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引而不發
활시위를 당길 뿐 놓지 않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덮어준 장포를 적시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나는 헤엄을 칠 줄 아는데 왜 나를 밀어 낸 거야?”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 아서를 구하려고 손을 뻗은 것이지 어찌 내가 그대를 밀어낸다는 말이야?” 주자서는 입술이 파래져서는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리고는 뒤쪽에 서있는 장양의 불편한 기색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온객행은 괜히 억울하여 앉아 있는 주자서에게 팔을 둘러 앉았다. “왜 그래 아서, 나는…, 나는 아서가 걱정되어서….”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길을 물리치고 풍막으로 가서 앉았다.
둘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장양이 어색하게 다가와 말했다. “주공자께서 물에 빠져 많이 놀라신 것 같으니 어서 별원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는 뱃사공이 있는 배의 뒤쪽으로 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제 이 치가 없으면 나는 못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풍막에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가 술상 앞에 털썩 앉은 온객행이 넋을 놓고 주자서를 보고 있자 주자서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몸을 말고 떨고 있는 주자서가 가엽고 불쌍하여 온객행은 일어나 주자서 옆에 가서 앉았다. 온객행을 피하려고 거리를 벌리는 주자서의 발을 잡아 신발을 벗기고 족건을 벗겼다. 찬물에 발끝이 빨갛게 곱아 있었다. 온객행은 손으로 주자서의 발을 문지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발을 빼려고 했으나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발에 물을 털어낸 신발을 신기고 일으켜 세웠다. 주자서 옆에 붙어 있느라 온객행의 옷도 많이 젖어 있었다. 장양은 하인을 시켜 얼른 마차를 불러왔다. 마차에 타서 다시 태수의 저택으로 가는 내내 주자서와 온객행은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었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장양이 눈치를 보며 태안에 대해 이것저것 말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태수의 저택에 도착하자 마자 장양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하인들에게 목욕물을 받아 놓으라고 지시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한참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손을 둘러 일으켜 세웠다. 젖어 있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발견한 하인들이 하나 둘 그들 곁으로 와서 그들을 별채로 안내했다. 둘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로 목욕했다. 온객행은 시중을 받으면서도 한참 생각했지만 주자서가 왜 자신에게 화를 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주자서는 예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 같았는데 온객행이 답답하여 크게 한숨을 쉬자 머리를 빗던 하인이 온객행에게 불편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며 작게 웃어 보였다. 목욕을 마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비단 옷을 입게 된 온객행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가 왜 태산에 왔는지, 무엇 때문에 장명산을 나왔는지 모두 잊고 싶다. 주자서가 말한 것처럼 모두 내려놓고 싶다. 주자서만 옆에 있어준다고 하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온객행은 두려웠다.
바로 옆방에 있지만 왠지 찾아가면 안될 것 같았다. ‘혼자 있게 해주고 싶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방이 있는 쪽 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으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으며, 조정이나 시장에서 만나면 무기를 가지러 돌아갈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다.”(89) 누구인지 알면 그렇게 할 텐데 온객행은 그럴 수도 없었다. 주자서는 알면서도 왜 피하는 것일까? 주구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기세가 무엇이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대체 주구전이 뭐라고 말했길래 주자서는 저렇게 고요할 수 있는 것일까?
