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手牽羊 | 3. 손에 잡히는 대로 양을 끌고 가라.
부유각이 백택이 위치한 소령(紹岺)의 선창에 닿았다. 이 곳은 태평호의 북쪽으로 구강으로 흘러 나가는 청익강(靑弋江)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은 다른 곳 보다 지형이 완만하고 물길이 나가는 곳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러다 보니 백택도 이곳에 위치하게 됐다. 요즘에는 근처에 살던 어부들과 산에서 약초를 캐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로인가 떠나서 주요와 그를 따르는 우사첩(雨師妾) 몇만 남아 살고 있다. 부유각이 선창에 도착하자 곧 두 명의 우사첩, 천교(天巧)와 보살(普撒)이 다가와 인사했다.
“파사공자.”
붉은 색 옷을 입고 공손히 인사한 두 사람은 온객행이 배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고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평상에서 일으켰다.
주자서의 팔을 잡은 온객행이 그를 갑판으로 데리고 나왔다. 주자서는 절뚝거리며 겨우 온객행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선창에 서 있는 두 여인을 보고 주자서는 다급하게 온객행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나…나는 기루에 팔려 가는 것이오?”
온객행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자서의 말에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물었다.
“주인은 어디에 계시오?”
온객행은 대답하지 않고 우사첩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승선을 허락했다. 천교와 보살은 부유각으로 올라와 주자서를 부축했다. 주자서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부유각을 내리면서도 뒤에 서 있는 온객행을 계속해서 돌아봤다. 온객행은 저를 보는 주자서의 눈빛이 간절하여 손바닥을 펼쳐 들어 그를 배웅했다.
주자서는 여인들의 몸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해서 걸었다. 그의 팔을 붙잡은 여인들은 그가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측백나무 숲을 일각 정도 걸어 송문(松門)이 나왔다. 이곳은 누군가의 사당인 모양이다. 주자서가 송문 앞에 서서 문을 열지 않자 옆에 있던 천교와 보살이 송문을 열었다. 송문 안쪽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로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또다시 작은 측백나무 숲이 나오는데, 이곳은 사당 안으로 들어오기 전보다 측백의 향이 더 진했다. 일각 정도 더 걸어 들어가자 재실(齋室)이 나왔다. 재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주를 모신 사당의 정전(正殿) 남문(南門)이 보였다. 두 여인은 주자서를 데리고 사당의 남문을 넘었다.
남문 옆에 작은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북쪽으로 커다란 정전(正殿)이 보였다. 두 여인은 정전의 입구에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도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주자서가 생각했던 사당과는 조금 달랐는데, 사당이라기 보다는 귀족 저택의 외실 같았다.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에 위패는 하나도 없고 평상이 덩그러니 있었다. 평상 양옆에 작은 향로가 있었는데 방금 향을 피웠는지 기다란 향이 몇 개 꽂혀 있다. 주자서는 일단 이곳이 사당이므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은 것 같아 ‘끙’ 소리를 내며 신위가 있어야 할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제례를 하는 것처럼 팔을 들려다 화살을 맞은 부분이 아파 또 다시 신음을 뱉은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다시 팔을 들어 올려 공수하고 세 번 절했다. 주자서는 절을 하고 너무 지쳐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숨을 골랐다. 문간 옆에 서 있는 여인들이 곧 ‘주인’하고 인사를 했다. 사당의 주인이 사당 안으로 들어왔다.
주요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내가 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바닥으로 금방 꺼지기라도 할 것 같은 유약한 모습은 마치 여인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사내가 절을 하는 모습을 보니 귀족 집의 자제인지 예를 갖추었다. 주요는 평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팔을 들어 올려 공수하고 말했다.
“주자서, 사당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주요는 ‘흥’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 휘우 뜸하게 평상에 누워 말했다.
“그대라면 들어 봤겠지? 태평호에 관련된 소문을 말이야.”
주자서가 소매를 내리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주요가 깊게 한숨 쉬자 뒤쪽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구강(九江)에서 사갈왕(蛇蝎王)이라 불리십니다.”
다른 여인이 말을 이었다.
“사갈왕께서는 여인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사내에게 화를 내리십니다.”
주자서는 그 말을 듣고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일단 너희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너희 주인이 올 때까지 재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천교와 보살이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주자서는 그들의 손길에 휘청거리더니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로 그의 장포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주요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미련한 것.”
그리고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천교와 보살은 사내의 팔을 잡고 일으켜 그를 재실로 옮겼다. 그를 일으키는 동안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축 늘어졌다. 사내를 침상에 눕히고 보살이 그의 옷을 걷어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동여매 놓은 붕대가 전부 피에 젖었다. 천교와 보살은 서로를 보고 한참 고민하다 사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고상은 괜한 투정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들이 백택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얼른 소령으로 향했다. 소령 선창에는 벌써 부유각이 들어와 있고, 참으로 오랜만에 선창과 잇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고상은 훌쩍 부유각으로 뛰어올라 온객행을 찾았다. 온객행은 어디를 갔는지 부유각은 비어 있었다. 뭍으로 나간 것이 아닐 테니 어디 태평호 안에서 누굴 찾는 구나 싶어서 고상은 백택으로 향했다. 정전에 들어서자 주요가 머리에 손을 대고 앉아 있었다. 고상이 웃으며 말했다.
