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27

27. 淸濁倂呑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

선화선생 장횡은 제일 상석에 앉아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별원에 자주오는 것은 아닌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 이 자리에는 내원에 있는 여인들도 모두 부른 자리였기 때문에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장순의 친인척일 것이다. 온객행과 주자서도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선화선생께 예의를 갖췄다. 장횡이 둘에게 물었다. “주공자께서는 사계산장의 주가이시고, 그 옆에 계신 분도 사계산장의 제자입니까?” 온객행은 주구전이 한 말이 생각나서 그렇다고 답했다. “저는 온객행이라 합니다.” 장횡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공자.” 하고 인사하였다.

장횡이 모두의 인사를 받자 하인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장횡은 하인들이 들고 들어오는 음식을 하나씩 집어 접시에 놓았다. 어른이 손대지 않은 음식은 먹을 수 없으니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다. 음식이 하나 둘 식탁 위로 오르고 장횡이 음식을 입에 대자 상석에서부터 아래로 사람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손님이었으므로 집안의 주인인 장순과 장부인 바로 옆에 앉았는데 처음에 봤던 장부인과 지금 본 장부인은 묘하게 주자서를 더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장부인과 주자서 사이에 장양을 세우면 세사람이 부모자식간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자 주자서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온객행의 팔을 꼬집었다. ‘앗’하고 소리를 내버리는 바람에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온객행을 보았다. 장횡이 헛기침을 하고는 온객행에게 음식이 입에 맞는지 물었다. 음식은 대체로 담백했으나 향신채가 듬뿍 들었는지 맛이 농후했다. 대체로 채소 위주의 찬이었으나 호수가 가까이 있으니 생선 요리도 있었다. 생선에 끼얹은 새콤한 소스가 아주 맛이 좋았다. 온객행이 음식을 칭찬하자 장횡이 호쾌하게 웃었다.

법도대로 하자면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았으나, 선화선생은 손자와 손녀가 귀여웠는지 그들의 생활에 대해 이것 저것을 다정하게 물었다. 식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웃어른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한 두 마디씩 덧붙이다 보니 꽤 떠들썩하고 즐거운 석반이다. 장순의 아들은 벼슬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의 누이는 얼마 전에 시집을 갔다. 장양에게는 어린 누이가 하나 더 있었는데, 혼기가 찬 손녀를 보내고 싶지 않아 들어오는 혼서를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온객행은 그들의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어 찬을 먹다가 새콤한 생선요리를 집어 주자서의 앞 접시 위에 올려 놓았다. “아서, 먹어봐 정말 맛있어.” 주자서는 익숙하게 온객행이 골라주는 찬을 잘 먹었다. 장횡은 흥을 이기지 못해 하인에게 술동이를 들이게 했고 온객행은 곧 맑은 건황주를 들고 건배를 하고 있었다. 주자서는 술잔을 받아 놓고도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입술만 축이고 많이 마시지 않았다. 양산에서 마셨던 노주와 달리 탁하지 않고 달지 않아 술술 넘어갔다. 찬이 하나 둘 치워지고 그 자리를 꿀에 절인 과일이 채웠다.

이경이 시작되는 소리를 듣고서야 석반은 끝이 났다. 바로 옆에 있는 서원으로 돌아가는 장횡을 손자와 손녀들이 배웅하고 온객행과 주자서는 장순과 장부인을 따라 내실로 들어갔다. 두사람이 앉자 하인들이 차를 내왔다. 탁자 없이 배치된 의자를 멀뚱히 보고 있는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장순이 자리를 권했다. 장부인은 내실로 들어온 이후로 주자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는데 장부인의 표정은 슬프기도 하고 또 기쁘기도 해서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신비해 보였다.

