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28

28. 彼一時此一時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엽백의가 소림사로 돌아와 온객행을 찾았다. 지객당 안을 뒤졌지만 주구전의 종손과 온객행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엽백의는 혀를 차며 속으로 주구전의 종손이 온가 놈에게 단단히 홀렸다고 생각했다. 엽백의가 데려온 소년은 기세가 얼마나 매몰차고 날카로운지 자꾸 도망을 가려고 하기에 자운당 안에 있는 기둥에 매어 놓았다. 어찌나 독한 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도 않았으나 그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주지가 걱정이 되어 몇 번이고 엽백의에게 다른 곳에 가둬 둘 것을 청했지만 엽백의는 듣지 않았다. 저 상태라면 저 놈은 스스로를 해 할 수도 있다.

주지에게 도성의 상황에 대해 듣고 남아있는 문파들의 거취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주지는 사계산장에서 받은 서신을 보여주며 양주 임천의 예장왕 사마치와 형주 강릉에 초은왕 사마위가 도성으로 출정 중이라는 소식이다. 엽백의는 사계산장 놈들이 참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엽백의는 사례가 쑥대밭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날 저녁 설법을 마친 후 지주와 회주, 아미사태와 곤륜산에서 온 용진대사가 대웅보전에 남아있었다. 엽백의는 용진대사(勇進大師)를 보고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장명산의 엽백의 용진대사를 뵙습니다.” 용진대사는 엽백의에게 웃으며 예를 거두라고 했다. 그는 벌써 5번의 윤회를 거친 라마이다. 엽백의는 그가 왜 이 먼 중원까지 노쇠한 몸을 이끌고 홀로 방문했는지 궁금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자순사태가 라마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그가 이곳까지 온 것은 최근 천마교의 분파인 ‘독갈’이라는 세력이 토번과 충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남에 본거지가 있는 독갈이 그 먼 서북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들과 맞춰 보니 채미공자는 마교(魔敎) 내부에서의 입지가 높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중원 출신의 교주를 두지 않는 마교 입장에서 세가 점점 커지는 채미공자는 안중정(眼中釘)이었을 것이다. 엽백의가 채미공자가 관의 손에 죽었다고 말하자 그가 죽은 줄 몰랐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아무래도 채미공자는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던 것 같다.

법주 몇과 개방의 장로가 대웅보전으로 들어왔다. 개방 장로들은 엽백의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공손히 인사했다. 개방 장로가 눈치 없이 먼저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옆에 서있던 법주 혜고(惠顧)가 그를 말렸다. 주지가 제일 상석에 용진대사를 모시고, 그 아래에 엽백의와 자순사태가 앉았다. 회주와 법주는 그 양 옆으로 늘어서 앉으며 개방 장로들은 대웅전 중앙에 앉았다. 주지가 입을 열었다. “개방 장로들께서는 지금 개봉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여장과 해백은 서로 얼굴을 보고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엽백의는 ‘흥’하고 코웃음 쳤다. 주지는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낭야왕께 무엇을 약속 받으신 것입니까?” 여장과 해백은 크게 놀라며 갑자기 넙죽 엎드렸다. 엽백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물의 물은 강의 물을 침범하지 않는 법인데.”(3) 여장이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저희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방주가 낭야왕에게 무엇을 약속 받고 그리 움직이는 것인지는 정말 알지 못합니다.”

엽백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질 줄 알았느냐! 어서 사실을 고하라!” 여장과 해백은 서로를 한참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연주 동에 땅을 받기로 했습니다! 개방의 본거지는 본래 기주로 북쪽인데 그곳은 선비족과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 세가 클 수 없어 중원에 본거지가 필요하여 그리 했습니다.” 엽백의가 웃으며 말했다. “빌어먹으며 떠도는 것들이 본거지가 왜 필요하다는 말이냐?”

주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고행을 한다 한들, 어리석음에서 오는 번뇌를 어찌 할까.”(86) 앉아 있던 사태와 대사도 염주를 굴리며 낮게 불경을 읊조렸다. 엽백의가 말했다.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하거늘, 어찌 이리 어리석어!” 관은 가만히 앉아서 개방이 세를 불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개방이 기주에서 선비족과 계속 다투지 않으면 선비족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낭야왕은 개방에게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없었다.

