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昊天罔極
어버이의 은혜가 넓고 큰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다.
오경이 끝나는 종소리가 네 번 울리고 온객행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는지 주자서는 옷을 다 입고 관수도 마쳤는지 얼굴이 말갛다. 화로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빛에 화롯불이 더해지자 희미하게 보이는 주자서의 얼굴이 곱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어서 보이는 목덜미가 요염하다. 호복을 입어도 맞지 않는 심의를 입어도 저와 같은 무명 장포를 입어도 고상해 보인다.
사계산장이 있는 양주는 망한 나라의 영지다. 그 곳은 황폐하고 수탈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주자서는 영 고생하고 자란 티가 나지 않았다. 한참 주자서를 구경하고 있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돌렸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더니 온객행의 신발을 가지고 온객행에게 다가왔다. “일어나셨소.” 온객행이 몸을 일으키며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벌써 일어났어? 아직 바깥이 어두운데…” 주자서는 온객행이 일어난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아침 설법이 끝나면 주지스님께 인사하고 등봉으로 출발하세.” 신발을 신는 온객행의 족건이 더러워진 것을 본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았다. 온객행은 헤실헤실 웃으며 개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주자서는 어제 얻어온 만두와 서신을 챙겨 작은 봇짐을 어깨에 매고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간단히 관수를 마친 온객행도 얼른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설법을 마친 스님들이 하나 둘 법당에서 나오고 주지와 회주 법주 몇 명이 법당에 남아 제자들의 인사를 받았다. 자순사태와 그녀의 제자들도 합장하고 앉아 불경을 외고 있었다. 엽백의는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조용히 주지스님께 다가가 아침문안 인사와 외출을 고하고 다소곳이 절했다.
주지는 주자서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하면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가볍게 포권하여 인사한 뒤에 주자서를 따라 나왔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산문을 지키는 스님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자서는 자는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한 뒤에 산문을 넘어 등봉으로 향하는 길에 들었다. 온객행은 일부러 큰소리로 “스님!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자서 뒤를 따라왔다. 온객행의 목소리에 스님이 깜짝 놀라 깨고는 멀어지는 온객행에게 불평을 했다. 온객행은 ‘히히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림사에서 등봉으로 난 길은 숭산에서 공의로 이어지는 길에 연결 되어있는 관도라 길이 넓고 사람 손을 타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온객행은 주자서 뒤를 따르며 봄이 완연한 산길을 걸었다. 온객행이 읊는다. “객당에 어젯밤 봄바람 불어오니, 멀리 양주의 미인 생각나네. 베개 위 짧은 봄의 꿈속에서 수천리를 헤맸네.”(71) 주자서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는 듯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온객행은 멈추지 않고 주자서에게 치대며 길을 걸었다. “아서 힘들지 않아?” 날이 밝아오자 봄 볕이 들기 시작했다.
한시진쯤 걸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여 이마에 땀이 맺혔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주자서의 땀을 닦아주려고 하자 주자서가 손길을 뿌리치며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온객행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반만 내린 머리가 땀에 젖은 목덜미와 얼굴에 달라붙어서 주자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땀을 식힐 겸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앉아 가져온 만두로 요기한 두사람은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등봉에 도착했다.
등봉에 도착한 주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은장이나 표국을 찾았다. 어디로 서신을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자서가 봇짐에 챙긴 서신이 주구전이 보내온 서신이라고 생각했던 온객행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귀한 종이봉투에 넣은 서신은 사계산장의 이름으로 날인되어 있다. 보내는 사람은 양주의 율령사 정회다. 점원에게 가서 편지를 부치고 값을 치러야 하는데 주자서는 돈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은 모르는 척 물었다. “아서 돈이 없어?” 주자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갯짓으로 점원을 가리켰다. 온객행은 기가 막혀서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품에서 염낭을 꺼내 값을 치렀다. 은장을 나오면서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내가 값을 치렀으니 서신의 내용을 알아야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을 무시하고 걸었다. 온객행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아서! 서신을 부치기 위해 일부러 등봉까지 온 거야?” 주자서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등봉은 낙양을 거치는 곳에 있어서 번화가가 아주 컸다. 주자서는 늘어놓은 좌판과 지나다니는 다양한 복식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온객행은 노점에서 이런 저런 군음식을 사서 주자서에게 권했다. 꿀을 섞은 떡도 있었고 다양한 속을 채운 월병도 있었다. 산지라 말린 육포나 과일도 많았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나물과 꽃망울이 맺힌 매화가지도 있다. 커다란 나무 밑에 상과 의자를 놓고 말린 과일과 차를 파는 노점에 앉아 온객행과 주자서는 주전자에 있는 차를 마셨다.
