急色鬼 | 급색귀
무상귀는 실로 오랜만에 박정부에 발을 들여 놓았다. 희상귀가 옆에 두는 아이들은 미색도 미색이지만 무공이나 머리가 비상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여인이 아니라 사내였으면 몇은 아마 악귀의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희상귀가 상석에 앉아 차를 마셨다. 여럿의 하인이 그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무상귀에게 살기를 내뿜는 것을 숨기지 않는 고수들이다. 희상귀는 무상귀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다. 자리를 권하지도 않고 덩그러니 세워놓고 하인들에게 이것 저것 지시를 했다.
설단은 눈치를 보며 손을 모아 포권하여 인사했다.
“희상귀, 별래무양 하십니까?”
희상귀가 인상을 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희상귀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인들이 하나 둘 무상귀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그를 포위했다. 설단이 ‘허’ 하고 헛웃음 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희상귀께서는 염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희상귀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손가락에 호갑투를 끼우는 하인에게 차를 새로 내와야겠다며 작게 투정했다. 설단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설단에 소매에서 서신을 꺼내고 말했다.
“이것이 염귀를 그린 그림이 맞는지요?”
설단이 서신을 내밀자 곧 희상귀 옆에 있던 하인이 다가와 서신을 받았다. 염귀는 하인이 가져온 서신을 받지 않고 새로 내온 김이 나는 차를 마시며 호갑투를 쓸었다.
작게 한숨을 쉰 희상귀가 말했다.
“무상귀는 필안과 무구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무상귀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상귀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희상귀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고 말했다.
“사내들은 어찌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모른다는 말입니까?”
무상귀가 고개를 들어 희상귀를 보았다. 희상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둘 중에 하나는 죽었을 테니, 다음은 자네 차례겠군.”
무상귀의 눈썹이 움찔했다.
나부몽은 희상귀가 된 이후로 무상귀를 하대한 적이 없다. 지위도 그러했고 연배도 그러했다. 그런 그녀가 일부러 하인들 앞에서 무상귀를 하대 한다는 것은 설단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설단이 주변에 그를 포위하고 있는 여귀들을 힐끔 보고 말했다.
“희상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희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설단을 내려보며 말했다.
“이리 아둔해서야… 무상귀라는 이름이 무색하네.”
나른하게 발걸음을 옮긴 희상귀는 더 말을 듣지 않고 기척 없이 응접실을 나갔다. 무상귀는 희상귀가 아직 보지 않은 자신이 가져온 서신을 한번 보고 희상귀가 나가는 길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를 갈았다. 머지않아 누군가가 설단의 머리와 이름을 가지러 올 것이다.
주자서는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그가 작은 소리로 ‘무…물…’이라고 말하자 그를 안고 있던 몸이 일어나 곧 입에 찻잔을 대주었다. 주자서는 물을 마시고 눈을 떴다. 밝은 빛이 눈으로 들어오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주자서는 다시 벌렁 뒤로 누워 머리를 감싸고 ‘끙’ 소리를 냈다.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자서가 실눈을 떠보니 내의만 입은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그를 보고 있다. 주자서가 다시 눈을 감고 말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온객행이 팔을 괴어 옆으로 누워 주자서의 얼굴을 쓸며 말했다.
“더 자.”
주자서가 옆으로 누워 온객행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이게 숙취라는 걸까?”
다 잠긴 주자서의 목소리를 듣고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살짝 한쪽 눈을 뜨고 온객행을 보았다.
“너는 괜찮아?”
주자서의 걱정이 기꺼워 온객행은 좀 더 웃고 대답했다.
“응.”
주자서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너 술이 세구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어제 밥도 안 먹고 마셔서 그래.”
주자서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맞아. 지금 엄청 배고파.”
온객행이 이불을 들춰 주자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배고파?”
주자서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물었다.
“그럼 뭐 먹으러 갈래?”
주자서가 파르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는 물었다.
“지금?”
온객행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응. 내가 만들어 줄게.”
주자서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완벽한 신랑감이네.”
온객행이 이불을 치우며 말했다.
“간단한 것만. 가자. 일어나.”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우와, 혹시 내 머리 깨지지 않았어?”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돌려 신발을 신기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주자서는 거의 온객행에게 기대다시피 일어나서 말했다.
“어… 나 토할 것 같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일단 따뜻한 걸 먹으면 좋아질 거야.”
