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萍水相逢
부평초와 물이 서로 만난다.
주구전은 진왕이 언제든 자기들을 부르겠다는 뜻의 서신을 한참 보고 있다가 다시 하인에게 건네 주었다. 혀를 한번 ‘쯧’차고 주구전이 말했다. “진왕전하께 저희는 소림사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전해주시오.” 하인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숭산으로 가는 길은 통금이 있사오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소서.” 그리고는 주자서와 주구전을 침실로 안내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주구전은 괜히 거절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인이 주구전과 주자서를 위아래로 힐끔 보더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주구전이 침상 위에 가서 앉자 주자서가 침상위에 올려진 이불을 펼치며 말했다. “조부, 저는 벼슬을 하나요?” 주구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신분상으로 문제될 것이 없으니 주시면 받아야지.” 잠자리를 정리하던 주자서가 주구전 옆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주구전이 말했다. “자서야 아까 진왕 옆에 있던 무인을 보았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무공이 높은 자다 곤륜파 출신이라 더구나.” 그는 아마 다른 사람의 내력과 무공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언제 주구전이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궁금했다. “태산에 진영을 만나볼까 하는데 그동안 너는 소림사에 가 있거라.” 태산 태수 장순은 진영의 상사이자 주희의 매부이다.
주자서는 모친을 많이 닮은 듯하니 그들이 주자서를 알아볼 수도 있다. 혼자 훌쩍 다녀오는 편이 빠르다. 내공을 흩어내는 공자산을 먹은 주자서는 움직임이 느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혼자 두기는 불안하여 주구전은 내일 아침 일찍 주자서를 숭산에 데려다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왕이 찾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통금은 오경이 지나야 풀리기 때문에 묘시에나 이 곳을 떠날 수 있다. 주구전은 예전에 사두었던 밀떡을 주자서에게 먹이고 침상에서 재웠다.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주구전은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떴다. 아침이 되자 밤새 소란스러웠던 청백루는 조금 조용해졌다. 아마도 객실 밖 복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기루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기녀들이 움직이는 소리일 것이다. 주구전은 침대에서 이불을 말고 자고 있는 주자서를 깨웠다. 주구전은 주변을 둘러보다 방 창문을 열었다. 아래쪽은 기루가 늘어선 대로이다. 주구전은 관수를 마치고 옷차림을 정리하던 주자서를 데리고 창문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옷이 휘날리는 소리에 주구전이 금방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공의성 남문으로 가면 거기서부터 숭산까지는 금방이다. 주구전은 노자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 후에 ‘아이요’하고 한숨을 쉬고 주자서에게 염낭을 건내 주며 말했다. “가서 말과 마차를 찾아오너라.” 주자서가 염낭을 받아 들고 주구전에게 물었다. “숭산에 마차로 갑니까?” 주구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팔아야겠다.” 주자서는 들고 있는 염낭과 주구전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문에서 만나자.” 그리고 주구전은 훌쩍 지붕위로 올라갔다.
주자서가 마구간이 모여 있는 공의성 서쪽으로 이동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던 주구전이 다시 청백루로 갔다. 진왕이 머무는 방을 찾아낸 주구전은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강호의 개들까지 나를 물어 뜯으려 드는구나.” 방 안쪽에서 진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녀는 아양으로 진왕의 기분을 풀어보려 했다. “옛말에 원한은 원한으로 갚으라 하였다. 내가 원한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진왕이 그의 수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주구전은 재빨리 지붕위로 올랐다. 남문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며 주구전은 생각했다. 정주에서의 황제 독살은 진왕이 꾸민 일인가? 속인 것인지 아니면 속아 준 것인지 주구전은 황족들의 권모술수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조부께 받은 염낭에는 마차와 말을 되찾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만 들어 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값을 치르고 말과 마차를 가지고 남문으로 갔다. 남문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조부와 짙은 감색의 장포를 입은 남자가 함께 서있었다. 주구전이 그 남자에게 말했다. “이보게, 용공자 우리가 이렇게 치사하게 흥정을 해야 하는 사이인가?”
