雨霖鈴 尾註


미주목록

주석은 총 98개입니다. 저도 정리하면서 좀 질렸어요. 이중에 중요한 주석은 20개 안팍 다 몰라도 됩니다. 1화~15화는 내용이 정해지지 않고 설정만 늘어놨기 때문에 별 내용이 없습니다. 나는 설명충이에요. 주자서랑 온객행이 많이 나오는걸 보고 싶으시다면 개인적으로 20~25화 사이부터 읽는걸 추천합니다.

(1) 폐추 敝帚 닳아 빠진 비라는 뜻으로, 분수에 넘게 자만심이 강한 사람을 이르는 말.

(2) 무불간섭 無不干涉 덮어놓고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음.

(3) 정수불범하수 井水不犯河水 관은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무림은 관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4) 호미의결 狐媚疑結: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決行)하지 못함을 비유(比喩)하는 말.

(5) 발묘조장 拔苗助長 논에 심어 놓은 모를 뽑다. 서둘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

(6) 이백 西施 서시
西施越溪女 出自苧蘿山
서시는 월나라의 빨래하던 아가씨로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浣紗溪) 출신인데

(7) 조식 洛神賦 낙신부
延頸秀項 皓質呈露 芳澤無加 鉛華弗御
길고 가녀린 목덜미에 절로 드러난 흰 살결은 향기로운 연지도 호사한 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구나.

(8) 진문제 (陳文帝) 진천이 한자고에게 바친 시
容貌艶麗 纖姸潔白 如美婦人 臻首膏髮 自然蛾眉 見者靡不嘖嘖
생김새가 아름답고 곱고, 가냘프고 깨끗하니 예쁜 부인과 같구나!
네모지고 넓은 이마와 윤기나는 머릿결 자연스러운 눈썹 보는 이가 즐겁지 아니한가!

(9) 시경 소남 碩人 아름다운 사람
碩人其頎 衣錦褧衣
저 미인 키도 크고 날씨한데 비단에 엷은 홑옷 입었네.

(10) 시경 정풍 子衿 님의 옷자락
靑靑子衿 悠悠我心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

(11) 시경 소남 江有汜 갈라진 강물
之子歸 不我以 不我以 其後也悔
저 강에 갈라진 물줄기처럼 아가씨 시집가시네, 나를 마다하고, 나를 마다하고 나중에는 후회하리.

(12) 논어집주 衛靈公 위영공 第十五 10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정(鄭)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추방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해야 하니, 정(鄭)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13) 논어집주 公冶長 공야장 第五 4
子曰, 焉用佞? 禦人以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말재주 있는 사람은 구변(口辯)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14) 사기 한비자집해 노자와 공자 서로에 대한 평가에 대한 구절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罔,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노자가 공자에게 “그대의 교만과 탐욕 위선적인 표정과 과도한 야심을 버리시오.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공자가 노자를 만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으면 되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는 낚싯줄로 잡으면 되고, 날아다니는 새는 활로 잡으면 된다. 하지만 龍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가 바로 용과 같구나!”

(15) 도덕경 79장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큰 원망을 풀어주더라도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으니, 어찌 가히 선하다 하겠는가?

(16) 예기 내칙 禮記‧內則
男不言內 女不言外
남자는 안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17) 사기 평원군열전: 평원군은 진나라의 장군 백기를 말한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으로 한나라가 수세에 몰리자 조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나라를 주고 보호를 부탁하였다. 조나라왕은 한나라의 땅이 탐나 한나라를 도왔는데, 이후 진나라가 군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르 멸망시켰다는 이야기. 여기서 조나라의 대신 평양군 조표가 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득을 보면 재앙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익에 어두워 형세를 읽지 못하고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망한다.

(18) 법구경 애욕품 18
貪爲敗處故 害人亦自害, 愛欲意爲田 婬怨癡爲種.
탐욕이란 망하는 법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해치니, 사랑하는 탐욕의 마음은 밭이 되고 음욕, 성냄, 어리석음은 종자가 된다.

(19) 나관중 삼국연의 황건적의 슬로건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20)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21) 시경 패풍 日月 해와 달
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逝不古處 胡能有定 寧不我顧.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옛날과는 다르게 차가울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日居月諸 下土是冒 乃如之人兮 逝不相好 胡能有定 寧不我報.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日居月諸 出自東方 乃如之人兮 德音無良 胡能有定 俾也可忘.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
居月諸 東方自出 父兮母兮 畜我不卒 胡能有定 報我不述.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아버님 어머님 그이는 나와 살지 않겠다 하네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게만 하니.

(22) 도연명 飮酒 술을 마시다
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 但恨多謬誤 君當恕醉人
만약 다시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다면 부질없이 머리 위의 두건만 저버리게 되리라.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잘못이 많으니 그대는 마땅히 술취한 사람 용서해주오.
도연명은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술을 걸러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23) 굴원 懷沙賦 회사부
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邑犬之群吠兮 吠所怪也
마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이상한 사람 있어 짖는 것이고....

(24) 송옥 九變 구변
彼日月之照明兮 尙黯黮而有瑕 何況一國之事兮 亦多端而膠加
환히 비추는 저 해와 달도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 데 한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일이야 선악에도 일이 많으니 어긋날 적도 있으리라.

(25) 법구경 우암품 60
不寐夜長 疲倦道長 愚生死長 莫知正法
잠 못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도 멀다.

(26) 법구경 애욕품 20
以欲網自蔽 以愛蓋自覆 自恣縛於獄 如魚入苟口
탐욕의 그물로 스스로를 가리고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으며 스스로 방자하여 감옥에 갇힌다. 마치 물고기가 통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27) 대학연의 大學衍義 卷22 格物致知之要(二) 辨人材 憸邪罔上之情
한무제의 아들 여태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를 시기하는 간신배가 여태자와 그의 어머니 위태후가 찬탈을 시도한다는 모함을 하여 여태자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목을 멘다. 그가 죽은 후 간신배들의 간사함을 알게 된 한무제는 모함한 이들을 다 죽이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다.

(28) 시경 위풍 木瓜 모과
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모과를 주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복숭아를 주기에 어여쁜 구슬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자두을 주기에 어여쁜 옥돌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길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패옥은 좋아하는 정인에게 주는 것이고 구슬은 혼인할 때 사주단자에 넣는 것이며, 옥돌은 혼인할 때 머리에 다는 장식이다.

(29) 손무자직해 하권 제 12 用間; 간첩의 활용
故 用間有五. 有鄕間, 有內間, 有反間, 有死間, 有生間, 五間俱起, 莫知其道, 是謂神紀, 人君之寶也.
이는 다섯 가지 간첩의 조목이다. 다섯 가지 간첩을 순환으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 이치를 측량할 수 없으면, 이것을 일러 신묘한 기강이라 하니, 군주의 소중한 보배이다.
鄕間者, 因其鄕人而用之, 內間者, 因其官人而用之, 反間者, 因其敵間而用之, 死間者, 爲誑事於外 令吾間知之 而傳於敵間也, 生間者, 反報也.

  1. 향간이란 적지의 고장 사람을 이용하여 후하게 대우해서 사용하는 것,
  2. 내간이란 적의 벼슬한 사람을 이용하여 은밀히 뇌물을 주어서 결탁한 다음, 적국의 실정을 정탐해서 적국의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여, 적으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고 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3. 반간이란 적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와서 첩자 노릇을 하는 자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고, 후하게 뇌물을 주어서 도리어 우리에게 쓰임이 되게 하는 것,
  4. 사간이란 거짓으로 허황된 일을 밖에서 만들어 우리 간첩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해서 적의 간첩에게 전달하여 누설하게 하는 것이다.
  5. 생간이란 돌아와서 적의 실정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는 것.

(30) 순자집해 修身篇 수신편 第二
行而供冀 非漬淖也, 行而俯項 非擊戾也, 偶視而先俯는 非恐懼也.
길을 걸을 적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진창에 옷이 젖을까 염려해서가 아니고, 길을 걸을 적에 목을 숙이는 것은 무엇에 부딪칠까 염려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마주볼 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31) 굴원 漁父辭 어부사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이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소”

(32) 도덕경 11장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고로 있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없음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있음에서 비롯되나, 있음은 없음에서 비롯된다.

(33) 공융 임종시
涓涓江漢流 天窗通冥室
가늘게 흐르는 물이 흘러 강으로 가고하늘을 보는 창 어두운 방과 통해 있으며,
讒邪害公正 浮雲翳白日
모함하는 말들이 바르고 곧은 이를 해치고 흘러가는 구름이 밝고 따뜻한 빛을 가리네.
靡辭無忠誠 華繁竟不實
듣기만 좋은 화려한 말 충성스런 마음 없고 수많은 꽃들이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데,
人有兩三心 安能合爲一
사람들이 마음속에 딴마음을 품는다면 어떻게 하나처럼 합쳐질 수 있겠는가?

(34) 방하착(放下着)은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 놓아라 라는 뜻이고,
착득거(着得去)는 마음에 있는 모두를 그대로 지니고 떠나라' 라는 불가의 가르침.

(35) 법구경 나한품 95
不怒如地 不動如山 眞人無垢 生死世絶
땅처럼 서로 다투지 않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진흙이 없는 연못과 같은 아라한에게는 생사가 없다.

(36) 도덕경 8장
上善若水 夫唯不爭 故無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저 다투지 않으니, 허물도 없다.

(37) 장자 내편 7응제왕
无爲名尸, 无爲謀府, 无爲事任, 无爲知主, 體盡无窮, 而遊无朕, 盡其所受乎天 而无見得.
명예의 표적이 되지 말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말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 무궁한 도를 잘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하게 하고, 스스로 얻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지 말라.

(38) 진공묘유 眞空妙有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

(39) 순자집해 王霸篇 왕패편 第十一
故孔子曰, 知者之知 固以多矣 有以守少 能無察乎, 愚者之知 固以少矣 有以守多 能無狂乎.
그러므로 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의 지식은 본디 이미 풍부하고 그가 맡은 일은 매우 적으니 어찌 분명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본디 이미 적고 그가 맡은 일은 매우 많으니 어찌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0)공자가어 36편 問玉 옥에 대해 묻다.
溫潤而澤 仁也, 縝密以栗 智也, 廉而不劌 義也, 垂之如墜 禮也.
옥의 성질이 온윤(溫潤)하면서도 윤택함은 어질고 치밀하면서도 견고함은 지혜와 같고, 모나면서도 상해입지 않음은 의리와 같고 드리우면서 떨어질 듯함은 예의 같다.
옥을 군자에 비유하고 옥돌과 비교하는 내용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군자가 옥을 귀하게 여기고 옥돌을 천하게 여기는 이유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해 답한 내용이다.

(41) 조식 낙신부
執眷眷之款實兮, 懼斯靈之我欺. 感交甫之棄言兮, 悵猶豫而狐疑.
간절한 정을 지녔으나 그 속음을 두려워하니 정교보의 버림받은 말생각하고 슬퍼져 머뭇거리며 의심하네
收和顏而靜志兮, 申禮防以自持. 於是洛靈感焉, 徙倚彷徨, 神光離合, 乍陰乍陽.
온화한 얼굴 거두고 뜻을 조용히 가지며 예의를 차려 자신을 지키니 이에 낙신이 느낀 바 있어 이리 저리 헤매는데 광채가 흩어졌다 모이며 그늘이 되었다 밝아졌다 하니
竦輕軀以鶴立, 若將飛而未翔. 踐椒塗之郁烈, 步蘅薄而流芳. 超長吟以永慕兮, 聲哀厲而彌長.
날렵한 자태 발돋움하여 나는 듯 날지 않고 향기 자욱한 길을 밟고 방향을 퍼트리니 길게 읊어 영원히 사모하니 그 소리 서러워 더욱 길어지네.

(42) 채근담 전집 96
如春風解凍, 如和氣消氷, 纔是家庭的型範.
봄바람이 얼어붙은 것을 녹이듯, 온화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 하라. 이것이 곧 가정을 다스리는 법도이다.

(43) 자야가 35번째 시
我念歡的的. 子行由豫情.
나는 그대를 보면 기뻐서 미치겠는데, 그대는 나를 보아도 우물쭈물거립니다.

(44) 시경 정풍 山有扶蘇 산의 부소나무
山有扶蘇 隰有荷華 不見子都 乃見狂且. 山有橋松 隰有遊龍 不見子充 乃見狡童.
산에는 부소나무 있고 늪에는 연꽃이 피었네. 보기 전엔 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미치광이라니.
산에는 우뚝 솟은 소나무 갯벌엔 말여뀌 자랐네. 보기 전엔 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못난이라니.

(45) 국어 89. 公子重耳夷吾出奔 공자 중이와 이오가 망명하다.
진나라에 쫓기던 중이가 백곡에 이르러 초나라로 갈지 제나라로 갈지 점쳐보았다. 어디로 가든 바라는 바가 커서 귀의하여 도망치기 어렵고 곤궁한 처지에 찾아갔다가 후회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진나라 근처에 있는 적나라로 망명한다.

(46) 진나라와 초나라는 전쟁 중이었는데 진나라왕이 초나라 회왕에게 초나라의 8개성을 놓고 맹약을 맺는 자리에 그를 불렀다. 의심하여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들의 설득으로 진나라로 간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다시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47) 국어 優施敎驪姬遠太子 우시와 여희가 태자를 쫓아내도록 교사하다.
精潔易辱 重僨可疾 不忍人 必自忍也
사람이 정결하면 욕보이기 쉽고, 자중자애하면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며, 남에게 차마 못할 짓을 못하면 반드시 자신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합니다.
진나라 우시와 여희가 태자를 없애기 위해 태자의 유약한 성격을 이용하여 태자를 모함한다.

(48) 전국책 31권 燕王喜使栗腹 연왕 희가 율복을 사신으로 삼다.
論不脩心, 議不累物, 仁不輕絶, 智不簡功.
논하면서는 마음을 수식하지 않으며 정당한 의논은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며 어진자는 남과의 사귐을 가볍게 끊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남의 공을 버리지 않는다.
연왕 희가 진나라에 대패한 조나라를 치려고 창국군 낙문을 불러 물었으나 낙문은 전쟁에 반대하였다.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조나라와 전쟁을 했고 낙승에게 군사를 주어 진을 막도록 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대패한다. 위 내용은 연왕이 낙문과 낙승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낙문과 낙승의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어서 돌아오라는 뜻이지만 둘은 조나라에 망명하여 답신도 하지 않는다.

(49) 장자 11편 재유
汝 徒處無爲 而物自化. 墮爾形體 吐爾聰明 倫與物忘 大同乎涬溟.
그대가 무위에 머물기만 하면 만물이 저절로 감화될 것이다. 그대의 몸을 잊어버리고 그대의 총명을 버리고 세상의 규범이나 외물을 잊어버리면 혼돈한 도와 완전히 같아질 것이다.

(50) 구석(九錫)은 중국 한나라 때 천자가 공이 큰 신하나 황족에게 준 9가지 특전이다.

  1. 거마(車馬) 행차할 때 항시 두 대의 수레가 움직이는데, 그중 큰 수레는 제후 본인이 타고 작은 수레는 무장을 한 호위병들을 태운다. 그 수레들을 이끄는 짐승들은 검은 소 두 필, 누런 말 여덟 필인데, 이는 황제의 행차에 준하는 격식이다.
  2. 의복(衣服) 곤복과 면류관을 착용하고 붉은 신발을 신는다. 이는 왕의 예복(禮服)에 준하는 복식이다.
  3. 악기(樂器)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이나 가무(歌舞)를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는 황제나 왕의 행사에 준하는 격식이다. 천자 앞에서는 팔일무(八佾舞), 왕 앞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추도록 한다.
  4. 주호(朱戶) 거처하는 집의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하도록 한다. 이 역시 일반 신하들은 사용할 수 없는 천자의 격식이다.
  5. 납폐(納陛)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에 오르내릴 수 있다. 원래 전상(殿上)에 오르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어야 된다.
  6. 호분(虎賁) 천자처럼 늘 곁을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3백명가량의 호분 병력을 사사로이 부릴 수 있다.
  7. 궁시(弓矢) 역적을 마음대로 토벌해도 좋다는 권한의 상징으로 붉은 활 한 벌, 붉은 화살 백 개, 검은 활 열 벌, 검은 화살 3천 개를 하사한다.
  8. 부월(斧鉞) 왕의 의장행사에 쓰이는 도끼로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이것은 구석으로서가 아니라도 출정하는 장수에게 군권을 맡긴다는 의미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 '출정하는 장수에게 부월, 절월(節鉞)을 주었다'는 표현을 쓰는데, 절월은 권위를 상징하는 부절과 생사권을 의미하는 부월을 합쳐 이르는 것으로, 출정하는 장수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9. 거창규찬(秬鬯圭瓚) 거창(검은 수수로 빚은 술)과 규찬(옥으로 만든 제기)을 조상의 제사에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천자의 태묘 제사 때 사용되는 것이다.

(51) 조식 낙신부
髣髴兮若輕雲之蔽月 飄颻兮若流風之廻雪
엷은 구름에 싸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遠而望之 皎若太陽升朝霞 迫而察之 灼若芙蕖出淥波
멀리서 바라보니 아침 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가까이서 바라보니 녹빛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네.

(52) 송옥 구변 九變
愴怳懭悢兮 去故而就新 坎廩兮貧士失職 而志不平 廓落兮羇旅而無友生
한스럽고 슬프다 옛 사람과 헤어져 새사람에게 가다니, 너무나 가난한 선비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니 불평한 마음이 생겨나 멍하니 우뚝 서 있네, 벗도 없는 나그네 신세여.

(53) 채근담 후집 72
權貴龍驤 英雄虎戰 以冷眼視之 如蟻聚羶 如蠅競血.
권세가들은 용처럼 다투고 영웅들은 범처럼 싸우나, 냉정한 눈으로 이를 보면 마치 개미가 비린 것에 모여들고 파리가 다투어 피를 빠는 것과 다름이 없다.

(54) 장자 내편 4인간세
天下 有大戒二 其一命也 其一義也
천하에는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천명이고 또 하나는 의리(인간사회의 규범)이다.

(55) 노동 有所思 그리움이 있어 짓다.
美人兮美人 不知爲暮雨兮爲朝雲 相思一夜梅花發
미인이여 미인이여! 알지 못하네 저녁에는 비 되고 아침에는 구름 되는가, 서로 그리워한 지 하룻밤 사이에 매화꽃 피니….

(56) 장자 내편 4 인간세
言者 風波也 行者 實喪也 風波 易以動 實喪 易以危 故忿設 無由 巧言偏辭
말은 바람이 일으킨 물결처럼 일정한 모습이 없고 행동은 득실이 있다. 바람이 일으킨 물결은 쉽게 움직이고 득실은 쉽게 위태로워진다. 그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고 교묘한 말과 치우친 말 때문이다.

(57) 한비자집해 15 망징편
輕其適正 庶子稱衡 太子未定而主卽世者 可亡
왕위를 계승할 적자는 가벼이 대하고 서자도 적자와 대등하게 여기며, 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채 군주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는 나라가 멸망할 수 있다.

(58) 장자 잡편 17. 추수
以道觀之 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다. 그런데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상대를 천시하고,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귀천이 나에 있지 않게 된다.
因其所有而有之 則萬物莫不有 因其所無而無之 則萬物莫不無
사람들이 각자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물을 유용하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유용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각자 무용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에 근거하여 어떤 사물을 무용하다고 하면 만물이 모두 무용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59) 두보 서경의 두 아들을 읊는 노래
孔子釋氏親抱送 幷是天上麒麟兒
꿈속에 공자와 석씨 아이를 친히 안아 건네 주니 모두 천상의 기린아(麒麟兒)라오.

(60) 굴원? 송옥? 초혼
弱顔固植 謇其有意些 靡顔膩理 遺視眄些
부드러운 얼굴에 단단한 마음 바탕 아, 진중하고 예의도 바르도다. 팽팽한 얼굴에 흐르듯 고운 살결 아득히 훔쳐보는 까만 눈동자.

(61) 장자 내편 6 대종사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못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서, 서로 습기를 뿜어주고 거품으로 적셔준다. 아무렴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 때만 하겠는가?

(62) 장자 잡편 32. 열어구
故 君子 遠使之 而觀其忠 近使之 而觀其敬 煩使之 而觀其能 卒然問焉 而觀其知 急與之期 而觀其信 委之以財 而觀其仁 告之以危 而觀其節 醉之以酒 而觀其側 雜之以處 而觀其色
그 때문에 군자는 사람과 사귈 때 사람을 멀리 보내서 그 사람이 충실한지 살펴보고, 가까운 곳에서 일을 시켜 그가 일을 공경하는지를 살펴보고, 번거로운 일을 시켜보아서 그 능력을 살펴보고, 갑자기 질문해서 그 사람의 지능을 살펴보고, 급히 그와 약속을 하여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 살펴보고, 재화(財貨)를 위탁하여 그가 어진지를 살펴보고, 그에게 위급함을 알려서 지절을 살펴보고, 술로 취하게 해서 그 사람이 예의를 지키는지 살펴보고, 남녀가 한곳에 섞여 있도록 해서 호색한지 살펴본다.

