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6

樹上開花 | 6. 나무에 꽃을 피운다.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마친 주요는 재실에서 느껴지는 작은 기척에 눈을 떴다. 막 명상을 마친 터라 그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눈을 감고 조금 더 숨을 고르던 주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측백나무숲을 나왔다. 부엌이 있는 재실의 남쪽을 지나 내실로 가자, 옷을 보관해 놓은 함을 이리저리 열어보는 고상이 보였다. 주요는 고상이 반가워서 말했다.
“아상, 옷을 갈아입으려고?”
주요를 발견한 고상이 웃으며 인사했다.
“주요! 주요, 분홍색 옷은 없어요? 나는 분홍색이 좋은데.”
주요가 능숙하게 함들 사이에서 분홍색 장포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 아상은 분홍색이랑 정말 잘 어울려.”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아니야. 나 입을 거 아니에요. 유서 입힐 거예요.”
주요가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다시 얼굴을 꾸며 말했다.
“유서에게…?”
고상이 주요가 들고 있는 옷을 받으며 말했다.
“화사는 붉은색 옷을 입잖아요. 유서는 아직 아기이니까 분홍색을 입히려구요.”

주요가 고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상. 내가 서왕모께 여쭤봤는데….”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요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왕모께서는 아신대요? 우리 유서는 화사이지요? 요괴이지요?”
주요가 고상을 평상으로 이끌어 앉힌 뒤에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니야. 유서는 사람이야.”
고상이 눈썹을 축 늘어뜨려 울상을 짓고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내 피를 한 말(斗)은 마셨을 텐데 어떻게 사람이에요?”
주요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희주씨(姬周氏; 주나라의 왕족)의 후손인 것 같아.”
고상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게 뭐요?”
주요가 작게 웃고는 말했다.
“아상, 내가 읽으라고 했던 책을 읽지 않았지?”

고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책 읽는 것이랑 우리 유서랑 무슨 상관이야?”
주요가 아상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고는 말했다.
“아상. 요괴와 사람이 구분 없이 살았을 때, 삿된 것을 물리치고 왕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고상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대답이 없다.
“천존께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삿된 존재를 물리친 요괴와 사람을 신선으로 만드시고, 그를 도운 사람을 왕으로 만드셨는데, 그중 하나가 희주씨야.”
고상은 더욱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요를 보았다. 주요는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그는 과거 천존이 황룡의 힘을 허락한 왕족의 후예인 것 같아.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상이 주요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구요?”
주요는 고상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주요가 고상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 어쩌다 전쟁에 휘말렸을까? 그는 분명히 시랑(豺狼)을 봤을 텐데….”


주자서는 앵두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세수를 한 것 같은 맑은 얼굴의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온객행을 마주 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온객행은 바구니를 힐끔 보고 앵두 몇 개 집어 손에 올려 놓은 뒤에 탁상에 앉아 앵두를 먹었다. 주자서도 따라서 온객행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공공께서 왔다고 하는데….”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나는 지네가 정말 싫어요. 어릴 때 발가락을 물려서….”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가 안고 있는 바구니에서 앵두 몇 개를 더 꺼냈다. 주자서는 바구니를 탁상 위에 올려 놓고 온객행에게 붙어 앉으며 말했다.
“여긴… 여기에는 없겠지요?”
온객행이 입안에 든 씨를 뱉고 말했다.
“지네는 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다 먹은 앵두 바구니를 들고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따라 일어났지만 감히 휘장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난간에 기대어 태평호를 보았다. 금방 온다던 고상에게 소식이 없다.

온객행은 누각에 두었던 화로와 냄비를 가져와 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 그리고 씨만 남은 앵두 바구니에 물고기를 잡아 왔다. 이미 정갈하게 손질된 물고기를 나무 막대에 끼워 화로에 걸어 놓고 주자서에게 차를 건넸다. 주자서가 차의 향을 맡아보더니 말했다.
“온공자, 이건 저번에 딴 연잎으로 만든 차입니까?”
온객행이 자기 앞에 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차로 입을 축이고 온객행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온공자. 저는… 저는 사람입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그것은 주요에게 들으시지요.”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주요?”
온객행이 조금 놀란 눈치로 말했다.
“태평호의 주인 무지기 주요 말이오. 설마 주요가 아직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소?”
그리고는 ‘하하하’하고 낮게 웃었다. 주자서는 멋쩍어서 고개를 백택 쪽으로 돌렸다가 즉저가 떠올라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은 접시에 갓 구운 생선을 올려 놓은 온객행이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처음 왔을 때는 주는 대로 아주 잘 먹었는데,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먹는 속도가 느려지고 방법이 많이 고상해졌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언제 마지막이었더라?’ 온객행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마저 구운 생선을 내밀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권했다. 온객행은 변덕이 일어 생선을 자기 앞으로 가져와 주자서가 먹는 것처럼 해보았다. 내장은 써서 먹지 않고, 가시와 비늘을 발라 먹는다. 구워서 그런지 은은하게 연기 냄새가 났다. 온객행은 이렇게 구워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화로와 다구(茶具)를 정리하고 주자서는 바구니에 접시와 젓가락을 담아 태평호에서 설거지를 했다. 요리에 재주가 없는 주자서는 종종 군영에서도 설거지를 하곤 했는데 구리나 나무로 된 그릇이 아니라 도자기로 된 그릇을 구경하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하얀 도자기는 중원(中原)의 수도인 낙읍(洛邑) 출신인 주자서도 몇 번 본적 없는 고급품이다. 주자서는 깨끗하게 씻은 식기를 가지고 내실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입구 근처에 서 있다가 그가 들고 온 바구니를 받아서 잘 씻은 그릇을 영견으로 닦아 함에 넣었다. 온객행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고상이나 천교, 보살과 함께 있을 때는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온객행과 둘이 있으면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온객행은 식기를 정리한 뒤에 태평호 쪽의 난간의 휘장을 걷었다. 주자서는 그 난간에 기대서 태평호를 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일렁이는 물 위로 햇빛이 쏟아진다. 마치 부서진 파편 같아서 손에 만져질 것 같다. 주자서가 수면위로 손을 뻗자 언제 다가왔는지 온객행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서서 말했다.
“수영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소?”
또 어정쩡하게 안기게 된 주자서는 온객행이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발이 닿는 곳이면 괜찮습니다. 이곳은 선창이지 않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내실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아상에게 내가 혼이 납니다.”
주자서가 어색하게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작은 대야를 찾아 물을 퍼 담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그 물에 세수를 하고 손을 씻었다.

주자서는 문득 고상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온객행이라는 파사는 흑룡이라 했다. 흑룡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긴장이 됐다. 주자서는 무관(武官)의 집에서 태어나 무관이 되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기 때문에 신화나 설화 같은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들었던 방패와 검에도 신화의 신수(神獸)가 새겨져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 지는 모를 일이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의 그다지 높지 않은 신분의 무관이란 신수가 아무리 영험(靈驗)한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자서도 음양오행 사상은 알고 있다. 흑룡. 검은색이라면 북방의 신일 것이다. 천교와 보살이 주인에 대해 말해준 것을 생각해보면 요괴와 신수는 그 위치가 비슷한 것 같다. 주자서는 의미 없이 세월을 보내기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상이 말했던 주자서가 죽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주자서의 능력으로 요괴들의 눈을 속이고 태평호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해가 중천을 막 넘었을 즈음 주요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같이 부유각으로 왔다. 고상은 주요의 바로 뒤에 서서 주요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주자서는 부유각 기둥에 몸을 숨기고 온객행이 내실을 나가 갑판에 서는 것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선창 위로 나아가는 것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앞섶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남자의 손에 작은 두루마리가 있었다.

남자는 두루마리를 손짓으로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천존께서 그대의 죄를 사하셨으니 봉인을 풀고 천존의 명을 받드시오.”
온객행은 갑판 끝에 서서 선창을 한참 바라보더니 선창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앞에 무릎 꿇어 두루마리를 받았다.
“서호의 흑망. 천존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온객행 주변으로 구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주자서는 휘장을 걷고 갑판으로 나와 온객행이 표풍(飆風)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고상이 갑판으로 나온 주자서를 발견하고 얼른 부유각으로 가서 주자서의 몸을 붙잡았다. 표풍은 한동안 계속되더니 검은 구름과 함께 곧 사라졌다. 온객행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랗고 푸른빛이 도는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방금 두루마리를 건넨 즉저를 향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즉저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선창에서 한발짝 물러섰다. 주요가 뱀에게 말했다.
“그쯤 하시오. 봉인이 풀린 것을 축하하오. 흑망.”
뱀이 하늘 높이 고개를 치 들더니 곧 큰 뱀이 연기처럼 쏟아져 내려 온객행이 되었다. 온객행은 뱀으로 변하기 전에 입었던 장포보다 더 짙은 검은색에 푸른색 실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장포를 입고 즉저가 건네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온객행은 발걸음을 옮겨 땅에 발을 내디뎠다.

주요가 즉저에게 말했다.
“천룡. 천존께서 시키신 일은 끝이 난 것 같으니 어서 천궁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떠한가?”
즉저는 두루마리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먼저 존명을 읽어 보시지요.”
온객행이 두루마리를 들고 즉저를 보며 말했다.
“내가 천룡에게 존대를 다 받고,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는가 보오?”
즉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에 사는 분들께서는 어찌 과거를 들추는 일을 즐기십니까?”
온객행이 두루마리에 감겨 있는 끈을 풀며 말했다.
“어디 쉽게 잊히는 과거여야지.”
즉저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두루마리를 읽으며 말했다.
“그동안 오룡(五龍)이나 사령(四靈)이라도 된 줄 알았지.”
즉저가 작게 혀를 찼다. 주요는 온객행의 말을 듣고 ‘하’ 하고 헛웃음 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다 읽은 두루마리를 주요에게 건네며 즉저에게 말했다.
“천존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에 내가 너무 부족하여 먼저 공공께 아뢰고 답변해도 되겠는가?”
즉저가 ‘쯧’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공공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한시가 급하니 결정을 명확히 하시어….”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현명대선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소?”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선께서는 원래 광택왕과 동창으로….”

온객행이 즉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도예는 어떠하오?”
도예의 이름에 즉저가 펄쩍 뛰며 말했다.
“어찌 감히 사흉(四凶)의 이름을 입에 올리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광택왕이 어찌 북해 용왕이 되었는지 벌써 잊었는가? 정말 그새 노망이라도 난 건가?”
주요가 온객행의 말에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즉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어떻게 하실지 정하시지요.”
그리고 눈을 굴리다 갑판 위에 부둥켜안고 있는 고상과 주자서를 발견했다.

즉저가 선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갑판을 보고 말했다.
“저자는 사람이 아닙니까?”
고상이 얼른 주자서를 자기 몸 뒤로 숨겼지만 고상보다 몸이 한참 큰 주자서를 가릴 수는 없었다. 즉저가 주요를 보며 물었다.
“여인들만 취하는 것 아니셨습니까?”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무엇을 취한다는 말인가? 나는 사람의 그 무엇도 취한 적이 없네.”
즉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요를 위아래로 보더니 선창에 올라 갑판 가까이 다가갔다. 고상이 벌떡 일어나 공수하고 말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이에요. 화사입니다!”
즉저가 고상의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화사 중에 사내가 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었소.”

주자서도 눈치껏 일어나 고상의 뒤에 섰다. 고상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주요가 말했다.
“그는 황제의 후손이요. 나의 사당에 빌 것이 있어서 왔다가 상처를 입어 내가 돌보고 있었소.”
즉저가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고 물었다.
“빌 것?”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는 사람들의 나라에 전쟁이 난 것을 모르시오?”
즉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사람과 교류가 끊어진 지 열 갑자가 넘었는데 어찌…?”
그러다 고상을 보고 말했다.
“화사는 또 무슨 말이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화사가 구해서 화사의 아이가 된 것이오. 일이 끝나면 사람의 세상으로 다시 보낼 것이니 상관치 마시오.”
주자서가 주요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의 세상?’ 즉저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정말 영력이 있군.”
주자서는 눈치를 보다가 고상을 따라 공손하게 공수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즉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력이 있는 사람은 정말 맛있는데 말이야.”
고상이 그 소리를 듣고 힐끔 고개를 들어 즉저를 보았다. 즉저가 고상의 시선을 눈치채고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온객행이 선창을 지나 다시 갑판 위에 올라가 고상 앞에 서서 즉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들은 모두 내 휘하에 있는 아이들이니 행동을 조심하시게. 그대가 혹시 기억 못할까 해서 하는 말인데. 나의 상전은 종화산(鐘火山) 촉룡(燭龍)이시네.”
즉저가 빙글빙글 웃으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 저 아이가 새로 얻은 희첩(姬妾)입니까? 퍽 고상한 취미인지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온객행은 즉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주요가 즉저에게 말했다.
“흑망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말 상대나 되어주게. 한동안 태연에 머물렀다 했지? 금모원군께서는 강녕하신가?”
즉저가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 온객행을 한번 보고 몸을 돌려 다시 땅을 밟고는 주요에게 말했다.
“금모원군께서는 건강하시지요. 요즘 오룡과 사령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주요가 즉저의 소매를 잡아 백택으로 이끌며 말했다.
“그것은 어제 다 말해주지 않았나? 올해 새로 딴 잎으로 덖은 연잎 차가 있으니 내게 원군의 말씀을 들려주세요.”
그리고는 갑판에 서 있는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와서 차시중을 들어야겠다.”
고상이 갑판에 서 있는 주자서와 온객행을 한번 보고 주요의 뒤를 따랐다.

온객행은 갑판에 서서 즉저와 주요가 백택의 송문을 지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팔을 낚아채서 다시 부유각 내실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왜 나왔소? 내가 몇 번이나 당부하지 않았소?”
주자서는 벌벌 떨다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는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온객행이 겁을 먹은 주자서를 보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황제의 자손이라구?”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황제(黃帝)…?”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평상에 앉히고 말했다.
“그대는 희주씨(姬周氏)인가? 어째서 황룡의 기운이 없소?”
주자서의 눈동자가 한참 이리저리 흔들리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저… 저는 기산(岐山) 주가(周家) 자서(子舒)입니다.”
온객행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기산?”
주자서는 흠칫 몸을 웅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물었다.
“혹 기산을 계곤산(係昆山)이라 부르지 않소?”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한참 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모친의 성을 따르는 것이오?”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객행과 거리를 벌리고 말했다.
“그… 그대는 누구십니까?”
온객행은 일어난 주자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사내가 아니오? 어찌…?”
주자서는 영문을 몰라 뒤로 물러나다 기둥에 부딪혔다. 온객행이 자리에 앉아 다 식은 찻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계곤산에 살고 있는 황제의 후예는 그의 딸 발(妭)뿐이오.”
발은 황제의 딸로 태양의 힘을 다루는 여신이다.

발은 천계의 왕이 되고 싶었던 치우(蚩尤)와 싸울 때 비와 구름의 신을 무찌르고 큰 공을 세웠지만 점점 강해지는 태양의 기운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가 가는 곳은 항상 메마르고 가물었는데 양기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운은 농작물을 시들게 했고, 날씨를 덥고 건조하게 했다.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그녀는 하늘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후에 천존께서 그녀의 상태를 발견하고 돌로 만들어진 계곤산에 그녀의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발은 천녀(天女)였기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달이 된다. 애초에 온객행은 발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기둥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주자서의 모습은 조금 가늘고 연약해서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온객행이 불쑥 물었다.
“혹 동복(同腹)의 누이가 계시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온객행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혹 그대의 모친께서 불혹(不惑)을 넘기셨소?”
주자서는 온객행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가 발의 자손이라면 문제가 조금 큽니다.”
그리고 온객행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말없이 다시 기둥에 몸을 기대고 생각했다. 사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해준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갑판에서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던 온객행이 커다란 뱀이 되었다 다시 안개처럼 사람이 되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온객행이 움직이고 그를 볼 때마다 주자서는 흠칫흠칫 놀랐다. 주자서의 경계하는 기색을 읽은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그제야 기둥에서 떨어져 탁상에 놓여있는 찻물을 들이켰다. 연거푸 타는 목을 축이고 난 후에야 차를 마신 잔이 방금까지 온객행이 사용하던 잔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주자서는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탁상 위에 떨어진 찻잔은 다행히 깨지지 않았다. 주자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
“발? 대체 그게 뭔데?”


즉저는 정전에 앉아 한참 영귀(靈龜)와 현무(玄武)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둘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모시는 상전이 다르니 같은 지역에 산다 한들 의견이 맞을 수가 없었다. 주요는 즉저의 말을 들으며 그가 천궁을 떠나와 있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오룡과 사령은 삿된 것을 함께 퇴치하며 생활과 전투를 반복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이 있어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사흉이라 불리는 요괴 역시 신선(神仙)이 되지 못한 영력이 높은 요괴로 사람을 잡아먹어 미쳤거나 천존에게 벌을 받아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영(靈)으로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을 오갈 수 있는 대선(大仙)의 영력을 가진 영물은 하늘에 머무르며 더 이상 땅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땅의 일에 상관하는 대선은 주요처럼 미련이 많은 요괴가 되는 것이다.

주요는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즉저에게 차를 권하고 재실로 향했다. 재실에는 고상이 하방탕을 끓이고 있었다. 주요가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주요.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해봤는데….”
주요가 고상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은 금방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주요… 유서는… 유서는….”
그때 송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요와 고상이 밖으로 나와 측백 숲을 지나쳐 다가오는 온객행을 보았다. 고상은 온객행을 보고 달려가 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파사… 파사….”
주요가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무슨 일인가?”
온객행이 고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고상의 아이는 좀 많이 귀한 것 같아.”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상이 어깨에 올려진 온객행의 손을 잡고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요를 보고 말했다.
“그는 발(妭)의 후손이야.”
주요가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발? 그는 사내가 아닌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퍼뜩 놀라더니 온객행에게 말했다.
“유서를 혼자 두고 왔나?”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부유각을 보며 말했다.
“어지간히 정신없는 영(靈)이 아니고서 나의 부유각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없어.”
주요는 헛웃음을 짓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고상이 주요를 부르며 말했다.
“주요! 하방탕 먹고 가!”
온객행이 재실 안에서 끓고 있는 구리냄비를 보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온객행을 심각하게 보며 물었다.
“근데 파사… 발이 뭐야?”

蛇苺 第5

欲擒姑縱 | 5. 잡고자 하면 먼저 놓아주어라.

주요는 자신을 뒤따라온 천룡(天龍)를 보고 작게 혀를 찼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금모원군께 여쭈려고 했을 뿐인데 혹을 달게 되었다. 천룡은 주요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수원대선 저에게 이리 모질게 구십니까? 한때 총신(寵臣)이었던 이 천룡을 잊으셨어요?”
주요는 천룡을 힐끔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덕분에 태평호에 머물게 되었지요.”
천룡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어찌 저 때문입니까? 미천한 사람 때문이지요.”
주요는 가던 길을 멈추고 천룡을 쏘아보았다. 천룡은 웃는 얼굴로 주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벌써 몇십 갑자 전의 일인데….”
주요가 말없이 천룡을 노려보자 천룡이 웃으며 말했다.
“천존께서 흑망공자(黒蟒公子)의 죄를 사(赦)한다는 좋은 소식을 두고 왜 과거를 꺼내십니까?”
주요는 크게 한숨을 쉬고 다시 태평호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주요가 백택에 돌아왔을 때, 백택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것이, 천룡은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독충을 잡아서 만드는 고독(蠱毒)은 사람뿐만 아니라 요괴나 신선에게도 위험한 독이었으니 선계에서 지네 요괴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드는 갖은 이유 중에 하나기 때문이다. 지네는 딱히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따로 날을 만들어 지네를 몰아내거나 잡아 말려서 약으로 쓰고는 했다. 토룡(土龍)과 달리 사람에게나 요괴에게나 신선에게나 취급이 좋지 못한 천룡은 열등감이 많았다. 그 열등감을 종종 유약한 요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풀었으니 그가 북방의 현명대선(玄冥大仙)의 가좌(假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꽤 의심스럽고 이상한 일이다. 태평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으니 고상이 주워 온 아이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혹여 천룡이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한다면 금모원군께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아무리 천룡이라도 유서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주요가 정전으로 들어오자 고상이 서투른 모양으로 차를 내왔다. 주요를 보고 ‘주인’하고 다소곳이 인사한 고상이 천룡을 보고 인사했다.
“오공공(蜈蚣公)”
천룡은 고상을 위아래로 흘겨보더니 말했다.
“누구?”
주요가 ‘흥’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노인네 잘못은 노망(老妄)인 셈 치렴.”
주요의 말에 천룡이 고상을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화사가 옥산을 나와 있다니 신기하군.”
고상이 주요가 앉은 평상의 협탁에 찻잔을 놓고 평상 아래에 있는 자리에 천룡의 몫의 차를 두었다. 천룡이 물었다.
“흑망공자는 어디 계시오?”
고상은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서 파사를 부르는 이름을 들었다. 파사는 커다랗고 검은 뱀이었으므로 흑망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동정호(洞庭湖)에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고상이 본 파사는 온객행 뿐이었으므로.

