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城計 | 4. 비어 있는 성.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한참 안겨서 지금 뭘 하고 있나 생각 중이었다. 주자서가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르작대면 온객행은 그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주자서는 그렇게 안겨 있었다. 주자서가 몸의 힘을 빼고 축 늘어지자 그제야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주자서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온객행을 보았는데 온객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방금 전의 그 포옹이 혹시 자신이 느끼는 것만큼 어색하게 오래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며 살포시 웃고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난간 옆으로 이동하여 연잎을 마저 땄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딴 연잎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직 피지 않은 백련 봉우리가 있으면 그것도 따 주겠소?”
주자서는 마침 커다란 연잎 사이에서 올라오고 있는 하얀 연꽃 봉우리를 발견했다. 주자서가 그것을 따서 온객행에게 건네자 온객행이 말했다.
“백련 봉우리를 차로 하면 향이 아주 좋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있는 연잎을 해치고 봉우리 몇 개를 더 따서 온객행에게 건넸다. 주자서가 난간을 다시 넘으려고 하자 온객행이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잡아주었다. 주자서는 또 그의 품에 안기게 될까 봐 더욱 조심하여 몸을 움직였다. 소쿠리 하나를 가득 채운 연잎과 온객행을 위해 백련 봉우리를 한 소쿠리 땄다.
주자서가 갑판으로 연잎이 든 소쿠리를 내려놓았다. 물속에서 거품이 올라오더니 보살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아직 연근이 없네. 그리고는 양손 가득 주먹만 한 조개를 갑판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우리 교교는 조개를 좋아해.”
그리고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교도 물 속에서 불쑥 나와 말했다.
“올해는 큰 조개가 많다.”
그리고 주자서가 따 놓은 연잎을 보고 좋아하며 말했다.
“유서, 많이 땄네. 나머지 소쿠리도 부탁해도 될까?”
온객행이 뒤에서 나와 말했다.
“천교, 그는 사람이라 작은 가시에도 상처를 입네.”
그리고는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연꽃 가시에 쓸린 팔을 보여 주었다.
천교가 작게 ‘어머!’ 하더니 갑판 위로 올라와 빨갛게 생채기가 난 주자서의 팔과 손을 보고 말했다.
“정말….”
천교가 얼굴을 찌푸리고 속상해하자 주자서가 손을 빼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교가 몸의 물을 흩어내고 연꽃대를 몇 개 잘라 거기서 나온 진액을 주자서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일단은 이거라도 발라 놓자.”
천교가 주자서를 갑판에 앉히고 소매를 걷어 팔과 손에 연의 진액을 발라 주었다. 보살이 곧 다시 불쑥 물 위로 올라와 말했다.
“교교! 어디 갔어?”
천교가 갑판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보살도 손에 쥔 조개를 놓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천교가 보살을 보고 말했다.
“보보, 사람은 정말 연약하다. 연잎 좀 땄다고 이 손 좀 봐.”
보살이 ‘흥’하고 코웃음 치고 말했다.
“맨손으로 땄는가 보군. 여인들은 손에 천을 둘러서 하던데. 요령이 없는 것뿐이야.”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연잎을 따는 과(戈; 꺾쇠창)가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보살은 조개를 소쿠리 안에 넣으며 말했다.
“소쿠리 가득 가져가고 싶은데 주인께서 언제 돌아오실 지 모르니까.”
천교가 조개가 담긴 소쿠리를 보며 말했다.
“내가 알려준 곳에 가보았어? 내가 작년에 묻어둔 펄조개가 있을 텐데.”
보살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는 나어(蠃魚)랑 소어(鳋魚)가 사는 곳이라 아마 없을 수도 있어. 한 번 더 보고 올게. 연잎 따고 있어.”
그리고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교도 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근처에 있는 연잎을 따며 말했다.
“파사공자께서도 같이 드세요. 오늘은 하방탕(河蚌湯)을 할 거예요. 현명대선(玄冥大仙)께서 보내주신 소금을 넣고 끓이면 정말 맛있답니다.”
주자서는 천교가 툭툭 뜯어낸 연잎을 받아 소쿠리에 담았다. 주자서가 서투른 손으로 천교를 돕는 것을 보던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좋지요. 오늘 밤에는 달이 좋을 테니, 누각에서 화로를 피워 끓이면 아주 좋겠네요.”
