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32

32. 玉巵無當
옥잔에 밑바닥이 없다.

주자서는 한참 전에 집안에 누군가가 들어온 기척을 눈치 챘다. 서사숙은 소림사에 태사숙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몇 일은 집에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만약 돌아오시더라도 기척을 숨기고 담을 넘어오실 필요는 없다. 주택(朱宅)에 사람을 보낼 만한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진왕 밖에 없었다. 황제는 조왕을 죽이지 않았다. 조왕을 동궁에 가두고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진왕은 황제의 결단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종종 주자서를 찾아와 패악을 부리고 잔뜩 화풀이를 하고 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주자서는 어째서 진왕이 그를 찾아오는지 알고 그를 비웃었다. 낭야왕을 따르던 수많은 무관과 문관은 숙청되고 벌을 받았다. 하지만 조왕을 따르던 이들은 조왕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은 자도 많았다. 그들이 진왕 곁에 숨을 죽이고 들러붙어 안색을 바꾸고 알랑거리는 것이 거슬리는 것이다.

주자서는 진왕에게 주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주자서가 주영이라는 것을. 황제가 종종 그를 남궁으로 부른다는 것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고 싶은데 주영이 아니라며 발뺌을 하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으니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황제가 정신이 돌아올수록 진왕은 혹 주영에게 과분한 신분이 주어질까 싶어서 이런 저런 일로 주자서를 귀찮게 했다. 집안에 어른이 없다는 핑계로 관을 올리고 혼사를 진행하려다 황제에게 핀잔을 들었다.

어찌 진왕이 주영의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황제나 초은왕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없애려는 것이지.’ 사당에 앉아 위패를 보며, 이 곳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혁란은 그런 놈이니까.’ 주자서는 태어난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 소매를 들어 절했다. ‘소자 양친을 곧 뒤 따르겠습니다.’ 주자서가 절을 마치고 일어났는데도 뒤에 서있는 자객은 움직일 낌새가 없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자 뒤에는 주자서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하얀색의 무명옷을 입고 처음 만났을 때 보다는 조금 익숙한 온객행이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보자 온객행이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주자서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손을 뻗었다. “멈추시오.”

온객행이 자리에 멈춰서 자신에게 뻗어진 손과 주자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예의 주자서가 어려워하는 눈썹을 늘어뜨린 울상으로 그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는 기가 막혔다. ‘나를 버려 두고 갔으면서 이 치는…’ 온객행은 되려 억울하다는 얼굴로 주자서를 마주한다. 흔들린 마음을 모두 버린 줄 알았는데 온객행은 또다시 가슴깨로 와서 주자서를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 댄다.

두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한참 서있었다.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고 누구도 물러서지 못하는 채로 두사람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주자서는 뻗은 손을 앞섶으로 가져가 온객행이 주었던 옥패를 꺼내 들었다. 주자서가 말했다. “이것을 찾으러 오셨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들린 옥패를 한참 보고 있자 주자서가 옥패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는 가져가지 못할 것 같으니, 돌려드리겠소. 영견은…”

주자서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하’하고 헛웃음 짓고는 말했다. “영견은 그대가 가지고 가시오.” 온객행이 움직이지 않자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다가가 옥패를 내밀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내가 도망쳐 버렸어.”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옥패가 있는 주자서의 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평생 도망치기만 했어. 도망쳐서 그렇게 후회했는데 또 너에게서 도망쳐버렸어. 아서…아서, 미안해.”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고 온객행의 손 위에 옥패를 올려 놓고 말했다. “기한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온공자께서 제 대답을 들으시겠다면…” 온객행은 자기에게 붙어 서있는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온객행을 밀어냈다. 온객행은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주자서를 꼭 붙들고 말했다. “아서 정말 미안해. 아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아서 몫까지 더 좋아할게.” 주자서는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그렇게 온객행에게 안겨 있었다.

주자서가 밀어내는 것을 멈추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짓이 기꺼워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아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들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온공자. 이곳은 사당 안이니 무례를 멈추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사당의 신위를 한번 보고 주자서에게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주자서가 앉아 있던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아 절하고는 말했다. “서선공! 경세장공주님! 아서는 걱정 마세요. 장명산 온가 객행이 지켜 줄게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온객행을 일으켜 세우며 주자서가 당황한듯 말했다. “온객행!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멈추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속을 뿌리치고 결국 신위에 세번 절하고 예를 갖췄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서 온객행 옆에 덜퍼덕 주저 앉았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향로 옆에 있는 향에 새로 불을 붙여 꽂아 놓고 다시 포단에 앉아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정신이 빠져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신위를 보았다. 이 꼴을 하늘에서 양친이 보고 계신다고 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온객행을 밀어내고 그의 어깨에 주먹을 질렀다. 온객행이 맞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내공이 돌아온 거야?” 주자서는 바닥을 보고 고개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을 일으켜 세웠다. 신위에 절을 할 때는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꿈쩍하지 않던 온객행의 몸이 주자서에게 들러붙어 왔다.