“주요! 내 아이는 봤어?”
주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정말 싫어. 사내라는 것들은 정말.”
고상은 ‘너도 사내 잖아’라고 말할 뻔했지만 다행히 하지 않았다. 크게 공기를 들이마신 고상이 말했다.
“지금은 아파서 그래. 다 나으면 기둥서방을 시켜서…”
주요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아상.”
주요의 부름에 고상이 입을 닫았다.
정전 안으로 천교와 보살이 들어왔다. ‘주인’하고 인사한 두사람은 고상을 보고, 서로를 힐끔 본 다음 보살이 주요에게 다가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고상은 괜히 심통이 나서 말했다.
“우리 유서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알아야 하겠소.”
주요가 보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이 상석에서 내려와 다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말했다.
“사내의 출혈이 심하여 사당에서 쓰고 남은 지혈제를 사용하여 치료하였습니다.”
천교가 옆에서 거들었다.
“짧은 소견으로는 내상이 의심됩니다만….”
천교의 말에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고상에게 말했다.
“그래서?”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주요, 우리 유서는 이제 사람이 아니오. 내 피를 마시고 화사가 되었으니 그리 모질게 굴 것 없어요.”
주요가 고상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고상! 피를 먹였어?”
고상이 주요가 앉은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에이, 파사공자가 영력이 있는 아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내 피는 그저 조금 회복을 도왔을 뿐.”
주요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내가 발견했을 때 그의 피는 사람의 피 냄새였는데?”
고상이 주요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파사 말로는 신선이 겁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였소.”
주요가 작게 코웃음 치고 말했다.
“영력이 있는데 어찌 상처가 낫지 않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고 천교와 보살을 보았다. 천교가 말했다.
“영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인의 겁을 사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보살이 말을 이었다.
“선인의 겁을 사는 것이라면 영력은커녕 요괴 근처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요즘 천존께서는 악수(惡獸)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계시니 요괴라면 싫으시겠지.”
주요는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쩔 수 없네. 너희 그 유서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으니.”
고상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응. 주요는 파사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분명히 유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주요가 고상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상, 그가 사람이라면 그를 보내주어야 해.”
고상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는 내 피를 많이 마셔서 온전히 사람이 될 수도 없어.”
주요가 고상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뭘 얼마나 먹였는데 그러는 거야? 가서 보자.”
고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의 시중을 들었다.
주요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고상과 우사첩을 밖에 두고 혼자 재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서는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주요는 양손을 들어 눈 위로 손등을 가져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무지기의 눈을 사용하는 참이다. 한참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주요가 손을 내리고 감았던 눈을 뜨자 그의 눈은 금빛으로 빛났다. 그가 시선을 사내에게 돌리자 사내의 몸 주변에 영력이 보였다. 보통 영력은 한 갑자 이상 수련을 해야만 생기는 것으로 보통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요괴나 신선의 자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보통 천존(天尊)께 처벌을 받는 일이라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주요가 유서에게 다가가자 유서의 영력이 주요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주요는 고개를 갸웃하고 사내의 몸을 감싼 영력이 뭘 하려는 것인지 한동안 지켜보았다. 영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열심히 막고 영력의 존재를 살피려는 기운을 밀어낸다. 주요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사내의 몸 주변을 떠다니던 영력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요는 사내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저 영력이 사내의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요가 한발짝 물러났음에도 주변에 있던 영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사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력이 모두 몸에 흡수되자 덜컥거리던 사내의 몸부림이 멈추었다. 주요가 다가가 그의 몸을 살피자 그의 몸에서 느껴지던 영력이 모두 사라졌다. 주요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만지려고 하자 사내의 몸이 튀어 오르더니 ‘컥’하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피를 토했다. 주요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천교와 보살을 불렀다.
“천교! 보살!”
재실의 장지문이 열리고 천교와 보살이 들어왔다.
피를 토하는 주자서를 발견한 보살이 얼른 다가와 주자서를 일으켜 앉히고 그의 등을 쓸었다. 천교는 물에 적신 영견을 가져와 주자서가 토한 피를 닦아냈다. 주자서는 잔기침을 조금 더 하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보살이 주요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대선(大仙)?”
주요는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감추고 말했다.
“아상이 아주 귀한 것을 주웠구나.”
주요가 비틀거리자 천교가 일어나 주요의 소매를 잡아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대선께서는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사람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주요가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것을 보는구나.”
고상이 문간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슬쩍 재실 안으로 들어왔다. 유서가 피를 토한 것을 보고는 그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달려가 말했다.
