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25

25. 黃河千年一淸
황하가 천년에 한번쯤 맑아질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이 주구전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객잔을 나가는 주자서가 보였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떠나는 줄 알고 그를 붙잡기 위해 따라갔다. 주자서는 무슨 생각인지 개봉성이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길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잠자리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굳게 닫힌 개봉성의 문을 보고 걸음을 멈춘 주자서는 한참 문 위에 ‘남문’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을 보았다. 온객행은 최대한 기척없이 주자서의 옆에 가서 섰다.

온객행이 물었다. “아서…주자서는 아서의 이름이 아니야?”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작게 코웃음친 주자서가 말했다. “누구나 버린 이름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온객행은 그대의 이름이 맞는가?” 온객행이라… 온객행은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더라… 장공이 읊었던 시가 절절 해서 그랬던가? ‘동산에 숨어사는 이조차 괴롭히니, 멀어지는 나무처럼 나그네 떠나가고 (遠樹帶行客; 원수대행객) 외로운 어느 곳에는 석양이 비추리라.’(78) 아니면 신세가 나그네 같아 그랬던가?

온객행은 이전에 어떤 이름이었는지 잊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부르셨더라… 아버지께서 뭐라고 부르셨던 것 같은데…’ 그가 가졌던 옛날의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람은 이제 없다. 온객행이 말했다. “어찌 버린 이름인데 다시 찾으려 하시오.” 주자서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잊은 이름인데, 그 이름을 찾으려 하는가? 이 미련한 사람아.’ 온객행은 주자서의 곡절을 모두 알지 못해도 이름을 버리는 과정이 즐겁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자신의 이름이 잊혀지는 과정 역시 순탄치 못했으므로.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덜 마른 옷을 입고 있으니 손이 차다. “아서, 오늘은 비를 많이 맞았으니까 푹 쉬어야 해.” 그리고 주자서를 객잔으로 끌고 갔다. 주자서의 방에 들어가 그가 옷을 벗는 것을 돕고 침상위에 누워 이불을 덮은 것까지 본 후에 온객행은 주저하며 주자서의 방을 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구전의 말을 듣지 않고 이름을 찾겠다고 하면 그를 도와줄 생각이다. 주자서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도 온객행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온객행은 주자서의 방으로 갔다. 주자서는 비를 맞아 피곤했는지 자고 있었다. 괜히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온객행은 주구전의 방으로 가서 아침 인사를 했다. 주구전은 온객행을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자서가 아직도 자는 모양이지?” 온객행을 뜨끔하여 주구전과 함께 객실을 나와 아래에 있는 주루로 갔다.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아침을 주문한 온객행은 주구전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주대인, 아서의 이름은 찾으면 안되는 것입니까?” 주구전은 온객행의 말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공연히 크기만 하여 스스로 부숴버린 것을 어찌 다시 찾는다는 말입니까?”(79) 온객행이 비워진 주구전의 찻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선생은 참으로 큰 것을 쓰는 데 졸렬하시오.”(79) 주구전이 온객행의 말에 크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일어나기 전에 주구전을 떠서 주자서가 찾으려고 하는 이름이 무엇인지 떠보려고 했다. 이 노인네가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쉽게 알려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공연히 크다 하시면, 혹 사마씨요?” 주구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온공자. 아직도 자서가 마음에 드시오? 나는 아서를 장명산으로 시집 보낼 마음이 없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시조부, 잊으셨습니까? 제가 사계산장으로 시집가는 것이에요.” 주구전이 양손을 뻗어 흔들며 말했다. “어찌 사계산장으로 시집을 오신다는 말입니까? 양주 회계로 가셔야지요.” 온객행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다음 웃는 얼굴로 주구전을 빤히 보았다. 주구전의 두꺼운 낯짝이 당황이 물드는 것을 본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졌다.