(63) 짐새 혹은 짐조(鴆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새매(鷣)라는 새가 천년 묵으면 짐새로 변한다고 했다. 짐새는 독이 있는 벌레나 뱀을 잡아먹어 온몸에서 독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이 새는 동력조(同力鳥)라고 불리우며 수컷은 운일(雲日, 运日, 運日), 암컷은 음해(陰諧, 阴谐)라고 전해진다

(64) 장자 잡편 29 도척
小盜者拘, 大盜者爲諸侯 작은 도적은 잡히고 큰 도적은 제후가 된다.
孰惡孰美? 成者爲首, 不成者爲尾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다. 성공을 하면 우두머리가 되어 존경받고, 성공하지 못하는 자는 꼬리가 되어 천대받게 된다.

(65) 한서 추양열전
桀犬吠堯, 堯非不仁, 特吠非其主耳
걸왕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인이 아닌 자를 보고 짖을 뿐이다.

(66) 노자 도덕경주 63
大小多少 報怨以德; 小怨은 則不足以報 大怨 則天下之所欲誅 順天下之所同者 德也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덕으로 원한을 갚으며;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망은 천하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같이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

(67) 이하(李賀) 장진주
皓齒歌細腰舞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勸君終日酩酊醉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인 춤 춘다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장차 저물려 하니 봉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라.

(68) 노자 도덕경 38장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고,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69) 장자 내편 6대종사
以知爲時者 不得已於事也
지식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부득이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70) 소식 월야여객음주행화하(月夜與客飮酒杏花下) 달밤에 손님과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다.
杏花飛簾散餘春 明月入戶尋幽人 褰衣步月踏花影 炯如流水涵靑蘋
살구꽃 주렴에 날아들어 남은 봄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들어와 그윽한 사람 찾아주네. 옷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 그림자 밟으니 밝기가 흐르는 물에 푸른 마름 잠겨 있는 듯하다오.

(71) 잠삼 봄의 꿈 春夢
洞房昨夜春風起 遙憶美人湘江水 枕上片時春夢中 行盡江南數千里
동방에 어젯밤 봄바람 불어오니, 멀리 상강가의 미인 생각하네. 베개 위 짧은 봄꿈 속에 강남 수천리 두루 돌아다녔네.

(72) 대학연의 6권 明道術 명도술 天理人倫之正 천리인륜지정
婦之於夫 貴乎柔巽 苟不由正則狃説而流於淫 非妻道也
아내는 남편을 대함에 있어 유순함을 귀하게 여기지만, 진실로 정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열락을 탐하여 음란으로 흐르게 되니 아내의 도리가 아닙니다.

(73)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 하편 6장
夫邪之興也는 豈邪者之所爲乎리오 淫之所起也는 豈淫者之所造乎
사악함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사악한 자가 하는 것이겠으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는가?

(74) 법구경 佛陀品 불타품 186
天雨七寶 欲猶無厭 樂少苦多 覺者爲賢
하늘이 칠보를 비처럼 내려도 사람의 욕망은 다 채울 수 없다. 즐거움은 잠깐이요. 괴로움이 많다고 지혜 있는 사람은 깨달아 안다.

(75) 조식 칠애시
君若清路塵 妾若濁水泥, 君懷良不開 賤妾當何依.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

(76) 사기 손자오기열전 圍魏救趙 (위위구조) 위나라를 포위해서 조나라를 구하다.
전국시대 위나라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조나라를 쳐들어 간다.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제나라는 청에 응한다. 위나라와 제나라 조나라는 국경을 마주하는 나라들로 제나라의 병법가 손빈은 조나라를 돕는 대신 조나라 정벌을 위해 출정한 위나라의 수도 안읍을 공격한다. 제나라의 군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겁지겁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77) 공자가어 標題句解孔子家語 상편 14 辯政, 정치를 변론함
子曰 勤之愼之, 言人之善 若己有之 言人之惡 若己受之 故君子無所不愼焉
“부지런히 하고 신중히 하라. 남의 선을 말할 경우에는 자기가 그 선을 소유한 듯이 하고 남의 악을 말할 경우에는 자기가 그 악을 뒤집어쓴 듯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78) 왕유 送綦毋潛落第還鄕 과거에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무잠을 전송하며
遂令東山客 不得顧採薇. 旣至金門遠 孰云吾道非.
동산에 숨어사는 이조차도 고사리 캐며 살지 못하게 하였구나 장안에 온 뒤 금마문(金馬門)은 멀어졌지만누가 우리 길을 그르다 할 것인가.
遠樹帶行客 孤城當落暉. 吾謀適不用 勿謂知音稀.
멀어지는 나무들 나그네 데려가고 외로운 어느 성엔 석양이 비추리라.우리 계획이 어쩌다 쓰이지 못했을 뿐 지음(知音)이 적다고는 말하지 말게나.

(79) 장자 내편 1 소요유
非不呺然 大也 吾爲其無用 而掊之
공연히 크기는 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장자가 말하였다. 선생은 참으로 큰 것을 쓰는 데 졸렬하다.

(80) 노자 도덕경 71장
知不知上 不知知病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앎의 부족함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

(81) 송옥 고당부 회왕과 신녀가 고당관에 올라 사랑을 나눈 이야기.
奔揚踴而相擊兮 雲興聲之霈霈. 猛獸驚而跳駭兮 妄奔走而馳邁.
물결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치니, 구름처럼 일어나고 그 소리가 철썩철썩합니다. 맹수가 소리를 듣고 놀라서, 멋대로 내달리며 멀리 도망을 갑니다.

(82) 춘추좌씨전 위나라 선공(宣空)과 서모 이강(夷姜)의 이야기; 손윗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蒸(찔증)이라 한다.

(83) 원결 병서(幷序) 石魚湖上醉歌 석어호에서 취하여 노래 부르다.
酒徒歷歷坐洲島 長風連日作大浪 不能廢人運酒舫 我持長瓢坐巴丘 酌飮四座以散愁.
주당들은 제각기 호숫가 섬에 앉았네, 긴 바람 연일 큰 물결 일으켜도, 우리의 술 실어오는 배를 멈출 수는 없네, 나는 긴 표주박 가지고 파구에 앉아서, 사방 주객들에게 술 따르며 시름 흩어지게 한다오.

(84) 장자 내편 4 인간세
來世 不可待 往世 不可追也
앞으로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지나간 옛날은 따라갈 수 없네.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복은 깃털보다도 가벼운데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줄 모르며, 재앙은 땅덩어리보다도 무거운데 피할 줄 모르는구나.

(85) 조식 영회시
智巧萬端出 大要不易方. 如何誇毘子 作色懷驕腸.
지혜와 기료(祈療)는 여러 갈래에서 나오지만 큰 뜻은 방향을 트는 법이 없다. 어찌하여 아첨꾼들은 얼굴 바꿔 교만함을 품고 있는가?

(86) 법구경 도장품
雖雖剪髮 長服草衣 沐浴踞石 奈癡結何
벌거벗고 삭발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온몸을 돌로 닦는 고행을 해도, 어리석음에서 오는 번뇌를 어찌 고칠 수 있으랴.

(87) 법구경 쌍요품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惡 卽言卽行 罪苦自追 車轢于轍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고 마음은 주인도 되고 심부름꾼도 되나니, 마음 속으로 악을 생각해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하면 죄의 고통 따르는 것이 수레가 바퀴 자국 따르는 것 같으리.

(88) 유우석(劉禹錫) 서새산에서 회고하다. 西塞山懷古
人世幾回傷往事 山形依舊枕寒流
인간 세상 지난 일을 얼마나 많이 아파했는데, 산세는 예전 그대로 찬 강물을 베고 있네.

(89) 공자가어
子夏 問於孔子曰 居父母之仇 如之何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물었다. “부모의 원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孔子曰 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於朝市 不返兵而鬪
공자가 대답하였다.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으며, 조정이나 시장에서 만나면 무기를 가지러 돌아갈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다.”

(90) 시경 국풍 바람 終風
終風且暴 顧我則笑 謔浪笑敖 中心是悼.
온종일 바람 몰아치듯 하다가도 나를 보고 웃네.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니 내 마음 서글퍼라.

(91) 이백 장진주 將進酒
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但願長醉不願醒, 呼兒將出換美酒 與爾同銷萬古愁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어나지 않길 바랄뿐, 아이 불러 가지고 가 좋은 술과 바꿔 오게 하여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을 씻어 내리라.

(92) 춘추좌씨전 九罰之法 구벌지법이란 천자의 토벌죄에 해당하는 제후가 범한 아홉 가지의 죄를 말한다.

  1. 시강능약(恃强凌弱): 자기가강함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것
  2. 잔해민중(殘害民衆): 백성을 이유 없이 해치는 것
  3. 사염별국(欺壓別國): 거짓말로 이웃 나라를 위협하는 것
  4. 인민이산(人民離山):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을 뿔뿔히 흩어지게 만드는 것
  5. 불복종명령(不服從命令): 왕명에 불복하는 것
  6. 모시군장(謀弑君長): 군주를 시해하거나 시해를 모의하는 것
  7. 위반정령(違反政令): 정령을 위반하는 것
  8. 살해친인(殺害親人): 제후가 친족(親族)을 죽이는 것
  9. 내란화위패인륜(內亂和違悖人倫): 내란을 일으키고 패륜(悖倫)을 행하는 것

(93) 장자 잡편 24 서무귀 徐无鬼
夫與國君 同食 澤及三族 而況父母乎?
무릇 한 나라의 임금이 먹는 음식과 같은 음식을 먹는 신분이 되면, 그 은택이 삼족(三族)에까지 미칠 것인데, 하물며 부모의 행복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94) 장자 잡편 19 달생 達生
復讎者 不折鏌干 雖有忮心者 不怨飄瓦.
〈예를 들면〉 복수하려는 사람도 〈원수는 미워하지만〉 원수가 살인에 사용하였던 막사(鏌邪)나 간장(干將)을 미워하여 그것을 부러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또 비록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바람에 날려 떨어진 기왓장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95) 계성 원야 園冶
雖由人作 宛自天開.
비록 사람이 만들되 하늘에서 만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96) 유영 우림령 雨霖鈴

寒蟬凄切, 對長亭晩, 驟雨初歇
가을 매미 처량하게 운다 십리 정자 길 황혼에 대고 퍼붓던 소나기 이제 막 그쳤다.
都門帳飮無緖, 留戀處, 蘭舟催發.
도성 문밖 이별의 술과 적, 울적하게 쓸쓸히 마시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배는 가자고 재촉한다.
執手相看淚眼, 竟無語凝噎.
두 손 마주 잡고 젖어 드는 눈동자 바라보다 끝내 한마디 못하고 목이 메인다.
念去去千里煙波, 暮靄沉沉楚天闊.
이제 떠나서 가고 또 가면 천리 물안개길, 저녁안개 가득한 남녘 하늘 아득하네.
多情自古傷離別, 更那堪冷落淸秋節?
자고로 다정한 사람은 이별이 서러운데 차갑고 쓸쓸한 이 가을의 이별을 어떻게 견딜까?
今宵酒醒何處, 楊柳岸曉風殘月?
오늘밤 마신 술 어디에서 깰까? 버드나무 언덕일까 새벽바람 지새는 달 아래일까?
此去經年, 應是良辰好景虛設.
이제 떠나가면 여러 해를 넘길 테니 아름다운 시절, 좋은 경치모두 부질없네.
便縱有千種風情, 更與何人說.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연정 있다해도 그 누구에게 말할까?

(97) 시호법 諡號法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한다.
慈仁短折曰懷 자애롭고 어질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경우를 회라고 한다.


마치며

퇴고를 하면서 처음부터 읽어 봤는데, 확실히 내가 처음 생각했던 스토리랑은 조금 차이가 있다. 처음엔 그냥 글읽는 주자서나 벼슬하는 주자서가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다른것보다 등려군의 상간루안(相看淚眼)노래가 너무 좋았다. 유영(柳永)이라는 북송 시인 우림령에 곡을 붙인 노래라고 한다. 제목은 빗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이지만 사실 그 방울 소리는 매미소리이다. 빗속에 매미가 우는 시기이니 늦여름, 초가을 즈음이다. 그걸 생각하고 썼는데 뭔가 중간중간 흐지부지 넘어간 부분이 많은 것은 내가 부족해서이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원작에서 두사람이 저질렀던 과거의 일에 대해 뭔가 찜찜했던 부분이 있었던게 틀림없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정말 극소수, 그리고 뭔가 죽이는 선택지보다 출가한다거나 은둔 혹은 잠적하는 쪽이 더 무협느낌 나기도 한다. 그리고 온객행이 복수로 누군가를 죽였다면 아마 미래에 또다른 일에 휘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주자서는 정말 생각보다 너무 신분이 고귀했고, 또 사람이 너무 다정해서 자기 부모를 죽인 선황까지도 용서하는 보살같은 면모를 보인다. 그건 아마 사계산장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고 자라서 그런것 같다.

주구전이라는 캐릭터는 속세에 크게 관심없는 은둔자 같은 느낌으로 설정했는데 어떻게 다 아는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여우같은 면모가 많은 사람이다. 만약 이사람이 야심을 가졌으면 정말 어디가서 삼공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은.. 유가보다는 도가쪽이 그래도 더 살갑고 정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에 관련된 내용도 많이 썼는데, 그건 무협이라는 느낌을 살리려고 많이 찾아 봤다. 암튼 사계산장에서 지지고 복고 알콩달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온객행은 엽백의 손에서 자랐는데도 복수의 불씨를 꺼뜨리지 못한거 보면 어쩌면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사계산장에서 사형,사저,사제,사매를 많이 만들어서 이지러진 부분을 채웠으면 좋겠다. 뭐 주자서가 다 채워주겠지만.

솔직히 15~20화 까지 정말 노잼이다. 그뭔씹 느낌이 강렬하다. 주인공보다 배경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많이 나온다. 황실 배경으로 사용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으로 AD 291~306 걸친 사마씨들의 뻘짓이다. 왜 그 시기를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황친 제척들의 이름과 자가 계속 바뀌었다. 사실 주구전과 주자서, 엽백의와 온객행을 계속 바꿔서 썼다. 아직도 수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지도.. 스크랩된 부분으로 두편은 나올만큼의 분량이 있지만 스토리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얘네는 그냥.. 저 너머로.. 마지막 부분 즈음에 자꾸 서임인데 소임이라고 쓴 것도 군자맹봐서 그렇다. 우리 소임이가 그럴 수 있는거 아니에요? 니들이 뭘알아아아아 소임아아아아아아

주자서의 부친 이름은 주희 회암 서국공이었는데 시호를 받아 서선공이 되었다. 주자서의 모친 이름은 사마헌 서경공주 이후 경무장공주에서 시호가 경세장공주가 되었다. 주영의 자는 직으로 시호는 회후이다. 그외에 황제 사마유 자도, 황제 등극 이전에는 시평왕이었고, 첫째아들 조왕 사마륜 정란, 둘째 진왕 사마란 흑란, 셋째 기왕 사마영 희란이다. 그 외에 등장한 황실종친으로는 기주 낭야왕 사마운 자이, 익주 문성왕 사마헌 자익, 청주 제왕 사마경 경치, 양주 회남왕 사마윤 흠도, 양주 예장왕 사마치 풍도, 형주 초은왕 사마위 언도 모두 서진 팔왕의 난에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을 차용했지만 조금 다르다. 그리고 진왕 사마란은 낭야왕 사마운의 아들이다.

엽백의의 호칭도 영감에서 노야로 바뀌었다. 찾아보니 영감은 조선시대 관직에서 파생된 말이다. 검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상선으로 바꿨다. 축객령도 그렇게 함부로 내릴수 있는게 아니더라 왕이나 귀족이 수도나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영건도 young gun이 아니다 영견(領絹)이다.

확실하게 공수를 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단 주인공 연령대가 철컹철컹이고, 내가 이상하게 이분들로는 뭐든 다 잘먹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나이는 16~18 사이이다. 두살이라고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1년 6개월정도 차이나는 수준이다. 주자서의 생일은 추석이 끝나는 즈음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는데 처음에 주자서 애비를 주희(朱子)로 설정했었기 때문에 그분 자나 호 생년월일 출신 등등을 많이 참고했다.

인용되거나 사용된 시의 해석은 대부분 동양고전종합DB (cyberseodang.or.kr) 이곳에서 발췌했다. 처음에는 시대에 맞게 당나라 시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범위가 너무 좁아지고 해석을 알 수 없는 시가 많아서 당나라 시를 많이 차용했다. 온객행이 플러팅하는 시는 시경과 당시삼백수를 제일 많이 차용했는데, 쓰다가 답답해서 시경 책을 샀다. 장자도 샀다.

지역 관련된 부분은 아래지도를 제일 많이 참고했다. 그리고 위키페디아를 통해서 과거에 불렸던 이름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관직이나 복장 같은것도 삼국지 관련 사료를 가장 많이 찾아 보았지만 아카이브에 있는 중국복식사 5000년도 참고했다.


주석을 정리하고 있는데 빠진 부분이나 필요한 부분을 추가하거나 뻬고 있다. 나는 책이나 문서를 읽을때 달린 주석을 다 확인하면서 읽는 편이라 일부러 바로 아래에 달았는데 여타 많은 글을 눈팅해본 결과 그게 아닌것 같아서 전부 뒤로 뺐다. 몇가지 주석을 빼면 설명 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마지막화는 첫화랑 비슷하게 가볍게 쓰고 싶었다. 사실 36화는 없는 화 쳐도 상관없다.

雨霖鈴 第36完

36. 月明愛無眠
달이 밝으니 사랑스러워 잠을 못 이룬다.

진회장은 두둑한 주머니를 열어 괄창의 주루에서 큰맘 먹고 월병을 샀다. 작년에는 사정이 좋지 못해 뒷산에서 채집한 석류와 동그랗게 빚은 밀떡을 먹었다. 그것도 많지 않아 모두 먹을 수 없어 사숙과 아이들만 먹었다. 하지만 올해는 사계산장의 사정이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값을 치르고 가져온 찬합에 월병을 옮겨 담았다. 묵직한 찬합을 온객행과 주자서가 들었다. 진회장이 인사를 하고 주루를 나가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진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는 먹을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온객행이 대답없이 웃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웃는 얼굴로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진회장이 물었다. “온공자는 스승님께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사제가 있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리고 스승님께 화식은 별로 좋지 않아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의아한 표정으로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회장이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래요? 그것은 수련의 경지가 높아서 그런 것입니까?” 온객행은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것은 직접 물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회장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객행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어이쿠, 온공자 제가 무례를 저질렀네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예를 거두세요. 진대인.” 진회장은 잠시 서있다가 말했다. “아차! 서신을 보내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어서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먼저 돌아가세요.” 그리고는 훌쩍 경공으로 다시 산을 내려갔다.

주자서가 멀어지는 진회장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자 온객행이 어깨를 붙이고 물었다. “아서, 월병을 이렇게 많이 사서 누구에게 주려는 거야? 엄청 무겁다.” 주자서가 다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사형이랑 사저, 사매가 다 오면 부족할지도 몰라.” 온객행이 주자서와 발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묵묵히 길을 가자 온객행이 다시 그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왜 자꾸 불러.”

온객행이 찬합을 놓고 주자서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부군. 왜 자꾸 소첩을 공방살이 시키십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여긴 아무도 없잖아.” 주자서가 찬합을 내려 놓고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노온, 정말 상선께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말했다. “부군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떼어내며 말했다. “노온,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은 없었어?”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며 말했다. “망할 늙은이가 말도 안 해 줬다구.”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아서가 정말 식건전에서 죽은 줄 알았어.” 주자서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아서가…아서가…” 주자서가 손을 들어 풀이 죽은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노온.”

주자서의 손에 뺨을 비비던 온객행이 손을 잡아왔다. “아서…” 주자서가 대답했다. “응.” 온객행의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근데 왜 별채로 안 와?”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나는 뒷산에서 지내니까 멀어서.” 주자서의 귀 끝이 빨갛다.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의 허리를 안으면서 말했다. “아서, 그럼 내가 뒷산으로 갈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안돼, 조부께서 계시잖아.” 온객행의 쳐진 눈썹을 주자서가 손을 들어 쓸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있잖아.”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나는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돌려진 고개 때문에 보이는 주자서 뺨에 입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아서, 장명산으로 사주단자는 언제 보낼 꺼야?” 주자서가 찬합을 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온객행도 놓아 두었던 찬합을 들고 주자서를 따르며 말했다. “나는 진심이야, 아서한테 시집가고 싶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 소리 사부님 앞에서 꺼내기만 해! 다시는 안 볼 줄 알아.”