엽백의는 혀를 차며 어떻게 개방 안에 이렇게 쉬이 보이는 수마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 한탄했다. “그대들은 개방의 형제들을 사지로 내 몰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엽백의가 말을 마치자 여장과 해백은 고개를 들고 엽백의에게 애원했다.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방주에게 뜻이 있어 그리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개방의 방주라는 놈은 퍽이나 권력에 욕심이 있는 놈인 모양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개방형제들 사이는 언제나 돈독하였는데 장기말처럼 쓰고 버리다니 이것은 강호의 도가 아니다.

엽백의는 개방과 다른 문파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여장과 해백은 엽백의가 묻는 것에 술술 대답했다. 개방은 처음부터 낭야왕의 일에 깊게 관여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정말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 했을 뿐이다. 오랜 전란으로 그 숫자가 늘어난 개방은 그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가업이 없고 친척도 친구도 받아주지 않아 먹고 살 방법이 없거나, 너무 늙거나 어려서, 병이 들거나 장애가 있어서 어디 소속되지 못하고 떠돌다 모인 오합지졸을 무슨 수로 통제하고 지휘한다는 말인가? ‘이번에 방주자리에 앉은 놈은 거지가 될 팔자가 아니었던 건가?’

엽백의는 남궁세가와의 관계도 물었다. 개방은 남궁세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남궁세가는 그 정보를 황산은장을 통해 낭야왕에게 전하는 것 같다고 했다. 엽백의는 황산은장에서 취급하는 정보가 진왕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명원에서 확인했다. 남궁세가가 완전히 동떨어진 또다른 세력을 지지하고 있다면 당장 시급한 일은 아니다. “그대는 무고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없소?” 여장과 해백은 고개를 들어 놀란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허술한 그들의 반응에 엽백의는 ‘흥’하고 코웃음 치고 말았다. 낭야왕 역시 무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온객행이 말한 그 무고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단 말인가? 무고 안은 이미 비어 있는 것을. 개방 장로들은 덜덜 떨면서 부정하거나 혹은 잘못을 빌었다. 개방의 일이 밖으로 세어 나가서는 안된다. 엽백의는 주지를 시켜 주변을 떠도는 거지들을 모두 잡아오라고 시켰다. 주지는 밖으로 나가면서 도감을 불러 개방 장로들을 계율원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엽백의는 대웅보전 밖에 있는 승려에게 부탁해 자운당에 묶어 놓은 소년을 데려왔다. 소년은 많이 지쳤는지 승려들이 그의 팔을 놓자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엽백의가 다시 자리에 앉자 자순사태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독갈이라는 마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소?” 소년은 기운이 없어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했으면서 자순사태를 노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순 사태가 말을 이었다. “그 세력이 사람들을 미약에 중독시켜 사람들을 해치고 악을 일삼는 것을 아시오?”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눈만 부라렸다. 엽백의가 작게 혀를 차자 소년이 엽백의를 보고 말했다. “모친께서 남기신 말이 무엇이오?” 엽백의는 자신이 마시고 있던 차를 소년에게 가져가 마시게 하며 말했다. “묻는데 대답을 잘 하면 알려줄 것이다.” 소년은 엽백의가 주는 찻물을 허겁지겁 마시고는 엽백의를 보았다.

소년의 눈빛을 보고 착잡해진 엽백의가 말했다. “내가 너를 속여서 어찌 하겠느냐? 자순사태와 용진대사 앞에서 내가 맹세하마.” 소년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인과 노인의 정체를 몰랐는지 엽백의의 말에 그들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자순사태가 다시 물었다. “그대 청성곡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아시오?” 소년은 자순사태의 말에 웃었다. 그가 갑자기 미친듯이 웃자 자순사태는 당황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한숨을 작게 쉬고 말했다. “네게 성을 물려주지 않은 아비가 태호파의 조경이 아니냐?” 힘없이 웃고 있던 소년의 웃음이 멈추고 다시 날카로운 시선이 엽백의에게 꽂혔다. “그자가 무고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무고라는 말에 자순사태와 용진사태가 조용히 서장어로 대화했다. 그들은 무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엽백의는 다시 소년을 어르며 말했다. “그는 악독한 짓을 많이 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라.”