천룡은 고상이 차를 내려놓은 자리에 가서 앉아 차를 마셨다. 차향을 맡더니 말했다.
“연꽃 향이 아주 그윽합니다. 한창 철이지요?”
주요는 천룡을 무시하고 고상에게 물었다.
“천교와 보살은?”
고상이 다소곳이 공수하고 답했다.
“황산에 곡물을 사러 갔습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고상을 내보냈다. 천룡이 물러나는 고상을 붙잡으며 말했다.
“화사, 가서 흑망공자를 불러오게.”
고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흑망공자께서는 공공(共工)께 벌을 받아 태평호에…”
천룡이 고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공공의 상전이신 천존께 존명(尊命)을 받고 온 나에게 감히!”
주요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놓으며 말했다.
“즉저(蚣蝮).”
주요의 부름에 천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요를 보았다. 즉저는 천룡을 천하게 부르는 멸칭(蔑稱)으로 보통 사람들이 천룡을 그렇게 불렀다. 주요가 고상에게 고갯짓하여 그녀를 물렸다.

천룡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흑망공자는 봉인이 거둬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주요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노망이 들었는가? 흑망은 스스로를 태평호에 가둔 것이지 정말 공공께서 가두셨다고 생각하는가?”
천룡이 주요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고 물었다.
“대선…?”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공공께서 흑망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룡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어째서…?”
주요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았어요.”
주요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윽한 연꽃향이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떠오르게 만든다.

고상은 정전의 장지문 앞에 서서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파사를 칠석이 아니라 오늘 풀어주려는 모양인데 그것을 전하기 위해 즉저가 직접 하늘에서 온 것 같았다. 그 많은 요괴 중에 왜 하필 즉저를 보냈을까? 그는 저 멀리 북해에 사는 탐욕스러운 늙은 지네인데, 분수도 모르고 모시는 현명대선의 힘만 믿고 자기보다 약한 요괴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고도 했다. 고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남문을 나와 재실로 향했다. 유서가 먹을 만한 것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던 고상은 앵두가 담긴 작은 소쿠리를 들고 백택을 나왔다. 앵두를 하나둘 입에 넣고 씨를 뱉으며 선창에 매여 있는 부유각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등롱 하나 밝히지 않은 내실은 바깥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어두워졌는데 이불 속에 숨은 주자서의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온객행은 물속에서 나와 잠시 누각에 올라가 차를 조금 더 마시다가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손짓으로 불을 밝히고 탁상에 고개를 괴고 앉아서 그리운 그를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 괜히 화가 났다. 태평호로 오고 난 뒤에 그는 단 한 번도 온객행의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참으로 모진 사람.’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자형제의 서고에는 그럴듯한 정리 방법이 없어서 여기저기 정보가 널려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자형제들의 시간은 매우 비쌌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온객행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며칠 전 만들었던 백련 봉우리를 말려 만든 연꽃 차 정도이다. 온객행은 품에 안아 보았던 사람을 생각했다. ‘그를 안아 보았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다섯 갑자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몇 백 몇 천 갑자를 사는 요괴에게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나 많이 그를 잊었다니.

온객행은 슬퍼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갔다. 한동안 침상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가 떠오를 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겉에 입은 푸른 장포와 검은색 중의를 벗고 하얀 내의 차림으로 침상으로 갔다. ‘오늘 아침에 휘장을 걷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신발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이불도 개지 않은 모양이다. 온객행은 이불을 펴려고 하다가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가여워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한동안 자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온객행은 사람 옆에 몸을 뉘어 이불 째 사람을 껴안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아이야. 여기 내가 함께 있어 주마.”
오르락내리락 작게 바르작대는 사람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심장 소리를, 살갗에 피가 부딪혀 나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온객행일지도 모르겠다.

고상은 앵두를 들고 부유각에 올랐다. 내실에서 등롱을 밝혔는지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온다. 그 빛으로 몰려드는 하루살이를 입김으로 태워버린 고상이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걸어서 병풍을 넘어 침상으로 갔다. 침상 옆에 있는 옷걸이에 온객행이 입는 푸른색 장포가 걸려있다. 고상은 내실 안을 살펴보며 유서를 찾았다. ‘유서가 어디 갔지?’ 고상은 손에 들고 있던 앵두를 침상 옆에 협탁에 놓아두고 휘장을 걷었다. 금침에 둘둘 말린 유서를 온객행이 안고 있었다. 고상은 조금 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항상 고상이 불쌍하다며 데려온 미물들을 살뜰하게 보살폈다. 막 태어난 두꺼비 요괴도 그랬고, 남쪽을 찾아 날아간 나비도 그랬다. 떠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고상은 그럴 수 없어서 매번 눈물을 쏟았다. 그러면 온객행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상,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유서는 주요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면 다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했다. 고상은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도 좋아하고 천교랑 보살도 좋아하고 이제 파사도 좋아하는데 왜 같이 살면 안돼?’ 고상은 침상의 휘장을 내리고 휘장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유서를 바라보다가 내실 밖으로 나갔다. 태평호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동이 틀 무렵 주자서는 몸이 답답하고 조금 더워서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하’ 하고 작게 숨을 들이켠 주자서는 몸을 굳혔다. 이불에 매여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즉저를 피하기 위해 파사공자의 침상 위에 숨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이는 파사공자일 것이다.

주자서는 몸에 힘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장 사이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주자서가 몸을 움직여 팔을 빼려고 하자 파사공자는 주자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주자서의 목덜미에 그의 차가운 입술이 스쳤다. ‘앗’하고 움츠러든 그의 목덜미에 파사공자가 뺨을 맞대어 문질렀다. 조금 서늘한 파사공자의 체온은 마침 이불에 싸여 조금 더웠던 주자서에게 딱 좋았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살을 그에게 맞붙였다.

온객행이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그는 그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주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피어나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뒤척이는 주서의 몸이 따뜻하여 온객행은 입술이 데인 것처럼 아리었다. 온객행이 아픈 것이 끔찍이도 싫었던 주서는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게 했었다. 대신 아프고 싶다고도 했었다.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달가울 것이라고도 했었다. 온객행은 그의 사랑이 두려웠다. 온객행은 주서가 사랑하는 만큼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서는 안식을 얻었고, 온객행은 고통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서의 사랑은 모두 다 타서 세상에 없지만, 타다가 만 온객행의 사랑만 세상에 남은 것이다. 온객행은 서글퍼져서 울었다.
“아서…아서….”

주자서는 흐느끼는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이 깨었다. 주자서의 머리에 기대어 울고 있는 것은 온객행이다. 주자서는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일그러져 울상이 된 온객행의 얼굴은 애달파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자서는 이불 속에서 팔을 들어 온객행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온객행의 뺨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서늘했는데, 그래서 손에 닿는 느낌이 시원했다. 주자서는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는 솜씨가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의 얼굴을 당겨 안았다. 주자서의 어깨가 서늘하게 젖을 때까지 훌쩍이던 온객행은 눈을 파르르 뜨고 주자서를 보았다.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이 부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객행의 목소리가 애처롭고 쓸쓸해서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말했다.
“연모(戀慕)해. 사모(思慕)해… 사랑해….”
온객행의 목소리는 점점 축축하게 젖더니 마지막에는 울먹였다. 주자서는 안타까웠지만 이 이상 받아주면 그를 기만(欺瞞)하는 것 같아서 몸을 떼고 말했다.
“이만 놓아주시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끌어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온공자.”
주자서의 부름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그를 보며 말했다.
“온공자….”
주자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온객행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쓸쓸해 보이는 그가 가여웠다. 동정(同情)일까? 시혜(施惠)일까? 이곳에서 주자서보다 미천한 것은 없을 텐데 말이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고 침상에서 나오려고 했다. 온객행은 일어나려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를 다시 침상 위에 앉혔다. 주자서가 자신의 소매를 잡은 온객행의 손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소매를 놓고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연잎을 따던 그날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스스로의 눈을 속이면서. 주자서는 한참 안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온공자. 이만 놓아주시오.”
주자서는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자신을 놓아주라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놓아주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무례를 범했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밖으로 나갔다. 침상에 홀로 남은 주자서는 몇 백 몇 천년을 산다는 요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온객행은 벗어 놓은 중의와 장포를 입고 내실 밖으로 나왔다. 쪼그리고 앉아 태평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잔뜩 젖은 못생긴 얼굴을 유서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퍽이나 다정한 사람이다. 싫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기꺼운 위로다. 화사나 우사첩이 만질 때는 그렇게 경계하더니 자신이 만지는 것은 그대로 둔다. ‘바보같이.’ 온객행은 태평호의 물에 얼굴을 씻었다. 그가 세수를 마치고 일어나자 고상이 물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파사! 오공공 즉저가 왔어. 봉인을 풀러 왔데.”
온객행이 백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필 즉저가 왔어?”
고상이 훌쩍 물 위로 나오며 말했다.
“주요는 천궁(天宮)에 다녀온 거야?”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태연(太淵), 서왕모께 다녀왔을 걸.”
고상이 ‘흠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자형제가 모르는 것을 서왕모께서 아실까?”
온객행이 내실을 보며 말했다.
“금모원군께서 모르는 일은 없지.”

고상이 온객행에게 다가가 서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어쩌지?”
온객행이 누각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주요에게 다 생각이 있겠지.”
고상이 우물쭈물하며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물었다.
“왜?”
고상이 쪼르르 온객행의 곁에 가서 소매를 잡고 말했다.
“온객행, 봉인이 다하면 태평호를 떠날 거야?”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상을 보았다.
“에이, 즉저가 왔다니까! 천존의 명령이래.”
온객행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상을 보며 말했다.
“천존?”
고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화로에 불을 피웠다. 물 주전자에 물을 담고 예쁜 항아리에 담아 두었던 백련 꽃잎을 찻주전자에 넣었다. 여상히 앉아서 차를 내리는 온객행을 보고 있던 고상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에이! 파사!”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며 말했다.
“가서 네 아이를 지켜. 즉저는 감히 부유각까지 오지 못할 테니까.”
고상은 입을 삐쭉이다 누각을 내려가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 안에 들어가자 주자서가 병풍 뒤에 서서 협탁 위에 있는 앵두 소쿠리를 보고 있었다. 고상이 다가가 앵두 소쿠리를 주자서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뭘 보고 있어.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어서 먹어봐.”
주자서는 얼떨떨하게 소쿠리를 받아들였다. 내실로 들어오는 쪽을 힐끔 보고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즉저는…?”
고상이 주자서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아이참! 너는 즉저라고 부르면 안되지. 오공공이라고 불러.”
그리고 주자서의 입을 막고 있던 손으로 앵두를 들어 주자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앵두를 씹다가 씨를 손에 뱉어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공공?”
고상이 앵두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 현명대선의 가좌니까. 지네 주제에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 갔을까?”
고상의 말에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네는 정말 싫어요.”
고상이 앵두 씨를 뱉으며 말했다.
“왜? 지네가 얼마나 맛있는데?”
주자서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주인, 설마 나 지네도 먹었어요?”
고상이 앵두를 더 집어먹으며 말했다.
“사람은 지네를 그냥 먹으면 죽잖아.”
주자서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주인, 저는 아직 사람인가요?”
고상이 주자서의 입에 앵두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이참! 아상이라고 부르라니까.”

고상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데려가 앉히고 침상의 휘장을 걷었다. 멀뚱히 앉아 있는 주자서의 입에 또 앵두 몇 개를 넣어주고 말했다.
“즉저는 파사랑 사이가 안 좋아. 즉저가 파사를 질투하거든.”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앵두를 먹었다. 고상이 손에 들고 있던 씨앗을 태평호로 던지며 말했다.
“즉저는 고작 벌레인데, 파사는 용이잖아.”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고상을 보며 물었다.
“용?”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벌을 받지 않았으면 흑룡이 되었을 거야. 봉인이 풀리면 아마 곧 흑룡이 되겠지. 그럼 즉저가 모시는 현명대선의 현무(玄武) 자리를 놓고 싸울 걸.”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현무?”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유서, 앵두로는 배가 안 차지? 물고기라도 잡아먹을까?”
주자서는 방금까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해 놓고 밥으로 무엇을 먹겠냐는 평범한 질문을 한 고상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하고 헛웃음 지었다.

고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풍 너머 내실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더니 함안에 들어 있는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불평했다.
“죄다 파랗고 까만 옷.”
고상이 다시 주자서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서, 너는 화사야. 옥산의 화사.”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상을 보았다.
“그러니까 흰옷은 안돼. 여기서 기다려 내가 백택에 다녀와야겠어. 일어나봐.”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상이 주자서를 올려보더니 이리저리 몸을 만져보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집어 이리저리 재보더니 말없이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앵두 소쿠리를 안고 멀뚱히 서서 고상이 나가는 것만 보았다. 감히 화사가 무엇인지 흑룡은 또 무엇인지 묻기 겁이 났다. 흑룡과 화사가 어려워하는 사당의 주인 무지기는 그럼 정체가 대체 무엇일까?


주요는 천룡에게 천궁(天宮)에 관해 물을 것이 있었다. 그를 붙잡고 요리조리 피하려는 천룡을 잘 구슬려 천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력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방신(四方神)과 오룡(五龍)은 산천대제(山川大帝) 성신(星辰)의 휘하(麾下)에 있다. 그런데 사령(四靈)은 금모원군(金母元君)인 서왕모의 휘하에 있으니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북방 흑룡 광택왕(廣澤王)이 승하하여 자리가 공석이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북해의 용왕인 광택왕은 용왕이 되기 전에 사흉(四凶) 중 하나인 도예(檮杌)의 부하였는데 노망이 와서 미친 도예를 백룡(白龍)이 봉인할 때 그를 도와 도예를 봉인하는데 공을 인정받아 신선이 되었고 후에 북쪽 바다의 용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산 출신으로 바다에서 살던 영(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요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요는 천룡에게 홍주를 대접하며 사령(四靈)과 오룡(五龍)에 대해서도 물었다.

천룡이 잔뜩 취해 평상 위에서 잠들었다. 주요는 일부러 오래 묶은 독한 술을 대접했다. 천룡이 자고 있는 동안은 태평호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주요는 정전을 나와 재실과 백택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백택에는 우사첩 말고도 산의 정령인 계낭(溪囊) 몇이 측백나무 숲 여기저기에 모여 살았는데 천룡과 함께 돌아온 뒤로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천교와 보살이 황산으로 사람의 물건을 사러 갔다면 한동안 들떠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천존이 파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필 북해 용왕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파사가 떠나면 파사를 감시한다고 붙여 놓은 화사도 옥산으로 떠날테지….’ 주요는 벌써 고상이 그리웠다. 파사의 시혜로 요괴가 된 고상은 그 은혜를 갚겠다고 옥산을 나와 온객행을 따라 태평호에 왔다. 아마 고상이 그 유서라는 사람에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이 주요가 고상에게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작고 연약하고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사랑받을 줄 아는 작은 아이는 주요의 자식과도 같았다. 주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웃어버렸다. 태평호에서 주요의 자식 같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인간조차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태평호는 앞으로도 별일 없이 아주 평화로울 것이다. 홀로 남은 무지기, 주요가 있는 태평호는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주요는 그것이 내심 아쉬워 한숨 쉬었다.

蛇苺 第4

空城計 | 4. 비어 있는 성.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한참 안겨서 지금 뭘 하고 있나 생각 중이었다. 주자서가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르작대면 온객행은 그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주자서는 그렇게 안겨 있었다. 주자서가 몸의 힘을 빼고 축 늘어지자 그제야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주자서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온객행을 보았는데 온객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방금 전의 그 포옹이 혹시 자신이 느끼는 것만큼 어색하게 오래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며 살포시 웃고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난간 옆으로 이동하여 연잎을 마저 땄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딴 연잎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직 피지 않은 백련 봉우리가 있으면 그것도 따 주겠소?”
주자서는 마침 커다란 연잎 사이에서 올라오고 있는 하얀 연꽃 봉우리를 발견했다. 주자서가 그것을 따서 온객행에게 건네자 온객행이 말했다.
“백련 봉우리를 차로 하면 향이 아주 좋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있는 연잎을 해치고 봉우리 몇 개를 더 따서 온객행에게 건넸다. 주자서가 난간을 다시 넘으려고 하자 온객행이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잡아주었다. 주자서는 또 그의 품에 안기게 될까 봐 더욱 조심하여 몸을 움직였다. 소쿠리 하나를 가득 채운 연잎과 온객행을 위해 백련 봉우리를 한 소쿠리 땄다.

주자서가 갑판으로 연잎이 든 소쿠리를 내려놓았다. 물속에서 거품이 올라오더니 보살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아직 연근이 없네. 그리고는 양손 가득 주먹만 한 조개를 갑판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우리 교교는 조개를 좋아해.”
그리고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교도 물 속에서 불쑥 나와 말했다.
“올해는 큰 조개가 많다.”
그리고 주자서가 따 놓은 연잎을 보고 좋아하며 말했다.
“유서, 많이 땄네. 나머지 소쿠리도 부탁해도 될까?”
온객행이 뒤에서 나와 말했다.
“천교, 그는 사람이라 작은 가시에도 상처를 입네.”
그리고는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연꽃 가시에 쓸린 팔을 보여 주었다.

천교가 작게 ‘어머!’ 하더니 갑판 위로 올라와 빨갛게 생채기가 난 주자서의 팔과 손을 보고 말했다.
“정말….”
천교가 얼굴을 찌푸리고 속상해하자 주자서가 손을 빼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교가 몸의 물을 흩어내고 연꽃대를 몇 개 잘라 거기서 나온 진액을 주자서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일단은 이거라도 발라 놓자.”
천교가 주자서를 갑판에 앉히고 소매를 걷어 팔과 손에 연의 진액을 발라 주었다. 보살이 곧 다시 불쑥 물 위로 올라와 말했다.
“교교! 어디 갔어?”

천교가 갑판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보살도 손에 쥔 조개를 놓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천교가 보살을 보고 말했다.
“보보, 사람은 정말 연약하다. 연잎 좀 땄다고 이 손 좀 봐.”
보살이 ‘흥’하고 코웃음 치고 말했다.
“맨손으로 땄는가 보군. 여인들은 손에 천을 둘러서 하던데. 요령이 없는 것뿐이야.”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연잎을 따는 과(戈; 꺾쇠창)가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보살은 조개를 소쿠리 안에 넣으며 말했다.
“소쿠리 가득 가져가고 싶은데 주인께서 언제 돌아오실 지 모르니까.”
천교가 조개가 담긴 소쿠리를 보며 말했다.
“내가 알려준 곳에 가보았어? 내가 작년에 묻어둔 펄조개가 있을 텐데.”
보살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는 나어(蠃魚)랑 소어(鳋魚)가 사는 곳이라 아마 없을 수도 있어. 한 번 더 보고 올게. 연잎 따고 있어.”
그리고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교도 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근처에 있는 연잎을 따며 말했다.
“파사공자께서도 같이 드세요. 오늘은 하방탕(河蚌湯)을 할 거예요. 현명대선(玄冥大仙)께서 보내주신 소금을 넣고 끓이면 정말 맛있답니다.”
주자서는 천교가 툭툭 뜯어낸 연잎을 받아 소쿠리에 담았다. 주자서가 서투른 손으로 천교를 돕는 것을 보던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좋지요. 오늘 밤에는 달이 좋을 테니, 누각에서 화로를 피워 끓이면 아주 좋겠네요.”
천교가 작은 백련 봉우리를 가져와 온객행의 소쿠리에 담으며 말했다.
“제가 백택에서 화로랑 재료를 가져올게요. 주인께 드릴 몇 개만 빼놓고 우리가 먹어요.”