온객행이 놀란 목소리를 꾸미며 말했다. “아서!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마. 아서가 없는 동안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단 말이야.” 주자서가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객행을 마주봤다. “노온. 내가 죽어도 노온은 살아야지.”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가 없는데 내가 왜 살아?”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없으면 내 몫까지 살아야지.” 온객행이 다시 울상이 되어 말했다. “싫어.” 주자서가 엄중한 표정을 꾸며서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망설이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사계산장에 도착하자 서신을 보내러 간다던 진회장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월병을 부엌에 가져다 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데 사모가 찬합을 들고 나왔다. “자서야.” 주자서는 월병이 들어있는 찬합을 내려 놓고 말했다. “사모, 사부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온객행도 주자서가 하는 데로 찬합을 내려 놓고 주자서 옆에 붙어 섰다. 추수는 한참 온객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주자서에게 찬합을 건네 주며 말했다. “자서야, 태사숙께서 찾으시니 저녁은 뒷산에서 먹도록 해라.”

주자서가 찬합을 받아 들자 추수는 또 온객행을 한참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진부인, 제가 도울 일이 없습니까?” 온객행은 문간에 놓여있던 월병이 든 찬합을 번쩍 들어 안으로 옮겼다. 추수는 온객행이 들고 온 찬합을 열어보고 ‘흠’하더니 말없이 부엌일을 했다. 온객행이 멀뚱히 서있자 추수는 또 온객행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자서를 따라가 보시오.”

오늘 외출하기 전까지는 친절하고 상냥한 진부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이상하여 온객행은 부엌을 벗어나 뒷산으로 향했다. 주자서가 싸리 문을 열고 뒷산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 따라잡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서 찬합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부군.”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온객행은 찬합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더니 그냥 웃었다. 처소에 도착해서도 인기척이 없었다. 실내에 들어가보니 등롱도 켜지 않고 아무도 없었다. 주자서는 등롱을 찾아 불을 밝히고 온객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온객행은 찬합을 낮은 서안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주구전은 처소 근처에 있는 석류나무에서 석류를 따고 있었는지 소쿠리에 석류를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온객행이 일어나 소쿠리를 받자 주구전이 말했다. “온공자, 언제 오셨소?” 온객행이 석류바구니를 근처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고 포권하여 인사했다. “주대인, 별고 없으셨습니까?”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차를 준비하던 주자서가 안쪽에서 나와 주구전을 발견하고 말했다. “조부, 어디 다녀오셨어요?”

주구전이 손짓으로 주자서를 불러 앉히고 말했다. “단원절이 얼마 안 남았으니 곧 제를 지내지 않니? 제에 올릴 토끼를 잡으러 갔었지.” 주자서가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무슨 토끼를 이틀씩이나 잡으셨어요?” 주구전이 찬을 구경하며 말했다. “잡는 족족 새끼를 뱄으니 어찌하니, 놓아 주어야지.”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사부께서 월병을 잔뜩 사왔으니 제사 음식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구전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말했다. “그래? 무슨 소가 들어 있는 것을 샀니?”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종류별로 많이 샀으니 주대인께서 좋아하시는 것도 있을 겁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는 장명산으로 안 가십니까? 어찌 단원절을 스승님과 함께 보내지 않고…” 온객행이 주구전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며 말했다. “시조부, 제 가족은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주구전이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온공자. 정말로 우리 자서에게 시집오실 생각입니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도 젓가락을 주며 말했다. “아니 왜 못 믿으시는 거에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주구전이 주자서가 내려놓은 밥그릇을 들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가져온 찬은 주구전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주구전이 찬을 보며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누가 보내서 왔니?” 주자서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 “사모께서 보내셨습니다.” 주구전은 ‘허허허’ 웃고는 밥을 먹었다.

온객행과 주자서도 젓가락을 들었다. 온객행은 사례에서 했던 것처럼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찬을 집어 올려 놓았다. 그리고 눈치가 보이면 주구전의 밥그릇에도 찬을 올려 놓았다. 밥을 다 먹은 주구전이 차로 입가심을 하고 주자서가 찬합에 다 먹은 음식을 치웠다. 주구전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찻물을 좀 더 올려야겠다.” 주자서는 아직 한참 남은 찻주전자를 보고 눈을 굴리다 조부께서 시키시는 대로 물주전자를 새로 화로에 올렸다.

온객행이 찬합을 챙겨 내려가려고 하자 주구전이 그를 막았다. “온공자, 잠시 이리와 앉으세요.” 온객행은 문간에 찬합을 놓고 밥을 먹었던 탁자로 가서 앉았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말없이 한참 보았다. 온객행은 아까 진부인이 자신을 보던 눈초리와 비슷한 주구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 왜 그러십니까?”

주구전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온공자, 내가 혹시 우리 자서가 사계산장 장문 후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온객행은 처음 듣는 소리라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아서의 무공이 그렇게 출중합니까?” 주구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공만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이 대화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주구전은 ‘쯧쯧’하고 혀를 차고는 또 말이 없었다.

주자서는 다 끓은 물을 탁자에 올려 두고 주구전 옆으로 가서 소쿠리에 들은 석류를 깠다. 찻잔을 하나 가져와서 거기에 석류 알갱이를 넣어 주구전에게 내밀었다. 주구전은 흐뭇하게 웃으며 주자서가 깐 석류 알갱이를 먹었다. 주자서는 주구전의 눈치를 보다가 찻잔 하나를 더 가져와서 알갱이를 담아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내게 석류를 주기에 옥패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28) 그리고 찻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소쿠리에서 석류 하나를 꺼내 본인도 까기 시작했다. 주구전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하는 꼴을 보고 ‘허’하고 헛웃음 쳤다.


온객행이 석류 하나를 다 까고 알갱이를 주구전과 주자서에게 나눠주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자서가 얼른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가자 밖에 진회장과 추수, 양가인, 서소강, 필장풍이 서있었다. 주자서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진회장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숙, 못난 제자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주구전이 제자들이 있는 쪽으로 손을 휘휘 젓고 말했다. “인사는 그만 두고 어서 와서 앉아라.” 주자서는 찻주전자에 있는 차로 다구를 씻어 다시 차를 내렸다.

찻잔을 들고 사계산장의 어른들과 온객행이 마주했다. 온객행은 눈치를 보다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시중을 들던 주자서도 무겁게 내려 앉은 분위기에 온객행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회장이 주자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자서야, 네 생일이 지나면 관례를 올릴 참인데…” 말을 줄이며 옆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후’쉬더니 입을 닫았다. 서소강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일단 관을 올리고 나면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서소강의 말에 온객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는 이미 아서와 육례를 치렀으니 혹여 첩을 들이시겠다는 것이면…” 온객행의 목소리에 사계산장의 어른들은 물론 주자서도 놀라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얼굴이 울상이 되어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 (75) 그리고는 ‘으앙’ 울기 시작했다.

추수가 ‘허’하고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육례? 의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온공자는 육례의 법도 모르시오?” 온객행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서의 양친께는 이미 인사드렸습니다.” 온객행의 말에 진회장이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자서의 양친을 뵈었다니?” 주자서는 옆에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朱)가의 사당에…”

진회장은 서소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서사형은 대체 낙양에서 무얼 한 거요?” 옆에 있던 양가인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진회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진회장이 씨근덕거리자 필장풍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서소강에게 물었다. “서사형은 둘이 사당에서 육례를 치르는 동안 뭘 하셨소?” 서소강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명산 상선께서 말씀하시기를 저놈은 끈질겨서 없는 마음도 만들어낼 놈이라 하셨네. 순진한 자서가 홀랑 넘어간게지.”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양가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자서야, 너는 어떻게 하고싶으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몸을 붙이면서도 아무 말을 안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자 필장풍이 말했다. “자서야, 괜찮아. 강호에 없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인데 틀리고 맞는 것이 어찌 있겠느냐?” 추수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대를…!” 주구전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어디서 사람을 구해 자손을 보게 해주시겠소? 온공자?”

온객행이 훌쩍이며 말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아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마음만 얻으면 몸은 나눌 수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구전을 보고 입을 달싹였다. 온객행이 주구전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음도 몸도 다 가져야겠습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주자서의 다정한 애칭에 진회장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사술을 쓴 것 아닙니까? 우리 자서가 그럴 리 없어요!” 양가인이 진회장의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장문 진정하세요. 관례를 올리는 것도 혼례를 하는 것도 자서가 하는 일이니 자서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추수가 진회장의 어깨를 감싸며 그를 달랬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주자서는 어른들의 눈치만 보고 입을 열지 못했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는 내 모과에요. 내 모과란 말이에요. 으앙.” 온객행에 바닥에 엎어져서 통곡하기 시작하자 옆에 앉아 있던 주자서가 당황하여 온객행의 등허리를 쓸며 말했다. “상선과 조부께서 허락하셔서 폐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주자서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구전에게 박혔다. 주구전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내가? 언제…?” 주자서는 품에서 옥패를 꺼내더니 말했다. “그가 예단을 주어서 받았어요.”

주구전이 입을 벙긋거리다 되물었다. “예단을… 받았어?” 진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더니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추수가 그의 뒤를 따랐다. 양가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단도 받고 사당에서 친영(親迎)까지 마쳤으면 뭐 더 물을 것도 없네요.” 서소강이 웃으며 말했다. “서로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인데 모질게 떼어 놓을 이유는 없지요.” 필장풍이 한참 생각하더니 물었다. “근데 모과는 대체 무슨 상관이오?”


다음날 주자서와 온객행은 사계산장의 사당에 인사를 올렸다. 부부의 연으로 할 수 없어 그들은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단원절이 다가와 사계산장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기 때문에 주자서의 일은 조용히 묻혔다. 주구전은 온객행의 거처를 자신의 거처로 옮겼다. 휘영청 밝은 달에 둥근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사형들의 매실주를 열었다. 주자서는 마당에 앉아 달을 구경하고 있다.

고상이 월병을 가지고 나와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월병 드세요. 이 월병에는 고기가 들었어요.” 주자서가 고상 손에 들려 있는 월병을 작게 쪼개 고상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상이가 많이 먹어. 사형은 많이 먹었어.” 고상이 입에 들어온 월병을 씹으며 말했다. “사형, 온공자는 어디 있어요? 이제 온공자도 우리랑 같이 살아요?” 주자서가 귀 끝을 붉히며 말했다. “상아, 다 먹고 말 해야지.”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고상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고상은 주자서 옆에 덜퍼덕 앉아서 손에 남은 월병을 먹었다. 온객행이 술병을 들고 주자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응, 이제부터 여기서 같이 살 거야.” 고상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공자!” 온객행이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온공자가 아니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을 빼앗아 마시고 말했다. “사형이면 되지 뭘 따져.” 고상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온공자도 사계산장에 입문 했소?” 온객행이 고상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태사숙께서 따 오신 석류는 맛보셨소?” 고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석류가 뭐야? 먹는 거야?”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빨간색에 작은 알갱이가 가득 찬 과일이야.” 고상이 외실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석류는 먹는 거야?”

고상이 외실로 향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21) 주자서가 외실 쪽을 보며 몸을 틀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아무도 안 와.” 주자서가 온객행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 그러지 마.”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나는 그대를 보면 기뻐서 미치겠는데,(43) 아서는 아니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그래. 노온.” 온객행이 일어나 주자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경애해.” 주자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제 뒷산으로 가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목을 잡아 돌려 세우고 다시 말했다. “아서, 경애해.” 그리고는 얼굴을 붙이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노온, 뒷산으로 가자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나와있던 장맹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뒷산으로 향하는 샛문을 지날 때까지 자리에 멈춰서 눈을 깜빡였다. 서소강이 그를 찾으러 나왔다. “맹아 뭐하냐? 자서한테 술은 줬느냐?” 장맹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서소강에게 물었다. “사부, 온공자는 대체…?” 서소강이 장맹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대제자라는데 정말 남다르구나.” 서소강은 장맹을 데리고 떠들썩한 외실 안으로 들어갔다.

단원절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엽백의가 사계산장을 찾아와 장문의 마음을 또다시 뒤집어 놓았다. 귀한 제자를 보낼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엽백의가 예단으로 가져온 상자에는 귀한 약초가 잔뜩 들어 있었다. 주구전은 거처를 다시 사계산장으로 옮겼고, 주구전이 머물던 사계산장 뒷산에 있는 거처에 온객행과 주자서가 살았다.

몇 년 후에 사례에는 또 다시 정변이 일어 나라가 나누어지고 국명이 바뀌었다.

雨霖鈴 第35

35. 南枝落北枝開
매화의 남쪽에서는 꽃이 떨어지고 북쪽에서는 꽃이 핀다.

온객행은 양주로 떠나기 전에 다시 주택을 찾았다. 사람이 가고 남은 빈집은 외롭고 적적하다. 그리운 마음이 주자서에게 모두 주어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운다. 사당에 있던 신위는 모두 어디 갔는지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주영의 시호는 회후(懷侯)이다.(97) 주영은 죽어서 제후로 봉해졌다. 이름만 남은 그의 위패는 누가 모셔줄까?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는 기주 낙릉의 형림으로 보냈다. 그들은 성씨가 같으니 그들을 기억해 줄 것이다. 온객행은 주영의 위패를 가지고 숭양서원의 속가사당으로 갔다. 불이 다 꺼진 그 사당에 주자서를 혼자 두려 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양친과 함께 있는 것을 주자서가 바랄 것 같아서 온객행은 주영의 위패를 이 곳에 두고 가기로 했다.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는 촛대는커녕 선향에도 불이 꺼져 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했던 것처럼 제단 아래에서 포단을 꺼내 놓고 가져온 향낭에서 향목을 꺼내 향로 위에 쏟았다. 제단 양 옆에 있는 초가 없는 촛대 아래에 화섭자를 찾아 향목에 불을 붙이고 하얀 소매를 털어 몸을 가지런히 하고 포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매를 수평으로 들어 신위에 세번 절했다. 온객행은 양주에 갔다가 장명산에 가서 노야에게 인사하고 청성곡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주자서가 그의 양친께 간 것처럼 온객행도 양친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주자서는 엄윤에게 몸이 거의 들려서 식건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황제가 준비한 옷과 짐이 있었다. 엄윤은 주자서를 황제의 침실로 데려가며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쭉 앞만 보고 달리시면 됩니다.” 주자서의 옷을 갈아 입히며 엄윤이 말했다. “밖으로 나가면 그 곳에 준비해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타고 강릉으로 가세요. 초은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엄윤에게 말했다. “아까 그 군관에게 말을 전해주세요.” 엄윤이 작게 고개를 흔들며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주공자, 그가 죽기를 바랍니까?” 주자서가 울상으로 말했다. “하지만…” 엄윤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오늘 식건전에서 죽어야 합니다.” 엄윤이 말한대로 침상 아래 있는 길을 쭉 따라 나왔다.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통로를 나오니 성문 밖에 있는 작은 문 앞이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말이 필요하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기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마구간으로 가서 말 한 마리를 내주며 말했다. “잘 먹인 말이니 두 시진은 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들이 사용하는 부절(符節)을 주며 말했다. “이 부절을 보여주면 강릉까지 말을 빌릴 수 있습니다. 문지기에게는 스스로를 파발(擺撥)이라고 소개하십시오.” 주자서가 떨리는 손으로 부절을 받자 남자는 그 부절을 빼앗아 주자서가 들고 있던 봇짐 안에 넣었다.

주자서를 한심한 눈으로 보던 남자는 주자서의 봇짐을 그의 등에 매어주고 말에 태웠다. 주자서가 얼떨하게 말 위에 앉아 있자 문지기가 말했다. “성 안에서는 말을 달려서는 안됩니다. 어서 가시오.” 그리고 말의 엉덩이를 손으로 밀었다. 주자서는 딱히 말을 몰지 않았지만 영특한 말이었는지 이궐관까지 조용히 걷다가 낙양성을 나오자 달리기 시작했다.

두 시진을 달려 남양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을 지키던 문지기가 주자서에게 통행패를 요구했다. 주자서는 봇짐에서 부절을 찾아 보여주었다. 문지기는 부절을 한참 보고 있더니 지친 말을 끌고 가서 다시 새 말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잘 먹인 말이니 두 시진은 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문지기가 주자서에게 말을 건네 주었다. 성안으로 가로지를 수 없어 주자서는 남양성을 빙 둘러 강릉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번 더 말을 바꿔 타고 다음날 오후에 주자서는 강릉에 도착해 초은왕을 만났다.

주자서는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실신했다. 밤새 말을 달려 지친 그를 서소강이 마차에 실어 양주로 향했다. 사계산장에 도착한 주자서는 십년 전 진회장의 품에 안겨 사계산장에 도착했을 때처럼 크게 앓았다. 평소 건강한 모습만 봐왔던 사제들이 동요할 정도로 살이 내리고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주구전은 동요하는 손제자들을 위해 주자서의 거처를 자신의 거처인 사계산장의 뒷산으로 옮겼다.

해는 점점 기울어 벼 꽃이 피었다. 올해는 제때 비가 내려 풍년이 들 것 같다며 농민들이 좋아했다. 진회장은 예년보다 일을 더 많이 해서 몸은 고단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하였다. 진회장은 뒷산을 또 다시 사형제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작년보다는 덜 굶겠습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회장의 말에 동의했다. 주고받는 대화는 좋은 일이었으나 표정은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태사숙의 거처에 도착하자 산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진회장이 싸리문을 지나며 말했다. “사숙! 못난 제자들이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자 주구전이 화로에 찻물을 올려 놓고 있었다. 주구전이 제자들의 인사를 받고는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올해는 무가 아주 잘 됐더구나.” 필장풍이 신나서 말했다. “비가 많이 와서 물도 많고 해를 잘 봐서 달기까지 합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한번 더 심으면 가을무도 먹을 수 있으니 내일 제자 몇을 서쪽에 있는 밭으로 보내 무를 심게 해라.” 서소강이 필장풍에게 물었다. “장풍아, 너 무씨는 받아 놓았니?” 필장풍이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 무 꽃이 한창 피었으니 그것을 심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진회장이 말했다. “그러다 날이 빨리 추워지면 또 바람 든 무를 먹어야 하는 것 아니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바람이라도 든 무를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주구전의 말에 제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구전이 진회장에게 물었다. “가인이는 어디를 갔느냐?” 진회장이 답했다. “부군을 데리러 양주자사가 있는 건업으로 갔습니다.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 곧 돌아올 것입니다.” 주구전이 물었다. “합비를 거쳐 갔느냐?” 서소강이 말했다. “혼자 보내지 않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숙.” 주구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인이가 걱정되어 물은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가인이의 경공보다 나은 놈이 있긴 하냐?” 진회장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옆에 앉아 있던 필장풍이 말했다. “사부, 사저가 소가를 두고 갔으니 좀 돌봐 주십시오. 저희는 논과 밭의 일이 많아 힘듭니다.” 주구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가가 언제 너희들을 힘들게 하였느냐? 그렇게 착한 아이가 또 어디 있다고.” 손제자의 역성을 드는 주구전에 제자들이 모두 웃었다.

주구전은 차를 우려 제자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입문한 아이들도 모두 부모가 없느냐?” 진회장이 작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예.” 주구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처 안에서 작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주구전이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할 말 모두 하였으면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진회장은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오면서 서소강이 말했다. “회장, 너무 걱정 말게. 사숙께서 자서를 보살피고 계시니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네.” 진회장이 서소강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저리 앓는다는 말입니까?” 서소강이 진회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꼭 황궁에서 있었던 일만은 아닌 것 같네만…” 그 말에 필장풍과 진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서소강을 보았다.

필장풍이 물었다. “서사형,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서소강은 한참 뜸을 들이다 물었다. “혹시 누가 모과를 보내지 않았소?” 진회장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과요?” 필장풍이 ‘아!’하고 작은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래요, 곡우 조금 지나서 누군가가 꿀에 절인 모과를 한 단지 보냈어요.” 진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침 풍한에 걸린 아이들이 많아 아주 유용했습니다. 주사숙께서 보내신 것 아닙니까?” 필장풍이 진회장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같이 온 서신에 “錦(비단 금)이라 쓰여 있었으니, 주사숙께서 삼백상단의 일에 대해 물으신 것이 아닙니까?” 사계산장은 근처에 있는 문파의 이름을 암호로 만들어 불렀는데 비단으로 유명한 삼백상단을 금(錦)이라고 불렀다.

서소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사숙께 모과를 보냈는지 물어보고 내 말하리다.” 진회장과 필장풍이 답답하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서소강을 붙잡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뜸을 들이시오? 사형!” 서소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라 그러네, 자서가 일어나면 자서에게 묻게.” 필장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며 진회장을 보았다. 진회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서소강을 보며 말했다. “아니, 자서랑 모과랑 대체 무슨 상관이오?”