황실에서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르면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소소한 일상으로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올해 새로 딴 찻잎이라며 바가지를 씌우려는 노점상과 한참 실랑이를 하고 두사람은 등봉성을 나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힐끔 보며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걷다 보니 온객행은 그제야 가고 있는 이 길이 소림사를 향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이 앞서 걷는 주자서와 발걸음을 맞추며 물었다. “아서 어디로 가는 거야? 소림사로 가는 길은 저쪽이야.” 관도에서 벗어나 가파른 산을 잇는 작은 오솔길에 들어섰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대답하지 않고 가파른 길을 올랐다. 몇차례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주자서를 붙잡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경공으로 훌쩍 가파른 길을 넘었다. 주자서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숲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양지바른 곳에 작은 사당이 있었다. 그 사당은 숭양서원에 붙어있는 속가사당으로 서원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온객행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당주변에 싸리로 엮은 울타리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종종 사람들이 와서 관리를 하는지 사당 내부는 깨끗했다. 위패 여러 개가 모셔진 사당에는 촛대는 물론 선향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온객행은 왜 편하게 숭양서원을 가로지르지 않고 빙 돌아 험준한 산길로 사당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주자서는 봇짐을 내리고 짚으로 엮은 포단을 제단 아래에서 찾아 꺼내어 놓고 소매에서 향낭을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 제단 위에 있는 커다란 향로에 향목을 쏟아 놓고 제단 양 옆에 있는 초가 없는 촛대 아래에서 화섭자를 찾아 향로에 불을 붙였다. 소매를 털어 몸을 가지런히 한 주자서가 포단위에 무릎을 꿇었다.
온객행은 제단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모셔진 위패를 보았다. 봉호와 이름을 보니 아주 귀한 신분들이 모셔진 사당인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위패에 글자는 금가루로 썼다. 보통 이렇게 호화롭게 위패를 꾸미는 사람들은 돈이 썩어 나게 많은 상인이거나 귀족이다. 주자서는 소매를 수평으로 들어 귀족이 제례에서 하는 것처럼 신위에 세번 절했다. 주자서의 조상은 귀족인 것인가? 주자서는 양주 회계의 주가(周家)가 아닌가?
모셔진 위패는 대다수가 황제와 같은 사마씨다. 임씨도 유씨도 주(朱)씨도 있지만 주(周)씨는 없다. 온객행은 절을 다하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자서 옆에 가서 바닥에 덜퍼덕 앉았다. 말을 붙여볼까 싶어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울어버렸으면 나았을까? 보는 사람도 애달프게 만드는 표정이다. 온객행은 고개를 들어 신위를 보았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사당은 어둡다. 금니(金泥)로 쓰인 위패가 하찮다.
온객행은 부모님의 묘가 생각났다. 부모님 만의 묘는 아니고 누군가가 청성곡의 시신을 수습하여 양지 바른 곳에 안장하고 신의당이 있던 근처에 돌을 세워 묘비를 만들어 놓았다. 묘비에는 청성곡이라고 쓰여 있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작은 사당에 해가 질때까지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주자서가 일어나면서 크게 휘청거렸다. 온객행은 얼른 일어나 주자서의 팔을 잡았다. 향로위에 향목은 다 탄지 오래 되어 흔적도 없다. 주자서는 신위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와 사당의 문을 닫고 또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자서는 한숨을 가늘게 내쉬며 자세를 바로 하고 왔던 길로 향했다.
