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月明愛無眠
달이 밝으니 사랑스러워 잠을 못 이룬다.
진회장은 두둑한 주머니를 열어 괄창의 주루에서 큰맘 먹고 월병을 샀다. 작년에는 사정이 좋지 못해 뒷산에서 채집한 석류와 동그랗게 빚은 밀떡을 먹었다. 그것도 많지 않아 모두 먹을 수 없어 사숙과 아이들만 먹었다. 하지만 올해는 사계산장의 사정이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값을 치르고 가져온 찬합에 월병을 옮겨 담았다. 묵직한 찬합을 온객행과 주자서가 들었다. 진회장이 인사를 하고 주루를 나가자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진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는 먹을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온객행이 대답없이 웃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웃는 얼굴로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진회장이 물었다. “온공자는 스승님께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사제가 있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리고 스승님께 화식은 별로 좋지 않아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의아한 표정으로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회장이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래요? 그것은 수련의 경지가 높아서 그런 것입니까?” 온객행은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것은 직접 물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회장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객행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어이쿠, 온공자 제가 무례를 저질렀네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예를 거두세요. 진대인.” 진회장은 잠시 서있다가 말했다. “아차! 서신을 보내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어서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먼저 돌아가세요.” 그리고는 훌쩍 경공으로 다시 산을 내려갔다.
주자서가 멀어지는 진회장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자 온객행이 어깨를 붙이고 물었다. “아서, 월병을 이렇게 많이 사서 누구에게 주려는 거야? 엄청 무겁다.” 주자서가 다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사형이랑 사저, 사매가 다 오면 부족할지도 몰라.” 온객행이 주자서와 발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묵묵히 길을 가자 온객행이 다시 그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왜 자꾸 불러.”
온객행이 찬합을 놓고 주자서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부군. 왜 자꾸 소첩을 공방살이 시키십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여긴 아무도 없잖아.” 주자서가 찬합을 내려 놓고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노온, 정말 상선께 가보지 않아도 되겠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고 말했다. “부군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가?”
주자서가 온객행을 떼어내며 말했다. “노온,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은 없었어?”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며 말했다. “망할 늙은이가 말도 안 해 줬다구.”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아서가 정말 식건전에서 죽은 줄 알았어.” 주자서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그 노인네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아서가…아서가…” 주자서가 손을 들어 풀이 죽은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노온.”
주자서의 손에 뺨을 비비던 온객행이 손을 잡아왔다. “아서…” 주자서가 대답했다. “응.” 온객행의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근데 왜 별채로 안 와?”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나는 뒷산에서 지내니까 멀어서.” 주자서의 귀 끝이 빨갛다.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의 허리를 안으면서 말했다. “아서, 그럼 내가 뒷산으로 갈까?”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안돼, 조부께서 계시잖아.” 온객행의 쳐진 눈썹을 주자서가 손을 들어 쓸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있잖아.”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나는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돌려진 고개 때문에 보이는 주자서 뺨에 입을 맞추고 놓아주었다. “아서, 장명산으로 사주단자는 언제 보낼 꺼야?” 주자서가 찬합을 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온객행도 놓아 두었던 찬합을 들고 주자서를 따르며 말했다. “나는 진심이야, 아서한테 시집가고 싶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 소리 사부님 앞에서 꺼내기만 해! 다시는 안 볼 줄 알아.”
온객행이 놀란 목소리를 꾸미며 말했다. “아서!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마. 아서가 없는 동안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단 말이야.” 주자서가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객행을 마주봤다. “노온. 내가 죽어도 노온은 살아야지.”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가 없는데 내가 왜 살아?”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없으면 내 몫까지 살아야지.” 온객행이 다시 울상이 되어 말했다. “싫어.” 주자서가 엄중한 표정을 꾸며서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망설이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사계산장에 도착하자 서신을 보내러 간다던 진회장이 먼저 돌아와 있었다. 월병을 부엌에 가져다 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데 사모가 찬합을 들고 나왔다. “자서야.” 주자서는 월병이 들어있는 찬합을 내려 놓고 말했다. “사모, 사부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온객행도 주자서가 하는 데로 찬합을 내려 놓고 주자서 옆에 붙어 섰다. 추수는 한참 온객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주자서에게 찬합을 건네 주며 말했다. “자서야, 태사숙께서 찾으시니 저녁은 뒷산에서 먹도록 해라.”
