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心鬼 | 개심귀
대전의 단상 뒤에는 여러 개의 석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보물이 가득 들어 차 있고, 그 중 하나는 서적이 가득 차 있고 또 그 중 하나는 평범한 거처였다. 온객행이 노곡주의 살갗을 벗긴 곳이기도 하다. 노곡주는 온객행을 좋아했다. 무심한 얼굴에 잔인한 성정에 끝까지 몰아붙여도 끝까지 버텨내는 온객행은 확실히 다른 잡귀와는 달랐다. 시키는 일도 잘했지만 시키지 않은 일도 잘했다. 온객행이 귀왕이 된 날 밤, 노곡주가 고통으로 정신을 놓기 전에 말했다. 온객행은 그 누구보다 귀곡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다음 귀곡주를 아주 잘 골랐 노라고. 온객행은 화가 나서 곡주의 혀를 잘랐던 것 같다. 온객행은 평상에 앉아 하인이 내오는 차를 보았다. 오늘은 또 무슨 독을 탔을까 기대가 되면서도 예상을 벗어 나지 않는 장난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이 손을 들어 주자서를 불렀다. 문간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주자서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온객행의 손짓이 빨라지자 주자서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주자서가 다가오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목을 채서 자기 무릎에 앉혔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듣고 온객행이 작게 웃었다. 차를 내왔던 하인이 온객행의 웃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온객행은 하인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나가보라고 말했다.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석실 문 밖에 서 있는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만 있는 것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조면사를 벗기며 말했다.
“아서. 오늘은 말 할 마음이 들어?”
주자서가 밝아진 시야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뭘?”
온객행이 얼굴을 가깝게 붙이며 말했다.
“입 안 무겁다더니, 거짓말.”
그리고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는 흠칫 몸을 굳히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고 입술을 떼며 말했다.
“왜 안 밀어내?”
주자서가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무서워.”
온객행이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뭐가?”
주자서는 한참 말이 없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죽일 거야?”
온객행이 몸을 떼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눈을 내리 깐 채로 온객행을 마주보지 않았다. 그게 짜증난 온객행이 주자서의 턱을 잡았다. 뭔가 말하려는 데 밖에서 잡귀 하나가 고했다.
“양연입니다.”
온객행이 작게 혀를 차고 조면사를 다시 주자서에게 씌워주었다. 조면사가 씌워지고 나서야 주자서는 온객행과 시선을 맞추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고는 말했다.
“들어오게.”
양연이라는 자는 입이 양 옆으로 찢어져 모습이 흉악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말이 없다. 양연은 문간에 멀지 않은 곳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양연에게 말했다.
“양형은 참 속도 없소.”
양연이 부들부들 떨며 웃음을 참고 말했다.
“저라고 참고 싶기만 하겠습니까, 히히히.”
양손으로 입을 막은 양연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조면사를 쓴 염귀를 보느라 양연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곧 밖에서 식시귀 보아가 기별도 없이 들어왔다. 식시귀가 된 보아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적사귀보다 부리는 수하가 많아졌다. 이제 무상귀나 개심귀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온객행이 조면사 위로 주자서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보아가 말했다.
“그게 염귀요?”
온객행이 크게 한숨을 쉬고 염귀를 놓아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백형에게 원한이 있지 않습니까?”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연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침 백형이 귀곡 밖에 있으니 아주 일이 쉽겠어요.”
온객행이 하인을 부르자 하인이 소반에 서신을 들고 들어왔다. 온객행은 서신을 들어 손에 몇 번 치더니 말했다.
“제가 이렇게까지 도와드렸는데… 안되면, 두분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
양연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히히’ 하고 웃었다. 온객행도 ‘하하하’ 그들을 보고 마주 웃었다. 온객행은 서신으로 보아를 가리켰다가 고개를 흔들고 양연에게 서신을 주었다. 서신을 받은 양연이 받은 자리에서 서신을 펴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온객행에게 포권하여 인사하고 보아와 함께 석실을 나갔다.
온객행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 앉아 염귀를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주자서의 등허리를 쓸며 온객행이 말했다.
“염귀, 누가 보냈는지 말하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뿌리치며 말했다.
