穿越 第6

黑白無常 | 흑백무상

주자서는 그날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평소와 다르게 주자서가 오늘은 온객행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혹시 불편할까 싶어 몸을 움직이자 온객행의 팔이 주자서를 감싸 안는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온객행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금 웃었다. 온객행이 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자.”
주자서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날씨가 조금 더워져서 붙어 있는 것이 조금 더웠지만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대로 두었다.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온객행은 나가고 없었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 왔는지 목란과 유이가 방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자서가 일어난 것을 보고 목란이 다가와 그의 이마에 손을 대며 물었다.
“망서, 이제 괜찮은가?”
주자서가 목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이가 다가와 말했다.
“곡주께서 내치시면 꼭 우리에게 와야 해요. 망서는 사람으로 살 수 있으니까, 우리가 도와 줄게요”
주자서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곡주가 나를 내쳐?”
목란이 주자서를 대야가 있는 쪽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여태 곡주가 데려온 아이들은 모두 죽었네.”
주자서가 세수하다 말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란을 보았다. 유이가 주자서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을 닦으며 말했다.
“망서 같은 사람은 처음이지만…”

목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곡주의 변덕이 언제 끓어오를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목란이 주자서가 입고 있는 얇은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곡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 기회를 봐서 도망치게 해 줄게.”
주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유이와 목란이 옷을 가져와 주자서에게 입혔다. 주자서가 입혀지는 옷을 보며 말했다.
“아… 오늘은 이 옷을 입어야 해요?”
평소에 입는 가벼운 장포가 아니라 검은색 장포에 붉은 색실로 화려하게 수 놓은 옷은 그동안 주자서가 귀곡에 와서 입었던 옷들과는 질부터 달랐다. 유이가 붉은 색 얇은 천을 내오며 말했다.
“곡주께서 망서를 대전으로 들이라고 하셨어요.”
주자서가 목란을 보며 울상을 짓자 목란이 유이가 가져온 천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덮으며 말했다.
“새신부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게.”
유이가 주자서에게 씌워진 천을 다시 벗기며 그를 면경 앞에 앉혔다.

유이가 주자서의 얼굴에 연지를 바르며 말했다.
“망서는 살결이 정말 곱다.”
주자서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젊어서 그렇지. 잘 자고, 잘 먹으니까 좋아진 거야. 예전엔 피부과도 다녔었는데…”
목란이 인상을 쓰며 다시 되물으려는 유이를 멈췄다. 목란이 주자서의 머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앞으로는 입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목란을 보며 물었다.
“누님?”
동곳으로 머리를 고정하고 은으로 만든 비녀를 꽂으니 귀한 대갓집 귀공자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목란은 오히려 입안이 썼다. 유이가 벗겼던 조면사(罩面紗)를 다시 씌우며 말했다.
“내가 아는 잡귀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대전에 도착해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곡주 옆에 꼭 붙어 있게. 그게 곤란하면 절대 귀왕좌 근처를 벗어나지 말게.”
유이가 어디서 났는지 작은 은장도가 달린 요패를 주자서의 요대에 달아 주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가지고 있어요.”
주자서가 묵직한 칼을 만져보았다. 칼집을 빼내 보니 날이 잘 벼려져 있다.

목란은 시야가 불편한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그를 문 밖으로 이끌었다. 유이 역시 반대쪽 소매를 잡고 말했다.
“우리는 대전에 함부로 갈 수 없어서 같이 못 가니까 조심해요.”
주자서는 그제야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차림새가 정말 시집가는 새 신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란의 손에 이끌려 온객행에게 들려서 넘었던 박정부의 문을 보름만에 처음으로 넘었다. 박정부 근처가 소란스러웠다. 염귀를 구경하러 잡귀들이 몰린 것이다. 조면사를 쓰고 가마 같은 것에 앉혀진 주자서가 자신의 소매를 놓는 목란의 손을 잡았다.
“목란누님.”
목란은 주자서의 손을 잡아 빼고 주자서의 손을 두어번 두들긴 다음 말했다.
“망서.”
주자서는 정말 시집을 가는 아가씨의 마음이 되어 목란누님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이 손을 놓으면 주자서가 알지 못하는 곳에 홀로 남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마는 주자서를 기다려 주지 않고 어디로 인가 향했다. 주자서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틀어 점점 멀어지는 박정부를 보았다. 조면사에 가려져 새빨갛고 아렴풋한 목란과 유이를 보았다.

