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34

34. 驟雨不終日
소나기는 하루 종일 오지 않는다.

주자서는 황제의 침상 옆에 앉아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눈칫밥을 먹으며 식건전에서 선황의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가 안타까워 내관은 그를 깨우려다 말았다. 언제인가 그를 평상에 재우려고 깨웠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한숨도 자지 않고 꼿꼿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자서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키가 조금 크고 살이 많이 내려서 그 모습이 더 처연했다. 선황이 주자서를 한순간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자 황제는 기세가 꺾였는지 예전만큼 주자서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정신을 놓았다는 선황은 전에는 찾지 않던 의학에 관련된 서적을 옆에 끼고 먹는 것 하나하나를 전부 투정했다. 급기야 만드는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자서는 가끔 사계산장에서 먹었던 묽은 죽이나 나물 찬을 만들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황은 주자서가 만든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했다. 선황은 이제 주자서가 목소리를 내도 발작하지 않았다. 날이 좋으며 화림원에 해가 잘드는 곳에 그늘을 만들어 놓고 고개를 숙이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주자서를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가 주자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황제가 숭덕전에서 황친을 모아 연회를 크게 열었다. 황위 계승을 축하할 겸 모시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연회이다. 선황과 함께 식건전 아니면 화림원을 거니는 것 말고는 크게 움직이지 않는 주자서도 남궁 전체가 얼마나 들썩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주자서에게 또 옷을 보내왔다. 능소화 빛깔의 노란 장포에 다홍색 중의는 매미날개처럼 얇다. 주자서는 그 옷을 받고 인사했다. “황제의 자애함에 망극 하나이다.” 그 옷을 가지고 온 내관은 주자서의 인사도 받지 않고 식건전을 떠났다.

황제의 내관은 주자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내관에게 청전(請錢)으로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받은 옷을 식건전 안쪽에 선황의 옷을 보관하는 곳으로 가져가 두었다. 주자서는 아직도 황제가 저에게 하는 이 고약한 장난이 자신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이 언짢았다.

연회에 입고 오라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내키지 않는다. ‘몸을 잊고 총명을 버려라.’(49) 주자서는 모친을 원망하려고 하다가 그러지 못했다. 저를 두고 먼저 가신 모친께서 어떤 마음이셨는지 주자서는 감히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선황과 모친을 함께 그린다고 생각하니 고스란히 혼자인 것만 같지는 않아 위안이 되었다. 내실에서 주자서를 찾는 내관이 그를 데리러 왔다. 선황이 그를 찾는 것이다.

선황은 조금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서안 앞에 앉아 오래된 서간을 읽고 있었다. 주자서는 어렴풋한 기시감에 마음이 조금 두근거렸다. 주자서가 손을 모아 공수하여 인사했다. 선황은 주자서를 보고 읽고 있던 서간을 내려놓고 그에게 손짓했다. “영아, 이리 오너라.” 주자서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주자서가 식건전으로 들어와 시중을 들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선황이 그를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주자서가 주변의 내관을 눈치를 보자 내관들이 조용히 서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서실의 장지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엄윤(閹尹)이 나가고 난 후에 선황에게 다가갔다. 선황은 주자서에게 자기 옆에 있는 포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영(嬴)아, 기억나니? 선황께서 네가 오는 날엔 편강 대신 모과 절임을 드셨어.” 황제는 귀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품속에서 작은 나무함을 꺼냈다.

주자서는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뚜껑을 여러 보니 모과 절임이 들어 있다. 얇게 편으로 저며 마치 편강처럼 생긴 모과 절임을 집어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선황께서 잘못 집어 영이에게 편강을 먹였다가 맵다며 크게 운 적이 있었거든. 영아 기억나니? 선황께서 한참을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헌이가 오자마자 눈물을 그쳤어.” 그리고는 주자서를 보고 웃었다.

주자서가 선황이 내민 모과 절임을 받아 들었다. 선황이 말을 이었다. “우는 너를 달래시려고 쩔쩔매는 모습은 영(潁; 사마영 기왕)이 때도 보지 못 했어.” 주자서가 고개를 들었다. 선황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우(杞憂)다. 기우였어.” 주자서가 작게 훌쩍였다.


선황은 이후로 주자서를 서실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화림원에 있는 석탁에 가서 바둑을 두었다. 낙양의 여름은 임해의 여름만큼 덥지 않았다. 선황은 주자서 역시 모친을 닮아 더위를 타는 것을 보고 기꺼워했다. 주자서는 점점 낯설었던 차게 식힌 백합탕에 익숙해지고 있다. 주자서는 황제가 선황을 모시라고 보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었다. 내관들은 그런 주자서를 데리고 식건전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말을 붙였다.