온객행은 숭양서원을 뒤로하고 주자서를 따라 갔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더 험해 주자서는 결국 온객행의 품에 안겨 소림사로 향하는 관도에 닿았다. 주자서는 무언가 내려놓은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옷을 추스르고는 소림사로 향했다. 두사람은 해가 지고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져서 소림사 산문에 도착했다.
산문 앞에 서 있는 스님 둘이 심각하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자 스님들이 그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상선의 제자가 아니십니까? 이렇게 늦게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온객행과 주자서가 공손히 인사하자 그들은 예를 거두라며 말했다. “벌써 제등시간이 지났는데 어서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두사람은 산문의 스님들께 인사하고 지객당으로 향했다. 제등시간이 지나 소림사 내부에 있는 건물에는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길을 제외하고 모든 불이 소등된 상태였다. 오늘은 삭일이라 달빛도 없어 길이 더욱 어두웠다.
길을 더듬어 지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은 불을 켜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온객행은 잠결에 주자서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아니면 꿈속에서 어린 온객행이 훌쩍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비가 내리는 청성곡에 앉아 한참을 훌쩍이다가 어깨를 잡아오는 손을 뿌리쳤다.
눈을 번쩍 뜬 온객행 앞에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방안이 어두워 누구인지 몰라 당황한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노온.”이라고 불러오는 주자서의 목소리에 온객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침상에 걸터앉아 닫힌 창호문을 보았다. 밖에서 희미하게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온객행을 다시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객행의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 “내 사제 중에는 고아가 많아. 잠 못 이루는 날은 누구나 있어.”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가슴을 토닥이는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아서도 잠 못 이루는 날이야?” 어둠에 익숙해진 온객행에게 주자서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온객행은 모르는 척 말했다. “아서가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들췄다.
주자서는 또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사당에서 봤던 애달픈 표정을 하고 있다가 신발을 벗고 온객행 옆에 누웠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계산장에서는 사제와 같이 바닥에서 자. 침상에서 주무시는 건 사부님들뿐이야.” 온객행은 옆으로 돌아 누워 주자서의 가슴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럼 아서의 사형제들은 모두 아서의 침상에 올랐겠네.”
주자서가 가슴에 올려진 팔을 치우며 온객행쪽으로 돌아 누웠다. “노온.” 주자서가 부르는 소리가 좋아 온객행이 답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사당에 다녀온 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온객행은 딱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주자서가 ‘둘만의 비밀’이라고 말한 것이 좋았다. “응. 아서랑 나랑 둘만의 비밀.” 주자서가 부스스 웃는 것을 보고 온객행도 따라 웃었다.
온객행이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었다. 몸을 말고 자는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감고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주자서는 아직 깨지 않았는지 몸이 따끈하고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들자 엽백의가 온객행을 실눈으로 보고 있었다. 온객행은 엽백의를 보고 씨익 웃은 다음에 다시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엽백의는 온객행이 하는 짓을 보고 있다가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기왕이 죽었다.” 엽백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든 온객행이 다시 물었다. “기왕 사마영이 죽었단 말이오?”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도 잠에서 깼는지 눈을 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온객행을 느꼈는지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엽백의를 발견하고는 불에 데인 것처럼 온객행을 밀쳤다. “어르신!”
주자서가 침상에서 내려와 인사하려고 하자 엽백의가 탁자로 가 앉으며 말했다. “중독으로 기왕이 죽은 것 같다.” 옷을 주워 입던 주자서가 크게 놀라며 엽백의에게 물었다. “기왕 전하가 등하 하셨습니까?” 엽백의는 주자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옷을 입다 말고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온객행이 주저 않은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황후 입니까?”
