吊死鬼 | 적사귀
설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정부에 찾아오고 난 이후부터 귀곡에서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은 박정부의 여귀들이 그를 처리한 줄 알았다. 개심귀와 적사귀가 함께 일을 꾸미는 것이라면, 급색귀를 꼬드겨서 무상귀를 없애는 쪽이 더 이야기가 빠를 수도 있다. 온객행은 곰곰이 다음 수를 생각하며 주자서의 머리를 빗었다. 주자서는 서안 앞에 앉아 예의 희상귀가 새로 내준 장부를 매일매일 채워 넣고 있었다. 나름대로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인지 붉은 색으로 칸을 나눠서 일별로 구분해 놓았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치는 정말 어디서 글이나 읽던 서생일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이 불쑥 물었다.
“아서, 한담에 빠지기 전에 뭐 더 기억나는 거 없어?”
주자서가 서안에 찰싹 붙어서 집중하는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온객행이 몸을 가까이 붙여 그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 놓자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면서 말했다.
“애기야. 방해하면 안돼.”
주자서가 오늘 분의 숫자를 목간에 정리해서 적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 안 나. 왜?”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등 뒤에 붙어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물었다.
“샤워(下卧; 아래에 눕다.)가 뭐야?”
주자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감고 말했다.
“너가 하고 싶다고 했어. 샤워.”
주자서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기억 안 나는데… 근데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닐 걸.”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그런 게 뭔데?”
주자서가 온객행을 흘겨보며 말했다.
“발랑 까져 가지고…”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에 얼굴을 묻고 물었다.
“그래서 싫어?”
주자서가 다시 시선을 목간으로 돌리며 말했다.
“음…응. 조금…? 아마?”
온객행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싫어?”
주자서가 붓을 놓고 온객행을 밀어내며 말했다.
“또! 또, 형을 놀리지. 애기는 가서 귀왕의 일을 해.”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눈썹이 축 처지더니 울상을 했다.
주자서가 그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애기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온객행을 일으켜 세웠다. 주자서는 서안에 놓인 장부와 목간을 들고 온객행에게 말했다.
“나 주인한테 보고하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온객행이 주자서를 졸졸 쫓아가며 말했다.
“내일 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애기는 기다리고 있어. 형이 가서 저녁도 가지고 올 게.”
온객행이 다시 입을 쭉 내밀자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목란누님이랑 유이는 어디 갔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있을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온객행이 가깝게 다가서며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놓고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언제 마음 줄지 모르니까.”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진짜… 너는…”
주자서가 온객행을 올려 보며 말했다.
“너 나보다 키도 크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180넘는데 너는 키 몇이야?”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팔십? 뭐가 백팔십이야?”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키, 신장! 이렇게 크니까 모델일도 했지.”
온객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가자 주자서가 재빨리 장지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나 얼른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온객행은 주자서를 잡는 것도 잊고 주자서가 한 말을 되 뇌였다.
“모델(模特; 모호할 모는 고서에서 간첩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온객행의 머리 속이 시끄럽다. 세작(細作)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누구의? 주자서는 온객행이 박정부로 데리고 온 이후로 한번도 박정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만약 누군가의 세작이라면 목적이 대체 뭘까? 온객행이 낮게 목란을 불렀다. 곧 밖에서 목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이 없는 동안 주자서가 누구를 만나서 누구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었다. 작은 아이들부터 부엌과 홍화 밭의 어멈까지 그 수가 많다. 곧 고상이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
고상이 찬합을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오늘 개심귀가 귀곡 밖으로 나갔어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온객행이 고상의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자 고상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설비 그 놈을 따라 나간 것 같아요.”
온객행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설비가 죽지 않았어?”
그리고 목란을 보았다. 목란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자가 데려온 잡귀는 모두 잡아 죽였지만 그는…”
온객행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자 고상이 찻잔에 차를 따라 내밀며 말했다.
“아이, 주인. 걱정마세요. 설비 그 놈이 청성곡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온객행이 찻잔을 받아 들며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권했다.
“주인. 어서 저녁 드세요. 배고프죠?”
온객행이 뭔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상은 슬슬 눈치를 보며 목란을 일으켜 장지문으로 향했다.
“망서는 어디 갔어요? 망서나 찾으러 가야겠네.”
온객행은 비워진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주자서가 앉아 있던 서안으로 갔다.
