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31

31. 天知地知汝知我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

주자서는 제(濟)왕의 손에 이끌려 하남태수와 영천태수에게 인사했다. 제왕이 자신을 당질이라 부르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술을 마시는 것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제왕이 따른 술잔을 받고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 예를 표한 뒤에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보았던 온객행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귀족들이 거북하다고 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고도 했다. 같이 도망가자고도 했다.

그가 도망가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고민했던가? 처음에 그가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 주자서는 그가 피곤해서 먼저 객실로 돌아간 줄 알았다.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난 온객행에게 제왕이 책을 잡을까 봐 먼저 저가 보냈노라고 제왕에게 고했다. 제왕과 태수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술을 많이 마셨다. 덕분에 주자서도 많이 마셔야 했다.

군자산의 독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자서의 마음의 병은 생각보다 더 깊은 것인지도 몰랐다. 주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객실로 돌아왔다. 객실 안에도 온객행이 없었다. 주자서는 작게 ‘노온, 노온.’ 하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자서는 관수도 하지 않은 채로 침상에 몸을 뉘였다. 팔을 뻗어 이불을 들췄다. ‘노온, 어디 갔어?’ 이불 속에 몸을 말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온객행에게 함께 도망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름은 희란(曦蘭)형님을 해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찾고 싶었다. 그저 희란형님을 해친 자들이 벌을 받으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처벌받는지, 누가 처벌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주자서가 버린 이름은 지나치게 무거워 주자서가 감당할 수 없다.

주자서는 오경이 끝났음을 알리는 보사의 외침에 눈을 떴다. 부스스 일어난 주자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수룩한 새벽빛에 어두운 방안은 어젯밤 주자서가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주자서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요대에 달려있는 옥패로 손이 갔다. 밤새 몸에 꼭 붙어 있던 옥패는 따뜻했다.

밖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옥패를 잡고 있던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수하고 몸 가짐을 바르게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여 묶고 요대를 풀어 장포를 정리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장순은 감청색 옷을 준비해 주었다. 감청색은 모친께서 가장 좋아하던 색이다. 아니면 부친께서 좋아하셔서 모친께서 자주 입으셨던 것일까? 주자서는 희미한 기억 사이를 헤집다 그냥 놓아버렸다. 면경에 비추는 저 얼굴이 양친을 닮았구나. 하지만 주자서의 기억에는 없다. 주자서를 마주보며 슬프게 웃었던 부친의 얼굴과 마지막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다부진 모친의 얼굴만 어렴풋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객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온객행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밤새 그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자서는 객실에서 내려가 객잔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도 물었다. 그들은 온객행이 성밖 동군 막사로 나갔다고 했다. 주자서는 그가 장순이나 진영을 만나러 갔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행군을 시작하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개봉성을 떠나면서 주자서는 동군의 진영 부대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도 온객행은 없었다. 주자서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진영이 말했다. “자서야, 서소강에게 서신을 받았는데 그들이 벌써 이천에 도착했다는 구나. 제왕전하는 정주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선문관으로 정행(征行)하실 것이다.” 주자서가 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서야 너는 제왕전하와 함께 가거라. 아무래도 온공자는 서소강에게 간 것 같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보았던 침착한 모습은 꾸며낸 것인지 주자서의 행동이 어색하다. 장순이 물이 들은 가죽부대를 주자서에게 건네 물을 마시게 했다. 주자서는 물을 조금 마시더니 금방 얼굴을 꾸며내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제왕은 온객행이 사라졌는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자서는 또 그게 달갑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제왕이 시키는 대로했다.

주자서는 제왕과 함께 말을 타고 선문관으로 향했다. 말을 바꿔가며 달려 하루만에 도착한 선문관에는 회남왕 사마윤(司馬允)이 먼저 도착해 이미 공격을 시작한 후였다. 정주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 중이었으나 그렇다고 낙양의 낭야왕을 돕지는 않았다. 낙양 동쪽의 선문관에서 제왕 사마경과 회남왕 사마윤이, 그리고 남쪽의 이궐관에서 초은왕 사마위(司馬瑋)와 예장왕 사마치(司馬熾)가 낙양을 공격했다.

