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桑土綢繆
근심과 재앙에 미리 대비하라.
황제가 마신 것 중에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데운 술이었다. 연주자사의 부친 경릉공 왕혼이 바친 호골주는 황제와 조왕, 낭야왕 밖에 마시지 않았다. 그 셋 중에 술을 데워 마신 것은 황제뿐이다. 황제의 냉증은 황족뿐만 아니라 궁궐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고질병이다. 원래 그 기운이 뜨거운 초오가 섞인 술을 데워 마셨으니 미량이라 하더라도 탈이 났을 것이다. 황제가 안주로 함께 먹은 잉어는 찬성질의 음식이니 초오의 기운이 천천히 돌게 했을 것이다.
엽백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처음 장명산에서 나왔을 때 알고자 했던 것은 황족의 권력 놀음이 아니었다. 엽백의가 알고자 하는 일에 황족이 연관된 일은 사실이나 황족의 일에 간섭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음날 황제는 기운을 보하는 탕약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재종형제인 남중랑장 사마흠을 시켜 일을 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날 오후 하구에서 풍년제를 지냈다. 엽백의는 황족들의 행태에 엽백의는 마음이 거북하였다.
황제의 일을 듣고 낙양에서 달려온 태의에게 천자의 증상을 말하고 엽백의가 떠나려고 하자 황제는 은인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엽백의를 잡았다. 황제는 본인의 아들인 조왕과 진왕은 물론 그에게 충절을 맹세한 기왕도 믿지 못했다. 엽백의는 그가 원래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지 아니면 천자의 앉은 자리가 그를 병들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제 앞에 무릎 꿇은 엽백의가 포권하며 말했다. “못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는 땅밖에서 서로 살고자 습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 때와 같겠습니까?”(61) 엽백의는 황제가 제령을 잊었나 했다. 강호가 황실의 일에 관여하지 않듯, 황실 역시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보니 황실과 강호는 서로에게 너무 많이 관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는 엽백의의 말을 듣고 아쉬운 듯 그에게 은 백 냥을 내렸다. 엽백의는 그것을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시라 부탁한 뒤에 평락원을 나왔다.
황제의 재종형제 중 하나인 사마헌은 10년전 문성왕으로 봉해져 익주자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청성곡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지금 사례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남군의 유격장군 사마량의 장사이다. 그는 10년전 청성곡의 일이 일어난 후 익주에서 떠나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가 익주에서 어떤 일을 했고, 왜 봉지를 버리고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을까? 10년 전 청성곡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산세가 험하고 거주민이 별로 없는 익주에 문성왕 사마헌이 주자사로 봉해진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황제의 이복동생인 낭야왕 사마운의 총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엽백의는 주구전에게서 청성곡의 일을 조사했던 서국공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왜 청성곡의 마을 사람들이 그날 모두 독살당했는지 알 수 있을까?
청성곡의 사람들이 마신 독은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독이 아니었다. 따로 독에 조예가 있는 자가 아주 교묘하게 조합한 것이다. 독에 의해 중독된 마을 사람들은 피할 겨를도 없이 산사태의 토사에 휩쓸려 죽었다. 장청의 딸 현의도 그 날 죽었다. 그 곳에서 엽백의는 청성곡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주구전을 만났다.
청성곡의 견곡주는 주구전의 은인이었다. 주구전의 동생 주구단이 막 이립이 지났을 즈음 갑작스럽게 앓아 누운 적이 있다. 그때 약초를 찾아 양주에 왔던 견곡주가 동생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청성곡의 일을 전해 들은 주구전은 양주에서 말을 바쁘게 달려 달포만에 익주 청성곡에 도착했지만 마을은 이미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살았던 마을사람 중에 아무도 그 폐허 같은 곳에서 살아나오지 못했다. 더 씁쓸했던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는 것이다. ‘청성곡에 은혜를 입은 그 많은 강호의 인사는 모두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간 것일까?’ 주구전은 청성곡에서 몇 달 지내며 시신을 찾아 묻어 주었다. 주구전이 강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청성곡에서 양주로 돌아가서 주구전은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계산장 뒷산에 머물렀다. 그때부터 주구전이 폐관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같다.
