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26

26. 德蕩乎名 知出乎爭
덕은 명예로 어지러워지고, 지식은 다툼에서 나온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걸어 양산박에 다다랐다. 태산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습지로 봄에는 물이 많지 않아 땅이 드러난 곳이 많았다. 호수에는 아침부터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이동하는 나룻배가 여기저기 보였다. 태산 바로 아래 있는 동평성으로 가려면 이 습지를 건너야 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나루터에는 배가 별로 없었다. 몇 일 동안 씻지도 못하고 열심히 걸은 두 사람의 행색은 별로 좋지 못해 뱃사공이 그들의 승선을 몇차례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두사람은 나루터에 앉아서 배가 많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에게 많이 익숙해졌는지 선창에 앉아 온객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매고 있던 봇짐을 안고 나룻배가 하나 둘 모이는 것을 보았다. 주인 없이 부두에 매여 있던 배들의 주인이 하나 둘 모이고, 호수너머 동평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배도 보였다.

두사람이 정답게 앉아 있는 것을 보던 어떤 늙은 뱃사공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자네 혈육은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 것인가?” 나룻배를 젓던 노인이 머리에 쓴 갈대로 짠 쓰개를 벗으며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숙여 눈을 뜨지 않는 주자서를 한번 보고 늙은 뱃사공에게 답했다. “많이 걸어 기진한 것입니다. 어르신.”

온객행의 말에 노인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어디까지 가는가?” 저 멀리 습지너머 보이는 산은 태산의 산맥 중에 하나인 대채산(大寨山)이다. 온객행이 손을 들어 이제 막 잦아들기 시작한 안개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켰다. 뱃사공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이 손가락질 한 곳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태산으로 가는 손님이군.” 온객행은 뱃사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뱃사공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시선을 잠깐 옮겼다가 말했다. “숭산에서 왔소.” 노인은 대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는 주자서를 한참 보다가 배에 타라고 손짓했다. 온객행이 뱃삯을 흥정하려고 하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뱃삯은 그대들의 이야기로 받겠소.” 온객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을 보았다.

온객행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노인이 말했다. “내가 주(朱)가에 진 빚이 있으니 갚는 걸로 칩시다.” 온객행이 까닭을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자 노인 역시 당황하여 물었다. “그 공자는 주(朱)가의 공자가 아니오?” 노인이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온객행이 “주(朱)씨요? 주(周)씨가 아니라요?” 노인은 익숙하게 선창에 배를 매고는 말했다. “낙릉의 주(朱)가 공자가 아니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주자서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금방 눈을 떴다. 눈을 뜨고는 앞에 배를 묶어 놓은 사공과 온객행을 번갈아 보며 눈을 굴렸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아서는 낙릉 주가 사람이야?” 주자서는 얼른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뱃사공이 온객행을 거들었다. “낙릉 형림에 주가가 아니오? 가주와 아주 많이 닮았구려.”

주자서는 공손히 공수하며 뱃사공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저는 양주에서 온 주자서라 합니다.” 뱃사공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양주에서 왔단 말이오? 기주 낙릉의 주가가 아니오?” 주자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저는 양주 회계 사람입니다.” 온객행이 말했다. “태어난 곳이 그런 것이지 평생 임해에서 살았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뱃사공은 자신이 무례를 범했다며 뱃삯을 받지 않고 그들을 동평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주자서는 주구전과 만난 뒤에 그에게 노잣돈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순박하게도 염낭을 펼쳐 들어 있는 동전을 모두 사공에게 보여 주었다. 사공은 그럴 수 없다며 받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서툰 것을 눈치챘다. 아마 양주에서는 직접 돈을 쓸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염낭을 뺏고는 뱃사공에게 말했다. “아서가 배를 그냥 탈 수 없다 하니 이 근처에서 하듯이 나룻배를 한번 건너는데 내는 닷푼을 두사람의 몫으로 열푼이오.” 그리고 염낭에서 동전 열개를 세서 뱃사공의 손에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배가 드나드는 것을 구경하면서 사람들이 값을 치르는 것도 보았기 때문에 뱃사공은 온객행에게 받은 돈을 수긍했다. 나룻배 한번 타는데 닷푼은 꽤 비쌌지만 양산에서 동평까지는 백리가 넘으니 아주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었다. 양산박은 물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어디는 얕고 어디는 깊다 한다. 그러니 보통의 호수를 건너는 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온객행은 배에 타기 전에 나루에 나와 있던 사람들에게서 뱃사공의 몫까지 요기할 것을 사고는 배에 탔다. 뱃사공은 다른 배들과 부딪히지 않게 천천히 배를 몰아 수심이 깊은 곳을 향했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배 가운데에 햇빛을 피할 수 있게 갈대로 엮어 놓은 풍막 아래에 앉아 사공이 노를 젖는 것을 보았다.