“정말이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기억하려고 하면 머리가 너무 아파.”
주자서는 어젯밤에도 기억해내 보겠다고 한참 머리를 쥐어 뜯다가 또 코피를 쏟았다. 그 모습을 온객행도 모두 보았던 터라 뭐라고 더 다그칠 만한 것도 없었다. 맥이 풀린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오늘은 목 안 말라?”
주자서가 온객행의 물음에 고개를 휙 돌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행동이 귀여워서 또 부스스 웃어버렸다. 주자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물이 가득한 방으로 주자서를 데리고 갔다. 주자서를 문간에 세워 두고 온객행이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화려한 함(函)이 여기 저기 놓여있자 주자서도 호기심이 일어 온객행 근처로 가서 함을 열어 보며 구경했다. 어떤 함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화려한 비녀가 들어 있었고, 어떤 함에는 진주가 가득했다. 주자서가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에게 말했다.
“너…아니, 귀왕은 엄청 부자구나.”
온객행이 어떤 함에서 무언가 찾아 주자서에게 다가와 말했다.
“부자라서 싫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면서 다른 함에 들어 있는 패옥을 만지며 말했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며 그의 요대에 무언가를 매달았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허리에 매달린 것을 보았다. 자개와 마노로 만든 학으로 장식된 구리로 만든 병이다. 주자서가 병을 들어 보더니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이제 여기에 물을 담아 마셔. 원래는 술을 담는 용도인 것 같지만.”
주자서가 뚜껑을 열어 병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병 안에서는 술냄새가 났다.
주자서가 뚜껑을 닫아 허리춤에 달며 말했다.
“그냥 네가 마시는 차를 나눠 마시면 될 텐데… 뭘 이런 걸…”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전에서는 내가 주는 것 말고 다른 것은 먹으면 안돼.”
주자서가 입을 삐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아서, 우리 술은 같이 안 마셔봤네?”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난 술 싫어.”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왜?”
주자서는 왜 술이 싫은 지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게. 왜 싫을까?”
온객행은 또 맥이 풀려 부스스 웃었다.
“그럼 오늘은 술을 마셔 볼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를 대전 밖으로 안내했다.
“도산부에는 좋은 술이 많아. 마침 주인도 없으니 딱 좋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이끌려 나가며 물었다.
“도산부? 불길한 이름이네.”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도산부의 담을 훌쩍 넘었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조면사가 들썩이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조면사를 잡고 물었다.
“근데 이건 언제까지 쓰고 있어야 하는 거야? 매두홍(埋頭紅)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를 창고로 이끌며 말했다.
“그럼 나에게 시집 올래?”
주자서가 조면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온객행이 창고의 문을 열며 말했다.
“첩이었다며, 내가 정실로 맞아 줄게.”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정실?”
온객행이 실내에 있는 술 단지를 둘러보더니 단지가 놓여 있는 탁자 아래에서 흙이 묻은 단지를 꺼냈다. 주자서에게 한 병 주고 한 병 더 꺼내며 말했다.
“백명은 제일 좋은 술은 항상 여기에 숨겨 두거든. 이제 주인이 없으니 내가 마셔야지.”
그리고 주자서에게 그 병을 주고 다시 창고 밖으로 나가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훌쩍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주자서는 술단지를 안고 가만히 온객행에게 안겨 있었다. 온객행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올랐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얕은 경공으로는 오를 수 없어 평소 귀신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종종 온객행 혼자 술을 마시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산 끝에 걸린 해가 곧 질 모양이다. 황혼에 하늘이 붉다. 멀지 않은 곳에 막 차오르기 시작한 초승달이 지는 해의 뒤를 따른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 털썩 앉아 주자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자서는 들고 있던 단지 중에 하나를 온객행에게 건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조면사를 벗고 앉았다. 온객행은 진흙으로 봉해 놓은 단지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주자서도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단지를 열었다. 단지 안에서는 향긋한 꽃냄새가 났다. 온객행이 단지를 들어 입을 축였다. 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입가에 술이 흘러 입술이 번들거렸다. 멍하니 온객행의 입술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가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소매를 들어 입가를 닦은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것은 홀연히 떠나는 객과 같으니, 한말 술로 서로 나누며 즐기면 오롯이 충분하고 부족함 없네.”(4)
주자서가 온객행을 따라하듯 단지를 들어 술을 마셨다.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사람의 생명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인생은 홀연히 사라져 가고 마는 것. 그러니 생전에 맛있는 술과 좋은 의복을 입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떠 한가?”(5)
온객행이 술단지를 내려놓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우와, 이 술 독하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며 말했다.
