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35

35. 南枝落北枝開
매화의 남쪽에서는 꽃이 떨어지고 북쪽에서는 꽃이 핀다.

온객행은 양주로 떠나기 전에 다시 주택을 찾았다. 사람이 가고 남은 빈집은 외롭고 적적하다. 그리운 마음이 주자서에게 모두 주어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운다. 사당에 있던 신위는 모두 어디 갔는지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주영의 시호는 회후(懷侯)이다.(97) 주영은 죽어서 제후로 봉해졌다. 이름만 남은 그의 위패는 누가 모셔줄까?

서선공과 경세장공주의 위패는 기주 낙릉의 형림으로 보냈다. 그들은 성씨가 같으니 그들을 기억해 줄 것이다. 온객행은 주영의 위패를 가지고 숭양서원의 속가사당으로 갔다. 불이 다 꺼진 그 사당에 주자서를 혼자 두려 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양친과 함께 있는 것을 주자서가 바랄 것 같아서 온객행은 주영의 위패를 이 곳에 두고 가기로 했다.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는 촛대는커녕 선향에도 불이 꺼져 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했던 것처럼 제단 아래에서 포단을 꺼내 놓고 가져온 향낭에서 향목을 꺼내 향로 위에 쏟았다. 제단 양 옆에 있는 초가 없는 촛대 아래에 화섭자를 찾아 향목에 불을 붙이고 하얀 소매를 털어 몸을 가지런히 하고 포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둘만의 비밀…’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매를 수평으로 들어 신위에 세번 절했다. 온객행은 양주에 갔다가 장명산에 가서 노야에게 인사하고 청성곡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주자서가 그의 양친께 간 것처럼 온객행도 양친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주자서는 엄윤에게 몸이 거의 들려서 식건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황제가 준비한 옷과 짐이 있었다. 엄윤은 주자서를 황제의 침실로 데려가며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쭉 앞만 보고 달리시면 됩니다.” 주자서의 옷을 갈아 입히며 엄윤이 말했다. “밖으로 나가면 그 곳에 준비해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타고 강릉으로 가세요. 초은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엄윤에게 말했다. “아까 그 군관에게 말을 전해주세요.” 엄윤이 작게 고개를 흔들며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주공자, 그가 죽기를 바랍니까?” 주자서가 울상으로 말했다. “하지만…” 엄윤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주공자께서는 오늘 식건전에서 죽어야 합니다.” 엄윤이 말한대로 침상 아래 있는 길을 쭉 따라 나왔다.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통로를 나오니 성문 밖에 있는 작은 문 앞이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말이 필요하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기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마구간으로 가서 말 한 마리를 내주며 말했다. “잘 먹인 말이니 두 시진은 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들이 사용하는 부절(符節)을 주며 말했다. “이 부절을 보여주면 강릉까지 말을 빌릴 수 있습니다. 문지기에게는 스스로를 파발(擺撥)이라고 소개하십시오.” 주자서가 떨리는 손으로 부절을 받자 남자는 그 부절을 빼앗아 주자서가 들고 있던 봇짐 안에 넣었다.

주자서를 한심한 눈으로 보던 남자는 주자서의 봇짐을 그의 등에 매어주고 말에 태웠다. 주자서가 얼떨하게 말 위에 앉아 있자 문지기가 말했다. “성 안에서는 말을 달려서는 안됩니다. 어서 가시오.” 그리고 말의 엉덩이를 손으로 밀었다. 주자서는 딱히 말을 몰지 않았지만 영특한 말이었는지 이궐관까지 조용히 걷다가 낙양성을 나오자 달리기 시작했다.

두 시진을 달려 남양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을 지키던 문지기가 주자서에게 통행패를 요구했다. 주자서는 봇짐에서 부절을 찾아 보여주었다. 문지기는 부절을 한참 보고 있더니 지친 말을 끌고 가서 다시 새 말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잘 먹인 말이니 두 시진은 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문지기가 주자서에게 말을 건네 주었다. 성안으로 가로지를 수 없어 주자서는 남양성을 빙 둘러 강릉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번 더 말을 바꿔 타고 다음날 오후에 주자서는 강릉에 도착해 초은왕을 만났다.