엽백의는 ‘흠’하더니 말했다. “낭야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앉히고 다 식은 찻물을 가져다 주자서에게 건넸다. 주자서는 정신이 없는듯 작은 소리로 “희란형님께서 왜…?” 엽백의는 크게 동요하는 주자서와 그의 시중을 드는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기왕은 풍년제를 지내러 황제가 정주에 갔을 때 죽은 듯하다. 앵속에 중독되어 그 용량을 알지 못하는 이가 결국 허용량을 초과하여 저승문을 연 것이다. 음용하는 것으로는 초무관에서 공급하는 앵속은 불순물이 많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향에 섞어 태워 흡입했다면 불순물과 앵속의 약효가 어떻게 섞여 무슨 작용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금족령이 내려진 기왕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 황제가 정주에서 낙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황후도 뒤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기왕의 앵속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진노하여 황후와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했다. 진왕은 한가롭게 주자서를 찾아올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주의 일이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이 몰아치니 시국이 불안하다. 조왕은 황후의 선처를 빌며 기왕의 장례를 도맡았고 낙양 근처에 봉지를 가진 황족들이 하나 둘 불필요해 보이는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하고 있다. 황제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앓아 누웠으며 황제의 재종형제인 진사왕 사마예와 남중랑장 사마흠(司馬歆)이 황제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
엽백의의 말을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듣고 있던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整蘭)정란, 네놈이 결국!” 조왕의 자를 들은 엽백의는 조금 놀랐다. 주자서가 무슨 생각으로 감히 군왕의 자를 존칭없이 부르는지 몰랐다. 옆에서 주자서의 시중을 들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시 침상에 앉힌 다음 꽉 쥐어진 주자서의 주먹을 쓸며 그를 달랬다. 온객행과 주자서의 모습이 다정하여 엽백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애정 놀음인지.’
엽백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희는 외출을 자제하고 처신을 조심하도록 해라.”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엽백의를 보며 말했다. “노야 어디 가시오?” 엽백의가 말했다. “채미공자가 사라졌다.” 낙양성에서 앵속을 취급하고 사용하는 것은 초무관 밖에 없다. 채미공자가 사라졌다면 앵속의 출처는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온객행이 말했다. “초무관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그대로 입니까?” 엽백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문성왕에게 선물을 보낸 것은 채미공자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소녀… 소년입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화산파와 태산파에 관련된 자들은 이미 초무관을 떠났다. 지금 그곳은 호위하는 사람이 없는 기루이니…” 엽백의는 고개를 끄덕이고 훌쩍 지객당을 나갔다.
조왕과 낭야왕은 황제를 독살하려고 계획 한 일로 처벌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애초에 황제가 죽지 않았고 죽을 만큼의 양도 아니었다. 배위에서 일하던 하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죄를 덮었을 것이다. 낭야왕이 다시 봉지로 돌아가 기왕의 일로 군사를 끌고 낙양으로 들어온다면 낙양성 근처의 교위와 낙양성안의 금위군만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강호와 관련된 이들이 낭야왕을 돕는다면 찬탈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황후와 내통했다는 자는 강호인이 아니라 낭야왕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온객행은 침상에 걸터앉아 넋이 나간 주자서 옆에 몸을 붙여 앉았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온객행은 애가 타서 주자서의 등을 문지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참 얄궂은 일이다. 어제 황족의 사당에 다녀왔는데 오늘 기왕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다니. 주자서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온객행이 드는 시중을 받았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어도, 차를 마시라고 잔을 입에 대주어도 고분고분 따라주었다. 저녁 늦게 사계산장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넋이 나간 그를 데리고 자운당으로 갔다.
주지는 서신을 건내 주면서 펴보라고 눈치를 주었는데 주자서는 서신을 받고도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온객행이 옆에 앉아 주자서의 변명을 했다. 등봉으로 다녀오는 길이 고되어서 몸이 좋지 않다고 둘러댔다. 예전에도 잠이 부족하여 열이 났던 적이 있었으니 주지는 별다른 의심없이 그들을 돌려보냈다. 지객당으로 걸어오는 내내 주자서는 말없이 서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해진 온객행이 입을 열었다. “아서 아무래도 양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가 발길을 멈췄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다시 처소로 이끌며 말했다. “아무래도 낙양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양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어. 주대인이 오시면 내가 잘 말할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넋이 나간 표정이 아닌 표정을 오늘 처음 본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을 문지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계산장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사주단자를 보낼게. 아니지 아서가 장명산으로 사주단자를 보내야 돼.” 주자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온객행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내가 노야를 졸라서 사계산장을 가득 채울 예단을 준비해 갈게.”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노온 나는 지금 돌아갈 수 없어.” 온객행은 주구전이 주자서를 데리고 양주로 못 돌아가서 안달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주자서는 품에 안고 있는 서신을 한참 보더니 뭔가 결심한듯 힘차게 처소를 향해 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넋이 돌아온 것 같아 기쁘면서도 이제 고분고분 제 시중을 안 받아주면 어쩌나 걱정하였다.