해가 지기 전에 초은왕과 예장왕이 낙양성 안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봉지인 청하로 도주하려다 실패한 낭야왕을 선문관에 있던 제왕과 회남왕이 사로잡았다. 낭야왕을 호송하여 낙양성으로 들어가자 예장왕이 제왕과 회남왕을 반겼다. “경치(景治)! 흠도(欽度)! 오랜만이네.” 제왕과 회남왕은 예장왕의 환대에 웃으며 남궁 안으로 들어갔다.

예장왕이 제왕과 회남왕을 뒤따르는 주자서를 눈치채고 물었다. “경치, 저 아이는 누구인가?” 제왕이 뒤따라 들어오던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겨 예장왕 앞에 세우며 말했다. “풍도(馮度), 기억나지 않는가? 회암의 아들 주영일세.” 제왕의 말에 예장왕이 주자서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올려 공수하며 인사하려고 했다.

예장왕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영이라고? 주희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리고는 주자서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당황한 주자서는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헤매다가 예장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예장왕은 주자서의 턱을 놓아주며 말했다. “주희의 아들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어찌 몰랐던 것이야?”

회남왕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경세장공주께서는 항상 좋은 묘수를 두셨으니, 아들을 죽게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예장왕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우리 중에 헌이를 이겨본 사람이 있기는 한가? 하하하.”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외재당숙이 하는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이 중에 주자서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주자서의 양친을 기억하고 있다. 부친이 옥에서 돌아가셨을 때, 모친이 저택에 감금되어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들이 숭덕전 안으로 들어가자 숭덕전 안에 황제와 함께 있던 초은왕이 그들을 맞이했다. 주자서는 예장왕과 제왕, 회남왕의 뒤에 서서 또 다시 외숙을 알현했다. 평락원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황제의 옆에는 진왕과 조왕이 그의 시중을 들며 왕후들에게 인사했다. 뒤이어 군관이 낭야왕 사마운과 문성왕 사마헌을 데리고 들어왔다. 기세를 잃은 낭야왕은 지쳐 보였으나 그의 눈은 아주 매서웠다.

사마운이 말했다. “사마유(司馬攸)! 네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되느냐?” 낭야왕의 말에 초은왕이 내관을 시켜 숭덕전 안에 있는 내관과 군관을 모두 밖으로 내쫓았다. 내관과 군관이 나가는 동안에도 낭야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히 장자인 나를 두고 네가 어찌 황제가 된다는 말이냐?”

낭야왕의 옆에 앉아 있던 문성왕이 주자서를 보고는 벌벌 떨며 말했다. “서국공, 서국공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낭야왕이 시킨 일이에요!” 그러더니 황제를 보고 말했다. “자도형님, 어서 말해보세요 서국공을 죽이라고 한 것은 형님이지 않습니까?!” 문성왕의 말에 숭덕전이 조용해졌다. 제왕이 놀라 황제를 보며 말했다. “폐하?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회암을 해치다니요?”

황제가 진왕의 부축을 물리며 문성왕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암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명망도 높았지 나는 그를 내쫓으려고 했다. 그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야.” 그리고는 문성왕 옆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황제를 보고 있던 낭야왕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부마 하나를 내쫓지 못하는 너 따위가 천자라니! 선황께서 내리신 교지는 어디 있느냐! 네 놈이 숨긴 것이지?” 황제는 대답없이 주저 앉아 울기만 했다. 진왕이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달랬다.