주자서는 또 온객행의 어깨를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주자서가 잠이 많아 진 것이 불안하여 온객행은 자고 있는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다 몇 번이고 맥을 짚었다. 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내공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걸어서 많이 지쳐 있었다.

길 중간에 멈춰 온객행이 사온 음식을 먹을 때도 주자서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온객행만 애가 타서 몇 번이고 권했지만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풍막에 기대 자고 있는 주자서에게 겉에 입은 호복을 벗어 덮어주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사공이 말을 붙였다. 사공은 처음에 주자서를 잘못 알아본 것이 미안했는지 온객행과 주자서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온객행은 처음에 사공이 꺼낸 그 낙릉 형림의 주가에 대해 물었다. 형림은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지만 주(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고 했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왔고 선조가 북방 출신이라 대체적으로 무공이 높고 호방하다고 한다. 북방에서 침략하는 이민족을 막아내어 큰 공을 세우고 부마가 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온객행이 추임새를 넣자 사공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지금 태산 태수의 부인이 낙릉의 형림 출신이라고 했다. 주(朱)가의 여식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주가와 사돈을 맺은 자들 중에 기주와 청주에서 크고 작게 벼슬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사공은 그가 태수의 아들인 장공자와 아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반나절을 배를 타고 도착한 동평은 황혼으로 붉었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뱃사공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태산 바로 아래 있는 태안성까지는 이제 이틀 정도 산을 넘으면 도착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만류를 꺾고 동평호수가 보이는 비싼 객잔에 방을 잡았다. 약간 돈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한방을 쓰게 된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불평했지만, 온객행이 사람을 시켜 목욕통을 준비하자 금방 입을 닫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그동안의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부지런히 몸을 씻고 주자서의 시중을 들었다. 주자서는 노곤했는지 온객행이 머리를 감겨주자 몇 번이나 물에 얼굴을 처박고 목욕물을 마셨다. 온객행이 웃으며 목욕통에 고개를 기대게 하자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귀여워 온객행이 소리 내어 웃자 주자서는 잠시 깼다가 다시 잠에 빠졌다. 온객행은 물이 차가워질까 서둘렀다.