소년은 엽백의의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모친이 아니었으면…, 내가 아니었으면 조경 따위는….” 엽백의가 답답하여 소년을 재촉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채미공자가 조경을 도왔다는 말이냐?” 소년은 채미공자의 이름이 나오자 금방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자순사태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무고가 아닙니다. 그곳은 천마교의 전신인 명교의 제단입니다.”

엽백의가 자순사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 그곳에는 사람의 백골과 파사어, 서장어로 쓰인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을 뿐입니다.” 용진대사가 물었다. “상선께서는 그곳에 가 보신적이 있습니까?” 엽백의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 “조경이 가져온 용독술의 두루마리를 모친과 제가 해독했습니다.” 용진대사가 물었다. “명교의 용독술을 해독했다는 말이오?” 소년이 말을 이었다. “그렇소. 하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함께 쓰인 두루마리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용진대사와 자순사태가 다시 조용히 서장어로 대화했다.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는 것인지 소년이 불쑥 말했다. “그렇소,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사람들을 속여 실험했소.” 자순사태와 용진대사는 경악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청성곡의 일 역시 그대들의 소행이오?”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분명히 사용해선 안된다고 하였소! 당시 두루마리를 막 발견해서 읽어 보았을 뿐이었소 그런데… 그런데….” 엽백의가 대충 상황이 짐작되어 말했다. “누군가가 그대와 그대의 모친을 강요하였군.” 소년의 얼굴이 무너지더니 엉엉 울었다. 엽백의는 소년의 어깨를 감싸 토닥여 주었다. 소년은 엽백의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울음을 그친 소년은 기력이 쇠하여 곧 실신하였다. 엽백의는 그를 바닥에 눕히고 자순사태와 용진대사를 보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소년을 보고 있다가 곧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숨을 쉬었다. 자순사태와 용진대사는 독갈의 수장인 채미공자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숭산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실신한 소년의 거취를 두고 한참 고민했다.

엽백의가 말했다.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다가 이 아이가 원하면 곤륜산으로 보내겠습니다.” 엽백의의 말에 용진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죄의 고통은 수레가 바퀴 자국을 따르는 것과 같으니….”(87) 자순사태가 말했다. “복호사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순태사와 용진대사는 다음날 말도 없이 훌쩍 소림사를 떠났다. 엽백의는 고루 지붕위에 서서 멀어져가는 아미파와 고승을 바라보았다. ‘다투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휘저을 것이 없는 아라한에게 생사는 없다.’(35) 서로 닦는 도가 달라도 그 방향은 같다. 무궁한 도의 길에 항상 홀로 인 것 같던 엽백의의 마음이 가벼웠다.

소년은 며칠을 앓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 엽백의는 무심하게 소년을 간병하며 도성의 동태를 살폈다.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야 엽백의가 장명산 검선인줄 알았다. 당황한 소년의 얼굴을 보고 엽백의는 ‘하하하’ 웃었다. 소년은 엽백의에게 모친의 일을 궁금해하면서도 눈치를 보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치도 볼 줄 아는 놈이었구나?” 엽백의의 말에 소년이 쏘아보았다.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으니 앞으로 너를 못난이라 부르겠다.” 소년이 빽 소리 질렀다. “싫소! 내가 왜 못난이오!”

그 기세가 아주 죽은 것은 아니라 엽백의는 속으로 안심하였다. “지난 일을 얼마나 많이 아파하였는가, 하지만 세상은 그대로 찬 강물을 베고 있네.”(88) 소년이 엽백의를 보았다. “너는 제갈씨니, 이름으로 왕(往)은 어떠 한가?”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엽백의는 ‘허허허’ 웃었다. 먼저 간 친우가 이렇게 다른 연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도 같다.


침상에서 천천히 일어난 온객행과 주자서는 조용히 아침을 준비했다. 주자서가 먼저 관수하고 온객행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주자서는 그새 시중이 익숙해졌는지 온객행이 몸을 이리저리 더듬어 대도 가만히 있었다. 장포를 걸치고 요대를 매고 온객행이 준 옥패를 달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단 옥패를 한참 쓰다듬다가 놓아주었다. 곧 하인들이 주자서와 온객행을 아침식사가 준비된 외실로 불렀다.