온객행은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바르게 앉았다. 태산파가 어떻게 알지 못했을까? 냥야왕 봉지 지척에 있는 이곳은 확실히 낭야왕이 데려다 쓰기에 의심을 사기 좋은 곳이기는 했다. 화산파 모두가 초무관과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숭산에 남아 있는 태산파의 무리만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주구전과 엽백의의 말을 추리면 현재까지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문파는 태호파와 화산파, 개방이다. 제남상단을 운영하는 황보세가와 제갈세가는 아마 양주의 삼백상단과 같이 낭야왕의 자금줄일 것이다. 주구전이 처음에 의심했던 문파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노인네는 태산파가 아니라 태산태수를 만났다. 황실의 일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위가 어두워졌지만 온객행은 등잔도 밝히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인이 밖에서 온객행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인이 의자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온공자. 벌써 술시가 넘었는데, 어찌 등롱도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요기하실 찬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찬합을 내려놓고 방에 불을 밝혔다. 온객행이 의자에서 일어나 하인에게 물었다. “주공자는 어디 있습니까?” 하인은 찬합에서 찬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별채에서 나오지 않으시고 저녁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온객행이 하인이 내려놓은 찬을 다시 찬합에 넣으며 말했다. “소란이 있어서 조금 놀란 것이니 심려치 마세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하인은 온객행이 찬합을 들고 나가자 뒤를 따라 나가며 말했다. “온공자, 그럼 음식을 좀 더 가져올까요?”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충분해요. 부족하면 제가 주방으로 가겠습니다.”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장부인께서 송화가루로 과줄을 만들었습니다. 혹시 드시겠다고 하면 제가 주공자 방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온객행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과줄 말고 저번에 선화선생께서 오셨을 때 먹었던 모과 절임이나 좀 가져다주세요. 아주 맛있었습니다.” 하인이 웃으며 그러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방문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웃는 얼굴을 꾸며서 “아서” 라고 부르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안색이 파리한 주자서와 주회가 있었는데 둘 다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온객행이 찬합을 두 사람이 앉은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주가주께서는 날이 늦었는데 어찌 아직도 여기에…” 온객행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눈치를 주자 주회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생각해보시오, 주(朱)공자.” 그리고 인사도 받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주자서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며 말했다. “아서 뭐 라도 좀 먹어봐. 안색이 너무 안 좋다.”
주자서는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제 자네까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참인가.”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앞접시에 찬을 놓고 말했다. “어찌 소첩이 부군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아양을 떨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힐끔 보고 부스스 웃었다. ‘온종일 바람 몰아치듯 하다가도 나를 보고 웃네.’(90)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자서에게 이것 저것 음식을 집어 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며 물었다. “노온, 그대는 식사했는가?” 온객행은 주자서가 걱정하는 것이 기꺼워 고개를 흔들자 주자서는 몸을 돌려 온객행에게 앞접시를 내밀었다. 온객행은 내밀어진 앞접시를 보고 있다가 ‘아’하고 입을 벌렸다. 주자서는 헛웃음 짓더니 접시위에 올려져 있는 경단을 집어 온객행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서가 주니까 더 맛있다.” 다정하게 음식을 먹고 있자 밖에서 하인이 기별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나무로 엮은 작은 찬합에 과일 절임이 들어있었다. 하인은 다 먹은 찬합을 정리하여 공손히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대나무 찬합을 열어보고는 다시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찬합에서 모과 절임을 하나 들어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가자 주자서는 모과 절임과 온객행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것인가 아니면 갚으라는 것인가?”(28)
온객행은 벌어진 주자서의 입안으로 모과 절임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서는 나에게 빚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갚는다는 말이야? 굳이 갚겠다면…” 하고 말끝을 흐리자 주자서가 얼굴을 붉혔다. 온객행은 붉어진 주자서의 뺨을 쓸고는 말했다. “아서 나는 매 순간 진심이야.” 온객행을 마주보고 있던 시선이 밑으로 떨어졌다. 온객행은 손을 주자서의 뺨에서 치우고 모과 절임을 집어먹었다. 연주의 모과 절임은 사례의 모과 절임보다 쓰다.
주구전이 숭산에 도착했을 때 사례의 상황은 주구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제(濟)왕 사마경이 역도를 처단한다는 의미로 청하에 군대를 배치했다. 낭야왕의 사병은 모두 온 것이 아니다. 과연 그가 청하를 버리고 사례를 완전히 점령할지, 아니면 다시 청하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다시 청하로 돌아간다면 후에 황제가 죄를 물어 그의 봉호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모반을 꼭 성공시켜야만 했다.
