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22

22. 落花流水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주자서는 사흘 내내 온객행을 웃는 낯으로 대하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었다. 덥석덥석 끌어안아도 작게 한숨을 쉴 뿐 반응이 없다. 그래서 온객행은 더 치댔다. 소림사는 아침이 이르다. 듣기로 하루에 총 두번의 설법을 하는데 그 중 첫번째 설법이 오경 끝나자 마자 한다고 했다. 그래서 소림사에서는 묘시와 중천 그리고 술시에 종각의 종을 쳤다. 범종은 일각의 간격으로 네 번 울리는데 주자서는 네 번의 종이 다 울리기 전에 기침하는 편이었다.

일찍 일어나는 주자서 덕분에 덩달아 일찍 일어나게 된 온객행은 주자서와 함께 주방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방장이 온객행을 기억하는지 온객행은 눈칫밥도 잔뜩 먹었다. 아침 일찍 주자서는 주구전에게 서신을 두개 받았는데 주구전이 떠난 지 사흘만이다. 하나는 주자서에게 하나는 엽백의에게 온 서신이다.

주자서의 서신은 주자서가 탁상에 앉아 읽을 때 보았다. 태산에 가기 전에 개봉에서 개방의 장로를 만났다는 내용이다. 그 때문에 태산으로 가는 길이 늦어 졌으니 돌아오는 길 역시 지체될 것이다. 주자서는 읽은 서신을 다시 고이 접어 행낭에 넣어 두고 다른 서신 하나를 들고 자운당에 있는 엽백의에게 갔다. 곡우가 다가오니 점점 날이 길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진시(辰時)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대낮같이 환했다.

지객당과 주방을 오가며 보니 소림사가 부산하였는데 길을 가던 스님께 여쭈니 어제 저녁 늦게 아미파에서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듯하다.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소림사에 아미파가 왔다고 하니 신기하다. 온객행은 대웅보전으로 가서 그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주자서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아서 아미파래, 우리 가서 구경하지 않을래?”

주자서는 옷을 정리하는 척 소매를 털며 말했다. “온공자께서 궁금하시면 가서 보시지요.” 온객행이 뿌리쳐진 손으로 다시 주자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서 보자.” 온객행이 끄는 힘에 휘청이는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온공자!” 둘은 대웅보전 앞까지 갔지만 결국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원주와 도감이 대웅보전 주변을 촘촘히 경계하고 있었다. 괜히 아쉬워 얼굴을 아는 스님들께 사정해 보았지만 안에는 주지와 검선 그리고 아미파에서 왔다는 자순사태와 그녀의 제자들이 있다고 했다. 소림사에서 여성을 허가하는 일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엄중하게 경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온객행은 괜히 김이 빠져서 스님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객당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몫까지 차분하고 공손하게 인사하고 온객행의 뒤를 따랐다.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보니 주자서는 요 며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몇차례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대답만 들었다.

괜히 심통이 난 온객행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휙 돌아섰다. 뒤에 따라오던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에 부딪혀 거리를 벌리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당황한 주자서가 버둥거리며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반가운 호칭에 빙글빙글 자리에서 몇 바퀴 돌다가 주자서를 내려 놓았다. 옷차림을 정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 주자서가 스님 몇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온공자! 이게 무슨 짓이오!”

온객행이 자신의 소매를 펼치며 말했다. “가는 허리의 미인 춤추네! 더구나 화창한 봄에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리.”(67) 주자서는 아주 작지만 확실하게 ‘쯧’하고 혀를 차면서 온객행을 지나 지객당으로 향했다. 혀를 차는 소리가 기꺼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아서 오늘도 하루 종일 불경만 읽을 거야? 같은 장을 몇 시진씩 보면 뭐가 보여?”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온객행의 말을 무시했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그러지 말고 공의에 다녀오자. 아니면 배를 타고 우주나 여양을 가 볼까? 온객행의 말에 구미가 당겼는지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의 손길을 치워낸 주자서는 다시 말없이 지객당으로 향했다. 지객당에 도착해서 어제 보았던 낡은 죽간을 펼쳐 놓고 한시진이면 다 읽을 책을 중천이 다 될 때까지 보고 있다. 심심한 온객행은 주자서 옆에서 주자서가 읽는 죽간을 보았다가 스님들께 얻어온 차를 우려 주자서와 나눠 마시기도 했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오기도 했다.