온객행이 소쿠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상은 어디 갔지요?”
천교가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천교의 눈짓을 읽은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백련 봉우리를 호숫물에 씻으며 말했다.
“아상도 좋아하잖아요. 하방탕.”
천교가 다시 갑판 위에 올라와 연잎을 정리하며 말했다.
“보보를 시켜서 찾으면 됩니다.”

물속에서 보살이 불쑥 나왔다. 갑판 위에 양손 가득 쥐고 있던 조개를 올려 놓고 훌쩍 올라와 말했다.
“나어랑 소어가 안 보이네? 어디 갔나?”
천교가 보보의 몸에 물을 흩어주며 말했다.
“단오절에 서산대선(西山大仙)께 갔겠지.”
보살이 ‘흠’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교의 시중을 받았다. 온객행이 백련봉우리를 씻는 것을 발견한 보살이 말했다.
“오늘은 부유각에서 먹자. 가서 홍주도 꺼내 올까?”
천교가 보살의 어깨를 살살 쓸며 말했다.
“주인께 혼나면 어쩌려고.”
보살이 천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파사공자께서 드셨다고 하면 되지.”
그리고 둘은 재미있다는 듯 뺨을 붙이고 웃었다. 두사람의 친밀한 모습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돌렸다.

천교와 보살은 갑판에 걸터앉아 영력으로 부유각을 밀어 소령으로 향했다. 소령에 도착해서 천교와 보살이 소쿠리를 들고 배에서 내리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유서, 너는 여기서 파사공자님을 돕도록 해.”
그때 백택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고상이 나와 웃으며 말했다.
“안돼! 유서가 도우면 기껏 구해온 펄조개를 못 먹을 수도 있어!”
그 말에 천교와 보살이 ‘호호호’하고 웃었다. 고상이 훌쩍 뛰어 부유각에 승선하고는 말했다.
“달빛 아래 부유각에서 풍류를 즐기며 먹으면 무엇이든 맛있을 테니 기대할 만할 거야.”
천교가 말했다.
“우리는 가서 재료를 가지고 올 게. 금방 올 거야.”
그리고는 훌쩍 날아 백택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날아가는 두사람을 보고 그동안 자기를 위해 걸어 다녔구나 싶었다.

주자서가 선창에서 백택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앗! 이게 뭐야?’ 끈적끈적한 연꽃의 진액이 묻은 그의 손을 다시 놓은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그의 생채기를 보았다.
“이건 또 왜 이래?”
주자서가 고상의 손에서 소매와 팔을 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놔주세요.”
고상이 ‘쯧’하고 작게 혀를 차더니 주자서의 양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다시 떠진 고상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에 ‘후’하고 입김을 불자 빨갛게 났던 생채기가 하나둘씩 아물었다. 고상은 다시 눈을 감고 심호흡하고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온객행이 다 씻은 백련 봉우리를 들고 누각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주 지극 정성이네. 정말 네 아이 삼을 셈이야?”
다시 떠진 고상의 눈은 다시 사람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주자서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상을 보자 고상이 온객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내 아이라니까! 이제 막 태어난 솜털 같은 화사라고.”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누각 위로 올라갔다. 어디에서 났는지 식기와 젓가락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온객행은 오늘 딴 백련 봉우리를 물에 끓이고 있었다. 고상이 ‘킁킁’ 냄새를 맡고 말했다.
“백련 향이 아주 좋네.”
온객행이 구리로 만든 냄비 안을 휘젓고 말했다.
“기껏 모은 영력을 그렇게 써도 괜찮겠어?”

고상이 주자서를 자리에 앉히고 자기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게 다 주요를 위한 일이야. 주요를 위한 일이면 파사공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 끓은 연꽃잎을 건져서 넓은 소쿠리에 널었다. 고상이 고개를 괴며 물었다.
“파사. 주요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온객행이 누각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그러게. 올 때가 지났는데 좀 늦어지는데?”
고상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갔냐구!”
온객행은 낮게 웃을 뿐 대답 없이 누각 아래에 있는 내실로 갔다.

천교와 보살이 구리로 만든 냄비에 조개와 재료를 정갈히 올려서 부유각으로 왔다. 방금 온객행이 백련 봉우리를 끓이던 화로 위에 구리냄비를 올려놓고 보살이 손에 들고 온 술 단지를 내려 놓았다. 고상이 술 단지를 보고 누각 난간 옆에 있는 함에서 술잔을 꺼내 들고 오며 말했다.
“태평홍주!”
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아상, 올해는 구기자 따는 것을 돕겠다고 해야 줄 거야.”
고상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싫어! 구기자는 너무 작아서 일이 많잖아.”
보살이 탁상 위에 올려놓은 술 단지를 팔로 안으며 말했다.
“그럼 안 줄 거야.”
고상이 입을 삐쭉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도와줄 거야. 나를 대신해서!”
그리고는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보살과 고상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이 주자서를 흘겨보며 말했다.
“연잎 땄다고 손에 상처가 났는데 구기자를 따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고상이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구기자가 나는 데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네.”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고상 네가 도와줘야 해.”
고상이 입을 꾹 다물고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
“알겠어! 대신 홍주 만들 때 구경해도 돼?”
보살이 단지의 붉은 천을 뜯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도와줘. 화사는 해독의 능력으로 유명하잖아. 약주가 될지 누가 알아?”

고상이 ‘하하하’하고 고개를 꺾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옥산의 화사는 해독으로 유명하지. 하하하.”
보살이 고상이 가져온 술잔에 술을 따라 주자서와 고상에게 권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잔에 조심스럽게 홍주를 따라 구리냄비 옆에 앉아 화로를 보고 있는 천교에게 다정하게 건넸다. 온객행이 다시 누각 위로 올라오며 말했다.
“단지 째로 드시면 흐르는 것이 더 많으니 술병에 담아 드시지요.”
하고 도자기로 만든 술병을 놓았다.

보살이 술병을 받아 단지의 술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역시 파사공자께서는 풍류를 아시는 분입니다.”
고상이 자신이 들고 있던 술을 온객행에게 건네고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잔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틀 뒤가 보름이니 보름을 축하할까요?”
보살이 술병에서 술을 따르며 말했다.
“파사공자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축하합시다.”
고상이 맞장구 치며 말했다.
“좋다! 좋습니다!”
고상이 온객행 쪽으로 술잔을 들어 올린 뒤에 잔을 비우고 잔을 보였다. 곧 보살과 천교, 온객행도 잔을 비웠다.

주자서만 멀뚱히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발견한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그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유서는 술을 하는가?”
주자서는 술잔에 담긴 붉은 술을 보고 주춤했다. 고상이 피를 먹였다는 말을 잔뜩 했으니 혹시 이 술도 피로 담근 술인가 의심이 일었다. 주자서가 주저하는 것을 느낀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에게 내민 잔을 낚아채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아직 아파서 술을 마시면 안돼.”
그리고 잔을 들어 비웠다. ‘크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정월대보름에 마셨던 것보다 더 맛있네?”
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정월대보름에 마신 것은 담근 지 얼마 안 된 술이었으니까.”
고상이 보살 옆에 앉아 치대며 말했다.
“매년 열 단지 넘게 담그는 것 같던데, 단지마다 맛이 다른가?”
천교가 웃으며 고상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온객행은 탁상 위에 올라와 있는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생채기가 났던 곳을 보았다. 그리고 천교와 보살과 살갑게 대화하고 있는 고상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가져와 펴서 쓸어 보았다. 조금은 뜨거운 듯한 체온에 온객행이 살포시 웃었다. 주자서는 제 손을 잡고 신기한 것을 보는 것같이 구는 온객행이 의아하여 하는 대로 두었다. 대체로 주자서는 이곳에서 남이 뭘 하면 그냥 하는 대로 두었다.

애초에 그들이 하는 대화에서 주자서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무지기니 파사니 우사첩이니 화사니 하는 요괴의 이름들은 어디에서 인가 들어는 보았지만 정확하게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게다가 이들은 사람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주자서는 그냥 그러하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구했다는 저 소녀의 눈은 붉은 색이었다. 주자서는 ‘요괴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며 여인들을 보았다. 주자서의 눈에는 요괴가 아니라 그냥 어린 소녀들 같았다.

천교가 그릇에 조개를 떠서 온객행에게 건넸다. 온객행은 그것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얼떨결에 온객행의 그릇을 받고 안에 내용물을 보았다. 커다란 조개가 입을 쩍 벌리고 안에 들어찬 속살이 실하다. 고상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우리 애는 내가 챙길 테니 파사공자 드시오.”
그리고 자기 몫의 그릇을 온객행에게 주었다. 주자서가 자신의 그릇을 고상에게 내밀자 고상이 손으로 조개를 벌려 살을 발라 ‘후후’ 불더니 주자서의 입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우리 아가. 많이 먹어.”
주자서는 입안에 들어온 것을 뱉을 수 없어 먹었다. 과연 소금을 곁들인 하방탕은 맛이 좋았다.

천교가 웃으며 한 그릇 더 떠서 고상에게 주었다.
“아상. 아상도 많이 먹어.”
보살이 조개를 발라 ‘후후’ 불어서 천교에게 주며 말했다.
“아상이 동생이 생겨서 좋은가 봐.”
천교는 보살이 준 조개를 받아먹고 자기가 바른 조갯살을 보살에게 주었다. 천교와 보살이 서로 정답게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던 온객행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고상은 자기 몫의 조개를 후후 불어 발라 먹고는 ‘히히히’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내려놓은 그릇에 조개를 발라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주자서의 행동에 작게 코웃음 친 온객행이 ‘아’하고 입을 벌리자 주자서가 냉큼 입안으로 조갯살을 넣어 주었다. 고상이 그 모습을 보고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인상을 쓰면서도 웃고 있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가 주변을 보았다. 천교와 보살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주자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부러워하시는 것 같길래….”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하하하’하고 고개를 꺾어 웃었다. 천교와 보살도 ‘호호호’하고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비우고는 말했다.
“유서가 주어서 그런가? 하방탕 맛이 아주 좋구나.”
그리고 같이 웃었다. 주자서만 눈을 도르르 굴리며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국물도 아주 맛이 좋았다.


하방탕을 나눠 먹은 이후 천교와 보살은 자주 부유각에 주자서를 맡겼다. 그들은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주자서를 돌보는 것이 귀찮아 지면 그렇게 했다. 고상은 말없이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어서 미덥지 않았으나 부유각에 매여 있는 온객행은 그동안 고상이 불쌍하다며 데려온 미물이나 작은 요괴들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주자서는 가끔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않는 그를 혼자 둘 수 없으니 온객행에게 맡기는 것이다. 비축해둔 곡물을 다 먹어가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황산으로 향하는 날도 그랬다.

백택에는 여자들이 입는 옷 밖에 없어서 천교와 보살은 일단 내의와 중의를 이어 장포를 만들어 주자서에게 입혔다. 색깔이라고 해 보아야 붉고 화려한 것밖에 없어서 어찌하다 보니 주자서는 하얀 옷을 입게 되었다. 천교는 주자서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파사공자께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보살이 옆에서 천교의 말에 맞장구 치며 말했다.
“백택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쓰고 마셔도 좋다. 정전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올려 인사했다. 보살이 주자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랬지.”
천교가 보살의 팔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주인께서는 이런 것을 좋아하니 그냥 하게 두자.”
보살이 천교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교교 말이 다 맞지.”
둘은 부유각 갑판에 서 있는 온객행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훌쩍 날아 남쪽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그 둘이 산을 너머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다가 부유각에 올랐다.

온객행은 말없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그를 누각으로 이끌었다. 화로 위에 놓인 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온객행은 손바닥을 펼쳐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아 차를 내렸다. 연꽃의 향기다. 주자서는 연잎을 따던 날이 떠올라서 살포시 웃었다. 주자서가 웃는 것을 보고 온객행도 그를 마주 보고 웃었다. 온객행이 연꽃같이 생긴 찻잔에 차를 따라 주자서에게 권했다.

주자서는 찻잔을 받아 코에 대고 그 향을 한참 맡더니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후룩’ 한입 마셔보더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화로에서 주전자를 내려놓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흩어지는 수증기에서 연꽃의 향이 난다. 온객행은 정말 오랜만에 서호(西湖)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차근차근 하나둘 잊어가고 있었나 보다.

주서가 온객행이 건넨 연꽃잎 차를 들고 말했다.
“진흙 속에 피어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 맑고 향기는 멀수록 진하네. 홀로 깨끗하게 피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다가갈 수 없음이라.” (1)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묵은 차라 향이 덜하니 이해하시게.”
주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홀로 깨끗하게 피어 다가갈 수 없는 그대와 함께하는데 묵은 차이던 새로 난 차이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온객행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상관이 있네. 그대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은데….”
주서가 웃으며 말했다.
“노온. 맑은 물에 홀로 깨끗이 피어난 그대가 제일 좋은 것이니 그것으로 되었네.”
마주 보고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눈을 감고 한참 주서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포기했다.
“그래. 그는 나를 노온이라고 불렀는데….”
온객행의 목소리에 차를 마시고 있던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주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온객행을 한참 보다가 그를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자신을 부르는 그리운 소리에 살며시 웃었다. ‘그래. 그는 나를 노온이라고 불렀는데….’ 온객행은 다시 눈을 떠서 손에 들린 찻잔을 보았다.

연꽃 같은 이 찻잔도 그와 함께 골랐다. ‘그는 연꽃을 정말 좋아했는데. 하얀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는데….’ 시선에 걸린 주자서의 옷자락이 하얗다. 온객행은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주자서의 옷자락을 쓸어보았다. 얇은 무명천의 감촉이 따뜻하다. ‘맞아. 그는 사람이었으니까.’ 온객행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마셨다.

온객행과 차를 나누어 마시고 주자서는 온객행이 구워 주는 물고기를 두어마리 먹었다. 주자서가 먹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던 온객행은 잠시 유사혈에 다녀온다며 내실의 휘장을 모두 내리고 주자서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후에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평상에 기대서 설핏 잠이 들어 있었다.


고상이 휘장을 걷고 들어와 온객행을 찾았다.
“파사! 파사! 큰일 났어! 파사!”
온객행을 부르는 소리에 주자서가 부스스 일어나 고상을 맞이했다.
“주인?”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물었다.
“유서, 온객행은 어디에 갔어? 주요가 돌아왔어.”
주자서가 대답했다.
“유사혈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상이 혀를 ‘쯧’ 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자서를 온객행의 침상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 있어. 휘장 밖으로 나오면 안돼.”
그리고 침상의 휘장도 쳤다. 주자서는 남의 침상 위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고상에게 말했다.
“주인! 이 곳은….”
고상이 주자서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유서. 사람은 물론 요괴도 먹는 즉저(蝍蛆)가 왔어. 말도 하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고 침상 위에 있어. 내가 데리러 올 게.”
고상은 침상 위의 이불을 들어 주자서를 꽁꽁 싸매 주고 나갔다.

주자서는 즉저라는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즉저는 지네 요괴로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산다. 즉저는 다른 벌레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악신으로 즉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온 벌레들이 기둥이며 대들보를 갉아먹는다 했다. 게다가 발이 많은 생김새 때문에 주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때 무심코 밟았다가 발가락을 물린 적도 있었다. 즉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로 들었던 즉저의 이름을 고상의 입으로 들은 것이 신기했지만, 그가 주요와 함께 왔다는 것은 아마 엄청 거대한 지네라는 뜻일 것이다. 커다란 지네를 상상하던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고 몸을 떨었다. 고상이 숨겨주지 않아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1) 주돈이 愛蓮說 애련설; 연꽃을 좋아하는 노래
군자를 연꽃 은둔자를 국화 화려한 귀족을 모란으로 은유하였다.
予獨愛蓮之出於 泥而不染 濯淸漣而不夭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 不可褻翫焉.
나 홀로 연꽃을 좋아하니,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며, 줄기 가운데는 통하며 밖은 곧고, 덩굴 뻗지 않고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이 깨끗하게 서있으며,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음이라.

蛇苺 第3

順手牽羊 | 3. 손에 잡히는 대로 양을 끌고 가라.

부유각이 백택이 위치한 소령(紹岺)의 선창에 닿았다. 이 곳은 태평호의 북쪽으로 구강으로 흘러 나가는 청익강(靑弋江)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은 다른 곳 보다 지형이 완만하고 물길이 나가는 곳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러다 보니 백택도 이곳에 위치하게 됐다. 요즘에는 근처에 살던 어부들과 산에서 약초를 캐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로인가 떠나서 주요와 그를 따르는 우사첩(雨師妾) 몇만 남아 살고 있다. 부유각이 선창에 도착하자 곧 두 명의 우사첩, 천교(天巧)와 보살(普撒)이 다가와 인사했다.
“파사공자.”
붉은 색 옷을 입고 공손히 인사한 두 사람은 온객행이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고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평상에서 일으켰다.

주자서의 팔을 잡은 온객행이 그를 갑판으로 데리고 나왔다. 주자서는 절뚝거리며 겨우 온객행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선창에 서 있는 두 여인을 보고 주자서는 다급하게 온객행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나…나는 기루에 팔려 가는 것이오?”
온객행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자서의 말에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물었다.
“주인은 어디에 계시오?”
온객행은 대답하지 않고 우사첩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승선을 허락했다. 천교와 보살은 부유각으로 올라와 주자서를 부축했다. 주자서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부유각을 내리면서도 뒤에 서 있는 온객행을 계속해서 돌아봤다. 온객행은 저를 보는 주자서의 눈빛이 간절하여 손바닥을 펼쳐 들어 그를 배웅했다.


주자서는 여인들의 몸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해서 걸었다. 그의 팔을 붙잡은 여인들은 그가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측백나무 숲을 일각 정도 걸어 송문(松門)이 나왔다. 이곳은 누군가의 사당인 모양이다. 주자서가 송문 앞에 서서 문을 열지 않자 옆에 있던 천교와 보살이 송문을 열었다. 송문 안쪽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로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또다시 작은 측백나무 숲이 나오는데, 이곳은 사당 안으로 들어오기 전보다 측백의 향이 더 진했다. 일각 정도 더 걸어 들어가자 재실(齋室)이 나왔다. 재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주를 모신 사당의 정전(正殿) 남문(南門)이 보였다. 두 여인은 주자서를 데리고 사당의 남문을 넘었다.