장부인은 주자서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자서….” 주자서가 장부인에게 맞다고 대답했다. 장부인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람(子) ‘자’에 집오리(舒鳧; 서부)할 때 ‘서’를 쓰시오?” 주자서는 잡힌 손을 보고 장순을 보았다. 장순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말했다. “장부인께서는 서선공의 종자매라오.” 장순의 말을 들은 주자서가 잡힌 손을 겹쳐 잡았다. 온객행은 갑자기 서선공의 이름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서선공이 낙릉 형림 출신인가?’ 장부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온객행은 봐서는 안될 것을 본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자서와 장부인은 온객행이 일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손을 붙들고 애절하게 굴었으며, 장순 역시 온객행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온객행은 장순과 장부인에게 인사하고 내실을 나왔다. 주자서의 정체는 주자서에게 단둘이 있을 때 직접 듣고 싶었다.


온객행은 내원에 있는 작은 정원을 구경하며 별채로 향했다. 산 바로 아래 있는 태안성의 바람이 따뜻하다. 봄이 만연한 것이다. 달도 반이나 차서 상현달이 되었다. 서선공의 일가족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경세장공주는 저택의 대문에 목을 맸고, 그의 아들은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런 것이고 소문으로는 아마 경세장공주가 본인이 목숨을 끊기 전에 아들에게 모진 짓을 한 것이라 했다. 어떤 곡절로 그렇게 했는지는 황제만 알고 있다. 무고에 관련된 보고를 하고 얼마 있지 않아 벌어진 일이니 서선공 일가가 몰살당한 것은 무고와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주자서가 서선공의 종자매를 닮았다? 경세장공주를 닮았다고도 했다. 주자서는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서선공의 아들일까? 진회장과 서선공이 함께 무고를 찾아 다녔다는 것은 그의 의형제들과 사계산장 밖에 알지 못했다. 온객행도 고숭이 말해 주어서 알았다. 서선공이 도성에서 화를 당하고도 그와 함께 무고를 조사했던 다른 문파들은 조사했지만 사계산장만은 조용했다. 사계산장은 청성곡의 일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고숭이 사계산장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객행은 웃음이 났다. “하하하.”

그가 소리 내어 웃자 근처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하인들이 그를 보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지혜와 수단은 여러 갈래에서 오지만, 큰 뜻은 방향을 트는 법이 없다. 어찌하여 아첨꾼들은 얼굴을 바꿔 교만함을 품었는가?(85) 하하하.” 온객행은 하인들의 눈초리를 피해 훌쩍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다 비단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다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졌다.

온객행의 목숨은 헐값이다. 척매(斥賣)된 목숨사이에 끼어 있다 제때 팔리지도 못했다. 만약 몰랐으면 놓아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영영 못하는 일이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온객행은 지붕에 누워 서쪽으로 지는 결월(缺月)을 보았다. 이지러진 달이다. 달은 다시 차오르기라도 하지, 온객행은 이지러진 자신의 귀퉁이를 어디에서 채워야 할지 몰랐다.

온객행은 하인들의 눈을 피해 주자서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고 온 봇짐과 벗어 놓은 옷이 보였다. 주자서가 잠을 잤을 침상위에 주자서의 옷을 안고 누웠다. ‘너는 이름을 찾으면 가족들이 많아 지겠구나.’ 온객행은 주자서의 옷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이름을 찾아도 아무도 없는데.” 온객행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옷감으로 눈을 꾹 눌렀다. 그러고 있으니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언제 잠들었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반듯하게 누워 곱게 이불을 덥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신발과 겉옷을 벗겨 눕힌 것 같았다. 온객행은 몸을 뒤척이다 옆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발견했다. 온객행은 웃기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한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둠에 익숙해진 온객행의 눈에 짓무른 주자서의 눈이 보였다.

안타까워 만지지도 못하고 얼굴 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주자서의 눈썹이 아래로 쳐지더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아서… 왜 그래? 울지 마…. 아서.” 온객행의 목소리를 듣고 감겨 있던 주자서의 눈이 뜨였다. 눈물이 이미 잔뜩 고여 눈동자가 반질반질했다. 주자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객행도 따라 앉으며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렀다. “아서, 왜 그래?” 어둠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자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그의 턱 끝에 고였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온객행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훔쳤다.

