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埋骨不埋名
뼈는 묻어도 이름은 묻을 수 없다.
호화로운 객잔에서 하룻밤을 지낸 주자서와 온객행은 다음날 아침 일찍 제왕이 아침을 먹는 곳에 불려 갔다. 제왕은 주자서를 주영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를 영이라고 부르며 상냥하게 굴었다. 주자서는 불편해하면서도 제왕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마구 휘둘렸다. 커다란 배를 몇 척 빌려 양산 습지를 건너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복양에 도착했다.
제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함부로 말을 탈 수 없어 허름한 수레를 타고 이동했는데, 행렬이 멈추자 온객행과 주자서는 행군을 하던 군병들 사이에서 멀뚱히 서있다가 막사를 치는 사람들을 돕고 죽을 얻어먹었다. 얼마 안 있어 장순이 동군을 이끌고 그들과 합류했다. 온객행을 거칠게 다뤘던 제왕의 심복인 하후장군이 주자서를 찾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데리고 복양성에 있는 객잔으로 불려가 원하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제왕과 어울렸다.
제왕은 주자서에게 객실을 내어주며 편히 쉬라고 말한 뒤에 자신의 객실로 갔다. 온객행은 하루 종일 귀족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느라 밤에는 진이 다 빠졌다. 주자서는 여상하고 적절하게 잘 대처하며 온객행을 챙겼다. 주자서의 행동은 오히려 온객행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온객행은 점점 주자서와 마음에 거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주자서가 영견에 물을 묻혀 온객행에게 내밀자 온객행은 겨우 팔을 들어 영견을 받았다. 영견을 펴서 얼굴에 덮어 놓고 있자 주자서가 와서 영견으로 온객행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노온 힘들어서 그래?” 온객행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서 우리는 언제까지 제왕전하와 함께 하는 거야?” 주자서가 영견을 대야 위에 얹어 놓고 침상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 어떡하면 좋을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아서 우리 도망갈까?”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서 나는 거북해서 힘들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노온, 그러면 혼자서 갈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서랑 같이 갈래.” 주자서는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로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그래, 노온.”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는데 그렇게 해도 주자서가 잡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자서의 손바닥 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손가락 끝에 겨우 걸쳐 있다.
제왕의 행렬은 이틀 후에 개봉성에 도착했다. 제왕이 개봉성에 도착하자 하남태수가 제왕을 반겼다. 그의 옆에는 예주의 영천태수 역시 함께 있었다. 영천태수는 제왕에게 회남왕 사마윤의 서신을 전달했다. 제왕은 회남왕의 서신을 받고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제왕이 동평호에서 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봉성은 온객행과 주자서가 주구전을 만났을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성의 안과 밖에 거지가 별로 없었고 성을 드나드는 사람의 숫자도 적었다. 개봉성에 있는 8개의 문 중에 열려 있는 것은 모두 4개로 하남군이 삼엄하게 문을 지키고 있었다. 제왕은 태수와 장군들을 부른 간소한 석찬에 온객행과 주자서를 불렀는데, 그곳에서 제왕은 주자서를 자신의 당질이라고 소개했다.
온객행은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 아득하고 아득한 내마음이여.’(10) 고운 비단 옷을 입고 관을 한 주자서는 정말 제왕의 당질처럼 보였다. 그와 비슷한 옷을 입고 관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우습다. 제왕에게 술을 받고 가지런히 양손으로 술잔을 받아 든 주자서의 모습을 웃는 얼굴로 보고 있던 온객행은 주자서가 제왕에게 인사하고 술잔을 넘기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온객행은 자조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온객행은 고개를 떨구고 작게 헛웃음 지었다. 석찬이 마무리되고 제왕은 주자서를 데리고 태수와 장군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온객행은 제왕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표정을 꾸민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잡으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온객행은 그를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아 말없이 객잔을 나왔다. 성을 지키는 군병에게는 동군의 막사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온객행은 숭산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스스로가 어수선하게 길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 엽백의가 그를 대신해 무언가를 찾았기를 바랬다.
온객행은 조금 무리해서 쉬지도 않고 숭산으로 향했다. 사흘정도 걸릴 길을 이틀만에 도착했다. 소림사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는지 산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이 산문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스님이 대답했다. 온객행은 장명산의 제자가 스승님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고 소림사 안으로 들어왔다. 소등시간이 지난 후라 소림사 내부는 어두웠지만 소란스러웠다.
