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분해서 하는 노래

悲憤詩
비분시 蔡琰(채염)

漢季失權柄 董卓亂天常 志欲圖篡弒 先害諸賢良
한말에 황제는 권력을 잃고 동탁이 세상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죽이고자 해서 먼저 어진 사람 모두 해쳤네

逼迫遷舊邦 擁主以自彊 海內興義師 欲共討不祥
임금 을러 옛 서울 옮기고 임금 세워 권력 오로지 했네
천하가 의로운 군사 일으켜함께 사악한 놈 치려했네

卓眾來東下 金甲耀日光 平土人脆弱 來兵皆胡羌
동탁 무리 동쪽으로 내려오니 금빛 갑옷 햇볕에 더욱 빛났네
현지 사람 모두가 허약하지만 들어온 병사는 모두 오랑캐 강족

獵野圍城邑 所向悉破亡 斬截無孑遺 尸骸相撐拒
들판 말 달리고 성읍 에워싸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무너졌네
모두 베어버리고 남기지 않으니 시체와 해골 서로 부대꼈네

馬邊懸男頭 馬後載婦女 長驅西入關 迥路險且阻
말 옆구리엔 남자머리 걸고 말 뒤에다간 여자들 실었네
멀리 말 달려 서쪽 함곡관 드니 길은 험하고 험했네

還顧邈冥冥 肝脾為爛腐 所略有萬計 不得令屯聚
고개 돌려 보니 아득아득 애간장 끊어질 듯 하네
잡은 사람 만 명 헤아리는데 같이 모이지도 못하게 하네

或有骨肉俱 欲言不敢語 失意幾微間 輒言斃降虜
골육이 함께 있어도 말도 하지 못하네
조금이라도 기분에 들지 않으면 바로 욕하기를 “쳐죽일 포로놈아

要當以亭刃 我曹不活汝 豈敢惜性命 不堪其詈罵
칼로 죽일 테니 너희들 죽음 목숨이야”
목숨 어찌 아까우리오 욕짓거리 참기 어렵네

或便加棰杖 毒痛參並下 旦則號泣行 夜則悲吟坐
더러 몽둥이 휘두르니 독한 맘 고통과 함께 일어나네
아침이면 울며불며 끌려가고 밤이면 비통하게 주저앉았네

欲死不能得 欲生無一可 彼蒼者何辜 乃遭此厄禍
죽으려 하나 죽을 수 없고 살려 해도 살길 없네
아! 하늘이여 무슨 죄 지었기에 이런 재앙 내리시나요?

邊荒與華異 人俗少義理 處所多霜雪 胡風春夏起
오랑캐 땅 중원과 달라 사람들은 의리가 없네
머무는 곳 서리 눈발 많고 모진 바람 봄여름에도 일어

翩翩吹我衣 肅肅入我耳 感時念父母 哀嘆無終已
펄럭펄럭 내 옷깃 나부끼며 휘잉하며 내 귓전 들어오네
계절 돌아 부모 생각 간절하여 슬픈 애탄 끝이 없네

有客從外來 聞之常歡喜 迎問其消息 輒復非鄉里
중원에서 손님이 왔다 하면 그 말 듣고 언제나 들뜨지만
맞아 들여 소식 물어보면비통하네 고향 사람 아니네

邂逅徼時願 骨肉來迎己 己得自解免 當復棄兒子
꿈에도 바라던 바 이루어 골육이 나를 맞으러 왔네
나는 풀려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버려야 하네

天屬綴人心 念別無會期 存亡永乖隔 不忍與之辭
하늘이 점지한 아이 헤어지면 다시 못볼 생각하니
살아서나 죽어서도 영원이 떨어지니 차마 작별인사도 못하는데

兒前抱我頸 問母欲何之 人言母當去 豈復有還時
아이 다가와 내 목을 껴안고는 묻기를 엄마 어디가요
사람들이 엄마 이곳 떠난다는데 언제 다시 돌아오시나요

阿母常仁惻 今何更不慈 我尚未成人 奈何不顧思
엄마는 항상 인자하셨는데 지금은 왜 이리 매정하신가요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는데 절 버리고 가시면 어떡하나요

見此崩五內 恍惚生狂痴 號泣手撫摩 當發復回疑
이 꼴 보자니 억장이 무너지고 어질어질 미칠 것만 같네
울며불며 아이손 어루만지며 떠나려다 다시 돌아보며 머뭇머뭇

兼有同時輩 相送告離別 慕我獨得歸 哀叫聲摧裂
함께 잡혀온 사람들도 송별하며 이별하는데
나만 돌아가니 부러워하네 우는 소리 맘이 찢어지고

馬為立踟躕 車為不轉轍 觀者皆歔欷 行路亦嗚咽
말 또한 멈춰서서 머뭇거리고 마차도 떠나려 하지 않네
보는 사람 모두가 흐니끼며 길가는 사람도 모두 목이 메네