주자서는 온객행이 해주는 대로 가벼운 장포를 입고 처소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아슴푸레하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아 주자서가 몸을 바르게 하고 온객행을 따라 걸었다.
곧 도착한 주방에는 벌써 어멈 몇이 나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굴이 익숙한 어멈이라 주자서가 아는 척을 했다. 뒤따라 들어온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어멈들이 주자서를 반겼다. 온객행이 아궁이 하나를 차지하고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자 어멈들도 각자 하던 일을 했다. 주자서는 아궁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얼굴을 손에 묻고 끙끙댔다. 어멈 하나가 꿀물을 타서 주자서에게 건넸다.
“망서, 술 마셨어?”
어멈의 물음에 힘겹게 고개를 든 주자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술을 잘 못하나 봐요.”
그리고는 어멈이 건네는 따뜻한 꿀물을 마시고 ‘크으’ 소리를 냈다.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어멈이 ‘호호호’ 웃고는 주자서의 어깨를 툭툭 치고 다시 자기 할 일을 찾아 했다. 주자서가 다 마신 꿀물 그릇을 들고 일어나 설거지 통에 넣고 옆에 있는 설거지까지 모두 하기 시작했다.
주자서가 일어나서 부엌일을 돕기 시작하자 곧 하나 둘 하인들이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설거지를 하는 아이들이 들어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온객행이 국수 두그릇을 말아 주자서에게 갔을 때 주자서는 아이들과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이들이 웃으며 주자서에게 말을 건네면 주자서는 다정하게 ‘응’, ‘그래’ 같은 말로 받아주었다. 주자서가 그릇을 들고 있는 온객행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포에 아무렇게나 젖은 손을 닦았다.
아이들이 서있는 온객행을 보고 눈치를 보자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염귀의 일을 하러 가야 하니까, 우리 또 만나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주자서는 이 아이들도 뭔가 들은 말이 있겠거니 하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온객행에게서 그릇을 받아 부엌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간이 탁자와 의자가 있었는데 주자서는 거기에 국수를 놓고 자리에 앉았다. 박정부의 하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침을 준비하는 것을 보다 주자서는 그릇을 들어 국수의 국물을 마셨다. 온객행이 어색하게 주자서 옆으로 와서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주자서가 자리에 앉은 온객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맛있네.”
그리고 후룩후룩 국수를 먹었다. 온객행도 주자서를 보다가 국수를 먹었다.
먼저 국수를 다 먹은 주자서가 부엌 근처에서 일하는 하인과 어멈을 구경했다. 그들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인사하다가 뒤에 앉아 있는 귀왕을 보고 멈칫했다. 주자서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했다. 온객행도 다 먹었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오늘은 대전에 안 갈래.”
주자서가 고개를 획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가도 되지?”
온객행이 자기가 먹은 그릇과 주자서가 먹은 그릇을 들고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자서는 온객행이 부엌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박정부 안에 있을 거야?”
온객행은 잠깐 생각하더니 주자서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순순히 일어나며 물었다.
“오늘 뭐 할 건데?”
온객행이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사음부에 갈 거야.”
주자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진짜 싫은 이름이다.”
온객행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박정부에 있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래도 돼?”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갈래?”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건 싫어. 그냥 안가면 안돼?”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처소를 향해 걸었다.
두사람이 처소에 돌아오자 안에 고상과 목란이 있었다. 고상이 살갑게 다가와 인사하며 온객행의 시중을 들었다. 온객행이 씻고 옷을 입는 동안 주자서는 탁상에 앉아 목란과 실랑이를 했다. 대전에 가지 않으니 검은 장포를 입을 필요 없다는 주자서와 그래도 일단 염귀니까 입는 것이 좋다고 달래는 목란이다. 주자서가 목란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누님, 어차피 오늘은 계속 박정부에 있을 거니까 안 입어도 된다니까요.”
온객행이 준비를 마치고 탁자로 걸어와 목란에게 내민 찻잔을 마시고 말했다.
“입을 필요 없어. 목란, 오늘 염귀랑 같이 있게.”
목란이 대답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자서는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차를 따라 목란에게 내밀었다.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가 내민 찻잔을 받고 말했다.
“주인, 그럼 오늘 망서랑 놀아도 돼요?”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찻잔을 꺼내 차를 따라 목란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의 앞섶을 쓸고 말했다.