자운당이 아니라 방장실로 안내받은 온객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지주와 엽백의 주구전 그리고 초무관에서 만났던 소년이 엽백의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온객행이 소년을 손가락질하며 엽백의를 보자 엽백의가 소년에게 말했다. “못난아, 인사해라. 네 사형이다.” 제갈왕과 온객행의 얼굴이 구겨져 서로를 보았다. 주지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오늘 이천 이궐관에 예장왕과 초은왕이 도착했네. 그리고 정주성의 월기교위와 진사왕 사마예는 농성중이네.”
온객행이 주지에게 말했다. “청주의 제왕과 양주의 회남왕도 곧 도착할 것입니다.” 주구전이 말했다. “그들이 도착하면 바로 낙양의 도위로 들어가겠군.” 주지가 말했다. “도위 중에 낭야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숭산에 있는 환원관뿐입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선문관으로 오겠군.” 주구전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그를 앉히고 마시던 차를 권했다. 온객행은 조금 식은 차를 마시고 말했다. “제왕전하께서 낭야왕 사택의 사병을 모두 방면하였습니다. 낭야왕을 도울 후발부대는 없습니다.”
주구전이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던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네 모과는 어디두고 너 혼자 왔느냐?”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무릇 한나라의 임금이 먹는 음식과 같은 음식을 먹는 신분인자는 그 은택이 삼족까지 미치는데 하물며 귀한집의 자식인 그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93) 주구전이 옆에서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진왕을 만난 것이오?” 온객행이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진왕이요? 제왕전하와 함께 있습니다.” 주구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청주 제(濟)왕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안심한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야기를 마치고 지객당으로 돌아가는 온객행은 하늘에 떠있는 휘영청 밝은 달을 보았다. ‘보름이 되었는데 나는 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쳐버렸네.’
오경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온객행은 눈을 떴다. 오랜만에 엽백의와 같은 하얀 무명옷을 입었다. 입고 온 비단옷은 곱게 개어 주자서의 봇짐 안에 넣어 놓았다. ‘그가 혹시라도 돌아오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했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한 후에 스님의 부름을 받고 설법이 끝난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대웅보전에는 소림사를 떠나지 못한 강호인들이 삼삼오오모여 있었다. 곧 엽백의와 공동산의 제자들 그리고 주구전이 들어왔다. 주구전은 들어온 뒤에 대웅보전의 문을 닫았다.
지주가 향로 앞에 나와 운을 띄웠다. “그대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변의 이유를 아시오?” 지주의 말에 잠시 조용했던 대웅보전이 다시 웅성거렸다. 엽백의가 주지에게 다가가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관은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무림은 관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3)
엽백의의 목소리는 내공이 담겨있어 대웅보전 안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청명에 그대들에게 물었소. 무림맹에 관여한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 엽백의의 말을 들은 각 문파의 장문과 장문후계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엽백의는 대웅보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뜸을 들이다 내부가 완전히 조용해지자 말을 이었다. “이 엽모는 강호를 어지럽히는 자를 처단하겠다 그대들과 약속하였으니 오늘 이자리에서 무림맹이 무엇이고 그들이 어떤 권모술수로 황실을 희롱하고 정변을 일으켰는지 말하고자 하오!”
엽백의의 말이 끝나자 공동파의 제자 당량(唐諒)이 나와 입을 열었다. “공동산은 과거 오랫동안 마교인 명교와 대립하였소. 명교가 스러져 그 명성이 바랜 것이 오래전인데 어찌하여 그들의 삿된 용독술이 중원을 어지럽히고 있단 말이오?” 당량의 말이 끝나자 제갈왕(諸葛往)이 그들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장명산의 제자 제갈왕 강호의 대인들 앞에 참회하고자 합니다.”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조경이 앞으로 나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놈은 마교인 독갈의 일원이오!” 소년이 조경을 보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남방 마교 분파의 일원이었소. 나와 모친에게 독갈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태호파의 조경이오!” 제갈왕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조경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그대의 모친을 알지 못하오!”
엽백의가 끼어 들어 조경에게 물었다. “그대는 초무관에 월금을 잘 타는 채미공자(囆微公子)를 모르오?” 채미공자의 이름이 나오자 태산파와 화산파의 장문인 오래자와 우달이 크게 동요했다.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가 그에게 물었다. “조경! 태산파의 낙계(烙契)를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인 것이냐?” 화산파의 장문인 우달이 나와 조경의 소매를 붙들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내가 아끼는 아이들로 골라 보냈는데 모두 무사한가?”