주자서는 외실로 가는 길에 온객행에게 말했다. “노온,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게.” 온객행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대도 일단 사계산장의 제자로 되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네.” 가깝게 다가와 속삭이는 주자서가 귀여워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부군이 원하시는데 소첩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노온, 나는 곧 떠날 생각이네.” 온객행이 아쉬운 듯 주자서를 놔주고 말했다. “어디로?” 주자서가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조부께 돌아가야지. 어디 다른 곳 갈 곳이 있는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낙릉에 가보고 싶지 않아?”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외실로 향했다. 온객행이 그를 ‘아서’라고 부르며 따라갔다. 그들은 외실로 가는 길에 장양을 만났다. 온객행이 포권하여 인사하자 장양도 두사람에게 기침하셨냐며 살갑게 인사했다. 온객행은 오늘도 비단옷이 아닌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자서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외실에 들어서자 장순을 포함하여 세사람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은 만약 주자서가 조금 살찌고 늙었다면 저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온객행이 인사하는 것도 잊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당황해하자 주자서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온객행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사계산장 제자 온객행 인사드립니다.”

장순이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이쪽은 낙릉의 주가문(朱家門)의 가주 주회(朱徊), 그리고 이쪽은 소가주 원중(元仲)입니다.” 아들은 외척 했는지 주자서를 닮지 않았는데 주회는 주자서의 아버지라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이미 인사를 마친 주자서는 그들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온객행만 당황하여 멀뚱히 서있자 장양이 그를 식탁으로 밀어 앉히며 옆에 앉았다. “온공자, 시장하지 않습니까? 어제 저녁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온객행은 자리에 앉고서도 주자서와 주회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주자서가 조용히 “노온.” 하고 부르자 온객행은 주회에게 붙어 있던 시선을 어렵게 옮겨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고개를 흔들자 온객행은 미련이 남아 주회를 힐끔 보고 고개를 숙였다.

아침으로는 담백한 죽과 나물이 찬으로 올라왔다. 장순은 정성스럽게 죽을 떠서 손님들에게 먼저 올리고, 장양에게도 죽그릇을 떠준 뒤에 자신의 죽그릇을 떴다. 조용히 시작된 아침식사는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는데 어젯밤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하는 온객행과 장양은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해보고자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온객행은 주로 아침 식사로 나온 음식에 대한 칭찬이었고, 장양은 아직 주자서가 태안을 둘러보지 못했으니 오늘 함께 태안을 둘러보는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조용히 죽을 먹으며 듣고 있던 장순이 죽그릇을 내려놓자 장양의 말이 멈추고 혼나기라도 할 것처럼 어깨가 튀었다. 하지만 장순은 장양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그를 부추겼다.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공자께서 연주에 오신 것은 처음이니 서둘러 돌아가시지 말고 두루두루 둘러보고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자서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부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주자서의 말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회가 물었다. “조부라 하심은…?” 주자서는 수저와 죽 그릇 모두 내려놓고 대답했다. “사계산장의 태사부이기도 하신 종조부 주구전 대인입니다.” 주회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찌 주대인이 그대의 조부가 된다는 말이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순이 주회를 말리며 말했다. “이보게, 문암(文庵) 진정하게 이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주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자서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대가 어찌 주(周)가의 종손이 된다는 말인가? 자네가 어찌!” 주자서는 아무 말도 없이 주회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온객행은 주(朱)가의 성질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듣고만 있는 주자서가 안타까워 말을 거들려고 했다. 그러자 불쑥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의 행동이 기꺼워 주회가 주자서에게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진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잡힌 손을 꼭 겹쳐 잡았다.

주회는 한참 말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을 구르더니 외실을 나가 버렸다. 옆에 앉아 안절부절 못하던 주원중은 곧 그의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주회가 나가고 한참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장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아. 아니 주공자.” 장순의 말에도 주자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죄인처럼 앉아만 있었다. 온객행은 잡힌 손을 더 꼭 쥐었다.