중천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주자서가 앉은 탁상 앞에 턱을 괴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아서 배 안 고파?” 주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죽간에 시선을 두고 있다. 온객행은 또 지객당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 빗을 들고 주자서가 앉은 자리 뒤에 앉아서 주자서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끝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머리에 머릿기름을 발라주고 싶었지만 찾아도 없으니 그냥 잘 빗는 수밖에 없다.

처음엔 놀라서 하지 말라고 하던 주자서도 말린다고 그만둘 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온객행은 묶여 있던 주자서의 머리를 풀어 잘 빗은 다음 엽백의가 머리를 올릴 때 쓰는 기다랗고 하얀 천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반만 묶었다. 온객행은 한동안 눈을 내리깔고 책을 읽는 주자서를 구경했다. 한참 보고 있다 주자서와 눈이 마주쳤다. 주자서가 말했다. “다 보았는가?” 온객행은 ‘히히히’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남겨두고 주방에 가서 만두 몇 개를 얻어 대나무 바구니에 넣었다. 주방에서 밥을 먹는 이들 중에 온객행을 곁눈질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지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엽백의를 보고 알았다. 엽백의 옆에는 그와 아주 비슷한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온객행은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놓고 엽백의에게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스승님! 언제 아미파의 사태가 되셨습니까?” 온객행의 말에 엽백의 옆에 서있던 여인이 살며시 웃었다.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온객행은 웃으며 자순사태(慈順師太)에게 인사했다. “장명산의 제자 온객행 사태를 뵙습니다.” 자순사태는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예를 거두게.” 온객행은 인사를 하고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내려 놓았던 대나무 찬합을 들었다. 엽백의가 물었다. “어디 가느냐?” 온객행은 대답하지 않고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네 모과에게 가는 길이냐?”

온객행은 엽백의의 말을 듣고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백의는 품에서 주구전에게 받은 서신을 온객행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누누이 말하지만,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68) 우리는 원한을 사러 온 것이 아니다.” 엽백의의 말에 옆에 있던 자순사태가 미간을 찡그렸다. 온객행은 공손히 두손으로 엽백의의 서신을 받았다. 엽백의는 온객행의 인사도 듣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엽백의 뒤를 자순사태와 아미파의 제자들이 따랐다.


온객행이 지객당으로 돌아왔을 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온객행은 찬합을 놓고 지객당 근처를 뒤졌지만 주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일각쯤 추보당 근처와 비랑을 어슬렁거리던 온객행은 자운당 쪽에서 걸어오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아서 어디 다녀왔어?”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지객당으로 향했다.

지객당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방에서 얻어온 찬합에서 만두를 꺼내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아서 배고프지?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거야? 벌써 조금 식었네…” 주자서는 만두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내일 등봉에 다녀올 거야.” 등봉은 숭산 동남쪽에 위치한 성이다. 보통 숭산에 도착했다고 말하면 숭산 기슭에 있는 이 등봉을 말하는 것이다. 숭산은 산이 크고 험준하여 악산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래서 근처에 성이 들어선 도시가 많지 않다.

등봉은 숭산을 넘어 사례로 가기 위해 꼭 거처야 하는 관문이다. 온객행이 물었다. “등봉에는 왜?” 주자서가 바구니에 들어 있던 만두를 먹었다. 온객행도 손에 들려 있는 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만두를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먹은 후에도 말이 없기에 온객행은 조바심이 나서 다시 물었다. “아서 등봉에는 왜 가는 거야?” 주자서는 여상하게 차를 우리며 온객행의 말을 무시했다. 온객행은 어차피 따라갈 것이니 가서 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온객행은 고민하고 있었다. 주구전의 서신을 주자서에게 보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자서가 없어지는 바람에 잠시 잊은 서신이 아직도 품속에 있다. 온객행은 지객당으로 오기 전에 오는 길에 읽어 보았다. 낭야왕의 사병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례를 벗어나자마자 주구전은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개봉에서 만난 개방의 방주는 아주 거만하여 주구전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개방의 특색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개봉성 안에는 개방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인지 아닌지 모를 거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무공실력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개방에서 일부러 무공이 높은 자들을 불러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태산으로 향하는 연주를 지나면서 주구전은 양주로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사계산장의 제자들을 시켜 태호파와 양주 일대의 문파를 떠보게 한 것이다.

