穿越收尾

地藏 | 지장

주자서를 안고 흐느끼던 귀왕은 곧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버렸다. 주자서는 곡주의 무게를 버티다 힘들어서 털썩 뒤로 누웠다. 곡주는 자연스럽게 주자서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옷이 모두 젖은 데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귀곡주가 얼굴을 묻은 부근이 화끈화끈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물 밖에 없고, 날은 저물었는지 입구를 통해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달빛을 구경하던 주자서는 설핏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달빛에 희게 빛나는 주자서의 얼굴을 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가 입 맞추었던 이마에 코 끝에 입술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다 혹시 사라질까 얼른 손을 거두고 주자서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두근두근’하고 뛰는 심장 소리가 기꺼워 그의 몸을 더 꼭 끌어안았다. 주자서의 몸이 뜨겁다. 온객행은 괜히 부끄러워 주자서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 축축한 옷자락이 온객행의 얼굴에 스몄다. 온객행은 한담 입구에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주자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침나절이 지나 점심때가 다 되도록 두 사람은 그렇게 붙어 있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고상이 찬합을 들고 한담에 나타났다. 한담 아래를 내려다본 고상은 목란에게 말했다.
“둘이 붙어 있는데 어떡하지? 그냥 갈까?”
목란이 배 주변을 보고 말했다.
“딱히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는데… 게다가 주공자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망서 같다면 먹는 걸 분명 좋아할 텐데… 점잖아서 그렇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히히히’하고 웃었다. 목란이 찬합을 고쳐 들고 말했다.
“나는 한담에 있는 섬으로 갈 테니까, 노를 저어 와. 아상.”
아상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주인이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목란과 고상은 한담 입구에 서서 한참 한담 아래에 있는 배를 보며 고민했다.

온객행은 한담 입구의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주자서 앞에서 울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온객행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달빛에 보았던 희고 빛나는 얼굴로 누워있다. 햇살에 조금은 창백해 보인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가 젖어서 축축하다고 생각했던 주자서의 가슴께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온객행이 놀라서 축 늘어진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가 맥을 집었다. 그의 몸은 열이라도 나는지 뜨겁다. 온객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자서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그의 맥에는 내공이 잡힌다. 온객행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이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다.

고상과 목란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온객행이 주자서를 안고 훌쩍 한담 입구로 올라왔다. 온객행의 등장에 조금 놀란 목란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인! 배고프죠?”
온객행은 고상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훌쩍 바위산 아래로 내려갔다. 온객행은 무표정한 얼굴로 염귀가 입던 검은 장포를 두른 주자서를 안고 처소로 향했다. 침상 위에 주자서를 올려놓고 검은 장포를 걷고 젖은 옷을 벗겼다. 내의 안에 주자서의 몸은 전에 보지 못했던 상처로 가득하다. 온객행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혹시나 또 주자서가 사라질까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옷을 갈아입히고 벌어진 상처를 다시 면포로 싸고 붕대로 고정했다. 그때까지도 주자서는 열에 들떠 눈을 뜨지 못했다. 온객행은 괜히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차가운 한담에 몸을 던진 그가 잘못될까 처소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혼자서 주자서의 시중을 들었다.

품에 안고 물과 탕약을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고 매일 면포도 갈아주었다. 주자서는 그렇게 또 사흘을 내리 앓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옆에 누워있다가 주자서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근처에 두었던 찻잔을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키고 찻잔을 가져가니 주자서가 팔을 들어 손으로 찻잔을 잡고 마셨다. 살짝 닿은 주자서의 손이 뜨거워 온객행은 주자서의 이마에 손등을 대어보았다. 주자서가 작게 내쉰 한숨조차 걱정되어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괜찮아? 해독이 다 안됐었나 봐.”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이 눕혀주는 대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온객행은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주자서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좀 더 쉬어. 배고파?”
주자서는 아직도 잠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눈을 깜박거리더니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대전에서 조면사를 뒤집어쓰고 보았던 모습이라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아서가 좋아하는 매운 음식은 아직 못 먹어.”
주자서는 피식 웃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고상이 가져온 묽은 죽을 ‘후후’ 불어서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고상과 목란, 유이가 침상 곁에 서서 온객행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주자서는 입 앞으로 다가온 숟가락을 한번 주변에 서 있는 소저들을 한번 마지막으로 주자서에게 어서 먹으라며 여상하게 죽을 뜨고 있는 온객행을 한번 보고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숟가락을 다시 죽그릇에 놓고 주자서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 왜 그래? 못 먹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길을 피하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 들고 말했다.
“혼자 먹을 수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온객행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가 죽을 한술씩 뜰 때마다 주자서의 입가를 훔쳤다.