옆에 앉아 있던 장양이 장순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두 분을 동평까지 배웅하겠습니다.” 장순은 장양의 말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양이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먼저 물러가거라.” 장양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순에게 인사하고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도 장양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또 주자서를 이곳에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주공자께서 이해하세요. 문암은 그저 잃은 줄 알았던 질자를 만나게 되어 기쁜 것 뿐입니다. 그대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은 없소.”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저는 주가주의 질자가 아닙니다.” 장순이 혀를 차며 말했다. “주공자.” 주자서가 다시 입을 꾹 다물자 장순은 답답했는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공자,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으며 만나면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라 하였는데 어찌 이리 모질게 굴어요.”(89) 주자서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몸을 버리고 총명을 버리면, 세상의 규범이나 혼돈은 결국 같은 것이 됩니다.(49) 모친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장순을 보자 장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순도 곧 일어나 외실을 나갔다.

결국 외실에는 손님인 온객행과 주자서 둘만 남았다. 밖에 있던 하인들이 와서 그릇을 치우는 동안에도 주자서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일어나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서 우리 도망갈까?” 주자서가 ‘하’하고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 “온객행, 지금 너는 사계산장의 제자인 것을 잊지 마.”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 예, 사형…. 아니 사제인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 웃는 낯으로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도 곧 부스스 웃어버렸다.


장순은 공무를 보러 나가서 집에 없다. 외실 밖을 서성이던 온객행에게 동전을 받았던 하인중에 하나가 다가와 주회와 주원중이 별채에서 그들을 기다린다는 말을 했다. 하인의 말에 겨우 웃음이 피었던 주자서의 얼굴이 다시 가라 앉았다. 온객행은 하인에게 장도련님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는 내원에 장부인과 함께 있다고 했다. 허락없이 내원으로 들어갈 수 없어 온객행과 주자서는 외실과 내원을 잇는 작은 화원에서 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 꽃을 감상했다. “아서 여기 봐 산수유 꽃이 피었어.” 온객행의 말에 바닥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시선을 옮겨 온객행이 가리킨 산수유나무를 보았다. “우리가 이 집에서 마셨던 차가 새콤하고 달았는데 산수유차 인가 봐.” 온객행은 가지 끝을 잡고 코끝으로 가져와 꽃향기를 맡았다.

나무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온객행을 보고 주자서가 밝게 웃었다. “아서 향이 정말 좋다. 북쪽에도 봄이 오네.” 주자서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인을 만나고 나오는 장양이 보였다. 주자서가 공손히 인사하려고 소매를 모으자 온객행이 뒤를 돌아 장양을 보며 말했다. “장공자!”

장양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발견하고 웃으며 그들에게 포권해 인사했다. “온공자, 주공자.” 온객행이 그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장공자, 내가 어제 태안성을 둘러보았는데 길을 알지 못해 많이 헤맨 것 같으니, 오늘 그대가 안내를 해주게.” 장양이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는 가보았나요? 마차를 타고 가면 한시진이면 도착하는데 그곳의 물은 아주 맑고 깨끗하답니다.”

온객행이 그를 대문으로 이끌며 말했다. “어서 가서 봅시다. 풍광이 좋은 곳이라면 당연히 주루도 있겠지요?” 장양이 앞장서며 말했다. “그럼요 어제 마신 건황주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청주의 황주도 좋지만 연주의 건황주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인을 시켜 마차를 준비하게 했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장양을 따라 나오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낙릉에서 온 손님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불편한 손님을 만나지 않고 태수의 저택을 나와 태평호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차의 휘장을 열어 거리를 구경하며 갔다. 주자서는 조금 신이 났는지 장양에게 태안성에 대해 이것 저것 물었다. 사람은 얼마나 사는지, 무엇이 많이 나고 무엇을 많이 먹는지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물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몰랐다. 아마도 그가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이곳을 스쳐갔겠구나 생각했다.

동평호 주변에는 산수유 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것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은 평민부터 귀족까지 다양했다. 사람이 많은 것이 보통의 일인지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가 신분을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앉아 군음식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시장기가 오른 온객행이 장양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호수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없소?”

장양이 온객행의 팔을 잡고 호숫가에 있는 선착장을 향하며 말했다. “배를 빌려 배 위에서 마십시다. 오늘은 내가 한턱 내겠소.” 온객행이 장양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장공자! 어찌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곳을 소개해 주셨으니 당연히 술은 제가 사야지요.” 둘은 아웅다웅하며 술상이 차려져 있는 작은 돛단배 하나를 빌렸다. 사공이 붙어 있는 이 배는 사람이 열명은 더 탈 수 있을 만큼 넓은 배였다.