주자서가 찬합을 받아 들자 추수는 또 온객행을 한참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진부인, 제가 도울 일이 없습니까?” 온객행은 문간에 놓여있던 월병이 든 찬합을 번쩍 들어 안으로 옮겼다. 추수는 온객행이 들고 온 찬합을 열어보고 ‘흠’하더니 말없이 부엌일을 했다. 온객행이 멀뚱히 서있자 추수는 또 온객행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자서를 따라가 보시오.”
오늘 외출하기 전까지는 친절하고 상냥한 진부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이상하여 온객행은 부엌을 벗어나 뒷산으로 향했다. 주자서가 싸리 문을 열고 뒷산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 따라잡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서 찬합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부군.”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온객행은 찬합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더니 그냥 웃었다. 처소에 도착해서도 인기척이 없었다. 실내에 들어가보니 등롱도 켜지 않고 아무도 없었다. 주자서는 등롱을 찾아 불을 밝히고 온객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온객행은 찬합을 낮은 서안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주구전은 처소 근처에 있는 석류나무에서 석류를 따고 있었는지 소쿠리에 석류를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온객행이 일어나 소쿠리를 받자 주구전이 말했다. “온공자, 언제 오셨소?” 온객행이 석류바구니를 근처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고 포권하여 인사했다. “주대인, 별고 없으셨습니까?”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차를 준비하던 주자서가 안쪽에서 나와 주구전을 발견하고 말했다. “조부, 어디 다녀오셨어요?”
주구전이 손짓으로 주자서를 불러 앉히고 말했다. “단원절이 얼마 안 남았으니 곧 제를 지내지 않니? 제에 올릴 토끼를 잡으러 갔었지.” 주자서가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무슨 토끼를 이틀씩이나 잡으셨어요?” 주구전이 찬을 구경하며 말했다. “잡는 족족 새끼를 뱄으니 어찌하니, 놓아 주어야지.”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사부께서 월병을 잔뜩 사왔으니 제사 음식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주구전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말했다. “그래? 무슨 소가 들어 있는 것을 샀니?”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종류별로 많이 샀으니 주대인께서 좋아하시는 것도 있을 겁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온공자는 장명산으로 안 가십니까? 어찌 단원절을 스승님과 함께 보내지 않고…” 온객행이 주구전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며 말했다. “시조부, 제 가족은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주구전이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온공자. 정말로 우리 자서에게 시집오실 생각입니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도 젓가락을 주며 말했다. “아니 왜 못 믿으시는 거에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주구전이 주자서가 내려놓은 밥그릇을 들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가져온 찬은 주구전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주구전이 찬을 보며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누가 보내서 왔니?” 주자서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 “사모께서 보내셨습니다.” 주구전은 ‘허허허’ 웃고는 밥을 먹었다.
온객행과 주자서도 젓가락을 들었다. 온객행은 사례에서 했던 것처럼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찬을 집어 올려 놓았다. 그리고 눈치가 보이면 주구전의 밥그릇에도 찬을 올려 놓았다. 밥을 다 먹은 주구전이 차로 입가심을 하고 주자서가 찬합에 다 먹은 음식을 치웠다. 주구전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찻물을 좀 더 올려야겠다.” 주자서는 아직 한참 남은 찻주전자를 보고 눈을 굴리다 조부께서 시키시는 대로 물주전자를 새로 화로에 올렸다.
온객행이 찬합을 챙겨 내려가려고 하자 주구전이 그를 막았다. “온공자, 잠시 이리와 앉으세요.” 온객행은 문간에 찬합을 놓고 밥을 먹었던 탁자로 가서 앉았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말없이 한참 보았다. 온객행은 아까 진부인이 자신을 보던 눈초리와 비슷한 주구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 왜 그러십니까?”