주자서는 일주일 정도 앓고 나니 점점 기력을 되찾는 것 같았다. 아침 나절 밭에서 일을 돕고 오후에 수련을 하고 나면 피곤할 법도 한데 사손들은 손에 꽃이며 먹을 거리를 들고 주구전의 처소를 찾았다. 주구전은 본인을 보러 온 것이 아닌 것이 서운하였지만 그런 기색 없이 사손들을 맞이했다. 주자서가 깨어 있을 때는 그와 만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앓아 누워 있을 때는 만나지 못하게 했다. 사형의 아픈 모습을 보고 울먹이는 사손들을 보는 것은 주구전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행히 주자서가 정신이 들어 침상에 앉아 죽을 뜨고 있었다. 잘 시간이 멀지 않은 양가인의 딸 정소가와 서소강의 딸 서임이 주자서가 누운 침상위에 하얀 메 꽃을 올려 두었다. 서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아프지 마세요.” 주자서가 꽃을 보고 웃으며 죽그릇을 내려 놓았다. “고마워. 소가야, 임아. 아주 예쁜 꽃이네.”

서임이가 주자서의 손에 꽃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얼른 일어나서 같이 포도를 따러 가요. 오라버니는 포도를 좋아하잖아요.” 서임의 말에 주구전이 ‘허허허’웃었다. 뒤에 서있던 사제들도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수련을 많이 해서 이제 사형과 대련해보고 싶다는 녀석부터 어서 일어나서 밭일을 도와 달라고 떼를 쓰고 조르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낙양에서의 일을 묻지는 않았다.

주자서는 낙양에 다녀오고 더 말 수가 줄고 전보다 더 알 수 없는 녀석이 되었다. 앓을 때가 아니면 하루 종일 넋을 놓고 허공을 보고 있어서 주구전이 걱정이 되어 주자서를 다독이면 주자서는 꾸민 얼굴로 웃었다. 주자서가 낙양에서 선황의 시중을 들며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는 주구전의 마음만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차라리 온가놈이라도 옆에 있어서 주자서를 달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농작물의 수확이 시작되고 사계산장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다. 제자들의 저녁수련을 단원절까지 면하여 준 것도 일이 바빠서 그렇게 되었다. 주자서는 조금씩 운신이 가능하여 주구전을 따라 밭 여기저기를 다니며 일손을 거들었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일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금방 못하게 그를 말렸다. 그럼 주자서는 함께 나와있는 어린 아이들을 그늘로 데려가 돌보는 일을 했다.

원래는 돌아가며 아이들을 돌보며 쉬었지만 주자서의 사정을 아는 제자들은 별말 없이 주자서에게 그 일을 맡겼다. 정주에서 함께 배를 탔던 평락원의 아이들도 사계산장에 와 있었다. 어떻게 데려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구전이 그렇게 했다. 주자서는 속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던 다른 하인들은 모두 죽었겠구나 생각했다. 아상은 주자서를 알아보고 종종 그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주자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점점 더 진짜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주자서는 새참으로 준비한 복숭아를 들고 밭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큼직한 복숭아를 하나씩 쥐어 주고 밭에서 일하는 사제와 사형을 불러 모았다. 필장풍의 조카 자신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사형, 벼와 밀을 터는 것은 꼭 도와주셔야해요.” 복숭아를 다 먹은 필장풍의 아들 필성명도 거들었다. “맞아요! 올해는 풍년이라 일이 아주 많을 거에요.” 주자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를 몰고 다니던 서임이가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싫어! 서임이는 자서 오라버니랑 놀고 싶으니까 일은 사형들이 해요!” 서임이를 따라온 정소가와 고상도 주자서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맞아! 사형들은 안 놀아주고 매일 누워서 땀만 식히잖아요.” 진구소가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형! 모친께서 부르세요.”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한번 더 확인하고 복숭아가 들어 있던 소쿠리를 들고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복숭아를 다 먹은 아이들이 각자 맡은 오리와 거위를 몰고 주자서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주자서는 주방에 들러 소쿠리를 놓고 사모가 계신 외실로 갔다. 외실에 들어가기 전에 조용히 고했다. “사모, 자서에요. 부르셨습니까?” 추수가 무거운 얼굴로 장지문을 열었다. 외실 안에는 양가인과 양가인의 부군 양주 율령사 정회가 앉아 있었다.

양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자서에게 낙양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주영은 죽어서 제후에 봉해졌고 그의 장례는 나라에서 치렀다고 했다. 황제로 등극한 사마연은 아직 죽지 않은 선황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위치가 불안했다. 선황은 무슨 생각인지 황친을 하나하나 따로 만나며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회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양가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또 다시 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그것은 기주 낙릉의 형림에서 온 서신이다. 주가주(朱家主)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양가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서신을 읽어보고, 자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라.”

주자서가 서신을 들고 머뭇거리자 추수가 주자서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읽어보고 당장 답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자서가 자리에 앉고도 봉투를 열 생각하지 않자 추수가 양가인에게 말했다. “사저께서는 돌아가서 여독을 푸세요.” 양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건업에 갈 일은 없으니 정회에게도 일을 주세요.”

정회가 추수에게 양손으로 공수하며 말했다. “좀 늦긴 했으나 사계산장에 입문할까 합니다. 관직을 그만 두고 왔어요.” 추수가 놀라서 정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율령사를 그만 두셨다는 말입니까?” 정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주와 서주, 예주는 정세가 매우 불안해요. 낭야왕의 일로 황친이 들썩이고 있으니 이 참에 잘된 일입니다. 저희 가족들도 곧 재산을 정리하고 임해로 올 거에요.” 추수가 외실을 나가며 말했다. “추후의 일은 장문과 상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외실을 나갔다.

그때까지 주자서는 서신을 펼쳐보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양가인이 주자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자서야. 네가 보기 싫으면 보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 그 누구도 너에게 뭘 강요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어.” 주자서가 반질반질한 눈을 들어 양가인을 보았다. 양가인이 주자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이제 곧 관을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울보여서 어쩌지?”

양가인이 아직 흐르지 않은 눈물을 소매로 찍어주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관을 올리면 혼인을 하겠구나.” 양가인이 웃으며 주자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서에게 잘 어울리는 색시를 찾아 주어야지.” 양가인의 말을 듣고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고개를 숙였다. 양가인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담아둔 이가 있니?” 주자서는 대답없이 서신을 뜯었다. 양가인은 정회를 일으켜 본인의 처소로 돌아갔다.

서신에는 그에게 낙릉 형림으로 오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주자서는 서선공 주희의 혈육이니 혈족과 함께 있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내용이다. 주자서는 혹시 그곳에 갔다가 황친을 만나 다시 남궁으로 돌아가는 생각만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 가면 혁란은 절대 주자서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주자서는 ‘부친께서는 상냥하다 못해 모친께 바보라고 놀림을 들으셨는데 이 호방한 주가주는 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생각했다.

그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교의 덕으로 벼슬하고자 하는 주가에 가면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또 황실의 종친과 엮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주자서가 어떤 일을 불구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외숙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시 사계산장으로 보낸 것이다. 주영의 시호는 회후라고 했다. 사마씨의 나라가 세워진 이후에 시호로 회(懷)를 쓰는 것은 주영이 처음이다. 주자서는 ‘하’하고 작게 웃었다. 이 시호는 분명히 그의 외숙이 지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가 뜻하는 바를 위해서도 주자서는, 주영은 형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계산장은 정회의 입문으로 또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들의 가족이 모두 임해 괄창으로 내려왔다. 정회는 무공을 수련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막 충년이 지난 아이들과 함께 내공수련을 했다. 함께 수련하는 아이들이 그를 놀리면 그의 딸 정소가가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역성을 들었다. 단원절이 다가와 사계산장은 명절을 준비하는 손길로도 바빴다. 그 날은 주자서가 사가에 나가서 살고 있는 사형들과 함께 폭죽을 사러 괄창에 나와 있었다.

혼인을 하여 데릴 사위로 들어간 사형도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 가문을 잇는 사형도 있었다. 그래도 단원절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 사계산장에 들르는 이들은 폭죽을 사가지고 왔다. 오랜 가뭄으로 황폐했던 임해 구강은 오랜만에 풍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번화했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과일들과 꽃들이 보이자 주자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괄창 현령의 고명딸과 혼인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간 유계(兪桂)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너도 곧 관을 올리겠구나 생일이 언제지?” 폭죽을 고르던 장맹(張萌)이 말했다. “유형, 자서를 몇 년이나 봤는데 아직도 자서의 생일도 기억 못합니까? 단원절이 지나고 딱 한달 후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장맹의 말에 작년에 혼인한 양회(楊茴)가 말했다. “유형은 사부나 사백의 생신도 기억 못하는데 자서의 생일이라고 기억하겠어요?” 양회의 말에 유계를 포함한 모두가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폭죽을 고른 장맹이 점원에게 값을 치렀다. 각자 폭죽이 들은 상자를 하나씩 들고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막 시장을 벗어나 주루가 있는 대로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누가 그를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곧 사람들을 헤치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주자서는 또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게 웃고는 길을 재촉했다. 멀리 먼저 가고 있던 사형이 주자서를 불렀다.

주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는 손에 놀라 들고 있던 폭죽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폭죽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자 주자서의 팔을 잡은 사람이 말했다. “혹시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 출신이 아니오?”(6)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흰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았다. 온객행이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엷은 구름에 사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51) 주자서가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개 위 짧은 꿈속에서 수천리를 헤맸어.”(71) 주자서가 온객행을 안으며 말했다. “보기 전엔 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못난이라니.”(44) 그렇게 말하는 주자서의 목소리도 떨렸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떼어내며 말했다. “아서, 이제 못난이라고 부르지 마. 내 사제 이름이 못난이란 말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온객행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다렸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같이 가기로 했잖아.” 온객행이 주자서가 잡은 손을 더 꼭 잡았다.

주자서가 오지 않아 먼저 길을 가고 있던 사형중에 하나가 주자서를 찾으러 왔다. 주자서가 하얀 옷을 입은 남자와 손을 잡고 있길래 장맹이 다가가 물었다. “자서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시선을 떼고 사형을 보며 말했다. “사형.” 장맹은 주자서가 앞에 쏟은 폭죽을 주워담으며 말했다. “자서야, 일단 산장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주자서와 온객행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폭죽을 주웠다.

주자서의 상자를 대신 들고 사계산장으로 함께 걷는 온객행을 사형들은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주자서는 사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온객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양친의 위패는 형림으로 보냈어. 그리고 회후의 위폐는 둘만의 비밀이 있는 곳에 모셨어.” 주자서의 표정이 가라 앉는 것을 본 온객행이 안타까워 작게 탄식했다. 주자서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잘했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쓸며 말했다. “무거워? 내가 들까?” 온객행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아니, 하나도 안 무거워.” 사형과 주자서는 해 질 녘에 사계산장에 도착했다.

저녁준비가 한창인 부엌에서 밥냄새가 났다. 주자서는 폭죽을 내려놓은 온객행의 손을 잡고 외실로 갔다. 외실에는 사백과 사숙이 모여 계셨다. 온객행을 본 서소강이 마시던 차를 뱉으며 말했다. “푸핫! 온공자!” 양가인이 옆에서 서소강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사형! 더럽게.” 온객행은 진회장과 서소강, 양가인, 필장풍에게 포권하여 인사했다. “장명산의 대제자 온객행 사계산장의 장문을 뵙습니다.”

(97) 시호법 諡號法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한다.
慈仁短折曰懷 자애롭고 어질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경우를 회라고 한다.

雨霖鈴 第34

34. 驟雨不終日
소나기는 하루 종일 오지 않는다.

주자서는 황제의 침상 옆에 앉아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눈칫밥을 먹으며 식건전에서 선황의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가 안타까워 내관은 그를 깨우려다 말았다. 언제인가 그를 평상에 재우려고 깨웠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한숨도 자지 않고 꼿꼿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자서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키가 조금 크고 살이 많이 내려서 그 모습이 더 처연했다. 선황이 주자서를 한순간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자 황제는 기세가 꺾였는지 예전만큼 주자서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정신을 놓았다는 선황은 전에는 찾지 않던 의학에 관련된 서적을 옆에 끼고 먹는 것 하나하나를 전부 투정했다. 급기야 만드는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자서는 가끔 사계산장에서 먹었던 묽은 죽이나 나물 찬을 만들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황은 주자서가 만든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했다. 선황은 이제 주자서가 목소리를 내도 발작하지 않았다. 날이 좋으며 화림원에 해가 잘드는 곳에 그늘을 만들어 놓고 고개를 숙이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주자서를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가 주자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황제가 숭덕전에서 황친을 모아 연회를 크게 열었다. 황위 계승을 축하할 겸 모시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연회이다. 선황과 함께 식건전 아니면 화림원을 거니는 것 말고는 크게 움직이지 않는 주자서도 남궁 전체가 얼마나 들썩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주자서에게 또 옷을 보내왔다. 능소화 빛깔의 노란 장포에 다홍색 중의는 매미날개처럼 얇다. 주자서는 그 옷을 받고 인사했다. “황제의 자애함에 망극 하나이다.” 그 옷을 가지고 온 내관은 주자서의 인사도 받지 않고 식건전을 떠났다.

황제의 내관은 주자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내관에게 청전(請錢)으로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받은 옷을 식건전 안쪽에 선황의 옷을 보관하는 곳으로 가져가 두었다. 주자서는 아직도 황제가 저에게 하는 이 고약한 장난이 자신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이 언짢았다.

연회에 입고 오라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내키지 않는다. ‘몸을 잊고 총명을 버려라.’(49) 주자서는 모친을 원망하려고 하다가 그러지 못했다. 저를 두고 먼저 가신 모친께서 어떤 마음이셨는지 주자서는 감히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선황과 모친을 함께 그린다고 생각하니 고스란히 혼자인 것만 같지는 않아 위안이 되었다. 내실에서 주자서를 찾는 내관이 그를 데리러 왔다. 선황이 그를 찾는 것이다.

선황은 조금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서안 앞에 앉아 오래된 서간을 읽고 있었다. 주자서는 어렴풋한 기시감에 마음이 조금 두근거렸다. 주자서가 손을 모아 공수하여 인사했다. 선황은 주자서를 보고 읽고 있던 서간을 내려놓고 그에게 손짓했다. “영아, 이리 오너라.” 주자서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주자서가 식건전으로 들어와 시중을 들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황이 그를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주자서가 주변의 내관을 눈치를 보자 내관들이 조용히 서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서실의 장지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엄윤(閹尹)이 나가고 난 후에 선황에게 다가갔다. 선황은 주자서에게 자기 옆에 있는 포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영(嬴)아, 기억나니? 선황께서 네가 오는 날엔 편강 대신 모과 절임을 드셨어.” 황제는 귀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품속에서 작은 나무함을 꺼냈다.

주자서는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뚜껑을 여러 보니 모과 절임이 들어 있다. 얇게 편으로 저며 마치 편강처럼 생긴 모과 절임을 집어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황께서 잘못 집어 영이에게 편강을 먹였다가 맵다며 크게 운 적이 있었거든. 영아 기억나니? 선황께서 한참을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헌이가 오자마자 눈물을 그쳤어.” 그리고는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가 선황이 내민 모과 절임을 받아 들었다. 선황이 말을 이었다. “우는 너를 달래시려고 쩔쩔매는 모습은 영(潁; 사마영 기왕)이 때도 보지 못 했어.” 주자서가 고개를 들었다. 선황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우(杞憂)다. 기우였어.” 주자서가 작게 훌쩍였다.


선황은 이후로 주자서를 서실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화림원에 있는 석탁에 가서 바둑을 두었다. 낙양의 여름은 임해의 여름만큼 덥지 않았다. 선황은 주자서 역시 모친을 닮아 더위를 타는 것을 보고 기꺼워했다. 주자서는 점점 낯설었던 차게 식힌 백합탕에 익숙해지고 있다. 주자서는 황제가 선황을 모시라고 보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었다. 내관들은 그런 주자서를 데리고 식건전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말을 붙였다.

그러다 주자서의 눈에 오랫동안 방치된 서실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 보였다. 그래서 주자서는 선황이 부르지 않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서실에 앉아 책을 정리하는데 썼다. 손때가 많이 탄 익숙한 죽간부터 낯선 비단 책자까지 주자서는 이것들 중에 어떤 것은 어쩌면 모친의 손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갈하게 달린 주석은 외조부께서 쓰신 것일까? 모친께서 쓰신 것일까? 그러다 황제가 오면 주자서는 환관들이 선황의 옆으로 급히 데리고 가서 시중을 들게 했다.

황제의 손이 아직 식건전 깊숙한 곳까지 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황제는 매일 아침 선황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가끔 기별없이 들이닥쳐 저녁을 먹었다. 선황은 황제와 식사할 때면 항상 음식을 투정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또 별볼일 없는 재주로 보잘것없는 음식을 만들어 선황께 바치는 것이다. 주자서가 없는 동안 무슨 대화를 했는지 황제의 발길이 뜸하다. 주자서는 연회 준비로 황제가 바빠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회가 다가오자 황친이 하나 둘 낙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착해서 선황에게 인사했다. 주자서는 예장왕, 회남왕, 제왕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선황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에게도 아는 척을 했다. 예장왕이 주자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너는 어째 볼때마다 매미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있구나.” 예장왕의 거친 손속으로 흐트러진 요대에 주목으로 만든 하얀 실의 요패가 걸려있다.

예장왕은 요패를 들어 보더니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어찌 이런 천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느냐?” 예장왕이 요패를 떼어내려고 당기자 주자서는 털썩 주저앉아 바닥에 머리를 붙여 조아렸다. 회남왕이 예장왕을 말리며 말했다. “풍도형님, 영이가 원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왕이 거들었다. “영아, 일어나거라.” 그리고는 자기 요대에 매여 있던 금방울이 달린 요패를 풀어 건네며 말했다. “그런 것은 황실 격에 맞지 않으니 앞으로는 이것을 쓰도록 해라.”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회남왕이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더 자주 만나며 차차 가르치면 됩니다. 건업에 돌아가면 산호로 만든 요패를 선물로 보내주마.” 주자서는 제왕이 쥐여준 요패를 손에 쥐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왕전하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손에 쥔 요패를 내밀었다. 예장왕이 답답하다는 듯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가 달고 있는 요패를 잡아당겨 바닥에 팽개쳤다. 그 바람에 요대가 풀린 주자서가 앞섶을 움켜쥐고 다시 주저 앉았다.

예장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서 화동이라도 하다 왔느냐 왜 이리 답답하게 굴어.” 제왕이 예장왕을 나무라며 말했다. “풍도형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왕이 말했다. “이것이 어찌 영이가 원해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황제가 영이를 모욕한 것을 잊으셨어요?” 제왕이 주저 앉아 있는 주자서를 일으키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영아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황친이 하는 행패를 보고 있던 선황이 주자서를 불렀다. “헌아.”

주자서는 선황에게 가기전에 손에 들고 있던 금방울이 달린 요패를 제왕에게 돌려주고 바닥에 떨어진 끊어진 주목 요패를 집어 들었다. 주자서를 자기 옆에 앉힌 선황이 말했다. “감히! 우리 헌이에게 무슨 짓이냐!” 선황의 말에 황친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 앉았다. 선황은 주자서의 앞섶을 다시 여며주며 주자서의 등을 쓸었다. “황궁에는 저런 몹쓸 것들 밖에 없어서 우리 헌이를 어떡하나.” 선황의 말에 제왕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폐하,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황제가 주자서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사마운이 헌이를 욕보이려 했다! 내가 그를 내쫓았으니 이제 괜찮아.” 선황의 말에 제왕과 회남왕이 시선을 교환했다.

예장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 자이는 이미….” 제왕이 예장왕의 말을 잘랐다. “폐하, 헌이를 제가 청주로 데려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회남왕이 말했다. “그동안 양주에서 자랐다고 하니 제가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황은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우리 헌이는 아무데도 안 간다! 너희는 믿을 수 없어. 어서 가서 회암을 불러와라.” 선황의 입에서 서선공의 이름이 나오자 식건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긴장했다. 선황이 횡설수설하자 엄윤이 황친에게 다가가 선황의 건강을 걱정하며 조용히 황친들을 밖으로 모셨다. 그들은 별 말없이 선황에게 인사하고 식건전을 나갔다.

황친이 나가고 나서도 선황은 한참 주자서를 안고 있었다. 작게 주자서의 귀에 속삭였다. “영아, 천자가 될 마음은 없느냐?” 주자서가 몸을 틀어 벗어나려고 하자 선황은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내가 너를 천자로 만들어 주마.”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폐하, 저는… 저는….” 선황이 몸을 물리고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내가 해주마.” 주자서는 선황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떴다.