배 위에 하루동안 갇혀 있던 하인들은 갑판으로 나와 난간에 매달려 부두를 보았다. 밤에 보았단 병력중의 절반은 철수한듯 한산했고, 하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어젯밤 주구전이 잡았던 선원과 관련이 있는 하인들과 선원은 효기교위가 낙양의 관청으로 호송하였고, 조왕이 따로 고용한 하인들은 남중랑장의 명령에 의해 정주에 있는 관청으로 호송되었다. 지금 배 위에 남아 있는 하인들은 대부분 평락원 주방에서 일을 하는 하인들이었다.
대부분 과년(16세)에서 방년(20세전후)사이의 소녀들과 어멈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배부분이다. 다행히 어제 연회가 끝난 후 짐을 다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배 안에 구금되었기 때문에 주구전은 사람들을 모아 요기를 했다. 하인들이 처벌을 두려워해 먹지 않자 주구전은 본인이 값을 치룰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주자서가 주구전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 후 주구전은 배를 감시하고 있는 군관에게 가서 상황을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제 내리지 못한 남아있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주구전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를 도와 배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했던 배 안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사람들은 갑판으로 나와 햇빛을 쬈다. 주구전은 물동이에 들은 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원인이 무엇이오?” 온객행이 말했다. “초오 인듯합니다.” 온객행의 대답에 주구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자(附子)가 아닌가?” 주구전의 말에 온객행이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도성 근처에서 초오를 구하기 쉽지 않네, 사례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독성이 있는 약초의 반입이 까다로운데 황실에 관련되어 있는 자가 아니면 함부로 구할 수 없을뿐더러, 황족이 구한다 하더라도 기록을 남기게 되어 있네. 천자의 허가 없이 초오를 팔거나 산 사람은 모두 멸문의 화를 피하지 못한다 했네.”
온객행이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어제 이 배에 탄 사람 중 절반이 황족인데 초오를 구하는 것이 어디 일이겠습니까?” 온객행은 독을 쓴 자가 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엽백의가 찾으라고 했던 독을 쓰는 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조왕의 사람인지 아니면 진왕의 사람인지 아니면 강호의 인물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미시(未時)가 되자 강 하구에 상단의 배들이 하나 둘 정박하기 시작했다. 부두에 사람이 많아지자 배를 감시하던 병력도 어느정도 분산되었다. 한시진쯤 지나서 월기교위 유연이 평락원의 하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온객행에게 인사를 하고 주구전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본 유연은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소림사에서 진왕과 함께 있던 자다. 그는 진왕의 세력일까?
온객행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월기교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주구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귀비의 당질이 아니오?” ‘귀비? 이번일에 귀비도 관련된 것인가?’ 온객행은 생각했다.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평소 진왕과 친분이 두터운 듯하나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교분이라는 말이 있더이다.” 온객행이 저 멀리 평락원으로 가는 유교위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구전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교분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진왕은 황제의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평소에 군관이나 병사를 가진 자들과는 좀처럼 관계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온객행은 유교위와 진왕이 종종 초무관이라는 기루에서 채미공자의 월금 연주를 즐긴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조왕의 일을 진왕이 덮어쓰게 된 것도 유교위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다. 온객행은 그 채미공자라는 사람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주대인은 어디로 가십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공의에 짐과 마차를 두고 왔으니 그리로 갈까 하네. 소림사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용처럼 호랑이처럼 다투는 이들과 어울릴 깜냥이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양주로 돌아가고자 하네.”(53) 하고 ‘허허허’ 웃었다.