엽백의가 우달에게 말했다. “그대의 아이들이 초무관의 기녀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모두 죽었네.” 우달이 엽백의의 말을 듣고 털썩 주저 앉아 기녀의 이름을 불렀다.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가 조경의 앞섶을 잡고 말했다. “이제 어서 낙계(烙契)를 돌려주시게! 내가 숭산에 온 이유는 그대에게 낙계를 받기 위함이네.” 조경이 오래자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오형, 모두 오해입니다. 상선, 모두 오해에요.”
제갈왕이 일어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조경 네놈이 문성왕을 시켜 내 모친을 해쳤느냐?” 문성왕의 이름이 나오자 대웅보전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엽백의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말했다. “조경 네놈이 할말이 많은 것 같으니 어디 들어 보자.” 조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포권한 뒤 말했다. “강호의 대협, 소협! 모두 오해입니다. 어찌 정체도 알 수 없는 소년의 말을 믿고 저를 모함한다는 말입니까?”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조경에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그대가 익주에서 명교의 용독술이 적힌 두루마리를 찾은 이후의 일이 아니오?” 조경이 당황하여 엽백의를 보고 말했다. “상선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조경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고숭이 조경에게 물었다. “둘째야, 둘째 너는 청성곡의 일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서국공께서 나와 아우들에게 말해주었을 때 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지?”
조경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잊으셨습니까?” 고숭이 조경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다. 나는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 너는 그때 다섯째 동생과 함께 먼저 떠나지 않았느냐!” 고숭의 말에 다섯째동생인 심신의 부친 심구응(沈邱鷹)이 일어났다.
온객행은 강호의 문파 장문과 후계가 서로 엉겨 붙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은 처음에는 아주 작았으나 종국에는 아주 커져서 대웅보전 안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모두 청성곡의 일은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온객행의 말에 조경과 고숭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청성곡은 예로부터 산세가 험준하고 깊어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곳에 물난리요? 돌림병이요? 어떻게 그 누구 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셨습니까?”
넙죽 엎드려 있던 제갈왕이 일어나 온객행의 말을 이었다. “청성곡은 조경이 명교의 두루마리를 찾은 곳입니다. 명교의 용독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바로 그 곳이에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갈왕을 보았다. 제갈왕이 말했다. “조경은 막 발견한 두루마리를 모친께 읽게 하고 그것을 청성곡에 시험하게 했습니다. 그 일로 모친은 두 눈을 잃었습니다.”
조경은 제갈왕의 말에 허허 웃으며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강호의 대협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느냐! 기루에서 웃음을 팔던 자의 말을 어찌 믿는다는 말이오?” 조경의 말에 엽백의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제자가 기루에서 웃음을 팔던 자라는 것을 어찌 아시오?”
엽백의의 말에 고숭이 다가와 조경의 멱살을 잡았다. “둘째야! 이게 모두 사실이냐?” 조경은 당황하며 온객행에게 따졌다. “그대는 누구인데 청성곡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오? 어찌 그대의 말을 믿는다는 말이오?” 온객행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엽백의가 말했다. “그 아이는 내가 청성곡에서 거둔 아이요.”
엽백의의 말에 조경이 엽백의를 보며 말했다. “말도 안돼! 청성곡은 그날 밤…” 온객행이 조경의 말을 이었다. “그렇소. 청성곡의 사람들은 그날 밤 모두 독에 중독되어 죽었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지.” 온객행이 조경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 화살은 문성왕의 화살이었소?”
조경이 제갈왕을 보며 말했다. “채미공자는 어디있는가? 이 모든 일은 채미공자가 조왕전하와 벌인 일이오. 나와는 상관없소.” 엽백의가 작게 한숨 쉬었다. 제갈왕은 조경에게 달려들며 말했다. “네놈이 죽였잖아!” 온객행은 사람들이 뭉쳐져 싸우는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온객행이 물었다. “부모의 원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89) 온객행의 목소리에 엽백의가 그를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으며, 조정이나 시장에서 만나면 무기를 가지러 돌아갈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크게 ‘하하하’하고 웃었다. 엽백의는 온객행의 입에서 유경(儒經)의 구절이 나온 것을 듣고 코웃음 쳤다. 모과만 온객행에게 홀린 것이 아니라 온객행도 모과에게 단단히 홀린 듯하다.