주자서는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져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친께서…, 장공주께서 유교의 덕으로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황이 작게 탄식하며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선황의 눈시울이 붉다. 주자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잊고 총명을 버리면 천륜도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47) 주자서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선황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름진 그의 얼굴을 적셨다. 선황이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헌이의 묘수는 언제나 이기는 구나.” 두사람은 식건전 옥좌에 앉아 한참 울었다. 주자서의 흐느낌이 수그러들고 선황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된다.” 주자서가 선황에게 눈을 맞췄다. 선황은 방금 막 다시 흐르기 시작한 주자서의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이제 모두 보내 주어야겠다.” 선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엄윤을 불렀다.


유시가 되자 내관이 선황을 모시러 식건전으로 들어왔다. 선황은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밝은 색의 대수삼관에 노란빛이 도는 폐슬과 붉은 요대를 하고 붉은 산호가 달린 요패를 맸다. 진왕이 보낸 능소화 빛깔의 옷을 입은 주자서와 아주 잘 어울렸다. 법도대로라면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기 때문에 어두운 색 심의를 입는 것이 맞지만, 선황은 황실의 제일 어른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했다.

태보가 선황의 옷차림을 보고 몇 차례 간언했으나 선황은 듣지 않고 옆에 황제에게 받은 옷을 입은 주자서를 데리고 숭덕전으로 향했다. 제일 상석에 선황이 앉고 한참 후에 황제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자리에 앉은 황친들 대부분이 아주 짙은 색의 옷을 입어서 선황과 주자서가 더 눈에 띄었다. 황제는 자리에 앉기 전에 도착한 황친과 하나하나 인사를 하며 상석 앞에 마련된 술상에 가서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음식이 들어오며 음악이 연주되었다. 주자서가 입은 옷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 주었다. 춤을 출 때마다 팔랑거리는 치마가 마치 능소화 같다.

선황은 주자서를 옆에 앉혀 놓고 이것 저것 음식을 권하다 말했다. “백합탕이 없지 않느냐? 우리 헌이는 백합탕을 좋아하니 어서 백합탕을 내오너라.” 선황의 목소리에 웃고 떠들던 황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황제는 잠시 얼굴을 구겼다가 내관에게 시켜 백합탕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황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자 황친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덕담을 하며 술을 권했다.

황친과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취기가 돈 황제가 선황에게 다가와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부황,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영(嬴)이에게 말씀하세요.” 황제가 선황을 도발하려는 것 같았다. 선황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내가 란이 너에게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식건전에 두고 온 모양이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부황, 제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선황이 손을 내젓고 말했다. “너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헌아 네가 다녀오너라.”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선황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황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숭덕전을 나갔다.

숭덕전을 나가자 엄윤이 주자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자서가 그를 따라 식건전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서!”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주자서는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거미가 앉은 황궁이 붉다. 갑옷을 입은 무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엄윤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주공자를 멈추는가?” 군관이 점점 다가오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틀어 올려 장관을 쓴 온객행은 너무 낯설어서 주자서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군관이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엄윤이 놀라 주자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주공자.” 군관이 주자서에게 다가오자 엄윤이 날카로운 기색으로 군관을 경계했다. 주자서가 군관의 견갑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어떻게…?” 엄윤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주공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해가 지기전에 가셔야 합니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더 바짝 다가오자 엄윤이 그를 막았다.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아서, 우리 도망갈까?” 주자서의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 온객행이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가져갔다. 엄윤이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주공자. 지금 가셔야 합니다.” 엄윤이 주자서를 일으켜 그를 식건전 쪽으로 끌고 갔다. 온객행이 그를 따르며 말했다. “아서,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주자서는 엄윤의 손에 이끌려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온객행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온, 돌아가.” 그의 말에 온객행의 걸음이 멈췄다. 주자서가 멈춰서 그에게 말하려고 하는데 엄윤이 그를 업고 식건전으로 향했다. 주자서가 말했다. “노온! 돌아가.” 온객행은 멀어지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주자서가 멀리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 사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온객행은 식건전으로 향하는 길에 서서 말했다.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아서….”

온객행은 방금까지 주자서가 잡아주었던 손을 쥐었다 폈다. 펴는 순간 그와 만났던 순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보낸 것이 후회가 되어 식건전으로 달려갔다. 식건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게 번진 불이 장지문을 뚫고 나왔다. 온객행이 식건전에 가까워질수록 번진 불로 사위가 붉었다. 주변에서 물을 옮기고 있던 군관들이 온객행을 보고 그에게 물동이를 건넸다.

식건전 근처에서 방금 주자서를 끌고 가던 엄윤이 내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온객행이 물동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자 엄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어서 불을 꺼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온객행이 그에게 물었다. “주공자는 어디 있습니까?” 엄윤이 인상을 쓰며 온객행을 보았다. “군관은 어서 불을 끄세요.” 온객행이 들고 있던 물동이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주공자는 어디에 있어요?”

엄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온객행이 내려 놓은 물동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물동이를 다시 온객행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주공자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며 엄윤을 보자 엄윤은 곧 불을 끄는 군관들에게 안에 주공자가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곧 뒤따라온 장순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무슨 일이오? 주공자는 만났소?” 온객행이 불길이 타오르는 식건전을 보고 있다가 그리로 달려 들려고 하자 장순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온공자, 왜 이러시오?”

온객행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넋이 나가 말했다. “아서가… 아서가 안에 있어요.” 장순은 버둥대는 온객행의 혈자리를 눌러 그를 제압했다. 쓰러진 온객행을 한 켠에 뉘여 놓고 주변에 있는 군관들을 모아 불을 끄기 시작했다. 숭덕전에서 연회를 즐기던 황친들이 타는 냄새를 맡고 하나 둘 식건전으로 모였다. 선황이 식건전 앞에 주저 앉아 울며 말했다. “헌아! 우리 헌이가 안에 있다! 헌아!” 황제가 선황 옆으로 가서 그를 토닥였다.


식건전은 밤새도록 타올라 동량과 서까래마저 모두 새카맣게 타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구의 시체를 찾았다. 식건전에 남아있던 내관과 여관들 그리고 선황의 침실에서 황제가 선물한 옷을 입고 온몸에 화상을 입어 죽어 있는 시신을 찾았다. 그의 손에는 타고 남은 주목 요패가 들려 있었다.

온객행은 다음날 아침 주택에서 눈을 떴다. 온객행은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하게 나는 타는 냄새가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온객행이 아침을 먹으려고 부엌으로 가는 길에 장양을 만났다 장양이 온객행에게 인사했다. “온공자!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온객행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장양이 답답하다는 듯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부친께서도 제왕께서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남궁에 큰 불이 났다고 하던데, 온공자는 다친데 없습니까?” 온객행의 몸이 크게 흔들리자 장양이 그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온공자? 어디 다쳤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황궁에…불이?”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식건전이 모두 탔다고 합니다.” 온객행이 자리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아서…아서.” 장양은 온객행을 부축해 외실로 데려갔다. 그날 오후 다 늦어서야 제왕과 장순이 돌아왔다.

장순은 돌아오자마자 온객행을 찾았다. “주공자께 전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전하셨소?” 온객행이 대답없이 멍하니 앉아 있자 장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젯밤에 주공자를 만났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순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주공자께서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아서는 무공이 높아요. 분명히 불이 나기 전에 도망쳤을 것입니다.” 장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온객행이 다시 조리가 없이 말을 지껄였다. “내관…, 내관이 그를 데리고 갔어요. 어서 가야 된다고 하면서…, 만났는데, 내 손을 잡고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대체 어디로?” 장순이 탁자위에 타다 만 주목 요패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황제께서는 주공자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른다 하셨소.” 온객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온객행은 주택에 마련한 주영의 빈소를 지켰다. 상을 모두 치르고 나서 제왕과 장순이 다시 청주와 연주로 돌아갈 때에도 온객행은 주택에 있었다. 그러다 황제가 주택을 거둬드렸다. 주택의 대문에는 다시 봉문이 붙었다. 온객행은 소림사에 머물면서 매일 주택을 찾아갔다. 더위가 꺾이고 무고를 열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무고에 갔던 사람들은 무고 근처에 있는 문파와 교류를 하고 각자 자기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엽백의는 온객행을 데리러 다시 숭산으로 돌아왔다. 무고 안에 남아있던 명교와 마교의 두루마리들은 모두 태우고 무고의 문을 열어 둔 채로 돌아왔다고 한다. 엽백의는 옥패를 온객행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제갈왕은 불태운 두루마리들이 아깝다며 한참 엽백의에게 불평했다. 온객행이 모르는 말로 한참 떠들다가 다시 이해가 되는 말로 떠들었지만 온객행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가.’ 온객행은 계속 생각했다. 대체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돌아가라고 한 곳이 어디인지. 장명산인지 아니면 처음 만났던 소림사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던 주택인지 ‘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볼일이 끝난 엽백의는 하루빨리 장명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제갈왕을 제자로 받았지만 그는 용독술에만 능통하여 체술이나 무공은 시원치 않았다. 그를 제자로 소개했으니 어디 가서 장명산의 이름이 부끄러울 짓을 하지 않게 하려면 가르쳐야 했다.

엽백의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너 사계산장에 다녀오거라.” 온객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엽백의가 말했다. “사계산장에는 주공자의 소식이 닿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네가 가서 알려주라는 것이다.” 온객행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엽백의가 ‘쯧’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네놈은 어디 눈물을 따로 담아 두는 것이냐? 그만 울어라!” 엽백의의 타박에 온객행이 ‘으앙’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자 엽백의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주공자도 네가 전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온객행은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제갈왕이 온객행의 곁으로 오더니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온객행은 제갈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또 한참 울었다. 엽백의가 다정한 둘의 모양새를 보고 ‘흥’하고 코웃음 쳤다. 제갈왕이 말했다. “내가 울면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해 주었소. 울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우는 것이 나을 때도 있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양주로 가겠다고 해 놓고 한참을 소림사에 눌러 앉은 온객행이 마음에 안 들어 엽백의와 제갈왕이 소림사를 떠났다.

소림사를 떠나면서 엽백의가 말했다. “올해를 넘기기 전에 돌아와라.”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자 엽백의는 온객행이 또 울 것 같아 경공으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제갈왕이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사형! 장명산에서 기다리겠소.” 온객행이 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왕이 말했다. “내가 해보니 사람이 난 자리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소.” 온객행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지자 제갈왕도 서둘러 엽백의를 따라갔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가을 매미 처량하게 운다. 도성 문 밖의 이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자꾸 가라고 재촉한다. 두 손 마주 잡고 젖어 드는 눈동자 바라보다 끝내 한마디 못했다. 목이 메인다. 이제 가면 아득한 물안개길, 저녁안개 가득한 남녘 하늘, 자고로 다정하면 이별이 아프다 하던데, 차갑고 쓸쓸한 이 가을에 이별을 어찌 견딜까? 마음속 일어나는 수많은 연정을 누구에게 말할까?”(96)

(96) 유영 우림령 雨霖鈴
“寒蟬凄切, 對長亭晩, 驟雨初歇
가을 매미 처량하게 운다 십리 정자 길 황혼에 대고 퍼붓던 소나기 이제 막 그쳤다.
都門帳飮無緖, 留戀處, 蘭舟催發
도성 문밖 이별의 술과 적, 울적하게 쓸쓸히 마시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배는 가자고 재촉한다.
執手相看淚眼, 竟無語凝噎
두 손 마주 잡고 젖어 드는 눈동자 바라보다 끝내 한마디 못하고 목이 메인다
念去去千里煙波, 暮靄沉沉楚天闊
이제 떠나서 가고 또 가면 천리 물안개길, 저녁안개 가득한 남녘 하늘 아득하네
多情自古傷離別, 更那堪冷落淸秋節
자고로 다정한 사람은 이별이 서러운데 차갑고 쓸쓸한 이 가을의 이별을 어떻게 견딜까?
今宵酒醒何處, 楊柳岸曉風殘月
오늘밤 마신 술 어디에서 깰까? 버드나무 언덕일까 새벽바람 지새는 달 아래일까?
此去經年, 應是良辰好景虛設
이제 떠나가면 여러 해를 넘길 테니 아름다운 시절, 좋은 경치모두 부질없네
便縱有千種風情, 更與何人說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연정 있다해도 그 누구에게 말할까?”

雨霖鈴 第33

33. 杯盤狼藉
술잔과 접시가 이리에게 깔렸던 풀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온객행은 무고로 향하고 난 이후로 신경이 날카롭다. 비가 오는 밤은 잠들기 힘들다. 차라리 요란하게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면 조금 낫다. 장마때가 되어 내리는 비가 오히려 더 괴롭다. 지붕과 창호문을 두드리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검질기게 온객행의 기억을 이리저리 젖히고 뒤적이며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모두 내려 놓기로 하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았는데도 과거는 유념(留念)이 되어 온객행을 놓아주지 않는다.

날이 점점 더워져서 주자서는 들러붙지 말라며 둘 사이를 넓게 벌려 얇은 내의 차림으로 온객행에게 등을 보인다. 그래도 한 침상에 눕는 것이 기꺼워 온객행은 그러마 하고 말았다. 청우 여하에 상관없이 진왕이 주자서에게 들러붙는 것도 짜증이 치밀었다. 주자서가 사계산장에서 입었던 호복으로 갈아 입고 마차를 나이가 많고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주구전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진왕은 주자서를 자신에 마차에 태우고 한참동안 그를 나무랐다.

그 이후로 주자서는 예의 불편하고 소매가 하늘하늘한 비단 장포를 입고 진 길을 함부로 걸어서는 안되는 비단신을 신고 진왕의 마차를 타고 갔다. 온객행이 함께 할 때도 온객행이 함께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진왕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주자서를 희롱하고 난폭하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주자서는 입을 꾹 닫고 그냥 그대로 진왕의 패악을 모두 받아 주었다. 진왕은 객잔에 머무를 때면 주자서를 밤 늦게까지 옆에 끼고 술을 마시게 했다. 감정적으로 시달린 주자서는 기진하여 침상에 누우면 금방 잠들곤 했다. 오늘도 3경이 너머서야 겨우 객실로 들어온 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진왕이 어떻게 할까 두려워서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온객행이 손을 뻗어 주자서를 잡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노온, 잠이 안 와?”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말했다. “이제 오경이야, 오경이 끝나려면 멀었으니 어서 더 자.” 주자서는 온객행이 덮어주는 이불을 발로 차며 말했다. “더워.” 온객행은 일어나 앉아 주자서가 치운 이불을 잘 개서 발치에 두고 다시 누웠다.

주자서가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고 말했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 온객행이 몸을 누이며 말했다. “나도 방금 깼어. 밖에 비가 오나 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창문이 있는 쪽을 보고 말했다. “그러네, 매림(梅霖)인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서, 어서 더 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노온, 왜 그래? 잠 들지 못하는 밤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조금 더 다가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덥다며….” 주자서가 온객행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싫어?” 온객행이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아니, 너무 좋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맘때 오는 비는 너무 세차게 오면 안돼. 그럼 막 여문 매실이 바람에 다 떨어지거든.” 온객행이 ‘흐음’하고 장단을 맞추자 주자서가 말을 이었다. “매림이 지나고 날이 더워지면 아직 덜 여문 파란 매실을 따다가 술을 담그는 거야. 새로 딴 매실로 담근 술은 제자들 이름을 붙여서 태사숙이 머무시는 산에 묻어 놔. 그리고 제자들이 관을 올리거나 혼례를 치르면 꺼내서 마시는 거야.”

온객행이 물었다. “아서의 이름이 붙은 매실주도 있어?” 주자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만약 낙양에 오지 않았다면 올해 관을 올리고 내 이름이 붙은 매실주를 꺼냈을 거야.”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사형들의 이름을 말했다. 온객행은 모르는 그들에게 질투가 일어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서는 지학인데 왜 벌써 관을 올려.” 주자서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의 표정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에 빗소리를 지워보고자 노력했다.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자는 것은 온객행의 잠버릇이 되었다. 익숙하게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늑장을 부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보자 엽백의가 온객행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

온객행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엽백의가 객실의 문 앞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진왕이 지키고 있는데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는 말이다.” 온객행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그냥 같이 잠만 잔 것뿐이오. 노야야 말로 생각이 막되고 문란한 것 아니오?”

엽백의가 혀를 ‘쯧’하고 차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라, 낙양에 무슨 일이 생겨 진왕이 난리다.” 온객행이 눈을 뜨지 못하는 주자서의 어깨를 살살 흔들며 말했다. “진왕이 난리인데 왜 여기로 오셨소.”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네 모과를 빌리러 왔지.” 이제 막 눈을 떠서 정신이 몽롱한 주자서의 몸을 일으키며 온객행이 말했다. “모과는 병이 들어 앓는 중이니 다른 데로 가보시오.”

엽백의가 주자서의 어깨를 좀더 강하게 흔들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모과야, 네 외숙이 많이 아픈 모양이다.” 주자서는 엽백의의 손속에 눈살을 찌푸리며 엽백의를 보고 말했다. “외숙?” 그러더니 정신이 번쩍 났는지 엽백의에게 되물었다. “황제폐하께서 위독하십니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원래도 오늘내일 하던 인물이니 놀랄 것은 아닌데, 시기가 미심쩍구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관수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았다. 온객행은 느긋하게 일어나 주자서가 입을 옷을 챙겼다.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던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모과가 아주 참한 각시를 얻었구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옷을 들고 주자서에게 가면서 일부러 엽백의의 발을 차며 말했다. “노인네는 어서 가서 망령이나 고치시오.” 엽백의가 온객행의 다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젊은이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는데 어디 맞아 볼 테냐?” 관수를 마친 주자서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 주자서가 좋아하지 않는 비단신까지 신긴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누구 신랑인지 정말 잘 생겼네.” 그리고 ‘히히히’웃었다.

그대로 주자서를 자리에 앉힌 온객행이 머리를 빗으려고 들자 엽백의가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얼른 해라. 진왕이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아’하고는 온객행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진왕이 난리다.” 대충 빗어 반만 묵어 내린 머리로 주자서와 엽백의가 나가고 나서야 온객행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진왕의 객실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주자서가 방으로 들어오자 진왕은 소식을 전한 병사를 물러가라 하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기 곁에 앉히고 말했다. “초은왕이 나를 익주로 보낼 때부터 이상했다. 무언가 꾸미는 일이 있어서 나를 이곳으로 내 쫓은 거야.”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진왕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놈도 결국은 태상황의 자식이니 원하는 바가 있었겠지.” 진왕의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주자서의 뺨에 와 닿았다.

진왕이 낮게 송영했다. “하늘에 열린 창은 어두운 방을 통과하며, 모함하는 말이 바르고 곧은 이를 해치고, 흘러가는 구름이 빛을 가리네.”(33) 주자서는 진왕의 말에 속으로 조소했다. ‘누가 빛이고 누가 흘러가는 구름인데?’ 진왕이 다소곳이 놓여있는 주자서의 손을 희롱하며 말했다. “직아(禝兒).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니?”

주자서가 대답했다. “서안에서 낙양까지는 말을 달리면 하루안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서안에서 멀지 않으니 서둘러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제폐하께서 갑자기 승하하시기라도 하면… 초은왕전하께서는 낙양에 대해 잘 알지 못하시니 녹상서사와 후장군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진왕이 조급해하며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군관은 모두 강릉에서 온 자들이니 이들 몰래 낙양으로 가야겠다.”

진왕이 주자서의 턱을 잡아 쥐고 말했다. “너는 내가 낙양에 도착할 때까지 본왕인 척하다가 내가 부르면 바로 낙양으로 돌아오거라.” 주자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작게 미간을 찌푸리자 진왕이 그를 비웃으며 놀렸다. “검선의 제자 놈에게 제대로 홀렸군, 왜? 저녁에는 비 되고 아침에는 구름 되는가?”(55) 주자서가 시선을 들어 진왕과 눈을 마주쳤다. 진왕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주자서. 너는 내가 주는 것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턱을 쥔 손을 놓고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렸다.

주자서는 진왕의 손속을 물리치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옷을 바꿔 입은 진왕은 주자서의 옷을 입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여인이 입는 옷 같긴 하군.” 하늘거리는 소매를 펄럭이는 진왕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검은색의 심의 소매를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진왕전하 사안이 시급하니 서두르십시오.” 진왕은 주자서를 힐끔 보고 몸을 돌려 나가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놀라셨으니 어서 의원을 부르십시오.”

진왕의 처소에 들어온 엽백의가 침상에 진왕의 옷에 파묻힌 주자서를 보고 표정을 구겼다. “모과야 네가 왜 거기 있냐?” 주자서가 일어나 엽백의에게 공수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어르신, 진왕전하께서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진왕의 상황을 들은 엽백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가 앉아 있던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진왕이 주공자를 낙양으로 보낸 거군. 황제를 보필하라는 이유로 말이야. 주공자는 바로 여기 계신데.”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말이 없다가 엽백의가 말했다. “소림사는 진왕 때문에 길을 멈출 생각이 없다 했소. 나중에 진왕이 알면 또 패악을 부리겠지만 어떻게 하겠소?” 주자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차에서 내리지만 않으면 눈 여겨 볼 사람도 없으니 그냥 함께 가겠습니다. 하지만 진왕이 추후에 다시 찾겠다 했으니 조금 뒤처져 가겠습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군관의 눈은 어떻게 피할 참이냐?”