“오늘도 잘 생겼네.”
온객행이 부스스 웃고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왜 이래, 아상이 보잖아.”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급하게 시선을 돌린 고상과 목란을 보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장지문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을 게. 다녀와.”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가 놔주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거처를 나갔다.
온객행이 사음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식시귀가 한바탕 휩쓸어 놓은 후였다. 온객행이 급색귀의 수하인 주요(周窯)를 급하게 찾았다. 주요는 그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는데, 그가 어릴 때 유자업에게 겁탈을 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내를 극도로 싫어하고 여인을 좋아했다. 아직 죽지 않은 헐벗은 급색귀의 곁에 기녀들이 잠자리 날개 같이 얇은 옷을 입고 흐느끼고 있었다. 온객행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이들은 박정부로 데려가라.”
식시귀의 수하들이 들어와 그녀들을 데리고 나갔다. 곧 주요가 헐레벌떡 들어와 곡주 옆에 섰다.
“곡주!”
온객행이 상석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주요, 그대가 박정부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면 내가 급색귀의 자리를 주겠소.”
유자업이 엉금엉금 기어서 온객행의 발치로 가서 빌었다.
“곡주! 곡주! 당장 희상귀를 모시겠습니다. 희상귀를 모시게 되면 제가 제일 좋지요!”
온객행은 인상을 쓰고 유자업의 가슴을 발로 찼다.
“주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주요가 유자업에게 다가가 부채로 그의 살을 베었다. 온객행은 주요가 유자업의 살을 난도질하는 것을 조금 보다가 사음부를 나왔다. 보아가 온객행을 뒤따르며 말했다.
“설비(契飛)가 계가(契駕)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광전으로 향했다.
적사귀는 오늘도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온객행이 다가가 과거 백명이 앉았던 작은 의자에 앉아 말했다.
“계가를 죽이셨습니까?”
적사귀가 흐르는 땀을 닦고 가죽부대에 든 물을 마시며 다가왔다.
“아직.”
적사귀가 온객행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내게 독을 탔소.”
온객행이 적사귀를 앞서 걸으며 말했다.
“겨우 백명의 끄나풀 인걸요.”
길도가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죽었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석에 가서 앉았다. 곧 하인이 김이 나는 차를 내왔다. 온객행은 내온 차를 한번 적사귀를 한번 보더니 살포시 웃고 차를 한입 마셨다.
“백명을 계가의 형이 죽였으니 상을 주어야 지요.”
적사귀가 가죽부대의 물을 꿀꺽꿀꺽 마시더니 말했다.
“목숨이면 되겠소.”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살아만 있으면 됩니다.”
적사귀가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자리에 앉아 길도가 대접한 차를 모두 마시고 자리를 떠났다. 진광전을 나가는 온객행에게 잡귀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필안이 죽었습니다.”
온객행은 ‘흠’ 하고 말없이 대전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설단이 찾아올지 무구가 찾아올지 기대가 되었다.
희상귀는 오전에 돌아볼 일들을 모두 보고 여귀 하나에게 오늘 염귀가 박정부에 머무른 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부몽은 그동안 많은 사내를 보았지만 염귀, 아니, 여귀들 사이에서는 망서라고 불린다. 망서 같은 사내는 본적이 없다. 여자들 밖에 없는 공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데다 다정하고 사려 깊었다. 함부로 여인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슴없이 자신을 만지는 여귀들을 내치지도 않았다. 곡주가 데려온 자가 아니었으면 그를 기둥서방 삼겠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정리해 놓은 장부는 어떤 정해진 방법이 있어, 하루정도 망서가 글을 읽을 줄 아는 여귀 몇을 붙여 알려 주었더니 희상귀가 더 신경 쓸 일도 없어졌다. 게다가 그는 연인을 배신한 자를 죽인다는 박정부주 희상귀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했다. 나부몽은 희상귀가 된 이후 그런 소리를 처음 들어 보았다. 그것도 사내에게서. 그에게는 귀신 같지 않은 밝음이 있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일을 마치고 잠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다시 돌아온 응접실에는 무상귀가 놓고 간 서신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희상귀는 하인 몇을 불러 망서에게 장부를 확인받아 오라고 일렀다. 자리에 앉은 희상귀가 서신을 들었다. 부드러운 종이로 만든 서신은 강호의 것이 아니다. 무상귀는 염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희상귀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망서는 관의 사람인가?’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신을 열었다.