주자서는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실신했다. 밤새 말을 달려 지친 그를 서소강이 마차에 실어 양주로 향했다. 사계산장에 도착한 주자서는 십년 전 진회장의 품에 안겨 사계산장에 도착했을 때처럼 크게 앓았다. 평소 건강한 모습만 봐왔던 사제들이 동요할 정도로 살이 내리고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주구전은 동요하는 손제자들을 위해 주자서의 거처를 자신의 거처인 사계산장의 뒷산으로 옮겼다.

해는 점점 기울어 벼 꽃이 피었다. 올해는 제때 비가 내려 풍년이 들 것 같다며 농민들이 좋아했다. 진회장은 예년보다 일을 더 많이 해서 몸은 고단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하였다. 진회장은 뒷산을 또 다시 사형제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작년보다는 덜 굶겠습니다.”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회장의 말에 동의했다. 주고받는 대화는 좋은 일이었으나 표정은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태사숙의 거처에 도착하자 산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진회장이 싸리문을 지나며 말했다. “사숙! 못난 제자들이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자 주구전이 화로에 찻물을 올려 놓고 있었다. 주구전이 제자들의 인사를 받고는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올해는 무가 아주 잘 됐더구나.” 필장풍이 신나서 말했다. “비가 많이 와서 물도 많고 해를 잘 봐서 달기까지 합니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한번 더 심으면 가을무도 먹을 수 있으니 내일 제자 몇을 서쪽에 있는 밭으로 보내 무를 심게 해라.” 서소강이 필장풍에게 물었다. “장풍아, 너 무씨는 받아 놓았니?” 필장풍이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 무 꽃이 한창 피었으니 그것을 심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진회장이 말했다. “그러다 날이 빨리 추워지면 또 바람 든 무를 먹어야 하는 것 아니오?”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말했다. “바람이라도 든 무를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주구전의 말에 제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구전이 진회장에게 물었다. “가인이는 어디를 갔느냐?” 진회장이 답했다. “부군을 데리러 양주자사가 있는 건업으로 갔습니다.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 곧 돌아올 것입니다.” 주구전이 물었다. “합비를 거쳐 갔느냐?” 서소강이 말했다. “혼자 보내지 않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숙.” 주구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인이가 걱정되어 물은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가인이의 경공보다 나은 놈이 있긴 하냐?” 진회장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옆에 앉아 있던 필장풍이 말했다. “사부, 사저가 소가를 두고 갔으니 좀 돌봐 주십시오. 저희는 논과 밭의 일이 많아 힘듭니다.” 주구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가가 언제 너희들을 힘들게 하였느냐? 그렇게 착한 아이가 또 어디 있다고.” 손제자의 역성을 드는 주구전에 제자들이 모두 웃었다.

주구전은 차를 우려 제자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번에 새로 입문한 아이들도 모두 부모가 없느냐?” 진회장이 작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예.” 주구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처 안에서 작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주구전이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할 말 모두 하였으면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진회장은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오면서 서소강이 말했다. “회장, 너무 걱정 말게. 사숙께서 자서를 보살피고 계시니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네.” 진회장이 서소강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저리 앓는다는 말입니까?” 서소강이 진회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꼭 황궁에서 있었던 일만은 아닌 것 같네만…” 그 말에 필장풍과 진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서소강을 보았다.

필장풍이 물었다. “서사형,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서소강은 한참 뜸을 들이다 물었다. “혹시 누가 모과를 보내지 않았소?” 진회장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과요?” 필장풍이 ‘아!’하고 작은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래요, 곡우 조금 지나서 누군가가 꿀에 절인 모과를 한 단지 보냈어요.” 진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침 풍한에 걸린 아이들이 많아 아주 유용했습니다. 주사숙께서 보내신 것 아닙니까?” 필장풍이 진회장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같이 온 서신에 “錦(비단 금)이라 쓰여 있었으니, 주사숙께서 삼백상단의 일에 대해 물으신 것이 아닙니까?” 사계산장은 근처에 있는 문파의 이름을 암호로 만들어 불렀는데 비단으로 유명한 삼백상단을 금(錦)이라고 불렀다.