주자서는 언제인가 바닥에 떨어진 옥패를 주워 들고 사당을 나왔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옥패를 보고 있다가 온객행의 가슴팍에 던지며 말했다. “온객행, 무엄하게 남의 집 사당에서 무슨짓이오?” 온객행이 옥패를 다시 주자서의 요대에 매어주며 말했다. “아서 순서는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육례를 마쳤으니 나는 이제 아서의 사람이야. 아서가 주(朱)씨 던 주(周)씨 던.” 계속해서 들러붙는 온객행을 밀어내며 주자서가 말했다. “그대는 아직 기러기를 받지 못했는데 육례는 무슨 육례.”

온객행이 밀어내는 주자서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주자서.”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경애(敬愛)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놀라서 온객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온객행이 말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어.” 온객행을 보고 있던 주자서의 눈썹이 축 쳐져 울상이 되어 그에게 말했다. “그럼 왜 나를 두고 갔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해 아서, 두고 간 것이 아니야. 내가 도망친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같이 가기로 했잖아.”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미안해. 이제 어디 안 갈거야. 계속 아서 옆에 있을게.” 주자서는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어 버렸다. 뭔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묻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서 온객행도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않기로 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외실로 안내했다. 주택(朱宅)은 외실과 내실 사이에 작은 원림이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원림을 기준으로 외실과 내실 그리고 주방과 서재를 제외한 공간은 아직도 허름하여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외실 안으로 들어온 온객행은 방안에 걸린 대련과 편액을 보고 입을 벌렸다. 열어놓은 창호문 뒤쪽에 보이는 정원을 보고 온객행이 말했다. “우와, 아서는 이런 집에서 자란 거야?”

온객행이 외실과 내실을 연결하는 복도 난간에 기대어 아래에 있는 연못을 보며 말했다.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에서 만든 것 같네.”(95) 주자서가 그의 곁으로 오며 말했다. “하늘이 만든 것이야. 이 곳은 원래 연못이었으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정리하지 못해 무성하게 자란 녹음(綠陰)을 보았다. 차오르는 달빛에 수풀이 푸르다. 성급한 매미가 벌써 나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사람은 난간에 서로에게 기대서 달구경을 했다. 아직 다 차지 않은 달빛이 밝고 선명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주자서는 온객행을 숭산으로 보내 서소강을 찾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서소강과 온객행이 주택의 대문을 넘어 들어왔다. 온객행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진왕의 사병이 그를 막으며 서소강에게 물었다. “이 자는 누구요?” 서소강이 공손히 포권하고 말했다. “이 분은 장명산 검선의 대제자 온공자요. 상선께서 주공자의 몸을 걱정하여 친히 보내신 의원이니 예를 갖추시오.” 사병이 온객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들여보내 주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엌에 있던 주자서가 그에게 다가오는 서소강과 온객행을 발견했다. 공손히 포권하여 서소강에게 인사했다. “사숙 잘 다녀오셨습니까?” 주자서의 인사를 받은 서소강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네가 온공자의 모과냐? 왜 다들 너를 모과라고 부르는 것이냐?” 서소강의 말에 고개를 들은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덮어둔 찬을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바구니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부군, 부엌일은 소첩을 시키세요.” 온객행의 말에 목을 축이며 숨을 돌리던 서소강이 물을 뿜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멀리 밀어내며 얼굴을 붉혔다. 서소강이 물었다. “부군?”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손에서 조리도구를 빼앗으며 말했다. “시숙께서도 들어가 계세요.”