온객행은 사계산장의 소식이 있으니 알려주는 것이 맞았지만 왜 등봉에 가는지 알려주지 않는 주자서에게 심술이 나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소림사의 차는 생차로 녹차였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같이 잔을 드는 이도 보는 맛이 좋다.

해가 뉘엿거리기 시작할 때 오랜만에 만나는 심아가 온객행과 주자서를 데리러 왔다. 심아는 그들을 자운당으로 안내했다. 자운당 근처는 그 전과 다르게 스님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자운당 안으로 들어가자 엽백의와 주지 그리고 자순사태가 앉아 있었다. 온객행은 포권하여 주자서는 공수하여 인사했다. 온객행이 먼저 인사했다. “온객행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뒤에 주자서가 인사했다. “양주 사계산장 주자서 인사드립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그가 온객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사계산장의 제자라는 것을 밝힌 것은 온객행이 알기로 이번이 처음이다.

그 말을 들은 엽백의가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라는 놈이 내공은 어찌 했느냐?” 주자서가 손을 내리고 다소곳이 앉아 대답했다. “조부께서는 이 일에 사계산장이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천자께 저를 유생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주구전은 숭산을 방문하는 일을 개인적인 일로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떠올려보니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일에 휘말리지 않기는 어렵다.

확실하게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르는 것 치고는 꽤나 파격적인 선택이다. 엽백의가 말했다. “아는 것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것은 부득이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69)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사계산장도 이 일에 관여하게 되었으니 너는 앞으로 처신을 조심하도록 해라.” 주자서가 머리를 바닥에 붙여 절했다.

엽백의는 온객행에게 황제의 배 위에서 일어났던 일과 초무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게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자순사태가 입을 열었다. “문성왕은 예전부터 이상한 사람이었으니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아미산은 익주에 있으니 익주에 봉지를 가진 현재 좌장사인 사마헌을 알고 있었다. 엽백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초무관에서는 제가 진왕이 보내온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확신하지는 않았는지 초무관을 빠져나와서 숭산으로 오는 길까지 저를 추적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염주를 굴리고 있던 주지 여운이 말했다. “요즘 숭산 근처에 불온한 자들이 많습니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근처를 떠도는 문파도 있습니다.” 소림사에 머무는 객 중에 소림사를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섣불리 나갔다가 의심을 살까 모두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게다가 단양파, 경호파, 태산파와 화산파의 장문이 묶여 있으니 속이 아마 까맣게 타 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밖에서 공동파의 손님이 도착했다는 기별을 했다. 엽백의는 자순사태와 주지를 한번보고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물러가라 말했다. 공동파에서 보낸 자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공동파는 천마교가 있는 천천산맥을 마주하고 있어 크고 작게 분란이 많았기 때문에 중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했다.

공동산은 마교가 중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이 일에 사람을 보낸 것은 이번 일이 천마교와도 닿아 있다는 것을 넌지시 시사했다. 초무관에서 얻은 앵속과 독약으로 마교와의 관계를 짐작했던 온객행은 그제야 왜 주지가 부러 아미파와 공동파를 함께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자서는 덧문을 닫자마자 온객행에게 손을 뻗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밀어진 손을 잡고 온객행이 웃자 주자서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부께서 보낸 서신을 어서 내놓으시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언제 눈치챘는지 몰라 일단 모르는 척했다. “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조부께서 어르신께 보낸 서신을 내놓으란 말이오”

온객행은 서신이 들어있는 품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무슨 서신 나는 몰라.” 온객행이 두 손을 짚은 앞섶을 보며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온객행. 말로 할 때 내놔.” 온객행이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아이 아서 화내지 마 내일 등봉에 왜 가는지 알려주면 줄게.”