남문 옆에 작은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북쪽으로 커다란 정전(正殿)이 보였다. 두 여인은 정전의 입구에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도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주자서가 생각했던 사당과는 조금 달랐는데, 사당이라기 보다는 귀족 저택의 외실 같았다.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에 위패는 하나도 없고 평상이 덩그러니 있었다. 평상 양옆에 작은 향로가 있었는데 방금 향을 피웠는지 기다란 향이 몇 개 꽂혀 있다. 주자서는 일단 이곳이 사당이므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은 것 같아 ‘끙’ 소리를 내며 신위가 있어야 할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제례를 하는 것처럼 팔을 들려다 화살을 맞은 부분이 아파 또 다시 신음을 뱉은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다시 팔을 들어 올려 공수하고 세 번 절했다. 주자서는 절을 하고 너무 지쳐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숨을 골랐다. 문간 옆에 서 있는 여인들이 곧 ‘주인’하고 인사를 했다. 사당의 주인이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주요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내가 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바닥으로 금방 꺼지기라도 할 것 같은 유약한 모습은 마치 여인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사내가 절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귀족 집의 자제인지 예를 갖추었다. 주요는 평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팔을 들어 올려 공수하고 말했다.
“주자서, 사당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주요는 ‘흥’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 휘우 뜸하게 평상에 누워 말했다.
“그대라면 들어 봤겠지? 태평호에 관련된 소문을 말이야.”
주자서가 소매를 내리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주요가 깊게 한숨 쉬자 뒤쪽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구강(九江)에서 사갈왕(蛇蝎王)이라 불리십니다.”
다른 여인이 말을 이었다.
“사갈왕께서는 여인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사내에게 화를 내리십니다.”
주자서는 그 말을 듣고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일단 너희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너희 주인이 올 때까지 재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천교와 보살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주자서는 그들의 손길에 휘청거리더니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로 그의 장포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주요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미련한 것.”
그리고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천교와 보살은 사내의 팔을 잡고 일으켜 그를 재실로 옮겼다. 그를 일으키는 동안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축 늘어졌다. 사내를 침상에 눕히고 보살이 그의 옷을 걷어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동여매 놓은 붕대가 전부 피에 젖었다. 천교와 보살은 서로를 보고 한참 고민하다 사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고상은 괜한 투정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들이 백택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얼른 소령으로 향했다. 소령 선창에는 벌써 부유각이 들어와 있고, 참으로 오랜만에 선창과 잇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고상은 훌쩍 부유각으로 뛰어올라 온객행을 찾았다. 온객행은 어디를 갔는지 부유각은 비어 있었다. 뭍으로 나간 것이 아닐 테니 어디 태평호 안에서 누굴 찾는 구나 싶어서 고상은 백택으로 향했다. 정전에 들어서자 주요가 머리에 손을 대고 앉아 있었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요! 내 아이는 봤어?”
주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싫어. 사내라는 것들은 정말.”
고상은 ‘너도 사내 잖아’라고 말할 뻔했지만 다행히 하지 않았다. 크게 공기를 들이마신 고상이 말했다.
“지금은 아파서 그래. 다 나으면 기둥서방을 시켜서…”
주요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아상.”
주요의 부름에 고상이 입을 닫았다.

정전 안으로 천교와 보살이 들어왔다. ‘주인’하고 인사한 두사람은 고상을 보고, 서로를 힐끔 본 다음 보살이 주요에게 다가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고상은 괜히 심통이 나서 말했다.
“우리 유서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알아야 하겠소.”
주요가 보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이 상석에서 내려와 다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말했다.
“사내의 출혈이 심하여 사당에서 쓰고 남은 지혈제를 사용하여 치료하였습니다.”
천교가 옆에서 거들었다.
“짧은 소견으로는 내상이 의심됩니다만….”
천교의 말에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고상에게 말했다.
“그래서?”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주요, 우리 유서는 이제 사람이 아니오. 내 피를 마시고 화사가 되었으니 그리 모질게 굴 것 없어요.”

주요가 고상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고상! 피를 먹였어?”
고상이 주요가 앉은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에이, 파사공자가 영력이 있는 아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내 피는 그저 조금 회복을 도왔을 뿐.”
주요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내가 발견했을 때 그의 피는 사람의 피 냄새였는데?”
고상이 주요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파사 말로는 신선이 겁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였소.”
주요가 작게 코웃음 치고 말했다.
“영력이 있는데 어찌 상처가 낫지 않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고 천교와 보살을 보았다. 천교가 말했다.
“영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인의 겁을 사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보살이 말을 이었다.
“선인의 겁을 사는 것이라면 영력은커녕 요괴 근처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요즘 천존께서는 악수(惡獸)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계시니 요괴라면 싫으시겠지.”
주요는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쩔 수 없네. 너희 그 유서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으니.”
고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응. 주요는 파사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분명히 유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주요가 고상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상, 그가 사람이라면 그를 보내주어야 해.”
고상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는 내 피를 많이 마셔서 온전히 사람이 될 수도 없어.”
주요가 고상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뭘 얼마나 먹였는데 그러는 거야? 가서 보자.”
고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의 시중을 들었다.

주요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고상과 우사첩을 밖에 두고 혼자 재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서는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주요는 양손을 들어 눈 위로 손등을 가져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무지기의 눈을 사용하는 참이다. 한참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주요가 손을 내리고 감았던 눈을 뜨자 그의 눈은 금빛으로 빛났다. 그가 시선을 사내에게 돌리자 사내의 몸 주변에 영력이 보였다. 보통 영력은 한 갑자 이상 수련을 해야만 생기는 것으로 보통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요괴나 신선의 자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보통 천존(天尊)께 처벌을 받는 일이라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주요가 유서에게 다가가자 유서의 영력이 주요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주요는 고개를 갸웃하고 사내의 몸을 감싼 영력이 뭘 하려는 것인지 한동안 지켜보았다. 영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열심히 막고 영력의 존재를 살피려는 기운을 밀어낸다. 주요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사내의 몸 주변을 떠다니던 영력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요는 사내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저 영력이 사내의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요가 한발짝 물러났음에도 주변에 있던 영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사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력이 모두 몸에 흡수되자 덜컥거리던 사내의 몸부림이 멈추었다. 주요가 다가가 그의 몸을 살피자 그의 몸에서 느껴지던 영력이 모두 사라졌다. 주요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만지려고 하자 사내의 몸이 튀어 오르더니 ‘컥’하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피를 토했다. 주요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천교와 보살을 불렀다.
“천교! 보살!”
재실의 장지문이 열리고 천교와 보살이 들어왔다.

피를 토하는 주자서를 발견한 보살이 얼른 다가와 주자서를 일으켜 앉히고 그의 등을 쓸었다. 천교는 물에 적신 영견을 가져와 주자서가 토한 피를 닦아냈다. 주자서는 잔기침을 조금 더 하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보살이 주요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대선(大仙)?”
주요는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감추고 말했다.
“아상이 아주 귀한 것을 주웠구나.”
주요가 비틀거리자 천교가 일어나 주요의 소매를 잡아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대선께서는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사람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주요가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것을 보는구나.”

고상이 문간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슬쩍 재실 안으로 들어왔다. 유서가 피를 토한 것을 보고는 그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달려가 말했다.
“유서! 이게 무슨 일이야?”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에 손을 대고 흔들며 말했다.
“유서야, 서야! 얼른 눈 떠보아라.”
고상이 주요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우리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피를 토한다는 말이오?”
주요가 몸을 돌려 재실을 나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사자형제에게 다녀와야 하겠어.”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 옆으로 가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지기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말이야?”

주요가 고상을 보며 말했다.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피는 그만 먹이는 것이 좋겠어.”
고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내 피는 다섯 갑자의 영력이 모인 영약이라고!”
주요가 고상에게 말했다.
“정말로 요괴로 만들 것이 아니면 그만하라는 소리다.”
고상은 침상에 누워있는 유서를 보았다. 파리한 안색에 입가에 묻은 피가 붉다.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모습에 고상은 겁이 났다.
“주요, 주요… 우리 유서는…?”
주요가 보살에게 말했다.
“보살, 네가 돌봐 주어라.”
보살이 유서를 옆으로 누이고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고상은 침상에 걸터앉아 유서의 손을 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은 고상의 체온보다 높았다. 화사의 체온은 원래 사람의 체온보다 항상 서늘했기 때문에 고상은 유서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주요는 소령 선창에 있는 부유각을 보고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유사혈에 가려던 발걸음을 부유각으로 옮겼다. 온객행은 내실의 휘장을 걷고 있었는데 주요를 발견하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주요가 말했다.
“유사혈에 무엇을 물으셨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천도를 아주 요긴하게 썼습니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셨으면 파사공자께도 보내 드렸을 텐데요.”
온객행이 주요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서왕모께서 아시면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금모원군(金母元君)께서는 자애(慈愛)하셔서 남에 흠은 덮고, 아픔은 보듬어 주시는 분입니다.”
온객행은 작게 코웃음 쳤다.

주요가 자리에 앉아 온객행이 건네는 차를 마시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상이 아주 재미있는 것을 주운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사자형제에게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온객행은 차를 마시며 백택의 측백나무를 보고 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소령에 와보는군요. 측백의 향이 좋습니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태평호에서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온객행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는 부유각을 나와 태평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주자서는 자신의 장포를 서슴없이 벌리며 허벅지에 붕대를 매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주자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자기 마음대로 주자서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붕대를 감는 것이 끝나자 여인은 주자서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인이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가 다치지 않은 팔로 그릇을 받으려 하자 여인은 고개를 흔들더니 주자서의 입가에 탕약 그릇을 댔다. 주자서는 여인들의 시중을 받느라 한참 정신이 없었다. 두 여인이 모두 나가고 방에 켜진 등롱의 빛이 어둡다고 느껴질 즈음 고상이 작은 소반에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고상은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선반을 두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켰다. 주자서가 일어난 것을 보고 한참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부루퉁하게 앉아 있다가 말했다.
“아프지 마! 싫어.”
주자서는 고상의 투정에 부스스 웃어버렸다. 고상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웃으면 좋잖아.”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더니 협탁에 놓았던 선반에 들은 묽은 죽을 건넸다. 주자서가 ‘후후’ 불어 죽을 먹기 시작하자 고상이 말했다.
“삐쩍 말라서 내가 너무 걱정이야. 얼른 살을 찌워야 될 텐데”
그리고는 주자서의 팔과 다리를 만지작댔다. 주자서는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몸이 성치 못해 그런 것이니 심려치 마세요, 주인.”
고상은 주자서가 먹는 것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주인이라는 말 싫다. ‘아상’이라고 불러.”

주자서가 먹다 남은 죽그릇을 소반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요.”
고상이 주자서가 내려놓은 죽그릇을 다시 들어 주자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안돼. 다 먹어야지.”
주자서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자 고상이 숟가락을 들어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가 다시 부스스 웃고 고상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죽을 몇 술 더 떴다. 하지만 입안이 까슬까슬하고 피 맛이 나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고상이 눈치껏 차를 가져다 주자서에게 따라주었다. 주자서는 그것이 기꺼워 또 고상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백택으로 온 이후로 주자서는 금방 몸이 좋아졌다. 다리에 난 열상도 거의 다 아물었고, 이제 팔을 들어 공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머리위로 팔을 드는 것은 아직도 아팠다. 백택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교와 보살은 종종 백택을 나가 물고기나 약초를 구해오고는 했는데 그것을 고상이 이리저리 요리하여 먹었다. 며칠 잘 먹여 놓으니 주자서의 뺨에 몸에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리한 안색에도 혈기가 돌았다.

집안일에는 영 재주가 없는지 음식을 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하였으나 부서진 가구나 집을 고치는 것은 잘했다. 천교와 보살은 그동안 그냥 두었던 백택의 이곳저곳을 수리하는데 주자서를 데리고 다녔다. 주요는 한동안 백택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고상이 온객행에게 물어도 온객행은 말없이 차만 마실 뿐이었다.

보살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유서, 오늘은 백련잎을 따러 가자. 수영은 할 줄 아시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천교가 커다란 소쿠리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파사공자께 부탁하면 되지. 어차피 헤엄쳐서 다 가지고 오지도 못해.”
보살이 얼른 가서 천교를 도우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교교 말이 다 맞지.”
주자서도 눈치껏 소쿠리를 들고 백택을 나섰다. 파사공자의 부유각은 아직도 소령의 선창에 닿아 있었다. 천교와 보살이 소쿠리를 내려놓고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말했다.
“파사공자.”
주자서도 둘을 따라 소매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이 실내에서 휘장을 걷고 나와 말했다.
“무슨 일이오?”
보살이 말했다.
“백련잎을 딸까 합니다.”
천교가 말을 이었다.
“파사공자께서는 연잎 차를 좋아하시지요?”
파사공자는 잠깐 쓸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여 그들이 승선하는 것을 허락했다.

천교와 보살은 영력으로 하얀 연꽃이 가득 핀 습지로 향했다. 주자서는 갑판에 앉아 태평호의 물을 보았다. 천교와 보살은 한참 부유각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갑판을 연꽃 근처에 대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가 놀라서 그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자서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높은 누각에 앉아 보고 있던 온객행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들은 우사첩이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우…우사첩?”
온객행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대는 요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주자서의 눈동자가 한참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뭔가 깨달은 듯 작게 ‘아’하고 말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주자서가 며칠 요양했던 내실로 이끌었다. 그리고 병풍 너머 침상 뒤쪽에 있는 난간에 있는 연잎을 손짓하며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올해 새로 난 백련잎이오.”
주자서가 한참 백련잎을 보고 있다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백련잎을 따러 온 것이 아니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파사공자 감사합니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온객행.”
주자서는 또 한참 소매를 들고 온객행을 보다가 말했다.
“온공자.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부스스 웃었다. 살이 차오른 주자서의 얼굴은 사경을 헤매던 주자서의 얼굴과 달라서 온객행은 신기했다. 왜 고상이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떼를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주자서는 난간을 넘어 걸터앉고는 연잎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조금 작은 연잎의 줄기를 잡았다. 온객행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멈추시오. 맨손으로 따면 가시에 찔립니다. 연대에는 작은 가시가 있어요.”
온객행이 작은 칼을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너무 어린 잎이 아니라 조금은 큰 것으로 잎의 가장자리가 늘어진 것이 가장 좋습니다.”
주자서는 연잎을 놓고 온객행에게서 칼을 받았다. 잔뜩 올라온 대를 몇 개 헤치고 넓은 연잎 아래를 칼로 잘랐다. 연꽃 진액이 실처럼 늘어져 하늘에 나부꼈다. 주자서는 처음 봤다는 듯이 연잎을 들어 온객행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온객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자서를 따라 웃고 있었다. 주자서가 연잎을 따서 옆에 두고 또 다른 연잎을 땄다. 손이 닿는 위치에 있는 연잎을 모두 딴 주자서가 자리를 옮기려고 난간을 넘으려다 발을 헛디뎠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나아가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챘다.
“아! 온공자 고맙습니다.”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주자서가 당황한 듯 말했다. 온객행은 자신의 품에 들어온 주자서의 온기가 기꺼워서 한참 안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안았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게서 방금 딴 백련잎의, 하얀 연꽃의 향이 난다.

蛇苺 第2

抛磚引玉 | 2.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다.

백택은 측백나무숲에 있는 커다란 사당으로 무지기의 사당이었다. 주요는 예전에 태평호의 신으로 모셔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며 사당을 지어주었다. 처음에는 작은 움막 같은 집이었다가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자 제대로 기와를 올린 사당이 되었다.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 만큼 커진 뒤에 무지기는 그곳에 살면서 신령한 약초를 모아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고,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며 과거 우왕(禹王)에게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중이다. 그는 원래 상수(湘水)에 수원대선(水源大仙)이었는데 어떤 죄를 짓고 이곳 태평호에 유폐(幽閉)되었다. 그의 죄가 무엇인지 아마 온객행은 알지도 모르겠다.

고상은 백택의 남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소리쳤다.
“무지기!”
정전의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주요가 고상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화가 난 것 같은 주요의 목소리에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주요! 화내지 말고 일단 들어봐.”
주요가 고상에게 자리를 권하고 찻잔을 꺼내 고상에게 내밀었다. 고상은 찻주전자를 들어 주요의 찻잔과 자신의 찻잔을 채우고 앉아 입을 축였다. 주요가 고상을 빤히 보자 고상이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주요, 주요! 여태 사내에게 여인들을 빼앗겼잖아요.”
주요가 인상을 쓰며 고상을 노려보았다.
“에이, 주요! 그니까 이 사내를 이용해서 여인을 낚으면 되잖소.”
고상의 말에 주요의 얼굴이 풀어졌다.
“사내의 생김새가 나쁘지 않으니…”
주요가 손을 앞으로 내젓고는 말했다.
“아상, 아상. 그만.”

고상이 턱을 괴며 말했다.
“주요, 그 사내는 내게 은혜를 입었으니 내 말을 들어줄 거예요.”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작게 코웃음 쳤다.
“사람은 요괴를 두려워해. 요괴라면 사람을 잡아먹고 탐욕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지.”
고상이 자리에 바로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는 찻잔을 비워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사람에게 불리는 이름은 언제라도 바뀌는 법.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은 또 몇인가?”
고상은 양손으로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갸웃거리다 손을 내려놓고 ‘히히히’하고 웃었다.

사내는 또 며칠간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화사가 준 피를 마시고 조금 나아졌다. 온객행은 가끔 들러 그의 입을 젖은 영견으로 축여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상에 누워 살아있는 것의 숨소리를, 살고자 하는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것이 온객행에게 위안이 되었다. 저 미물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살고자 하는 것일까? 목숨이란 무엇인가? 수백 번 수천 번 물었던 질문에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온객행은 내실의 휘장을 드리워 실내를 어둡게 하고 사내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내실 안에서 사내의 숨소리만 들었다. 그러다 고상이 찾아와 사내에게 피를 먹이면 고상에게 사람을 요괴로 만들 참이냐며 잔소리를 했다.

온객행은 문간의 휘장을 걷어 고상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고상은 어두운 실내를 보고 한참 잔소리를 하다 가져온 찬합을 내려놓고 사내가 누워있는 평상으로 갔다. 온객행은 가져온 찬합을 열어 보았다. 복숭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주요가 보낸 것이다. 복숭아를 들어 향을 맡아 보았다. 올해는 초여름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아 복숭아의 색이 더 빨갛고 향긋하다. 고상이 사내의 이불을 매만지며 말했다.
“자서야 어찌 눈을 뜨지 못하느냐.”
고상은 온객행이 알려준 사내의 이름을 퍽 다정하게 부른다.

고상은 또 손가락을 물어뜯어 사내의 입안으로 피를 떨어뜨렸다. 온객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많이 먹이면 사람도 요괴도 아니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고상이 ‘흥’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미 사람도 요괴도 아니오. 자서는 사람인데 이 영력은 어디에서 난 것이지?”
온객행이 주자서가 누운 평상으로 다가가 말했다.
“하늘의 누군가가 겁을 사는 것일지도 모르니 그쯤 하게.”
고상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선인(仙人)이 겁을 사는 것이면,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에게 은혜를 입힌 것이네?”
고상은 몸을 숙여 주자서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기왕이면 서왕모(西王母)의 아이였으면 좋겠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왜? 고향인 옥산(玉山)으로 돌아가려고?”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정말 좋겠다. 히히히.”
주자서는 고상이 다녀간 날 늦은 저녁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두워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주자서는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실내는 조용했다. 휘장으로 겹겹이 감싸진 실내에는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군영에서 그를 찾고 있을 것이다. 군영에서 도망하였다고 하면 그와 같은 여(閭)에 속한 자들이 오제령(伍制令)으로 연형(蓮刑)으로 처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분군(死憤軍)에 포함된 자들은 서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어 덮어주려고 할 것이다. 주자서는 터져 나오는 깊은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남자가 물었다.
“기껏 살려주었는데, 어찌 한숨이시오?”

주자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도 인영을 찾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주자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이 없는 남자의 얼굴은 조금 무섭기까지 했는데 주자서는 닿았던 시선을 얼른 돌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남자는 또 한참 주자서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태평호.”
주자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을 본 온객행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을 나갔다.