만약 그가 모반에 성공한다면 황제의 아들인 조왕과 진왕은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진왕은 다른 사람이 시킨 것도 아닌데 제 발로 식건전에 들어가 황제의 수발을 들고 있다고 했다. 주구전은 사계산장에서 온 서신을 보고 나서야 진왕이 발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궁세가가 줄을 대고 있는 곳이 조왕이 아니라 진왕이었던 모양이다.
양주의 예장왕 사마치와 형주의 초은왕 사마위가 형주 양양에 닿았고, 양주 건업의 회남왕 사마예의 군대가 벌써 예주 여남에 닿았다. 아마 사나흘내로 그들은 사례에 닿을 것이다. 낭야왕의 측근 중에 황족을 상대할 만한 병력을 가진 자는 없었고 낭야왕의 봉지인 청하는 제(濟)왕 사마경이 지키고 있다. 이미 판은 기울기 시작했다.
소림사는 황실의 권력다툼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강호의 문파들을 가둔 채로 숭산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안에 갇힌 이들도 그렇게 한 줄 모르게 모든 일은 아주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들의 문파에는 사례에 정변이 일어나 길이 막혀 갈수 없다고 미리 서신을 보내 두었고, 개방에는 특별히 회주 여희가 직접 개봉으로 향했다. 개방의 방주가 아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면 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낭야왕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할 것이다.
부산한 소림사의 대웅보전 밖에 서서 엽백의와 주구전은 그동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구전은 태산에서 들었던 낭야왕의 사병에 관한 이야기를, 엽백의는 그가 독갈을 조사하면서 만났던 채미공자와 소년의 일을 이야기했다. 주구전이 물었다. “엽선배, 무고의 일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엽백의가 주구전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 비어 있는 제단을 다들 무슨 이유로 찾는지 모르겠구나.”
주구전이 맞장구 치며 말했다. “그것을 낭야왕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강호에서 원하는 것인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무래도 낭야왕은 그 곳의 이름이 무고(武庫)인 것에 이끌려 그곳을 찾는 것 같고, 강호는 그 안에 있는 사술에 욕심이 나서 찾는 것 같다.”
주구전이 물었다. “그 소년은 어디 있습니까?” 엽백의가 대웅보전 옆에 있는 고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주구전이 고개를 들어 고루를 보자 고루 지붕 위에 작은 인영이 보였다. 주구전이 다시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엽백의가 말했다. “내 이미 제자로 들였으니 방법이 없다.” 주구전이 놀라 엽백의에게 되물었다. “예? 제자요?” 엽백의는 주구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훌쩍 지붕 위로 올라가 소년 곁에 섰다.
소년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낙양이 있는 쪽을 보고 있다. 엽백의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소년은 엽백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 모친이 네게 한 말을 알려주마.”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엽백의를 보았다. 엽백의는 소년이 몸을 돌려 그를 볼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모르는 것이 가장 좋다.(80) 너는 천륜을 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된다.” 금방 울상이 된 소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엽백의가 말했다. “내가 너의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나를 잘못 본 것이다.” 소년이 엽백의를 쏘아보았다. “허튼 짓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엽백의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제자라고 있는 놈들이 하나같이 허튼 짓을 한다고 목숨을 내놓으니 이것은 모두 내가 오래 산 죄인 것인가?”
그리고는 소년 옆에 털썩 앉아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대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이 술로 만고의 시름을 씻어 내리라.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91) 엽백의가 호리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소년에게 호리병을 내밀었다. 소년은 호리병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네가 참으로 말이 많소.” 소년의 말을 들은 엽백의가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그는 정말 제자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청하에 도착한 제(濟)왕은 낭야왕 사택의 노비문서를 찾아 불태웠다. 그 양이 어찌나 많았던지 문서는 재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탔다고 한다. 사병으로 남은 자들은 낭야왕의 곳간을 털어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낭야왕의 식솔들은 제왕의 사가로 호송하였다. 제왕은 회남왕 사마윤이 출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하하였다. 연주자사는 제왕과 함께 청하로 가지 않았는지 다 늦은 저녁에 태산태수의 집으로 와서 그에게 제왕을 원조하라 명령했다.