제왕은 주자서의 곁으로 와 그의 손을 잡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초은왕이 낭야왕에게 말했다. “자이(子彛)형님!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신겁니까?” 낭야왕이 말했다. “언도(彦度)야! 너는 듣지 못했느냐? 선황이 승하하시기 전에 나를 낙양으로 부르셨다! 그가 어째서 장자인 나를 천자 삼지 않았다는 말이냐!”

낭야왕과 황제는 동복 형제였다. 낭야왕은 황태후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선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낳은 아들이었다. 낭야왕이 다시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황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네 놈은 너의 아들이 모두 너의 소생인 것 같으냐?” 낭야왕의 말에 왕후들의 시선이 진왕으로 향했다.

황후의 부정으로 의심을 샀던 것이 진왕이었기 때문이다. 낭야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 옆에 조용히 서있는 조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륜이는 내 아들이다.” 예장왕이 성큼성큼 걸어 숭덕전을 나갔다. 황제의 훌쩍이는 소리와 낭야왕의 웃음소리가 섞여 그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했다.

예장왕은 숭덕전으로 황후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황후 왕씨는 낭야왕과 부정을 저질렀는가?” 황후는 대답없이 황제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예장왕이 그녀에게 다가가 다그치며 말했다. “륜이가 자이의 아들이오?” 예장왕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황후는 고개를 땅에 대고 절하며 말했다. “황후로써 부덕을 저질렀으니 벌을 주십시오. 폐하.” 예장왕이 답답하다는 듯 조왕에게 물었다. “너는 자이의 아들이냐?”

조왕이 황제 앞으로 와서 무릎 꿇으며 말했다. “부황,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에게 부친은 부황뿐입니다. 저는 낭야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낭야왕이 조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바로 어제까지 너는 내게 천자의 자리를 권하며 부친이라 부르더니 그새 부친이 늘었느냐?” 그리고 주변에 있는 왕후를 보며 말했다. “자, 저기 흠도에게도 부친이라 불러 보거라! 아니다 언도에게, 아니 풍도에게 어서 아비라 불러 보거라!” 낭야왕은 조왕을 흔들며 웃었다.

황제는 엎드려 있는 황후를 일으키며 물었다. “황후, 륜이는 내 아들입니까? 란이는 내 아들이 에요?” 황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 천자의 핏줄입니다. 모두 폐하의 자식입니다.” 황제는 황후의 팔을 밀치고 낭야왕의 멱살을 잡으며 울먹였다. “네놈이 감히 황후를 욕보였느냐!” 낭야왕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탈력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자 진왕과 조왕이 황제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였다.

예장왕이 조왕에게 말했다. “강호에서 사술을 빌려 기왕을 독살한게 사마륜 너냐?” 조왕은 고개를 흔들며 진왕을 보았다. 진왕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숙!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강호와는 물론 병권을 가진 자와도 가까이 한적 없는데 제가 어찌 기왕을 해치겠습니까?” 초은왕이 말했다. “풍도형님, 제가 강호에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진왕이 아니라 조왕이 맞습니다. 양주의 삼백상단과 낙양의 초무관이라는 기루에서 작당한 것입니다.”

황제가 조왕을 보며 말했다. “너! 사마륜!” 초은왕이 말했다. “폐하, 걱정마세요. 강호의 일은 소림사에 부탁해 놓았으니 정리가 되면 제가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초은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왕이 휘청하는 황제를 부축하였다.

조용히 있던 회남왕이 사람을 시켜 제왕의 붉은 활을 가져와 낭야왕과 문성왕 앞에 두었다. “역도 사마륜과 사마헌은 들어라. 권력으로 약자를 능멸하고, 백성을 해쳤으며, 거짓말로 사람을 현혹하고, 황명에 불복하여 친족을 시해하려 모의하였으며, 정령을 위반하고 내란을 일으켜 패륜을 저질렀다. 이는 구벌지법에 해당하니 왕호를 거두고 효시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하겠다.”(92)

그리고 황후에게 가서 말했다. “황후 왕씨는 내조를 어지럽히고 부덕을 저질렀음으로 그 지위를 미인으로 강등하고 천자의 자식을 낳은 것을 인정하여 냉궁에 유폐한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그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예장왕이 그들을 따라 나가며 낭야왕의 형을 집행하려고 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서령이 예장왕을 말렸다. 날이 너무 늦어 길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오경이 지나면 바로 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예장왕은 친히 낭야왕과 문성왕을 대리(大理)로 호송하였고, 내관이 황후를 데리고 냉궁으로 향했다.