깨끗이 씻은 후 더러워진 낡은 옷을 입을 수는 없어서 온객행이 객잔에 있는 점원에게 돈을 얹어 부탁한 옷을 입었다. 중의 없이 간단히 내의와 장포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온객행은 점원에게 동평 안에 포목점이 있는지 물었다. 점원은 난처한듯 포목점은 태안성에 가야 있다고 했다. 옷을 짓는 장인도 없다 했다. 보통 포목점에서 산 옷감으로 집에서 지어 입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오수전 몇 개를 손에 쥐어 주며 간단히 요깃거리를 부탁했다. 음식의 가격보다 많은 돈을 받은 점원인 신이 나서 음식과 함께 차를 내왔다. 얇은 옷을 입고 평상에 앉아 졸고 있는 주자서에게 음식을 권하자 주자서는 거절하지 않고 잘 먹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이제 이틀 뒤면 태산 태안성이야. 이제 어디로 누구에게 가는지 나에게 말해줘도 괜찮지 않아?” 주자서는 찬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에 찻잔에 차를 따라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서 주대인께서 태산에 누굴 만나라고 하셨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내민 차를 마시고 말했다. “태산 동군의 진부대장.” 온객행은 그렇게 낮은 지위의 사람은 잘 알지 못했다. 태산 태수인 장순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온객행이 “그렇구나.” 하고 흐리터분하게 반응하자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진부대장님은 스승님의 친우셔.” 온객행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주자서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오래전에 도성에서 유학하셨는데, 그때 함께 수학했던 동창이라 하셨어.”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주대인께서 서신이나 인장을 남기지 않았는데 그분을 찾아 간다고 너를 아실까?” 주자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지적한 점에 대해 생각했다.

간단히 요기한 두사람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주자서는 이제 같은 침상에서 함께 자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불을 펴고는 온객행이 누울 공간을 놓고 안쪽으로 들어가 먼저 누웠다. 주자서는 침상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어 버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이불을 잘 정리해준 뒤에 객실 아래에 있는 주루로 향했다.


노야에게 받은 은전이 얼마 남지 않아 여비를 벌려면 호구를 하나 잡아야 했다. 기루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객잔은 호수가 잘 보이도록 높은 누각을 지어 두었다. 게다가 날씨가 많이 풀려 밤에도 많이 쌀쌀하지 않았다. 비단 피풍의를 걸친 귀족들이 그 곳에 앉아 시를 읊는 것을 본 온객행이 난간에 기대어 입을 열었다. “주당들은 각각 호수에 앉아, 긴 바람 큰 물결 일어도, 술을 실어오는 배를 멈출 수는 없네. 나는 긴 표주박 가지고 파구에 앉아 사방 주객께 술을 따르며 시름 흩어지게 하려 하오.”(83)

온객행을 보고 있던 비단 옷을 입은 공자 하나가 온객행을 칭찬하며 난간으로 다가왔다. 온객행은 공손이 손을 모아 인사하고 본인을 태호파의 온요라고 소개했다. 귀족들은 그가 무공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조예가 깊다며 술을 대접했고 온객행은 술을 얻어 마시며 지금 낙양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것을 흘렸다. 그들은 꽤 높은 집안의 자제들인지 낙양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대략적인 부분은 알고 있었다. 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미약으로 해쳐 참수당했다는 이야기다.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얼추 맞았다. 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제(濟)왕이 낭야왕의 낙양행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남중랑장의 죽음을 아직 모르는 것인가? 아직 장례를 치렀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황궁에서 아직 사마흠의 시신을 내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가 죽은 것을 덮고 싶어 하는 것일까?

온객행은 귀족들을 떠보며 그들이 하고 있는 패물을 눈 여겨 보았다. 주자서는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나고 싶어 할 것이고, 이 치들은 점원에게 턱턱 내어놓는 은자를 보면 패물 몇 개 없어 졌다고 크게 상관할 자들도 아니었다. ‘아마 성현의 길을 걷는다는 호화로운 유람을 하는 자들 일 테니….’ 아랫것을 대하는 태도가 퍽이나 거만하다. 온객행이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자 온객행의 손에도 은정이 쌓였다. 온객행은 맥이 풀려 귀족들이 하는 대로 두었다.

그 중에 가장 상석에 앉은 공자가 자신을 녹수 석가(石家)로 소개하였다. 석가의 씀씀이가 사치스러운 것이 산기상시 석중의 친 인척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매고 있던 산호 요패를 풀어 온객행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저 멀리 동영에서 온 산호로 만든 것이오. 이것을 가지고 낙양성으로 이 석모를 찾아오면, 내가 그대를 천거하겠소.” 온객행은 머리를 조아리고 두손으로 그 요패를 받아 들었다. 산기상시를 하고 있는 것은 석중이지 그대가 아닌데 벼슬도 없는 나부랭이가 무슨 수로 온객행을 천거를 한다는 말인가? 온객행은 속으로 귀족들을 비웃으며 술을 마셨다.