그러다 주자서의 눈에 오랫동안 방치된 서실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 보였다. 그래서 주자서는 선황이 부르지 않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서실에 앉아 책을 정리하는데 썼다. 손때가 많이 탄 익숙한 죽간부터 낯선 비단 책자까지 주자서는 이것들 중에 어떤 것은 어쩌면 모친의 손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갈하게 달린 주석은 외조부께서 쓰신 것일까? 모친께서 쓰신 것일까? 그러다 황제가 오면 주자서는 환관들이 선황의 옆으로 급히 데리고 가서 시중을 들게 했다.

황제의 손이 아직 식건전 깊숙한 곳까지 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황제는 매일 아침 선황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가끔 기별없이 들이닥쳐 저녁을 먹었다. 선황은 황제와 식사할 때면 항상 음식을 투정했다. 그래서 주자서는 또 별볼일 없는 재주로 보잘것없는 음식을 만들어 선황께 바치는 것이다. 주자서가 없는 동안 무슨 대화를 했는지 황제의 발길이 뜸하다. 주자서는 연회 준비로 황제가 바빠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회가 다가오자 황친이 하나 둘 낙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착해서 선황에게 인사했다. 주자서는 예장왕, 회남왕, 제왕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선황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에게도 아는 척을 했다. 예장왕이 주자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너는 어째 볼때마다 매미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있구나.” 예장왕의 거친 손속으로 흐트러진 요대에 주목으로 만든 하얀 실의 요패가 걸려있다.

예장왕은 요패를 들어 보더니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어찌 이런 천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느냐?” 예장왕이 요패를 떼어내려고 당기자 주자서는 털썩 주저앉아 바닥에 머리를 붙여 조아렸다. 회남왕이 예장왕을 말리며 말했다. “풍도형님, 영이가 원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왕이 거들었다. “영아, 일어나거라.” 그리고는 자기 요대에 매여 있던 금방울이 달린 요패를 풀어 건네며 말했다. “그런 것은 황실 격에 맞지 않으니 앞으로는 이것을 쓰도록 해라.”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회남왕이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더 자주 만나며 차차 가르치면 됩니다. 건업에 돌아가면 산호로 만든 요패를 선물로 보내주마.” 주자서는 제왕이 쥐여준 요패를 손에 쥐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왕전하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손에 쥔 요패를 내밀었다. 예장왕이 답답하다는 듯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가 달고 있는 요패를 잡아당겨 바닥에 팽개쳤다. 그 바람에 요대가 풀린 주자서가 앞섶을 움켜쥐고 다시 주저 앉았다.

예장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서 화동이라도 하다 왔느냐 왜 이리 답답하게 굴어.” 제왕이 예장왕을 나무라며 말했다. “풍도형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왕이 말했다. “이것이 어찌 영이가 원해서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황제가 영이를 모욕한 것을 잊으셨어요?” 제왕이 주저 앉아 있는 주자서를 일으키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영아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황친이 하는 행패를 보고 있던 선황이 주자서를 불렀다. “헌아.”

주자서는 선황에게 가기전에 손에 들고 있던 금방울이 달린 요패를 제왕에게 돌려주고 바닥에 떨어진 끊어진 주목 요패를 집어 들었다. 주자서를 자기 옆에 앉힌 선황이 말했다. “감히! 우리 헌이에게 무슨 짓이냐!” 선황의 말에 황친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 앉았다. 선황은 주자서의 앞섶을 다시 여며주며 주자서의 등을 쓸었다. “황궁에는 저런 몹쓸 것들 밖에 없어서 우리 헌이를 어떡하나.” 선황의 말에 제왕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폐하,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황제가 주자서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사마운이 헌이를 욕보이려 했다! 내가 그를 내쫓았으니 이제 괜찮아.” 선황의 말에 제왕과 회남왕이 시선을 교환했다.

예장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 자이는 이미….” 제왕이 예장왕의 말을 잘랐다. “폐하, 헌이를 제가 청주로 데려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회남왕이 말했다. “그동안 양주에서 자랐다고 하니 제가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황은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우리 헌이는 아무데도 안 간다! 너희는 믿을 수 없어. 어서 가서 회암을 불러와라.” 선황의 입에서 서선공의 이름이 나오자 식건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긴장했다. 선황이 횡설수설하자 엄윤이 황친에게 다가가 선황의 건강을 걱정하며 조용히 황친들을 밖으로 모셨다. 그들은 별 말없이 선황에게 인사하고 식건전을 나갔다.