주자서는 온객행이 멀어진 만큼 다가서며 말했다. “그것은 온공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어서 서신을 내놓으시오.” 온객행은 대답없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주자서는 콧김을 ‘흥’하고 내뿜은 뒤에 온객행의 앞섶을 잡았다. 당황한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부군 소인을 가련히 여기소서!” 주자서는 앞섶을 잡아 벌리기 위해 온객행과 몸싸움을 했다.

둘이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바구니를 든 심아 스님이 기별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온객행은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로 주자서는 온객행의 앞섶에 손을 쥔 채로 심아를 맞이하고 말았다. 심아스님은 움직임을 멈춘 주자서와 온객행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법주스님께서 가져온 귤 좀 드셔 보세요.” 그리고는 손에 든 바구니를 탁상위에 올려 놓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앞섶을 밀어 놓고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주자서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 놀란 심아가 말했다. “주공자, 주공자!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바구니에 들어 있는 귤을 권한다. 저 중놈이 무슨 꼴을 보고자 기별도 없이 방문을 열어 젖힌 것인지 온객행은 모를 수가 없었다. 주자서는 허탈하여 한숨을 쉬고 탁상 앞에 앉아 바구니에서 귤을 하나 들어 까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앞섶에 손을 모은 채 심아에게 말했다. “살구꽃 날아들어 봄은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그윽한 사람 찾아 옷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그림자 밟으니…”(70) 주자서가 바구니에 있던 귤을 온객행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온객행! 그 입 좀!” 온객행은 주자서가 던진 귤을 받으며 다시 말했다. “내게 귤을 주시는데 무엇으로 보답하나 굳이 갚자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이좋게 지내 보자며….”(28) 주자서는 한숨을 크게 쉰 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아는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젓고 말했다. “제가 두 공자님의 흥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심아는 이만 물러 가겠사오니…” 반장을 하고 인사한 심아가 문을 닫으며 객당을 나갔다. 온객행은 심아가 아직도 문밖에 붙어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문에 가까이 다가서서 말했다. “아서, 부군! 소인을 가련히 여기소서!” 그리고는 문을 확 밀었다.

밖에서 장지문에 귀를 대고 듣고 있던 심아가 바닥으로 철버덕 넘어졌다. 온객행은 들고 있던 귤을 심아에게 던지며 말했다. “스님 살펴 가십시오.” 심아가 멋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반장하며 멀어졌다. 온객행은 심아가 지객당에서 꽤 멀어진 다음에 창호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탁상 앞에 그린 듯이 앉아 귤을 먹고 있었다. 온객행이 탁상으로 다가가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며 말했다. “아서 맛있어? 아서는 귤을 좋아해?” 주자서가 까놓은 귤을 떼어 온객행의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노온 귤이 아주 맛이 좋네, 맛보게.”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는 귤이 기꺼워 몸을 가까이 붙여 주자서의 손에서 귤을 받아먹었다. 주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객행의 앞섶으로 손을 넣어 서신을 손에 쥐었다.

온객행이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서신은 이미 주자서의 손에 있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서신을 펴서 읽었다. 앞섶을 정리한 온객행이 턱을 괴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귤이 정말 맛있다. 더 줘.” 그리고 입을 벌렸다. 주자서는 다 읽은 서신을 탁상에 내려 놓고 바구니에서 새로운 귤을 들어 온객행의 입에 껍질을 까지도 않고 넣었다. “알아서 드시게.” 온객행은 입안으로 들어온 귤을 정성스럽게 까서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렸지만 온객행이 끈질기게 권하자 결국 귤을 받아먹었다. 이 귤은 달지 않았는지 주자서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등봉에는 왜 가는 거야?” 그러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있는 신 귤을 들어 온객행의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어차피 따라올 예정 아닌가? 등봉에 가면 알게 될 걸세.”