온객행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아서는 오늘 잠 못 이루는 밤인가 봐.” 주자서의 팔을 쓸며 말하자 주자서가 바스스 웃었다. 서글픈 표정으로 웃으려고 하는 것이 또 애처롭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고 말했다. “아서 내가 옛날 얘기를 해줄까?” 온객행은 주자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의 팔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아주 작은 마을에 사는 아이는 하루 종일 마을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자기 하기 좋은 일만 했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색했던 아이는 언제는 밭일을 하는 사람을 언제는 약초를 캐는 사람을 따라다녔다. 아이는 똑똑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글을 깨치는 것이 빨랐는데 어느 날은 약초를 캐는 사람들을 따라 갔다가 모르는 글자가 쓰인 동굴을 발견했다. 어른들을 불러 무슨 글자인지 물었지만 아무도 몰랐다.

다음날 마을에 공부를 많이 했다는 학자가 찾아와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는 동굴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학자는 동굴에 쓰여 있는 글자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게 되었고 한참 지나 그 글자의 뜻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 학자를 융숭하게 대접했고 그 학자는 그 글자가 동굴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했다. 학자는 사람들을 모아 그 동굴의 문을 결국 열었다. 열지 말아야 할 그 동굴이 열렸다.

그 동굴은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오는 귀문이었는데 그 문을 통해 많은 악귀가 세상에 나왔다. 악귀들은 제일 먼저 작은 마을을 도륙했다. 사람의 피가 비가 되어 내리는 것 같은 참상에도 마을의 아이는 살아남고 말았다. 온객행은 말을 멈추고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그 아이는 어떡해야 할까?” 주자서는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눕히고 그 옆에 누웠다. 이불을 잘 덮어주고 팔을 괴고 주자서를 보며 다시 물었다. “아서 대체 그 아이는 뭘 해야 할까?”


다음날 아침 온객행은 아주 늦게까지 잠을 잤다. 온객행이 일어났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그동안 주자서의 방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지 하인 하나 없이 고요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누워 있던 자리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 그대로 대자로 누워 생각했다. 기왕 태산까지 왔으니 태산파를 떠보는 일을 해야지. 주구전이 한번 휩쓸고 갔을 테니 더 정신이 없게 해야 한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입었던 비단 옷이 아니라 동평호에서 구한 무명옷을 입고 방을 나왔다. 별채를 정리하던 하인이 와서 온객행에게 아는 척을 했지만 온객행은 하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훌쩍 경공으로 담을 넘었다. 당황한 하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온객행은 일단 표국이나 전당을 찾았다. 동평호에서 얻은 패물을 처리하고 개중에 귀해 보이는 것 몇 개를 조경의 이름으로 태호파에 보냈다. 서신에는 촉(蜀)이라고 써서 보냈다.

태산은 높고 험준했다. 가늘게 늘어선 계단이 끝도 없이 보였다. 온객행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부러 험준한 절벽이 있는 곳으로 산을 올랐다. 해가 지기전에 태산파의 산문에 도착한 온객행은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장명산 검선의 제자 온객행 태산파에게 배움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길 중앙에 앉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검은색과 흰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온객행 앞에 섰다. “소협은 누구인데 태산에서 소란입니까?” 온객행이 일어나 포권하며 말했다. “장명산의 온가 객행 태산파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들을 공격했다. 오래자가 숭산에 묶여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온객행은 오랜만에 몸을 잔뜩 움직이니 마음이 상쾌했다.

일각쯤 있다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나와 온객행을 말렸다. “온공자, 장명산과 태산은 척진 것이 없는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희를 곤란하게 하십니까?” 온객행이 싸움을 멈추고 몸을 바로 세우자 주변에 있던 태산파 제자들이 그를 더욱 경계했다. 온객행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기생집의 사람을 사면서 원한 하나 사지 않을 것 같으셨습니까?”

태산파의 장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온공자! 그게 무슨 소리요! 태산파가 연주의 한미한 문파인 것은 사실이나 도교를 따르며 도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거늘 어찌 천인공노한 말을 하시오!” 온객행이 말했다. “그대는 태산파가 초무관을 도와 기왕전하를 해친 일을 모르시오?” 온객행의 말에 노인은 핏대를 세우고 말이 안된다며 소리를 치다가 풀썩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태산파 제자들이 그를 ‘스승님!’ 이라고 부르며 달려가 부축했다.