회남왕이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폐하 조왕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조왕은 황제의 무릎에 매달려 애원했다. “부황! 제게 아버지는 부황뿐입니다. 소자를 용서해주십시오. 부황! 부황!” 황제는 조왕을 걷어차고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진왕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내 아들이 아니다. 기왕은 어디에 있느냐! 어서 기왕을 데려와라! 영아(潁兒)! 영아!” 황제가 숭덕전을 안을 휘저으며 이미 세상에 없는 기왕을 찾았다.

기왕을 찾던 황제의 눈에 주자서가 들어왔다. 황제는 주자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헌아… 우리 헌이가 왔구나. 오래비는 네가 정말 많이 그리웠다.” 주자서는 황제가 버거워 그만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주저 앉은 주자서의 허리에 달린 옥패를 본 황제가 그 옥패를 쥐어 채며 말했다. “이것은 무고의 열쇠가 아니냐? 이것을 왜 헌이 네가…?” 그리고 주자서의 얼굴을 한번 더 보더니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회암! 네놈이 돌아왔구나! 거짓말을 한 것은 너다! 내게 아무것도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어긴 것은 너란 말이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요패를 잡아당겼다.

주자서의 요대가 끊어지면서 요패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고 주자서의 차림새가 흐트러졌다. 주자서는 얼른 몸을 뒤집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황제는 한참 씩씩대며 주자서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손에 든 옥패를 주자서에게 던졌다. 옥패를 맞은 주자서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났다. 황제는 주자서의 이마에 난 피를 보고 발작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황제를 진왕이 부축하여 옥좌에 눕혔다.

회남왕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자 제왕이 말했다. “조왕 사마륜, 너 역시 구벌지법을 피할 수 없다.” 조왕은 바닥에 엎드려 황제에게 빌었다. “부황! 잘못했습니다. 부황, 제발…제발! 흑흑” 회남왕이 그를 데리고 숭덕전을 나갔다. 제왕이 엎어져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영아, 너는 죄가 없으니 일어나거라.”

초은왕이 황제가 던진 옥패를 주워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이 무고의 열쇠냐?” 주자서는 앞섶을 움켜쥔 손으로 옥패를 받아 손에 쥐고 있다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왕이 주자서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말했다. “어서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피가 멎지 않는구나.” 초은왕이 주자서의 어깨를 감싸 그를 데리고 숭덕전 밖으로 나갔다. 초은왕은 남궁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머물고 있던 낙양의 객잔으로 데려갔다.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소강은 초은왕이 주자서를 데리고 와서 놀랐다.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자서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초은왕은 주자서를 자신의 당질로 소개하며 그를 치료하라고 명령했다. 작게 한숨을 쉰 서소강이 약상자를 들고 주자서가 쉬고 있는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자서는 침상위에 몸을 작게 말고 있었다. 서소강은 주자서가 울고 있는 줄 알고 작게 소리를 내며 약상자를 놓았다.

주자서는 얼굴을 들어 방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서소강을 보자 주자서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서소강은 주자서의 울상을 보고 허탈하여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서야, 어찌 주가(朱家)가 되었느냐?” 서소강은 약상자를 열고 깨끗한 천을 가지고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를 마주 보았다. 주자서는 서소강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서소강이 다정하게 “자서야.” 라고 부르며 이마에 난 상처에 천을 가져다 대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사숙.”