희상귀가 받은 서신에는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망서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희상귀는 그림 아래에 쓰여진 글을 읽었다. 진왕궁의 시위 주자서. 진왕이라면 저 멀리 곤주에 있는 종친 중에 하나이다. ‘곤주에서 익주까지 사람을 보냈다고? 대체 무엇때문에?’ 희상귀는 기억을 더듬다 십수년 전 청성곡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두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강호에서 귀곡을 공격한 일이다. 희상귀는 그 때 악귀의 이름을 얻었다. 전대 희상귀는 지금의 박정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내였다. 청성곡 전투 때 많은 악귀가 죽어 나갔고, 나부몽은 운도 좋았고 머리도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귀곡주 온객행이 입곡했다. 노곡주가 아들인양 끼고 데리고 돌아다니는 동안 온객행은 마음 한구석이 이지러진 것 같았다. 그리고 노곡주가 죽은 날, 몇 날 며칠 그의 살가죽을 벗기는 온객행을 보며 희상귀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부서졌다고 생각했다.
희상귀는 아직 온객행과 망서가 함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들은 것 만으로도 곡주가 염귀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희상귀는 서신을 펼쳐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곧 차를 내온 하인이 그 서신을 보았다. 희상귀는 호갑투를 쓸던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희상귀가 살포시 웃으며 차를 내온 하인을 칭찬했다.
“홍화씨구나.”
하인이 고개를 숙이다 탁자에 놓인 서신을 보고 움찔했다. 희상귀가 웃으며 말했다.
“마료(馬蓼)는 글을 읽을 줄 알았던가?”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희상귀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시기가 안 좋았구나.”
희상귀는 소매를 들어 춘매(春梅; 매화)와 추국(秋菊; 국화)을 불렀다. 서신을 본 아이가 두사람에게 끌려 나가는 것을 보며 희상귀는 고민했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하면 망서는 죽고 이 평화는 깨지겠지. 말하지 않으면?’ 희상귀가 웃으며 하인을 불렀다.
“가서 염귀를 데려와라.”
희상귀의 말에 하인이 머리를 조아려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희상귀가 차를 다 마시자 염귀가 고상, 목란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고상은 상석 근처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으며
“나이모!”
라고 인사했고 목란은 양손을 모아 무릎 꿇고 조아렸다.
주자서는 고민을 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주인!”
희상귀는 망서가 자신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어 웃었다.
“예를 거두세요.”
목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자서도 목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상귀는 탁자에 놓인 서신을 먼저 고상에게 보여주었다. 고상은 종이를 만져보더니 좋은 종이라며 좋아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얼굴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이모? 망서를 그려 놓으시게요?”
희상귀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이 아래에 쓰인 글자 중에 주자서의 이름을 읽고 좋아했다. ‘아상에게 누가 글을 가르쳤나?’ 고상이 종이를 들고 주자서와 목란에게 가서 보여주며 말했다.
“망서! 이것 봐, 너를 그린 거야.”
주자서가 서신을 받고 요리조리 돌려보며 말했다.
“이게 나라고?”
목란이 아래에 쓰인 글씨를 읽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상이 글자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망서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주자서가 글자를 읽는다.
“진왕궁(晉王宮) 기도위(騎都尉). 기도위가 뭐야?”
주자서가 고상에게 물었다. 고상은 갸웃거리며 모른다고 대답했고 목란은 고개를 들어 희상귀를 보았다. 주자서도 목란을 따라 희상귀를 보았다. 희상귀가 웃으며 말했다.
“왕궁에서 오신줄은 몰랐습니다. 염귀.”
계손(溪蓀; 난초)과 벽선(碧鮮; 대나무)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목란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주인! 그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아 희상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나이모?”
목란이 멀뚱히 서있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당겨 자기 옆에 무릎 꿇렸다. 주자서는 목란이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영접실로 들어온 하인을 보았다. 두 사람은 박정부의 하인이 입는 옷이 아닌 잡귀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곧 귀면을 벗고 희상귀에게 인사했다.
“주인.”
희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렇게 귀하신 분께서 저에게 무릎을 꿇다니...”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희상귀를 보고 말했다.
“주인?”