온객행은 주구전이 말한 태산이 태산파가 아니었음을 눈치챘다. 태산파는 아직 낙양에서의 일도 모르는 눈치였다. 주구전이 태산에 온 이유는 순전히 태수의 부대장인 진영 때문이란 것을 깨닫자 온객행은 훌쩍 뒤돌아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산파 제자들이 그를 불러 세웠지만 온객행은 멈추지 않았고, 태산파의 경공으로는 온객행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의도치 않게 태산파를 휘저어 놓았으니 이제 제남상단의 차례다.


밤이 다 늦어서야 태안성에 도착한 온객행은 태수의 집으로 갔다. 이번엔 담을 넘지 않고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하인들은 온객행을 보고 어디를 다녀오셨냐는 둥 요기는 하셨냐는 둥 소세할 물을 길어 놓겠다는 둥 살갑게 말을 붙였다. 온객행은 너스레를 떨며 태안을 구경하고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묵직한 염낭을 열어 동전을 나눠주며 말했다. “우리 아서는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제가 꼭 옆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 제 사정을 좀 봐주세요.”

웃는 얼굴로 동전을 쥐어 주며 상냥하게 굴자 하인들도 웃으며 그러냐 물었다. 그리고는 미주알고주알 오늘 집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주자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장순과 함께 관청에 갔다가 미시쯤 돌아와서 제음서원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유시 즈음에 도착한 낙릉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외실에 있다고 했다.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곧 삼경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외실에 있단 말입니까?” 온객행은 서쪽으로 거의 다 기울어진 달을 보며 말했다.

하인들은 온객행의 말에 동의하면서 오늘 낙릉에서 온 손님들이 얼마나 장부인과 장도련님을 닮았는지 이야기했다. “낙릉 가주라는 분은 정말 장도련님 아버지라도 믿겠어요. 어쩜 그렇게 닮으셨는지.” 그러자 옆에서 제등을 들고 가던 하인이 말을 덧붙였다. “장도련님보다는 오히려 주공자를….” 사람들의 눈초리에 말을 끝맺지 못한 하인이 멋쩍게 웃었다. 온객행도 그저 따라 웃으며 주자서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자서의 방에는 선객이 있었는데 여태 떠들어 댔던 장순의 아들 장양이다.

장양은 온객행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호쾌하게 포권하여 인사했다. “온공자.” 온객행도 똑같이 포권하여 인사했다. “장공자.” 둘은 말없이 서있다가 장양이 앉아 있던 탁자에 가서 앉았다. 주자서를 기다리는 것 같아 온객행이 물었다. “아서를 기다리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장양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두 분은 대체 어떤 사이시기에 서로 퍽이나 정답게 부르십니다.” 온객행이 ‘하하하’ 웃으며 놓여있는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며 말했다. “장공자, 장공자 언짢아 하지 마세요. 저는 아서와 동문에 동창이니 당연히 정답지요.” 장양은 온객행이 건내 준 찻잔을 받아 마셨다.

온객행이 본인 분의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혹 제가 답해 드릴 수도 있으니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세요.” 다정한 온객행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사그라드니 장양이 온객행 가까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 “온공자는 주공자의 정체를 아시오?” 온객행이 모르겠다는 눈치로 고개를 흔들자 장양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온공자, 아무래도 주공자는 나의 형제인 듯하오.” 온객행은 헛웃음이 나와 참지 못하고 ‘하하하’하고 웃어버렸다. 장양은 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잔뜩 경계심을 세우고 말했다. “무엇이 재미 있단 말이오! 모친의 부정을 내가 어찌 묻는다는 말이오!”

온객행은 손을 들어 장양의 팔뚝을 쓸며 말했다. “장공자, 장공자, 이리 둔한 사람을 보았나.” 온객행이 다정하게 그를 타이르자 장양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아니라는 말이오? 모친의 혼외자가 아니라는 말이오?” 그 말에 온객행은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이 순진한 도련님은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렇게 세상이 망할 것 같은 표정으로 주자서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주자서와 닮은 얼굴에 모질게 굴 수 없어 온객행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장공자 걱정 마세요. 장부인께서는 부정을 저지르실 분이 아닙니다. 장공자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장양은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온객행이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문간으로 데리고 가서 내쫓으려고 하는데 주자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답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온객행과 장양을 번갈아 보더니 공손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려는 것을 장양이 주자서의 팔을 붙들고 예를 거두라고 했다. 장양은 온객행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두사람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장양이 나간 쪽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 허튼 짓이오?”