방금 전까지 주자서가 사용했던 붓과 어제 썼다던 목간을 보았다. 붓으로 쓰는 것이 서툴다고 했다. 천축국의 숫자를 쓴다. 게다가 종종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온객행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온객행이 일어나 거처의 장지문을 열자 고상과 주자서, 목란과 유이가 장지문 앞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온객행이 문을 벌컥 열자 네 사람은 마치 잘못을 한 사람처럼 조용해지더니 고상과 목란, 유이가 주자서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리를 피했다. 주자서가 다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온객행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주자서가 잡힌 어깨를 한번 보더니 온객행에게 말했다.
“저녁은 같이 먹으면 좋잖아. 안 그래?”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에 들려 있는 찬합을 빼앗아 들고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탁자로 와서 의자에 앉혔다. 주자서가 순순히 온객행이 하는 데로 두었다.
온객행이 말이 없자 주자서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물에 흠뻑 젖어서 봤을 때와 비슷한 차가운 시선에 주자서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왜? 왜 그래?”
온객행이 일어나서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주자서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벌리자 온객행이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 누구야? 누가 보냈지?”
주자서가 손을 앞으로 뻗어 온객행을 멈추며 말했다.
“모른다니까! 정말 몰라. 알겠어. 생각해 볼 게.”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주자서는 물에 빠지기 전의 상황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햇살에 누군가의 별궁? 화원? 뒤죽박죽 머리속에서 정리되는 것이 없었다. ‘난간에 기대서 뭔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남총(男寵)이었나?’ 주자서가 작게 헐떡이며 머리를 부여잡자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주자서의 머리속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무슨 기억이 있는데 주자서가 그 근처에 다가 가려고만 하면 뿌옇게 흐려진다. 주자서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주룩하고 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어깨를 잡고 있던 온객행이 놀라 주자서의 턱을 잡았다. 주자서도 곧 코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손으로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나는 누군가의 첩이었나 봐.”
주자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온객행을 보다가 눈이 뒤집히며 풀썩 다리가 꺾였다. 온객행이 놀라서 쓰러지는 주자서를 품에 안았다. 온객행이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하다. 맹파탕으로 정말 모든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것일까? 온객행은 코피로 더러워진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피가 스미는 것이 싫어서 소매를 들어 코피를 닦았다. 닦이지 않고 더 스민다. 마치 사람을 죽이고 난 다음의 피처럼. 온객행은 피로 얼룩진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주자서의 얼굴은 피와 어울리지 않는다.
온객행은 진광전 안에 잡귀가 내온 차가운 차로 입을 헹구며 적사귀를 기다렸다. 곧 땀에 흠뻑 젖은 적사귀 길도가 들어왔다. 온객행이 심드렁하게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길형, 오랜만입니다.”
적사귀가 잡귀에게 물을 부탁하며 온객행이 앉은 자리 옆에 털썩 앉았다.
“귀곡주께서 하찮은 진광전까지 어찌 발걸음 하셨습니까?”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전혼사는 어때요? 잘 만들어집니까?”
적사귀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땔감을 구하는 게 제일 큰 일이지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양연의 입을 찢어 놓은 것이 개심귀 백명이오?”
적사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온객행이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가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 또한 개심귀가 한 짓이오?”
적사귀가 웃으며 말했다.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라는 말이요?”
온객행이 심각한 척 목소리를 꾸며 말했다.
“요즘 귀곡에 제가 알지 못하는 독이 보여서 말입니다.”
그때 잡귀가 적사귀가 마실 물을 들고 나왔다. 온객행이 잡귀가 가져온 물을 빤히 보며 말했다.
“길형께서 물만 드신다는 것을 개심귀는 알고 있지요?”
개심귀가 손에 들린 물잔을 보고 다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적사귀가 들고 있는 물을 힐끔 다시 보더니 말했다.
“백명이 어찌 개심귀가 되었는지 아시오?”
백명은 이전 개심귀의 심복이었다. 그는 전대 개심귀를 독살하여 그 자리에 앉았다. 개심귀는 무공이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입을 아주 잘 놀렸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요리조리 싸움을 피하며 다른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렇게 이간질하여 지금의 개심귀 자리도 얻게 된 것이다. 길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관계는 관심 없었기 때문에 개심귀가 저의 무공을 이용하여 득을 보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길도에게 전 적사귀를 죽이라고 부추긴 것도 백명이다. 의심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두려워하게 만든다. 온객행은 귀곡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모든 일을 의심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대가가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온객행은 자리를 일어나며 길도를 떠 보았다.