온객행은 별 말 아닌 흰소리를 하는 것처럼 공의와 정주에서 보았던 낭야왕의 군대 이야기도 했다. 야숙을 하며 고생한 이야기에 끼워 넣으니 딱히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주구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낙양에 황후와 낭야왕이 있고,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막을 만한 세력을 가진 이는 남쪽에 있는 양주 건업에 회남왕 사마윤, 양주 예장왕 사마치, 형주 강릉에 초은왕 사마위 정도이다. 그들은 아직 도성의 상황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온객행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위나라는 비어 있습니까?”(76) 주구전은 처음에 알아듣지 못한 듯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위나라가 그러하면 조나라는 어디이고 제나라는 어디인가?” 온객행은 ‘휴’하고 한숨을 쉰 뒤에 주구전에게 말했다. “지금 위의 도성이 비었으니 이제부터 제나라와 조나라를 찾아야지요.” 주구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자서가 내려올 때까지 둘은 간단히 요기하고 앉아서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해가 중천이 다 되어서야 주자서가 객실에서 나왔다. 어젯밤에 또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다. 주구전에게 다가가 인사한 주자서가 온객행의 옆자리에 앉았다. 주구전은 점원을 불러 주자서가 요기할 음식을 주문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붉은 눈가가 애처로워서 영견에 물을 적셔 눈가를 쓸어 주었다. 주자서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온객행의 손속을 뿌리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애가 탄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뚝에 들러붙으며 말했다. “아서 왜 그래? 눈이 다 부었잖아. 어젯밤에 잘 잤어?” 다정한 온객행의 목소리에도 주자서는 답이 없다. 주자서가 대충 요기를 하고 세사람은 객잔을 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일과 낙양에 일어난 일을 한꺼번에 생각하느라 머리속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이 사건에 태산파를 어떻게 엮어야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지 생각했다.


소림사에 머물고 있는 조경은 마음이 급하다. 도성으로 낭야왕이 군대를 데리고 들어왔다. 황제는 감금되었고, 아마도 조경이 맹진과 맹주에 숨겨놓은 물자들을 마음대로 가져다 썼을 것이다. 낭야왕과 거래하는 일에 대해 아는 자는 조경이 부리는 자중에 많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독갈에게 독살을 성공한 뒤에 치러야 하는 대금도 아직 다 지불하지 못했는데 숭산에 갇혀 있는 동안 사마운 그 놈이 조경의 돈으로 생색을 내는 중이다. 조왕은 어째서 그런 치를 가까이 두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조왕이 순조롭게 황위에 앉으면 그 다음에 무고의 열쇠를 찾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왕이 벼슬을 준다 하면 조경은 삼백상단을 정리하고 그렇게 할 요량이었다. 진왕과 낭야왕이 끼어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궁세가의 가주는 이미 양주로 돌아갔는데 어째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숭산에 묶어 두는지 주지의 저의가 너절하다. 황실의 태보는 이미 돌아갔고 이곳에 그들이 남아 있는 것은 다 그 장명산 검선이라는 놈 때문이다. ‘그와 청성곡에 연이 있었던가?’ 조경은 수하를 시켜 채미공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미 도성을 빠져나간 것 같으니 다른 사람 손에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조경의 생각과는 달리 채미공자는 이미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엽백의가 그를 찾았을 때 채미공자는 이미 크게 부상을 입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상처를 보니 강호의 것은 아니었다. 엽백의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가?” 채미공자는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여성이었다. 짙은 색의 장포를 입고 윤건을 썼다. 키가 크고 늘씬하여 갓 벼슬에 오른 젊은 공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엽백의의 말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누구의 노예인 적이 없소! 나는 그 누구의 노예로 죽지 않을 것이오.” 엽백의가 쓰러져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어지러이 찢긴 경맥은 그녀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했다. 엽백의는 그녀를 가엾이 여겨 그녀의 몸을 바로 한 뒤에 물었다. “그대의 독이 청성곡에 닿았는가?”

그녀는 울컥 피를 토해 내더니 가는 숨을 몰아 쉬었다. 엽백의는 그녀가 피에 질식하지 않게 앉힌 다음 등을 쓸어 주며 말했다. “사막에서 난 채미충은 그 독이 아주 위험하다 들었네. 그대의 독이 청성곡에 닿았는가?” 그녀는 엽백의의 얼굴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 들어보지 못했소? 모르는 것이 가장 좋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 병이라는 것을.”(80) 그리고 또 피를 울컥 쏟아 내더니 엽백의에게 몸을 기댔다.