용공자가 말했다. “주대인 은혜는 은혜고 거래는 거래입니다, 저는 장사치인데 당연히 상법에 의거해 흥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주구전이 말했다. “아이야! 이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게! 자네 부친께서 사계산장에서 마신 소흥주가…” 용공자가 주구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것이야 부친과의 거래지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부친께 말씀하십시오.” 떠나려는 용공자를 잡은 주구전이 말했다. “우리는 또 볼 사이인데 이러지 말게 용공자.”
용공자가 주대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냥 받으세요! 뭘 판다 하십니까? 마차는 제가 나중에 사계산장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주구전이 손에 쥐어지는 염낭을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받았다. 주자서가 다가온 것을 발견한 주구전이 용공자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종손 자서네.” 용공자는 주자서를 보고 포권해 인사했다. “주공자.” 주자서도 양손을 모아 공수하여 인사했다.
주구전이 말했다. “자서야 여기는 익주 건령 용연각의 각주 용작(龍雀)이다.” 주자서가 말했다. “용대인.” 용작은 한참 주자서를 보고 주구전을 보다가 부스스 웃더니 주자서의 손에서 말의 고삐를 뺐어 들었다. “아무래도 복잡한 일에 휘말리신 것 같으니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사계산장으로 마차를 보내면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소흥주나 보내주십시오.” 용작이 인사하자 주구전과 주자서도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주구전이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아버님께 사계산장에 꼭 들리라고 하게. 내가 기장으로 담근 백주를 열겠네.” 용작이 허허 웃으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양주로 어서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회장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구요.” 주구전은 ‘그러마’ 하고 용작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구전은 용작이 건네 준 염낭을 열어보고 놀랐다. 작은 은정과 은자가 들어있었다. 이 돈이면 사계산장 제자들 모두 배불리 두 달은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주구전은 빚을 진 것 같아서 용연각에 미안해졌다.
진시가 될 때까지 성문은 열리지 않으니 주구전과 주자서는 문 근처에 앉아 남은 밀떡을 나눠 먹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구전은 동전 몇 개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짚으로 얼기설기 엮어 짠 쓰개를 사서 썼다. 흰색 무명옷에 쓰개를 쓰니, 영락없이 도를 닦는 모습이라 문지기도 구태여 둘을 붙잡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어서 중천이 되기 전에 소림사의 산문에 도착했다.
주구전이 말했다. “서두르면 이틀 안에 태산에 도착할 것이다. 태산에 도착하면 숭산으로 기별할 테니 내가 오기 전까지는 절대 진왕을 만나서는 안된다. 닷새 후에도 내가 오지 못하면 그때는 장명산 검선을 찾아가거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전의 손을 잡았다. “종조부,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내가 오기 전까지 진왕을 잘 피하고 있거라.”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산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주구전은 서둘러 태산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스님들의 안내로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왔다. 대웅보전 안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실내가 소란스러웠다. 스님들의 안내로 들어온 주자서를 발견한 도감스님 혜립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주공자!” 주자서도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했다. “도감스님.” 혜립은 주자서의 팔을 잡고 그를 안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주자서가 장명산 검선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으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도감은 주자서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물리며 물었다. “어찌 혼자 오십니까? 주대인께서는요? 상선께 인사하셨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도감에게 물었다. “장명산 어르신께서 여기 계십니까?” 도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째 주지스님과 자운당에 계십니다.” 주자서는 도감스님께 검선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도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웅보전 근처에 서있는 젊은 스님을 자운당으로 보냈다.
심아 스님이 대웅보전에 들어와 도감스님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도감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주자서와 심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대웅보전 문을 닫고 도감스님이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일단 지객당으로 가시지요. 제가 상선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감스님은 자운당 쪽으로 심아와 주자서는 지객당을 향해 걸었다. 심아는 힐끔힐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심아스님이 반장하며 말했다. “주공자 오해 마세요, 온공자와 일부러 옷을 바꿔 입은 것이지요?” 주자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심아가 말했다. “상선께서 주대인을 찾으시던데 알고 계십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아는 신이 나서 그동안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엽백의와 주구전이 떠난 후 소림사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주지가 모아 황실과 관련 있는 자들을 추려내었다는 내용이다. 대웅보전에는 악양파, 태호파, 고산파의 장문 후계와 단양파, 경호파, 태산파, 화산파의 장문 그리고 남궁세가의 소각주 남궁하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일과도 관계 있는 듯한데 그 것과 황후가 기왕을 데리고 벌인 일이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왕과 조왕은 기왕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 두사람이 황후를 도와 벌인 일이라고 말이다.