온객행은 조경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그대는 이 온모의 부모를 죽인 원수이니 오늘 이자리에서 내가 부모의 원한을 풀겠소.” 그리고 조경을 공격했다. 엽백의는 조경을 잡고 있던 제갈왕을 끌어당겼다. 제갈왕은 온객행과 마찬가지로 조경을 공격하려고 했다. 엽백의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너의 차례가 아니다. 조금 기다려라.” 엽백의의 말에 제갈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엽백의는 고개를 젓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직 관을 올리지 않은 온객행의 실력은 엽백의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 조경과 온객행의 싸움은 허무하게 끝났다. 간단한 권법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조경은 악독한 독술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제갈왕에 의해 그것도 저지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경을 보던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큰 원망은 풀어주어도 반드시 남는 원망이 있다.(15) 네가 무위에 머무르며 세상의 규범을 잊고 외물을 잊으면 모든 일은 혼돈한 도와 같다.”(49)
온객행은 주자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을 잊고 총명을 버려라.(49) 앞으로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지나간 옛날은 따라갈 수 없다.’(84) 온객행이 작게 읊조렸다. “원한이 나를 망친 것인가? 내가 원한으로 나를 망친 것인가?” 온객행은 눈물이 났다. 온객행이 생각한 복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랬다. 온객행은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것은 주자서 한 사람이었다.
‘주자서는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나를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었을까?’ 온객행은 주자서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너도 양친의 복수를 포기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느냐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 같았냐고. 그래서 그렇게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온객행의 복수는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
조경은 소림사의 계율원에 갇히면서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다. 조경은 낙양성에 조왕과 낭야왕이 있으니 강호에서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와 의형제를 맺은 문파의 장문과 장문후계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고숭은 그에 대한 배신감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각주 남궁하는 모두들 앞에서 그들이 황산은장을 통해 낭야왕과 조왕에게 정보를 팔았다고 했다.
조왕은 황산은장과 삼백산장을 일부러 경쟁하게 만든 것이다. 황제의 의심병을 조왕이 물려받은 것이다. 낙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각 문파의 사람들은 주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또다시 일어난 정변에 넌더리가 났다. 이제 겨우 황폐해진 논밭을 일궈 사람이 사는 땅이 되었는데 또다시 황족이 벌이는 환란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 둘 자리에 앉아 서로를 다독였다.
온객행은 탈력하여 서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잔뜩 젖은 제갈왕의 얼굴을 보았다. 엽백의가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복수하는 사람은 원수가 미워도 원수가 사용한 칼을 부러뜨리려 하지는 않는다.(94) 그 역시 너와 같이 뜻하지 않은 재앙을 만났을 뿐이다.”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조금 더 울었다.
엽백의는 온객행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오늘 조경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온객행의 모과가 그의 모난 구석을 잘 채워준 모양이다. 엽백의는 온객행을 울고 있는 제갈왕 옆에 두고 당량에게 갔다. 당량이 포권하여 엽백의에게 인사했다. “공동파 당량, 상선을 뵙습니다.” 온객행이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예를 거두게.” 초무관에서 온객행이 제갈왕에게 받아온 독을 조사한 것이 공동파다.
공동파는 과거에 명교와 대립하면서 독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초무관의 독을 보자마자 그것이 명교의 용독술이며 사람을 해치기 위한 것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자순사태와 용진대사가 공동파의 일을 확인하고 떠났으니 조경이 마교의 사술을 사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모두 지나고 보니 무림맹이라고 할 것도 없이 조경과 화산파, 태산파가 조왕의 이름으로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경과 화산파의 장문 우달은 계율원에 개방의 장로들과 함께 갇혔고,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는 파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연주로 보냈다. 오래자는 파문이 허가되면 소림사로 출가할 예정이다. 남궁세가를 제외한 형주와 양주의 문파는 모두 돌아갔다. 조경이 죽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 강호로 발을 붙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조경의 거취는 낙양에서의 정변이 끝나고 결정하기로 했다. 강호의 일은 이렇게 끝났지만 황실의 일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객당에 앉은 엽백의, 주구전, 온객행 그리고 제갈왕은 소림사의 찬을 먹으며 요기했다. 입맛이 없는지 모두 젓가락질이 느리다. 엽백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허리춤에 달려있는 호리병을 열어 술을 마셨다. 주구전이 그에게 눈치를 주자 옆에서 보고 있던 온객행이 엽백의의 호리병을 낚아채 마시며 말했다. “우리는 도를 닦아도 중놈은 아니니 술은 마셔도 되는 것 아니오?” 주구전은 온객행의 말에 ‘허’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이 마신 호리병을 제갈왕에게 건네자 제갈왕은 엽백의의 눈치를 보며 술을 마셨다. 온객행이 제갈왕에게 물었다. “너 나이가 몇이냐?” 온객행의 말에 제갈왕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몇인데 반말이야?” 온객행이 제갈왕에 손에 들려 있던 호리병을 빼앗으며 말했다. “사형한테 이게 무슨 버릇이야?” 제갈왕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누가 내 사형인데?”