황친이 나가고 나서도 선황은 한참 주자서를 안고 있었다. 작게 주자서의 귀에 속삭였다. “영아, 천자가 될 마음은 없느냐?” 주자서가 몸을 틀어 벗어나려고 하자 선황은 주자서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내가 너를 천자로 만들어 주마.”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폐하, 저는… 저는….” 선황이 몸을 물리고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내가 해주마.” 주자서는 선황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떴다.

주자서는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져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친께서…, 장공주께서 유교의 덕으로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황이 작게 탄식하며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선황의 눈시울이 붉다. 주자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잊고 총명을 버리면 천륜도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47) 주자서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선황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름진 그의 얼굴을 적셨다. 선황이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헌이의 묘수는 언제나 이기는 구나.” 두사람은 식건전 옥좌에 앉아 한참 울었다. 주자서의 흐느낌이 수그러들고 선황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된다.” 주자서가 선황에게 눈을 맞췄다. 선황은 방금 막 다시 흐르기 시작한 주자서의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이제 모두 보내 주어야겠다.” 선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엄윤을 불렀다.


유시가 되자 내관이 선황을 모시러 식건전으로 들어왔다. 선황은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밝은 색의 대수삼관에 노란빛이 도는 폐슬과 붉은 요대를 하고 붉은 산호가 달린 요패를 맸다. 진왕이 보낸 능소화 빛깔의 옷을 입은 주자서와 아주 잘 어울렸다. 법도대로라면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기 때문에 어두운 색 심의를 입는 것이 맞지만, 선황은 황실의 제일 어른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했다.

태보가 선황의 옷차림을 보고 몇 차례 간언했으나 선황은 듣지 않고 옆에 황제에게 받은 옷을 입은 주자서를 데리고 숭덕전으로 향했다. 제일 상석에 선황이 앉고 한참 후에 황제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자리에 앉은 황친들 대부분이 아주 짙은 색의 옷을 입어서 선황과 주자서가 더 눈에 띄었다. 황제는 자리에 앉기 전에 도착한 황친과 하나하나 인사를 하며 상석 앞에 마련된 술상에 가서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음식이 들어오며 음악이 연주되었다. 주자서가 입은 옷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 주었다. 춤을 출 때마다 팔랑거리는 치마가 마치 능소화 같다.

선황은 주자서를 옆에 앉혀 놓고 이것 저것 음식을 권하다 말했다. “백합탕이 없지 않느냐? 우리 헌이는 백합탕을 좋아하니 어서 백합탕을 내오너라.” 선황의 목소리에 웃고 떠들던 황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황제는 잠시 얼굴을 구겼다가 내관에게 시켜 백합탕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황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자 황친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덕담을 하며 술을 권했다.

황친과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취기가 돈 황제가 선황에게 다가와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부황,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영(嬴)이에게 말씀하세요.” 황제가 선황을 도발하려는 것 같았다. 선황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내가 란이 너에게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식건전에 두고 온 모양이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부황, 제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선황이 손을 내젓고 말했다. “너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헌아 네가 다녀오너라.”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선황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황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숭덕전을 나갔다.

숭덕전을 나가자 엄윤이 주자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자서가 그를 따라 식건전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서!”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주자서는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거미가 앉은 황궁이 붉다. 갑옷을 입은 무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엄윤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주공자를 멈추는가?” 군관이 점점 다가오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틀어 올려 장관을 쓴 온객행은 너무 낯설어서 주자서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군관이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엄윤이 놀라 주자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주공자.” 군관이 주자서에게 다가오자 엄윤이 날카로운 기색으로 군관을 경계했다. 주자서가 군관의 견갑을 잡으며 말했다. “노온! 어떻게…?” 엄윤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주공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해가 지기전에 가셔야 합니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더 바짝 다가오자 엄윤이 그를 막았다.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아서, 우리 도망갈까?” 주자서의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 온객행이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가져갔다. 엄윤이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주공자. 지금 가셔야 합니다.” 엄윤이 주자서를 일으켜 그를 식건전 쪽으로 끌고 갔다. 온객행이 그를 따르며 말했다. “아서,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주자서는 엄윤의 손에 이끌려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온객행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온, 돌아가.” 그의 말에 온객행의 걸음이 멈췄다. 주자서가 멈춰서 그에게 말하려고 하는데 엄윤이 그를 업고 식건전으로 향했다. 주자서가 말했다. “노온! 돌아가.” 온객행은 멀어지는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주자서가 멀리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 사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온객행은 식건전으로 향하는 길에 서서 말했다.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아서….”