주자서는 황실의 일원이 그렇게 뻔히 보이는 술수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얘기에 별 반응이 없자 흥이 식은 심아는 주자서에게 요기는 하였느냐며 다정하게 물었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자 심아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지객당의 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검선은 대체 무슨 은원으로 이 일에 간섭하고 계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엽백의가 처음 소림사에 왔을 때 검선께서도 소림사의 초대를 받고 온 것이라 했다. 주자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검선께서는 황후에게 독약을 준 강호의 문파를 찾는 중이다. 그리고 그 독약은 진왕의 손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중명원과 평락원에서 들은 것을 토대로 유추하면 진왕은 조왕이 씌운 누명을 쓴 것이다.
조왕과 진왕의 사이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둘 다 귀한 황자이며 적통 황족이다. 태자를 정하지 않은 황제에게 있어 모두 태자의 후보이다. 게다가 이 번 일로 기왕이 가택에 연금되었다고 하니 한동안은 그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테니 서로를 헐뜯고 있는 것이다.
주자서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소림사를 떠났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자신은 변한 것 같아 어색했다. 소매를 털어 정리하고 탁상 앞에 있는 짚으로 엮은 포단에 무릎 꿇고 앉았다. 진왕에게 소림사에서 머무른다는 말을 남겨 놓았으니 그가 찾아올 것이다. 조부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진왕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온객행은 자운당에 앉아 엽백의가 하문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엽백의는 독과 관련된 질문을 에둘러 했다. 독초가 잘 자라는 지역과 기후 그리고 그 용례가 다양한 것부터 교묘하게 말을 꾸며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엽백의의 이런 교활한 점은 처음 보는 것이라 온객행은 엽백의가 낯설었다. 그리고 초무관은 대체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일까? 진왕? 조왕? 아니면 낭야왕? 황제일 수도 있다.
청성곡에 독을 퍼트린 것은 초무관의 누군가가 확실하다. 소년이 말했던 전갈의 독, 그것은 중원에서는 널리 쓰이는 독이 아니다. 청성곡의 일에서 중독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이후로 여러가지 독에 대해 공부한 온객행은 그것이 서역에서 온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해독약이 없을 정도로 아주 맹독이라는 것도 안다. 그 양을 조절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리를 조절한 것이다. 마시거나 호흡으로 중독되며 몸안으로 한번 흡수되면 토하거나 남은 독을 제거해도 멈추지 않고 진행된다. 정말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독이다.
누군가가 청성곡을 떠나면서 마을 우물에 그 독을 탓을 것이다. 마을 우물 말고도 식수로 사용하던 수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러 남아서 화살로 남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온객행은 화가 치밀어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묻고 싶었다. 마을 사람을 모두 죽여 없애 버릴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경호파의 장문 장익에게 질문을 하던 엽백의가 ‘흠’하고 말을 줄였다.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주지가 일어나 장익을 데리고 나갔다. 며칠 전 아들 장옥삼을 양주로 다시 내려 보낸 참이다. 각 문파의 몇 사람만 남기고 대부분의 문파는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주지가 결국 아미파와 공동파에 공식적으로 사람을 청했으니 그들이 오면 소림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주지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생각한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 맞지 않아 소매 끝이 짧았다. 그 모습을 보자 한참 자라던 시기의 온객행이 떠올랐다. 초여름에 지나친 죽순처럼 쑥쑥 자라 금방 자신의 키도 장청(張靑)의 키도 넘었다. 비단 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던 아이가 허우대만 멀쩡하게 자란 것 같아 엽백의는 잠시 아쉬움에 젖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장명산을 나오지 말았어야 할까?’