주자서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유이가 달아준 요대의 은장도를 손에 쥐었다. 대전으로 가는 길 내내 잡귀들은 주자서에게 이런저런 말을 던졌다. 멸시와 희롱의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왜 인지 그들이 하는 말은 주자서가 아니라 박정부를 향한 말 같아서 화가 나고 답답했다. 왜 희상귀가 박정부의 하인들을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인 자신도 박정부의 옷을 입은 것만으로 이런 경멸과 모욕을 당하는데 하물며 소녀들은 어떨까? 말로만 당하면 다행일 것이다. 주자서가 착잡해하는 동안 가마는 대전에 도착했다. 온객행은 귀왕좌에 앉아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근처에는 박정부에서 보았던 하인 몇 명과 귀면을 쓴 잡귀 몇이 보였다. 조면사 때문에 시야가 희미한 주자서가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있자 하인이 내려와 주자서를 일으켰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곡주 곁으로 갔다. 주자서는 키가 큰 편인데 관을 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주자서가 검은색 옷을 입고 붉은 천을 쓰고 단상에 서 있으니 그 기운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인들은 주자서의 소매를 놓고 다시 처음에 자신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주자서는 멀뚱히 귀왕좌 근처에 서서 주변을 보았다. 대전이라고 할 만큼 공간은 넓었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황량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온 것을 분명히 봤을 텐데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주자서도 말없이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주자서가 한참 손이 심심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가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온객행은 염귀를 발견했다는 듯이 염귀의 손목을 잡고 귀왕좌에 앉혔다.

주자서가 조면사 너머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서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방금 들어온 흑무상과 백무상에게 인사했다.
“필안(必安), 무구(无救).”
그들은 온객행의 목소리에 무릎 꿇고 손을 모아 인사했다.
“곡주!”
온객행이 읽던 서신을 주자서의 손 위에 올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설형의 아들이 아주 말썽쟁이인 듯합니다.”
백무상과 흑무상이 서로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이 단상을 내려가며 말했다.
“아니면 설형이 말썽인 걸까요?”
온객행이 점점 다가오자 그들은 무릎 걸음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곡주! 하명하소서.”
온객행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겁을 내세요? 겁날 일을 하셨습니까?”
흑무상이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설비는 설단의 아들이 아닙니다.”
온객행이 ‘하’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것을 모르는 잡귀도 있단 말입니까?”
백무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진짜 설단의 아들은 제가 죽였습니다.”

온객행이 안타깝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원한으로 아들까지 죽이셨습니까?”
백무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희가 어떻게 흑백무상이 되었는지 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잊어요? 덕분에 한담 구경을 하였는데.”
백무상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설단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온객행이 뒤돌아 뒷짐을 지며 말했다.
“흠.”
흑무상 역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금 설단 옆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늙은 노인네일 뿐입니다!”
온객행이 발걸음을 다시 단상으로 옮기며 말했다.
“이걸 어쩐다…”
온객행의 작은 탄식에 흑무상과 백무상 모두 고개를 들었다. 온객행이 돌아서며 말했다.
“무상귀 자리는 하나 에요.”
흑무상과 백무상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온객행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귀왕좌로 올라가며 말했다.
“돌아가 보세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귀왕좌에 앉아 있는 염귀에게 몸을 붙여 앉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낯선 모습이 겁이 나서 그를 뿌리치고 싶었지만, 여기로 오기 전에 목란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가만히 온객행의 품에 안겼다. 온객행의 손이 주자서의 허리를 감싸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작게 한숨 쉬었다. 흑무상과 백무상은 그런 온객행의 모습을 힐끔 보더니 대전을 나갔다. 다시 텅 빈 대전 안에 하인 몇과 주자서, 온객행이 남았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하얗게 손마디가 질리도록 서신을 꼭 쥐고 있었다. 온객행이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진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고 웃으며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의 손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서늘해서 더 낯설었다. 주자서가 몸을 흠칫 떨자 온객행이 낮게 목소리로 웃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아서, 뭘 겁내는 거야?”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이 없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 염귀는 이렇게 겁이 많아서 어쩌지?”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턱을 잡아 돌리며 말했다.
“우리 염귀는 대체 누가 보냈을까?”
온객행은 조면사 너머로 흔들리는 주자서의 눈동자를 보고 조금 안심했다. 어쩌면 주자서는 온객행이 바라는 대로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는 희망이 끓어올랐다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 인지 깨닫고 화가 났다. ‘그럴 리 없지, 절대 그럴 리 없어.’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하며 염귀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정말 대단한 놈이야.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군.’ 온객행은 굳어진 주자서의 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허리를 더 끌어당겨 안았다. 주자서는 싫은 내색이 가득하면서 밀어내지 않았다. 그게 또 온객행의 마음을 화나게 만들었다.