천교가 작은 백련 봉우리를 가져와 온객행의 소쿠리에 담으며 말했다.
“제가 백택에서 화로랑 재료를 가져올게요. 주인께 드릴 몇 개만 빼놓고 우리가 먹어요.”
온객행이 소쿠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상은 어디 갔지요?”
천교가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천교의 눈짓을 읽은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백련 봉우리를 호숫물에 씻으며 말했다.
“아상도 좋아하잖아요. 하방탕.”
천교가 다시 갑판 위에 올라와 연잎을 정리하며 말했다.
“보보를 시켜서 찾으면 됩니다.”
물속에서 보살이 불쑥 나왔다. 갑판 위에 양손 가득 쥐고 있던 조개를 올려 놓고 훌쩍 올라와 말했다.
“나어랑 소어가 안 보이네? 어디 갔나?”
천교가 보보의 몸에 물을 흩어주며 말했다.
“단오절에 서산대선(西山大仙)께 갔겠지.”
보살이 ‘흠’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교의 시중을 받았다. 온객행이 백련봉우리를 씻는 것을 발견한 보살이 말했다.
“오늘은 부유각에서 먹자. 가서 홍주도 꺼내 올까?”
천교가 보살의 어깨를 살살 쓸며 말했다.
“주인께 혼나면 어쩌려고.”
보살이 천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파사공자께서 드셨다고 하면 되지.”
그리고 둘은 재미있다는 듯 뺨을 붙이고 웃었다. 두사람의 친밀한 모습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돌렸다.
천교와 보살은 갑판에 걸터앉아 영력으로 부유각을 밀어 소령으로 향했다. 소령에 도착해서 천교와 보살이 소쿠리를 들고 배에서 내리며 주자서에게 말했다.
“유서, 너는 여기서 파사공자님을 돕도록 해.”
그때 백택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고상이 나와 웃으며 말했다.
“안돼! 유서가 도우면 기껏 구해온 펄조개를 못 먹을 수도 있어!”
그 말에 천교와 보살이 ‘호호호’하고 웃었다. 고상이 훌쩍 뛰어 부유각에 승선하고는 말했다.
“달빛 아래 부유각에서 풍류를 즐기며 먹으면 무엇이든 맛있을 테니 기대할 만할 거야.”
천교가 말했다.
“우리는 가서 재료를 가지고 올 게. 금방 올 거야.”
그리고는 훌쩍 날아 백택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날아가는 두사람을 보고 그동안 자기를 위해 걸어 다녔구나 싶었다.
주자서가 선창에서 백택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앗! 이게 뭐야?’ 끈적끈적한 연꽃의 진액이 묻은 그의 손을 다시 놓은 고상이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그의 생채기를 보았다.
“이건 또 왜 이래?”
주자서가 고상의 손에서 소매와 팔을 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놔주세요.”
고상이 ‘쯧’하고 작게 혀를 차더니 주자서의 양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다시 떠진 고상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상이 주자서의 손에 ‘후’하고 입김을 불자 빨갛게 났던 생채기가 하나둘씩 아물었다. 고상은 다시 눈을 감고 심호흡하고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온객행이 다 씻은 백련 봉우리를 들고 누각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주 지극 정성이네. 정말 네 아이 삼을 셈이야?”
다시 떠진 고상의 눈은 다시 사람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주자서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상을 보자 고상이 온객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내 아이라니까! 이제 막 태어난 솜털 같은 화사라고.”
고상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누각 위로 올라갔다. 어디에서 났는지 식기와 젓가락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온객행은 오늘 딴 백련 봉우리를 물에 끓이고 있었다. 고상이 ‘킁킁’ 냄새를 맡고 말했다.
“백련 향이 아주 좋네.”
온객행이 구리로 만든 냄비 안을 휘젓고 말했다.
“기껏 모은 영력을 그렇게 써도 괜찮겠어?”
고상이 주자서를 자리에 앉히고 자기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게 다 주요를 위한 일이야. 주요를 위한 일이면 파사공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 끓은 연꽃잎을 건져서 넓은 소쿠리에 널었다. 고상이 고개를 괴며 물었다.