처소로 돌아온 주자서는 봇짐을 싸기 시작했다. 날이 다 늦어 사위가 캄캄한데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작게 봇짐을 멘 주자서가 처소를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붙잡았다. “아서! 아서, 지금 어딜 가려고?”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내공이 흩어진 지금 주자서가 온객행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서 진정해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나.”
주자서가 몸부림을 멈추고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온객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난 어서 태산으로 가야 하겠어.” 온객행이 당황하여 물었다. “갑자기 태산에는 왜?” 주자서는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나도 못 놔줘.” 그리고는 주자서를 어깨에 매고 처소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로 던졌다. 주자서는 다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소등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났다.
목탁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처소 근처까지 와서 객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한참 실랑이 중이던 온객행과 주자서는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두 사람을 구경하던 심아가 목탁을 치며 외쳤다. “해시요! 밤의 시작 해시요!” 온객행에게 붙잡혀 버린 주자서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낑낑댔다.
심아는 한참 구경하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아쉽다는 듯이 두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가 먹고 마시는 것을 소홀이 했던 주자서는 힘이 쭉 빠져서 온객행에게 기대고는 말했다. “온객행 내가 내공만 있었으면 너는…”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에 매인 봇짐을 풀어 멀리 던져두고 주자서를 침상에 앉혔다.
주자서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자 온객행도 그 옆에 앉아서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숨이 찼는지 숨을 몰아쉬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허튼 짓 할 생각 하지마.” 엽백의에게도 들었던 말을 주자서에게 들으니 신선하다. 온객행은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아서 대체 그 허튼 짓은 뭘 말하는 거야?”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객행은 드러난 목덜미에 아침에 했던 것처럼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아침에 맡았던 그 체향이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밀었다. 온객행이 물었다. “이것도 허튼 짓이야?” 주자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팔을 뿌리쳤다. 멀리 던져진 봇짐과 온객행을 번갈아 보던 주자서가 다시 일어나자 온객행이 그의 팔을 붙잡고 다시 앉히며 말했다. “아서. 접문해주면 태산까지 가는 것도 도와주고 왜 가는지 묻지도 않을게.”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코웃음 쳤다. “노온 아내는 남편을 대함에 있어 유순함이 제일 귀하고, 열락을 탐하여 음란한 것은 아내의 도리가 아닌 것을 모르는가?”(72) 온객행은 주자서가 자신을 아내 취급하는 것이 기꺼워 웃으며 말했다. “부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습니까?”(73)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입을 쭉 내밀었다. 주자서는 내밀어진 온객행의 입을 찰싹 때리고는 침상에 누워 버렸다.
(71) 잠삼 봄의 꿈 春夢
洞房昨夜春風起 遙憶美人湘江水 枕上片時春夢中 行盡江南數千里
동방에 어젯밤 봄바람 불어오니, 멀리 상강가의 미인 생각하네. 베개 위 짧은 봄꿈 속에 강남 수천리 두루 돌아다녔네.
(72) 대학연의 6권 明道術 명도술 天理人倫之正 천리인륜지정
婦之於夫 貴乎柔巽 苟不由正則狃説而流於淫 非妻道也
아내는 남편을 대함에 있어 유순함을 귀하게 여기지만, 진실로 정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열락을 탐하여 음란으로 흐르게 되니 아내의 도리가 아닙니다
(73)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 하편 6장
夫邪之興也는 豈邪者之所爲乎리오 淫之所起也는 豈淫者之所造乎
사악함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사악한 자가 하는 것이겠으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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