엽백의가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말했다. “내게 말해주면, 그대가 원하는 것 한가지를 들어 주겠소.” 생명이 꺼져가는 눈동자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엽백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연이…우리 연이를 찾아 주시오. 천륜을 끊고… 하고 싶은 일을…” 그녀는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엽백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또 연이인가.’ 엽백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녀는 온몸에서 숨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엽백의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마도 그 연이라는 아이가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일 테니. 엽백의는 이미 숨을 거둔 채미공자를 안고 해가 다 질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알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허무했다. 엽백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디였는지, 그것이 왜 궁금했는지.

지평선 너머로 황혼을 넘어 그에게 다가오는 이가 있다. 소녀는 엽백의가 안고 있는 시신위에 작은 몸을 다 덮고 서럽게 울었다. 엽백의는 실로 오랜만에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사위가 캄캄하게 변할 때까지 엽백의와 소녀는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핑계삼아 채미공자의 시신을 안고 울었다. 둘 다 죽은 사람이 그리워서 울었다.


객잔에서 나온 주구전은 개봉성 앞에 들어선 좌판에서 헌 옷을 사서 주자서와 온객행을 갈아 입히고는 말했다. “주자서. 신중히 하도록 해라.(77) 우리는 진왕의 사람이다.”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온객행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주구전은 소림사로 향했고, 주자서는 가고자 했던 태산으로 향했다.

주구전은 헤어지면서 최대한 마을과 관도는 피하고 신변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일렀다. 온객행을 보면서도 함부로 장명산 검선의 이름을 꺼내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주자서는 소림사로 향하는 주구전에게 공손히 절하고 주구전은 그런 주자서에게 한참 잔소리를 한 뒤에 날이 어둑어둑 해진 뒤에 출발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면 단연 밤에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와 으슥한 숲길을 걸으며 물었다. “아서, 우린 태산에 왜 가는거야?” 주자서는 축 쳐져서 대꾸도 하지 않고 걸었다. 답답해진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걸자 그 팔을 뿌리치며 주자서가 말했다. “태산 태수를 만나고 낙릉으로 갈거요.”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 곁에 몸을 붙이고 서서는 물었다. “낙릉? 낙릉에는 왜?”

낙릉은 제(濟)왕 사마경의 봉지인 청주 제남과 냥야왕의 봉지인 기주 청하와 아주 가까웠다. 만약 제(濟)왕이 낭야왕의 출정을 모른다면 비어 있는 청하를 공격해 낙양을 구할 수도 있다.(76) 하지만 낭야왕이 황제를 가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시해하여 스스로 즉위하려 든다면 낭야왕의 봉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는 다른 황족과 달리 그의 식솔을 아끼는 자일까?

주자서가 답했다. “전할 것이 있소.” 짙은 색의 낡은 호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주자서는 머리를 내린 것보다 어려 보였다. 헤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희다. 온객행은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고 대신 그의 손을 잡아채 맥을 짚어 보았다. 소림사에서 개봉까지 오며 고생한 것 때문이지 공자산의 독성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의 내공은 희미하게 바닥에 깔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된 온객행이 말했다. “안되겠어, 오늘 부터라도 운기조식을 하도록 해.”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탁’하고 뿌리친 뒤에 길을 갔다. 온객행은 우는 소리를 하며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아서, 아파. 많이 아프다구.” 주자서는 온객행이 그러거나 말거나 길을 갔다.

제등 없이 이제 막 차오르는 희미한 달빛에 밤길을 가려고 하다 보니 주자서는 종종 발을 헛디뎠다. 온객행은 그럴 때마다 주자서를 놀리며 그의 허리를 잡아 챘다. 온객행의 손속을 뿌리치려고 하다가 숲길에서 얽혀 구른 후로는 주자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온객행의 도움을 받았다. 주자서의 허리춤을 더듬거리다 손에 옥패가 걸린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주자서의 허리를 꼭 안고 경공으로 훌쩍 황하 근처까지 왔다.

정주에서 태산까지 흐르는 황하는 물길이 자주 바뀌어 그 주변이 거칠고 쓸쓸했다. 몇 년 전에도 봄에 큰 홍수가 나서 주변 일대가 범람해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올해는 봄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강물이 많이 말라 있었다. 그래도 또 언제 갑자기 물이 불어날지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은 황하 근처에 집을 짓지 않았다.