엽백의의 시선을 눈치챈 온객행이 주지와 장익이 나간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 “노야, 초무관은 아무래도 그냥 이름만 빌린 것 같소.”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삼백상단의 인을 보았다고 했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루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모두 태산파의 낙계(烙契)로 고용한 아이들입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다. 화산파의 우달이면 몰라 태산파의 오래자는 살면서 여자구경 한번 못해본 숙맥인데 그가 어찌… 게다가 소문으로는 태산파가 아니라 화산파라 하지 않느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태산파 화산파도 아닌 다른 세력이 그 두 문파를 이용하는 것일지도…” 온객행의 말에 엽백의도 동의했다. 엽백의가 말을 이었다. “조경 그 놈은 청성곡에서 벌인 일에 비하면 양주에서 꽤나 그럴듯한 명성을 가졌구나. 삼백상단의 재화도 대단하다 하니…” 온객행이 말했다. “남궁세가는 그저 다리를 놓는 중개인인 듯합니다. 그들은 조왕의 사람임이 틀림없어요.”
엽백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조왕? 진왕이 아니고?” 온객행이 설명했다. “남궁세가와 낭야왕은 꽤 오래전부터 거래를 이어왔고 이 온모가 추측한 바로는 남궁세가는 낭야왕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소.” 엽백의가 ‘흠’하더니 말했다. “너의 말대로 남궁세가는 낭야왕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뿐이다. 그들이 평안은장으로 첩정하는 것은 낭야왕도 조왕도 아니다.” 온객행이 나지막이 말했다. “진왕…?” 둘은 주지가 점심을 권하며 다시 자운당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주지는 엽백의를 주방이 아닌 지객당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주대인을 찾으신다 하셨지요.” 엽백의는 그동안 자운당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주지가 뻔뻔하게 물어오자 기가 찼다. 엽백의가 코웃음 치며 대답이 없자, 주지가 엽백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주공자가 낮에 찾아와 상선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엽백의는 주공자라는 말에 뒤따라오던 온객행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온객행은 주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지객당에 도착해 문을 열자 탁자 앞에 정갈히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주자서가 보였다. 어느 집 아들인지 기품이 넘친다. 주구전에게 하는 것을 보면 고분고분 한 것이 자꾸 온객행과 비교하게 됬다.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온객행 못지 않게 태가 난다. 주구전을 졸라 제자로 달라 해볼까 생각하던 엽백의에게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공수하여 인사했다. “어르신”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인사를 대신한 엽백의가 탁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주구전은 어디에 가고 너 혼자 있느냐?” 주자서는 아직도 지객당 안에 있는 지주와 심아 스님을 보고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이제야 주자서가 보였는지 주자서가 앉은 포단 옆에 몸을 붙여 앉고는 ‘아서’를 불러 댔다.
찬합을 들고 있던 심아스님이 탁상에 음식을 올려놓은 뒤 인사하고 나갔다. 엽백의가 주지스님을 빤히 쳐다보자 주지스님도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방을 나갔다. 엽백의가 물었다. “낭야왕과 조왕은 처벌을 받았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각각 낙양과 정주로 호송되었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엽백의가 물었다. “양주로 간다 들었는데 어찌 여기 있어?”
주자서가 말했다. “황제가 낙양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있던 진왕을 공의에서 만났습니다.” 엽백의은 생각했다. ‘대체 진왕은 무엇 때문에 주구전을 붙잡아 두려고 하는 것이지? 그가 붙잡아 두려는 것이 주구전인지 아니면 이 기품 넘치는 주자서인지…’ 주자서 옆에 앉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밥그릇에 찬을 올리며 말했다. “아서 양주로 돌아간 줄 알고 사계산장으로 모과 절임을 보냈는데.” 온객행이 히히히 하고 웃는 것을 본 엽백의와 주자서는 맥이 풀렸다.
방금 전까지 무서운 얼굴로 생각하고 있던 온객행은 어디 갔는지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거리며 주자서를 마주보았다. 엽백의는 차라리 여기 이 고상한 공자가 온객행을 잡아주었으면 했다.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되고, 큰 원망은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원망을 잊고 살았으면 한다.(66) 이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엽백의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가는 언제 돌아오는가?” 주자서가 대답했다. “닷새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르신을 찾으라 이르셨습니다.” 엽백의가 말했다. “에잇! 내가 한가롭게 아이나 돌봐야 하겠느냐!” 온객행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노야는 걱정마시오. 아서는 내가 지킬 테니. 어서 가서 일 보시오.” 주자서가 들러붙는 온객행의 손길을 거절하며 말했다. “어르신, 조부께서는 태산에 가셨습니다.”