去去割情戀 遄征日遐邁 悠悠三千里 何時復交會
아! 애타는 정 끊어버리고 수레 달리니 날마다 멀어지네
머나먼 삼천리 길 언제나 다시 만나리오

念我出腹子 胸臆為摧敗
내 배로 낳은 아이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네
既至家人盡 又復無中外 城郭為山林 庭宇生荊艾 白骨不知誰 縱橫莫覆蓋
집에 왔건만 사람은 없고 친척도 하나 없네
성곽은 산림으로 변하고 마당엔 가시 쑥만 자랐네
누군지 모를 백골들이 여기저기 나뒹구네

出門無人聲 豺狼號且吠 煢煢對孤景 怛吒靡肝肺
문을 나서도 인기척 하나 없고 이리 승냥이만 울어대네
우두커니 외로운 그림자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애간장 끊어지네

登高遠眺望 神魂忽飛逝 奄若壽命盡 旁人相寬大
산에 올라 사방 바라보니 정신은 각중에 멀리 날아간 듯 문득 목숨 끝난 듯하네
주위 사람들 마음 크게 먹으라 하네

為復彊視息 雖生何聊賴 託命於新人 竭心自勖勵
다시 한번 정신 차리려 하지만 살아간들 무슨 기쁨 있으리오
새로운 사람 만나 인생 맡겼으니 마음 단단히 잡고 애써야 하네

流離成鄙賤 常恐復捐廢 人生幾何時 懷憂終年歲
오랑캐 땅에서 괄시받았기에 다시 버려질까 늘 두렵네
남은 인생 얼마일지시름 품은 채 살아가리


채염(蔡琰 약 177년-?)의 원래 자(字)는 소희(昭姬)이다. 하지만 나중에 진(晉)나라가 세워진 후 개국황제의 부친인 사마소(司馬昭)의 이름과 같아지자 문희(文姬)로 바꿨다. 동한시대 진류어(陳留圉) 사람이다. 진류어란 지금의 하남성 기(杞)현에 해당한다.

채염은 16세 때는 명문의 후예인 하동(河東)의 위중도(衛仲道)와 혼인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혼한 지 얼마 후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 문희는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신세로 전락해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동한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동탁이 무력을 앞세워 수도인 낙양을 점령해버렸다. 채염은 동탁의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장안으로 이사해야 했다. 나중에 남흉노에 포로로 잡혀 흉노 좌현왕(左賢王)에게 시집갔다. 당시 채염의 나이 23세였다. 다행히 좌현왕은 문희를 몹시 아껴 자신의 왕비로 삼았고 채염은 남흉노에서 12년을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조조(曹操)가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의 옛 친구였던 채옹을 떠올렸다. 그가 사도 왕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후사(後嗣)가 없었고 혈육이라곤 딸 채염만 남은 것을 동정해 채염을 데려오고자 했다. 건안(建安) 8년 조조가 많은 금을 주어 좌현왕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좌현왕은 본래 채염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조조에게 대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문희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희의 한나라 귀국’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희는 한편으로는 고향을 찾아가는 기쁨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 및 아이들과 헤어지는 슬픔에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모순적인 정서 하에 창작한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다. 호가란 북방의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악기 이름이다. 음악에 재능이 뛰어난 채염이 흉노 땅에 살면서 호가의 연주법을 배워 호가로 작곡을 한 것이다. 이때 채염의 나이 35세였다.

문희가 중원에 돌아온 후 조조의 주선 하에 둔전도위(屯田都尉) 동사(董祀)에게 세 번째 시집을 갔다. 동사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문희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군법을 어겨 사형에 처해질 처지에 놓였다. 문희는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직접 조조를 찾아가 구해줄 것을 청했다. 사서에는 “문희가 한겨울에 헝클어진 머리에 맨발로 조조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했는데 그 소리가 분명하면서도 슬프고 처량해 보는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고 전한다. 조조도 문희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동사를 사면해주었다.

문희는 문학에도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부친인 채옹의 작품 400여 편을 기억해 다시 쓴 것 외에도 또 여러 수의 시가를 지었다. 후대에 채옹의 이름으로 전해진 작품은 모두 그녀가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문희가 지은 시 중에 ‘비분시(悲憤詩)’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란 두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비분시를 소개한다. 여자의 인생에 남자만큼 불행한게 없다. 억지로 끌려간 오랑캐땅에서 본인의 의지가 아닌 또 누군가의 의지로 돌아왔지만 결국은 또 남자때문에 고생을한다. 지금도 그런데 전한시대인 그때는 얼마나 더했을까? 기구하고 슬프다. 채염은 능력도 뛰어났고 집안도 좋았기 때문에 서럽고 비통한 마음을 시로 남겨 아직까지 전해지기라도 했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수많은 여자들은 이보다 얼마나 더 억울하고 비통한 삶을 살았을까? 대체 얼마나 더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야 사람이 될 수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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