온객행이 호리병에 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엽백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아니 노야 어디서 이런 것을 주웠소?” 엽백의가 크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제자복이 지지리도 없지, 너보다 더한 놈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엽백의의 말에 온객행이 표정을 구겼다. “나 같은 놈이 뭐가 어때서 그러시오?” 엽백의는 혀를 차며 호리병을 비웠다.
주구전이 옆에서 셋을 보고 있다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놀란 엽백의가 말했다. “주가야 갑자기 왜 눈물바람이야?” 주구전이 소매 끝에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우리 자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혼자 있을 텐데, 안타까워 어쩌나…” 주구전의 말에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작게 한숨 쉬고 고개를 숙였다. 엽백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모과는 어디에 두고 왔어?” 온객행은 대답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한 제갈왕이 엽백의에게 물었다. “상선, 모과는 왜 찾으시오?” 제갈왕의 물음에 주구전이 더 크게 훌쩍였다. “아이요! 우리 자서는 어떡하나… 흑흑.” 엽백의는 주구전의 속셈이 보여 뭐라고 할까 하려다 말고는 제갈왕에게 말했다. “주대인의 모과를 온가놈이 잃어버린 모양이다.” 제갈왕은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구전과 엽백의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방을 나가 온객행을 쫓아 갔다.
엽백의가 주구전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셈이냐?” 주구전이 우는 척을 관두고 엽백의에게 말했다. “오늘 날이 저물면 맹진으로 가볼까 합니다. 그 곳에 조경이 숨겨둔 물자가 있다고 하니 그것들을 잘 쥐고 있다가 자서가 오면 도우려구요.”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서 네 종손은 정체가 대체 뭐냐?” 주구전이 곤란하다는듯 멋쩍게 웃자 엽백의가 관두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구전이 물었다. “언제 갈까요?” 엽백의가 뒤로 돌아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내가 거길 왜 가냐? 네 종손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주구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엽백의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엽선배, 가서 보시면 다 알게 됩니다.” 엽백의는 아닌 척했지만 주자서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러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주구전은 밖으로 나가는 엽백의를 배웅하면서 돌계단에 정답게 붙어 앉아 있는 온객행과 제갈왕을 보았다.
주구전은 온객행을 떠보기 위해 온객행에게 다가갔다. 온객행 손에 들려 있는 영견을 본 주구전이 깜짝 놀라며 그 영견을 빼앗아 들었다. “온공자! 이것을 왜 그대가 가지고 있소?” 온객행은 쓰다듬던 영견이 주구전의 손으로 들어가자 놀라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대인, 그것은 아서가 저에게 준 정표이니 제가 들고 가는 것이 맞습니다.” 주구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서가 이걸 그대에게 주었단 말입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견을 내 놓으라고 손을 흔들었다.
제갈왕이 보고 있다 옆에서 ‘자서가 대체 누구요?’라고 물었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구전은 손에 든 영견을 한번 더 자세히 본 뒤에 온객행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온가놈이 언제 어떻게 우리 자서를 꼬신거지?’ 주구전이 눈을 흘기며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 저도 아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정표로 주었으니 걱정 마세요.”