“너는 정말 정체가 뭘까?”
주자서가 허리춤에 달려있는 구리병을 꺼내 들고 말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나 또 반한 거 같아.”
주자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두사람은 지는 해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에 구리병을 들게 하고 단지를 기울여 술을 담았다. 술을 다 담고 나서 구리병을 다시 허리춤에 달며 말했다.
“나 술 싫지 않은 것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 맛있어?”
주자서가 다시 단지를 들고 술을 마셨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입가에 흐르는 술을 보고 있다가 다가가서 핥았다. 주자서는 그게 재미있는지 술을 머금고 웃었다. 온객행이 입가를 지나 입술을 핥고 주자서의 입안에 들어 있는 술을 마시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밀면서 말했다.
“네 것 마셔.”
온객행이 얼굴을 붙여 주자서의 입술을 조금 더 핥다가 말했다.
“이게 더 맛있는 거 같아.”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술은 맛없는데, 너랑 마시니까 괜찮은 거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거 마음 주겠다는 소리야?”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니야. 아니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손으로 밀면서 말했다.
“나는 첩이었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내 정실해.”
주자서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기왕이면 나도 장가가고 싶었는데…”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마주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시집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꺾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온객행이 울상을 꾸며서 말했다.
“왜? 나는 싫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너를 데려가면 우리 할머니 넘어가시겠네.”
온객행이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랑 살았어?”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며 물었다.
“어? 뭐라고?”
온객행의 표정은 슬프기도 하고 또 기쁘기도 하고 복잡해 보였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에 들러붙어 고개를 어깨에 기대고는 말했다.
“내가 아서에게 시집 갈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나는 데릴사위가 되는 건가?”
이번엔 온객행이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자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셔?”
온객행의 표정이 가라 앉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답없이 하늘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하늘을 가리켰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가리킨 곳을 보고 있다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시집살이는 안 하겠네.”
온객행이 주자서의 옆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은 물으려고 하다 말았다. 그가 묻지 않았으니 온객행도 묻지 않기로 했다. 다시 주자서의 허리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단지를 들어 술을 더 마시고 물었다.
“근데 하늘을 나는 거, 나는 못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가 맥을 짚듯이 잡아 보았다. 느껴지는 기운에서 알 수 있다. 주자서에게는 내공도 내단도 없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거 할 수 있으면 좀 멋있을 거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주자서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게, 스스로에게. 너 정말 너무 매달린다. 내가 그렇게 좋아?”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디에 가둬 두고 싶어. 아무도 못 보게. 나만 볼 수 있게.”
주자서가 몸을 떨며 말했다.
“우와, 그거 좀 섬뜩하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생각만 해. 입밖으로 내지 마. 그건 진짜 싫다.”
온객행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할게. 근데 진심이야. 정말 그러고 싶어.”
주자서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동안 대답이 없다.
주자서가 무릎에 고개를 기대 온객행을 보며 물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고개에 맞춰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잘 생겼어.”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생겼지. 또?”
온객행이 점점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다정하고 재밌어. 너랑 있을 때는 다른 건 잘 생각이 안나.”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다정한 걸까? 재미있는 것도 잘 모르겠는데…”
온객행이 쪼그리고 앉은 주자서를 팔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
주자서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래?”
온객행이 고개를 숙여 드러난 뒷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응. 뭐든 다 해주고 싶어.”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어스름한 황혼 끝에 걸려 있던 상현달마저 진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온객행을 향해 웃었다. 그 웃음은 어쩐지 억지로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해서 온객행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연은 자신의 입을 찢고 사술을 써서 웃음을 멈추지 않게 만든 백명을 찾아 죽였다. 백명은 원래 무공이 출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곡을 나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양연은 백명과 함께 있던 설비에게 물었다.
