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33

33. 杯盤狼藉
술잔과 접시가 이리에게 깔렸던 풀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온객행은 무고로 향하고 난 이후로 신경이 날카롭다. 비가 오는 밤은 잠들기 힘들다. 차라리 요란하게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면 조금 낫다. 장마때가 되어 내리는 비가 오히려 더 괴롭다. 지붕과 창호문을 두드리며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검질기게 온객행의 기억을 이리저리 젖히고 뒤적이며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모두 내려 놓기로 하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았는데도 과거는 유념(留念)이 되어 온객행을 놓아주지 않는다.

날이 점점 더워져서 주자서는 들러붙지 말라며 둘 사이를 넓게 벌려 얇은 내의 차림으로 온객행에게 등을 보인다. 그래도 한 침상에 눕는 것이 기꺼워 온객행은 그러마 하고 말았다. 청우 여하에 상관없이 진왕이 주자서에게 들러붙는 것도 짜증이 치밀었다. 주자서가 사계산장에서 입었던 호복으로 갈아 입고 마차를 나이가 많고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주구전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진왕은 주자서를 자신에 마차에 태우고 한참동안 그를 나무랐다.

그 이후로 주자서는 예의 불편하고 소매가 하늘하늘한 비단 장포를 입고 진 길을 함부로 걸어서는 안되는 비단신을 신고 진왕의 마차를 타고 갔다. 온객행이 함께 할 때도 온객행이 함께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진왕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주자서를 희롱하고 난폭하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주자서는 입을 꾹 닫고 그냥 그대로 진왕의 패악을 모두 받아 주었다. 진왕은 객잔에 머무를 때면 주자서를 밤 늦게까지 옆에 끼고 술을 마시게 했다. 감정적으로 시달린 주자서는 기진하여 침상에 누우면 금방 잠들곤 했다. 오늘도 3경이 너머서야 겨우 객실로 들어온 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진왕이 어떻게 할까 두려워서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온객행이 손을 뻗어 주자서를 잡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노온, 잠이 안 와?”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말했다. “이제 오경이야, 오경이 끝나려면 멀었으니 어서 더 자.” 주자서는 온객행이 덮어주는 이불을 발로 차며 말했다. “더워.” 온객행은 일어나 앉아 주자서가 치운 이불을 잘 개서 발치에 두고 다시 누웠다.

주자서가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고 말했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 온객행이 몸을 누이며 말했다. “나도 방금 깼어. 밖에 비가 오나 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창문이 있는 쪽을 보고 말했다. “그러네, 매림(梅霖)인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서, 어서 더 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노온, 왜 그래? 잠 들지 못하는 밤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조금 더 다가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덥다며….” 주자서가 온객행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싫어?” 온객행이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아니, 너무 좋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맘때 오는 비는 너무 세차게 오면 안돼. 그럼 막 여문 매실이 바람에 다 떨어지거든.” 온객행이 ‘흐음’하고 장단을 맞추자 주자서가 말을 이었다. “매림이 지나고 날이 더워지면 아직 덜 여문 파란 매실을 따다가 술을 담그는 거야. 새로 딴 매실로 담근 술은 제자들 이름을 붙여서 태사숙이 머무시는 산에 묻어 놔. 그리고 제자들이 관을 올리거나 혼례를 치르면 꺼내서 마시는 거야.”

온객행이 물었다. “아서의 이름이 붙은 매실주도 있어?” 주자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만약 낙양에 오지 않았다면 올해 관을 올리고 내 이름이 붙은 매실주를 꺼냈을 거야.”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사형들의 이름을 말했다. 온객행은 모르는 그들에게 질투가 일어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서는 지학인데 왜 벌써 관을 올려.” 주자서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의 표정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에 빗소리를 지워보고자 노력했다.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자는 것은 온객행의 잠버릇이 되었다. 익숙하게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늑장을 부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보자 엽백의가 온객행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

온객행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엽백의가 객실의 문 앞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진왕이 지키고 있는데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는 말이다.” 온객행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그냥 같이 잠만 잔 것뿐이오. 노야야 말로 생각이 막되고 문란한 것 아니오?”