알고 있는 시가를 몇 개 읊고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자 벌써 몇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마시는 즉묵노주는 청주에서 많이 마시는 황주로 탁하고 맛이 달다. 그리 독한 술은 아니지만 이들은 온객행이 객잔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벌써 한 두 시진동안 노주를 데워 마셨으니 취기가 많이 올랐을 것이다. 온객행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귀족을 부축하는 척,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요패를 끌러 소매에 숨겼다. 점원에게 그를 넘겨주고 또 다른 귀족을 부축하는 척 다가가 패물을 슬쩍했다.

모양이 화려한 것은 장식용이다. 하지만 빛이 은은하고 손때가 탄 것은 물질적 가치를 차치하고도 귀중한 것이다. 온객행은 태안성에 도착하여 눈 여겨 보았던 패물을 태호파로 보낼 생각이다. 조경의 이름으로 도착한 물건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이미 흙탕물이 되어버린 물 속에 숨는 것은 오래전에 진흙이 되어버린 온객행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75) 두둑하게 한바탕 챙긴 온객행이 객실로 올라가 주자서의 옆에 몸을 뉘였다. 그들은 술을 많이 마셨으니 내일 중천까지는 눈을 뜨지 못 할 것이다. 아정하신 주자서는 아마 또 새벽같이 일어나 길을 재촉할 것이다. 온객행은 잠이 든 주자서의 얼굴을 한번 쓸어보고 눈을 감았다.

어슴푸레한 빛에 이미 옷을 다 입은 주자서가 온객행을 깨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온객행에게 젖은 수건을 주고 벗어 놓은 장포를 가져와 입혔다. 아침이 이른 주자서는 자고 일어나면 다시 기운이 채워진 것처럼 길을 재촉한다. 중의 없이 내의 위에 걸친 장포가 주자서의 몸을 비춘다. 어떻게 보면 가냘픈 것 같은데, 또 다시 보면 건장하다. 허리춤에 매인 옥패가 흔들 거리는 것이 색스럽다.

투박하게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를 풀어 잘 빗고 흰색의 긴 끈으로 반만 묶어 내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빗을 주자 주자서는 한숨을 쉬고는 온객행의 머리를 빗겨주고 똑같이 머리를 묶어 주었다. 두 사람은 일출하는 시간에 맞춰 방 값을 치르고 점원에게 넌지시 양주 오(吳)에 태호로 간다고 말을 흘렸다. 주자서는 행동을 조심하는 것으로 알고 온객행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두사람은 이틀 뒤 태안성에 도착했다.


태산의 태수 장순은 공정하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교학자 집안이었다. 그의 일족은 태산에서 제음서원을 운영하였는데 과거 남방의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그 곳에서 많은 유생들이 망국에서 벼슬을 했다. 지금이야 나라가 망해서 그 명성이 덜하지만 그들의 선조 중 한 명이 과거 육경을 수정 집필하여 세운 비석은 유학자들이 태산을 찾게 했다.

태산의 성 주변, 기주와 청주의 사정은 또 달라서 시도 때도 없이 세금을 뜯어내는 기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러니 바로 지척에 있는 평원 태수나 연주 자사에게 장순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출신과 능력에 비해 관직이 낮았다. 주자서는 태안성에 도착하자 마자 관청으로 가 진부대장을 뵙기를 청했다.

그들이 온객행과 주자서의 출신에 대해 묻자 주자서는 한참 망설이다 사계산장이라는 이름을 내놓고 말았다. 한 시진 정도 관리들이 정무를 보는 정실에 앉아 찻물을 들이켰다. 정실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물건들은 낡았지만 아주 잘 손질되어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곧 정실안으로 무장을 한 무관이 들어왔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서 온객행은 포권하여 들어온 관리에게 인사했다.