주자서가 엽백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진왕은 저 말고는 얼굴을 마주했던 군관이 많지 않으니 제가 얼굴만 잘 숨기면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 엽백의가 주자서의 얼굴을 가까이 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진왕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얼마나 귀한 출신인 것이냐?”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답했다. “어르신, 저는 양주 회계의….”

주자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엽백의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아들이면, 황친이냐? 제척이냐?” 주자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자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신분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은 정녕코 없느냐?” 주자서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르신, 저는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입니다.” 주자서의 태도가 제법 도를 닦은 티가 나서 엽백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뭘로 가리면 좋을까?” 주자서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엽백의는 왔을 때처럼 훌쩍 자리를 떠났다.

주자서는 온몸을 가린 얇은 비단의 유모(帷帽)를 쓰고 마차 안에 앉아 있다. 휘장을 다 걷어도 끈끈하고 무더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주자서는 일부러 중의를 입지 않고 내의 위에 바로 심의를 걸쳤는데도 날이 무더워 혹서와 씨름하고 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하루가 지났지만 산속이라고 그렇게 시원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산을 넘어 도착한 마을은 산속에 쌓여 있는 분지라서 더 덥고 더 습했다. 차라리 비가 오면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비가 오기 시작하니 더 무더워졌다.

내의가 척척 들러붙어 움직일 때마다 불쾌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며 군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전처럼 패악을 부리지 못하는 것도 몸에 난 발진 때문이라고 가져다 붙이니 그럴 듯해졌다. 혹시라도 괜히 심기를 거슬러 난리를 피울까 군관들은 더욱 조심하면서도 진왕의 일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마을의 객잔에서 가장 좋다는 객실에 도착한 주자서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춰서 군관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 창호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주자서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문으로 가서 문을 끈으로 묶어 잠갔다.

유모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입고 있는 장포를 벗어 침상위에 대충 던졌다. 주자서는 대야를 찾아 물을 담아 얼굴에 물을 적셔 땀을 닦아 냈다. 안에 입은 내의가 땀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는 느낌이 찌뿌드드하여 좋지 않았다. 그러다 밖에서 군관이 기별을 하자 주자서는 어깨를 튀며 탁자위의 유모를 얼른 쓰고 창호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요기할 음식이 든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문단속을 하고 유모를 벗어 침상 위에 던져두고 탁상에 앉았다.

온객행이 소반에서 찬을 꺼내다 주자서를 보고 그릇을 놓쳤다. 주자서가 온객행이 떨어뜨린 음식을 정리하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노온, 왜 그래?” 온객행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주자서가 벗어 놓은 장포를 들고 와 주자서에게 입히며 말했다. “아서, 옷을 입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가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더워서 싫어.” 하고 어깨를 털어 걸쳐진 장포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온객행은 얼굴이 빨개져서 주자서에게 말했다. “부군, 소첩에게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소첩이 만드는 것이겠습니까?”(73) 주자서가 음식에서 눈을 떼고 온객행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끄러워하는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린 주자서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견으로 짠 얇은 내의가 땀에 젖어 주자서의 몸을 은근하게 비쳤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른 주자서가 바닥에 떨어진 장포를 주워 두르며 말했다.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또 헛소리!”

말을 더듬는 주자서가 장포를 주워 여미는 것을 본 온객행이 탁상에 앉으며 말했다. “아서…, 그렇게 더워? … … … 씻을래?”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더위에 지쳐 입맛이 없는 주자서가 금방 젓가락을 내려놓자 온객행이 옆에 앉아 그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리며 말했다. “아서, 좀 더 먹어야지.” 주자서는 대답없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조부께서는 괜찮으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찬 몇 개를 더 권하며 대답했다. “응. 오히려 널 걱정하셨어, 너는 더위를 많이 탄다면서?” 주자서가 밥그릇을 밀어내고는 일어났다. “그러니까 오늘은 평상에서 자.”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을 내밀자 주자서가 말했다. “싫어서가 아니야 정말 더워서 그래.” 온객행이 소반에 음식을 정리하며 말했다. “나는 더워도 아서랑 같이 자고 싶어.” 주자서가 침상에 올려진 유모를 치우며 말했다. “너는 나에게 철썩 붙어서 자잖아. 정말 너무 덥다구.”

주자서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자 온객행이 다가와 주자서의 풀어진 머리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좀 시원하지?” 주자서의 땀에 젖은 목덜미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킨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다시 내려놓고 탁자위에 있는 소반을 들었다. “그럼 오늘은… 따로 잘까?” 주자서는 손부채질을 한참 하다가 온객행을 보고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아니.” 온객행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창문 열어 놔.” 온객행은 더 묻지 않고 객실을 나갔다.


서천 한수에 도착하기 전에 낙양에서 보낸 진왕의 군대가 주자서를 데리러 왔다. 진왕의 군대는 오직 주자서만 데리고 왔던 길을 거슬러 낙양으로 향했다. 서안에 도착하기전에 초은왕의 군관은 모두 죽었다. 안 좋은 사고로 꾸몄지만 주자서는 그것이 진왕이 시킨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처신을 조심했다. 낙양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진왕에게 황위를 선양했다.

황위에 앉은 진왕은 제일 먼저 동궁의 조왕을 죽였다. 조왕 사마륜의 머리는 낙양의 동쪽 선문관에 걸렸다. 초은왕은 딱히 찬탈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가 위독했을 때 낙양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서 다시 자신의 봉지가 있는 형주의 강릉으로 돌아갔다. 서소강은 대외적으로 초은왕의 부하였으므로 낙양성에 남을 수 없어서 초은왕과 함께 형주로 내려간 뒤 사계산장으로 돌아갔다. 낙양성 안은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듯이 어수선했는데 주자서가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정리된 후였다.

진왕은 한동안 기분이 좋은지 주자서를 주택에 가둬 뒀다가 황제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남궁으로 들였다. 황제는 자신의 등극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신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주자서에게 여인이 입는 옷을 선물하며 선황을 잘 모시라고 명령했다. 주자서는 황제가 원하는 대로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식건전에서 하루 종일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남궁에 들어간 이후로 주자서는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을 황제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주자서는 선황을 부축하여 화림원을 거닐고 있다. 선황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헌아(櫶兒), 기억나니? 선황께서 우리에게 처음 수담(手談)하셨을 때 말이야.” 황제가 걸음을 빨리하여 계수나무 아래 정각으로 주자서를 이끌었다. “바로 이곳이었어. 너는 수담하는 재주가 정말 좋았는데.” 황제가 석탁 위에 난 기국(碁局)을 쓰다듬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말없이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주자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더위를 많이 탔는데, 그래 너는 백합탕을 좋아했지? 백합청양 말이다.” 주자서는 기억을 더듬어 여름에 모친께서 뭘 드셨는지 한참 생각했다. 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장마비가 내리고 나면 항상 공의에 있는 별장에 가서 물놀이를 했었다. 뭘 먹고 마셨는지 기억하기에는 너무 멀고 아득한 기억이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내관이 조용이 물러갔다. 석탁에 있는 의자에 선황을 앉히고 그 앞에 가서 앉았다. 궁녀가 옥을 깎아 만든 바둑돌을 가지고 와서 선황과 주자서 앞에 놓았다. 선황은 기분이 좋았는지 첫수를 우상귀에 두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헌아, 봐줄 필요 없다. 오늘 제대로 수담하자.” 주자서는 조금은 어색하게 바둑돌을 두어 선황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주자서는 수담에 서툴다. 어릴 때 양친께서 두시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사계산장으로 온 이후에는 일상이 바빠 바둑판구경도 힘들었다. 어렴풋한 기억을 마음으로 짐작하여 수를 두었다. 바둑돌이 기국을 반쯤 덮었을 때, 내관이 소반에 유리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내관이 소반을 내려놓자 황제는 그릇을 집어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헌아, 네가 좋아하는 백합탕이다. 향이 아주 좋구나.” 주자서는 차게 식힌 백합탕을 들고 선황을 보았다.

선황은 자기 몫의 백합탕에는 관심이 없는지 주자서에게 어서 먹어보라며 채근했다. ‘달다.’ 주자서의 기억에 없는 음식이다. 주자서가 조금 먹고 그릇을 내려놓자 선황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 “왜? 입에 맞지 않느냐?”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선황 몫의 유리그릇을 들어 건넸다. 주자서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황제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를 ‘회암’이라 부르며 발작했다. 주자서는 구중궁궐안에 갇혀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선황의 곁에 버려졌다.

밤 늦게까지 선황의 시중을 든 주자서는 선황이 침상에서 잠이 들때까지 부채질을 하다가 식건전을 나왔다. 남궁에 있는 모두가 주자서를 감시하는 중이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서가 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일이다. 처소로 돌아가는 길은 달빛도 없이 어둡기만 하다. 그가 잠잘 준비를 마치고 작게 한숨을 쉬고 옷을 벗고 있을 때 황제가 주자서의 처소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벗고 있던 옷을 다시 여미고 손을 모야 공수하며 인사했다. “황제폐하.” 황제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한동안 횡설수설했다. 혁란은 황제가 되고도 거슬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주자서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휘우듬하게 기우는 그를 부축했다. 황제가 주자서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한참동안 삼공과 장군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주자서가 반응이 없자 황제는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순종적으로 굴자 황제가 주자서의 턱을 잡아채며 말했다. “너도 내가 우습지?” 주자서가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황제가 벌떡 일어나 주자서의 앞섶을 잡았다. “사내를 안는 취미는 없지만, 너라면 나쁠 것 같지도 않군.” 주자서가 황제의 팔을 잡자 황제가 그에게 말했다. “감히 옥체에 손을 대느냐?” 주자서가 멈칫하자 황제가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렸다. 주자서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황제는 주자서를 끌고 침상으로 갔다.

침상에 팽개쳐진 주자서가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폐하!” 황제가 자신의 요대를 푸르며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주자서는 황제를 뿌리칠 능력도 기술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뿌리쳐서 잃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주자서의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읽은 진왕이 조소하며 몸을 붙여왔다. “그래, 너는 내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야지.” 주자서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꼭 감았다.

한참 황제가 주자서의 몸을 더듬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주자서의 처소의 문이 벌컥 열리며 선황이 들어왔다. 선황을 본 황제가 재빨리 자신의 앞섶을 추스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옷이 다 흐트러진 주자서를 보고 선황이 다가와 황제를 밀어냈다. “우리 헌이에게 무슨 짓이냐!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주자서는 얼른 앞섶을 추스르고 일어나 선황을 부축했다. 선황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황제에게 한참 욕을 퍼부었다. 내관과 주자서가 선황을 달래 식건전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 주자서는 식건전을 떠나지도 못했다.


온객행은 한수에 도착하고 나서 크게 앓았다. 이맘때는 항상 몸이 좋지 않았는데 사례에서의 일을 겪으면서 쌓였던 피로가 뭉쳐 터진 것이다. 시기가 좋지 못했다. 다행히 주자서는 온객행이 앓는 것을 보기 전에 낙양으로 떠났다. 이번 초여름 장마는 긴 것인지 아니면 익주에만 많은 비가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정신이 없는 사이 대서가 지났다.

무고를 찾으러 간다는 사람들은 그를 한수에 두고 성도로 떠났다. 그 때문에 길을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산세가 험해 소림사 회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길이 지연되었다. 엽백의는 작게 혀를 차고 제갈왕을 두고 갔다. 제갈왕은 곤륜산에 조경과 우달을 호송하고 막 돌아온 참이다. 온객행은 꿈을 꾸는 것 같다가도 금방 일어나 누군가를 찾았다. “아서! 아서….” 제갈왕은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라 누구인지 모르니 멀찍이 앉아 그러려니 했다. 장마가 끝나고 날이 더워지자 온객행은 정신을 차리고 주(周)공자를 찾았다. 주공자가 낙양으로 떠난 것은 벌써 이레 전의 일이다.

온객행이 이레를 걸어 서안에 도착해서야 초은왕이 형주로 돌아간 것을 알았다. 주(朱)공자는 대신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선황과 함께 황궁 식건전에 갇혔다고 한다. 황궁안에 혼자서 그 모욕을 견디고 있을 주자서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어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택(朱宅)에 갇혔을 때 왜 하루빨리 찾아가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이제 갈 수도 없는 곳에 갇힌 그를 만날 길이 없다.

온객행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구주에 흩어져 있는 황족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그는 꼭 집어 초은왕만 초대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염치 불구하고 주택에 머물고 있는 제왕을 찾아갔다. 제왕은 이번 길을 태산의 태수와 함께 왔는지 장순이 온객행을 반기며 나왔다. “온공자!” 제왕은 몰라도 장순은 온객행을 반기며 그를 주택 안으로 들였다. 제왕에게 인사하고 장순과 내실로 향했다.

장부인과 장양도 함께 왔는지 온객행이 내실로 들어서자 그를 반겼다. “온공자!” 온객행이 입은 하얀 옷을 보더니 장양이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 어디서 도라도 닦으십니까?” 온객행이 무거운 얼굴로 장순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장대인, 저는 사계산장의 제자가 아니라 장명산의 제자입니다.” 장양이 옆에서 놀라며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제자라는 말이오?” 장순이 장부인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온공자는 무슨 연유로 이 곳에…?”

온객행은 말없이 서있다가 거짓말을 했다. 검선께서 주자서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아주 중요한 것이라 꼭 직접 만나 전해야 한다고. 장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제께서 여신 연회에는 제왕께서 초대받으신 것이지만, 나와 제남의 태수는 제왕을 호위하는 목적으로 온 것이지, 황궁에는 들어갈 수 없네. 우리도 주공자를 만나고 싶어 이리 함께 왔는데 그가 황궁에 갇혀 있다니…, 대체 황제는…?” 장순이 자리에 앉아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온객행을 제왕에게 데려갔다.

제왕 사마경은 과거 서선공이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칠 때 함께 있었던 장군 중 한명이라 서선공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주자서가 궁궐에 갇힌 것을 알자 분개하며 말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이를 궁궐에 가두었단 말이냐! 사마연 그 놈은 어릴 때도 영이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더니 아직까지도!” 그리고는 온객행의 어깨를 토닥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황궁으로 갈 때 그대를 호위로 대동할 테니 혹 영이가 연회에 나오면 만나서 검선의 말씀을 전하게.”

雨霖鈴 第32

32. 玉巵無當
옥잔에 밑바닥이 없다.

주자서는 한참 전에 집안에 누군가가 들어온 기척을 눈치 챘다. 서사숙은 소림사에 태사숙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몇 일은 집에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만약 돌아오시더라도 기척을 숨기고 담을 넘어오실 필요는 없다. 주택(朱宅)에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진왕 밖에 없었다. 황제는 조왕을 죽이지 않았다. 조왕을 동궁에 가두고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진왕은 황제의 결단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종종 주자서를 찾아와 패악을 부리고 잔뜩 화풀이를 하고 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주자서는 어째서 진왕이 그를 찾아오는지 알고 그를 비웃었다. 낭야왕을 따르던 수많은 무관과 문관은 숙청되고 벌을 받았다. 하지만 조왕을 따르던 이들은 조왕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은 자도 많았다. 그들이 진왕 곁에 숨을 죽이고 들러붙어 안색을 바꾸고 알랑거리는 것이 거슬리는 것이다.

주자서는 진왕에게 주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주자서가 주영이라는 것을. 황제가 종종 그를 남궁으로 부른다는 것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고 싶은데 주영이 아니라며 발뺌을 하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으니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황제가 정신이 돌아올수록 진왕은 혹 주영에게 과분한 신분이 주어질까 싶어서 이런 저런 일로 주자서를 귀찮게 했다. 집안에 어른이 없다는 핑계로 관을 올리고 혼사를 진행하려다 황제에게 핀잔을 들었다.

어찌 진왕이 주영의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황제나 초은왕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없애려는 것이지.’ 사당에 앉아 위패를 보며, 이 곳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혁란은 그런 놈이니까.’ 주자서는 태어난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 소매를 들어 절했다. ‘소자 양친을 곧 뒤 따르겠습니다.’ 주자서가 절을 마치고 일어났는데도 뒤에 서있는 자객은 움직일 낌새가 없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자 뒤에는 주자서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하얀색의 무명옷을 입고 처음 만났을 때 보다는 조금 익숙한 온객행이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보자 온객행이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주자서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손을 뻗었다. “멈추시오.”

온객행이 자리에 멈춰서 자신에게 뻗어진 손과 주자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예의 주자서가 어려워하는 눈썹을 늘어뜨린 울상으로 그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는 기가 막혔다. ‘나를 버려 두고 갔으면서 이 치는…’ 온객행은 되려 억울하다는 얼굴로 주자서를 마주한다. 흔들린 마음을 모두 버린 줄 알았는데 온객행은 또다시 가슴깨로 와서 주자서를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 댄다.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한참 서있었다.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고 누구도 물러서지 못하는 채로 두사람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주자서는 뻗은 손을 앞섶으로 가져가 온객행이 주었던 옥패를 꺼내 들었다. 주자서가 말했다. “이것을 찾으러 오셨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들린 옥패를 한참 보고 있자 주자서가 옥패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는 가져가지 못할 것 같으니, 돌려드리겠소. 영견은…”

주자서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하’하고 헛웃음 짓고는 말했다. “영견은 그대가 가지고 가시오.” 온객행이 움직이지 않자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다가가 옥패를 내밀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내가 도망쳐 버렸어.”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옥패가 있는 주자서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평생 도망치기만 했어. 도망쳐서 그렇게 후회했는데 또 너에게서 도망쳐버렸어. 아서…아서, 미안해.”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고 온객행의 손 위에 옥패를 올려 놓고 말했다. “기한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온공자께서 제 대답을 들으시겠다면…” 온객행은 자기에게 붙어 서있는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온객행을 밀어냈다. 온객행은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주자서를 꼭 붙들고 말했다. “아서 정말 미안해. 아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아서 몫까지 더 좋아할게.” 주자서는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그렇게 온객행에게 안겨 있었다.

주자서가 밀어내는 것을 멈추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짓이 기꺼워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아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들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온공자. 이곳은 사당 안이니 무례를 멈추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사당의 신위를 한번 보고 주자서에게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주자서가 앉아 있던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아 절하고는 말했다. “서선공! 경세장공주님! 아서는 걱정 마세요. 장명산 온가 객행이 지켜 줄게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온객행을 일으켜 세우며 주자서가 당황한듯 말했다. “온객행!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멈추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속을 뿌리치고 결국 신위에 세번 절하고 예를 갖췄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서 온객행 옆에 덜퍼덕 주저 앉았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향로 옆에 있는 향에 새로 불을 붙여 꽂아 놓고 다시 포단에 앉아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정신이 빠져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신위를 보았다. 이 꼴을 하늘에서 양친이 보고 계신다고 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온객행을 밀어내고 그의 어깨에 주먹을 질렀다. 온객행이 맞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내공이 돌아온 거야?” 주자서는 바닥을 보고 고개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을 일으켜 세웠다. 신위에 절을 할 때는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꿈쩍하지 않던 온객행의 몸이 주자서에게 들러붙어 왔다.

주자서는 언제인가 바닥에 떨어진 옥패를 주워 들고 사당을 나왔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옥패를 보고 있다가 온객행의 가슴팍에 던지며 말했다. “온객행, 무엄하게 남의 집 사당에서 무슨짓이오?” 온객행이 옥패를 다시 주자서의 요대에 매어주며 말했다. “아서 순서는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육례를 마쳤으니 나는 이제 아서의 사람이야. 아서가 주(朱)씨 던 주(周)씨 던.” 계속해서 들러붙는 온객행을 밀어내며 주자서가 말했다. “그대는 아직 기러기를 받지 못했는데 육례는 무슨 육례.”

온객행이 밀어내는 주자서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주자서.”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경애(敬愛)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놀라서 온객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온객행이 말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어.” 온객행을 보고 있던 주자서의 눈썹이 축 쳐져 울상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그럼 왜 나를 두고 갔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해 아서, 두고 간 것이 아니야. 내가 도망친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같이 가기로 했잖아.”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미안해. 이제 어디 안 갈거야. 계속 아서 옆에 있을게.” 주자서는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어 버렸다. 뭔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묻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서 온객행도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않기로 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외실로 안내했다. 주택(朱宅)은 외실과 내실 사이에 작은 원림이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원림을 기준으로 외실과 내실 그리고 주방과 서재를 제외한 공간은 아직도 허름하여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외실 안으로 들어온 온객행은 방안에 걸린 대련과 편액을 보고 입을 벌렸다. 열어놓은 창호문 뒤쪽에 보이는 정원을 보고 온객행이 말했다. “우와, 아서는 이런 집에서 자란 거야?”