온객행은 조왕과 진왕이 주자서를 대하는 것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어서 벗어나려는 듯 떠나려고 하는 주구전도 의심스럽다. ‘저 둘은 황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온객행이 포권하며 말했다. “주대인 우리 아직 낙양성의 모란 화채를 맛보지 못했는데, 이곳까지 와서 낙양성도 둘러보지 않고 돌아가시겠습니까?”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큰 바람이 불기전에는 항상 조용하지요.” 주구전은 노야에게 뭔가 들은 말이 있는 것 같다.
공의에서 정주로 올 때 진왕의 마차를 타고 왔으니 갈 때는 걸어 가야 했다. 배를 탈까 했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삯이 싸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경공을 펼칠 수는 없으니 일단 정주성을 벗어나기로 했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괜히 군자산만 아깝게 됐구나.” 주자서가 주구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물었다. “그러게 그런 것을 왜 먹인 겁니까?” 주구전은 허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자서 옆으로 가서 물었다. “아서 왜 군자산을 먹은 거야?” 주자서가 말했다. “종조부께서 나를 유생으로 소개하셨으니 황제를 모시는 군관중에 무공의 경지가 높은 자가 있었으면 나의 무공을 의심할 것이니 그리했지.” 온객행이 주자서 곁에서 걸으며 말했다. “주대인의 제자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주자서는 곤란한 표정을 했다.
주구전이 입을 열었다. “온공자 우리 아직 청성곡의 이야기를 마치지 못한 것 같은데…” 주구전의 말에 온객행이 입을 ‘합’하고 다물었다. 그들은 한시진을 걸어 정주성문에 도착했다. 성을 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군관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배에 있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이라 주구전의 임기응변으로 정주성을 나왔다.
주구전은 가벼운 주머니를 열어 성밖 노점에서 밀떡을 세 개 구입했다. 주자서는 주구전이 산 밀떡을 소매안에 넣고 다시 공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공이 흩어진 주자서가 좀처럼 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 예농현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이 곳 객잔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다행히 예농현은 작았지만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황하와 정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객잔이 아주 많았다. 주구전은 염낭이 가벼워 허름해 보이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그런 주구전을 회유하여 근처에 그럭저럭 괜찮은 객잔에 방을 잡았다.
온객행은 돌아가지 않고 주구전 주자서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생선요리와 돼지고기튀김이 아주 맛이 좋았다. 점원이 추천한 서주의 황주도 독하지 않은데다 향긋하여 셋은 두 단지를 나누어 마셨다. 온객행은 술을 마시는 내내 주자서와 잔을 부딪히고 싶어서 안달하였는데 그것을 눈치챈 주구전이 번번히 먼저 술잔을 부딪혀왔다. 노야가 말한대로 이 노인네는 쓸데없이 눈치가 매우 좋다.
식사를 마친 세사람은 간단히 씻고 각자의 객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객실안에는 침상과 탁상이 놓여 있었다. 예농현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관청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의 잠자리를 돌보는 동안 온객행은 주자서가 머무는 객실로 들어가 주자서를 기다렸다. 온객행은 점원을 시켜 차를 준비했다. 자기전에 몸을 따뜻하게 하면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점원보다 먼저 객실로 들어왔다.
온객행을 발견한 주자서는 잠깐 놀란 듯하더니 온객행이 앉아있는 작은 탁상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노온….” 주자서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밖에서 점원이 기별했다. 온객행이 일어나 차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소반을 받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따라주는 차를 가만히 보고 있다 말했다. “노온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하네.” 그리고는 품에서 주목 요패를 꺼냈다. 온객행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주자서가 말했다. “정표를 돌려주시게.” 온객행은 품속에 넣고 있는 주자서의 영견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가 어려워하는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아서 아직 약속한 보름이 되지 않았잖아”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거야 진왕이 곁에 있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온객행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그럼 진왕을 데려오면 계속 정표를 가지고 있어도 좋다는 얘기야?”