무관은 그들에게 예를 거두라고 말한 뒤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두사람이 고개를 들자 보사가 가지고 들어온 차를 마시던 무관의 시선이 주자서에게 박혔다. 그는 차를 마시다 말고 찻잔을 다시 내려 놓고는 일어나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영아?” 주자서는 당황하여 고개를 바닥에 조아렸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영아?” 곧 뒤로 무관이 한 명 더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동군의 부대장 진영이라고 소개했다.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주자서의 몸을 일으키는 무관을 턱짓하며 “태산 태수…님?” 이라고 물었다. 그러자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태산 태수 장순을 다시 보았다. 그는 주자서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시울이 붉어 졌다. 주자서도 장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던가? 온객행은 당황하여 옆에 있는 진영을 보았다. 진영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주자서와 온객행이 차를 마시고 있던 탁자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사람이 정결하면 욕보이기 쉽고, 스스로를 아끼는 자는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며, 남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못할 짓을 한다 했습니다.(47) 태수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온객행도 눈치를 보다가 진영 옆에 가서 앉았다. 장순이 주자서를 탁자로 데려와 자리를 권하고 스스로 앉으며 말했다. “남에게 차마 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못할 짓을 하셨지….” 온객행을 제외한 세 사람의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 앉았다. 탁자에 앉은 네 사람 중에 사정을 모르는 것은 온객행 뿐이다.

주자서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숭산에서 보았을 때 낯설었던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주구전이 해준 이야기를 했다. 낭야왕과 조왕이 작당을 하고 황제를 식건전에 감금한 것과 기왕을 미약에 중독시켜 죽인 것까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한 적 없으니 모두 주구전이 말해준 것이다. 대체 어디서 주워서 조각을 맞춘 것인지 상황이 모두 맞아 떨어졌다. 장순은 주자서의 말을 듣고도 한참 주자서의 얼굴만 보았는데 온객행은 그것이 매우 불쾌했다.

온객행은 일부러 목을 가다듬고 차를 마시며 주자서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 앉았는데 침울한 주자서는 온객행이 그의 팔을 쓰다듬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말을 모두 전한 주자서가 일어나 장순과 진영에게 인사했다. 온객행도 얼떨결에 같이 일어나 인사했다.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주자서를 잡은 것은 장순이 아니라 진영이었다. “주(朱)공자. 그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가 많네.” 주자서는 공손히 소매를 올리고 답했다. “앞으로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지나간 옛날은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저는 복은 깃털보다 가벼움을 알고, 재앙은 땅덩이보다 무거운 것을 알고 있으니 저에게 중하(重荷)를 지우지 마소서.”(84)

이름을 찾겠다던 기세는 어디로 갔을까? 주자서는 평온한 얼굴로 장순과 진영에게 한번 더 절했다. 장순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주자서의 팔을 붙들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주자서와 진영의 표정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무의식적으로 주자서의 손을 찾아 잡았다. 맥을 짚어 볼 때처럼 잡힌 손은 차게 질려서 주먹을 꽉 쥐었다. 또 그 표정이다. 차라리 울어버렸으면 나았을까?


온객행과 주자서는 결국 관청의 정실을 떠나지 못했다. 장순과 진영이 업무를 모두 마칠 때까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장순은 연주자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연주 자사는 지금 청주에 있는 제(濟)왕과 함께 있으니 낭야왕의 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청하를 그냥 둘지 아니면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태산태수는 허가 없이도 청하를 공격할 마음이 등등했다. 일을 하던 진영은 얼마 뒤 말없이 정실을 나갔다. 날이 저물자 장순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데리고 본인의 사가로 갔다.