온객행이 외실과 내실을 연결하는 복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에 있는 연못을 보며 말했다.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에서 만든 것 같네.”(95) 주자서가 그의 곁으로 오며 말했다. “하늘이 만든 것이야. 이 곳은 원래 연못이었으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정리하지 못해 무성하게 자란 녹음(綠陰)을 보았다. 차오르는 달빛에 수풀이 푸르다. 성급한 매미가 벌써 나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사람은 난간에 서로에게 기대서 달구경을 했다. 아직 다 차지 않은 달빛이 밝고 선명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자서는 온객행을 숭산으로 보내 서소강을 찾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서소강과 온객행이 주택의 대문을 넘어 들어왔다. 온객행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진왕의 사병이 그를 막으며 서소강에게 물었다. “이 자는 누구요?” 서소강이 공손히 포권하고 말했다. “이 분은 장명산 검선의 대제자 온공자요. 상선께서 주공자의 몸을 걱정하여 친히 보내신 의원이니 예를 갖추시오.” 사병이 온객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엌에 있던 주자서가 그에게 다가오는 서소강과 온객행을 발견했다. 공손히 포권하여 서소강에게 인사했다. “사숙 잘 다녀오셨습니까?” 주자서의 인사를 받은 서소강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네가 온공자의 모과냐? 왜 다들 너를 모과라고 부르는 것이냐?” 서소강의 말에 고개를 들은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덮어둔 찬을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바구니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부군, 부엌일은 소첩을 시키세요.” 온객행의 말에 목을 축이며 숨을 돌리던 서소강이 물을 뿜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멀리 밀어내며 얼굴을 붉혔다. 서소강이 물었다. “부군?”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손에서 조리도구를 빼앗으며 말했다. “시숙께서도 들어가 계세요.”

서소강이 얼빠진 얼굴로 본인을 가리키며 온객행에게 되물었다. “시숙(媤叔)?” 온객행은 구리 솥에 지어진 밥을 그릇에 담아 소반 위에 올려 놓았다.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온객행의 소매를 보고 있던 주자서가 어디서 끈을 가져와 그의 어깨에 둘러 매어주며 말했다. “맞는 옷이 있는지 모르겠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서소강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서야, 너 언제 소실을 들였냐?” 온객행이 울상이 되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아서… 나는 소실이야?” 음식을 소반에 담아 외실로 가면서 주자서가 말했다. “또 헛소리.” 온객행이 주자서와 어깨를 붙이며 말했다. “나는 정실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 속의 진흙이에요.”(75)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을 무시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두사람을 따라가던 서소강이 뒤쳐진 온객행과 발을 맞추며 물었다. “온공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것을 멈추고 서소강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시숙, 말씀 편히 하세요.” 서소강은 온객행을 위아래로 보며 다시 물었다. “우리 자서에게 장가들 셈이오?” 온객행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서에게 시집을 갈 셈이에요.” 온객행이 ‘히히히’웃으며 주자서의 뒤를 따라 외실로 들어갔다.

서소강은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찬을 올려 놓는 온객행을 보며 밥을 먹었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사숙이 온객행을 낙양으로 보낼 때 안색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제 온객행의 모과가 되어버린 주자서는 온객행이 살갑게 구는 것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고 있어서 서소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사숙께서 무고의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무언가 생각 났다는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품속에서 주목으로 만든 요패를 꺼냈다. 서소강이 관심을 보이자 온객행이 그에게 자세히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우리 예단이에요. 주목으로 만든 것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붉어 진다 합니다.”

서소강이 무늬를 보더니 코웃음 치며 말했다. “시집온다더니 어찌 기러기를 주셨소?” 서소강의 말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요패를 채 가며 말했다. “기러기라니요?” 서소강이 남은 밥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다시 들며 말했다. “거기 푸른색으로 쓰여 있지 않느냐, 자서 너는 아직도 전서(篆書)를 읽는 것이 서툴구나.” 주자서가 손에 들고 있던 요패를 다시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요대에 요패를 달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그렇게 비싼 것 아니야. 아서가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잖아. 마음에 든 것이 아니야?” 온객행이 허리춤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속을 물리치며 말했다. “노온, 밥상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온객행이 주목 요패를 기어코 주자서의 허리춤에 달아주고는 젓가락을 들어 찬을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무슨 짓? 허튼 짓?” 그리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밥을 먹었다.

서소강이 밥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다시 말했다. “태사숙께서 무고의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어디 두었느냐?” 주자서가 다 먹은 그릇을 소반으로 옮겨 담으며 말했다. “돌려주었습니다.” 서소강이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품속에서 옥패를 꺼냈다. 서소강이 달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내밀자 온객행이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온객행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의 손에서 옥패를 빼앗아 서소강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무고로 가십니까?” 서소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반을 들고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옥패가 놓여있던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서소강에게 말했다. “대인, 노야도 가시오?” 서소강은 온객행이 묻는 노야가 누굴까 생각하다 말했다. “무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선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언제 출발하시오?” 서소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도 무고로 가실 참이오?” 온객행이 대답없이 물끄러미 서소강을 보았다. 서소강은 외실을 나가며 말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파도 있고, 낙양에서 성도까지는 길이 머니 사람이 모이는 대로 출발하신다 하였소.” 서소강은 온객행의 대답을 듣지 않고 외실을 나갔다. 외실에 앉아 있는 온객행은 마음이 복잡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고 서소강은 외실과 내실 사당에 불을 밝혔고 주자서는 내원에서 무공을 연습했다. 온객행은 내실로 들어가는 복도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가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엷은 구름에 싸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51)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의 보법을 봐주기 위해 사당에서 나와 다가오던 서소강이 ‘하’하고 헛웃음 쳤다.

주자서는 호흡이 흐트러지더니 얼마 안가 자기 다리에 걸려 풀썩 쓰러졌다. 서소강이 혀를 차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온공자, 방해할 속셈이면 먼저 들어가 쉬시오.”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다가가 팔과 다리를 툭툭 치며 자세를 고쳐주었다.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소강은 주자서에게 들어가 쉬라며 외실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찍으며 난간에 기댔다.

온객행이 품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다 작게 난 상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아서! 이게 뭐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영견을 빼앗아 얼굴을 닦고 몸을 돌려 내실로 향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뒤를 따르며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대체 그 상처는 뭐야? 어떻게 하다가 다친 거야?” 주자서가 대답없이 대야에 얼굴을 씻고 잘 준비를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누가 그랬어? 어서 얘기해 내가 갚아 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의 웃는 얼굴이 좋아서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누가 그랬어! 어서 말해! 내가 가서 혼쭐내주게.” 주자서가 대야의 물을 내원에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았다. 주자서가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자 그는 실실 웃으면서 관수했다. 온객행이 얼굴을 씻는 것을 보던 주자서가 옷을 벗어 걸어 놓고 침상에 가서 앉아 신발을 벗었다. 침상 위로 올라가 이불을 펴자 온객행이 얼른 옷을 벗어 걸어 놓고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침상에 몸을 누이자 온객행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서, 누가 그랬어?”

주자서가 이불 안으로 들어오는 온객행을 쏘아보자 온객행이 몸을 물리며 말했다. “아이, 아서 나는 평상에서 자기 싫단 말이야.”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그대가 침상에서 주무시게. 내가 평상으로 가겠네.” 일어난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온객행이 말했다. “아이요! 아서, 내가 꼭 아서랑 같이 자고 싶다고 말해야겠어?”

주자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본 온객행이 신발을 벗고 침상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서, 우리가 한 침상을 나눈 것이 벌써 몇 번인데 매번 이렇게 수줍어 할 거야?” 침상을 벗어나려는 주자서의 허리를 꼭 안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아서, 정말 누가 그랬어? 많이 아팠어?” 주자서가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멈추고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치우며 울상으로 말했다. “누가 우리 아서의 잘생긴 이마에 흉을 만들어 놓았냐는 말이야.”(8) 온객행이 속상하다는 듯이 입을 앞으로 내밀자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어.” 주자서의 말에 당황한 온객행이 다시 물었다. “많이 아팠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앞섶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응. 많이 아팠어.” 온객행은 기대오는 주자서를 꼭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주자서가 아무 말이 없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초은왕은 강호의 일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숭산에서 사람을 모아 무고를 확인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초은왕이 보낸 군대와 진왕이 소림사 앞에 떡하고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본 주지가 혀를 차며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를 쏘아보았다.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틀어 막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골라 모으고 있었는데 그것이 황궁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남궁하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주지는 염주를 굴리며 낮게 읊조렸다.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도 멀다.”(25) 주지가 하는 말을 들은 엽백의가 턱짓으로 주구전을 가리켰다. 주지가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 주대인께서 진왕전하와 안면이 있으시니…” 주구전이 ‘쯧’하고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저라고 방법이 있겠습니까?” 주지가 깊게 한숨을 쉬고 진왕을 향해 웃어 보이며 다가갔다.

엽백의가 주구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점을 쳐보니 바라는 바가 커서 곤궁한 내가 줄 것이 없구나.”(45) 주구전이 말했다. “독이든 나무는 필시 그 열매에도 독이 있으니까요.” 엽백의가 주구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왕을 보며 물었다. “온가의 모과가 그리 귀한 신분이냐?”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왕과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이니 그 은택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저도 모르지요.”(93)

주지가 두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눈치를 주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진왕에게 인사했다. 주구전이 인사하는 것을 본 엽백의도 손을 모아 포권하며 인사했다. 진왕은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그들에게 인사했으나 이상하게도 예를 거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주구전은 진왕의 초조함을 읽고 속으로 빈정거리며 그를 비웃었다.

삼백상단이 벌여 놓은 일은 기주 청하의 낭야왕까지 닿아 있었기 때문에 하남의 양주와 형주를 포함해 제남상단이 있는 하북의 연주, 기주, 청주의 문파들도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왔다. 주지는 서신에서 참여할 수 있는 각 문파의 인원을 두 명으로 정했는데, 크고 작은 문파가 모두 모이자 그 인원은 거의 백명에 가까웠다. 그들이 숭산으로 다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려 하지가 지나고 소서가 되어서야 모두 모였다.

우기가 시작된 사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뀌었다. 주지는 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숭숭한 숭산을 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봉을 방문하여 개방 방주를 설득했던 여희가 그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무고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엽백의였고, 무고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악양파의 고숭, 단양파의 육태충, 경호파의 장옥삼과 고산파의 심신도 참여했다. 익주 성도에서 청성곡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산세가 깊고 오랫동안 사람이 왕래하지 않아 길이 없어진 곳이 많았다.

엽백의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청성곡에 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고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이번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허상을 쫓다 죽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엽백의는 공동산과 아미산에 서신을 보내 무고의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아미파의 자순사태와 공동파의 장문 당청진은 오랫동안 첨예하게 대립했던 마교의 교주와 만나 이 일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다. 사사로운 문파간의 원한과 이념은 잠시 묻어두고 산사람은 살아야 하겠다는 그들의 뜻을 마교가 받아들인 것은 황족의 권력싸움으로 황폐해진 것이 비단 중원의 정파뿐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발하기로 한날 주구전은 거의 두 달 만에 주자서와 재회했다. 주자서는 진왕이 타고 있는 마차에서 내려 비가 내려 질퍽한 진흙길을 달려 주구전을 만났다. 그가 입고 있는 하늘하늘한 연한 옥색의 비단 장포가 비에 젖었다. 주구전은 주자서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귀하신 주(朱)공자께서 어찌 이곳에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주자서의 눈썹이 축 늘어지더니 눈동자가 금방 반질반질해졌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주공자께서 왜 이 험한 길에 옥체를 상하게 하십니까?”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와 팔을 만지며 말했다. “그동안 옥체는 보중하셨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눈물을 찍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셔서 어찌 합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흐르지 않은 주자서의 눈물을 훔쳤다. 진왕은 마차안에서 주구전과 재회하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팔을 들어 그를 불렀다. 한참 주구전의 손을 붙들고 있던 주자서가 힘겹게 손을 놓고 다시 진왕이 탄 마차로 와서 앉았다.

진왕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직아, 아직 몸이 좋지 않은데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 주자서는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고개를 숙였다. 진왕이 하인을 시켜 온객행을 불러왔다. 온객행은 마차 안으로 들어와 진왕에게 인사했다. “진왕전하.” 그리고 비를 맞은 주자서를 보고 자신의 젖지 않은 소매로 그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주(朱)공자, 비를 맞으셨습니까? 아직도 열이 남아 있는데….” 온객행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맥을 짚었다.

불필요하게 오랫동안 주자서의 손목을 만지작대던 온객행이 진왕에게 말했다. “아직 기혈의 흐름이 불안정하여 여도(旅途)에 드는 것이 상태를 악화시킬까 저어 됩니다.” 진왕이 ‘흠’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직아, 네가 주(周)대인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이번 길에 너를 초대한 것인데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겠느냐?”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진왕전하.”

진왕이 온객행과 주자서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너를 위해 따로 마차를 준비했으니, 내가 부르면 바로 오도록 하라.” 그리고 진왕의 마차에서 내린 주자서는 진왕의 눈치를 보며 진왕이 타고 있는 마차 바로 뒤에 있는 작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주자서는 마차 안에 앉자마자 휘장을 걷어 뒤쪽에 걷고 있는 주구전을 보았다. 몸을 쭉 빼는 주자서의 허리를 붙잡은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아직 밖에 비가 오는데 몸이 젖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속을 물리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비를 맞으며 걸으시는데 내가 어찌 마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마차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서가 주대인을 스승님으로 부르면 주대인만 곤란해져.” 온객행의 말에 얌전히 마차에 탄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난 아직도 네가 온전하게 행동하면 어색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젖은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부군, 풍한이라도 들까 걱정입니다. 어서 젖은 장포를 벗어요.” 주자서는 자연스럽게 온객행의 시중을 받아 젖은 장포를 벗으며 말했다. “멀쩡한 것이 오래가지는 않네.”

진흙이 잔뜩 튄 신발을 본 온객행이 주자서의 발을 잡고 말했다. “아서! 신발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 갑자기 발이 잡아당겨진 주자서가 휘우듬하게 몸이 기울며 말했다. “비가 와서 질척질척한 땅을 밟아서 그래.” 온객행이 주자서의 신발을 벗겨 진흙을 털며 말했다. “아서, 이게 얼마짜리 신발인 줄 알아?”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렇게 좋은 거면 너 신어. 나는 원래 신던 신발이 더 좋아.”

온객행이 비단신의 진흙을 다 털어내고 다시 주자서의 발에 신겨주며 말했다. “진왕이 내가 이 신을 신은 것을 보면 바로 목을 치려고 들걸?”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다른 신발도 챙겼지?”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군의 행장을 살피는 것도 소첩의 일이지요.” 주자서는 휘장 밖에 내리는 비를 보다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부군이 계시면 소첩에게 어찌 잠 못 드는 밤이 있겠습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노온. 장난 그만하고 확실하게 말해. 정말 괜찮은 거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정말이야 아서, 아서만 옆에 있으면 나는 괜찮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노온.” 온객행이 답했다. “나는 괜찮아, 아서.”

(95) 계성 원야 園冶
雖由人作 宛自天開.
비록 사람이 만들되 하늘에서 만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雨霖鈴 第31

31. 天知地知汝知我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

주자서는 제(濟)왕의 손에 이끌려 하남태수와 영천태수에게 인사했다. 제왕이 자신을 당질이라 부르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술을 마시는 것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제왕이 따른 술잔을 받고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 예를 표한 뒤에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보았던 온객행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귀족들이 거북하다고 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고도 했다. 같이 도망가자고도 했다.

그가 도망가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고민했던가? 처음에 그가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 주자서는 그가 피곤해서 먼저 객실로 돌아간 줄 알았다.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난 온객행에게 제왕이 책을 잡을까 봐 먼저 저가 보냈노라고 제왕에게 고했다. 제왕과 태수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술을 많이 마셨다. 덕분에 주자서도 많이 마셔야 했다.

군자산의 독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자서의 마음의 병은 생각보다 더 깊은 것인지도 몰랐다. 주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객실로 돌아왔다. 객실 안에도 온객행이 없었다. 주자서는 작게 ‘노온, 노온.’ 하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자서는 관수도 하지 않은 채로 침상에 몸을 뉘였다. 팔을 뻗어 이불을 들췄다. ‘노온, 어디 갔어?’ 이불 속에 몸을 말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온객행에게 함께 도망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름은 희란(曦蘭)형님을 해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찾고 싶었다. 그저 희란형님을 해친 자들이 벌을 받으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처벌받는지, 누가 처벌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주자서가 버린 이름은 지나치게 무거워 주자서가 감당할 수 없다.

주자서는 오경이 끝났음을 알리는 보사의 외침에 눈을 떴다. 부스스 일어난 주자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수룩한 새벽빛에 어두운 방안은 어젯밤 주자서가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주자서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요대에 달려있는 옥패로 손이 갔다. 밤새 몸에 꼭 붙어 있던 옥패는 따뜻했다.

밖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옥패를 잡고 있던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수하고 몸 가짐을 바르게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여 묶고 요대를 풀어 장포를 정리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장순은 감청색 옷을 준비해 주었다. 감청색은 모친께서 가장 좋아하던 색이다. 아니면 부친께서 좋아하셔서 모친께서 자주 입으셨던 것일까? 주자서는 희미한 기억 사이를 헤집다 그냥 놓아버렸다. 면경에 비추는 저 얼굴이 양친을 닮았구나. 하지만 주자서의 기억에는 없다. 주자서를 마주보며 슬프게 웃었던 부친의 얼굴과 마지막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다부진 모친의 얼굴만 어렴풋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객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온객행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밤새 그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자서는 객실에서 내려가 객잔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도 물었다. 그들은 온객행이 성밖 동군 막사로 나갔다고 했다. 주자서는 그가 장순이나 진영을 만나러 갔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행군을 시작하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개봉성을 떠나면서 주자서는 동군의 진영 부대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도 온객행은 없었다. 주자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진영이 말했다. “자서야, 서소강에게 서신을 받았는데 그들이 벌써 이천에 도착했다는 구나. 제왕전하는 정주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선문관으로 정행(征行)하실 것이다.” 주자서가 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서야 너는 제왕전하와 함께 가거라. 아무래도 온공자는 서소강에게 간 것 같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보았던 침착한 모습은 꾸며낸 것인지 주자서의 행동이 어색하다. 장순이 물이 들은 가죽부대를 주자서에게 건네 물을 마시게 했다. 주자서는 물을 조금 마시더니 금방 얼굴을 꾸며내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제왕은 온객행이 사라졌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자서는 또 그게 달갑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제왕이 시키는 대로했다.

주자서는 제왕과 함께 말을 타고 선문관으로 향했다. 말을 바꿔가며 달려 하루만에 도착한 선문관에는 회남왕 사마윤(司馬允)이 먼저 도착해 이미 공격을 시작한 후였다. 정주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 중이었으나 그렇다고 낙양의 낭야왕을 돕지는 않았다. 낙양 동쪽의 선문관에서 제왕 사마경과 회남왕 사마윤이, 그리고 남쪽의 이궐관에서 초은왕 사마위(司馬瑋)와 예장왕 사마치(司馬熾)가 낙양을 공격했다.

해가 지기 전에 초은왕과 예장왕이 낙양성 안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봉지인 청하로 도주하려다 실패한 낭야왕을 선문관에 있던 제왕과 회남왕이 사로잡았다. 낭야왕을 호송하여 낙양성으로 들어가자 예장왕이 제왕과 회남왕을 반겼다. “경치(景治)! 흠도(欽度)! 오랜만이네.” 제왕과 회남왕은 예장왕의 환대에 웃으며 남궁 안으로 들어갔다.

예장왕이 제왕과 회남왕을 뒤따르는 주자서를 눈치채고 물었다. “경치, 저 아이는 누구인가?” 제왕이 뒤따라 들어오던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겨 예장왕 앞에 세우며 말했다. “풍도(馮度), 기억나지 않는가? 회암의 아들 주영일세.” 제왕의 말에 예장왕이 주자서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올려 공수하며 인사하려고 했다.

예장왕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영이라고? 주희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리고는 주자서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당황한 주자서는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헤매다가 예장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예장왕은 주자서의 턱을 놓아주며 말했다. “주희의 아들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어찌 몰랐던 것이야?”