서소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사숙께 모과를 보냈는지 물어보고 내 말하리다.” 진회장과 필장풍이 답답하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는 서소강을 붙잡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뜸을 들이시오? 사형!” 서소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라 그러네, 자서가 일어나면 자서에게 묻게.” 필장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며 진회장을 보았다. 진회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서소강을 보며 말했다. “아니, 자서랑 모과랑 대체 무슨 상관이오?”


주자서는 일주일 정도 앓고 나니 점점 기력을 되찾는 것 같았다. 아침 나절 밭에서 일을 돕고 오후에 수련을 하고 나면 피곤할 법도 한데 사손들은 손에 꽃이며 먹을 거리를 들고 주구전의 처소를 찾았다. 주구전은 본인을 보러 온 것이 아닌 것이 서운하였지만 그런 기색 없이 사손들을 맞이했다. 주자서가 깨어 있을 때는 그와 만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앓아 누워 있을 때는 만나지 못하게 했다. 사형의 아픈 모습을 보고 울먹이는 사손들을 보는 것은 주구전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다행히 주자서가 정신이 들어 침상에 앉아 죽을 뜨고 있었다. 잘 시간이 멀지 않은 양가인의 딸 정소가와 서소강의 딸 서임이 주자서가 누운 침상위에 하얀 메 꽃을 올려 두었다. 서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 아프지 마세요.” 주자서가 꽃을 보고 웃으며 죽그릇을 내려 놓았다. “고마워. 소가야, 임아. 아주 예쁜 꽃이네.”

서임이가 주자서의 손에 꽃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얼른 일어나서 같이 포도를 따러 가요. 오라버니는 포도를 좋아하잖아요.” 서임의 말에 주구전이 ‘허허허’웃었다. 뒤에 서있던 사제들도 주자서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수련을 많이 해서 이제 사형과 대련해보고 싶다는 녀석부터 어서 일어나서 밭일을 도와 달라고 떼를 쓰고 조르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낙양에서의 일을 묻지는 않았다.

주자서는 낙양에 다녀오고 더 말 수가 줄고 전보다 더 알 수 없는 녀석이 되었다. 앓을 때가 아니면 하루 종일 넋을 놓고 허공을 보고 있어서 주구전이 걱정이 되어 주자서를 다독이면 주자서는 꾸민 얼굴로 웃었다. 주자서가 낙양에서 선황의 시중을 들며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는 주구전의 마음만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차라리 온가놈이라도 옆에 있어서 주자서를 달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농작물의 수확이 시작되고 사계산장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다. 제자들의 저녁수련을 단원절까지 면하여 준 것도 일이 바빠서 그렇게 되었다. 주자서는 조금씩 운신이 가능하여 주구전을 따라 밭 여기저기를 다니며 일손을 거들었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일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금방 못하게 그를 말렸다. 그럼 주자서는 함께 나와있는 어린 아이들을 그늘로 데려가 돌보는 일을 했다.

원래는 돌아가며 아이들을 돌보며 쉬었지만 주자서의 사정을 아는 제자들은 별말 없이 주자서에게 그 일을 맡겼다. 정주에서 함께 배를 탔던 평락원의 아이들도 사계산장에 와 있었다. 어떻게 데려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구전이 그렇게 했다. 주자서는 속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던 다른 하인들은 모두 죽었겠구나 생각했다. 아상은 주자서를 알아보고 종종 그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주자서는 그 모습이 귀여워 점점 더 진짜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주자서는 새참으로 준비한 복숭아를 들고 밭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큼직한 복숭아를 하나씩 쥐어 주고 밭에서 일하는 사제와 사형을 불러 모았다. 필장풍의 조카 자신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사형, 벼와 밀을 터는 것은 꼭 도와주셔야해요.” 복숭아를 다 먹은 필장풍의 아들 필성명도 거들었다. “맞아요! 올해는 풍년이라 일이 아주 많을 거에요.” 주자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를 몰고 다니던 서임이가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싫어! 서임이는 자서 오라버니랑 놀고 싶으니까 일은 사형들이 해요!” 서임이를 따라온 정소가와 고상도 주자서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맞아! 사형들은 안 놀아주고 매일 누워서 땀만 식히잖아요.” 진구소가 주자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형! 모친께서 부르세요.”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한번 더 확인하고 복숭아가 들어 있던 소쿠리를 들고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복숭아를 다 먹은 아이들이 각자 맡은 오리와 거위를 몰고 주자서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주자서는 주방에 들러 소쿠리를 놓고 사모가 계신 외실로 갔다. 외실에 들어가기 전에 조용히 고했다. “사모, 자서에요. 부르셨습니까?” 추수가 무거운 얼굴로 장지문을 열었다. 외실 안에는 양가인과 양가인의 부군 양주 율령사 정회가 앉아 있었다.