온객행은 방금까지 주자서가 잡아주었던 손을 쥐었다 폈다. 펴는 순간 그와 만났던 순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보낸 것이 후회가 되어 식건전으로 달려갔다. 식건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게 번진 불이 장지문을 뚫고 나왔다. 온객행이 식건전에 가까워질수록 번진 불로 사위가 붉었다. 주변에서 물을 옮기고 있던 군관들이 온객행을 보고 그에게 물동이를 건넸다.

식건전 근처에서 방금 주자서를 끌고 가던 엄윤이 내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온객행이 물동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자 엄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어서 불을 꺼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온객행이 그에게 물었다. “주공자는 어디 있습니까?” 엄윤이 인상을 쓰며 온객행을 보았다. “군관은 어서 불을 끄세요.” 온객행이 들고 있던 물동이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주공자는 어디에 있어요?”

엄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온객행이 내려 놓은 물동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물동이를 다시 온객행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주공자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며 엄윤을 보자 엄윤은 곧 불을 끄는 군관들에게 안에 주공자가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곧 뒤따라온 장순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온공자 무슨 일이오? 주공자는 만났소?” 온객행이 불길이 타오르는 식건전을 보고 있다가 그리로 달려 들려고 하자 장순이 그를 막으며 말했다. “온공자, 왜 이러시오?”

온객행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넋이 나가 말했다. “아서가… 아서가 안에 있어요.” 장순은 버둥대는 온객행의 혈자리를 눌러 그를 제압했다. 쓰러진 온객행을 한 켠에 뉘여 놓고 주변에 있는 군관들을 모아 불을 끄기 시작했다. 숭덕전에서 연회를 즐기던 황친들이 타는 냄새를 맡고 하나 둘 식건전으로 모였다. 선황이 식건전 앞에 주저 앉아 울며 말했다. “헌아! 우리 헌이가 안에 있다! 헌아!” 황제가 선황 옆으로 가서 그를 토닥였다.


식건전은 밤새도록 타올라 동량과 서까래마저 모두 새카맣게 타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구의 시체를 찾았다. 식건전에 남아있던 내관과 여관들 그리고 선황의 침실에서 황제가 선물한 옷을 입고 온몸에 화상을 입어 죽어 있는 시신을 찾았다. 그의 손에는 타고 남은 주목 요패가 들려 있었다.

온객행은 다음날 아침 주택에서 눈을 떴다. 온객행은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하게 나는 타는 냄새가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온객행이 아침을 먹으려고 부엌으로 가는 길에 장양을 만났다 장양이 온객행에게 인사했다. “온공자!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온객행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장양이 답답하다는 듯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부친께서도 제왕께서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남궁에 큰 불이 났다고 하던데, 온공자는 다친데 없습니까?” 온객행의 몸이 크게 흔들리자 장양이 그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온공자? 어디 다쳤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황궁에…불이?” 장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식건전이 모두 탔다고 합니다.” 온객행이 자리에 주저 앉으며 말했다. “아서…아서.” 장양은 온객행을 부축해 외실로 데려갔다. 그날 오후 다 늦어서야 제왕과 장순이 돌아왔다.

장순은 돌아오자마자 온객행을 찾았다. “주공자께 전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전하셨소?” 온객행이 대답없이 멍하니 앉아 있자 장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젯밤에 주공자를 만났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순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주공자께서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아서는 무공이 높아요. 분명히 불이 나기 전에 도망쳤을 것입니다.” 장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온객행이 다시 조리가 없이 말을 지껄였다. “내관…, 내관이 그를 데리고 갔어요. 어서 가야 된다고 하면서…, 만났는데, 내 손을 잡고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대체 어디로?” 장순이 탁자위에 타다 만 주목 요패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황제께서는 주공자의 장례를 국상으로 치른다 하셨소.” 온객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온객행은 주택에 마련한 주영의 빈소를 지켰다. 상을 모두 치르고 나서 제왕과 장순이 다시 청주와 연주로 돌아갈 때에도 온객행은 주택에 있었다. 그러다 황제가 주택을 거둬드렸다. 주택의 대문에는 다시 봉문이 붙었다. 온객행은 소림사에 머물면서 매일 주택을 찾아갔다. 더위가 꺾이고 무고를 열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무고에 갔던 사람들은 무고 근처에 있는 문파와 교류를 하고 각자 자기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고 한다.