서소강이 얼빠진 얼굴로 본인을 가리키며 온객행에게 되물었다. “시숙(媤叔)?” 온객행은 구리 솥에 지어진 밥을 그릇에 담아 소반 위에 올려 놓았다.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온객행의 소매를 보고 있던 주자서가 어디서 끈을 가져와 그의 어깨에 둘러 매어주며 말했다. “맞는 옷이 있는지 모르겠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서소강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서야, 너 언제 소실을 들였냐?” 온객행이 울상이 되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아서… 나는 소실이야?” 음식을 소반에 담아 외실로 가면서 주자서가 말했다. “또 헛소리.” 온객행이 주자서와 어깨를 붙이며 말했다. “나는 정실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 속의 진흙이에요.”(75)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을 무시하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두사람을 따라가던 서소강이 뒤쳐진 온객행과 발을 맞추며 물었다. “온공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것을 멈추고 서소강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시숙, 말씀 편히 하세요.” 서소강은 온객행을 위아래로 보며 다시 물었다. “우리 자서에게 장가들 셈이오?” 온객행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서에게 시집을 갈 셈이에요.” 온객행이 ‘히히히’웃으며 주자서의 뒤를 따라 외실로 들어갔다.

서소강은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찬을 올려 놓는 온객행을 보며 밥을 먹었다.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사숙이 온객행을 낙양으로 보낼 때 안색이 불편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제 온객행의 모과가 되어버린 주자서는 온객행이 살갑게 구는 것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고 있어서 서소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서소강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사숙께서 무고의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무언가 생각 났다는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품속에서 주목으로 만든 요패를 꺼냈다. 서소강이 관심을 보이자 온객행이 그에게 자세히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우리 예단이에요. 주목으로 만든 것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붉어 진다 합니다.”

서소강이 무늬를 보더니 코웃음 치며 말했다. “시집온다더니 어찌 기러기를 주셨소?” 서소강의 말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요패를 채 가며 말했다. “기러기라니요?” 서소강이 남은 밥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다시 들며 말했다. “거기 푸른색으로 쓰여 있지 않느냐, 자서 너는 아직도 전서(篆書)를 읽는 것이 서툴구나.” 주자서가 손에 들고 있던 요패를 다시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요대에 요패를 달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그렇게 비싼 것 아니야. 아서가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잖아. 마음에 든 것이 아니야?” 온객행이 허리춤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속을 물리치며 말했다. “노온, 밥상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온객행이 주목 요패를 기어코 주자서의 허리춤에 달아주고는 젓가락을 들어 찬을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무슨 짓? 허튼 짓?” 그리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밥을 먹었다.

서소강이 밥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다시 말했다. “태사숙께서 무고의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어디 두었느냐?” 주자서가 다 먹은 그릇을 소반으로 옮겨 담으며 말했다. “돌려주었습니다.” 서소강이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품속에서 옥패를 꺼냈다. 서소강이 달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내밀자 온객행이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온객행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의 손에서 옥패를 빼앗아 서소강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무고로 가십니까?” 서소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반을 들고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옥패가 놓여있던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서소강에게 말했다. “대인, 노야도 가시오?” 서소강은 온객행이 묻는 노야가 누굴까 생각하다 말했다. “무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선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언제 출발하시오?” 서소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도 무고로 가실 참이오?” 온객행이 대답없이 물끄러미 서소강을 보았다. 서소강은 외실을 나가며 말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파도 있고, 낙양에서 성도까지는 길이 머니 사람이 모이는 대로 출발하신다 하였소.” 서소강은 온객행의 대답을 듣지 않고 외실을 나갔다. 외실에 앉아 있는 온객행은 마음이 복잡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고 서소강은 외실과 내실 사당에 불을 밝혔고 주자서는 내원에서 무공을 연습했다. 온객행은 내실로 들어가는 복도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주자서가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엷은 구름에 싸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51)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의 보법을 봐주기 위해 사당에서 나와 다가오던 서소강이 ‘하’하고 헛웃음 쳤다.

주자서는 호흡이 흐트러지더니 얼마 안가 자기 다리에 걸려 풀썩 쓰러졌다. 서소강이 혀를 차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온공자, 방해할 속셈이면 먼저 들어가 쉬시오.”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다가가 팔과 다리를 툭툭 치며 자세를 고쳐주었다.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서소강은 주자서에게 들어가 쉬라며 외실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찍으며 난간에 기댔다.

온객행이 품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다 작게 난 상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아서! 이게 뭐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서 영견을 빼앗아 얼굴을 닦고 몸을 돌려 내실로 향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뒤를 따르며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대체 그 상처는 뭐야? 어떻게 하다가 다친 거야?” 주자서가 대답없이 대야에 얼굴을 씻고 잘 준비를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누가 그랬어? 어서 얘기해 내가 갚아 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의 웃는 얼굴이 좋아서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누가 그랬어! 어서 말해! 내가 가서 혼쭐내주게.” 주자서가 대야의 물을 내원에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았다. 주자서가 물끄러미 온객행을 보자 그는 실실 웃으면서 관수했다. 온객행이 얼굴을 씻는 것을 보던 주자서가 옷을 벗어 걸어 놓고 침상에 가서 앉아 신발을 벗었다. 침상 위로 올라가 이불을 펴자 온객행이 얼른 옷을 벗어 걸어 놓고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침상에 몸을 누이자 온객행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서, 누가 그랬어?”

