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文选)》의 주석란에 육신(六臣)의 한 명인 여향(吕向)이 “『칠애(七哀)』는 통(痛), 의(義), 감(感), 원(怨), 이목문견((耳目聞見),구탄(口歎), 비산(鼻酸) 등의 애(哀)라 했다.”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뜻을 알지 못하면서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한 말이다. 원나라 사람 이야(李冶)는 그의 저서 《경제고금주(敬斋古今黈)》에서 “사람의 칠정 희로애락애오옥(喜怒哀樂愛惡欲) 중 哀가 가장 앞선 감정으로 슬퍼함이 너무 심하니 나머지 감정이 없어지고 애만 남았음으로 『칠애(七哀)』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도 견강부회한 면이 없지 않다. 『칠애(七哀)』는 악부(樂府) 가사(歌辭)다. 진(晉)나라 악부시가의《원시행(怨詩行)》에 『칠애(七哀)』라는 편명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七哀詩 曹植
칠애시 조식
밝은 달은 높은 누각을 비치니 달빛은 흘러 누각의 주위를 배회한다.
누각의 우수에 잠긴 부인 슬픈 탄식소리 애처로움이 넘친다.
탄식하는 이 누구냐고 물으니 집 떠난 사람의 처라고 한다.
당신이 집을 떠난지 10년이 넘었어요. 외로운 첩은 항상 외롭게 지내고 있어요.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떠다니고 가라앉음은 서로 처지가 다르지요. 만나더라도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할까요?
조식의 칠애시 화자는 집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남편이 저잣거리의 먼지 따위라면 어찌 못의 진흙이 먼지따위를 기다릴까? 한대 시인 장곡이 행로난에서 말했다. 龍蟠泥中未有雲 不能生彼昇天翼(용반니중미유운 불능생피생천익; 용도 진흙 속에 서려있고, 구름 없으면 저 하늘에 오를 날개 생겨나지 못한다네.) 용이 서리고 맑은 연꽃을 피워내는 진흙이 길에서 굴러다니는 먼지따위를 기다린다는 뜻이므로 숨은 뜻은 어쩌면 어찌 천한 니가 귀한 나를 기다리게 하느냐 뭐 그런 의미 아니엇을까?
조식의 상황을 보면 그럴수도 있다. 나는 조식이 왜 마음을 고쳐먹고 촉이나 오로 가지 않았는지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그리로 간다고 해서 등용 될수 있을지 없을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혈족들한테 천대당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것 같은데... 조식은 조비가 죽고 조비의 아들 조예가 등극한 후에도 계속해서 등용을 바랬는데 쓰마이와 소비의 외척, 친척들이 그의 덕망을 두려워해 오랫동안 위의 성도인 사례에 발으 붙이지 못했다. 그가 변방을 떠돌기 전에 쓰인 시는 대체로 공자의 호방함과 화려한 생활이 담겨있다면 그 이후에 쓰인 시는 이처럼 떠난이를 그리워하거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오랫동안 떠돌면서 얻은 병에 40에 죽었는데 그 생몰일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들을 포함하면 대체적으로 40대 전후로 사망한 아들이 많다. 전쟁에 죽고 당쟁에 죽고 쫒겨나서 죽고.. 조조는 아들이 진짜 많은데 하필 그 많은 아들중에 조비를 골랐을까 꼭 지같은 애를 왕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쓰마이한테 다 뺏긴다. 뭐 쓰마이도 결국 종친으로 망하기 때문에 능력없는 사람을 단지 혈연으로 천거하는 것이 얼마나 폐단이 많은지 증명한다.
七哀詩 王粲
칠애시 왕찬
其一
장안은 난리가 나서 무법천지가 되고 승냥이 호랑이들은 환난을 일으켰다.
다시 중원 땅을 버리고 떠나 형만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려고 하니,
친척들을 나를 보고 슬퍼하고친구들은 뒤따라와 손을 잡고 아쉬워한다.
집을 나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들판에 가득 찬 백골만 뿐이다.
길가의 굶주린 아낙내들 아이를 안아다 풀 속에다 버리고는,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뒤돌아보며 곡을 한다. 눈물 훔치며 홀로 떠나지 못하고
「이 몸 죽을 곳도 몰라 어찌 두 목숨 보전할 수 있나요!」
말을 달려 자리를 떠난 것은 차마 이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였다.
남쪽의 패릉 위로 올라 머리 돌려 장안을 바라보니,
《하천》시를 지은 사람 이해되어 간장 끊어지는 슬픔에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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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西京):서한왕조가 국도로 삼았던 장안(長安)을 말한다. 서한의 뒤를 이은 동한왕조가 낙양을 도성으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했으나 동탁이 한헌제(漢獻帝)를 겁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했다. 무상(無象)은 사회가 혼란하여 법도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 시호(豺虎):승냥이와 호랑이라는 뜻으로 동탁의 부장으로 동탁이 죽자 란을 일으킨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말한다. 구환(遘患)은 백성들에게 닥친 재난을 말한다.
- 위신(委身)은 몸을 의탁함이고 형만(荊蠻)은 형주(荊州)를 지칭한다. 형만은 중국고대에 있어서 남쪽에 거주했던 만족을 비하하는 말이다. 당시 형주에는 중원의 전란이 미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란을 피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찍이 왕찬의 조부 왕창(王暢)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당시 형주자사 유표는 왕찬의 집안과는 인연이 있었다. 이에 왕찬이 유표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다.