주구전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온공자, 내가 혹시 우리 자서가 사계산장 장문 후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온객행은 처음 듣는 소리라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아서의 무공이 그렇게 출중합니까?” 주구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공만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이 대화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주구전은 ‘쯧쯧’하고 혀를 차고는 또 말이 없었다.
주자서는 다 끓은 물을 탁자에 올려 두고 주구전 옆으로 가서 소쿠리에 들은 석류를 깠다. 찻잔을 하나 가져와서 거기에 석류 알갱이를 넣어 주구전에게 내밀었다. 주구전은 흐뭇하게 웃으며 주자서가 깐 석류 알갱이를 먹었다. 주자서는 주구전의 눈치를 보다가 찻잔 하나를 더 가져와서 알갱이를 담아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내게 석류를 주기에 옥패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28) 그리고 찻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소쿠리에서 석류 하나를 꺼내 본인도 까기 시작했다. 주구전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하는 꼴을 보고 ‘허’하고 헛웃음 쳤다.
온객행이 석류 하나를 다 까고 알갱이를 주구전과 주자서에게 나눠주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자서가 얼른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가자 밖에 진회장과 추수, 양가인, 서소강, 필장풍이 서있었다. 주자서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진회장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숙, 못난 제자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주구전이 제자들이 있는 쪽으로 손을 휘휘 젓고 말했다. “인사는 그만 두고 어서 와서 앉아라.” 주자서는 찻주전자에 있는 차로 다구를 씻어 다시 차를 내렸다.
찻잔을 들고 사계산장의 어른들과 온객행이 마주했다. 온객행은 눈치를 보다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시중을 들던 주자서도 무겁게 내려 앉은 분위기에 온객행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회장이 주자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자서야, 네 생일이 지나면 관례를 올릴 참인데…” 말을 줄이며 옆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후’쉬더니 입을 닫았다. 서소강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일단 관을 올리고 나면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서소강의 말에 온객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는 이미 아서와 육례를 치렀으니 혹여 첩을 들이시겠다는 것이면…” 온객행의 목소리에 사계산장의 어른들은 물론 주자서도 놀라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얼굴이 울상이 되어 소매로 눈가를 찍으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 (75) 그리고는 ‘으앙’ 울기 시작했다.
추수가 ‘허’하고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육례? 의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온공자는 육례의 법도 모르시오?” 온객행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서의 양친께는 이미 인사드렸습니다.” 온객행의 말에 진회장이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자서의 양친을 뵈었다니?” 주자서는 옆에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朱)가의 사당에…”
진회장은 서소강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서사형은 대체 낙양에서 무얼 한 거요?” 옆에 있던 양가인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진회장에게 눈치를 주었다. 진회장이 씨근덕거리자 필장풍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서소강에게 물었다. “서사형은 둘이 사당에서 육례를 치르는 동안 뭘 하셨소?” 서소강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명산 상선께서 말씀하시기를 저놈은 끈질겨서 없는 마음도 만들어낼 놈이라 하셨네. 순진한 자서가 홀랑 넘어간게지.”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양가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자서야, 너는 어떻게 하고싶으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몸을 붙이면서도 아무 말을 안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자 필장풍이 말했다. “자서야, 괜찮아. 강호에 없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인데 틀리고 맞는 것이 어찌 있겠느냐?” 추수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대를…!” 주구전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어디서 사람을 구해 자손을 보게 해주시겠소? 온공자?”
온객행이 훌쩍이며 말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아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마음만 얻으면 몸은 나눌 수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자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구전을 보고 입을 달싹였다. 온객행이 주구전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음도 몸도 다 가져야겠습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주자서의 다정한 애칭에 진회장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사술을 쓴 것 아닙니까? 우리 자서가 그럴 리 없어요!” 양가인이 진회장의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장문 진정하세요. 관례를 올리는 것도 혼례를 하는 것도 자서가 하는 일이니 자서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추수가 진회장의 어깨를 감싸며 그를 달랬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주자서는 어른들의 눈치만 보고 입을 열지 못했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는 내 모과에요. 내 모과란 말이에요. 으앙.” 온객행에 바닥에 엎어져서 통곡하기 시작하자 옆에 앉아 있던 주자서가 당황하여 온객행의 등허리를 쓸며 말했다. “상선과 조부께서 허락하셔서 폐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주자서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구전에게 박혔다. 주구전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내가? 언제…?” 주자서는 품에서 옥패를 꺼내더니 말했다. “그가 예단을 주어서 받았어요.”