황하를 따라 걸으면서 온객행은 생각했다. 만약 주자서가 제(濟)왕을 떠보러 가는 것이라면 태호파를 도운 태산파를 주물러서 그들에게 알아 낼 수 있는 정보를 캐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태산파의 오래자는 개방과 오래된 악연이 있고, 개방은 낭야왕에게 무언가를 약속 받고 그를 돕고 있다.

삼백상단과 제남상단의 물건이 함께 있던 것으로 봐서 아마 그 지역에 있는 세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낭야왕은 사병을 늘린 것 같았다. 예주와 서주는 옛날부터 비옥한 농토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각 주의 자사와 마음을 먹고 둔전을 했다면 그 병력은 지금 낙양성에 있는 병사가 전부가 아닐 것이다.

곡식을 심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낙양성을 지키는 군대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제(濟)왕을 떠서 청하를 치게 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고작 강호인의 말을 듣고 황족인 사마경이 사병을 움직여 줄까?


강의 지평선이 어스름이 밝아 온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인 것을 알고 있다. 점점 느려지는 발걸음이 그랬고 그의 거친 숨결이 결정적이다. 온객행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서! 나는 힘들어서 더 못 가겠어!” 주자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일출이 시작된 지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서 벌써 해가 뜰 만큼 오래 걸었는데 쉬었다가 가자.” 주자서 역시 걷고 있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쉬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주변에 높게 자란 갈대를 꺾어 바닥에 깔았다. 해가 들면 햇빛을 가릴 만한 작은 관목 옆에 자리를 잡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손짓하며 불렀다. “아서! 이리 와서 같이 쉬자.”

온객행이 만들어 놓은 자리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별말 없이 온객행 옆에 와 앉고는 봇짐을 풀었다. 봇짐 안에는 주구전이 챙겨서 넣어준 쑥떡과 호리병이 있었다. 온객행은 호리병에 들은 것이 물인 것을 알고는 아쉽다며 한참 불평을 했고 주자서는 정말 많이 지쳤었는지 떡을 먹으면서도 눈이 감겼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해가 뜰때까지 서너 시진을 가끔 쉬면서 걸었으니 피곤할 만하다. 그래도 그가 그렇게 오래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것은 그의 무공실력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가늠케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손에 든 떡을 내려놓고, 주자서가 앉아 있는 몸 뒤에 팔을 넣어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주자서는 저항없이 스르르 온객행에게 기댔다. 온객행은 만족한 얼굴로 일출을 감상하며 방금 전 주자서 손에 들려 있었던 떡을 먹었다. 온객행은 평소에 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 먹는 이 쑥떡은 아주 맛이 좋았다.

온객행은 잠깐 잠이 들었다 깼는데 그 사이 언제 누웠는지 주자서는 온객행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몸 뒤에 넣었던 팔은 주자서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날이 밝아 햇빛이 따뜻하다. 하지만 두사람이 앉은 자리는 관목에 가려져 햇빛이 주자서의 얼굴에는 닿지 않았다. 팔을 괴고 자고 있는 주자서를 구경하고 있는데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멀지는 않으나 갈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던 온객행이 몸을 굳혔다.

온객행이 몸을 일으켜 앉자 주자서도 정신이 들었는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젊은 남녀로, 찰싹 붙어서 서로를 희롱했다. 온객행이 두사람이 이곳에 온 의도를 눈치채고 비몽사몽한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어나 앉으려던 주자서의 얼굴이 온객행의 가슴에 폭삭 부딪혔다. 주자서는 고단한지 따뜻한 온객행의 가슴을 베개삼아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온객행과 주자서를 발견한 남녀는 잠깐 놀란 듯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추슬러 안으며 말했다. “노한 파도가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치니, 구름이 일어나고 그 소리가 철썩 철썩.”(81) 그리고는 가슴깨에 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주자서가 잠든 것을 알지 못하는 남녀는 빤히 온객행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온객행의 얼굴이 주자서의 얼굴로 향하자 찬물을 맞은 것처럼 ‘하’ 하고 숨을 들이켜고는 갈대를 헤치고 사라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뺨에 얼굴을 붙인 채로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의 웃는 소리에 잠이 깬 주자서는 자신이 온객행의 품에 얼굴이 잡힌 채 안겨 있는 것이 의아하여 온객행을 밀어냈다. “뭐가 그리 즐거운가.” 잔뜩 잠긴 주자서의 목소리에 또 한참 ‘하하하’하고 웃은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이 곳은 남녀가 서로 몸을 섞어 찌는 곳인가 봐. 하하하”(82)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표정을 구긴 주자서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온객행도 조금 더 소리 내서 웃은 다음에 주자서의 봇짐을 들고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있는 것을 보니 대낮일 것이다. 두사람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길을 태산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황하의 강변을 따라 걷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해를 가려 줄 그늘이 없어 뒤통수가 뜨겁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주자서도 온객행과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아 양쪽 뺨이 빨갛게 익어서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맺혀 있었다. 열심히 소매로 얼굴을 찍으며 걷고 있는 주자서의 기세가 대단하여 온객행은 감히 멈추자는 소리를 못했다.