주자서가 수저를 들면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온객행은 다짜고짜 주자서의 앞섶을 풀어 헤치며 말했다.
“아서, 많이 아파? 또 피가 배어 나올지도 몰라.”
주자서가 죽그릇을 어쩌지 못해 몸을 앞으로 숙여 말며 말했다.
“무슨 짓이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침상 옆에 서 있는 소저들을 보았다. 목란이 웃으며 주자서의 손에 있던 죽그릇을 치우고 말했다.
“어…저희는 그럼 이만…”
소저들은 웃는 얼굴로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다가 장지문을 닫고 나갔다. 주자서는 앞섶을 움켜쥐고 온객행의 어깨를 밀었다.
“조금 불편한 것이니 걱정 마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에 있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럼 면포라도 새로 갈자.”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자 온객행이 말했다.
“일단 죽부터 더 먹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란이 탁자에 내려놓은 죽을 가져와 숟가락을 들어 주자서의 입 앞에 대주었다. 주자서는 인상을 쓰고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순순히 입을 열어 죽을 받아먹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락이 기꺼워 부스스 웃으며 죽을 떠주었다.

온객행은 다 먹은 죽그릇을 정리하고 찬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뒤 돌아 침상을 보았는데, 주자서가 앞섶을 풀고 있었다. 온객행은 당황하여 침상으로 가서 말했다.
“아…아서?”
주자서의 내의는 불편한 어깨에 걸려 반쯤 벗겨졌다. 붕대로 가득한 주자서의 몸은 맨살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었으나 온객행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서…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주자서가 내의를 벗기 위해 씨름하며 말했다.
“면포를 새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온객행은 붉어진 얼굴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은 허둥대며 침상 옆에 면포가 들어 있는 함을 열었다.

주자서는 몸에 둘러진 붕대를 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더듬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 뒤에 있는 매듭을 풀어 붕대를 풀고 피에 젖은 면포를 상처에서 떼어 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는 독 때문인지 지혈이 잘 되지 않았다. 주자서가 상처를 보고 말했다.
“황실에서 쓰는 독을 썼을 테니 보통의 상처보다 아무는 속도가 느릴 것이오.”
온객행이 젖은 수건을 가져와 주자서의 상처를 닦으며 말했다.
“아파?”
주자서는 상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새 면포를 대고 주자서의 몸에 붕대를 감았다. 앞 뒤로 붕대를 감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떨어졌다. 주자서는 덤덤하게 온객행의 시중을 받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가까워 질 때마다 마음이 널뛰었다. 매듭을 짓는다는 핑계로 한참 주자서를 끌어안고 있던 온객행이 그를 놔주자 주자서는 별말 없이 옆에 두었던 내의를 다시 걸쳐 입었다.

온객행이 피에 젖은 면포를 치우는 것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불쑥 물었다.
“그대가 귀곡주요?”
온객행은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흠 ’하더니 말했다.
“몸이 온전치 못하여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마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곡주를 뵙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팔을 들어 공수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나…나는…”
머뭇거리는 온객행의 얼굴을 고개를 들어 힐끔 본 주자서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가 정말 귀곡의 곡주요?”
온객행이 침상에 다가와 앉고는 주자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온객행은 한참 주자서의 손을 쓸고 만지더니 부스스 웃었다. 주자서는 그냥 곡주가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온객행이 한참 뜸을 들이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마음을 아주 비싸게 사기로 했어…”
주자서는 곡주의 말뜻을 알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웃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더니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주자서를 보았다.
“내가 안 믿어서 그런 거지? 정말로 누군가 보낸 게 아니었는데…”
주자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차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숙였다. 온객행은 손을 들어 주자서의 뺨에 대고 말했다.
“다시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온객행은 주자서의 고개 숙인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게 하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은애(恩愛)해.”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하고 서로를 보고 있다가 온객행이 시선을 떨어뜨려 주자서의 양손을 잡고 말했다.
“마음… 다 안 줘도 되니까… 내 옆에 있어 주면 안돼?”