주구전이 물었다. “자서가 그걸 받았단 말이오?” 온객행은 버들잎 영견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온객행을 한참 보고 있다가 주저하듯 말했다. “오늘 밤에 맹진으로 갈 겁니다.” 온객행이 주구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왕이 주구전에게 물었다. “주대인 맹진은 저도 갑니까?” 주구전이 제갈왕을 보며 말했다. “제갈공자께서 도와주신다면 일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제갈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온객행이 그의 어깨를 잡아 숙이며 말했다. “제갈공자 예를 갖추세요.” 그리고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 제 사제에게 말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제갈왕이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사제 하겠다 한적 없소.” 온객행이 그의 어깨를 다시 잡고 숙이며 말했다. “사형은 인내심이 많지 않으니 사제는 조심하는 것이 좋겠네.” 제갈왕은 온객행이 잡은 어깨를 잡고 한참 소리를 지르다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 말씀을 낮추세요. 저 같은 놈에게 말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왕의 다급한 목소리에 주구전은 ‘허허허’웃었다.
저녁을 먹은 주구전은 주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녀오겠다는 뜻을 전하고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지객당 안에는 준비를 마친 엽백의와 온객행 그리고 제갈왕이 있었다. 그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에 소림사에서 나와 태곡관을 지나 이궐관으로 향했다. 이궐관은 초은왕과 예장왕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들은 벌써 낙양으로 진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구전이 엽백의에게 말했다. “낙양성으로 이미 들어간 모양인데요?” 이궐관을 지키는 병사들의 태도가 엄숙하다.
엽백의가 물었다. “맹진까지 어떻게 가는 것이 좋겠는가?” 주구전이 이궐관 근처의 병사들의 동태를 보며 말했다. “맹진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도로 내려가더니 성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엽백의는 당황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온객행은 주구전을 따라 훌쩍 관도로 내려갔다. 제갈왕이 엽백의에게 물었다. “상선은 왜 안가세요?” 엽백의는 제갈왕을 보고 혀를 찼다. 그리고 관도로 내려가며 말했다. “못난이, 참으로 말이 많구나.” 제갈왕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못난이라 부르지 마시오! 내 이름은 상선이 짓지 않았소?” 엽백의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랬지…”
주구전은 문 앞으로 가서 뭐라고 한참 말하더니 곧 문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주구전은 나온 사람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뭔가 말했다. 엽백의가 다가오자 주구전이 그를 소개하며 말했다. “엽선배, 이 아이는 사계산장의 소강입니다. 소강아 어서 장명산 검선께 인사드리거라.” 서소강은 엽백의를 향해 포권하여 인사했다. “사계산장 서소강, 장명산 상선을 뵙습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전을 보았다. ‘저 노인네는 정말 어디까지 보이는 것일까?’ 성안으로 들어온 엽백의와 일행은 서소강이 머물고 있는 거처로 갔다.
서소강이 상석에 엽백의를 모시고 주구전의 시중을 들며 앉았다. 온객행과 제갈왕은 눈치껏 서소강에게 자신들을 엽백의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주구전이 말했다. “네가 왔구나. 누군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만, 소강이 네가 올 줄은 몰랐구나.” 서소강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임해에는 올해 비가 제때 와서 아주 바뻐요. 주사숙.” 주구전은 서소강의 말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어서 자서를 데리고 돌아 가자구나.”
서소강이 입을 달싹이자 엽백의가 물었다. “그대는 주(周)공자를 만나 보았소?” 서소강이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상선, 말씀 낮추세요. 예,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는 지금 주(朱)공자입니다.” 엽백의가 되물었다. “주(朱)공자? 그가 서선공의 아들이란 말이냐?” 서소강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았다. 엽백의가 알고 있는 주(朱)씨 중에 황족과 가장 가까운 주씨는 서선공 주희밖에 없다.
장공주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주자서가 서선공 주희의 아들이라는 것은 생각해보면 그렇게 떠올리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조용히 앉아 듣고 있던 제갈왕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주자서가 주대인의 모과요?” 온객행은 작은 목소리로 제갈왕에게 속삭였다. “아서는 내 모과요.” 온객행의 속삭이는 소리에 주구전과 서소강이 온객행을 보았다.
(93) 장자 잡편 24 서무귀 徐无鬼
夫與國君 同食 澤及三族 而況父母乎?
무릇 한 나라의 임금이 먹는 음식과 같은 음식을 먹는 신분이 되면, 그 은택이 삼족(三族)에까지 미칠 것인데, 하물며 부모의 행복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94) 장자 잡편 19 달생 達生
復讎者 不折鏌干 雖有忮心者 不怨飄瓦.
〈예를 들면〉 복수하려는 사람도 〈원수는 미워하지만〉 원수가 살인에 사용하였던 막사(鏌邪)나 간장(干將)을 미워하여 그것을 부러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또 비록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바람에 날려 떨어진 기왓장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