희상귀가 호갑투로 주자서의 뺨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염귀는 알고 있나요? 사람의 기억이란 가끔은 만들어 지기도 한답니다.”
계손과 벽선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곧 하인이 다 식은 차와 얇은 천을 내왔다. 희상귀가 천을 적시며 말했다.
“염귀. 어서 말해보세요. 왕궁의 시위가 무슨 일로 귀곡에 오셨습니까?”
희상귀의 말에 고상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목란이 희상귀를 보며 말했다.
“주인, 그는 정말 기억이 없어요. 그가 기억하려고 하면 피를 쏟으며 혼절합니다.”
희상귀가 ‘흠’ 하더니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황망하게 응접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히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주자서는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주자서가 목란을 보며 말했다.
“왕궁의 시위?”
목란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망서 뭔가 기억나는 게 없는가? 내게 첩이라고 하지 않았나?”
주자서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그러니까 누군가의 별궁에 있는 애첩의 화원에서…”
주자서는 순간 ‘아 좀 더 제대로 들어 둘 걸. 누군가가 말해줬는데, 왕의 별궁… 왕의 애첩의 화원…’ 주자서가 갑자기 인상을 쓰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작은 목소리로 주자서가 말했다.
“… 돈을 받으면 마라탕을 먹으러 가려고…”
희상귀가 인상을 쓰며 주자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주자서의 코에서 피가 주룩 흐르더니 곧 그의 눈이 뒤로 넘어가며 축 늘어졌다.
희상귀가 인상을 쓰고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어깨에 받치고 흐르는 코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과거를 기억하려고 하면 항상 이렇습니다. 정말 그가 원해서 귀곡에 왔다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희상귀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관리라는 자들은 언제나 사람을 장기말로 보는 자들이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귀곡으로 들어올 수 없었겠지.”
고상이 서신을 들고 희상귀에게 다가왔다.
“나이모… 이거…”
희상귀가 고상에게 서신을 받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곡주께는 내가 이야기하마.”
희상귀가 소매를 펄럭이자 계손과 벽선이 주자서를 질질 끌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목란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주인. 그는 정말 몰라요. 망서는…”
희상귀가 목란에게 손을 들며 말했다.
“그만. 거기서 더 말하면 너도 가두겠다.”
희상귀가 목란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에게는 네가 꼭 해주어야 할 일이 있으니…”
온객행은 그날 해가 다 질때까지 설단도 무구도 보지 못했다. 온객행이 처소로 돌아오자 고상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다가가 물었다.
“아서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흠칫 어깨가 튄 고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주인! 벌써 오셨어요?”
온객행이 장포를 벗으며 말했다.
“아서는 어디 갔어?”
고상이 온객행의 장포를 받아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목란이랑 어디 간 것 같은데,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온객행이 탁자에 앉아 찻잔을 집어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래? 유이는?”
고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녁 가지러 가지 않았을까요? 유이가 저녁 담당이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곧 유이가 헐레벌떡 찬합을 들고 처소안으로 들어왔다.
“아상! 망서가…”
고상이 잽싸게 다가가 유이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래. 망서가 지금 나이모랑 대화 중이지.”
유이가 탁자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발견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상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 놓고 유이와 함께 방을 나가며 말했다.
“주인, 우리가 가서 망서를 찾아올 테니 기다려요!”
온객행은 차려진 음식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상이 달려와 다시 온객행을 앉히고 말했다.
“주인!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얼른 가서 데려올 게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자 고상이 얼른 유이를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금방 올거니까 먼저 드시고 계세요. 망서가 밥을 안 먹다니 말도 안되지.”
온객행은 고상이 나간 장지문을 한참 보고 있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가 오기 전까지 항상 혼자 쓰던 처소였는데, 이제는 탁자를 볼 때도 장지문을 볼 때도 침상을 볼 때도 주자서가 떠올랐다. 차려진 음식은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매운 음식으로 모두 주자서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온객행은 젓가락을 들어 먼저 식사를 하려다 다시 내려놓고 주자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 그를 볼 때만이 아니라 생각할 때도 웃음이 난다. 예전에 모친께 물었다. 어째서 부친과 혼인하셨냐고. 모친께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를 웃게 해. 너희 부친은.’ 온객행은 참으로 오랜만에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슬퍼졌다. 그들을 위해서도 온객행은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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