“파사. 주요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온객행이 누각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그러게. 올 때가 지났는데 좀 늦어지는데?”
고상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갔냐구!”
온객행은 낮게 웃을 뿐 대답 없이 누각 아래에 있는 내실로 갔다.
천교와 보살이 구리로 만든 냄비에 조개와 재료를 정갈히 올려서 부유각으로 왔다. 방금 온객행이 백련 봉우리를 끓이던 화로 위에 구리냄비를 올려놓고 보살이 손에 들고 온 술 단지를 내려 놓았다. 고상이 술 단지를 보고 누각 난간 옆에 있는 함에서 술잔을 꺼내 들고 오며 말했다.
“태평홍주!”
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아상, 올해는 구기자 따는 것을 돕겠다고 해야 줄 거야.”
고상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싫어! 구기자는 너무 작아서 일이 많잖아.”
보살이 탁상 위에 올려놓은 술 단지를 팔로 안으며 말했다.
“그럼 안 줄 거야.”
고상이 입을 삐쭉이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도와줄 거야. 나를 대신해서!”
그리고는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자서는 보살과 고상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이 주자서를 흘겨보며 말했다.
“연잎 땄다고 손에 상처가 났는데 구기자를 따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고상이 자리에 다시 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구기자가 나는 데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네.”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고상 네가 도와줘야 해.”
고상이 입을 꾹 다물고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
“알겠어! 대신 홍주 만들 때 구경해도 돼?”
보살이 단지의 붉은 천을 뜯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도와줘. 화사는 해독의 능력으로 유명하잖아. 약주가 될지 누가 알아?”
고상이 ‘하하하’하고 고개를 꺾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옥산의 화사는 해독으로 유명하지. 하하하.”
보살이 고상이 가져온 술잔에 술을 따라 주자서와 고상에게 권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잔에 조심스럽게 홍주를 따라 구리냄비 옆에 앉아 화로를 보고 있는 천교에게 다정하게 건넸다. 온객행이 다시 누각 위로 올라오며 말했다.
“단지 째로 드시면 흐르는 것이 더 많으니 술병에 담아 드시지요.”
하고 도자기로 만든 술병을 놓았다.
보살이 술병을 받아 단지의 술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역시 파사공자께서는 풍류를 아시는 분입니다.”
고상이 자신이 들고 있던 술을 온객행에게 건네고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잔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틀 뒤가 보름이니 보름을 축하할까요?”
보살이 술병에서 술을 따르며 말했다.
“파사공자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축하합시다.”
고상이 맞장구 치며 말했다.
“좋다! 좋습니다!”
고상이 온객행 쪽으로 술잔을 들어 올린 뒤에 잔을 비우고 잔을 보였다. 곧 보살과 천교, 온객행도 잔을 비웠다.
주자서만 멀뚱히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발견한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그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유서는 술을 하는가?”
주자서는 술잔에 담긴 붉은 술을 보고 주춤했다. 고상이 피를 먹였다는 말을 잔뜩 했으니 혹시 이 술도 피로 담근 술인가 의심이 일었다. 주자서가 주저하는 것을 느낀 고상이 다가와 주자서에게 내민 잔을 낚아채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아직 아파서 술을 마시면 안돼.”
그리고 잔을 들어 비웠다. ‘크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정월대보름에 마셨던 것보다 더 맛있네?”
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정월대보름에 마신 것은 담근 지 얼마 안 된 술이었으니까.”
고상이 보살 옆에 앉아 치대며 말했다.
“매년 열 단지 넘게 담그는 것 같던데, 단지마다 맛이 다른가?”
천교가 웃으며 고상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온객행은 탁상 위에 올라와 있는 주자서의 소매를 걷어 생채기가 났던 곳을 보았다. 그리고 천교와 보살과 살갑게 대화하고 있는 고상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가져와 펴서 쓸어 보았다. 조금은 뜨거운 듯한 체온에 온객행이 살포시 웃었다. 주자서는 제 손을 잡고 신기한 것을 보는 것같이 구는 온객행이 의아하여 하는 대로 두었다. 대체로 주자서는 이곳에서 남이 뭘 하면 그냥 하는 대로 두었다.