주구전이 입을 벙긋거리다 되물었다. “예단을… 받았어?” 진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더니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추수가 그의 뒤를 따랐다. 양가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단도 받고 사당에서 친영(親迎)까지 마쳤으면 뭐 더 물을 것도 없네요.” 서소강이 웃으며 말했다. “서로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인데 모질게 떼어 놓을 이유는 없지요.” 필장풍이 한참 생각하더니 물었다. “근데 모과는 대체 무슨 상관이오?”
다음날 주자서와 온객행은 사계산장의 사당에 인사를 올렸다. 부부의 연으로 할 수 없어 그들은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단원절이 다가와 사계산장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기 때문에 주자서의 일은 조용히 묻혔다. 주구전은 온객행의 거처를 자신의 거처로 옮겼다. 휘영청 밝은 달에 둥근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사형들의 매실주를 열었다. 주자서는 마당에 앉아 달을 구경하고 있다.
고상이 월병을 가지고 나와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월병 드세요. 이 월병에는 고기가 들었어요.” 주자서가 고상 손에 들려 있는 월병을 작게 쪼개 고상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상이가 많이 먹어. 사형은 많이 먹었어.” 고상이 입에 들어온 월병을 씹으며 말했다. “사형, 온공자는 어디 있어요? 이제 온공자도 우리랑 같이 살아요?” 주자서가 귀 끝을 붉히며 말했다. “상아, 다 먹고 말 해야지.”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고상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고상은 주자서 옆에 덜퍼덕 앉아서 손에 남은 월병을 먹었다. 온객행이 술병을 들고 주자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응, 이제부터 여기서 같이 살 거야.” 고상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공자!” 온객행이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온공자가 아니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을 빼앗아 마시고 말했다. “사형이면 되지 뭘 따져.” 고상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온공자도 사계산장에 입문 했소?” 온객행이 고상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태사숙께서 따 오신 석류는 맛보셨소?” 고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석류가 뭐야? 먹는 거야?”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빨간색에 작은 알갱이가 가득 찬 과일이야.” 고상이 외실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석류는 먹는 거야?”
고상이 외실로 향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21) 주자서가 외실 쪽을 보며 몸을 틀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아무도 안 와.” 주자서가 온객행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 그러지 마.”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나는 그대를 보면 기뻐서 미치겠는데,(43) 아서는 아니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그래. 노온.” 온객행이 일어나 주자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경애해.” 주자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제 뒷산으로 가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목을 잡아 돌려 세우고 다시 말했다. “아서, 경애해.” 그리고는 얼굴을 붙이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노온, 뒷산으로 가자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나와있던 장맹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뒷산으로 향하는 샛문을 지날 때까지 자리에 멈춰서 눈을 깜빡였다. 서소강이 그를 찾으러 나왔다. “맹아 뭐하냐? 자서한테 술은 줬느냐?” 장맹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서소강에게 물었다. “사부, 온공자는 대체…?” 서소강이 장맹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대제자라는데 정말 남다르구나.” 서소강은 장맹을 데리고 떠들썩한 외실 안으로 들어갔다.
단원절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엽백의가 사계산장을 찾아와 장문의 마음을 또다시 뒤집어 놓았다. 귀한 제자를 보낼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엽백의가 예단으로 가져온 상자에는 귀한 약초가 잔뜩 들어 있었다. 주구전은 거처를 다시 사계산장으로 옮겼고, 주구전이 머물던 사계산장 뒷산에 있는 거처에 온객행과 주자서가 살았다.
몇 년 후에 사례에는 또 다시 정변이 일어 나라가 나누어지고 국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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