장순의 집은 제음서원 바로 옆에 있는 저택이었는데 들어보니 태수의 저택이 아니라 제음서원 별원으로 불리는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에 비해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행동이 깍듯하고 다정했다. 두 사람은 작은 별채에 나란히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와 함께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하인이 온객행을 막았다. 온객행은 당황하여 주자서를 불렀지만 주자서는 온객행을 한번 보고 고개를 젓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온객행은 밖에서 한참 “아서! 아서야 아서!” 라고 불러 댔지만 지나가던 하인들의 눈총만 샀다.

그날 저녁 온객행과 주자서는 내원으로 저녁식사를 초대받았다. 내원이라 함은 외가의 남자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의아하여 온객행이 여러 번 다시 묻자 하인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갈아 입을 옷과 소세할 물을 가져와 시중을 들었다. 온객행은 죽기전에 입어 볼 수 있을까 싶었던 얇은 비단 옷을 입고 관을 했다.

면경에 보이는 저 남자는 어디 권문세가의 공자처럼 보였다. 온객행이 별채에서 나오자 밖에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던 주자서와 만났다. 주자서는 짙은 푸른색의 비단 옷을 입고 머리를 올렸는데 원래 그런 옷을 입은 사람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아서…. 내가 오늘 아서에게 좋아한다고 했던가?” 주자서는 하인의 눈치를 보고 온객행의 팔을 밀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 입을 열지 말게.”

온객행은 넓은 소매를 흔들어 절하는 것처럼 앞으로 모으고는 말했다. “저 미인 키도 크고 날씬한데 비단에 엷은 홑옷 입었네.(9) 어떻게 이 모습을 보고 찬양할 수 없단 말입니까.” 온객행은 주자서를 부군이라고 부를까 하다가 하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온윤한 옥돌 같으신 온공자와 같겠습니까?”(40)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하하하’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두사람은 내원 밖에 횃불을 밝혀 준비된 식탁에 앉아 집주인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오늘 저녁을 함께 할 사람이 아주 많았는지 자리가 매우 많았다. 자리에 이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흘끔거렸다. 주자서를 보고 수근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객행은 괜히 기분이 나빠 수근 거리는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태수가 들어오고 태수 옆에 주(朱)씨 장부인이 함께 들어왔다. 장부인은 주가의 여식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품 있고 단아했다.

자리가 하나 둘 차고 장순의 아들 장양(張壤)이 내원으로 들어왔을 때 온객행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장양은 주자서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는데 선이 굵고 몸이 두툼했다. 그는 태산파에서 수학했다고 했는데 확실히 단련된 내공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는데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긴 자기 얼굴은 저보다 남들이 더 많이 볼 테니,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왜 장양과 주자서를 번갈아 보며 속닥대는지 장본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한참 시선을 굴리던 주자서와 눈이 마주쳤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지?’싶은 얼굴로 마주하자 주자서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주었다. 온객행은 괜히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오늘 이 밥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네 편이야.’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네 편이야. 아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지만 곧 제음서원의 선화선생(宣龢先生) 장횡(張宖)이 나타나서 꿀떡 삼켜버리고 말았다. 온객행은 아쉬워서 주자서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83) 원결 병서(幷序) 石魚湖上醉歌 석어호에서 취하여 노래 부르다.
酒徒歷歷坐洲島 長風連日作大浪 不能廢人運酒舫 我持長瓢坐巴丘 酌飮四座以散愁.
주당들은 제각기 호숫가 섬에 앉았네, 긴 바람 연일 큰 물결 일으켜도, 우리의 술 실어오는 배를 멈출 수는 없네, 나는 긴 표주박 가지고 파구에 앉아서, 사방 주객들에게 술 따르며 시름 흩어지게 한다오.

(84) 장자 내편 4 인간세
來世 不可待 往世 不可追也
앞으로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지나간 옛날은 따라갈 수 없네.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복은 깃털보다도 가벼운데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줄 모르며, 재앙은 땅덩어리보다도 무거운데 피할 줄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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