‘어떻게 태평호까지 오게 되었을까?’ 주자서가 소속된 군영은 선우산(仙寓山) 바로 아래 있다. 여신(餘燼; 패잔병)을 쫓다 황산(黃山)까지 닿은 모양이다. 군령(軍令)을 어겼으니 돌아가면 또 벌을 받겠구나 생각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전사자(戰死者)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되었으면 고향에 있는 모친과 당질은 죄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주자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자는 곧 어디서 가져왔는지 복숭아를 가져와 얼기설기 깎아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한참 내민 복숭아를 보다가 받아먹었다. ‘그래, 벌써 복숭아가 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입에 넣은 복숭아는 달고 향긋하다. 언제인가 군영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었던 복숭아는 시고 떫었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복숭아를 언제 먹었었는지 이제는 그 기억이 까마득하다. 주자서는 남자가 주는 대로 복숭아 하나를 모두 먹었다. 남자는 주자서가 복숭아를 먹는 것을 또 빤히 보다가, 영견에 물을 묻혀 주자서의 손을 닦아주었다. 또 한참 평상 앞에 앉아 주자서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흠’하고 방을 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방안을 살펴보았다. 귀족이 풍류를 위해 잠시 기거하는 거처인 모양이다. 주자서는 이불을 걷어 상처를 보았다. 입고 있는 하얀 장포를 걷어 허벅지를 보았다. 바지는 어디에 갔는지 바로 맨 살이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는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주자서는 앞섶을 풀어 어깨의 상처를 보았다. 상처는 거의 아물어 있었다. 주자서는 다친 어깨를 들려다 ‘윽’ 소리를 내고 어깨를 잡았다. 딱히 뼈를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팔을 들 수가 없었다. ‘큰일이다.’ 상처를 입었으니 군영에 돌아가면 그 처지가 곤란할 것이다. 주자서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느라 자신의 상처가 고작 며칠 새에 나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했다.


온객행은 오랜만에 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평호 안에는 해화상(海和尙; 물의 요괴)이 몇 있는데 그중 사자헌(沙子軒)과 사자상(沙子尙)은 형제이다. 그들은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아 사람과 요괴, 신선 할 것 없이 떠도는 소문과 각종 지식을 모아 그들이 사는 유사혈(流沙穴)에 잔뜩 모아두고 내킬 때마다 꺼내 본다. 그들이 축적한 지식은 그 양이 방대하여 상선이나 원군(元君)이 찾기도 하였다. 온객행은 가져온 찬합에서 복숭아를 꺼내 사자헌에게 건넸다. 사자헌은 복숭아를 요리조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천도(天桃)가 아닌가? 어디에서 구했나?”
온객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주요는 서왕모께서 아끼는 대선(大仙)이었지요.”
사자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상수에서 후토를 만나지 않았다면….”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사자헌과 사자상은 복숭아를 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 온객행이 그들을 빤히 보자 사자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선조를 구할 것도 아니고 등선할 것도 아니니 오래 살아 무엇 하겠는가?”
사자헌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 죗값으로 또 몇 갑자를 더 살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소.”
온객행이 작게 웃었다. 사자상이 말했다.
“곧 끝나겠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헌이 물었다.
“이것은 작별의 선물인가?”
온객행은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뭐… 겸사겸사.”
사자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사자상이 말했다.
“길어질 이야기인가?”
온객행은 눈을 굴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자헌이 말했다.
“천도로는 차 한잔 정도의 시간밖에 살 수 없네.”
사자상이 거들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야.”
온객행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날이 밝아 고상이 부유각으로 갔을 때 주자서는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고상은 몸에 물기를 다 털지도 않은 채로 실내에 들어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 일어났구나.”
그리고는 주자서의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몸을 살폈다. 주자서는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고상은 개의치 않았다. 고상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 좀 일어나봐, 걸을 수 있겠어? 다리에 상처는 다 나았나?”
고상은 주자서의 이불을 걷고 장포를 걷으려고 했다. 주자서는 놀라서 고상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주인!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고상은 활짝 웃으며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뭘 이제 와서 내외하는 거야? 너를 씻기고 입힌 것은 나인데. 귀여운 것.”
그리고는 옷을 걷어 상처를 살폈다. 주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옷으로 몸을 가리려고 했다. 고상이 말했다.
“이상하게 빨리 낫지 않네. 보통 하루 이틀이면 다 나아야 하는데.”
그러더니 주자서의 앞섶을 벌려 어깨에 있는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 그 근처를 눌러보았다.


“윽!”
주자서가 신음하자 고상은 놀라서 손을 떼고 말했다.
“아직도 아프단 말이야? 정말 이상하네.”
고상은 평상에 걸터앉고 말했다.
“너는 이제 내 아이이니, 음… 이름을 뭐라고 할까?”
주자서가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제 이름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주자서입니다.”
고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주자서는 죽었어.”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
“내가 네가 입고 있던 찰갑을 너희 군영 근처에 두고 왔어.”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어… 어찌!”
고상이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네가 내 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 줄 알아? 아마 너의 반은 이미 화사(花蛇)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주자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달싹이자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줄 터이니 걱정 말아라. 내 아이야.”
주자서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내게는 이미 모친이 계시오.”
고상은 주자서에게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그래, 그래. 내가 너의 모친에게도 후하게 사례(射禮)하마.”
주자서는 고상의 말에 역시 입만 달싹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곧 내실로 들어온 온객행이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아상, 어찌 천륜을 이런 식으로 맺는다는 말이냐?”
저 남자는 고상을 상전이라고 말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를 한다.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말했다.
“파사공자, 그러지 말고 여기 음… 청강하 근처에는 버들이 많으니 유서(柳絮)라고 부를까? 이제 막 요괴가 되었으니 솜털처럼 귀엽지. 유서야?”

주자서는 고상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이불을 더 끌어 덮었다. 고상이 ‘히히히’하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서 맥 좀 짚어봐. 또 누가 알아? 나보다 먼저 신선이 될지?”
남자는 평상으로 다가와 걸터앉고 주자서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의 손은 방금 찬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차가웠다. 남자의 손길에 주자서가 움찔하자 고상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우리 유서, 괜찮아. 겁먹을 것 없다.”
주자서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소녀가 자신을 아이 어르는 듯이 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남자가 주자서의 손목을 놓아주고 말했다.
“정말 영력이 있네. 어쩌면 아상 너보다 더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남자는 고개를 숙인 주자서의 얼굴을 좀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천도는 어디에 뒀어? 내가 유서 주려고 어젯밤에 가져다 놨는데….”
온객행이 탁상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유사혈에 가져다줬어.”
고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온객행! 귀한 천도를 사자(沙子)형제에게 전부 다 줬단 말이야?”
온객행이 차를 준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탁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대체 뭘 물으려고 천도를 가져다 준거야? 그건 주요가 나에게 준 천도였으니까 어서 말해!”
온객행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사람이 천도를 먹으면 어찌 되는지 물었지.”
고상이 온객행이 따라준 차로 입을 적시고 말했다.
“그러게. 사람은 영력이 있는 경우가 드무니 천도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상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영력을 담을 곳이 있어야 깃드는 것이니까.”
고상이 온객행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온객행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온객행이 뜸을 들이자 고상이 온객행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영력을 담을 그릇이 없으면 사람 몸속에 남은 영력이 사람의 영혼을 태울 수도 있다는데?.”
고상이 고개를 돌려 평상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영혼이 탄다고? 안 되는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사람의 영혼이 타면 먼저 육신이 쇠하고 그다음에 정신이 흩어진다는데… 흠.”

고상이 주자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육신이 쇠하고… 정신이 흩어져?”
주자서는 온객행과 고상을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상이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벌써 화사(花蛇)가 된 건가…? 너무 빠른데?”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쥐고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보통 사람에서 요괴가 되면 가장 먼저 그 눈동자가 동물의 것으로 바뀐다. 고상은 주자서의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았지만 주자서의 눈동자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놓아주고 말했다.
“내 피를 마셨으니 화사가 돼야 하는데….”
고상의 말에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피를 마시다니….”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 치는 원래 사람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사람이오. 평생 사람이었소.”

고상이 주자서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온객행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주요에게 물어봐야 하겠어. 우리 중에 제일 오래 살았잖아.”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잡아먹겠다고 하면?”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다 수를 써 놓았지.”
그리고 주자서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호이(好餌).”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자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여인을 낚을 좋은 미끼!”
온객행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미끼?”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요에게 여인을 데려다 줄… 주요가 뭐라고 했는데 무엇이더라… 아! 그래. 기둥서방!”
고상의 말에 온객행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고상을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상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는 주자서를 위해 온객행은 자신이 입던 옷을 몇 개 추려 주자서에게 입혔다. 잘 먹지 못해 많이 말라 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 꽤 신장이 컸다. 흰색 내의와 중의를 입히고 그 위에 짙은 푸른색 장포를 입혔다. 옷을 다 입히자 금방 고상이 들어와 주자서의 머리를 빗겼다. 고상이 불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잘 매만지지 못해. 이런 건 주요가 정말 잘하는데….”
온객행이 함에서 비단 끈을 가져와 주자서의 머리를 대충 반으로 묶으며 말했다.
“백택까지는 어찌 가시겠소? 그대의 유서는 아직 물에 들어가면 안될 것 같은데….”
주자서는 두 사람이 하는 대로 두었다. 아무래도 주자서는 죽은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죽었다고 생각하니 이 곳이 지옥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고상이 불평하며 말했다.
“부유각을 백택이 있는 선창에 대면 되잖아! 칠석이 지나면 징계도 끝나는데 슬슬 뭍으로 나오는 것이 어떠하오?”
고상의 말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은 주자서를 탁상으로 데려가 앉히고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너는 내 아이니까, 내 말을 잘 들으면 된다.”
고상은 주자서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일단 생김새는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좀 먹여서 살을 찌워야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주자서의 뺨을 툭툭 쳤다.
“사람의 여인들은 이런 얼굴을 좋아하나?”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자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고상이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내 눈에는 귀여운데? 이제 막 트기 시작한 버들개지 같아. 히히히.”
온객행은 고상이 주자서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행동하면 유서가 아상 너를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고상이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유서는 나의 아이이니 나를 제일 많이 좋아해야지.”
주자서가 고상을 힐끔 보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주자서가 웃는 것을 본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을 양손에 가두고 말했다.
“방금 그거 뭐야? 웃으니까 더 귀여워. 유서 어서 더 웃어봐.”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상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고상은 영력을 조금 사용하여 주자서의 얼굴을 바로 했다.
“유서! 어미의 말을 들어야지.”
주자서가 작게 숨을 들이켜고는 힘겹게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고상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이게 아니야! 방금처럼 웃어보란 말이야!”
고상이 윽박지르자 옆에 있던 온객행이 다가와 고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상, 그는 사람이야. 다른 미물과는 달라.”

고상은 순순히 주자서를 놓아주고 입을 내밀고 씰룩이며 말했다.
“대체 뭐야! 정말 짜증나.”
고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 내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풍덩’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온객행은 내실 밖으로 나가 저 멀리 사라지는 고상의 모습을 보았다. 고상의 실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녀가 데려온 미물 중에 사람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온객행은 멀뚱히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며, 저 사람도 고상이 버린 작은 미물들처럼 본인이 거둬 드려야 하는 것인지 고심했다. 주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조금 눈에 익어 온객행은 당황스러웠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째서 주자서에게서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것일까? 그의 이름과 닮은 유서라는 이름 때문일까?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찻잔을 권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앉아서 방금 고상이 사라진 휘장 너머의 태평호를 보았다. 온객행의 고향인 서호(西湖)에서 그와 함께 이렇게 앉아서 차를 마셨던 기억이 났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연꽃잎차를 만드는 백련잎을 곧 따겠구나. 그는 백련(白蓮)처럼 새하얀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온객행과 주자서가 동시에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둘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며 태평호를 바라보았다.

蛇苺 第1

走爲上 | 1. 도망치는 것이 상책

온객행은 공공(共工) 상류(相柳)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목놓아 울었다.
“영지초(靈地草)를 영지초를 먹이면…”
공공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고작 몇 날을 더 살리고자 곤륜산(崑崙山)의 노금(露禽)을 번잡스럽게 하겠다는 것이냐?”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고 목놓아 울었다.
“아서… 아서! 흑흑”
상류가 말했다.
“그대는 사사로이 영력(靈力)을 사용하여 인간의 생애(生涯)를 어지럽혔으니, 그대를 다섯 갑자(甲子; 60년) 동안 태평호(太平湖)에 봉(封)한다.”
온객행은 반항하지 않고 그저 사졸들이 그를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눈에서는 한 갑자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태평호 위에 부유(浮游)하는 누각 위에 그는 물 밖을 벗어 날 수 없는 징벌에 묶여 있다.

고상(顾湘)은 공공께서 온객행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 둔 화사(花蛇)이다. 이제 막 다섯 갑자를 살아낸 이 어린 요괴는 궁금한 것이 많아 태평호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다른 요괴들을 귀찮게 했다. 무지기(無支祁)는 원래 태평호에 살고 있던 아주 오래된 물의 요괴로 얼마나 살았는지 아는 요괴가 없다. 그는 좀 알 수 없는 취향을 가진 요괴였다. 여인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그래서 스스로를 여인처럼 꾸미고 다녔다. 그렇다고 여색(女色)을 밝혀 겁탈하거나 취하는 것이 아니고 돌보아주고 아껴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남아준 여인은 없었다.

예전에는 태평호 근처에도 사람이 많았었다고 하지만 모두 옛날이야기다. 사람의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구강(九江)의 물길이 붉어졌다 맑아진 이후로 태평호는 물론이고 남쪽에 있는 황산까지 사람의 씨가 말랐다. 깊은 골짜기 사이에 있는 태평호는 옛날부터 산세가 험해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아 물고기가 많고 짐승이 많이 살았다. 환란을 피해 산속으로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호수 근처에 작은 마을을 몇 개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하나둘 조금씩 보였는데, 벌써 세 번의 가을이 지나는 동안 고상은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누각에 파사공자께서는 요즘 어때?”
무지기가 고상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고상은 옆에 있는 풀꽃을 뜯어 꽃잎을 하나둘 떼고는 말했다.
“똑같지 뭐. 그래도 이제 울지 않으니까 괜찮아.”
무지기가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모르겠네.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걸지도.”
고상이 고개를 돌려 무지기를 보며 물었다.
“주요(朱幺) 그게 무슨 소리야? 우는 게 낫다니?”
주요가 돌아간 고상의 머리를 바로 하고 말했다.
“앞에 봐.”
그리고 또 한참 고상의 머리를 매만지다 말했다.
“차라리 눈물이 나면, 알 수 있잖아.”
고상은 인상을 쓰며 다시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았다. 무지기는 가끔 파사와 꼭 같은 표정을 한다. ‘흥!’하고 고상이 코웃음을 친 다음 주요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 태평호 안으로 들어갔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상을 보며 말했다.
“곧 단오절인데 우리도 술이라는 것을 마셔 볼까?”
고상이 주요를 보며 말했다.
“단오절에 술을 마시면 본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주요가 방금 예의 그 표정을 설핏 짓고는 금방 얼굴색을 바꾸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내 본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어.”
고상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승천이라도 할 셈이야?”
주요가 고상이 뽑아 놓은 꽃을 주우며 말했다.
“하늘에 가면 그는 나를 알아볼까?”
고상은 이 노인네의 헛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태평호에 묶여 있는 이 요괴들은 하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지 못할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미련한 것들이다.

고상은 누각 위로 뛰어올라 몸에 있는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파사(巴蛇)!”
온객행이 장지문을 열어 고상을 힐끗 보고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고상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로 누각 위로 올라오자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몸을 다 말리고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고상은 온객행을 못마땅하게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온객행은 얼어 죽을.”
그녀는 온객행이 막 마시다 남은 차를 들고 마시며 말했다.
“대체 태평호에 있는 요괴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미련한지…”
온객행이 고상의 앞자리에 앉으며 영견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고상은 온객행이 하는 대로 시중을 받다가 말했다.
“이제 곧 다섯 갑자가 다가오는데 어찌 하시겠소?”
온객행이 비워진 고상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말했다.
“주요가 사는 곳은 어떠하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노인네는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사는 곳 같소.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소. 그것도 사람의 길이 끊겨 이제 구할 길도 없게 되었소.”
온객행이 고상을 보며 물었다.
“길이 끊기다니 무슨 소리야?”
고상이 탁상에 턱을 괴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났는가 보오. 왜 몇 해 전에 구강의 물길이 붉지 않았소? 그것은 사람의 피였소.”
온객행은 태평호에 갇혀 있었으니 구강의 물이 붉어진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고상은 구강은 물론이고 황산 근처에 있던 커다란 성곽에도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일 뿐, 예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은 고상을 탐탁지 않게 만들었다.


후발 부대와의 통신이 끊겼다. 산속에 잠복하고 있던 정예부대의 기척이 사라졌다. 민심이 들끓어 전쟁만은 안된다고 울부짖던 그의 부친과 백부는 형장에서 그 생을 마감하였고, 고향에 남은 모친과 이미 전장(戰場)에서 스러진 종형제의 어린 당질을 위해 주자서는 전장으로 향했다. 벌써 몇 해 동안 지지부진(遲遲不進)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병법을 모르는 사졸이 보아도 이 전쟁은 탐욕에 의해 사사롭게 발발(勃發)했다.

구강을 중심으로 천 리 밖까지 사람이 없다. 흉년으로 배급으로 나오는 마른 쌀은 하루에 한 번이면 다행이고, 기병(騎兵)이 타던 말의 반 이상을 벌써 잡아먹었다. 지원을 나왔다는 보병은 이제 갓 지학을 넘은 소년들이고, 장군이라는 자는 우유부단하고 지세(地勢)를 읽지 못해 번번이 패한다. 여기서 멈추고 도성(都城)으로 돌아가면 장군의 목이 달아날 테니, 으레 겁을 먹고 서로의 나라를 좀먹고 있는 이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자서는 기병 정예부대 일원 중의 하나였으나, 그가 말을 잃은 지는 몇 해가 지났다.

그는 있는 자리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영(陣營)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가 숲속에서 이리를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수컷 이리는 주자서를 보자마자 주둥이를 찌그러뜨려 위협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은 조금 무딘 장검과 예리한 단검이 전부라서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숲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숲을 나오자마자 적군의 진영에서 그를 발견하여 그가 있는 쪽으로 화살을 쏘아 댔다. 주자서는 화살과 이리를 동시에 피하려다 발을 잘못 디뎌 절벽에서 떨어져 호수로 강으로 떨어졌다. 마구 쏘아 대는 화살에 어깨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그가 떨어진 곳은 호수였는지 ‘풍덩’하는 큰 소리와 함께 주자서의 의식도 점멸하다 희미해졌다.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뭍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주자서는 가슴과 어깨 사이에 맞은 화살의 끝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맞은 허벅지를 보았다. 화살을 맞은 줄 알았으나 그저 스쳤을 뿐인지 열상에 출혈이 심했다. 그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다리를 물 밖으로 빼냈다. 원하지 않는 ‘끙’하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주자서는 눈꺼풀을 계속해서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금방 허사가 되었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온객행은 주요가 가져온 술을 부유각에서 함께 마셨다. 과거 그와 지내던 어느 재주 많은 여인네가 그에게 술 담그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태평호의 맑은 물과 구기자(枸杞子)로 담근 홍주로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그저 그 여인이 이 술을 태평홍주라 불렀으니 그들도 그렇게 불렀다. 주요가 술잔을 비우더니 ‘킁킁’하고 냄새를 맡았다. 온객행은 빈 주요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무엇을 달래시려고 단양절(端陽節) 밝은 햇살에 술잔을 비우십니까?”
주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고상은 어디 갔지요?”
온객행이 주요의 불편한 기색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어디에서 혼을 부르고 있겠지요.”
그리고 자기 잔에 홍주를 따라 마셨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피 냄새가 납니다. 사람의 피 냄새예요.”
온객행은 주요의 말에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주요는 곧 태평호로 몸을 던져 피 냄새가 나는 근원을 찾았다. 청강하(靑崗河)의 물길은 황산에서 시작되어 태평호로 흘러 들어온다. 황산은 산세가 험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람의 인기척은 매우 드문 일이다. 주요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뭍에 걸려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가죽을 덧댄 찰갑을 입었다. 허벅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근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인간에게 다가간 주요는 상처를 살폈다.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심해졌는지 안색이 파리하다. 어깨에 맞은 화살은 뽑지 않아 출혈이 심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두면 이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태평호는 앞으로도 별일 없이 아주 평화로울 것이다. 주요는 쓰러진 사람을 앞에 두고 멀뚱히 그 사람을 보기만 했다. 햇살 아래 창백한 사내는 여인처럼 퍽 가녀리다. 마치 며칠 아니 보름은 피죽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고상이 불쑥 물속에서 나타나 사내를 보며 말했다.
“사람이네?”
주요가 고상을 보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눈을 굴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사내인가 보군.”
주요가 고상 곁으로 다가갔다. 고상은 물 밖으로 나와 옷에 물기를 털어내고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요는 고상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태평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운명은 거기까지 인 것이다. ‘여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인이었다면….’이라고 생각한 주요는 다시 태평호를 부유하는 누각으로 갔다. 온객행은 이미 가져온 술 한단지를 모두 마셨는지 새로운 단지의 붉은 천을 걷고 있었다. 그가 술병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사람입니까?”
주요는 영력으로 물기를 날려버린 후에 다시 자리에 앉아 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요를 힐끔 보고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웠다.