엽백의가 혀를 ‘쯧’하고 차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라, 낙양에 무슨 일이 생겨 진왕이 난리다.” 온객행이 눈을 뜨지 못하는 주자서의 어깨를 살살 흔들며 말했다. “진왕이 난리인데 왜 여기로 오셨소.”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네 모과를 빌리러 왔지.” 이제 막 눈을 떠서 정신이 몽롱한 주자서의 몸을 일으키며 온객행이 말했다. “모과는 병이 들어 앓는 중이니 다른 데로 가보시오.”

엽백의가 주자서의 어깨를 좀더 강하게 흔들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모과야, 네 외숙이 많이 아픈 모양이다.” 주자서는 엽백의의 손속에 눈살을 찌푸리며 엽백의를 보고 말했다. “외숙?” 그러더니 정신이 번쩍 났는지 엽백의에게 되물었다. “황제폐하께서 위독하십니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원래도 오늘내일 하던 인물이니 놀랄 것은 아닌데, 시기가 미심쩍구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관수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았다. 온객행은 느긋하게 일어나 주자서가 입을 옷을 챙겼다.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던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모과가 아주 참한 각시를 얻었구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옷을 들고 주자서에게 가면서 일부러 엽백의의 발을 차며 말했다. “노인네는 어서 가서 망령이나 고치시오.” 엽백의가 온객행의 다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젊은이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는데 어디 맞아 볼 테냐?” 관수를 마친 주자서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 주자서가 좋아하지 않는 비단신까지 신긴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누구 신랑인지 정말 잘 생겼네.” 그리고 ‘히히히’웃었다.

그대로 주자서를 자리에 앉힌 온객행이 머리를 빗으려고 들자 엽백의가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얼른 해라. 진왕이 말썽을 일으키기 전에.”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아’하고는 온객행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진왕이 난리다.” 대충 빗어 반만 묵어 내린 머리로 주자서와 엽백의가 나가고 나서야 온객행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진왕의 객실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주자서가 방으로 들어오자 진왕은 소식을 전한 병사를 물러가라 하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기 곁에 앉히고 말했다. “초은왕이 나를 익주로 보낼 때부터 이상했다. 무언가 꾸미는 일이 있어서 나를 이곳으로 내 쫓은 거야.”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진왕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놈도 결국은 태상황의 자식이니 원하는 바가 있었겠지.” 진왕의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주자서의 뺨에 와 닿았다.

진왕이 낮게 송영했다. “하늘에 열린 창은 어두운 방을 통과하며, 모함하는 말이 바르고 곧은 이를 해치고, 흘러가는 구름이 빛을 가리네.”(33) 주자서는 진왕의 말에 속으로 조소했다. ‘누가 빛이고 누가 흘러가는 구름인데?’ 진왕이 다소곳이 놓여있는 주자서의 손을 희롱하며 말했다. “직아(禝兒).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니?”

주자서가 대답했다. “서안에서 낙양까지는 말을 달리면 하루안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 서안에서 멀지 않으니 서둘러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제폐하께서 갑자기 승하하시기라도 하면… 초은왕전하께서는 낙양에 대해 잘 알지 못하시니 녹상서사와 후장군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진왕이 조급해하며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군관은 모두 강릉에서 온 자들이니 이들 몰래 낙양으로 가야겠다.”

진왕이 주자서의 턱을 잡아 쥐고 말했다. “너는 내가 낙양에 도착할 때까지 본왕인 척하다가 내가 부르면 바로 낙양으로 돌아오거라.” 주자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작게 미간을 찌푸리자 진왕이 그를 비웃으며 놀렸다. “검선의 제자 놈에게 제대로 홀렸군, 왜? 저녁에는 비 되고 아침에는 구름 되는가?”(55) 주자서가 시선을 들어 진왕과 눈을 마주쳤다. 진왕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주자서. 너는 내가 주는 것만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턱을 쥔 손을 놓고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렸다.