출정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장순의 저택은 분위기가 엄숙하였다. 주(朱)가주도 제왕의 출정 소식을 듣고 바삐 낙릉으로 돌아갔다. 장순은 온객행과 주자서를 외실로 불러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숭산에 있는 주대인께 가려고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태수와 함께 동평으로 함께 갑시다.” 주자서는 태안성을 떠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들이 떠난 다는 것을 알게 된 장양이 장순을 졸라 그들과 함께 동평으로 향하게 됐다.
아침 일찍 장부인은 장양을 배웅한다는 핑계로 나와 주자서의 손을 붙들고 한참 울었다. “또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주공자.” 장부인이 영견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주자서는 곤란하다는 듯이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렇게 손이 붙들려 서있었다. 남들이 보면 꼭 멀리 가는 아들을 배웅하는 것 같아 애절했다.
말을 타고 있던 장순이 결국 말에서 내려 장부인을 달래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양이와 같이 사계산장에 다녀오세요. 그럼 또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장부인은 장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울다가 장순의 말에 화색이 되어 물었다.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태수가 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주공자를 잘 보살펴준 은인들이니 제가 직접 가서 고마움을 전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은인이지요.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를 꼭 안아준 후에 놓아주었다. 옆에 서있던 장양이 모친에게 다가가자 장부인은 장양의 손도 꼭 쥐고 ‘주공자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한 뒤에 그 역시 꼭 안아 주었다. 장순과 장양은 다시 말을 탔고, 온객행과 주자서는 태수가 준비해준 마차에 탔다. 태안성을 빠져나오자 온객행과 주자서가 탄 마차 뒤로 곡식을 실은 수레와 동군이 줄줄이 이어졌다. 성문이 닫히는 해시전에 동평에 들어온 장순의 일행은 객잔에서 쉬고 있는 제(濟)왕을 만났다.
제(濟)왕이 쉬고 있는 곳은 공교롭게도 온객행과 주자서가 머물렀던 객잔으로 높은 누각에서 제왕이 동평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는데 그의 갑옷은 전장을 많이 누빈 것처럼 낡아 있었으나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서 있는 자세나 풍채에서 그의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온객행은 여태 보았던 황족과는 조금 다른 사마경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장순이 진영과 함께 누각에 올라 제왕에게 인사했다. “태산태수 장순 제(濟)왕전하를 뵙습니다.” 그의 뒤에 서있던 동군의 대장과 부대장 진영도 무릎 꿇고 인사했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진영의 뒤에서도 조금 떨어져서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따랐다. 온객행은 굳이 제왕을 만날 필요는 없었으나 그의 모습에 궁금증이 일어 따르게 되었다. 주자서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온객행이 혹시나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그를 따랐다.
장순이 뒤에 따라온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고 그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제왕이 동평호에서 시선을 장순에게 옮겨 말했다. “장태수는 예를 거두세요.” 그리고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았다. 그리고 돌아서는 길에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시선이 꽂혔다. 제왕은 그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가와 말했다. “그대들은 고개를 들어 본왕를 보시오.” 온객행이 힐끔 눈을 들어 사마경을 보았다.
사마경은 온객행이 아니라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온객행은 또 낙릉의 주(朱)가 얘기가 나오겠구나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가 한참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자 사마경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제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주자서는 자기 발끝을 보며 우물쭈물했다.
옆에 있던 온객행이 공수하며 말했다. “제왕전하, 양주 사계산장의 제자 온객행입니다.” 주자서도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제왕전하를 뵈옵니다.” 사마경은 인상을 쓰더니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사계산장…” 그는 별말 없이 발길을 돌려 제일 상석에 가서 앉았다. 그가 손짓하자 하인들이 술을 들고 들어왔다.