온객행이 몸을 돌려 객실을 나가는 척하자 주자서가 얼른 일어나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노온.” 주자서의 미안한 표정이 좋아 온객행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놓지 않고 말했다. “노온 나는 조부와 함께 양주로 돌아갈 예정이네. 상황을 보니 이 일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인 듯해.”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보름이 안 지났잖아. 급히 약속하여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도 보아야 하고, 위급함을 알려 지절도 살펴보고 술에 취하게 하여 예의를 보고 호색한지도 봐야 하는데…”(62)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주모 온공자께서 군자의 절개를 시험하시는지 몰라보았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그대가 나를 공경하는 것도 살피는 능력이 있는 것도 뛰어난 지능을 지닌 것도 알겠는데 나에게 충실할지 모르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따라준 찻잔을 비우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괜히 애가 탔다.
주목 요패를 탁상에 꺼내 놓은 주자서가 일어났다. 온객행도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아서. 내게 준 영견을 돌려받지 않아도 좋아?” 주자서는 일어나서도 한참을 무언가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에 슬픔이 차오르는 것이 보여 온객행은 어쩔 줄 몰랐다. 품속에서 비단 영견을 꺼내며 말했다. “아서, 돌려 줄게 가지마.”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꺼내든 영견을 보고도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처음으로 주자서가 준 영견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서투르게 놓여있는 버들잎의 자수가 귀엽다. 솜씨가 좋지 못한 소녀가 아서에게 선물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일까 온객행은 억울했다. “아서, 이 영견은 정표로 줄 만큼 아서에게 소중한 물건이야?” 주자서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하다.
말할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주자서가 답답해서 온객행은 또 덥석 안아버렸다. 차라리 밀어내기라도 했으면 덜 조바심 났을까 가만히 안겨 있는 주자서는 조금만 더 세게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아서 그러지 마, 그렇게, 그렇게… 사라질 것 같은 표정 하지 마.”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며 말했다. “노온 그 영견이 마음에 들면 그대에게 줄게. 나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물건이니….” 온객행은 괜히 심통이 나서 영견을 요패가 놓인 탁상위로 던져 놓았다. “이런 물건은 하나도 의미가 없어. 나는 아서를 원해. 아서가 가지고 싶어.” 주자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물건이 아니니 아무도 가질 수 없네.” 온객행이 말했다. “그럼 나를 가져. 내가 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온객행은 또 그 찡그리는 얼굴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주자서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며 온객행의 어깨를 놔주었다. 그가 뒤로 돌아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얼른 팔을 낚아챘다. “주자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탁상위에 올려진 비단 영견을 보았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봤을 때 온객행은 처음으로 주자서가 낯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꾸며낸 주자서가 말했다. “온공자 그대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가시게. 내가 부탁하지.” 주자서의 말 뜻을 몰라 온객행은 주자서가 팔을 빼고 천천히 객실을 걸어 나가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시 탁상으로 와서 주자서가 올려놓고 간 요패와 영견을 보았다. 온객행은 질투가 일었다. 대체 이 영견을 준 사람은 누구기에 주자서에게 평생 잊히지 못할 사람이 되었을까? 요패와 영견을 품속에 집어넣고 온객행은 침상에 누웠다. 다시 일어나 주자서에게 갈까 하다가 예농현에서 공의까지는 걸어서 한나절은 가야 하니 그동안 동행하면서 마음을 돌려 보자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저번에도 그런 것처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밀어붙이면 주자서는 다정한 사람이라 온객행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보름 중에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온객행은 자신이 남에게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인가 스스로를 조금 자책했다.
일찍 일어난 온객행은 일부러 주대인에게 살갑게 굴었다. 주자서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온객행에게 웃어 주었지만 그 전과 달랐다. 웃고 있는 얼굴이 같은 것 같은데 같지 않다. 오늘 만난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이 알고 있던 주자서가 아닌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오후 다 늦게 공의에 도착했다. 오는 길 내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해보고 울상을 지어 보기도하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팔에 매달리는 등 잔뜩 치댔지만 주자서는 그것을 다 받아 주면서 웃기만 했다. 차라리 밀어내고 불편했으면 좋았을까? 온객행은 점점 화가 났다.