“길형, 물은 끓여 드시는 게 좋습니다. 혹시 끓인 물의 색이 탁하면 생강을 드세요.”
적사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는 온객행에게 물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요?”
온객행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전혼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온객행은 그대로 나와 개심귀의 거처인 도산부(刀山府)로 향했다. 적사귀를 부채질해 놓았으니 이제 양연(楊然)을 꼬드기러 가야겠다.
주자서는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천개정도 보면 그 중에 두세개는 원하는 배역이 아니어도 연락이 올 수 있다고 말이다. 간간이 들어오는 모델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 아는 선배의 선배가 소개해준 작은 기획사에서 광고를 하나 찍었다. 그 동안 했던 일에 비해서 받은 금액이 너무 좋아서 주자서는 내심 그 기획사에서 계속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기획사의 진대표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대표는 종종 주자서를 불러 밥도 사주고 모델이라면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며 고급 브랜드의 옷도 사주었다. 주자서는 너무 부담스럽다면서 옷은 받지 않고 밥만 얻어먹었는데, 그와 종종 일을 함께 했던 다른 모델들은 거리낌 없이 그 대표가 사주는 옷을 받았다.
몇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그 옷들이 탐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무 조건이나 이유 없이 받고 싶지는 않았다. 주자서가 고고하게 군다며 동료 모델들도 그를 싫어했다. 밥을 먹자는 전화를 받고 받은 주소는 음식점이 아니었다. 가겠다고 말했으니 나타나지 않으면 실례일 것 같아 주자서는 무턱대고 바안으로 들어갔다. 진대표는 주자서가 들어오자 그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 어깨에 팔을 걸고는 술을 따라 주었다. 주자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을 거절하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진대표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더니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는 이 바닥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이렇게 고고하게 굴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주자서는 진대표의 말에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대표가 주자서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비싸게 굴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어.”
주자서가 딱딱하게 얼어서 반응이 없자, 진대표는 주자서의 어깨에 있던 손을 내려 주자서의 등허리를 쓸었다. 주자서가 몸을 떨자 진대표는 웃으며 그에게 더 몸을 붙였다.
“반응이 귀엽네.”
진대표의 말에 주자서는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모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마치 이런 일은 항상 있는 일인 양 무관심하게 앉아 핸드폰을 했다. 바로 눈 앞에서 진대표가 동료를 희롱하고 있는데! 주자서는 작게 숨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모델과 진대표가 그에게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그 날 이후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금액에 상관없이 몸이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자서 인생 처음으로 직업 선택에 대해, 미래에 대해, 꿈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그 회의감은 좌절감을 넘어 그를 절망하게 했다.
고상이 찬합을 회수하러 다시 방 안에 들어 갔을 때, 주자서는 온객행의 품에 곱게 안겨 있었다. 고상은 조심스럽게 기척을 지우고 찬합을 챙기러 다가갔는데, 주자서의 얼굴이 온통 피 칠갑이었다. 고상이 놀라며 주자서의 얼굴을 만졌다.
“망서! 망서! 왜 이래?”
온객행은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는지 주자서를 번쩍 안아 침상 위에 올렸다. 고상은 주자서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펴서 잘 눕혔다. 대야에 물을 받아 영견에 물을 묻혀서 흘러내린 코피를 닦아냈다. 고상이 말없이 주자서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본 온객행은 방을 나가버렸다. 온객행이 나가자 고상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질리신 건가…”
고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이를 찾았다.
주자서가 쓰러진 것을 안 유이가 법석을 떨어서 의술을 아는 어멈을 불러왔다. 어멈은 주자서가 남자인 것을 보고 조금 불편한 기색을 비치며 그의 맥을 짚었다. 어멈은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멈은 사내를 진맥해본 적은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냥 기혈이 조금 상했을 뿐이라고 했다. 유이가 기혈이 상했는데 왜 코피를 쏟냐며 어멈을 귀찮게 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다. 유이가 울상을 하고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곡주님께 한번만 봐 달라고 부탁드리면 안될까?”
고상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어쩌면 곡주가 그런 걸 수도 있어.”
유이가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목란이 그들에게 말했다.
“질리신게지.”