온객행은 서신과 목책을 보며 귀왕이 하는 일을 했다. 주자서는 일부러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지 않기 위해 생각을 비웠다. 귀신이 하는 일을 알아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 귀왕의 일을 하는 온객행은 주자서가 아는 어리고 여린 온객행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박정부의 여귀 하나가 염귀의 장부와 목간을 들고 왔다. 주자서는 손에 쥐어진 장부와 목간을 보고 차를 마시며 일하고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작게 한숨 쉬고 귀왕좌 옆에 있는 작은 탁상에 장부와 목간을 놓았다. 온객행이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요즘 박정부는 어떠합니까? 염귀.”
주자서는 온객행이 묻는 것이 장부의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일인지 몰라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온객행은 또 유순한 주자서가 미워서 작게 ‘흥’ 코웃음 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곡주 옆에 앉아서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주자서는 짜증이 났다. 편히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뭘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고 목이 말랐다. 귀면을 쓴 귀신들이 들어와 주자서가 모르는 말을 하고 나가면 온객행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집고 한참 생각을 했다. 그러다 옆에 있는 하인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고 서신을 쓰기도 했다. 또 그러다 주자서를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일을 했다. 고상이 찬합을 들고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도 온객행은 별말없이 음식을 조금 먹다 말았다. 주자서 역시 조면사를 쓰고 먹기는 힘들어서 그냥 앉아만 있었다. 고상이 주자서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주자서도 딱히 고상을 도와줄 처지는 아니 라서 고상이 차라도 한잔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고상이 작은 경단을 주자서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망서! 주인 옆에 잘 붙어 있어.”
고상이 가려는 것을 소매를 붙잡아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상,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뿌리치며 온객행 쪽으로 턱짓했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찬합을 정리해서 대전을 나갔다.

주자서가 손에 든 경단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입에 넣지 않고 있는 것을 본 온객행이 곁으로 다가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으며 물었다.
“왜 안 먹어?”
온객행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주자서는 금방 억울해졌다. 주자서가 다시 대답없이 고개를 숙이자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왜? 배 안 고파?”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풀이 죽은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주자서는 또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흔들다 살짝 시선을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조면사 너머로 온객행이 저를 보는 것을 느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말라.”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에서 주자서가 마실 수 있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차나 물에는 독이 들었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흠’ 하고 소리를 내고 주자서를 놔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앉는 것을 보았다. 바로 옆에 놓인 찻잔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도 온객행은 다시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전 안으로 무상귀 설단이 들어왔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왕 옆에 털썩 앉았다. 주자서의 투정을 읽은 온객행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가렸다. 설단이 인사했다.
“곡주.”
온객행은 설단이 온 것은 관심이 없다는 듯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귀에 속삭였다.
“목말라?”
주자서가 단상 아래 있는 설단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설단이 곡주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설단이 입을 열었다.
“곡주,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온객행은 작게 인상을 쓰고 말했다.
“설형, 업이 이렇게 많아서야…”
무상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곡주, 무슨 말씀이신지?”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십니까?”
그리고는 주자서의 손을 희롱했다. 꼭 쥐었다가 깍지도 꼈다가 쓸기도 했다. 남자의 손이라 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객행보다 크지도 않았다. 조금은 땀이 밴 듯 따뜻한 손이 귀여워서 온객행이 부스스 웃었다. 설단이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자 온객행이 말했다.
“설형은 필안과 무구가 원해서 설형 밑에 있는 줄 아셨습니까?”
설단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곡주?”
온객행이 혀를 차며 작게 웃었다.
“전부 다 말로 해드려야 아시는 겁니까? 설단이 뭔가 깨달은 듯이 ‘아’하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무상귀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무상귀의 자리는 하나지요.”
그제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놔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야 우리 설형이지요. 설비의 일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개심귀도 곧 바빠질 겁니다.”
무상귀가 더 깊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곡주께서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온객행이 무상귀 근처로 가서 서며 물었다.
“요즘 급색귀는 어디서 아이들을 데려옵니까?”
무상귀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청성곡 아래에 포주에게서 삽니다.”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산다고요? 제가 들은 이야기와 다르군요.”
무상귀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온객행이 설단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설형, 이제 막 곡주가 된 제가 뭘 알겠습니까? 설형께서 가르쳐 주세요.”
설단이 억지로 입매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곡주.”
온객행이 단상을 오르며 말했다.
“이제 가 보세요. 바쁘신 분의 시간을 오래 뺏을 수야 없지요.”
무상귀가 작게 인사하고 급하게 대전을 나갔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귀왕좌에 털썩 앉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다시 박정부로 돌아 갈래?”
주자서가 고개를 들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서, 누가 보냈는지 말해. 그럼 내일부터는 여기 안 와도 돼.”
온객행은 조면사 때문에 주자서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표정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져서 주자서가 하자는 대로 모두 해주었을 것이다. 주자서가 대답이 없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누가 보냈는지 말 안 하면 내일부터 매일 이렇게 내 옆에 둘 거야.”
주자서는 억울한 마음이 복받쳐서 조금 울먹였다.
“정말 몰라…”
온객행은 울먹이는 주자서의 목소리가 애달파서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누구인지만 말해.”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 누가 보내서 온 거 아니야.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잘 모르겠어.”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의 가슴은 이미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놔주며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을 불렀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대전에서 박정부로 돌아가는 길은 주자서 혼자 가마를 타고 왔을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리에 온객행과 주자서의 옷이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주자서는 양 옆에서 자신의 소매를 잡고 시중을 들고 있는 하인들은 어떻게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지 궁금했다. 주자서는 하인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가서 박정부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온객행은 하인이 들고 있던 장부와 목간을 희상귀에게 돌려주며 앞으로 염귀는 대전에서 자신을 보좌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희상귀는 아쉬운 듯했으나 별 말 하지 않았다. 조면사를 쓰고 덩그러니 서 있는 주자서가 가엾어서 희상귀는 소매를 펄럭이며 염귀를 물러가게 했다. 온객행이 따라 나가려고 하자 희상귀가 차를 대접하며 온객행을 붙잡았다.