애초에 그들이 하는 대화에서 주자서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무지기니 파사니 우사첩이니 화사니 하는 요괴의 이름들은 어디에서 인가 들어는 보았지만 정확하게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게다가 이들은 사람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주자서는 그냥 그러하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구했다는 저 소녀의 눈은 붉은 색이었다. 주자서는 ‘요괴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며 여인들을 보았다. 주자서의 눈에는 요괴가 아니라 그냥 어린 소녀들 같았다.
천교가 그릇에 조개를 떠서 온객행에게 건넸다. 온객행은 그것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얼떨결에 온객행의 그릇을 받고 안에 내용물을 보았다. 커다란 조개가 입을 쩍 벌리고 안에 들어찬 속살이 실하다. 고상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우리 애는 내가 챙길 테니 파사공자 드시오.”
그리고 자기 몫의 그릇을 온객행에게 주었다. 주자서가 자신의 그릇을 고상에게 내밀자 고상이 손으로 조개를 벌려 살을 발라 ‘후후’ 불더니 주자서의 입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우리 아가. 많이 먹어.”
주자서는 입안에 들어온 것을 뱉을 수 없어 먹었다. 과연 소금을 곁들인 하방탕은 맛이 좋았다.
천교가 웃으며 한 그릇 더 떠서 고상에게 주었다.
“아상. 아상도 많이 먹어.”
보살이 조개를 발라 ‘후후’ 불어서 천교에게 주며 말했다.
“아상이 동생이 생겨서 좋은가 봐.”
천교는 보살이 준 조개를 받아먹고 자기가 바른 조갯살을 보살에게 주었다. 천교와 보살이 서로 정답게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던 온객행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고상은 자기 몫의 조개를 후후 불어 발라 먹고는 ‘히히히’하고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내려놓은 그릇에 조개를 발라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주자서의 행동에 작게 코웃음 친 온객행이 ‘아’하고 입을 벌리자 주자서가 냉큼 입안으로 조갯살을 넣어 주었다. 고상이 그 모습을 보고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인상을 쓰면서도 웃고 있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가 주변을 보았다. 천교와 보살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주자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부러워하시는 것 같길래….”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하하하’하고 고개를 꺾어 웃었다. 천교와 보살도 ‘호호호’하고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비우고는 말했다.
“유서가 주어서 그런가? 하방탕 맛이 아주 좋구나.”
그리고 같이 웃었다. 주자서만 눈을 도르르 굴리며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국물도 아주 맛이 좋았다.
하방탕을 나눠 먹은 이후 천교와 보살은 자주 부유각에 주자서를 맡겼다. 그들은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주자서를 돌보는 것이 귀찮아 지면 그렇게 했다. 고상은 말없이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어서 미덥지 않았으나 부유각에 매여 있는 온객행은 그동안 고상이 불쌍하다며 데려온 미물이나 작은 요괴들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주자서는 가끔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않는 그를 혼자 둘 수 없으니 온객행에게 맡기는 것이다. 비축해둔 곡물을 다 먹어가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황산으로 향하는 날도 그랬다.
백택에는 여자들이 입는 옷 밖에 없어서 천교와 보살은 일단 내의와 중의를 이어 장포를 만들어 주자서에게 입혔다. 색깔이라고 해 보아야 붉고 화려한 것밖에 없어서 어찌하다 보니 주자서는 하얀 옷을 입게 되었다. 천교는 주자서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파사공자께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보살이 옆에서 천교의 말에 맞장구 치며 말했다.
“백택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쓰고 마셔도 좋다. 정전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올려 인사했다. 보살이 주자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랬지.”
천교가 보살의 팔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주인께서는 이런 것을 좋아하니 그냥 하게 두자.”
보살이 천교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교교 말이 다 맞지.”
둘은 부유각 갑판에 서 있는 온객행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훌쩍 날아 남쪽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그 둘이 산을 너머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다가 부유각에 올랐다.
온객행은 말없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그를 누각으로 이끌었다. 화로 위에 놓인 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온객행은 손바닥을 펼쳐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아 차를 내렸다. 연꽃의 향기다. 주자서는 연잎을 따던 날이 떠올라서 살포시 웃었다. 주자서가 웃는 것을 보고 온객행도 그를 마주 보고 웃었다. 온객행이 연꽃같이 생긴 찻잔에 차를 따라 주자서에게 권했다.