제왕은 태수에게 청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낭야왕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이자를 받아 그들을 노비로 만들어 사병을 키웠다고 했다. 태수는 기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종종 태산까지 내려와 살았기 때문에 낭야왕의 폭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얼추 알고 있는 듯했다.
제왕은 옆에 서있던 군관을 시켜 금으로 장식된 상자를 가져와 그 안에 들어있는 붉은 활(弓矢)을 보여주며 말했다.(50) “본왕은 이번 길을 오를 때 선황께서 주신 이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처음으로 꺼내 보았네.” 상자 안에는 핏빛의 활과 화살 두 묶음이 들어 있었다. 역적을 처단한다는 붉은 활(彤弓; 동궁)이다.
제왕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역도가 나라를 어지럽히니 구벌지법으로 그를 벌하겠다.”(92) 장순과 그의 부하들도 제왕과 함께 잔을 들었다. 제왕은 자리에 앉은 사람과 모두 눈을 맞추고서 잔을 들어 비웠다. 잔을 들었던 사람들도 모두 비장하게 술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주자서도 한번에 잔을 모두 비웠다. 제왕은 장순과 진영 그리고 주자서를 제외한 모든 무관과 하인을 물렸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의 불안한 눈동자가 흔들리자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잡고 다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있던 장양이 온객행의 소매를 붙들어 재촉했다. 누각을 내려오자 누각으로 올라가는 길을 군관이 지켰다. 갑옷이나 신발을 보니 하급무관은 아닌 것 같았다.
온객행이 한숨을 쉬자 장양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온공자, 가서 황주를 사서 막사로 돌아갑시다.” 온객행이 장양을 보며 말했다. “막사로 돌아간다니요? 태수께서는 이곳에 제왕전하와 함께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장양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부하들이 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을 청하는데 수장(首將)된 자로써 지붕아래 호강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대체 누가 따른다는 말입니까?” 온객행은 장양의 말에 조금 웃음이 났다. 벼슬하는 귀족 중에도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보기에 사람이 아닌줄 알았는데. 온객행은 장양을 도와 객잔에서 노주를 잔뜩 사서 수레에 싣는다고 한참 법석을 떨었다.
동군의 대장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온객행은 동평성 남문에서 장순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시가 넘어 성문을 드나들려면 군부(軍符)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각쯤 기다리자 번화가에서 걸어 나오는 장순이 보였다. 온객행은 옆에 주자서가 보이지 않아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으리, 우리 아서는 어디 있습니까?” 장순은 온객행을 미안한 기색으로 한참 보다가 말했다. “온공자는 다시 객잔으로 가보세요. 주공자는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온객행은 장순과 동군의 대장, 부대장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훌쩍 경공으로 지붕위로 올라갔다. 장양이 놀라며 온객행을 불렀지만 온객행은 몇 걸음 가지 않아 객잔에 도착했다.
객잔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군관이 그를 막았다. 온객행은 방금 노주를 싣던 곳에서 자신을 보지 못했냐고 한참 사정했지만 군관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 나던 온객행이 군관을 공격하려는데 뒤에서 주자서가 나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반가워서 “아서.” 라고 부르자 주자서 뒤에 있던 군관이 나와 온객행을 무릎 꿇리며 말했다. “감히 어느 안전(案前)인줄 알고 함부로 부르느냐.”