주자서가 이불 안으로 들어오는 온객행을 쏘아보자 온객행이 몸을 물리며 말했다. “아이, 아서 나는 평상에서 자기 싫단 말이야.”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그대가 침상에서 주무시게. 내가 평상으로 가겠네.” 일어난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온객행이 말했다. “아이요! 아서, 내가 꼭 아서랑 같이 자고 싶다고 말해야겠어?”

주자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본 온객행이 신발을 벗고 침상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서, 우리가 한 침상을 나눈 것이 벌써 몇 번인데 매번 이렇게 수줍어 할 거야?” 침상을 벗어나려는 주자서의 허리를 꼭 안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아서, 정말 누가 그랬어? 많이 아팠어?” 주자서가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멈추고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치우며 울상으로 말했다. “누가 우리 아서의 잘생긴 이마에 흉을 만들어 놓았냐는 말이야.”(8) 온객행이 속상하다는 듯이 입을 앞으로 내밀자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랬어.” 주자서의 말에 당황한 온객행이 다시 물었다. “많이 아팠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앞섶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응. 많이 아팠어.” 온객행은 기대오는 주자서를 꼭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주자서가 아무 말이 없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초은왕은 강호의 일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숭산에서 사람을 모아 무고를 확인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초은왕이 보낸 군대와 진왕이 소림사 앞에 떡하고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본 주지가 혀를 차며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를 쏘아보았다.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틀어 막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골라 모으고 있었는데 그것이 황궁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남궁하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주지는 염주를 굴리며 낮게 읊조렸다.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도 멀다.”(25) 주지가 하는 말을 들은 엽백의가 턱짓으로 주구전을 가리켰다. 주지가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 주대인께서 진왕전하와 안면이 있으시니…” 주구전이 ‘쯧’하고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저라고 방법이 있겠습니까?” 주지가 깊게 한숨을 쉬고 진왕을 향해 웃어 보이며 다가갔다.

엽백의가 주구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점을 쳐보니 바라는 바가 커서 곤궁한 내가 줄 것이 없구나.”(45) 주구전이 말했다. “독이든 나무는 필시 그 열매에도 독이 있으니까요.” 엽백의가 주구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왕을 보며 물었다. “온가의 모과가 그리 귀한 신분이냐?”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왕과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이니 그 은택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저도 모르지요.”(93)

주지가 두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눈치를 주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진왕에게 인사했다. 주구전이 인사하는 것을 본 엽백의도 손을 모아 포권하며 인사했다. 진왕은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그들에게 인사했으나 이상하게도 예를 거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주구전은 진왕의 초조함을 읽고 속으로 빈정거리며 그를 비웃었다.

삼백상단이 벌여 놓은 일은 기주 청하의 낭야왕까지 닿아 있었기 때문에 하남의 양주와 형주를 포함해 제남상단이 있는 하북의 연주, 기주, 청주의 문파들도 소림사로 사람을 보내왔다. 주지는 서신에서 참여할 수 있는 각 문파의 인원을 두 명으로 정했는데, 크고 작은 문파가 모두 모이자 그 인원은 거의 백명에 가까웠다. 그들이 숭산으로 다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려 하지가 지나고 소서가 되어서야 모두 모였다.

우기가 시작된 사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뀌었다. 주지는 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숭숭한 숭산을 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봉을 방문하여 개방 방주를 설득했던 여희가 그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무고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엽백의였고, 무고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악양파의 고숭, 단양파의 육태충, 경호파의 장옥삼과 고산파의 심신도 참여했다. 익주 성도에서 청성곡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산세가 깊고 오랫동안 사람이 왕래하지 않아 길이 없어진 곳이 많았다.