고상과 유이가 목란의 얼굴을 보았다. 목란이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그날 밤 늦게까지 박정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누구를 거느리고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온객행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상은 혹시 주인이 자기가 방 안에 있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싶어서 일부러 방안에 주자서 혼자 두었다. 혹시 또 마음이 바뀌어서 잘 해 줄까 싶어서 말이다. 그 전에 데리고 왔던 애들은 모두 살랑대고 애교를 부리는 애들이라 시끄럽고 거만했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망서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사내라고 여자를 밝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냥 다정한 사람이었다.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주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노파를 돕는 사람이었다. 귀곡에서 사람은 흔하지 않다. 고상은 내심 망서가 주인의 마음을 잡아서 평생 같이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만큼 주자서는 좋은 사람이다. 장지문 밖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자 따뜻한 차를 가지고 유이와 목란이 다가와 고상 옆에 앉았다. 목란이 찻잔을 주며 차를 따랐다. 유이가 고상을 보고 말했다.
“망서는 정말 달의 신이 아닐까?”
고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목란이 자기 찻잔에도 차를 따르고 주전자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아상, 하늘을 봐. 오늘은 삭(朔)이야.”
셋은 나란히 장지문에 기대 차를 마시며 달도 없는 밤하늘을 구경했다.
어스름하게 새벽동이 틀 무렵, 온객행은 흠뻑 젖어서 처소로 돌아왔다. 온객행은 문 앞에 앉아 사이좋게 잠들어 있는 세사람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주자서는 온객행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많이 산 듯했다. 온객행은 괜히 그들을 깨우기 싫어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희미한 등롱이 타는 소리만 나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온객행이 침상으로 다가가 누워있는 주자서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그는 숨을 쉬고 있다. 온객행은 침상 옆에 털썩 주저 앉아 주자서를 보았다. ‘너를 보낸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대단한 놈이구나.’ 온객행은 웃음이 났다. 온객행이 웃는 소리에 주자서가 눈을 떴다. 바닥에 주저 앉은 온객행을 보고 이불을 걷고는 말했다.
“귀왕? 왜 거기 있어 이리와.”
온객행은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마주 보았다. 온객행이 움직이지 않자 주자서는 다시 풀썩 이불을 내리고 돌아 누우며 말했다.
“난 더 자겠어.”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제야 온객행의 몸이 젖은 것을 알게 된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왜 이렇게 젖었어?”
온객행은 주자서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알 수가 없어 화가 났다.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얼른 옷부터 갈아 입어. 감기 걸리겠다.”
주자서가 귀왕의 겉옷을 벗기며 말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밖에 비라도 오는 거야? 어디서 이렇게…”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당황했는지 온객행을 밀어내더니 온객행이 그의 입술을 핥고 혀를 입안으로 집어넣자 온객행의 어깨를 꾹 잡아왔다. 온객행은 이런 행동도 모두 거짓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화가 났다. 주자서가 숨이 모자랐는지 고개를 돌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짓이 애틋해서 품에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마주 안았다.
“귀왕.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의 첩이었어?”
주자서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 첩이었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누구의 첩이었는지 알아야 널 과부 만들어서 데려오지.”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조금 더 웃고 말했다.
“너 때문에 나도 다 젖었어.”
주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딱히 온객행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온객행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더니 말했다.
“이불도 다 젖겠다.”
둘은 말없이 서로 안고 있었다. 주자서의 뱃속에서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났다. 주자서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더니 말했다.
“나 어제 어떻게 잠들었지?”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며 마주 보았다. 주자서가 젖은 머리카락을 온객행의 얼굴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 어제 저녁밥 먹었나?”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잡힌 손을 자기 입가로 가져가서 온객행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한참만에 눈을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반절쯤 준거 같아.”
온객행이 방금 주자서가 입을 맞춘 자신의 손을 보고 부스스 웃었다.
“겨우 반절?”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건 마음뿐이니까, 아껴야지.”
온객행이 주자서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다 준 것 같아.”
조금은 울상이 된 것 같은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그렇게 덥석덥석 다 주면 어떡해.”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는 어쩌다 귀왕이 됐을까?”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은 울컥 슬픔이 치밀었다. 온객행의 등이 떨리며 그가 훌쩍이자 주자서는 말없이 온객행의 등을 토닥였다. ‘어쩌다 너는 귀왕이 됐을까? 이렇게 여리고 어린데…’ 주자서는 온객행이 안타까워 찔끔 눈물이 났다. 어쩌면 반절보다 훨씬 많이 마음을 준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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