온객행이 황망하여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군관에게 말했다. “하후(夏侯)장군님 그러지 마십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자 장군이 그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며 무릎 꿇었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하후장군님께서 이렇게 할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예를 거두세요.” 하후장군이 일어나자 주자서는 온객행을 데리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자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군관과 방금 자신을 함부로 한 하후장군을 쏘아보며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어느 안전이긴 우리 부군 안전이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주자서를 따라간 온객행은 호화로운 객실에 앉아 주자서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주자서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찻주전자의 차를 다 마실 동안 주자서는 여상하게 차를 마시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자 주자서가 그를 힐끔 보고 다 식은 찻물을 마셨다. “아서…?” 대답이 없어 애가 탄 온객행이 여러 번 주자서를 부르자 그제야 온객행의 부름에 얼굴을 마주한 주자서가 말했다. “왜 부르시오. 온공자.” 온객행이 의자를 주자서 곁으로 붙여 앉으며 말했다. “아이, 아서 왜 또 온공자야.” 어깨에 기대오는 온객행의 머리를 거부하지 않은 주자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주자서의 팔을 쓸어도 보고 손도 잡아 보았지만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모두 내려놓자고 했잖아.” 주자서가 답했다. “응. 노온.”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가 내려놓고 싶지 않으면 내려놓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버들잎 영견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이 영견은 돌려주지 않을거야.” 그동안 만지고 쓸어서 조금은 때가 탄 영견을 보던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허리춤에 달려있는 옥패를 보았다. “노온, 주단으로 만든 요패는 어쨌어?”
온객행은 생각했다. ‘어디에 두었더라’ 옥패를 주겠노라 마음먹고 어디에 두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옥패가 마음에 안 들어?” 주자서가 옥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나는…” 주자서가 말을 못 잇자 온객행은 몸을 세워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하다. “나는 옥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 주자서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안타까워 온객행이 팔을 둘러 주자서를 안았다. 마주안아 오는 손이 기꺼워서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대고 작게 탄식했다. 주자서가 입을 열었다. “노온, 내가 옛날 얘기를 해줄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고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숨기지도 않고 그냥 전부 말해버렸다. 그날 밤, 서선공이 잡혀가던 날 밤의 일을 경세장공주가 천륜을 끊던 그날 밤의 일을. 온객행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멀어진 것 같아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맥을 짚는 것처럼 손을 가져와 양손으로 잡았다. ‘역시 너는 귀한 신분이었구나. 나처럼 떠도는 신분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럼 정말 네 말 대로, 네가 하라는 대로,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내려놓을 수도 있었는데…’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놓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아서는 이름을 찾고 싶어?” 주자서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망설여 놓고 아니라고 하다니 아서는 거짓말을 참 못하네.’ 온객행이 살포시 웃자 주자서도 따라 웃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두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해?” 주자서가 한숨 쉬며 대답하지 못하자 온객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왕전하는 알고 계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물었다. “그럼, 이번엔 누굴 닮았데? 부친? 모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서선공이야? 아니면 경세장공주?” 주자서는 양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아는가? 나는 양친을 닮은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어깨를 붙여 앉으며 말했다. “아이, 아서 화내지 마.”
주자서가 고개를 기울여 온객행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대는 양친을 많이 닮았는가?” 온객행은 말을 잃었다. 온객행은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온객행의 어두워진 표정을 읽은 주자서가 그의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주자서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온객행은 웃음을 가장해 말했다. “그럼 닮았지. 아서는 못 들어 봤어? 씨도둑질은 못한데…” 꾸며낸 웃음이 무색하게 온객행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온객행의 표정이 실패했는지 주자서가 떨리는 그의 몸을 안아 왔다.
(91) 이백 장진주 將進酒
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但願長醉不願醒, 呼兒將出換美酒 與爾同銷萬古愁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어나지 않길 바랄뿐, 아이 불러 가지고 가 좋은 술과 바꿔 오게 하여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을 씻어 내리라
- 시강능약(恃强凌弱): 자기가강함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것
- 잔해민중(殘害民衆): 백성을 이유 없이 해치는 것
- 사염별국(欺壓別國): 거짓말로 이웃 나라를 위협하는 것
- 인민이산(人民離山):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을 뿔뿔히 흩어지게 만드는 것
- 불복종명령(不服從命令): 왕명에 불복하는 것
- 살해친인(殺害親人): 제후가 친족(親族)을 죽이는 것
- 모시군장(謀弑君長): 군주를 시해하거나 시해를 모의하는 것
- 위반정령(違反政令): 정령을 위반하는 것
- 내란화위패인륜(內亂和違悖人倫): 내란을 일으키고 패륜(悖倫)을 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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