주자서는 진왕의 손속을 물리치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옷을 바꿔 입은 진왕은 주자서의 옷을 입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여인이 입는 옷 같긴 하군.” 하늘거리는 소매를 펄럭이는 진왕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검은색의 심의 소매를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진왕전하 사안이 시급하니 서두르십시오.” 진왕은 주자서를 힐끔 보고 몸을 돌려 나가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진왕 전하께서 놀라셨으니 어서 의원을 부르십시오.”

진왕의 처소에 들어온 엽백의가 침상에 진왕의 옷에 파묻힌 주자서를 보고 표정을 구겼다. “모과야 네가 왜 거기 있냐?” 주자서가 일어나 엽백의에게 공수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어르신, 진왕전하께서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진왕의 상황을 들은 엽백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가 앉아 있던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진왕이 주공자를 낙양으로 보낸 거군. 황제를 보필하라는 이유로 말이야. 주공자는 바로 여기 계신데.”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말이 없다가 엽백의가 말했다. “소림사는 진왕 때문에 길을 멈출 생각이 없다 했소. 나중에 진왕이 알면 또 패악을 부리겠지만 어떻게 하겠소?” 주자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차에서 내리지만 않으면 눈 여겨 볼 사람도 없으니 그냥 함께 가겠습니다. 하지만 진왕이 추후에 다시 찾겠다 했으니 조금 뒤처져 가겠습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군관의 눈은 어떻게 피할 참이냐?”

주자서가 엽백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진왕은 저 말고는 얼굴을 마주했던 군관이 많지 않으니 제가 얼굴만 잘 숨기면 들키지 않을 것입니다.” 엽백의가 주자서의 얼굴을 가까이 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진왕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얼마나 귀한 출신인 것이냐?” 주자서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답했다. “어르신, 저는 양주 회계의….”

주자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엽백의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아들이면, 황친이냐? 제척이냐?” 주자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자 엽백의가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신분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은 정녕코 없느냐?” 주자서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르신, 저는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입니다.” 주자서의 태도가 제법 도를 닦은 티가 나서 엽백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뭘로 가리면 좋을까?” 주자서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엽백의는 왔을 때처럼 훌쩍 자리를 떠났다.

주자서는 온몸을 가린 얇은 비단의 유모(帷帽)를 쓰고 마차 안에 앉아 있다. 휘장을 다 걷어도 끈끈하고 무더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주자서는 일부러 중의를 입지 않고 내의 위에 바로 심의를 걸쳤는데도 날이 무더워 혹서와 씨름하고 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하루가 지났지만 산속이라고 그렇게 시원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산을 넘어 도착한 마을은 산속에 쌓여 있는 분지라서 더 덥고 더 습했다. 차라리 비가 오면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비가 오기 시작하니 더 무더워졌다.

내의가 척척 들러붙어 움직일 때마다 불쾌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며 군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전처럼 패악을 부리지 못하는 것도 몸에 난 발진 때문이라고 가져다 붙이니 그럴 듯해졌다. 혹시라도 괜히 심기를 거슬러 난리를 피울까 군관들은 더욱 조심하면서도 진왕의 일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마을의 객잔에서 가장 좋다는 객실에 도착한 주자서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멈춰서 군관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 창호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주자서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문으로 가서 문을 끈으로 묶어 잠갔다.

유모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입고 있는 장포를 벗어 침상위에 대충 던졌다. 주자서는 대야를 찾아 물을 담아 얼굴에 물을 적셔 땀을 닦아 냈다. 안에 입은 내의가 땀에 젖어 피부에 들러붙는 느낌이 찌뿌드드하여 좋지 않았다. 그러다 밖에서 군관이 기별을 하자 주자서는 어깨를 튀며 탁자위의 유모를 얼른 쓰고 창호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요기할 음식이 든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문단속을 하고 유모를 벗어 침상 위에 던져두고 탁상에 앉았다.