양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자서에게 낙양의 상황에 대해 말했다. 주영은 죽어서 제후에 봉해졌고 그의 장례는 나라에서 치렀다고 했다. 황제로 등극한 사마연은 아직 죽지 않은 선황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위치가 불안했다. 선황은 무슨 생각인지 황친을 하나하나 따로 만나며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회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양가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또 다시 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그것은 기주 낙릉의 형림에서 온 서신이다. 주가주(朱家主)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양가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서신을 읽어보고, 자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라.”

주자서가 서신을 들고 머뭇거리자 추수가 주자서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읽어보고 당장 답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자서가 자리에 앉고도 봉투를 열 생각하지 않자 추수가 양가인에게 말했다. “사저께서는 돌아가서 여독을 푸세요.” 양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건업에 갈 일은 없으니 정회에게도 일을 주세요.”

정회가 추수에게 양손으로 공수하며 말했다. “좀 늦긴 했으나 사계산장에 입문할까 합니다. 관직을 그만 두고 왔어요.” 추수가 놀라서 정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율령사를 그만 두셨다는 말입니까?” 정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주와 서주, 예주는 정세가 매우 불안해요. 낭야왕의 일로 황친이 들썩이고 있으니 이 참에 잘된 일입니다. 저희 가족들도 곧 재산을 정리하고 임해로 올 거에요.” 추수가 외실을 나가며 말했다. “추후의 일은 장문과 상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작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외실을 나갔다.

그때까지 주자서는 서신을 펼쳐보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양가인이 주자서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자서야. 네가 보기 싫으면 보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 그 누구도 너에게 뭘 강요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어.” 주자서가 반질반질한 눈을 들어 양가인을 보았다. 양가인이 주자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이제 곧 관을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울보여서 어쩌지?”

양가인이 아직 흐르지 않은 눈물을 소매로 찍어주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관을 올리면 혼인을 하겠구나.” 양가인이 웃으며 주자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서에게 잘 어울리는 색시를 찾아 주어야지.” 양가인의 말을 듣고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고개를 숙였다. 양가인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담아둔 이가 있니?” 주자서는 대답없이 서신을 뜯었다. 양가인은 정회를 일으켜 본인의 처소로 돌아갔다.

서신에는 그에게 낙릉 형림으로 오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주자서는 서선공 주희의 혈육이니 혈족과 함께 있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내용이다. 주자서는 혹시 그곳에 갔다가 황친을 만나 다시 남궁으로 돌아가는 생각만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 가면 혁란은 절대 주자서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주자서는 ‘부친께서는 상냥하다 못해 모친께 바보라고 놀림을 들으셨는데 이 호방한 주가주는 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생각했다.

그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교의 덕으로 벼슬하고자 하는 주가에 가면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또 황실의 종친과 엮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주자서가 어떤 일을 불구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외숙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시 사계산장으로 보낸 것이다. 주영의 시호는 회후라고 했다. 사마씨의 나라가 세워진 이후에 시호로 회(懷)를 쓰는 것은 주영이 처음이다. 주자서는 ‘하’하고 작게 웃었다. 이 시호는 분명히 그의 외숙이 지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가 뜻하는 바를 위해서도 주자서는, 주영은 형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계산장은 정회의 입문으로 또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들의 가족이 모두 임해 괄창으로 내려왔다. 정회는 무공을 수련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막 충년이 지난 아이들과 함께 내공수련을 했다. 함께 수련하는 아이들이 그를 놀리면 그의 딸 정소가가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역성을 들었다. 단원절이 다가와 사계산장은 명절을 준비하는 손길로도 바빴다. 그 날은 주자서가 사가에 나가서 살고 있는 사형들과 함께 폭죽을 사러 괄창에 나와 있었다.