주자서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온객행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곡주.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오.”
주자서가 고개를 숙여 온객행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은애하는 사람이 아니오. 내가 그대를 기만(欺瞞)하기를 바라오?”
온객행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떨어진다. 주자서는 안타까워 손을 들어 온객행의 눈물을 훔쳤다. 온객행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대의 정인은 떠났소. 그대가 놓아주지 않으면, 당신의 정인도 당신도 불행할 거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참고 있던 울음을 뱉었다. 이 주자서도 그 주자서처럼 퍽이나 다정하다. 온객행은 이 주자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도 벌써 반절 넘게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팔을 들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마음… 다 안 줘도 되니까. 내 옆에 있어.”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귀곡에 입곡한 귀신인데 곡주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온, 온객행.”
주자서가 ‘흠’하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곡주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소.”
온객행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예의 엄청 따지네. 어디 귀족이라도 하다 왔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떼어 놓고는 말했다.
“그렇소. 지금은 노비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지만.”
온객행이 당황하여 주자서를 놓아주고 물었다.
“귀족이었어?”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대역죄인에 쫓기는 도망자요.”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자 주자서가 미소 짓고는 말했다.
“나의 원수는 나라의 천자이니 복수할 길이 없어 귀신이 되었소.”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지자 주자서가 손을 들어 그의 눈썹을 쓸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길에 눈을 감고 말했다.
“복수할 길이 왜 없어. 가서 죽이면 되잖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툭툭 치고는 말했다.
“나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소.”
온객행은 눈을 떠 주자서의 올곧은 눈을 보았다. 온객행은 예전에 어디에서 인가 읽었던 성인군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그 이야기를 읽고 그 군자를 비웃었던 것 같다.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양친의 복수를 포기하였으니 불효를 저질렀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가… 내가 대신 해 줄게.”
주자서가 웃으며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이 죄는 나의 죄요. 그대는 그대 몫의 죄가 있지 않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은 이 주자서에게도 한없이 빠지겠구나! 직감했다. 온객행은 바짝 몸을 붙이고 말했다.
“아서…”
주자서가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놀라서 몸을 돌려 주자서를 마주 보고 되물었다.
“뭐라고?”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미소 짓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아서… 내가 두 살이나 동생인데 정말 그렇게 부르겠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자서의 웃는 모습이 기꺼워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와락 안아버렸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엇!’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온객행을 밀어내지 않았다.


온객행은 그 이후로 한담에 가지 않았다. 박정부의 하인들은 곡주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주자서를 찾아오지 않았다. 주자서는 변함없이 하인들의 손을 타는 것을 불편해하며 처소의 장지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찾아오지 못하는 하인들은 근처를 서성이다 망서에게 줄 음식과 물건을 근처에 두고 갔다. 날은 점점 빨리 어두워지고 바람은 차가웠다. 온객행은 잠시 내려 놓았던 곡주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가가지 못하고 하인들이 하는 것처럼 주자서의 근처를 배회했다. 열린 장지문 사이로 침상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주자서를 훔쳐서 볼 뿐이다.

매일 박정부에 들러 희상귀에게 홍화 일에 관해 물으면서도 시선은 항상 주자서의 처소를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희상귀가 따로 주자서를 불러주면 온객행은 다소곳이 앉아 내외하듯 말없이 차만 마셨다. 그 모습이 갓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라 희상귀는 우습기만 했다. 주자서는 망서가 정리해 놓은 장부를 보고 칭찬하며 몇 가지 보완점을 제시했고 희상귀는 기껍게 받아들였다. 여인만 있는 박정부를 불편해하는 것 같아 문 근처에 있는 사랑채로 거처를 옮긴 날에는 온객행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박정부가 한바탕 소란이었다. 주자서는 사랑채에서 급히 나와 저를 찾는 온객행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박정부의 하인 모두가 보았다. 그 이야기는 곧 귀곡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귀곡의 귀신들은 주자서를 지장(地藏)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보물을 모아 둔 석실에 들어가 담비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찾았다. 몇 년 전에 무상귀가 노곡주에게 선물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귀곡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여름에 서늘한 대신 겨울에 추웠기 때문에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따뜻한 옷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고 거절한 주자서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온객행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석실에서 주자서의 선물을 골랐다. 글을 읽을 줄 알았으니 심심하지 말라고 죽간 몇 개와 고서도 챙겼다. 시간이 꽤 늦어 졌는지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주려고 가져온 물건을 나무함에 담아 들고 박정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모두 기울어 어둑어둑 해진 뒤였다.

주자서는 이미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나 등롱을 끄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무함을 들고 들어온 온객행은 아무 말도 없이 함을 들고 앉기를 청하는 말에도 응하지 않고 망부석처럼 멀뚱히 서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손에 들린 함을 받을까, 아니면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나 망설이다 그냥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리기로 했다. 주자서가 차를 다 마시고 탁자에 턱을 괴고 온객행을 보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재밌기도 하고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탁자에 고개를 괴고 졸고 있는 주자서를 보다가 나무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자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사랑채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주자서의 얼굴만 보면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만다. ‘너는 다른 사람의 대신이 아니라고. 네가 누구이던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방금까지 차를 마시던 주자서의 입술이 참 촉촉하고 탐스러워 보인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주자서에게 몸을, 얼굴을 붙였다. ‘그냥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아서는 이렇게 생겼었나?’ 같은 생각을 하며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주자서의 눈이 반짝 뜨였다.