풍막 아래 고즈넉하게 차려진 간소한 술상에 나란히 앉자 사공이 배를 밀어 수심이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막대를 집어 이동하는 것을 보니 호수의 수심은 그렇게 깊은 것 같지는 않았다.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지자 고기를 잡는 배가 보였다. 장양이 온객행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온형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온형이 아니었으면 자당께 불효를 행할 뻔했어요.” 온객행이 장양의 술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장공자께서 그럴 리 없지요, 그럴 리 없어.”

온객행과 장양은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주자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두사람을 보고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뱃머리로 가서 앉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온종일 몰아치듯 바람 같다 가도, 나를 보고 웃네.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니 내 마음 서글퍼라.”(90) 온객행은 주자서가 있는 쪽으로 잔을 들어 올리고 한번에 술잔을 비웠다. 장양이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온형은 주공자와 막역한 사이인가 보오.” 온객행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었다. “그렇소. 막역하다 마다. 하하하.”

온객행은 장양과 술을 마시면서 계속 힐끔힐끔 주자서가 있는 곳을 보았다. 주자서는 뱃머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더니 호수 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임해에는 큰 호수가 없고 몇 년간 구강이 가물었다고 하니 이렇게 큰 물을 즐기는 것은 아마 처음이리라. 주자서가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온객행은 피식 웃었다.

장양이 온객행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온형 아무리 생각해도 주공자는 주가주(朱家主)의 아들인 것 같소.” 장양의 말에 온객행이 다시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의 반응에 황망하게 그를 보던 장양이 덧붙였다. “이번에도 아니란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공자. 주공자의 양친께서는 양주의 회계 출신인데 왜 자꾸 그러시오.” 장양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정말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저렇게 닮을 수 있단 말이오? 온형은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소리 못 들어 보았소?” 장양의 말에 온객행이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온객행의 웃음 소리에 뱃머리에 앉아 있던 주자서가 일어났다. 그때 뱃사공이 뭘 어떻게 했는지 배가 크게 흔들리더니 ‘풍덩’ 소리와 함께 주자서가 물에 빠졌다. 번쩍 정신이 든 온객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뱃머리로 가서 주자서를 끌어 올렸다. 주자서는 당황했는지 온객행의 손을 밀어냈다. 온객행이 “주자서!” 라고 부르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이 잡히자 마자 그를 쭉 끌어 올렸다. 끌어 올려진 주자서는 기침을 심하게 하고 몸을 심하게 떨었다. 입하가 멀지 않았으나 이 곳은 북쪽인 연주였다. 주자서가 몸을 감싸며 떨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앞섶을 잡았다. 젖은 옷을 벗기려고 하자 주자서가 몸부림쳤다. 장양이 뒤에서 다가와 물었다. “주공자 괜찮으시오?” 그 말에 온객행은 주자서의 앞섶을 놓았다. 그리고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둘러 주었다. 그리고 사공에게 말했다. “뱃머리를 돌리시게.”

(86) 법구경 도장품
雖雖剪髮 長服草衣 沐浴踞石 奈癡結何
벌거벗고 삭발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온몸을 돌로 닦는 고행을 해도, 어리석음에서 오는 번뇌를 어찌 고칠 수 있으랴.

(87) 법구경 쌍요품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惡 卽言卽行 罪苦自追 車轢于轍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고 마음은 주인도 되고 심부름꾼도 되나니, 마음 속으로 악을 생각해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하면 죄의 고통 따르는 것이 수레가 바퀴 자국 따르는 것 같으리.

(88) 유우석(劉禹錫) 서새산에서 회고하다. 西塞山懷古
人世幾回傷往事 山形依舊枕寒流
인간 세상 지난 일을 얼마나 많이 아파했는데, 산세는 예전 그대로 찬 강물을 베고 있네.

(89) 공자가어
子夏 問於孔子曰 居父母之仇 如之何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물었다. “부모의 원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孔子曰 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於朝市 不返兵而鬪
공자가 대답하였다.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으며, 조정이나 시장에서 만나면 무기를 가지러 돌아갈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다.”

(90) 시경 국풍 바람 終風
終風且暴 顧我則笑 謔浪笑敖 中心是悼.
온종일 바람 몰아치듯 하다가도 나를 보고 웃네.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니 내 마음 서글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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