엽백의는 온객행을 데리러 다시 숭산으로 돌아왔다. 무고 안에 남아있던 명교와 마교의 두루마리들은 모두 태우고 무고의 문을 열어 둔 채로 돌아왔다고 한다. 엽백의는 옥패를 온객행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제갈왕은 불태운 두루마리들이 아깝다며 한참 엽백의에게 불평했다. 온객행이 모르는 말로 한참 떠들다가 다시 이해가 되는 말로 떠들었지만 온객행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가.’ 온객행은 계속 생각했다. 대체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돌아가라고 한 곳이 어디인지. 장명산인지 아니면 처음 만났던 소림사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던 주택인지 ‘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볼일이 끝난 엽백의는 하루빨리 장명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제갈왕을 제자로 받았지만 그는 용독술에만 능통하여 체술이나 무공은 시원치 않았다. 그를 제자로 소개했으니 어디 가서 장명산의 이름이 부끄러울 짓을 하지 않게 하려면 가르쳐야 했다.

엽백의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너 사계산장에 다녀오거라.” 온객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엽백의가 말했다. “사계산장에는 주공자의 소식이 닿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네가 가서 알려주라는 것이다.” 온객행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엽백의가 ‘쯧’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네놈은 어디 눈물을 따로 담아 두는 것이냐? 그만 울어라!” 엽백의의 타박에 온객행이 ‘으앙’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자 엽백의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주공자도 네가 전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온객행은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제갈왕이 온객행의 곁으로 오더니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온객행은 제갈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또 한참 울었다. 엽백의가 다정한 둘의 모양새를 보고 ‘흥’하고 코웃음 쳤다. 제갈왕이 말했다. “내가 울면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해 주었소. 울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우는 것이 나을 때도 있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양주로 가겠다고 해 놓고 한참을 소림사에 눌러 앉은 온객행이 마음에 안 들어 엽백의와 제갈왕이 소림사를 떠났다.

소림사를 떠나면서 엽백의가 말했다. “올해를 넘기기 전에 돌아와라.”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자 엽백의는 온객행이 또 울 것 같아 경공으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제갈왕이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사형! 장명산에서 기다리겠소.” 온객행이 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왕이 말했다. “내가 해보니 사람이 난 자리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소.” 온객행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지자 제갈왕도 서둘러 엽백의를 따라갔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가을 매미 처량하게 운다. 도성 문 밖의 이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자꾸 가라고 재촉한다. 두 손 마주 잡고 젖어 드는 눈동자 바라보다 끝내 한마디 못했다. 목이 메인다. 이제 가면 아득한 물안개길, 저녁안개 가득한 남녘 하늘, 자고로 다정하면 이별이 아프다 하던데, 차갑고 쓸쓸한 이 가을에 이별을 어찌 견딜까? 마음속 일어나는 수많은 연정을 누구에게 말할까?”(96)

(96) 유영 우림령 雨霖鈴
“寒蟬凄切, 對長亭晩, 驟雨初歇
가을 매미 처량하게 운다 십리 정자 길 황혼에 대고 퍼붓던 소나기 이제 막 그쳤다.
都門帳飮無緖, 留戀處, 蘭舟催發
도성 문밖 이별의 술과 적, 울적하게 쓸쓸히 마시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데 배는 가자고 재촉한다.
執手相看淚眼, 竟無語凝噎
두 손 마주 잡고 젖어 드는 눈동자 바라보다 끝내 한마디 못하고 목이 메인다
念去去千里煙波, 暮靄沉沉楚天闊
이제 떠나서 가고 또 가면 천리 물안개길, 저녁안개 가득한 남녘 하늘 아득하네
多情自古傷離別, 更那堪冷落淸秋節
자고로 다정한 사람은 이별이 서러운데 차갑고 쓸쓸한 이 가을의 이별을 어떻게 견딜까?
今宵酒醒何處, 楊柳岸曉風殘月
오늘밤 마신 술 어디에서 깰까? 버드나무 언덕일까 새벽바람 지새는 달 아래일까?
此去經年, 應是良辰好景虛設
이제 떠나가면 여러 해를 넘길 테니 아름다운 시절, 좋은 경치모두 부질없네
便縱有千種風情, 更與何人說
마음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연정 있다해도 그 누구에게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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