엽백의가 화색이 되어 물었다. “그래? 역시 주가가 눈치 하나는 좋구나.” 엽백의가 ‘허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기 전에 주자서를 한번, 온객행을 한번 보더니 말했다. “듣는 이가 많으니 자중하도록 해라.” 주자서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리느라 객실을 나가는 엽백의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온객행은 나가는 엽백의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노야는 신경 끄시오!” 그리고는 엽백의가 앉아있던 탁상 앞으로 가 앉으며 주자서에게 음식을 권했다.
허기가 졌던 주자서는 젓가락을 들어 소림사의 음식을 맛보았다. 중명원에서 평락원에서 맛 보앗던 향긋한 요리도 맛있었지만 사계산장에서 먹는 음식과 비슷하게 담백한 사찰음식이라 입에 잘 맞았다.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도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젓가락을 놀렸다.
주자서는 밥을 다 먹은 뒤 심아 스님이 문간에 두고 간 찬합에 그릇을 담아 주방으로 향했다. 찬합을 돌려주며 주방장에게 저번에 받았던 음식이 맛이 있었다며 감사인사를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소림사 곳곳에서는 강호에서 온 사람들이 스님들과 함께 있었는데 몇몇은 소림사에 머물고 몇몇은 공의나 등봉에 머물며 소림사로 찾아오는 듯했다. 자운당과 추보당을 지나 지객당이 보인다. 주자서는 한참 머뭇거리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오랜만에 만난 주자서가 낯설었다. 표정도 없고 몸짓도 경직되어 있다. ‘주대인이 곁에 없어서?’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져 온객행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객실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주자서가 장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어서와.” 그리고는 탁상 앞에 있는 포단을 털었다. 주자서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온객행은 별로 본적이 없는 얼굴이다.
온객행은 화로위에 올려 두었던 물을 가져와 차주전자에 넣고 차를 우렸다. 주자서가 문간에 있는 의자위에 올려놓은 봇짐을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온공자께서 중명원에 다녀오셨군요.” 주자서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했지만 높이는 말에 당황하여 온객행은 손에 쥐고 있던 주전자를 내려놓고 주자서를 마주보고 앉아 말했다. “아서 왜 그래…” 주자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온공자께 폐를 끼쳤네요. 조부께서 돌아오시면 꼭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온객행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품속에서 옥으로 만든 옥패를 꺼내 주자서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아서에게 이 영견이 잊을 수 없는 물건이라고 했지? 나에게 이 옥패 역시 그런 물건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이 쥐어준 옥패를 자세히 보았다. 예전에도 한번 받은 적 있는 옥패이다. 주자서가 얼굴을 찡그리자 온객행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는 아서에게 영견을 돌려줄 마음이 없어. 그러니까 이건 영견 대신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내려 한동안 옥패를 보았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붙였다. 그러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온공자. 영견은 내가 원해서 그대에게 준 것이니 돌려줄 필요도 그것을 대신할 물건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주자서가 옥패를 온객행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온객행은 옥패와 주자서의 손을 한꺼번에 잡고 말했다. “아서 왜 그래… 아서… 내가 잘못 했어 이러지 마.” 주자서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온공자께서 잘못 하신 것이 없는데 어찌 저에게 사과하십니까.” 온객행은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겹쳐 잡은 손위에 올리고 말했다. “이 영견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돌려 줄게. 잘못 했어.”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손위에 올려진 영견을 한참동안 봤다.
온객행은 괜히 애가 타서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아서…” 주자서는 잡힌 손을 풀어 영견 위에 옥패를 올려놓고 그것을 온객행에게 건내 주며 말했다. “온공자 그대가 가지고 가세요. 제가 부탁드립니다.” 온객행은 주자서 손에 들린 영견과 옥패를 한참 보다가 그린 듯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자서를 와락 안아버렸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는 기척을 느낀 온객행은 불안해져서 주자서를 더 꽉 껴안았다.
(66) 노자 도덕경주 63
大小多少 報怨以德; 小怨은 則不足以報 大怨 則天下之所欲誅 順天下之所同者 德也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덕으로 원한을 갚으며;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망은 천하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같이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