고상은 사람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주요가 마지막에 데리고 있던 여인은 어부와 눈이 맞아 주요가 아끼는 비단 천을 들고 도망갔다. 주요는 며칠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더니 며칠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나와 온객행과 술을 마셨다. 그 전보다 조금 더 자주 온객행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서 술을 마셨다. 고상은 파사와 무지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대체 이 미물(微物)의 어느 부분이 좋아 사랑이라는 것을 한다는 말인가? 고작 한 갑자의 인생도 겨우 살아내는 못난 미물을.

고상은 쪼그리고 앉아 사내의 코에 손을 가져갔다. 미미하게나마 아주 작게 몰아쉬는 숨이 느껴졌다. 고상은 그렇게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미물의 숨이 흩어지는 것을 구경했다. 얼마나 그렇게 구경했을까 갑자기 사내의 몸이 덜컥거리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고상은 내버려 두려고 하다가 조금 겁이 났다. 혹시라도 서왕모께서 미물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벌을 하실 지도 모를 일이다. 고상은 ‘쯧’하고 혀를 찬 다음 손가락을 물어 뜯어 그 피를 사내에게 먹였다. 요괴를 죽여 취하는 피는 보통 사람에게 독이지만 요괴가 원하여 베푸는 피는 영약(靈藥)이다.
“나의 다섯 갑자 영력이 모인 피이니 너는 내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고상은 입안 가득 피를 짜낸 뒤에 사내의 목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사내는 목이 말랐는지 금방 화사의 피를 삼켰다.

고상은 사내의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을 조심스럽게 뽑아내고, 그의 갑옷을 벗겼다. 얼마 동안 밥을 먹지 못했는지 사내의 몰골은 조금 불쌍할 정도였는데 고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옷을 찢어 상처가 난 곳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내의 상처를 모두 동여맸을 때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고상은 ‘흠’하고 고민한 후에 사내를 태평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자는 사내이니 주요가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태평호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한 곳은 주요가 지내는 백택(栢宅)이 아니면 부유각(浮游閣)뿐이다. 주요는 사내를 싫어하니 그래도 온객행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주요는 고상이 사내를 데리고 부유각으로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온객행이 그를 배웅하려 했지만 주요는 온객행의 인사도 받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고상이 낑낑대며 사내를 부유각에 올려 놓았다.
“파사! 내 선물이야.”
온객행은 고상의 호칭에 작게 웃고는 말했다.
“단양절 선물이라면 어쩌지… 난 사람을 먹지 않아.”
고상이 물을 털며 말했다.
“사람을 먹으면 영력이 강해진다 하던데 정말이야?”
온객행이 쓰러진 사내를 심드렁하게 보며 말했다.
“…아마?”
고상이 물었다.
“몇십 갑자 살면서 사람도 안 먹어 봤어?”
온객행이 고상의 옷에 묻은 물을 영력으로 날리며 말했다.
“아상, 사람을 먹은 요괴는 영원히 죽지 못해.”
고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만해! 이제 그만해!”
온객행은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고상은 낑낑대고 사내를 온객행의 처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이렇게 삐쩍 말랐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뱃속에 금이라도 들었나?”
그러더니 사내를 내려놓고 사내의 배를 꾹꾹 눌러보았다. 사내는 움찔하더니 ‘윽’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자신의 배를 만지는 소녀를 발견한 사내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몸을 틀었다가 그대로 다시 풀썩 쓰러졌다. 고상은 바닥에 거의 헐벗은 채로 쓰러진 사내를 물끄러미 보다가 처소의 문간에서 고상을 바라보는 온객행을 보았다.
“실내에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왜 이리로 데려온 거야? 백택으로 데려가야지.”
고상이 몸을 작게 떨며 말했다.
“안돼. 그럼 무지기가 잡아먹을지도 몰라.”
온객행이 ‘하’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주요는 사내라서 안 먹을 걸?”
고상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쯧쯧. 이렇게도 모른다니까. 여인이면 아까워서 못 먹지만 사내라면 아마 고민할 걸?”
온객행은 고상의 말에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고상이 처소를 나가며 말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먹일 것을 가지러 백택에 다녀올 테니 그동안 내 아이를 잘 돌봐주시오.”
온객행은 고상이 사내를 부르는 호칭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사내를 들어 평상에 눕혔다. 제법 묵직한 것이 영력을 가진 모양이다. 다 헝클어진 머리에 천을 얼기설기 둘러 놓은 몸, 바지만 겨우 입은 모양새가 이상하여 온객행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제일 낡은 내의 장포를 꺼내 사내에게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실내라고 해도 거의 사방이 다 뚫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부유각에 이렇게 엉망으로 다친 사람이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고, 고상이 ‘내 아이’라고 말하며 감싸고 도는 것이 못마땅해 온객행은 처소에서 나와 누각을 올랐다.

방금 전까지 주요와 마시던 술이 그대로 탁상 위에 남아있다. ‘단양절이 지났으니 점점 무더워지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이맘때 복숭아가 참 맛있지.’ 또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홍주는 언제 담근 홍주일까? 구기자가 열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객행은 술잔에 담긴 붉은 홍주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그리던 이의 얼굴도 이름도 희미하다. 온객행은 겁이 많아 그를 따라가지도 못했다.
“사람과 요괴가 가는 저승은 다르다고 하던데. 그대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사람의 저승은 견딜만하오…?”
온객행은 술잔을 들어 비웠다.
“술로써 그대를 잊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술을 전부 마셔 없앨 텐데.”
온객행은 작게 웃었다.


주자서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는 한참 주자서에게 무언가 설명해 주었지만, 주자서는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자서는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다시 꺼지려는 정신을 힘겹게 다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주자서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한참 기침을 했다. 불쑥 내밀어진 찻잔을 받아 마시고 조금 더 기침을 한 후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ㄴ…누…누구시오?”
주자서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근처에 있던 탁상에 가서 앉은 남자는 새파랗게 시린 옷을 입고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주자서를 보았다. 순간 살기를 읽은 주자서가 뭔가 더 말하려고 했으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고상이 방안에 들어오자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기침을 하고 있었다. 고상이 사내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아이야! 일어났느냐?”
사내는 고개를 들어 고상을 보았다. 사내의 입가에 피가 맺힌 것을 본 고상이 말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은 모두 베풀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주자서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아이. 너는 내 아이다. 앞으로 내가 아껴주마.”
그리고는 사내를 덥석 끌어안았다. 사내는 어안이 벙벙하여 탁자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는 온객행을 보고 기시감이 들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지?’ 소녀는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살렸으니 앞으로 너는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거라.”
주자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소녀가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왜? 이제 와서 봇짐이라도 내놓으라고 할 참이냐? 이래서 미물이란….”
뒤에 있던 남자가 소녀에게 말했다.
“그러게 왜 구하였느냐?”
소녀가 뒤돌아 남자를 보며 말했다.
“서왕모께서 왜 베풀지 않았냐고 묻지 않으실까?”
남자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의 생애를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자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어쩌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만약 죽었다면 지금 주자서가 느끼는 이 고통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온 세상이 새카맣게 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자서는 상태가 조금 나았다. 일단 뜨겁게 달아오르던 상처가 조금 가라앉았고 꼼짝할 수 없었던 몸이 조금이나마 움직였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주자서는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물을 가져다 놓았다. 주자서는 무심결에 다친 팔을 뻗다가 ‘윽’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장지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주자서를 보더니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아직 기혈이 미비하니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좋겠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남자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벌떡 일으켜 평상에 앉혔다. 남자는 협탁에 있는 물잔을 들어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다치지 않은 팔로 물잔을 잡고 마셨다. 남자는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물 주전자를 들어 몇 번 더 물잔을 채워 주었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나는… 주자서라 합니다.”
남자는 ‘흠’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이 없다.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 주자서가 다시 말했다.
“살려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주인은 어디 계십니까?”
남자는 주자서의 호칭에 ‘하’하고 작게 웃은 뒤에 답했다.
“그대의 주인이라면 아상 말이오?”
주자서가 작게 말했다.
“아…아상?”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평상 위에 눕히며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고상이오. 내 상전이지.”
주자서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부러 묻지 않았다.

모과

詩經 國風 衛風 木瓜
시경 국풍 위풍 모과

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모과를 주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복숭아를 주기에 어여쁜 구슬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자두을 주기에 어여쁜 옥돌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길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더보기
  1. 경(瓊)은 옥이 아름다운 것이요, 거(琚)는 패옥(佩玉)의 이름이다.
  2. 요(瑤) 아름다운 옥구슬이다.
  3. 구(玖) 역시 아름다운 옥구슬이다.

위의공(衛懿公)이 학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적족(狄族)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싸움 중에 죽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송환공의 도움으로 란을 피해 하수를 건너 조읍(漕邑)으로 들어갔다. 이에 제환공(齊桓公)이 3국의 제후와 군사들을 소집하여 각기 삼태기와 가래를 휴대하게 한 다음 위나라로 행군했다. 위문공 훼(燬)가 멀리까지 나와 제환공의 일행을 마중했다. 위문공은 그때까지 아직 삼베로 만든 군주의 의복과 비단으로 만든 관을 바꾸지 않고 상복으로 계속 입고 있었다.

제환공이 보고 측은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위나라 도성을 어디에다 쌓아야하냐고 물었다. 문공이 초구(楚丘)를 정했으나 나라가 망해서 성을 세우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바라만보고 있다고 대답했다.제환공은 그 날로 3국의 병사들에게 초구로 이동하여 위나라를 위하여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다시 재목을 제나라에서 가져오게 하여 종묘를 모시는 사당을 짓게 하고 그 사당의 문에 위나라를 초구에 봉한다는 뜻의 ‘위봉(衛封)’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위문공이 제환공에게 위나라의 도성과 종묘를 모시는 사당을 세워준 은혜에 감격하여 〈모과(木瓜)〉라는 시를 읊어 노래했다. 출처

張子曰衛國, 地濱大河, 其地土薄. 故 其人氣輕浮, 其地平下. 故 其人質柔弱, 其地肥饒, 不費耕耨. 故 其人心怠惰. 其人情性 如此則其聲音 亦淫靡. 故 聞其樂 使人懈慢而有邪僻之心也. 鄭詩 放此
장자 가라사대 위나라가 땅 가에 큰 하수가 있어서 그 땅이 토박하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의 기운이 가볍고 떠있고, 그 땅이 평평하고 낮음이라. 그러므로 그 사람의 바탕이 유약하고, 그 땅이 비옥하고 기름져서 소비하고 밭 갈고 김매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들의 마음이 게으르니라. 그 사람들의 성정이 이와 같으면 그 성음이 또한 음탕하고 어지러우니라. 그러므로 그 음악을 들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게을러지게 하여 사벽한 마음이 있느니라. 정나라 시도 이와 같으니라. 출처

공자가 정풍의 시를 깠는데, 장자 역시 위풍의 시를 깠다. 그래서 일까? 정풍과 위풍이 너무 내 취향이다.남녀가 서로 주고 받으며 부른 유행가라고 하는데 귀엽다. 애초에 시경이라는 책이 북방에서 유행하던 유행가를 모은 것이라고 어디서 읽은것 같다. 그래서 작자가 미상인 것이 많고, 당시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실이나 생활상을 잘 담고 있어서 좋은 사료가 되기도 한다고 했던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봤던 걸까?

해와 달

詩經 國風 邶風 日月
시경 국풍 패풍 일월

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逝不古處 胡能有定 寧不我顧.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옛날과는 다르게 차가울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日居月諸 下土是冒 乃如之人兮 逝不相好 胡能有定 寧不我報.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日居月諸 出自東方 乃如之人兮 德音無良 胡能有定 俾也可忘.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
日居月諸 東方自出 父兮母兮 畜我不卒 胡能有定 報我不述.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아버님 어머님 그이는 나와 살지 않겠다 하네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게만 하니.

더보기
  1. 日居月諸(일거월제)는 해와 달을 부르면서 호소함이다.
  2. 지인(之人)은 위장공(衛莊公)을 가리킨다.
  3. 서(逝)는 발어사(發語辭)다.
  4. 고처(古處)는 자세하지 않으나 혹자는 옛날 정리로 대함을 이른다고 했다.
  5. 호·녕(胡·寧)은 모두 어찌이다.
  6. 모(冒)는 덮음이요, 보(報)는 답하거나 대꾸함이다.
  7. 덕음(德音)은 말을 곱게 함이요, 무량(無良)은 그 실상이 추한 것이다.
  8. ‘비야가망(俾也可忘)’은 “ 정녕 나를 잊을건가요? ”라 말한 것이다.
  9. 축(畜)은 기름이요, 졸(卒)은 마침이니 지아비에게 버림을 받으니 부모님이 나를 기르심이 끝나지 못했음으로 탄식했다.
  10. 아마도 우환(憂患)과 질통(疾痛)이 극에 달하면 자연스럽게 부모님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리다.
  11. 술(述)은 따름이니, 불술(不述)은 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장강이 썼다고 추정되는 시중에 하나이다. 송의 주희(朱熹)는 패풍(邶風) 중《燕燕》,《終風》,《柏舟》,《綠衣》,《日月》등 다섯 수가 그녀의 작품이라고 추정했다. 모시정의에서 이 시에 대한 역주를 보자. 출처

之人 指莊公也. 逝는 發語辭. 古處 未詳, 或云以古道相處也
지인은 장공을 가리킴이라. 서는 발어사라.
고처는 자세하지 아니하니 혹자는 옛 법도로 서로 처신한다고 함이라.
胡寧, 皆何也. 莊姜 不見答於莊公. 故 呼日月而訴之.
호와 녕은 다 어찌함이라. 장강이 장공에게 답을 보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해와 달을 부르면서 하소연함이라.
言日月之照臨下土久矣 今乃有如是之人而不以古道相處,
말하건대 ‘일월이 아래 땅을 비춰 임한지 오래 하거늘,
이제 이와 같은 사람이 옛 법도로써 서로 처하지 아니하니,
是其心志回惑 亦何能有定哉 而何爲其獨不我顧也.
그 마음과 뜻이 미혹한 데로 돌아감이 또한 어찌 정함이
(후회하여 본처에게 돌아가겠다는 마음의 결정이) 있으리오마는
어찌 그 홀로 나를 돌아보지 않는고.’ 하니,
見棄如此而猶有望之之意焉 此詩之所以爲厚也.
버림을 당함이 이와 같으면서도 오히려 바라보는 뜻을 두었으니
이 시가 이로써 두터운 바가 되니라.
제장공(齊莊公)의 딸인 장강(莊姜)은 위풍 석인에서도 나온다. 장강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위장공(衛莊公)에게 냉대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와 위나라의 관계를 잘 모르지만 위장공이 장강을 멀리한 이유는 어쩌면 정치적인 이유였을 지도 모르겠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포스트를 참고하자.

穿越收尾

地藏 | 지장

주자서를 안고 흐느끼던 귀왕은 곧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버렸다. 주자서는 곡주의 무게를 버티다 힘들어서 털썩 뒤로 누웠다. 곡주는 자연스럽게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옷이 모두 젖은 데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귀곡주가 얼굴을 묻은 부근이 화끈화끈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물 밖에 없고, 날은 저물었는지 입구를 통해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달빛을 구경하던 주자서는 설핏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달빛에 희게 빛나는 주자서의 얼굴을 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가 입 맞추었던 이마에 코 끝에 입술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다 혹시 사라질까 얼른 손을 거두고 주자서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두근두근’하고 뛰는 심장 소리가 기꺼워 그의 몸을 더 꼭 끌어안았다. 주자서의 몸이 뜨겁다. 온객행은 괜히 부끄러워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 축축한 옷자락이 온객행의 얼굴에 스몄다. 온객행은 한담 입구에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주자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침나절이 지나 점심때가 다 되도록 두 사람은 그렇게 붙어 있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고상이 찬합을 들고 한담에 나타났다. 한담 아래를 내려다본 고상은 목란에게 말했다.
“둘이 붙어 있는데 어떡하지? 그냥 갈까?”
목란이 배 주변을 보고 말했다.
“딱히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는데… 게다가 주공자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망서 같다면 먹는 걸 분명 좋아할 텐데… 점잖아서 그렇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히히히’하고 웃었다. 목란이 찬합을 고쳐 들고 말했다.
“나는 한담에 있는 섬으로 갈 테니까, 노를 저어 와. 아상.”
아상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주인이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목란과 고상은 한담 입구에 서서 한참 한담 아래에 있는 배를 보며 고민했다.

온객행은 한담 입구의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주자서 앞에서 울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달빛에 보았던 희고 빛나는 얼굴로 누워있다. 햇살에 조금은 창백해 보인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가 젖어서 축축하다고 생각했던 주자서의 가슴께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온객행이 놀라서 축 늘어진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가 맥을 집었다. 그의 몸은 열이라도 나는지 뜨겁다. 온객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자서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의 맥에는 내공이 잡힌다. 온객행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이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다.

고상과 목란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온객행이 주자서를 안고 훌쩍 한담 입구로 올라왔다. 온객행의 등장에 조금 놀란 목란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인! 배고프죠?”
온객행은 고상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훌쩍 바위산 아래로 내려갔다. 온객행은 무표정한 얼굴로 염귀가 입던 검은 장포를 두른 주자서를 안고 처소로 향했다. 침상 위에 주자서를 올려놓고 검은 장포를 걷고 젖은 옷을 벗겼다. 내의 안에 주자서의 몸은 전에 보지 못했던 상처로 가득하다. 온객행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혹시나 또 주자서가 사라질까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옷을 갈아입히고 벌어진 상처를 다시 면포로 싸고 붕대로 고정했다. 그때까지도 주자서는 열에 들떠 눈을 뜨지 못했다. 온객행은 괜히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차가운 한담에 몸을 던진 그가 잘못될까 처소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혼자서 주자서의 시중을 들었다.

품에 안고 물과 탕약을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고 매일 면포도 갈아주었다. 주자서는 그렇게 또 사흘을 내리 앓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옆에 누워있다가 주자서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근처에 두었던 찻잔을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키고 찻잔을 가져가니 주자서가 팔을 들어 손으로 찻잔을 잡고 마셨다. 살짝 닿은 주자서의 손이 뜨거워 온객행은 주자서의 이마에 손등을 대어보았다. 주자서가 작게 내쉰 한숨조차 걱정되어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괜찮아? 해독이 다 안됐었나 봐.”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눕혀주는 대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온객행은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주자서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좀 더 쉬어. 배고파?”
주자서는 아직도 잠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눈을 깜박거리더니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대전에서 조면사를 뒤집어쓰고 보았던 모습이라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아서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은 아직 못 먹어.”
주자서는 피식 웃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고상이 가져온 묽은 죽을 ‘후후’ 불어서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고상과 목란, 유이가 침상 곁에 서서 온객행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주자서는 입 앞으로 다가온 숟가락을 한번 주변에 서 있는 소저들을 한번 마지막으로 주자서에게 어서 먹으라며 여상하게 죽을 뜨고 있는 온객행을 한번 보고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숟가락을 다시 죽그릇에 놓고 주자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 왜 그래? 못 먹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길을 피하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 들고 말했다.
“혼자 먹을 수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온객행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가 죽을 한술씩 뜰 때마다 주자서의 입가를 훔쳤다.