주자서의 시선을 느낀 온객행의 얼굴이 뜨거웠다. ‘앗!’ 온객행의 당황을 읽은 주자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정말 꽃이 핀다는 게 이런 것일까?’ 온객행은 힘겹게 숨을 삼켰다. 주자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온객행이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 온객행을 밀었다.
“노온?”
온객행은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아직…’ 온객행의 주저함을 읽은 주자서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이 눈썹이 축 처지고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미…미안.”
주자서는 인상을 쓰고 온객행에게 물었다.
“노온,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네. 알고 있지 않은가?”

온객행이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말로 하게.”
온객행이 눈을 꼭 감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대에게서 과거의 정인을 찾고자 함이 아니네!”
온객행의 큰 목소리에 조금 놀란 주자서가 눈을 깜빡이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민망하여 옆에 놓은 나무함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귀곡의 겨울은 추우니까…”
하고는 나무함의 뚜껑을 열었다. 함안에는 담비 털로 만든 피풍의와 그가 고른 책들이 들어 있다. 주자서가 피풍의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고마워.”
온객행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며 말했다.
“입어 줄 거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마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온객행이 담비 털을 쓰다듬는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나는 말이야…”
주자서는 작게 한숨 쉬고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내가 이걸 입으면, 자네는 무엇을 입나?”
온객행이 방금까지 주자서의 손이 있던 담비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 나는…”

주자서가 물었다.
“많이 닮았나?”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마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다. 온객행은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누구의 대신도 아니야. 주자서 너라는 사람이 좋은 거야. 절대로 누굴 닮아서 그런 게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좋은가?”
온객행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자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물었다.
“내가 왜 좋은가?”
온객행이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잘 생겼어.”
주자서가 ‘하하하’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한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랑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너랑 같이 있으면 너밖에 안 보여.”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이상한 표정을 했다.

아렴풋한 등롱불에 주자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온객행은 참지 못하고 주자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코끝이 거의 맞닿아 숨결이 느껴졌다.
“아서. 내 아서.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흔들리는 주자서의 시선이 온객행의 눈가에서 코 끝 그리고 입술로 옮겨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주자서의 입술을 핥았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끙’하고 작게 신음했다. ‘완전히 달라. 이건 진짜야.’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했다. 좀처럼 좁힐 수 없던 간극 따위 없이 드디어 맞닿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다가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치열을 핥았다. 그리고 입천장을 핥고 그다음에는 물컹한 살덩이를 빨았다. 신음이 되지 못한 주자서의 비음이 들렸다.

주자서의 손이 얼굴을 쥐고 있는 온객행의 손목을 잡았지만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온객행은 너무 기뻐서 몸을 더 가깝게 붙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입을 맞대고 있던 두 사람은 숨을 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했다. 아쉬운 한숨이 터져 나오고 온객행은 주자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정말이야. 좋아해.”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입을 맞추기 시작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멈추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애가 닳아 주자서의 눈가에 뺨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말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지는 않네.”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응…”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몸을 뒤로 물리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나는 누구의 대신이 될 마음도 없고…”
온객행이 다급하게 몸을 붙이며 주자서의 말을 멈추고 말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달라… 너는 진짜야.”
주자서가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신기루 같았어. 같이 있는데도 너무 멀어서 외로웠어. 무서웠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양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너는 진짜야. 신기루 같은 게 아니야. 그렇지?”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다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뺨을 꼬집었다. ‘아야!’ 주자서가 웃으며 물었다.
“아픈가?”
온객행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주자서가 붉어진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나는 신기루도 아니고, 누구의 대신도 아니오. 그렇다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대를 동정할 마음도 없소.”
이번엔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찌푸려진 온객행의 미간을 살살 쓸고 말했다.
“그대의 얼마 남지 않은 생에 그대의 마음을 내가 채워도 되겠소?”
온객행은 뺨에 있는 주자서의 손을 겹쳐 잡고 말했다.
“나는 욕심쟁이라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데…”
그리고 주자서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불에 데인 듯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그런…”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 주자서의 얼굴이 붉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허리를 안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온객행이 얼굴을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곡주께서는 참으로 기골이 장대하시오.”
온객행이 투정하듯 고개를 작게 흔들고 말했다.
“싫어. 곡주라고 부르지 마.”
그리고 방금 곡주라고 부른 입을 입술로 막았다. 한참 입을 맞추고 숨이 모자라 떨어진 두 사람은 기름이 다 떨어져 어두워진 등롱 불빛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노온.”
주자서의 부름에 온객행이 답한다.
“응.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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