엽백의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청성곡에 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고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이번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허상을 쫓다 죽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엽백의는 공동산과 아미산에 서신을 보내 무고의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아미파의 자순사태와 공동파의 장문 당청진은 오랫동안 첨예하게 대립했던 마교의 교주와 만나 이 일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다. 사사로운 문파간의 원한과 이념은 잠시 묻어두고 산사람은 살아야 하겠다는 그들의 뜻을 마교가 받아들인 것은 황족의 권력싸움으로 황폐해진 것이 비단 중원의 정파뿐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발하기로 한날 주구전은 거의 두 달 만에 주자서와 재회했다. 주자서는 진왕이 타고 있는 마차에서 내려 비가 내려 질퍽한 진흙길을 달려 주구전을 만났다. 그가 입고 있는 하늘하늘한 연한 옥색의 비단 장포가 비에 젖었다. 주구전은 주자서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귀하신 주(朱)공자께서 어찌 이곳에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주자서의 눈썹이 축 늘어지더니 눈동자가 금방 반질반질해졌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주공자께서 왜 이 험한 길에 옥체를 상하게 하십니까?”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와 팔을 만지며 말했다. “그동안 옥체는 보중하셨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눈물을 찍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셔서 어찌 합니까.”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흐르지 않은 주자서의 눈물을 훔쳤다. 진왕은 마차안에서 주구전과 재회하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팔을 들어 그를 불렀다. 한참 주구전의 손을 붙들고 있던 주자서가 힘겹게 손을 놓고 다시 진왕이 탄 마차로 와서 앉았다.

진왕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직아, 아직 몸이 좋지 않은데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 주자서는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고개를 숙였다. 진왕이 하인을 시켜 온객행을 불러왔다. 온객행은 마차 안으로 들어와 진왕에게 인사했다. “진왕전하.” 그리고 비를 맞은 주자서를 보고 자신의 젖지 않은 소매로 그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주(朱)공자, 비를 맞으셨습니까? 아직도 열이 남아 있는데….” 온객행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맥을 짚었다.

불필요하게 오랫동안 주자서의 손목을 만지작대던 온객행이 진왕에게 말했다. “아직 기혈의 흐름이 불안정하여 여도(旅途)에 드는 것이 상태를 악화시킬까 저어 됩니다.” 진왕이 ‘흠’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직아, 네가 주(周)대인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이번 길에 너를 초대한 것인데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겠느냐?”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진왕전하.”

진왕이 온객행과 주자서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너를 위해 따로 마차를 준비했으니, 내가 부르면 바로 오도록 하라.” 그리고 진왕의 마차에서 내린 주자서는 진왕의 눈치를 보며 진왕이 타고 있는 마차 바로 뒤에 있는 작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주자서는 마차 안에 앉자마자 휘장을 걷어 뒤쪽에 걷고 있는 주구전을 보았다. 몸을 쭉 빼는 주자서의 허리를 붙잡은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아직 밖에 비가 오는데 몸이 젖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속을 물리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비를 맞으며 걸으시는데 내가 어찌 마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마차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서가 주대인을 스승님으로 부르면 주대인만 곤란해져.” 온객행의 말에 얌전히 마차에 탄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난 아직도 네가 온전하게 행동하면 어색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젖은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부군, 풍한이라도 들까 걱정입니다. 어서 젖은 장포를 벗어요.” 주자서는 자연스럽게 온객행의 시중을 받아 젖은 장포를 벗으며 말했다. “멀쩡한 것이 오래가지는 않네.”

진흙이 잔뜩 튄 신발을 본 온객행이 주자서의 발을 잡고 말했다. “아서! 신발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 갑자기 발이 잡아당겨진 주자서가 휘우듬하게 몸이 기울며 말했다. “비가 와서 질척질척한 땅을 밟아서 그래.” 온객행이 주자서의 신발을 벗겨 진흙을 털며 말했다. “아서, 이게 얼마짜리 신발인 줄 알아?”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렇게 좋은 거면 너 신어. 나는 원래 신던 신발이 더 좋아.”

온객행이 비단신의 진흙을 다 털어내고 다시 주자서의 발에 신겨주며 말했다. “진왕이 내가 이 신을 신은 것을 보면 바로 목을 치려고 들걸?”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다른 신발도 챙겼지?”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군의 행장을 살피는 것도 소첩의 일이지요.” 주자서는 휘장 밖에 내리는 비를 보다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부군이 계시면 소첩에게 어찌 잠 못 드는 밤이 있겠습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노온. 장난 그만하고 확실하게 말해. 정말 괜찮은 거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정말이야 아서, 아서만 옆에 있으면 나는 괜찮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노온.” 온객행이 답했다. “나는 괜찮아, 아서.”

(95) 계성 원야 園冶
雖由人作 宛自天開.
비록 사람이 만들되 하늘에서 만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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