주자서가 수저를 들면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온객행은 다짜고짜 주자서의 앞섶을 풀어 헤치며 말했다.
“아서, 많이 아파? 또 피가 배어 나올지도 몰라.”
주자서가 죽그릇을 어쩌지 못해 몸을 앞으로 숙여 말며 말했다.
“무슨 짓이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침상 옆에 서 있는 소저들을 보았다. 목란이 웃으며 주자서의 손에 있던 죽그릇을 치우고 말했다.
“어…저희는 그럼 이만…”
소저들은 웃는 얼굴로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다가 장지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앞섶을 움켜쥐고 온객행의 어깨를 밀었다.
“조금 불편한 것이니 걱정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에 있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럼 면포라도 새로 갈자.”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자 온객행이 말했다.
“일단 죽부터 더 먹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란이 탁자에 내려놓은 죽을 가져와 숟가락을 들어 주자서의 입 앞에 대주었다. 주자서는 인상을 쓰고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순순히 입을 열어 죽을 받아먹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락이 기꺼워 부스스 웃으며 죽을 떠주었다.

온객행은 다 먹은 죽그릇을 정리하고 찬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뒤 돌아 침상을 보았는데, 주자서가 앞섶을 풀고 있었다. 온객행은 당황하여 침상으로 가서 말했다.
“아…아서?”
주자서의 내의는 불편한 어깨에 걸려 반쯤 벗겨졌다. 붕대로 가득한 주자서의 몸은 맨살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었으나 온객행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서…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주자서가 내의를 벗기 위해 씨름하며 말했다.
“면포를 새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온객행은 붉어진 얼굴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은 허둥대며 침상 옆에 면포가 들어 있는 함을 열었다.

주자서는 몸에 둘러진 붕대를 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더듬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 뒤에 있는 매듭을 풀어 붕대를 풀고 피에 젖은 면포를 상처에서 떼어 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는 독 때문인지 지혈이 잘 되지 않았다. 주자서가 상처를 보고 말했다.
“황실에서 쓰는 독을 썼을 테니 보통의 상처보다 아무는 속도가 느릴 것이오.”
온객행이 젖은 수건을 가져와 주자서의 상처를 닦으며 말했다.
“아파?”
주자서는 상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새 면포를 대고 주자서의 몸에 붕대를 감았다. 앞 뒤로 붕대를 감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떨어졌다. 주자서는 덤덤하게 온객행의 시중을 받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가까워 질 때마다 마음이 널뛰었다. 매듭을 짓는다는 핑계로 한참 주자서를 끌어안고 있던 온객행이 그를 놔주자 주자서는 별말 없이 옆에 두었던 내의를 다시 걸쳐 입었다.

온객행이 피에 젖은 면포를 치우는 것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불쑥 물었다.
“그대가 귀곡주요?”
온객행은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흠 ’하더니 말했다.
“몸이 온전치 못하여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곡주를 뵙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팔을 들어 공수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나…나는…”
머뭇거리는 온객행의 얼굴을 고개를 들어 힐끔 본 주자서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가 정말 귀곡의 곡주요?”
온객행이 침상에 다가와 앉고는 주자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온객행은 한참 주자서의 손을 쓸고 만지더니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는 그냥 곡주가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온객행이 한참 뜸을 들이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마음을 아주 비싸게 사기로 했어…”
주자서는 곡주의 말뜻을 알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웃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더니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주자서를 보았다.
“내가 안 믿어서 그런 거지? 정말로 누군가 보낸 게 아니었는데…”
주자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차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숙였다. 온객행은 손을 들어 주자서의 뺨에 대고 말했다.
“다시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온객행은 주자서의 고개 숙인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게 하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은애(恩愛)해.”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하고 서로를 보고 있다가 온객행이 시선을 떨어뜨려 주자서의 양손을 잡고 말했다.
“마음… 다 안 줘도 되니까… 내 옆에 있어 주면 안돼?”

주자서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온객행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곡주.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오.”
주자서가 고개를 숙여 온객행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은애하는 사람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기만(欺瞞)하기를 바라오?”
온객행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떨어진다. 주자서는 안타까워 손을 들어 온객행의 눈물을 훔쳤다. 온객행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대의 정인은 떠났소. 그대가 놓아주지 않으면, 당신의 정인도 당신도 불행할 거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참고 있던 울음을 뱉었다. 이 주자서도 그 주자서처럼 퍽이나 다정하다. 온객행은 이 주자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도 벌써 반절 넘게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팔을 들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마음… 다 안 줘도 되니까. 내 옆에 있어.”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귀곡에 입곡한 귀신인데 곡주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온, 온객행.”
주자서가 ‘흠’하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곡주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소.”
온객행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예의 엄청 따지네. 어디 귀족이라도 하다 왔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떼어 놓고는 말했다.
“그렇소. 지금은 노비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지만.”
온객행이 당황하여 주자서를 놓아주고 물었다.
“귀족이었어?”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대역죄인에 쫓기는 도망자요.”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자 주자서가 미소 짓고는 말했다.
“나의 원수는 나라의 천자이니 복수할 길이 없어 귀신이 되었소.”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지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그의 눈썹을 쓸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길에 눈을 감고 말했다.
“복수할 길이 왜 없어. 가서 죽이면 되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툭툭 치고는 말했다.
“나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소.”
온객행은 눈을 떠 주자서의 올곧은 눈을 보았다. 온객행은 예전에 어디에서 인가 읽었던 성인군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그 이야기를 읽고 그 군자를 비웃었던 것 같다.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양친의 복수를 포기하였으니 불효를 저질렀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가… 내가 대신 해 줄게.”
주자서가 웃으며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이 죄는 나의 죄요. 그대는 그대 몫의 죄가 있지 않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은 이 주자서에게도 한없이 빠지겠구나! 직감했다. 온객행은 바짝 몸을 붙이고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놀라서 몸을 돌려 주자서를 마주 보고 되물었다.
“뭐라고?”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미소 짓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아서… 내가 두 살이나 동생인데 정말 그렇게 부르겠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자서의 웃는 모습이 기꺼워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엇!’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온객행을 밀어내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 이후로 한담에 가지 않았다. 박정부의 하인들은 곡주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주자서를 찾아오지 않았다. 주자서는 변함없이 하인들의 손을 타는 것을 불편해하며 처소의 장지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찾아오지 못하는 하인들은 근처를 서성이다 망서에게 줄 음식과 물건을 근처에 두고 갔다. 날은 점점 빨리 어두워지고 바람은 차가웠다. 온객행은 잠시 내려 놓았던 곡주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가가지 못하고 하인들이 하는 것처럼 주자서의 근처를 배회했다. 열린 장지문 사이로 침상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주자서를 훔쳐서 볼 뿐이다.

매일 박정부에 들러 희상귀에게 홍화 일에 관해 물으면서도 시선은 항상 주자서의 처소를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희상귀가 따로 주자서를 불러주면 온객행은 다소곳이 앉아 내외하듯 말없이 차만 마셨다. 그 모습이 갓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라 희상귀는 우습기만 했다. 주자서는 망서가 정리해 놓은 장부를 보고 칭찬하며 몇 가지 보완점을 제시했고 희상귀는 기껍게 받아들였다. 여인만 있는 박정부를 불편해하는 것 같아 문 근처에 있는 사랑채로 거처를 옮긴 날에는 온객행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박정부가 한바탕 소란이었다. 주자서는 사랑채에서 급히 나와 저를 찾는 온객행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박정부의 하인 모두가 보았다. 그 이야기는 곧 귀곡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귀곡의 귀신들은 주자서를 지장(地藏)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보물을 모아 둔 석실에 들어가 담비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찾았다. 몇 년 전에 무상귀가 노곡주에게 선물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귀곡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여름에 서늘한 대신 겨울에 추웠기 때문에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따뜻한 옷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고 거절한 주자서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온객행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석실에서 주자서의 선물을 골랐다. 글을 읽을 줄 알았으니 심심하지 말라고 죽간 몇 개와 고서도 챙겼다. 시간이 꽤 늦어 졌는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주려고 가져온 물건을 나무함에 담아 들고 박정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모두 기울어 어둑어둑 해진 뒤였다.

주자서는 이미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나 등롱을 끄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무함을 들고 들어온 온객행은 아무 말도 없이 함을 들고 앉기를 청하는 말에도 응하지 않고 망부석처럼 멀뚱히 서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함을 받을까, 아니면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나 망설이다 그냥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리기로 했다. 주자서가 차를 다 마시고 탁자에 턱을 괴고 온객행을 보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재밌기도 하고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탁자에 고개를 괴고 졸고 있는 주자서를 보다가 나무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자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사랑채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주자서의 얼굴만 보면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만다. ‘너는 다른 사람의 대신이 아니라고. 네가 누구이던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방금까지 차를 마시던 주자서의 입술이 참 촉촉하고 탐스러워 보인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주자서에게 몸을, 얼굴을 붙였다. ‘그냥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아서는 이렇게 생겼었나?’ 같은 생각을 하며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주자서의 눈이 반짝 뜨였다.

주자서의 시선을 느낀 온객행의 얼굴이 뜨거웠다. ‘앗!’ 온객행의 당황을 읽은 주자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정말 꽃이 핀다는 게 이런 것일까?’ 온객행은 힘겹게 숨을 삼켰다. 주자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온객행이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 온객행을 밀었다.
“노온?”
온객행은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아직…’ 온객행의 주저함을 읽은 주자서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이 눈썹이 축 처지고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미…미안.”
주자서는 인상을 쓰고 온객행에게 물었다.
“노온,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네. 알고 있지 않은가?”

온객행이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말로 하게.”
온객행이 눈을 꼭 감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대에게서 과거의 정인을 찾고자 함이 아니네!”
온객행의 큰 목소리에 조금 놀란 주자서가 눈을 깜빡이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민망하여 옆에 놓은 나무함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귀곡의 겨울은 추우니까…”
하고는 나무함의 뚜껑을 열었다. 함안에는 담비 털로 만든 피풍의와 그가 고른 책들이 들어 있다. 주자서가 피풍의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고마워.”
온객행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며 말했다.
“입어 줄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온객행이 담비 털을 쓰다듬는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나는 말이야…”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내가 이걸 입으면, 자네는 무엇을 입나?”
온객행이 방금까지 주자서의 손이 있던 담비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 나는…”

주자서가 물었다.
“많이 닮았나?”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마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다. 온객행은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누구의 대신도 아니야. 주자서 너라는 사람이 좋은 거야. 절대로 누굴 닮아서 그런 게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좋은가?”
온객행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자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물었다.
“내가 왜 좋은가?”
온객행이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잘 생겼어.”
주자서가 ‘하하하’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한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랑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너랑 같이 있으면 너밖에 안 보여.”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이상한 표정을 했다.

아렴풋한 등롱불에 주자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온객행은 참지 못하고 주자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코끝이 거의 맞닿아 숨결이 느껴졌다.
“아서. 내 아서.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흔들리는 주자서의 시선이 온객행의 눈가에서 코 끝 그리고 입술로 옮겨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주자서의 입술을 핥았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끙’하고 작게 신음했다. ‘완전히 달라. 이건 진짜야.’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했다. 좀처럼 좁힐 수 없던 간극 따위 없이 드디어 맞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다가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치열을 핥았다. 그리고 입천장을 핥고 그다음에는 물컹한 살덩이를 빨았다. 신음이 되지 못한 주자서의 비음이 들렸다.

주자서의 손이 얼굴을 쥐고 있는 온객행의 손목을 잡았지만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온객행은 너무 기뻐서 몸을 더 가깝게 붙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입을 맞대고 있던 두 사람은 숨을 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했다. 아쉬운 한숨이 터져 나오고 온객행은 주자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정말이야. 좋아해.”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입을 맞추기 시작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멈추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애가 닳아 주자서의 눈가에 뺨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말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지는 않네.”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응…”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몸을 뒤로 물리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나는 누구의 대신이 될 마음도 없고…”
온객행이 다급하게 몸을 붙이며 주자서의 말을 멈추고 말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달라… 너는 진짜야.”
주자서가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신기루 같았어. 같이 있는데도 너무 멀어서 외로웠어. 무서웠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양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너는 진짜야. 신기루 같은 게 아니야. 그렇지?”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다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뺨을 꼬집었다. ‘아야!’ 주자서가 웃으며 물었다.
“아픈가?”
온객행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주자서가 붉어진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나는 신기루도 아니고, 누구의 대신도 아니오. 그렇다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대를 동정할 마음도 없소.”
이번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찌푸려진 온객행의 미간을 살살 쓸고 말했다.
“그대의 얼마 남지 않은 생에 그대의 마음을 내가 채워도 되겠소?”
온객행은 뺨에 있는 주자서의 손을 겹쳐 잡고 말했다.
“나는 욕심쟁이라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데…”
그리고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불에 데인 듯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그런…”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 주자서의 얼굴이 붉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허리를 안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온객행이 얼굴을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곡주께서는 참으로 기골이 장대하시오.”
온객행이 투정하듯 고개를 작게 흔들고 말했다.
“싫어. 곡주라고 부르지 마.”
그리고 방금 곡주라고 부른 입을 입술로 막았다. 한참 입을 맞추고 숨이 모자라 떨어진 두 사람은 기름이 다 떨어져 어두워진 등롱 불빛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노온.”
주자서의 부름에 온객행이 답한다.
“응. 아서.”

穿越 尾註

미주목록

(1) 자야가 세번째
婉伸郎膝上 何處不可憐
낭군님 무릎에 살며시 누웠으니,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요!

(2) 고시십구수 두번째
昔為倡家女, 今為蕩子婦. 蕩子行不歸 空床難獨守.
지난날엔 기생집 여인이었고 지금은 떠도는 나그네의 아내라네. 길 떠난 사내는 돌아오지 않으니, 빈 침상 홀로 지키기 어렵다네

(3) 자야가 열일곱번째
綠攬迮題錦 雙裙今復開 已許腰中帶 誰共解羅衣
나는 비단 겹치마에 녹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겹치마를 다시 벗어 던지고 이미 허리에 두른 허리띠를 풀어 님 에게 허락했지만, 나와 함께 내 비단 옷을 풀어헤친 사람은 누구였지요?

(4) 고시십구수 중 세번째
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 斗酒相娯樂 聊厚不為薄
인생이 천지사이에 사는 것은 홀연히 멀리 떠나는 여객과 같다.
한말 술로 서로 나누면서 즐기면 애오라지 충분하고 부족함이 없도다.

(5) 고시십구수 중 열세번째
年命如朝露 人生忽如寄 不如飲美酒 被服紈與素
이 세상을 사는 사람 생명은 아침이슬과 같구나. 인생은 홀연히 사라져 가고 마는 것, 그렇지 못 할 바에 생전에 맛있는 술과 좋은 의복을 입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것은 어떠할까?

(6) 시경 왕풍 黍離 우거진 기장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何求 悠悠蒼天 此何人哉
나를 알아주는 자는 내 마음에 근심 있다 말하고 나를 모르는 이는 내가 무엇을 구한다 말한다네. 아득히 푸른 하늘이여 이것이 어떤 사람 탓인가!

(7)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마치며

나는 뭘 쓰고 싶었던 걸까? 사실 구상은 주자서가 이미 칠규삼추정을 박은 상태에서 타임슬립하는걸로 쓰려고 했던거 같은데.. 그때 쓰지 않았으니 지금의 나로써는 뭘 썼을지 모를 일이다. 우림령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극강의 설명충이다. 개연성이 없으면 죽는 병에 걸렸다. 머라구? 개연성이 있는데 타임슬립을하냐? 이게 말이야 똥이야 그냥 설명충이라고햌ㅋㅋ 주석이 우림령과 겹치는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의외로 잔인한 내용이 많다. 사람의 목을 뽑는다거나 포를 뜬다거나 먹는다거나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하게 했지만 명백하게 따지면 성인용이다. 그래도 그걸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았으니 PG-13 정도의 수위이다. 그쪽말고 다른쪽의 수위는 나도 올리고 싶다 진짜 정말ㅠㅠㅠ

뭔가 온객행의 광공적인 면모를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귀곡 십대악귀의 이름과 거처는 불교의 팔대지옥과 열명의 시왕에서 참고했다. 망서(望舒)는 실제로 고대 악부시가중 하나인 구가(九歌)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달의 마차를 끄는 마부로도 설명된다. 하늘의 신들을 태우고 다니는 셔틀같은 이미지.. 희상귀가 데리고 있는 하인들의 이름 역시 고대 악부 시가 중 굴원의 이소(離騷)에 나오는 풀꽃의 이름을 대거 사용하였다.

온객행이 귀곡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악귀들과 온객행의 관계는 어땠을까? 에서 시작된 글이다. 사실 십대 악귀에 관련된 부분을 더 많이 쓰고 싶었지만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것 같아서 꽤 많은 내용을 쳐냈다. 설단과 설비, 계가 사이의 일이라던가 양연이 어떻게 유자업에게 겁탈을 당했는지 뭐 그런 얘기도 쓰긴 했는데... 나만 관심있는 얘기라서 뺐다.

마지막에 주자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그의 온객행을 찾았고, 남겨진 온객행 역시 그 시대에 있는 주자서를 찾았으니 잘 된 일이다. 나는 설명충에 해피엔딩성애자인것이다. 추후에 내용이 더 추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현대물에는 영 재주가 없으니 남겨진 온객행의 이야기겠거니 그냥 대충 짐작한다. 뭐 아닐수도 있고.. 나는 멀티가 안되는 바보라서... 희신광요도 먹어야되는데..

일단 이 글은 무협의 틀을 하고 있으나 정확히 무협은 아니다. 무협에 자주 나오는 '하이야~'하는 부분은 최대한 덜어 냈는데 그런건 내가 못쓰기 때문이다. 아웃랜더작가가 성애묘사를 잘하는걸로 유명한데 그래서 관련내용으로 책을 냈다. 그 책을 살까 생각중이다. 랜달... 랜달 잊지 않겠다.. 진짜 내안의 광공은 너로 정했다⭐ 참고용으로 게동을 몇개 봤는데 그냥 좋았다. 그냥 좋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ㅠㅠㅠㅠㅠㅠ그냥 게동본사람이 되버리고 말았어ㅠㅠㅠㅠ으앙아앙 아아 나도 흥퍽흥퍽하는거 쓰고싶다. 이런건 어디서 배우나ㅠㅠ

다시 읽어보니 대체 귀신들이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표를 덧붙인다.