온객행은 서있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 방금까지 제가 마시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자서 손에 쥐어 주고는 말했다. “아서, 허튼 짓이라니? 장공자께 오해가 있으니 풀어야지. 아서.” 주자서가 차를 마시고 짧게 물었다. “오해?” 온객행은 의자를 끌어 다가 주자서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말했다. “장공자는 글쎄, 아서가 배다른 형제 인줄 알잖아. 하하하.” 온객행의 말에 ‘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주자서는 입고 있던 비단 장포를 벗고 대야에 담긴 물에 손을 씻고 얼굴을 닦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벗어 놓은 비단 장포를 잘 걸어 놓고 물었다. “아서 낙릉에서 온 손님들은 누구야?” 주자서는 잠시 멈칫 하더니 얼굴을 마저 다 닦고는 대답이 없었다.

온객행이 물었다. “제(濟)왕전하는 움직일 것 같아?”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왕전하께서는 이미 평원태수와 함께 제남으로 이동하고 계시네.” 태안에서 제(濟)왕의 봉지까지는 산이 험준하여 말을 하루 종일 달려야 겨우 도착하는데 그가 벌써 제남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마치 소식을 듣자마자 출정을 결정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서, 도성에서 주대인께 연락이 없었어?” 주자서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온객행에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인지 모르는 온객행은 그냥 주자서가 하는 말은 다 믿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주자서를 데려다 맥을 짚고 말했다. “아서 운기 조식은 하고 있어?”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도무지 겨를이 생기지 않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으면 아서쯤이야 내가 지켜줄 수 있어.” 주자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앓고 있는 병이 있어 회복의 차도가 느린 것이니 천천히 돌아 올거요.”

온객행이 깜짝 놀라 주자서의 손목을 다시 채어 맥을 짚으며 말했다. “앓고 있는 병이라니? 아서, 정말 많이 아픈 거야? 아서?” 주자서의 맥은 어제 푹 쉬어서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었고, 바닥에 깔린 내공은 전보다는 그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주자서의 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것 같아 온객행이 손을 들어 주자서의 이마에 가져갔다. 열은 없었지만 주자서의 얼굴이 조금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서 왜 얼굴은 붉히고 그래, 나도 부끄러워지려고 하잖아.” 온객행의 말에 온객행의 손길을 뿌리친 주자서가 말했다. “내공이 돌아오면 자네부터 흠씬 패 줄 참이네.” 온객행은 그 말에 또 크게 ‘하하하’ 웃었다.

주자서는 자기 방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이는 온객행에게 계속 눈치를 주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그러던 말던 주자서가 손과 얼굴을 씻은 물을 내다 버리고 그 곳에 물을 받아 관수하고 옷을 벗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옷을 보더니 물었다. “노온, 태수께서 준비해 주신 옷은 어디에 두고 그걸 다시 입었어?” 온객행이 내의차림으로 침상에 다가와 앉아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서 내 신분으로 비단 옷을 입으면 길에서 비명횡사하기 딱 좋아.” 주자서가 침상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내주었다.

온객행은 몸을 옆으로 기대 눕고 팔을 괴어 주자서를 보았다. “아서는 비단 옷을 입고 살 팔자였나 봐. 무명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멋있어.” 주자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멋있는 게 뭐가 중요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중요하지 아서, 내가 이렇게 홀렸잖아.”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온객행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또 그 소리!”

온객행이 주자서의 턱을 잡아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아서, 보름까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 마주 보고 있다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피해 몸을 돌려 누웠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한참 그의 옥침관을 보다 잠이 들었다.