온객행의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온객행은 그와 정인이 될 수 없다면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친구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얌전히 공수하여 온객행에게 작별을 고하고 중명원으로 갔다. 온객행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온객행은 알 수 없는 행동과 몸짓의 주자서도 좋았다.
마음을 이미 다 줘버려서 텅 빈 것 같다. 사계산장의 제자라고 하니 사계산장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주자서는 그 곳에 있을 것이다. 온객행은 시간이 주자서의 마음을 돌려주기를 빌었다. 살면서 무언가 얻고자 빌어본 적이 별로 없는 온객행은 어찌 빌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온객행은 밤에도 쉬지 않고 걸어 밤늦게 낙양성에 도착했다. 낙양에도 통금이 있었지만 관의 허가가 있는 지역에서는 저녁에도 낮처럼 밝았다. 주루와 기루가 모여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 인파가 대단했다. 사내는 물론 여인도 있었다. 초무관은 그 규모가 작지도 크지도 않았는데 위치가 거리의 제일 안쪽에 있었다. 화산파가 호위한다는 소문에 맞게 화산파의 호복을 입은 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채미공자는 월금으로 유명한 사람이니 뜨내기처럼 보이는 온객행이 어떻게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은 온객행 옆에 나이에 맞지 않게 한껏 꾸민 소녀가 앉았다. “공자님, 공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초무관을 찾으셨나이까?” 소녀의 은근한 손길에 온객행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것이 있어 왔소.” 온객행은 일단 떠보기로 했다. 소녀가 살풋이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온객행이 소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짐새.”(63) 소녀는 잠시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가 다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사내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곧 주변에 있는 다른 손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공자께서 동력조를 찾으신다고 하던데…”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은 온객행의 팔을 붙들며 그를 어디로 인가 이끌었다. “찾으시는 것이 운일입니까 음해입니까?” 온객행은 이들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일단 대답했다. “운일이오.” 여인이 말했다. “그 운일에게 관(볏)이 있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를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자리를 권하고 곧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작은 탁자와 부들로 두텁게 짠 포단만 있었다. 포단위에 앉은 온객행이 조금 기다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들어왔다.
(61) 장자 내편 6 대종사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못에 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서, 서로 습기를 뿜어주고 거품으로 적셔준다. 아무렴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 때만 하겠는가?
(62) 장자 잡편 32. 열어구
故 君子 遠使之 而觀其忠 近使之 而觀其敬 煩使之 而觀其能 卒然問焉 而觀其知 急與之期 而觀其信 委之以財 而觀其仁 告之以危 而觀其節 醉之以酒 而觀其側 雜之以處 而觀其色
그 때문에 군자는 사람과 사귈 때 사람을 멀리 보내서 그 사람이 충실한지 살펴보고, 가까운 곳에서 일을 시켜 그가 일을 공경하는지를 살펴보고, 번거로운 일을 시켜보아서 그 능력을 살펴보고, 갑자기 질문해서 그 사람의 지능을 살펴보고, 급히 그와 약속을 하여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 살펴보고, 재화(財貨)를 위탁하여 그가 어진지를 살펴보고, 그에게 위급함을 알려서 지절을 살펴보고, 술로 취하게 해서 그 사람이 예의를 지키는지 살펴보고, 남녀가 한곳에 섞여 있도록 해서 호색한지 살펴본다.
(63) 짐새 혹은 짐조(鴆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새매(鷣)라는 새가 천년 묵으면 짐새로 변한다고 했다. 짐새는 독이 있는 벌레나 뱀을 잡아먹어 온몸에서 독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이 새는 동력조(同力鳥)라고 불리우며 수컷은 운일(雲日, 运日, 運日), 암컷은 음해(陰諧, 阴谐)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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