온객행이 소반에서 찬을 꺼내다 주자서를 보고 그릇을 놓쳤다. 주자서가 온객행이 떨어뜨린 음식을 정리하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노온, 왜 그래?” 온객행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주자서가 벗어 놓은 장포를 들고 와 주자서에게 입히며 말했다. “아서, 옷을 입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가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더워서 싫어.” 하고 어깨를 털어 걸쳐진 장포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온객행은 얼굴이 빨개져서 주자서에게 말했다. “부군, 소첩에게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소첩이 만드는 것이겠습니까?”(73) 주자서가 음식에서 눈을 떼고 온객행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끄러워하는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린 주자서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견으로 짠 얇은 내의가 땀에 젖어 주자서의 몸을 은근하게 비쳤다. 갑자기 열이 확 오른 주자서가 바닥에 떨어진 장포를 주워 두르며 말했다.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또 헛소리!”

말을 더듬는 주자서가 장포를 주워 여미는 것을 본 온객행이 탁상에 앉으며 말했다. “아서…, 그렇게 더워? … … … 씻을래?”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더위에 지쳐 입맛이 없는 주자서가 금방 젓가락을 내려놓자 온객행이 옆에 앉아 그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리며 말했다. “아서, 좀 더 먹어야지.” 주자서는 대답없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조부께서는 괜찮으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찬 몇 개를 더 권하며 대답했다. “응. 오히려 널 걱정하셨어, 너는 더위를 많이 탄다면서?” 주자서가 밥그릇을 밀어내고는 일어났다. “그러니까 오늘은 평상에서 자.”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을 내밀자 주자서가 말했다. “싫어서가 아니야 정말 더워서 그래.” 온객행이 소반에 음식을 정리하며 말했다. “나는 더워도 아서랑 같이 자고 싶어.” 주자서가 침상에 올려진 유모를 치우며 말했다. “너는 나에게 철썩 붙어서 자잖아. 정말 너무 덥다구.”

주자서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자 온객행이 다가와 주자서의 풀어진 머리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좀 시원하지?” 주자서의 땀에 젖은 목덜미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킨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다시 내려놓고 탁자위에 있는 소반을 들었다. “그럼 오늘은… 따로 잘까?” 주자서는 손부채질을 한참 하다가 온객행을 보고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아니.” 온객행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창문 열어 놔.” 온객행은 더 묻지 않고 객실을 나갔다.


서천 한수에 도착하기 전에 낙양에서 보낸 진왕의 군대가 주자서를 데리러 왔다. 진왕의 군대는 오직 주자서만 데리고 왔던 길을 거슬러 낙양으로 향했다. 서안에 도착하기전에 초은왕의 군관은 모두 죽었다. 안 좋은 사고로 꾸몄지만 주자서는 그것이 진왕이 시킨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처신을 조심했다. 낙양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진왕에게 황위를 선양했다.

황위에 앉은 진왕은 제일 먼저 동궁의 조왕을 죽였다. 조왕 사마륜의 머리는 낙양의 동쪽 선문관에 걸렸다. 초은왕은 딱히 찬탈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가 위독했을 때 낙양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서 다시 자신의 봉지가 있는 형주의 강릉으로 돌아갔다. 서소강은 대외적으로 초은왕의 부하였으므로 낙양성에 남을 수 없어서 초은왕과 함께 형주로 내려간 뒤 사계산장으로 돌아갔다. 낙양성 안은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듯이 어수선했는데 주자서가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정리된 후였다.