- 추반(追攀):뒤를 따르며 손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놔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아쉬어하는 모습.
- 패릉(霸陵):한문제 유항(劉恒)의 능묘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동쪽에 있다. 한문제는 한왕조 4백 년 기간 가장 현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황제다. 문제의 치세 기간 동안 사회는 질서가 잡히고 안정되었으며 경제가 급속히 발전되었다. 그래서 왕찬은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와 대비하여 격앙된 마음을 표현했다.
- 《하천(下泉)》:《시경(詩經)·조풍(曹風)》에 실려 있는 시가다. 한 대의 오경박사들은 이 시를 조나라의 국인들이 명왕과 현군을 애타게 바라면서 부른 노래라고 여겼다. 하천은 지하수를 말한다.
- 위연(喟然):위(喟)는 휴(虧)로 마음이 상해 한숨짓는 모습이다.
이 시의 마지막 4구는 한문제의 능을 지나가다 당시의 란세와 대비되어 마음이 아픈 나머지 시경의《하천(下泉)》이란 제목의 시를 생각하며 밝은 임금과 현능한 신하들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래서「장안은 난리가 나서 무법천지가 되고 승냥이 호랑이들은 환난을 일으켰다(
동한(東漢) 왕조는 도읍을 낙양(洛陽)에 정하고 동도(東都)라 부르고 서안은 낙양의 동쪽에 있었음으로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
시호(豺虎)로 지칭한 동탁(董卓)의 부장(部將)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란을 일으켜 백성들을 대거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아 생긴 재앙이었다. 왕찬은 이 두 구절을 통해 당시 사회에 불어 닥친 동란 때문에 장안을 떠나는 이유를 밝혔다.
其二
형만은 원래 내 고향이 아닌데 어찌하여 오래 동안 머물고 있는가?
방주를 타고 강수를 거슬러 올라가니 저녁 해가 나를 슬프게 한다.
산언덕에는 아직 그림자 드리워 있고 바위는 그늘을 짙게 만든다.
여우와 삵쾡이는 자기의 굴로 달려가고 나는 새는 옛날 살던 숲으로 날아간다.
밀려오는 파도소리 크고 맑은데 강변의 원숭이 울부짖는다.
새찬 바람은 내 소매자락을 휘날리고 하얀 이슬방울 내 옷깃을 적신다.
홀로 잠 못이루고 깨어 있으니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거문고를 집어든다.
거문고의 명주실과 오동나무 통은 내 마음 이해하고 나를 위해 슬픈 소리 토해낸다.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 몸 둘 곳 몰라, 고향 생각 떨쳐버릴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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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칠애시 3수 중 2번째 편이다. 오랫동안 형주에서 객지생활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용은 시인의 또다른 유명한 작품《등루부(登楼赋)》와 유사하고 대략 서기 208년 형주에 머물고 있을 때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其三
내 마음 슬프게 했던 변방의 외로운 성, 옛날 내가 직접 가본 적이 있었네.
빙설은 살 갗을 애이고 매서운 회오리바람은 끊이지 않는다.
백리 간에 보이는 사람 없고 무성한 잡초와 나무는 누가 돌보겠는가?
성루에 올라 봉수대를 바라보니 펄럭이는 영기는 군진을 엄하게 지킨다.
출정하는 사람 돌아올 생각 못하고 성문 밖에서 가족들과 이별을 나눈다.
대부분의 자제들 오랑캐의 포로가 되니 울부짖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
천하는 모두 전쟁터로 변해 락토라고는 없으니 어찌 오랫동안 이 곳에 머물러 살 수 있겠는가?
여뀌풀을 늘상 먹는 요충은 아픔을 모르듯이 떠나는 사람이 구태여 도움말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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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찬(王粲 : 177-217)은 건안칠자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삼국연의에서는 유표 사후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형주를 바치게 한 장본인으로 소설의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분노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희평 원년 177년에 태어나 건안 22년 217년 당시에 창궐한 전염병에 죽었다는 설과 조식과 친분이 깊었던 이유로 건안 칠자를 살해할 때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왕찬의 아버지 왕겸(王謙)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長史)였는데, 하진은 왕겸의 집안이 삼공을 배출한 곳이었으므로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자신의 두 딸을 보여 둘 중 한 명과 혼인하도록 보냈지만 왕겸은 이를 거절한 이유로 면직되어 머지않아 후에 질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왕찬은 황족을 존중했으며 명분가 문벌을 중시하고 경사(經史)와 유학(儒學)을 애호하고 예를 높이고 교화를 중시했다. 또한 아악을 제정하고 복식과 패물로 치장하고 그의 시문들은 소제(昭帝)와 현제(顯帝)시대의 정화였음으로 그는 공당에서 상좌에 앉아 조정의 의례를 주재했다. 왕찬은 채옹(蔡邕)에게 발탁되었으나 거절하고 유표에게 의탁하지만 유표에게서 중용되지 못했고, 조조의 수하로 들어가서 고위직에 임명이 되었긴 하지만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유표와 조조에게 중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적 야심은 그가 지은 시와 행적에 남아있다. 출처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왕찬이 죽은 지 2년 후인 건안 24년 위풍(魏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어 둘 모두 처형되었고, 왕찬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사마가가 여러모로 큰일 했다. 조씨도 모자라 왕씨 대도 끊어 놓다니... 8왕의 난을 생각하면 그게 과연 왕씨 뿐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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