서소강이 주자서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자서야, 자서가 우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주자서는 서소강이 이마의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가루와 연고를 발라 치료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훌쩍이며 눈물만 흘렸다. 서소강이 주자서의 피를 닦아낸 천들을 정리하고 탁상으로 가서 앉자 주자서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앞섶이 다 흘러내린 채로 서소강이 있는 곳으로 와서 앉으며 말했다. “사숙, 양주로 돌아 갈래요. 양주로 가요.”

서소강이 주자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은 좀 그렇구나.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 태사숙께서 오시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며 다시 엉엉 울었다. “사숙 저는 양주로 가고 싶어요. 저는 주자서란 말이 에요.” 그리고는 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서소강은 마음이 착잡하여 주자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래, 그래.’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서소강은 초은왕이 주자서를 당질이라고 소개한 순간 주자서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주자서는 주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자서는 한참 울다가 소매로 얼굴을 닦고 서소강을 보고 말했다. “얼마나… 얼마나 주영이 되어야 합니까?” 서소강은 과연 장문후계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주자서를 다독였다. “태사숙이 지금 소림사에 계시니, 내가 가서 태사숙을 만나보고 어떻게 할지 너에게 알려주마. 그동안은 초은왕께서 시키는대로 하고 있거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소강에게 물었다. “사숙께서는 왜 여기 계십니까?” 서소강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나의 형님이 형주 강릉에 현령의 양자로 간 것을 너는 모르고 있지? 초은왕의 봉지가 그곳에 있단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소강이 물었다. “남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낭야왕과 문성왕이 효수될 것이라는 것과 황후가 유폐된 일, 그리고 머뭇거리며 서선공을 해친 것은 황제였다는 것까지. 서소강이 말했다. “폐하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조금 더 오래 낙양에 머무르게 될지 모르겠구나. 자서야.” 주자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소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 벌어진 장포와 중의를 벗기고 내의만 입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눕혔다. “태사숙과 내가 데리러 올 테니 그동안 보중하고 있거라.” 그리고 약상자를 정리해 나가려다 다시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이불을 덮고 누운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자 서소강이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냈다.

주자서가 호리병을 받자 서소강이 말했다. “군자산을 먹었다고 들었다. 그동안 고생했다.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이것을 먹으면 내공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를 툭 치고 방을 나갔다. 서소강이 나간지 얼마 안되어 오경이 끝났다는 보사의 외침이 들렸다. 다음날 예장왕이 갑자기 객잔으로 쳐들어와 초은왕과 주자서를 데리고 남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서소강은 낙양으로 찾아온 주구전과 만나게 되었다.


주자서는 예장왕 제왕 초은왕 회남왕이 모인 숭덕전 연회에 앉아 있었다. 밤새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자서의 거취는 이미 정해진 듯했다. 진왕이 관리하고 있던 과거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재산이 다시 주영의 것이 되었고, 주영은 10년전 진회장의 품에 안겨 떠났던 서국공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주택(朱宅)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이곳 저곳 많이 낡고 바랬다. 주영은 모친이 목을 매달았다는 대문의 들보를 보았다.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하다. 그는 홀로 집안을 둘러보다 사당으로 갔다. 사당은 주영이 기억하는 대로 주(朱)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는 아직 없다.

주자서는 진왕에게 받은 돈으로 제일 먼저 양친의 위패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사당을 청소했다. 그리고 낙릉 형림으로 서신을 보냈다. 양친의 위패를 제외한 주가의 위패는 다시 낙릉으로 보낼 생각이다. 아마 그 곳에도 이미 있겠지만 사당에 모셔진 신위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렇게 했다. 그리고 주자서는 하인을 들이지 않고 스스로 저택을 청소했다. 먼지를 터는 것부터 바닥을 닦는 것까지 모두 주자서 혼자 했다. 그가 외실의 청소를 마쳤을 때 대문에 누군가 기별했다. 나가보니 진왕이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주자서가 몸에 붙은 먼지를 떼며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진왕 전하.” 진왕은 주자서의 더러운 몰골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큼’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직아! 언제까지 진왕 전하라 부를 참이냐? 혁란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대문을 넘어 들어와 외실로 갔다. 조금씩 정리되는 집안을 보고 진왕이 작게 혀를 차며 외실안으로 들어가 하인이 들고 들어온 선물을 늘어 놓았다. 귀중한 서책이며, 비단옷 그리고 검이 있었다.