진왕은 한동안 기분이 좋은지 주자서를 주택에 가둬 뒀다가 황제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남궁으로 들였다. 황제는 자신의 등극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신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주자서에게 여인이 입는 옷을 선물하며 선황을 잘 모시라고 명령했다. 주자서는 황제가 원하는 대로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식건전에서 하루 종일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남궁에 들어간 이후로 주자서는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을 황제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주자서는 선황을 부축하여 화림원을 거닐고 있다. 선황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헌아(櫶兒), 기억나니? 선황께서 우리에게 처음 수담(手談)하셨을 때 말이야.” 황제가 걸음을 빨리하여 계수나무 아래 정각으로 주자서를 이끌었다. “바로 이곳이었어. 너는 수담하는 재주가 정말 좋았는데.” 황제가 석탁 위에 난 기국(碁局)을 쓰다듬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말없이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주자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더위를 많이 탔는데, 그래 너는 백합탕을 좋아했지? 백합청양 말이다.” 주자서는 기억을 더듬어 여름에 모친께서 뭘 드셨는지 한참 생각했다. 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장마비가 내리고 나면 항상 공의에 있는 별장에 가서 물놀이를 했었다. 뭘 먹고 마셨는지 기억하기에는 너무 멀고 아득한 기억이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내관이 조용이 물러갔다. 석탁에 있는 의자에 선황을 앉히고 그 앞에 가서 앉았다. 궁녀가 옥을 깎아 만든 바둑돌을 가지고 와서 선황과 주자서 앞에 놓았다. 선황은 기분이 좋았는지 첫수를 우상귀에 두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헌아, 봐줄 필요 없다. 오늘 제대로 수담하자.” 주자서는 조금은 어색하게 바둑돌을 두어 선황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주자서는 수담에 서툴다. 어릴 때 양친께서 두시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사계산장으로 온 이후에는 일상이 바빠 바둑판구경도 힘들었다. 어렴풋한 기억을 마음으로 짐작하여 수를 두었다. 바둑돌이 기국을 반쯤 덮었을 때, 내관이 소반에 유리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내관이 소반을 내려놓자 황제는 그릇을 집어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헌아, 네가 좋아하는 백합탕이다. 향이 아주 좋구나.” 주자서는 차게 식힌 백합탕을 들고 선황을 보았다.

선황은 자기 몫의 백합탕에는 관심이 없는지 주자서에게 어서 먹어보라며 채근했다. ‘달다.’ 주자서의 기억에 없는 음식이다. 주자서가 조금 먹고 그릇을 내려놓자 선황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 “왜? 입에 맞지 않느냐?”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선황 몫의 유리그릇을 들어 건넸다. 주자서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황제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를 ‘회암’이라 부르며 발작했다. 주자서는 구중궁궐안에 갇혀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선황의 곁에 버려졌다.

밤 늦게까지 선황의 시중을 든 주자서는 선황이 침상에서 잠이 들때까지 부채질을 하다가 식건전을 나왔다. 남궁에 있는 모두가 주자서를 감시하는 중이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서가 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일이다. 처소로 돌아가는 길은 달빛도 없이 어둡기만 하다. 그가 잠잘 준비를 마치고 작게 한숨을 쉬고 옷을 벗고 있을 때 황제가 주자서의 처소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벗고 있던 옷을 다시 여미고 손을 모야 공수하며 인사했다. “황제폐하.” 황제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한동안 횡설수설했다. 혁란은 황제가 되고도 거슬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주자서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휘우듬하게 기우는 그를 부축했다. 황제가 주자서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한참동안 삼공과 장군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주자서가 반응이 없자 황제는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순종적으로 굴자 황제가 주자서의 턱을 잡아채며 말했다. “너도 내가 우습지?” 주자서가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황제가 벌떡 일어나 주자서의 앞섶을 잡았다. “사내를 안는 취미는 없지만, 너라면 나쁠 것 같지도 않군.” 주자서가 황제의 팔을 잡자 황제가 그에게 말했다. “감히 옥체에 손을 대느냐?” 주자서가 멈칫하자 황제가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렸다. 주자서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황제는 주자서를 끌고 침상으로 갔다.

침상에 팽개쳐진 주자서가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폐하!” 황제가 자신의 요대를 푸르며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주자서는 황제를 뿌리칠 능력도 기술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뿌리쳐서 잃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주자서의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읽은 진왕이 조소하며 몸을 붙여왔다. “그래, 너는 내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야지.” 주자서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꼭 감았다.

한참 황제가 주자서의 몸을 더듬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주자서의 처소의 문이 벌컥 열리며 선황이 들어왔다. 선황을 본 황제가 재빨리 자신의 앞섶을 추스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옷이 다 흐트러진 주자서를 보고 선황이 다가와 황제를 밀어냈다. “우리 헌이에게 무슨 짓이냐!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주자서는 얼른 앞섶을 추스르고 일어나 선황을 부축했다. 선황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황제에게 한참 욕을 퍼부었다. 내관과 주자서가 선황을 달래 식건전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 주자서는 식건전을 떠나지도 못했다.