“곡주가 너를 잡아 죽이겠다고 사람을 풀었어.”
설비가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이 곳에 백명을 데리고 온 것은 곡주가 시킨 일인데!”
양연이 ‘히히히’ 웃으며 말했다.
“곡주가 자네 동생을 잡고 있는 것은 아는가?”
설비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양연이 웃으며 말했다.
“진광전에 숨겨 놓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백명이 그 아이를 시켜 적사귀에게 독을 타게 했다더군.”
설비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벌떡 일어나자 보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만약 적사귀 밑에서 살아 남는다면 그자도 이름을 받겠군.”
양연이 의아하다는 듯이 보아를 보았다. 설비가 보아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바보로 죽는 것보다, 바보로 사는 것이 낫지.”
보아가 양연에게 말했다.
“개심귀가 되었으니 주변에 둘 사람은 고르시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설비가 보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놈도 속이 아주 시커멓구먼.”
양연이 웃으며 말했다.
“히히히. 귀곡에서 속이 까맣지 않은 자가 어디 있소? 히히히.”
설단은 잡귀가 가져온 목간을 읽다 부러뜨려 버렸다. 필안과 무구는 어디에 갔는지 요 며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개심귀는 설비를 잡으러 귀곡을 나갔다가 화를 당했다. 온가놈은 적사귀를 만났다고 했다. 그가 곡주의 자리에 앉고 이제 막 일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고오와 황작, 그리고 백명이 죽었다. 그동안 제일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설단의 자리도 바람 앞에 등롱이 되고 말았다. 필안과 무구가 원해서 자신을 따르지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 갔길래 둘 다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라지기 전에 온가놈을 만났다면 무상귀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상귀는 하인을 시켜 박정부에 기별을 넣었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법이다. 나부몽은 출신이 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귀신들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보통 사내보다 배로 똑똑했기 때문이다. 힘의 균형이 깨지고 세태를 파악할 수 없을 때에는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정리된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무상귀는 그녀가 새로운 염귀에 대한 정보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했다.
무릎에 고개를 묻고 주자서가 어눌하게 말했다.
“나는 진짜 대전에 있는 거 싫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옆에 어깨를 붙여 앉고 말했다.
“응. 나도.”
주자서가 고개를 들고 다시 말했다.
“이… 이 매두홍 쓰는 것도 싫어!”
그리고 옆에 놓았던 조면사를 멀리 던졌다. 조면사는 주자서의 손 끝에서 나풀나풀 떨어져 다시 주자서의 발치로 돌아왔다. 주자서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이 씨! 짜증나!”
하고 투정을 부렸다. 온객행이 조면사를 주워서 소매에 넣고 말했다.
“그래도 써야 해. 널 위한 거야.”
주자서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 말했다.
“나도 알아. 다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지?”
안고 있던 무릎을 풀어 앉고는 입고 있는 옷의 소매를 펄럭이며 말했다.
“이 옷도, 전부.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조금 훌쩍이며 말했다.
“나도 알고 싶어.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을까? 귀왕, 여기는 지옥이야?”
온객행이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응. 여기는 지옥이야.”
주자서가 몸을 돌려 온객행을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온객행이 ‘허’하고 웃으며 주자서를 마주 안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너도 귀왕 그만하고, 나도 염귀 그만하고.”
온객행은 정말 그러고 싶어서 주자서를 더 꽉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그럼 다 줄게.”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나도 도망가고 싶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뒤로 밀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대로 뒤로 밀리다 결국 풀썩 바닥에 누웠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 옆에 팔을 놓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건 좀 새롭다.”
온객행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주자서가 입술을 붙여왔다. 주자서가 먼저 입술을 붙여 오는 것은 처음이라 온객행은 기분이 얼떨떨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입술을 핥다가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가 망설이더니 입술을 떼고 반응이 없는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날이 어두워 주자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까웠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이마에 코에 뺨에 입술을 맞췄다. 온객행은 간지러워서 조금 웃었다. 주자서가 한참 입을 맞추다 입을 떼고 말했다.