진왕은 검을 들어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서선공의 검을 잊지 않았겠지?” 주자서는 얼떨떨하게 검을 받아 들고 서서 진왕이 자리에 앉아 차를 찾는 것을 보았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검을 한참 보다가 옆에 내려놓고 손을 모아 진왕에게 말했다. “전하, 아직 집안이 정리되지 않아 대접할 만한 차가 없습니다.” 진왕이 ‘하하하’하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올해 딴 동정 벽라춘이 있으니 너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 그리고는 사람 좋게 ‘하하하’하고 웃었다. 진왕이 가져온 것들은 모두 원래 주영의 것이다.

진왕의 속셈을 눈치챈 주자서가 진왕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모아 절하며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우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저는 잠시 이름을 빌리는 것이니 예를 거두어 주세요.” 진왕이 웃음을 멈추고 주자서를 싸늘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 말은 너는 정녕 주영(朱嬴)이 아니라는 말이냐?” 주자서가 소매너머로 진왕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양주 회계의 주(周)가 자서는 진왕 전하께 거짓을 고한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던 진왕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 좋다. 아주 좋아.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나갔다. 하인이 외실로 들고 들어온 것이 전부가 아닌지 마당에 진왕이 가져온 함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주자서는 진왕이 저택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소매를 들어 그가 가는 길에 인사했다.

주자서가 주가의 저택을 청소하는 동안 예장왕과 회남왕은 양주로 돌아갔고, 제왕은 동군과 함께 각각 연주와 청주로 돌아갔다. 태산태수 장순은 곧 장부인과 함께 낙양으로 나들이를 올 것이라며 꼭 어디 가지 말고 낙양에 있으라고 한참 주자서를 붙들고 사정한 뒤에 야 회군하는 행렬에 합류했다. 황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조정의 일을 초은왕과 진사왕이 각각 나누어 조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초은왕은 아직 관을 올리지 않은 주자서를 도와주라는 핑계로 서소강을 주가의 저택으로 보냈고, 진왕은 주자서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호위라는 이름의 군병을 주가 저택 주변에 배치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서소강과 커다란 저택에서 둘이 지냈다. 진왕의 호위 때문에 주택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입하가 지나고 소만이 지날 때까지 주자서는 태사숙을 만날 수 없었다.

오늘도 사계산장에서 하던 대로 묽은 죽에 나물로 끼니를 때우던 주자서가 서소강에게 물었다. “태사숙께서는 아직도 소림사에 계십니까?” 서소강이 나물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강호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구나. 청성곡의 일로 아직도 시끄럽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청성곡이요?” 서소강이 말했다. “그래 서선공께서 무고를 찾으셨다는 곳이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무고라니요? 무고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서소강이 입에 넣은 음식을 다 씹고 말했다. “그래. 검선께서 아무것도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시는데도 믿지들 않는구나. 게다가 무고의 열쇠는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주자서가 앞섶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무고의 열쇠요…?” 서소강이 다시 찬을 집으며 말했다. “그래. 부친께 뭐 들은 것이 있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의 기색이 이상해진 것을 눈치챈 서소강이 물었다. “무고의 열쇠에 대해 아는 것이 있구나?” 주자서가 앞섶에 손을 넣어 온객행이 준 옥패를 꺼내 들었다. 주자서 손에 든 옥패를 보고 있던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옥패를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말했다. “옥패가 아니냐? 이 귀한 것이 어디에서 났느냐?”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제자께서 주셨습니다.” 서소강이 옥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검선의 제자라면 온공자냐 제갈공자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서소강을 보며 말했다. “제갈공자?” 서소강이 다시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 “제갈공자가 준 것이냐?” 주자서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온공자께서 주셨습니다.” 서소강이 찬을 집어먹으며 ‘흠’했다.