혼인을 하여 데릴 사위로 들어간 사형도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 가문을 잇는 사형도 있었다. 그래도 단원절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 사계산장에 들르는 이들은 폭죽을 사가지고 왔다. 오랜 가뭄으로 황폐했던 임해 구강은 오랜만에 풍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번화했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과일들과 꽃들이 보이자 주자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괄창 현령의 고명딸과 혼인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간 유계(兪桂)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너도 곧 관을 올리겠구나 생일이 언제지?” 폭죽을 고르던 장맹(張萌)이 말했다. “유형, 자서를 몇 년이나 봤는데 아직도 자서의 생일도 기억 못합니까? 단원절이 지나고 딱 한달 후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장맹의 말에 작년에 혼인한 양회(楊茴)가 말했다. “유형은 사부나 사백의 생신도 기억 못하는데 자서의 생일이라고 기억하겠어요?” 양회의 말에 유계를 포함한 모두가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폭죽을 고른 장맹이 점원에게 값을 치렀다. 각자 폭죽이 들은 상자를 하나씩 들고 사계산장으로 향했다. 막 시장을 벗어나 주루가 있는 대로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주자서를 불렀다. “아서.”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누가 그를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곧 사람들을 헤치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주자서는 또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게 웃고는 길을 재촉했다. 멀리 먼저 가고 있던 사형이 주자서를 불렀다.

주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는 손에 놀라 들고 있던 폭죽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폭죽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자 주자서의 팔을 잡은 사람이 말했다. “혹시 저라산 기슭의 완사계 출신이 아니오?”(6)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흰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았다. 온객행이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엷은 구름에 사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51) 주자서가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개 위 짧은 꿈속에서 수천리를 헤맸어.”(71) 주자서가 온객행을 안으며 말했다. “보기 전엔 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못난이라니.”(44) 그렇게 말하는 주자서의 목소리도 떨렸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떼어내며 말했다. “아서, 이제 못난이라고 부르지 마. 내 사제 이름이 못난이란 말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온객행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다렸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같이 가기로 했잖아.” 온객행이 주자서가 잡은 손을 더 꼭 잡았다.

주자서가 오지 않아 먼저 길을 가고 있던 사형중에 하나가 주자서를 찾으러 왔다. 주자서가 하얀 옷을 입은 남자와 손을 잡고 있길래 장맹이 다가가 물었다. “자서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시선을 떼고 사형을 보며 말했다. “사형.” 장맹은 주자서가 앞에 쏟은 폭죽을 주워담으며 말했다. “자서야, 일단 산장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주자서와 온객행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폭죽을 주웠다.

주자서의 상자를 대신 들고 사계산장으로 함께 걷는 온객행을 사형들은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주자서는 사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온객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양친의 위패는 형림으로 보냈어. 그리고 회후의 위폐는 둘만의 비밀이 있는 곳에 모셨어.” 주자서의 표정이 가라 앉는 것을 본 온객행이 안타까워 작게 탄식했다. 주자서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잘했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쓸며 말했다. “무거워? 내가 들까?” 온객행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아니, 하나도 안 무거워.” 사형과 주자서는 해 질 녘에 사계산장에 도착했다.

저녁준비가 한창인 부엌에서 밥냄새가 났다. 주자서는 폭죽을 내려놓은 온객행의 손을 잡고 외실로 갔다. 외실에는 사백과 사숙이 모여 계셨다. 온객행을 본 서소강이 마시던 차를 뱉으며 말했다. “푸핫! 온공자!” 양가인이 옆에서 서소강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사형! 더럽게.” 온객행은 진회장과 서소강, 양가인, 필장풍에게 포권하여 인사했다. “장명산의 대제자 온객행 사계산장의 장문을 뵙습니다.”

(97) 시호법 諡號法 시호, 묘호, 존호 등을 붙이는 데 쓰는 법칙을 말한다.
慈仁短折曰懷 자애롭고 어질었지만 재위 기간이 짧은 경우를 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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