온객행은 신 귤을 씹어 삼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귤을 다 먹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등봉에는 나도 가는 거야?” 주자서는 바구니에 든 귤을 이리저리 고르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싫으면 말던지.” 온객행은 도리질하며 말했다. “아니야! 너무 좋아 꼭 갈래 아서랑 등봉에 가고 싶어!” 그리고 ‘히히히’ 하고 웃었다.

해시가 되자 소등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침상에 이불을 펴 놓고 주자서가 관수 마치기를 기다렸다. 어찌 하다 보니 온객행과 주자서는 같은 옷을 입게 되었는데 온객행에게는 조금 짧았고 주자서에게는 꼭 맞았다. 주자서가 의자에 벗어 놓은 하얀 장포와 중의를 잘 개어 놓고 온객행도 장포와 중의를 벗었다.

침상에 앉아 신발을 벗는 주자서 옆에 가서 주자서가 이불 덮는 것을 봐준 온객행이 한참 머뭇거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며 대답했다. “응. 아서 왜?” 주자서가 고갯짓으로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온 내일 등봉에 가려면 어서 쉬는 것이 좋아.” 온객행은 주자서가 고갯짓한 침상을 한참 보다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춥지 않아?”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추우면 가서 중의를 덧입고 주무시게.” 그리고는 온객행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 누웠다. 온객행이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서어. 나는 좀 추운 것 같아.” 주자서는 벌떡 일어나 다시 침상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나가려는 줄 알고 주자서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아이요, 아서 알았어. 가서 잘게 어서 누워.” 주자서는 침상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본인이 누워있던 침상에 눕혔다.

앞섶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온객행을 보고 코웃음친 주자서가 온객행의 신발을 벗겨 침상 옆에 두고 이불을 덮었다. 온객행은 영문을 몰라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버리고 온객행의 신발을 들고 남은 침상에 올라 이불을 펼쳤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서 내가 아서를 두고 도망갈 리 없잖아. 신발은 왜?” 주자서가 침상에 올라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허튼 짓 하지 말고 어서 주무시게.” 온객행이 말했다. “허튼 짓이라니? 아서 무슨 허튼 짓을 말하는 거야?” 주자서에게 대꾸가 없자, 온객행은 또 한참동안 추운 것 같다 느니, 무섭다 느니 같은 말도 안되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주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려버렸다.

달이 기우는 삭일이 다가오는 모양인지 객당 안이 어두웠다. 주자서의 숨소리가 일정해진 것을 눈치챈 온객행은 자리에 일어나서 깨금발로 주자서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갔다. 춥지 않다면서 이불을 안고 잔뜩 몸을 말고 잔다. 이불이 짧았는지 이불 끝에 주자서의 족건(足巾)이 빼꼼 나와있다. ‘너를 보러 오는 일에 족건을 더럽히는 일쯤 이야.’ 온객행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내려 주자서의 발을 잘 덮어주었다. 꽤 깊이 잠들었는지 몸을 틀어 바로 누웠다. 잠결에 풀어진 앞섶이 온객행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이불을 끌어 잘 덮어준 뒤 온객행은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장명산을 나온 이후로 잠이 부족했던 온객행은 금방 잠이 들었다.

(67) 이하(李賀) 장진주
皓齒歌細腰舞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勸君終日酩酊醉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인 춤 춘다오.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장차 저물려 하니 봉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라.

(68) 노자 도덕경 38장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고,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69) 장자 내편 6대종사
以知爲時者 不得已於事也
지식으로 시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부득이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무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식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70) 소식 월야여객음주행화하(月夜與客飮酒杏花下) 달밤에 손님과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다.
杏花飛簾散餘春 明月入戶尋幽人 褰衣步月踏花影 炯如流水涵靑蘋
살구꽃 주렴에 날아들어 남은 봄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들어와 그윽한 사람 찾아주네.
옷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 그림자 밟으니 밝기가 흐르는 물에 푸른 마름 잠겨 있는 듯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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