온객행은 한수에 도착하고 나서 크게 앓았다. 이맘때는 항상 몸이 좋지 않았는데 사례에서의 일을 겪으면서 쌓였던 피로가 뭉쳐 터진 것이다. 시기가 좋지 못했다. 다행히 주자서는 온객행이 앓는 것을 보기 전에 낙양으로 떠났다. 이번 초여름 장마는 긴 것인지 아니면 익주에만 많은 비가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정신이 없는 사이 대서가 지났다.

무고를 찾으러 간다는 사람들은 그를 한수에 두고 성도로 떠났다. 그 때문에 길을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산세가 험해 소림사 회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길이 지연되었다. 엽백의는 작게 혀를 차고 제갈왕을 두고 갔다. 제갈왕은 곤륜산에 조경과 우달을 호송하고 막 돌아온 참이다. 온객행은 꿈을 꾸는 것 같다가도 금방 일어나 누군가를 찾았다. “아서! 아서….” 제갈왕은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라 누구인지 모르니 멀찍이 앉아 그러려니 했다. 장마가 끝나고 날이 더워지자 온객행은 정신을 차리고 주(周)공자를 찾았다. 주공자가 낙양으로 떠난 것은 벌써 이레 전의 일이다.

온객행이 이레를 걸어 서안에 도착해서야 초은왕이 형주로 돌아간 것을 알았다. 주(朱)공자는 대신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선황과 함께 황궁 식건전에 갇혔다고 한다. 황궁안에 혼자서 그 모욕을 견디고 있을 주자서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어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주택(朱宅)에 갇혔을 때 왜 하루빨리 찾아가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이제 갈 수도 없는 곳에 갇힌 그를 만날 길이 없다.

온객행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구주에 흩어져 있는 황족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그는 꼭 집어 초은왕만 초대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염치 불구하고 주택에 머물고 있는 제왕을 찾아갔다. 제왕은 이번 길을 태산의 태수와 함께 왔는지 장순이 온객행을 반기며 나왔다. “온공자!” 제왕은 몰라도 장순은 온객행을 반기며 그를 주택 안으로 들였다. 제왕에게 인사하고 장순과 내실로 향했다.

장부인과 장양도 함께 왔는지 온객행이 내실로 들어서자 그를 반겼다. “온공자!” 온객행이 입은 하얀 옷을 보더니 장양이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 어디서 도라도 닦으십니까?” 온객행이 무거운 얼굴로 장순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장대인, 저는 사계산장의 제자가 아니라 장명산의 제자입니다.” 장양이 옆에서 놀라며 말했다. “장명산 검선의 제자라는 말이오?” 장순이 장부인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온공자는 무슨 연유로 이 곳에…?”

온객행은 말없이 서있다가 거짓말을 했다. 검선께서 주자서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아주 중요한 것이라 꼭 직접 만나 전해야 한다고. 장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제께서 여신 연회에는 제왕께서 초대받으신 것이지만, 나와 제남의 태수는 제왕을 호위하는 목적으로 온 것이지, 황궁에는 들어갈 수 없네. 우리도 주공자를 만나고 싶어 이리 함께 왔는데 그가 황궁에 갇혀 있다니…, 대체 황제는…?” 장순이 자리에 앉아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온객행을 제왕에게 데려갔다.

제왕 사마경은 과거 서선공이 북방의 오랑캐를 물리칠 때 함께 있었던 장군 중 한명이라 서선공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주자서가 궁궐에 갇힌 것을 알자 분개하며 말했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이를 궁궐에 가두었단 말이냐! 사마연 그 놈은 어릴 때도 영이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더니 아직까지도!” 그리고는 온객행의 어깨를 토닥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황궁으로 갈 때 그대를 호위로 대동할 테니 혹 영이가 연회에 나오면 만나서 검선의 말씀을 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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