또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자고 있던 온객행은 주자서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또 엽백의가 와 있나 싶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 사위가 밝아 오고 있었다. 온객행은 팔자 좋게 다시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붙였다. 일각도 되기 전에 주자서의 몸이 굳어 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아직도 수줍어하는 주자서가 귀여워 눈을 뜨지 않고 팔을 걸어 품으로 끌어당겼다. ‘흡’하는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의 몸이 온객행의 몸에 밀착되었다.

온객행은 잠투정을 하는 척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바로 뿌리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주자서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밖에서 하인의 인기척이 날 때까지 주자서는 그렇게 온객행 품에 안겨 있었다. 온객행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더 꼭 안으며 얼굴을 비비자 주자서가 말했다. “노온,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하네”(34) 온객행은 한동안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다 주자서가 자기가 해주었던 이야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았다. 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대의 영견을 가지고 가는 것처럼?”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영견은 그대가 가지고 가시게. 옥패는 내가 가지고 갈 테니.”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몸을 돌려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노온, 마음을 내려놓아. 그 마음은 내가 지고 갈 테니.” 이 치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온객행은 서러워져서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조금 울었다. 온객행이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주자서가 가슴위에 놓인 온객행의 손을 토닥였다. 온객행은 생각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달래 주었더라. 모친이 나를 뭐라고 불렀더라 ‘연아(衍兒)…연아….’ 그래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나의 이름은 연이었던가?’


엽백의와 소녀는 채미공자의 몸을 양지바른 곳에 잘 묻고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파사에서는 사람을 돌 아래 묻는다 하니 엽백의는 소녀가 무덤 앞에 앉아 펑펑 우는 것을 둔 채로 크고 작은 돌을 모아 무덤을 덮었다. 저 멀리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엽백의는 불쑥 소녀에게 물었다. “네가 연(演)이냐?” 소녀는 짓무른 눈으로 엽백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건 왜 물으시오?”

소녀의 목소리가 낮아 진 것을 눈치챈 엽백의가 물었다. “그 옷과 치장은 너의 의취(意趣)냐?” 소년은 벌떡 일어나 몸을 휘감고 있던 장식을 떼어 내고 말했다. “아니오.” 소년이 엽백의에게 물었다. “모친을 해친 것은 당신이오?” 엽백의가 한참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그러려고 했으나 너무 늦었다.” 소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자 엽백의는 당황하여 말했다. “너의 모친께서 남기신 말이 있다.” 소년이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가 말이 없자 소년이 버럭 소리쳤다. “무엇이오!” 엽백의는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너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어디 어른에게 큰소리야!” 소년은 비죽 웃더니 엽백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기루에서 자란아이에게 버르장머리가 어디 있소?” 엽백의는 수긍하며 소년에게 말했다. “일단 나와 가자.”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엄마가 뭐라고 말했어!” 엽백의는 혀를 ‘쯧쯧’차며 소년에게 말했다. “온가보다 더한 놈도 있구나.”

소년이 엽백의를 노려보자 엽백의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이리도 제자 복이 없을까…. 꼬맹이 너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은 어디서 그런 기세가 나왔는지 엽백의에게 다시 소리쳤다. “뭐라고 말했는지 어서 말해!” 엽백의가 달래듯 소년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은 한참 더 노려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연(蝎演).”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갈씨군. 너의 아비의 성이 갈씨냐?” 소년은 많이 지쳤으면서도 눈에 힘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나의 부친은 조씨요.” 엽백의가 웃으며 말했다. “어찌 성도 물려주지 않은 놈을 부친이라 부르느냐? 너는 오늘부터 제갈(諸葛)씨다. 이름은 차차 생각해보자.” 스스로를 갈연이라고 말한 소년은 곧 서있던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밤새 울고 악을 썼으니 얼마 남지 않은 내력이 바닥난 것이다. 엽백의는 스스로에게 제자복이 지긋지긋하게 없다고 불평을 하며 쓰러진 소년을 안고 숭산으로 향했다.

(85) 조식 영회시
智巧萬端出 大要不易方. 如何誇毘子 作色懷驕腸.
지혜와 기료(祈療)는 여러 갈래에서 나오지만 큰 뜻은 방향을 트는 법이 없다. 어찌하여 아첨꾼들은 얼굴 바꿔 교만함을 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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