사실 고백하자면 쓸때도 이표를 참고해서 썼다.
10대 악귀 전임 후임
희상귀 모름 나부몽 羅浮夢
염귀 모름 류천교 柳千巧
무상귀 설단 契丹 무구 無咎
급색귀 유자업 劉子業 주요 周耀
개심귀 백명 百鳴 양연 楊然
식시귀 구오 古奥 보아 甫兒
장설귀 황작 黃雀 구빈 邱賓
흑무상 무구 無咎 모름
백무상 필안 必安 모름
적사귀 모름 길도 姞徒

穿越 第10完

鬼王 | 귀왕

주자서는 휘우듬하게 기우는 몸에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아… 빠지겠다… 옷이 젖으면 내가 사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고 힘을 뺐는데 순간 누군가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았다. 거의 다 뒤로 넘어간 주자서의 몸이 일으켜지고 주자서를 붙잡은 사람을 보았다. 햇빛에 가려 그림자진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남자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고…고맙습니다.”
남자가 물었다.
“괜찮아요?”
주자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연못을 다시 보았다. 짙은 물색은 안보이고 연꽃이 가득하다. ‘연꽃이 있었나?’ 같은 생각을 하며 난간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남자는 한발짝 물러나며 주자서의 몸에서 손을 뗐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주자서보다 키가 컸는데, 평소 주자서보다 키가 큰 사람은 모델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그도 모델인가 했다. 남자가 말했다.
“촬영 끝났는데, 옷을 갈아 입으시겠어요?”
주자서는 조금 정신이 없어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주자서를 간이 탈의실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옷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남자는 주자서의 어깨에 있는 머리를 살짝 쓸었다. 주자서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 ‘잘 생겼네.’ 라고 생각하며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왕.”
남자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옷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자서가 오늘 입었던 옷은 파는 옷이 아니었나 보다. 물에 빠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전통복식사를 연구하는 어느 대학의 문화인류학과에서 자료를 만들기 위한 촬영이라고 한다. 주자서가 입은 옷은 후한 말, 송나라의 도의라고 한다. 남자는 신이 나서 주자서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주자서는 대부분 모르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 네.’ 같은 어색한 말로 호응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계속 한참 떠들다 말했다.
“키가 크다고 다 모델을 하는 건 아닌가 봐요. 제가 입고 찍은 건 다 이상했는데…”
주자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자 남자가 말했다.
“소요건이나 하엽건 같은 꼬리가 긴 모자를 쓰면…”
촬영 관계자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팔을 들어 그를 불렀다.

주자서는 말을 걸던 남자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촬영기사에게 갔다. 촬영 기사는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다음 일에 대해 제안했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라면 돈을 떼일 일은 없을 것 같아 주자서는 흔쾌히 허락했다. 주자서가 옷을 갈아입고 촬영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진행스텝 한 명이 다가와 주자서에게 앞으로 자주 보자고 인사하며 입금은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중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공손히 인사한 뒤에 고궁을 나왔다. ‘바로 입금이 아니구나. 오늘 저녁에 해줬으면 좋겠다. 배고파…’ 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주자서씨!”
주자서는 햇빛에 인상을 쓰며 뒤로 돌아섰다. 시야가 잠시 뿌옇게 흐려지더니 몸이 휘청였다. 주자서를 부른 사람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주자서씨 괜찮아요?”
주자서를 난간에서 잡아준 사람이다. ‘목소리가 참 좋네.’ 생각하고 눈을 뜨니 역시 그 남자다. 주자서가 자기도 모르게
“배고프다.”
라고 말한 순간 주자서의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났다.

남자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배고파요? 저랑 밥 먹으러 갈까요?”
주자서가 인상을 쓰고 남자를 보았다. 주자서의 표정을 본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종종 볼 건데 친해지면 좋잖아요.”
주자서가 대답없이 남자를 보자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혹시 체중 조절 중이라서 못 먹는 거예요? 이렇게 말랐는데…”
그리고는 주자서의 손목과 팔을 만졌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남자는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내가 살게요. 뭐 좋아해요?”
주자서가 대답이 없자 남자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 근처에 마라탕 맛있는 집 있는데 우리 거기로 가요.”
주자서는 남자가 ‘마라탕’이라고 말하는 순간 식욕이 돌며 갑자기 남자가 엄청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먹는 걸 주는 사람이야.”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했다.
“네?”
주자서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되려 물었다.
“네?”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낮게 웃더니 말했다.
“내가 사랑스러워요?”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남자가 주자서에게 가깝게 다가서며 말했다.
“방금… 제일 사랑스럽다고…”
주자서가 남자를 올려보며 말했다.
“내가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붙였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 제가 편견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이건 좀…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하하하’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주자서가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 일단 고백을 하고…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일단 우리 마라탕 먹으러 가요. 내가 사 줄게요. 나를 사랑스럽게 봐주세요.”
주자서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는 남자와 발 맞춰 걸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밥 먹을 건데…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주자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온, 온객행이요.”
주자서는 내심 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가 웃었으면 좋겠다.


온객행은 자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주자서를 보고 재빨리 몸을 움직여 설비의 목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 바로 한담의 아래를 보았다. 한담은 고요했다. 방금 사람이 빠졌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서… 아서…”
무구가 설비의 머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곡주.”
온객행은 대답없이 한담수옥 입구에 주저 앉아 주자서를 불렀다. 무구가 온객행에게 다가가자 고상과 목란이 나타나 그를 막았다. 고상이 말했다.
“어서 가서 백무상과 흑무상을 고르시오.”
무구는 고상과 목란은 흘겨보다 곧 바위산을 내려갔다. 무구의 기척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숲 속에서 춘매와 추국이 나왔다. 그들은 주저앉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바위산의 접근을 막는 것이 좋겠네.”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곡주를 보았다. 고상이 곡주에게 다가 가려는 것을 목란이 막으며 말했다.
“시간이 필요할 거야. 우리가 망서를 잊기 위해 필요한 시간 보다는 조금 더 많이.”
고상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망서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추국이 말했다.
“분명 한담에 빠졌는데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춘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기척도 같이 사라졌어.”
목란이 고상을 데리고 바위산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는 정말 망서였는지도 모르겠어.”

온객행은 다음날 무상귀 설단의 거처였던 등활처(等活處)의 귀신을 모두 죽였다. 계가 역시 곧 형제의 뒤를 따랐다. 온객행은 대전에 7명의 악귀를 불러 세워놓고 새로 무상귀가 된 무구에게 웃으며 말했다.
“무형이 원하는 곳에 새로 거처를 지으세요. 이름은… 무간(無間)이라고 합시다. 내가 직접 현판을 쓰겠소.”
무구는 떨리는 손을 다잡고 온객행에게 조아리며 포권했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나는 한동안 좀 쉬어야겠으니, 다들 알아서 처신하세요. 거처 하나 불태우는 일을 귀찮게 아랫사람 시키지 않을 테니…”
온객행은 한동안 박정부에 있다가 그 거처를 한담으로 옮겼다. 한담 위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염귀가 입었던 검은 장포를 덮고 어떨 때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어떨 때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귀곡에서 한담을 쉽게 오르고 내릴 만한 경공을 가진 자는 드물어 다른 악귀들은 감히 살수를 보내지도 못했다. 그 사이 나부몽은 저잣거리에서 모욕을 당하던 류천교를 데려와 염귀로 삼았고, 무구는 자기가 부리던 수하들 중 두 명을 골라 백무상과 흑무상으로 만들었다. 고상은 목란에게 경공을 배웠다. 고상의 경공으로 한담을 오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만월의 밤이 찾아왔다. 귀곡에서 명절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챙기는 사람이 없었지만, 박정부의 몇 어멈이 홍화 꽃잎에 곡식가루를 섞어 노랗게 부친 달 모양 떡을 만들어 먹었다. 망서가 좋아하는 떡이라며.

온객행은 배위에 누워 검은 장포를 끌어안고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보았다. 망(望)이다. 온객행은 밝은 달빛 아래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서러워졌다. 그리고 그리웠다. 온객행은 그를 가뒀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그가 싫다고 했던 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추악한 자신의 마음이 그를 놓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늘이 데려가 버리신 거라고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자서는 마치 귀곡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온객행은 내심 그가 주자서를 놓아주면 그가 다시 한담으로 돌아올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서, 달에서 행복해? 나는 너무 보고싶어.”
온객행이 눈을 감고 검은 장포를 꼭 껴안았다. 온객행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진왕궁의 기도위 주자서는 금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진왕은 부러질지언정 굽지 않는 주자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왕의 세력을 키우는 것을 주도한 그의 가문을 멸하였으니 주자서 역시 사라지는 것이 진왕의 도의(道義)에 맞았다. 주자서는 피식 웃으며 나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부친과 연이 닿은 사계산장의 장주가 보낸 서신에는 ‘귀곡(鬼谷)’이라는 두 글자 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곤주에서 익주까지 오는 길은 멀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경계하며 도착한 청성산은 왜 인지 인기척이 없었다. 그를 바짝 뒤쫓고 있는 금군을 따돌리기 위해 가파른 절벽 위로 올라 바위산에 올랐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금군이 그를 포위했다. 당황한 주자서가 숲을 나와 평지로 나가자 금군 몇이 달빛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주자서가 그들을 경계하자 그들 중 한 명이 주자서를 향해 활을 쏘았다. 어깨와 가슴 사이에 화살에 맞은 주자서가 발을 헛디뎌 한담에 빠지고 말았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가 가라 앉는 것을 본 금군이 한담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담 아래에는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금군은 깊이를 가늠하더니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온객행은 ‘풍덩’하고 물에 무언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고상이 또 자신을 귀찮게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 온객행이 덮고 있던 검은 장포를 치우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물결이 시작된 곳을 보는데 고상이 수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담 입구를 보았다. 고상과 항상 같이 오는 목란이 보이지 않는다. 온객행은 장포를 벗고 한담 안으로 몸을 던졌다. 밝은 달빛에 맑은 물에 인영이 가라 앉는 것을 본 온객행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람에게 다가갔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정신을 잃은 듯했다. 고상이 아닌 것을 확인한 온객행은 그를 내버려 둘까 하다가 염귀를 만났을 때 일었던 그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너는 한담에 빠진 것일까? 온객행이 사람을 데리고 뭍으로 갔다.

남자는 기침을 하며 물을 뱉다가 이내 정신을 잃었다. 남자는 비단 피풍의에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살수 같았다. 그가 입은 옷은 그동안 온객행이 보았던 살수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질이 좋아 보였다. 온객행은 저에게 보낸 살수를 바위산을 지키는 박정부의 하인들이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하다 남자가 맞은 화살을 보았다. 온객행은 깃을 만져보았다. 매의 깃털이다. 온객행이 다시 한담의 입구를 한번 보고 남자의 얼굴에 있는 복면을 벗겼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 정말 그는 망서일까? 온객행은 드디어 꿈에서 그를 만난 줄 알고 그를 끌어안았다.
“아서…”
남자의 입에서 ‘윽’하고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화살을 맞은 부분을 보다가 덜컥 겁이 나서 그를 놓아주었다. 그를 놓지 못하는 온객행을 벌하기 위해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온객행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더 스미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는다. 인상을 쓰던 온객행이 피가 묻은 손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만졌다. 온객행은 피로 얼룩진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주자서의 얼굴은 피와 어울리지 않는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안고 한담을 나와 박정부로 향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안고 나타난 다음날 아침, 박정부는 박정부답지 않게 소란이었다. 처소에서 주자서의 상처를 돌보던 어멈이 그의 가슴에 박혀 있던 화살을 희상귀에게 건내며 말했다.
“이건 황궁에서 쓰는 화살입니다.”
희상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머리에 관을 하고 벗은 몸위로는 피로 얼룩진 면포로 가득했다. 희상귀가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주자서의 몸에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망서는 이런 상처들이 없었어요.”
희상귀가 인상을 쓰며 유이를 보았다. 유이가 젖은 영견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희상귀가 ‘허’하고 헛웃음 치고 물었다.
“곡주는?”
목란이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한담에…”
희상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게 대체…”

주자서는 사흘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가 맞은 화살에 독이 들어 있었는지 의술을 아는 하인들이 모두 들러붙어 그를 보살폈다. 망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박정부 하인들이 하나둘 망서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꽃을 들고 귀왕의 처소를 찾아왔다. 귀왕은 한담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희상귀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했다. 희상귀도 딱히 그들을 막을 이유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

주자서는 옅은 약탕의 냄새에 눈이 떠졌다. 살을 잘 붙게 해준다는 탕약의 냄새다. 주자서는 또 이렇게 살아남은 자신이 우스워서 작게 웃었다. 주자서의 웃는 소리에 목란이 다가와 말했다.
“망서! 정신이 드는가?”
졸면서 탕약을 다리던 유이가 벌떡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와 말했다.
“망서!”
주자서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망서라고 부르는 소녀들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자서는 순간 자신이 유곽에 온 줄 알고 이불을 들어 몸을 가렸다.

유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망서가 부끄러워할 줄도 아네.”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유이를 보았다. 유이는 얼른 함으로 가서 내의를 가져왔다. 목란이 주자서의 이불을 뺏으며 말했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아는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주자서는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며 시중을 드는 이들이 낯설어 말을 하려다 기침을 했다. 유이가 얼른 가서 찻물을 받아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가 목을 축이고 말했다.
“소저들께서는 누구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목란과 유이가 행동을 멈추고 주자서를 보았다.

유이가 건넨 쓴 탕약을 불평도 없이 마시고 말없이 앉아 있는 주자서는 확실히 고상이 알고 있는 망서와는 앉은 자세부터 달랐다. 유이가 고상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찾은 것 같아.”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왜 우리를 기억 못하지?”
주자서가 탕약 그릇을 어디에 두어야 되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 목란이 다가가 그릇을 받으며 말했다.
“주인께서 당신을 보러 올 것이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이 곳은 귀곡이오?”
주자서의 입에서 귀곡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이와 고상이 ‘앗’하고 숨을 들이켜며 다시 속닥대기 시작했다. 장지문이 열리고 희상귀가 들어왔다. 목란은 희상귀를 보자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조아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희상귀는 주자서를 조심스럽게 보며 물었다.
“주자서?”
주자서가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기에 희상귀가 그를 멈추며 말했다.
“예를 거두시게.”
주자서가 신음을 참으며 목란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 무릎 꿇고 포권하여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곡주를 뵙습니다.”
희상귀 뒤에 서있던 염귀가 놀라며 물었다.
“사계산장?”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염귀를 보았다. 희상귀가 말했다.
“나는 박정부주 희상귀, 곡주가 아니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받아줄 곳도 살아 갈 곳도 없어 귀곡으로 왔습니다.”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귀곡에 입곡을 원하는 자는 반드시 맹파탕을 마셔야 합니다.”
고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안돼요! 나이모 안돼요! 망서가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
주자서가 고상의 호칭에 인상을 썼다. 유이가 말했다.
“곡주를 만나고 난 다음에 마시면 안될까요?”
희상귀는 헛웃음이 나서 그냥 웃어버렸다. 망서가 떠난 지 달포가 넘었는데, 아직도 박정부에는 망서를 싫어하는 자가 없다.

사흘정도 운신을 조심하고 몸을 보살핀 주자서는 혼자서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전에 입었던 하늘하늘한 옷을 보여주자 질색을 하며 입지 않겠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온객행이 입는 장포를 몇 개 골라 입혔다. 머리를 정리하는 것도 몸을 만지는 것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데다 뭐만 하면 ‘소저들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같은 점잖은 말로 거절하고 ‘소저들께서는 잘못하고 계십니다.’하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며칠 지내다 박정부 안에 여인들 밖에 없는 것을 알고 거처를 옮기겠다는 소리도 하였다. 그래도 사람의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았는지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주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노파를 도왔다.

그는 박정부의 하인들이 자신 때문에 불편할까 대부분의 시간을 거처 안에서 지냈다. 목란과 유이가 남아 그의 시중을 들었고 하인들이 종종 찾아와 주자서를 만나고 갔다. 원래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아픈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고상이 찾아와 주자서에게 귀왕의 이야기를 하며 그를 망서라고 부르자 주자서가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망서는 달의 여신인데 어찌 저를 그리 부르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울상이 되었다.


목란과 고상은 오랜만에 한담을 찾았다. 온객행은 배위에 검은 장포를 덮고 누워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한담 위에 그러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 봐온 참이라 목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상이 말했다.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위에서 찬합을 내려줘.”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상, 나는 안 내려 갈래.”
고상이 입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훌쩍 한담 아래로 내려갔다.
“주인!”
고상이 헤엄을 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배위에 착지했다. 고상은 노를 저어 해가 들어오는 한담 입구 아래로 갔다. 목란이 내려준 찬합을 받아 들고 고상이 목란에게 손을 저어 인사했다. 목란은 손을 흔들다 곧 자리를 떠났다. 고상이 누워있는 온객행의 발을 툭툭 차서 길을 만들어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주인! 밥 먹어요. 이제 그냥 박정부에 와서 드시면 안돼요?”
온객행이 장포를 내리고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서는 어때?”
고상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묻지 말고 가서 직접 봐요!”
온객행이 다시 장포를 덮어쓰고 누우며 말했다.
“안돼.”

고상이 찬합의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이 주자서라는 사람은 엄청 점잖고 다정한 사람이라 나도 기둥서방 삼고 싶어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기둥서방?”
고상이 ‘히히히’하고 웃으며 말했다.
“망서를 좋아했던 사람 중에 주자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주인이 내버려 두니까 다들 넘보는 거잖아요.”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지며 말했다.
“아서가 원하면… 그렇게 해.”
그리고는 다시 누워 버렸다. 고상은 음식 먹는 것을 멈추고 온객행의 다리를 꼬집었다.
“아야!”
온객행이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고상을 흘겨보았다.
“주인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고상이 버럭 온객행에게 소리질렀다.
“그럼 여기 그만 누워있고 주자서한테 보낼 혼서나 써줘요! 주인이 싫으면 내가 시집 갈 테니까!”
온객행도 고상과 같은 기세로 소리질렀다.
“싫어!”


목란은 고상이 이번에는 귀왕을 한담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귀왕을 나오게 만드는 것보다 주자서를 한담으로 밀어 넣는 것이 빠를 것 같아 목란은 박정부로 돌아와 내실로 향했다. 목란이 장지문을 소리가 나게 ‘탁’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실내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며 항상 처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목란이 주자서를 탁자로 손짓해 자리를 권하고 본인도 가서 앉아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주공자는 사내를 좋아하시오?”
목란이 건넨 찻잔을 놓친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목란을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목란이 떨어진 찻잔을 다시 바로 세워 두며 말했다.
“귀왕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주자서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것과 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목란이 깊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대가 귀왕의 정인과 닮았기 때문이오.”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입을 꾹 닫았다. 목란이 말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귀왕을 위해 그대가 귀왕의 정인이 되어 주시오.”
주자서가 말했다.
“어찌 사람을 속이라는 말이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할 수는 없소.”
목란이 낮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주공자의 경공은 어떠하오?”
주자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주자서를 빤히 쳐다보자 주자서가 ‘큼큼’하고 목소리를 정리하고 말했다.
“아직 공력이 모두 돌아오지 않아 경공으로 운신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듯 하오.”
목란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소? 아주 좋소. 내일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으니 그리 알아 두시오.”
주자서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목란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목란은 고상을 데리러 한담에 갔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고상은 한참 귀왕의 욕을 했다. 목란이 고상을 달래며 말했다.
“꼭 귀왕이 만나러 올 필요는 없어. 아상.”
고상이 목란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그런 방법이 있었네.”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고상이 목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언니! 뭘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지금 당장.”
목란이 고상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지금?”


주자서는 한담 입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곳은 주자서가 화살을 맞고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주자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목란과 고상을 보았다.
“여기로 내려가라는 말이오?”
고상과 목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목란이 손을 펼쳐 아래를 가리키고 말했다.
“귀왕을 만나러 가시지요.”
귀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 것은 주자서인지라 주자서가 작게 인상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덩’ 사람이 빠지는 소리에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낮에는 운이 좋아 배에 착지한 것인지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의 파동이 일어난 곳을 보았다. 사람의 인영이 수면 위로 불쑥 나오더니 배를 향해 물을 가로 질러오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어 황혼이 비추는 한담은 서정적이다. 온객행은 다시 장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배가 출렁하고 곧 사람이 배위에 올라탔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상.”
주자서가 말했다.
“그대가 귀왕이오?”
온객행이 장포를 걷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물에 젖은 주자서의 모습은 조금 처량해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장포를 덮어주며 말했다.
“아서,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귀왕의 호칭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오.”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져 울상이 되었다.
“아서…”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마주하고 말했다.
“그대 들어보지 못하였소?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은 아침 이슬과 같아 홀연히 사라져 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떠 하오?” (5)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붙여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그를 떼어내려다 들썩이는 온객행의 등을 보고, 흐느끼는 귀왕의 목소리를 듣고 멈추었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울고 있는 귀왕의 등을 쓸며 말했다.
“그대는 어찌 귀왕이 되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