열심히 걸어 사례 하남지역을 넘어 연주에 들어섰다. 연주에 들어서자 종종 마주쳤던 부대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낭야왕이 원하는 만큼의 숫자가 모두 낙양성에 모였다는 말이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니 낭야왕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황족들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주구전이 챙겨준 음식과 물은 동이 난지 오래 되어 온객행은 주자서와 함께 근처에 있는 작은 촌락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사람이 농사를 짓는 농민으로 여러 사람이 논에 실을 묶어 놓고 모를 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정리가 되어가는지 몇몇 사람은 논에서 나와 신발을 신으며 술을 마셨다. 온객행이 그들에게 다가가 공손히 말하자 농민들은 경계하는 기색 없이 주자서와 온객행을 집으로 초대했다.

추레한 두사람의 행색에 떠도는 난민인 줄 알았는지 그들은 퍽 살갑게 그들을 대접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동생으로 소개했고 그들은 농민들의 선의로 하룻밤을 묶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아서’라고 부르며 동생을 곰살 맞게 챙기는 온객행을 주자서는 별 말없이 하자는 대로 따랐고 온객행은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싹싹한 그의 행동에 온객행은 술까지 얻어 마셨다.

둘이 머무르기로 한 낡은 방에는 침상이 하나 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둘은 한 침상에 몸을 뉘였다. 주자서는 꽤나 익숙해졌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어버린 주자서가 야속하기도 하고 사랑스러워서 몸을 완전히 돌려 누워 주자서의 몸을 껴안았다.

주자서는 불편한듯 인상을 쓰며 뒤척이더니 온객행의 체온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먹은 군자산에 혹시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내력을 회복하는 일이 오래 걸리는 것인가 걱정되었다. 독을 먹은 것이 이레가 다 되어 가는데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주구전을 만났을 때 어떤 독인지 물어봤어야 한다고 후회하면서 온객행도 수마에 빠졌다.

(78) 왕유 送綦毋潛落第還鄕 과거에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무잠을 전송하며
遂令東山客 不得顧採薇. 旣至金門遠 孰云吾道非.
동산에 숨어사는 이조차도 고사리 캐며 살지 못하게 하였구나
장안에 온 뒤 금마문(金馬門)은 멀어졌지만누가 우리 길을 그르다 할 것인가
遠樹帶行客 孤城當落暉. 吾謀適不用 勿謂知音稀.
멀어지는 나무들 나그네 데려가고 외로운 어느 성엔 석양이 비추리라.
우리 계획이 어쩌다 쓰이지 못했을 뿐 지음(知音)이 적다고는 말하지 말게나.

(79) 장자 내편 1 소요유
非不呺然 大也 吾爲其無用 而掊之
공연히 크기는 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장자가 말하였다. 선생은 참으로 큰 것을 쓰는 데 졸렬하다.

(80) 노자 도덕경 71장 知不知上 不知知病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앎의 부족함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

(81) 송옥 고당부 회왕과 신녀가 고당관에 올라 사랑을 나눈 이야기.
奔扬踊而相击兮 云兴声之霈霈. 猛兽惊而跳骇兮 妄奔走而驰迈.
물결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치니, 구름처럼 일어나고 그 소리가 철썩철썩합니다. 맹수가 소리를 듣고 놀라서, 멋대로 내달리며 멀리 도망을 갑니다.

(82) 춘추좌씨전 위나라 선공(宣空)과 서모 이강(夷姜)의 이야기; 손윗사람과 간음하는 것을 蒸(찔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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