“왜… 왜… 너는 기분 안 좋아?”
온객행이 팔을 들어 주자서의 얼굴을 붙잡았다. 주자서의 팔이 풀썩 꺾이더니 온객행 옆에 같이 누웠다. 주자서는 뺨을 온객행의 손에 기대며 말했다.
“얼른…”
온객행은 손에 잡힌 주자서가 사랑스러워서 주자서가 한 것처럼 이마에 코에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주자서도 간지러운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온객행이 얼굴을 붙여 주자서의 입술을 소리가 나게 빨았다. 주자서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졌다. 온객행은 그 탄식마저 아까워서 얼른 입을 붙였다. 주자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입안을 탐했다.
온객행은 흥분해서 주자서의 입 주변은 물론 목덜미도 물고 빨았다. 주자서는 처음에는 조금 바르작대더니 곧 별 반응이 없었다.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리는 데도 주자서는 가만히 있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 위에 올라타며 그의 앞섶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는 맨 살에 기분이 좋아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끙끙댔다. 그에 비해 아래에 누운 사람은 별 반응이 없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온객행은 정염(情炎)이 일어 나쁜 마음이 들었다가 맥이 풀려서 주자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 너는 뭘까?”
온객행이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누워 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의 손속에 다 흐트러진 앞섶이 야하다. 온객행은 한참 주자서의 속살을 보고 있다가 앞섶을 다시 여며주었다. 주자서 옆에 놓인 주자서가 마시던 술동이를 집어 들었다. 거의 남지 않았다. 온객행은 자기 몫의 단지를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러다 누워있는 주자서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아무리 몸을 붙이고 있어도 느껴지는 간극을 줄일 수 없어 답답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안고 돌아왔을 때 박정부의 거처에는 고상과 목란이 있었다. 축 늘어진 주자서를 보고 놀란 두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온객행이 침상에 주자서를 조심스럽게 올려 놓자 고상이 주자서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 보고는 목란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고상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하’ 하고 코웃음 쳤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인, 망서가 벌써 싫어 지신 거예요?”
온객행이 침상에 있는 주자서의 장포를 벗기는 목란을 물리고 스스로 주자서의 옷을 벗겼다. 목란은 흐트러진 주자서의 앞섶을 보고 온객행과 주자서를 번갈아 보다가 받은 장포를 걸어 놓고 방을 나갔다. 고상이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주인, 망서는 귀신이 아니라 아직 귀곡을 잘 몰라서 그래요.”
온객행은 고상이 역성을 드는 것이 신기해 주자서의 몸에 이불을 덮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 주인. 망서 같은 애가 또 어디 있겠어요. 다정하고 박정부 하인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건드리지도 않잖아요. 진짜 좋은 애예요.”
온객행이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의 뺨을 쓸며 말했다.
“알아. 나도.”
고상이 온객행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그니까 나중에라도 질리면 죽이지 말고 어… 어디 가둬 놔요.”
온객행이 웃으며 고상을 보았다.
“그런 건 싫데, 말하지 말고 생각만 하래.”
고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온객행이 일어나 장포를 벗었다. 고상이 다가와 온객행의 장포를 받으며 물었다.
“주인, 망서도 주인 좋아해요. 말을 안 하는 것뿐.”
온객행이 침상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알아. 나도.”
고상은 온객행의 장포를 옷걸이에 걸어 놓고 처소를 나왔다. 나오는 길에 보았던 망서를 보는 온객행의 표정은 고상이 처음 보는 것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고상은 그저 주인이 망서를 계속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4) 고시십구수 중 세번째
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 斗酒相娯樂 聊厚不為薄
인생이 천지사이에 사는 것은 홀연히 멀리 떠나는 여객과 같다.
한말 술로 서로 나누면서 즐기면 애오라지 충분하고 부족함이 없도다.
(5) 고시십구수 중 열세번째
年命如朝露 人生忽如寄 不如飲美酒 被服紈與素
이 세상을 사는 사람 생명은 아침이슬과 같구나. 인생은 홀연히 사라져 가고 마는 것, 그렇지 못 할 바에 생전에 맛있는 술과 좋은 의복을 입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것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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