하인들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그를 거처로 데려갔다. 방안에 장지문이 닫히자 곧 조면사가 벗겨지고 목란의 얼굴이 나타났다. 주자서는 마음이 놓여서 그대로 목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우는 소리를 했다.
“목란누님. 나 너무 목말라요.”
목란이 작게 웃으며 주자서의 등을 쓸었다.
“고생했네.”
유이가 얼른 차를 따라 가지고와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얼른 찻잔을 받아 마셨다. 평소에 쓰다고 생각했던 차가 달다. 주자서가 다 비운 찻잔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유이. 나 한잔만 더 줘.”
유이가 웃으며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목란은 주자서가 입고 있는 검은색 장포를 벗겨 걸어 놓고 그를 탁자로 데려가 앉혔다. 주자서는 연거푸 차를 마시고 그제야 허기가 도는지 먹을 것을 찾았다. 유이가 차주전자를 내려놓고 나가면서 말했다.
“망서,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가서 음식을 가져올게요.”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같이 가자! 오늘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어.”
목란이 주자서를 막으며 말했다.
“망서.”
유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방을 나갔다.

주자서가 목란의 손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목란이 말했다.
“이제 너는 아무데도 못 가.”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 에요?”
목란이 주자서 옆에 앉아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곡주께서 주자서의 발을 묶었 노라고. 이제 곡주가 가는 곳 아니면 그 어느 곳도 혼자서 갈 수 없다고. 주자서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갑자기…갑자기 왜?”
목란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망서, 정말 기억 나는 것이 없는가? 잘 기억해 보게.”
주자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뭘 기억하라는 거에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데…”
목란이 주자서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었다.

목란이 일어나자 주자서는 목란이 가려는 줄 알고 일어나서 목란을 붙잡았다.
“나는 첩이었데요. 아니, 첩이었던 것 같아요.”
목란이 주자서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첩?”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기억 나는 거는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요.”
목란이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남첩이었다는 거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란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익주에서 남첩은 드물어. 알겠어. 내가 알아볼 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목란이 나가려고 하자 주자서가 망설이다 목란의 소매를 잡았다.
“누님. 가지 마세요. 혼자 있기 싫어요.”
목란이 소매를 털어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곡주 손에 죽고 싶지 않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목란이 주자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상을 불러 줄게. 아상까지는 뭐라고 못 하실 거야.”
주자서가 목란을 따라 나가자 곧 장지문 옆에 서 있던 다른 하인이 주자서를 막았다. 목란이 작게 혀를 차고 주자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같이 있어서 좋았는데 오늘은 대전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좋기는커녕 불편하고 낯설기만 했다. 주자서가 얼굴을 양손에 묻으며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배고파.”
뭔가 생각이 많았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허기만 졌다. 곧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주자서는 유이가 밥을 들고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기가 져서 고개를 들 힘도 없는 주자서는 탁자에 머리를 기대고 엎어졌다. 주자서의 얼굴 앞으로 찬합이 놓여 지고, 그 찬합을 들고 온 사람을 보니 온객행이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쓰자 온객행이 ‘허’하고 웃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꺼냈다. 주자서가 고개를 반대로 돌려 엎드렸다. 온객행이 찬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먹어.”
온객행이 젓가락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져온 음식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주자서가 힘겹게 고개를 들고 젓가락을 쥐었다. 그러다 고상이 생각나서 말했다.
“귀왕,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온객행은 주자서의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 지 대답없이 음식을 먹었다. 주자서가 앞접시에 음식을 덜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말이야…”
온객행이 말했다.
“입이 무겁고 마음이 여린 사람.”
주자서가 음식을 덜다 말고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는 입 안 무거운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말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허리가 가늘고 다리가 긴 사람?”
주자서가 접시와 젓가락을 내려놓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 허리가 가늘어?”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물었다.
“나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어?”
주자서는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곧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이 없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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