주자서는 찻잔을 받아 코에 대고 그 향을 한참 맡더니 온객행을 보고 웃었다. ‘후룩’ 한입 마셔보더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화로에서 주전자를 내려놓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흩어지는 수증기에서 연꽃의 향이 난다. 온객행은 정말 오랜만에 서호(西湖)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차근차근 하나둘 잊어가고 있었나 보다.
주서가 온객행이 건넨 연꽃잎 차를 들고 말했다.
“진흙 속에 피어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 맑고 향기는 멀수록 진하네. 홀로 깨끗하게 피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다가갈 수 없음이라.” (1)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묵은 차라 향이 덜하니 이해하시게.”
주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홀로 깨끗하게 피어 다가갈 수 없는 그대와 함께하는데 묵은 차이던 새로 난 차이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온객행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상관이 있네. 그대에게는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은데….”
주서가 웃으며 말했다.
“노온. 맑은 물에 홀로 깨끗이 피어난 그대가 제일 좋은 것이니 그것으로 되었네.”
마주 보고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눈을 감고 한참 주서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포기했다.
“그래. 그는 나를 노온이라고 불렀는데….”
온객행의 목소리에 차를 마시고 있던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았다. 주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온객행을 한참 보다가 그를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자신을 부르는 그리운 소리에 살며시 웃었다. ‘그래. 그는 나를 노온이라고 불렀는데….’ 온객행은 다시 눈을 떠서 손에 들린 찻잔을 보았다.
연꽃 같은 이 찻잔도 그와 함께 골랐다. ‘그는 연꽃을 정말 좋아했는데. 하얀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는데….’ 시선에 걸린 주자서의 옷자락이 하얗다. 온객행은 조금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주자서의 옷자락을 쓸어보았다. 얇은 무명천의 감촉이 따뜻하다. ‘맞아. 그는 사람이었으니까.’ 온객행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마셨다.
온객행과 차를 나누어 마시고 주자서는 온객행이 구워 주는 물고기를 두어마리 먹었다. 주자서가 먹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던 온객행은 잠시 유사혈에 다녀온다며 내실의 휘장을 모두 내리고 주자서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여러 차례 당부한 후에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평상에 기대서 설핏 잠이 들어 있었다.
고상이 휘장을 걷고 들어와 온객행을 찾았다.
“파사! 파사! 큰일 났어! 파사!”
온객행을 부르는 소리에 주자서가 부스스 일어나 고상을 맞이했다.
“주인?”
고상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물었다.
“유서, 온객행은 어디에 갔어? 주요가 돌아왔어.”
주자서가 대답했다.
“유사혈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상이 혀를 ‘쯧’ 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자서를 온객행의 침상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 있어. 휘장 밖으로 나오면 안돼.”
그리고 침상의 휘장도 쳤다. 주자서는 남의 침상 위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고상에게 말했다.
“주인! 이 곳은….”
고상이 주자서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유서. 사람은 물론 요괴도 먹는 즉저(蝍蛆)가 왔어. 말도 하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고 침상 위에 있어. 내가 데리러 올 게.”
고상은 침상 위의 이불을 들어 주자서를 꽁꽁 싸매 주고 나갔다.
주자서는 즉저라는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즉저는 지네 요괴로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산다. 즉저는 다른 벌레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악신으로 즉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온 벌레들이 기둥이며 대들보를 갉아먹는다 했다. 게다가 발이 많은 생김새 때문에 주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때 무심코 밟았다가 발가락을 물린 적도 있었다. 즉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로 들었던 즉저의 이름을 고상의 입으로 들은 것이 신기했지만, 그가 주요와 함께 왔다는 것은 아마 엄청 거대한 지네라는 뜻일 것이다. 커다란 지네를 상상하던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고 몸을 떨었다. 고상이 숨겨주지 않아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1) 주돈이 愛蓮說 애련설; 연꽃을 좋아하는 노래
군자를 연꽃 은둔자를 국화 화려한 귀족을 모란으로 은유하였다.
나 홀로 연꽃을 좋아하니,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아니하며, 줄기 가운데는 통하며 밖은 곧고, 덩굴 뻗지 않고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이 깨끗하게 서있으며,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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