회남왕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경세장공주께서는 항상 좋은 묘수를 두셨으니, 아들을 죽게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예장왕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우리 중에 헌이를 이겨본 사람이 있기는 한가? 하하하.”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외재당숙이 하는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이 중에 주자서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주자서의 양친을 기억하고 있다. 부친이 옥에서 돌아가셨을 때, 모친이 저택에 감금되어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들이 숭덕전 안으로 들어가자 숭덕전 안에 황제와 함께 있던 초은왕이 그들을 맞이했다. 주자서는 예장왕과 제왕, 회남왕의 뒤에 서서 또 다시 외숙을 알현했다. 평락원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황제의 옆에는 진왕과 조왕이 그의 시중을 들며 왕후들에게 인사했다. 뒤이어 군관이 낭야왕 사마운과 문성왕 사마헌을 데리고 들어왔다. 기세를 잃은 낭야왕은 지쳐 보였으나 그의 눈은 아주 매서웠다.

사마운이 말했다. “사마유(司馬攸)! 네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되느냐?” 낭야왕의 말에 초은왕이 내관을 시켜 숭덕전 안에 있는 내관과 군관을 모두 밖으로 내쫓았다. 내관과 군관이 나가는 동안에도 낭야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히 장자인 나를 두고 네가 어찌 황제가 된다는 말이냐?”

낭야왕의 옆에 앉아 있던 문성왕이 주자서를 보고는 벌벌 떨며 말했다. “서국공, 서국공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낭야왕이 시킨 일이에요!” 그러더니 황제를 보고 말했다. “자도형님, 어서 말해보세요 서국공을 죽이라고 한 것은 형님이지 않습니까?!” 문성왕의 말에 숭덕전이 조용해졌다. 제왕이 놀라 황제를 보며 말했다. “폐하?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회암을 해치다니요?”

황제가 진왕의 부축을 물리며 문성왕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암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명망도 높았지 나는 그를 내쫓으려고 했다. 그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야.” 그리고는 문성왕 옆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황제를 보고 있던 낭야왕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부마 하나를 내쫓지 못하는 너 따위가 천자라니! 선황께서 내리신 교지는 어디 있느냐! 네 놈이 숨긴 것이지?” 황제는 대답없이 주저 앉아 울기만 했다. 진왕이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달랬다.

제왕은 주자서의 곁으로 와 그의 손을 잡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초은왕이 낭야왕에게 말했다. “자이(子彛)형님!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신겁니까?” 낭야왕이 말했다. “언도(彦度)야! 너는 듣지 못했느냐? 선황이 승하하시기 전에 나를 낙양으로 부르셨다! 그가 어째서 장자인 나를 천자 삼지 않았다는 말이냐!”

낭야왕과 황제는 동복 형제였다. 낭야왕은 황태후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선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낳은 아들이었다. 낭야왕이 다시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황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네 놈은 너의 아들이 모두 너의 소생인 것 같으냐?” 낭야왕의 말에 왕후들의 시선이 진왕으로 향했다.

황후의 부정으로 의심을 샀던 것이 진왕이었기 때문이다. 낭야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 옆에 조용히 서있는 조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륜이는 내 아들이다.” 예장왕이 성큼성큼 걸어 숭덕전을 나갔다. 황제의 훌쩍이는 소리와 낭야왕의 웃음소리가 섞여 그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했다.

예장왕은 숭덕전으로 황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황후 왕씨는 낭야왕과 부정을 저질렀는가?” 황후는 대답없이 황제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예장왕이 그녀에게 다가가 다그치며 말했다. “륜이가 자이의 아들이오?” 예장왕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황후는 고개를 땅에 대고 절하며 말했다. “황후로써 부덕을 저질렀으니 벌을 주십시오. 폐하.” 예장왕이 답답하다는 듯 조왕에게 물었다. “너는 자이의 아들이냐?”

조왕이 황제 앞으로 와서 무릎 꿇으며 말했다. “부황,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에게 부친은 부황뿐입니다. 저는 낭야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낭야왕이 조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바로 어제까지 너는 내게 천자의 자리를 권하며 부친이라 부르더니 그새 부친이 늘었느냐?” 그리고 주변에 있는 왕후를 보며 말했다. “자, 저기 흠도에게도 부친이라 불러 보거라! 아니다 언도에게, 아니 풍도에게 어서 아비라 불러 보거라!” 낭야왕은 조왕을 흔들며 웃었다.

황제는 엎드려 있는 황후를 일으키며 물었다. “황후, 륜이는 내 아들입니까? 란이는 내 아들이 에요?” 황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 천자의 핏줄입니다. 모두 폐하의 자식입니다.” 황제는 황후의 팔을 밀치고 낭야왕의 멱살을 잡으며 울먹였다. “네놈이 감히 황후를 욕보였느냐!” 낭야왕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탈력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자 진왕과 조왕이 황제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였다.

예장왕이 조왕에게 말했다. “강호에서 사술을 빌려 기왕을 독살한게 사마륜 너냐?” 조왕은 고개를 흔들며 진왕을 보았다. 진왕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숙!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강호와는 물론 병권을 가진 자와도 가까이 한적 없는데 제가 어찌 기왕을 해치겠습니까?” 초은왕이 말했다. “풍도형님, 제가 강호에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진왕이 아니라 조왕이 맞습니다. 양주의 삼백상단과 낙양의 초무관이라는 기루에서 작당한 것입니다.”

황제가 조왕을 보며 말했다. “너! 사마륜!” 초은왕이 말했다. “폐하, 걱정마세요. 강호의 일은 소림사에 부탁해 놓았으니 정리가 되면 제가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초은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왕이 휘청하는 황제를 부축하였다.

조용히 있던 회남왕이 사람을 시켜 제왕의 붉은 활을 가져와 낭야왕과 문성왕 앞에 두었다. “역도 사마륜과 사마헌은 들어라. 권력으로 약자를 능멸하고, 백성을 해쳤으며, 거짓말로 사람을 현혹하고, 황명에 불복하여 친족을 시해하려 모의하였으며, 정령을 위반하고 내란을 일으켜 패륜을 저질렀다. 이는 구벌지법에 해당하니 왕호를 거두고 효시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하겠다.”(92)

그리고 황후에게 가서 말했다. “황후 왕씨는 내조를 어지럽히고 부덕을 저질렀음으로 그 지위를 미인으로 강등하고 천자의 자식을 낳은 것을 인정하여 냉궁에 유폐한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그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예장왕이 그들을 따라 나가며 낭야왕의 형을 집행하려고 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서령이 예장왕을 말렸다. 날이 너무 늦어 길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오경이 지나면 바로 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예장왕은 친히 낭야왕과 문성왕을 대리(大理)로 호송하였고, 내관이 황후를 데리고 냉궁으로 향했다.

회남왕이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폐하 조왕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조왕은 황제의 무릎에 매달려 애원했다. “부황! 제게 아버지는 부황뿐입니다. 소자를 용서해주십시오. 부황! 부황!” 황제는 조왕을 걷어차고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진왕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내 아들이 아니다. 기왕은 어디에 있느냐! 어서 기왕을 데려와라! 영아(潁兒)! 영아!” 황제가 숭덕전을 안을 휘저으며 이미 세상에 없는 기왕을 찾았다.

기왕을 찾던 황제의 눈에 주자서가 들어왔다. 황제는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헌아… 우리 헌이가 왔구나. 오래비는 네가 정말 많이 그리웠다.” 주자서는 황제가 버거워 그만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주저 앉은 주자서의 허리에 달린 옥패를 본 황제가 그 옥패를 쥐어 채며 말했다. “이것은 무고의 열쇠가 아니냐? 이것을 왜 헌이 네가…?” 그리고 주자서의 얼굴을 한번 더 보더니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회암! 네놈이 돌아왔구나! 거짓말을 한 것은 너다! 내게 아무것도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어긴 것은 너란 말이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요패를 잡아당겼다.

주자서의 요대가 끊어지면서 요패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고 주자서의 차림새가 흐트러졌다. 주자서는 얼른 몸을 뒤집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황제는 한참 씩씩대며 주자서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손에 든 옥패를 주자서에게 던졌다. 옥패를 맞은 주자서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났다. 황제는 주자서의 이마에 난 피를 보고 발작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황제를 진왕이 부축하여 옥좌에 눕혔다.

회남왕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자 제왕이 말했다. “조왕 사마륜, 너 역시 구벌지법을 피할 수 없다.” 조왕은 바닥에 엎드려 황제에게 빌었다. “부황! 잘못했습니다. 부황, 제발…제발! 흑흑” 회남왕이 그를 데리고 숭덕전을 나갔다. 제왕이 엎어져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영아, 너는 죄가 없으니 일어나거라.”

초은왕이 황제가 던진 옥패를 주워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이 무고의 열쇠냐?” 주자서는 앞섶을 움켜쥔 손으로 옥패를 받아 손에 쥐고 있다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왕이 주자서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말했다. “어서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피가 멎지 않는구나.” 초은왕이 주자서의 어깨를 감싸 그를 데리고 숭덕전 밖으로 나갔다. 초은왕은 남궁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머물고 있던 낙양의 객잔으로 데려갔다.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소강은 초은왕이 주자서를 데리고 와서 놀랐다.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자서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초은왕은 주자서를 자신의 당질로 소개하며 그를 치료하라고 명령했다. 작게 한숨을 쉰 서소강이 약상자를 들고 주자서가 쉬고 있는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자서는 침상위에 몸을 작게 말고 있었다. 서소강은 주자서가 울고 있는 줄 알고 작게 소리를 내며 약상자를 놓았다.

주자서는 얼굴을 들어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서소강을 보자 주자서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서소강은 주자서의 울상을 보고 허탈하여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서야, 어찌 주가(朱家)가 되었느냐?” 서소강은 약상자를 열고 깨끗한 천을 가지고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를 마주 보았다. 주자서는 서소강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서소강이 다정하게 “자서야.” 라고 부르며 이마에 난 상처에 천을 가져다 대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사숙.”

서소강이 주자서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자서야, 자서가 우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주자서는 서소강이 이마의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가루와 연고를 발라 치료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훌쩍이며 눈물만 흘렸다. 서소강이 주자서의 피를 닦아낸 천들을 정리하고 탁상으로 가서 앉자 주자서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앞섶이 다 흘러내린 채로 서소강이 있는 곳으로 와서 앉으며 말했다. “사숙, 양주로 돌아 갈래요. 양주로 가요.”

서소강이 주자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은 좀 그렇구나.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 태사숙께서 오시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며 다시 엉엉 울었다. “사숙 저는 양주로 가고 싶어요. 저는 주자서란 말이 에요.” 그리고는 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서소강은 마음이 착잡하여 주자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래, 그래.’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서소강은 초은왕이 주자서를 당질이라고 소개한 순간 주자서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주자서는 주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자서는 한참 울다가 소매로 얼굴을 닦고 서소강을 보고 말했다. “얼마나… 얼마나 주영이 되어야 합니까?” 서소강은 과연 장문후계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주자서를 다독였다. “태사숙이 지금 소림사에 계시니, 내가 가서 태사숙을 만나보고 어떻게 할지 너에게 알려주마. 그동안은 초은왕께서 시키는대로 하고 있거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소강에게 물었다. “사숙께서는 왜 여기 계십니까?” 서소강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나의 형님이 형주 강릉에 현령의 양자로 간 것을 너는 모르고 있지? 초은왕의 봉지가 그곳에 있단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소강이 물었다. “남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낭야왕과 문성왕이 효수될 것이라는 것과 황후가 유폐된 일, 그리고 머뭇거리며 서선공을 해친 것은 황제였다는 것까지. 서소강이 말했다. “폐하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조금 더 오래 낙양에 머무르게 될지 모르겠구나. 자서야.” 주자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소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 벌어진 장포와 중의를 벗기고 내의만 입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눕혔다. “태사숙과 내가 데리러 올 테니 그동안 보중하고 있거라.” 그리고 약상자를 정리해 나가려다 다시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이불을 덮고 누운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자 서소강이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냈다.

주자서가 호리병을 받자 서소강이 말했다. “군자산을 먹었다고 들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이것을 먹으면 내공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를 툭 치고 방을 나갔다. 서소강이 나간지 얼마 안되어 오경이 끝났다는 보사의 외침이 들렸다. 다음날 예장왕이 갑자기 객잔으로 쳐들어와 초은왕과 주자서를 데리고 남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서소강은 낙양으로 찾아온 주구전과 만나게 되었다.


주자서는 예장왕 제왕 초은왕 회남왕이 모인 숭덕전 연회에 앉아 있었다. 밤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자서의 거취는 이미 정해진 듯했다. 진왕이 관리하고 있던 과거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재산이 다시 주영의 것이 되었고, 주영은 10년전 진회장의 품에 안겨 떠났던 서국공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주택(朱宅)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이곳 저곳 많이 낡고 바랬다. 주영은 모친이 목을 매달았다는 대문의 들보를 보았다.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하다. 그는 홀로 집안을 둘러보다 사당으로 갔다. 사당은 주영이 기억하는 대로 주(朱)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는 아직 없다.

주자서는 진왕에게 받은 돈으로 제일 먼저 양친의 위패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사당을 청소했다. 그리고 낙릉 형림으로 서신을 보냈다. 양친의 위패를 제외한 주가의 위패는 다시 낙릉으로 보낼 생각이다. 아마 그 곳에도 이미 있겠지만 사당에 모셔진 신위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렇게 했다. 그리고 주자서는 하인을 들이지 않고 스스로 저택을 청소했다. 먼지를 터는 것부터 바닥을 닦는 것까지 모두 주자서 혼자 했다. 그가 외실의 청소를 마쳤을 때 대문에 누군가 기별했다. 나가보니 진왕이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주자서가 몸에 붙은 먼지를 떼며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진왕 전하.” 진왕은 주자서의 더러운 몰골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큼’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직아! 언제까지 진왕 전하라 부를 참이냐? 혁란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대문을 넘어 들어와 외실로 갔다. 조금씩 정리되는 집안을 보고 진왕이 작게 혀를 차며 외실안으로 들어가 하인이 들고 들어온 선물을 늘어 놓았다. 귀중한 서책이며, 비단옷 그리고 검이 있었다.

진왕은 검을 들어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서선공의 검을 잊지 않았겠지?” 주자서는 얼떨떨하게 검을 받아 들고 서서 진왕이 자리에 앉아 차를 찾는 것을 보았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검을 한참 보다가 옆에 내려놓고 손을 모아 진왕에게 말했다. “전하, 아직 집안이 정리되지 않아 대접할 만한 차가 없습니다.” 진왕이 ‘하하하’하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올해 딴 동정 벽라춘이 있으니 너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 그리고는 사람 좋게 ‘하하하’하고 웃었다. 진왕이 가져온 것들은 모두 원래 주영의 것이다.

진왕의 속셈을 눈치챈 주자서가 진왕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우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저는 잠시 이름을 빌리는 것이니 예를 거두어 주세요.” 진왕이 웃음을 멈추고 주자서를 싸늘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 말은 너는 정녕 주영(朱嬴)이 아니라는 말이냐?” 주자서가 소매너머로 진왕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양주 회계의 주(周)가 자서는 진왕 전하께 거짓을 고한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던 진왕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 좋다. 아주 좋아.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나갔다. 하인이 외실로 들고 들어온 것이 전부가 아닌지 마당에 진왕이 가져온 함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주자서는 진왕이 저택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소매를 들어 그가 가는 길에 인사했다.

주자서가 주가의 저택을 청소하는 동안 예장왕과 회남왕은 양주로 돌아갔고, 제왕은 동군과 함께 각각 연주와 청주로 돌아갔다. 태산태수 장순은 곧 장부인과 함께 낙양으로 나들이를 올 것이라며 꼭 어디 가지 말고 낙양에 있으라고 한참 주자서를 붙들고 사정한 뒤에 야 회군하는 행렬에 합류했다. 황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조정의 일을 초은왕과 진사왕이 각각 나누어 조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초은왕은 아직 관을 올리지 않은 주자서를 도와주라는 핑계로 서소강을 주가의 저택으로 보냈고, 진왕은 주자서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호위라는 이름의 군병을 주가 저택 주변에 배치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서소강과 커다란 저택에서 둘이 지냈다. 진왕의 호위 때문에 주택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입하가 지나고 소만이 지날 때까지 주자서는 태사숙을 만날 수 없었다.

오늘도 사계산장에서 하던 대로 묽은 죽에 나물로 끼니를 때우던 주자서가 서소강에게 물었다. “태사숙께서는 아직도 소림사에 계십니까?” 서소강이 나물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강호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구나. 청성곡의 일로 아직도 시끄럽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청성곡이요?” 서소강이 말했다. “그래 서선공께서 무고를 찾으셨다는 곳이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무고라니요? 무고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서소강이 입에 넣은 음식을 다 씹고 말했다. “그래. 검선께서 아무것도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시는데도 믿지들 않는구나. 게다가 무고의 열쇠는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주자서가 앞섶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무고의 열쇠요…?” 서소강이 다시 찬을 집으며 말했다. “그래. 부친께 뭐 들은 것이 있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의 기색이 이상해진 것을 눈치챈 서소강이 물었다. “무고의 열쇠에 대해 아는 것이 있구나?” 주자서가 앞섶에 손을 넣어 온객행이 준 옥패를 꺼내 들었다. 주자서 손에 든 옥패를 보고 있던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옥패를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말했다. “옥패가 아니냐? 이 귀한 것이 어디에서 났느냐?”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제자께서 주셨습니다.” 서소강이 옥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검선의 제자라면 온공자냐 제갈공자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서소강을 보며 말했다. “제갈공자?” 서소강이 다시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 “제갈공자가 준 것이냐?” 주자서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온공자께서 주셨습니다.” 서소강이 찬을 집어먹으며 ‘흠’했다.

주자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옥패가 무고의 열쇠인 것 같습니다.” 서소강이 옥패를 한번 더 힐끔 보고 다시 밥을 먹으며 말했다. “비어 있는 제단이라 하던데 뭐 좋은 것이 있다고 그것을 열려고 하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심드렁한 서소강의 반응에 주자서가 다시 앞섶에 옥패를 집어넣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자서야 너 많이 자란 것 같구나. 이제 내공은 돌아왔느냐?” 주자서가 대답없이 밥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사숙께서 네가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시니 사당에 인사를 올린 후에 보법을 좀 보자.” 주자서가 공손히 대답했다. “네. 사숙.”


온객행은 강호의 사람들에게 기가 막히고 실증이 나는 참이다. 검선은 물론 곤륜산의 대사와 아미파, 공동파의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무고는 명교의 제단이며 안이 비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무고의 문을 열 것을 종용했다. 온객행도 당장 청성곡으로 돌아가 무고의 문을 열고 싶었으나 무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자서에게 있다. 게다가 주사서는 진왕이 촘촘하게 호위를 세워 둔 저택에 갇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만날 수도 없었다.

각 문파에서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 무고를 둘러볼 것을 요청했고 소림사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강호는 무고의 열쇠를 찾겠다고 매우 시끄러웠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날 수 없어 답답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하고 있으면 어찌 하나? 싫어 져서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끄러워 도망친 것인데…’ 주자서와 약속했던 시간은 보름을 지나 벌써 망과 삭이 두번이나 지났다. 날은 점점 더 무더워졌고 길어졌다.

온객행은 무고의 열쇠를 찾는다는 핑계로 낙양에 주자서가 있는 주택 주변을 맴돌았다. 담을 넘어 그를 만나러 갈까 수도 없이 생각했지만 혹시나 그가 원하지 않을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온객행은 장에서 분주를 사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주(朱)공자가 관을 올리고 귀비 유씨의 질녀와 혼인한다는 소문 들었소?”

차를 마시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귀비 유씨의 질녀라면 정안군을 말하는 것인가?” 먼저 말을 꺼낸 사내가 말했다. “그래! 지금은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인데, 정안군과 혼인하고 관을 올리면 곧 천거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겠군.” 그러자 그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 말을 거들었다. “주공자라면 경세장공주님의 아드님이시니 격에 맞추려면 상서는 하셔야겠군.”

그러자 노인 앞에 앉아 있던 낭자가 말했다. “주공자는 매일 서책을 읽는다 하던데, 그도 과거를 준비하는 것일까요? 서선공께서는 매우 공명정대하신 분이셨으니 아드님도 천거로 벼슬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실거에요.” 낭자의 말에 말을 얹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그들의 대화 내용 중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주자서가 혼인한다는 내용만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온객행은 술을 따르고 있던 호리병도 챙기지 않고 바로 주가의 저택으로 갔다. 이 곳을 배회한지 오래 된 온객행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저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지 두번째 방문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은 몇 번째 방문인지 온객행은 세는 것을 잊었다.

날이 어두워 질때까지 기다렸다가 뒷골목에 보초를 서는 군관이 교대할 때를 틈타 담을 넘었다. 저택 안은 고요했는데 날이 어두워도 불을 밝힌 곳이 많지 않았다. 제일 밝은 곳으로 가보니, 사당이었다. 사당 안 포단에 무릎 꿇고 앉은 주자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온객행은 한참동안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사당 밖에 서서 주자서가 신위에 절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둘만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