주자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옥패가 무고의 열쇠인 것 같습니다.” 서소강이 옥패를 한번 더 힐끔 보고 다시 밥을 먹으며 말했다. “비어 있는 제단이라 하던데 뭐 좋은 것이 있다고 그것을 열려고 하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심드렁한 서소강의 반응에 주자서가 다시 앞섶에 옥패를 집어넣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자서야 너 많이 자란 것 같구나. 이제 내공은 돌아왔느냐?” 주자서가 대답없이 밥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사숙께서 네가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시니 사당에 인사를 올린 후에 보법을 좀 보자.” 주자서가 공손히 대답했다. “네. 사숙.”


온객행은 강호의 사람들에게 기가 막히고 실증이 나는 참이다. 검선은 물론 곤륜산의 대사와 아미파, 공동파의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무고는 명교의 제단이며 안이 비어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무고의 문을 열 것을 종용했다. 온객행도 당장 청성곡으로 돌아가 무고의 문을 열고 싶었으나 무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자서에게 있다. 게다가 주사서는 진왕이 촘촘하게 호위를 세워 둔 저택에 갇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만날 수도 없었다.

각 문파에서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 무고를 둘러볼 것을 요청했고 소림사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강호는 무고의 열쇠를 찾겠다고 매우 시끄러웠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날 수 없어 답답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하고 있으면 어찌 하나? 싫어 져서 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끄러워 도망친 것인데…’ 주자서와 약속했던 시간은 보름을 지나 벌써 망과 삭이 두번이나 지났다. 날은 점점 더 무더워졌고 길어졌다.

온객행은 무고의 열쇠를 찾는다는 핑계로 낙양에 주자서가 있는 주택 주변을 맴돌았다. 담을 넘어 그를 만나러 갈까 수도 없이 생각했지만 혹시나 그가 원하지 않을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온객행은 장에서 분주를 사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주(朱)공자가 관을 올리고 귀비 유씨의 질녀와 혼인한다는 소문 들었소?”

차를 마시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귀비 유씨의 질녀라면 정안군을 말하는 것인가?” 먼저 말을 꺼낸 사내가 말했다. “그래! 지금은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인데, 정안군과 혼인하고 관을 올리면 곧 천거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겠군.” 그러자 그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 말을 거들었다. “주공자라면 경세장공주님의 아드님이시니 격에 맞추려면 상서는 하셔야겠군.”

그러자 노인 앞에 앉아 있던 낭자가 말했다. “주공자는 매일 서책을 읽는다 하던데, 그도 과거를 준비하는 것일까요? 서선공께서는 매우 공명정대하신 분이셨으니 아드님도 천거로 벼슬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실거에요.” 낭자의 말에 말을 얹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그들의 대화 내용 중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주자서가 혼인한다는 내용만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온객행은 술을 따르고 있던 호리병도 챙기지 않고 바로 주가의 저택으로 갔다. 이 곳을 배회한지 오래 된 온객행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저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지 두번째 방문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오늘은 몇 번째 방문인지 온객행은 세는 것을 잊었다.

날이 어두워 질때까지 기다렸다가 뒷골목에 보초를 서는 군관이 교대할 때를 틈타 담을 넘었다. 저택 안은 고요했는데 날이 어두워도 불을 밝힌 곳이 많지 않았다. 제일 밝은 곳으로 가보니, 사당이었다. 사당 안 포단에 무릎 꿇고 앉은 주자서의 뒷모습이 보였다. 온객행은 한참동안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사당 밖에 서서 주자서가 신위에 절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둘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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