“유서! 이게 무슨 일이야?”
고상이 주자서의 얼굴에 손을 대고 흔들며 말했다.
“유서야, 서야! 얼른 눈 떠보아라.”
고상이 주요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우리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피를 토한다는 말이오?”
주요가 몸을 돌려 재실을 나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사자형제에게 다녀와야 하겠어.”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 옆으로 가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지기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말이야?”
주요가 고상을 보며 말했다.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피는 그만 먹이는 것이 좋겠어.”
고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내 피는 다섯 갑자의 영력이 모인 영약이라고!”
주요가 고상에게 말했다.
“정말로 요괴로 만들 것이 아니면 그만하라는 소리다.”
고상은 침상에 누워있는 유서를 보았다. 파리한 안색에 입가에 묻은 피가 붉다.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모습에 고상은 겁이 났다.
“주요, 주요… 우리 유서는…?”
주요가 보살에게 말했다.
“보살, 네가 돌봐 주어라.”
보살이 유서를 옆으로 누이고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고상은 침상에 걸터앉아 유서의 손을 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은 고상의 체온보다 높았다. 화사의 체온은 원래 사람의 체온보다 항상 서늘했기 때문에 고상은 유서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주요는 소령 선창에 있는 부유각을 보고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유사혈에 가려던 발걸음을 부유각으로 옮겼다. 온객행은 내실의 휘장을 걷고 있었는데 주요를 발견하고도 인사하지 않았다. 주요가 말했다.
“유사혈에 무엇을 물으셨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천도를 아주 요긴하게 썼습니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셨으면 파사공자께도 보내 드렸을 텐데요.”
온객행이 주요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서왕모께서 아시면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금모원군(金母元君)께서는 자애(慈愛)하셔서 남에 흠은 덮고, 아픔은 보듬어 주시는 분입니다.”
온객행은 작게 코웃음 쳤다.
주요가 자리에 앉아 온객행이 건네는 차를 마시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상이 아주 재미있는 것을 주운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사자형제에게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온객행은 차를 마시며 백택의 측백나무를 보고 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소령에 와보는군요. 측백의 향이 좋습니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태평호에서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온객행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는 부유각을 나와 태평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주자서는 자신의 장포를 서슴없이 벌리며 허벅지에 붕대를 매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주자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자기 마음대로 주자서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붕대를 감는 것이 끝나자 여인은 주자서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인이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주자서가 다치지 않은 팔로 그릇을 받으려 하자 여인은 고개를 흔들더니 주자서의 입가에 탕약 그릇을 댔다. 주자서는 여인들의 시중을 받느라 한참 정신이 없었다. 두 여인이 모두 나가고 방에 켜진 등롱의 빛이 어둡다고 느껴질 즈음 고상이 작은 소반에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고상은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선반을 두고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켰다. 주자서가 일어난 것을 보고 한참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부루퉁하게 앉아 있다가 말했다.
“아프지 마! 싫어.”
주자서는 고상의 투정에 부스스 웃어버렸다. 고상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웃으면 좋잖아.”
그리고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더니 협탁에 놓았던 선반에 들은 묽은 죽을 건넸다. 주자서가 ‘후후’ 불어 죽을 먹기 시작하자 고상이 말했다.
“삐쩍 말라서 내가 너무 걱정이야. 얼른 살을 찌워야 될 텐데”
그리고는 주자서의 팔과 다리를 만지작댔다. 주자서는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몸이 성치 못해 그런 것이니 심려치 마세요, 주인.”
고상은 주자서가 먹는 것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주인이라는 말 싫다. ‘아상’이라고 불러.”
주자서가 먹다 남은 죽그릇을 소반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요.”
고상이 주자서가 내려놓은 죽그릇을 다시 들어 주자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안돼. 다 먹어야지.”
주자서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자 고상이 숟가락을 들어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가 다시 부스스 웃고 고상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죽을 몇 술 더 떴다. 하지만 입안이 까슬까슬하고 피 맛이 나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고상이 눈치껏 차를 가져다 주자서에게 따라주었다. 주자서는 그것이 기꺼워 또 고상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백택으로 온 이후로 주자서는 금방 몸이 좋아졌다. 다리에 난 열상도 거의 다 아물었고, 이제 팔을 들어 공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머리위로 팔을 드는 것은 아직도 아팠다. 백택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교와 보살은 종종 백택을 나가 물고기나 약초를 구해오고는 했는데 그것을 고상이 이리저리 요리하여 먹었다. 며칠 잘 먹여 놓으니 주자서의 뺨에 몸에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리한 안색에도 혈기가 돌았다.
집안일에는 영 재주가 없는지 음식을 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하였으나 부서진 가구나 집을 고치는 것은 잘했다. 천교와 보살은 그동안 그냥 두었던 백택의 이곳저곳을 수리하는데 주자서를 데리고 다녔다. 주요는 한동안 백택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고상이 온객행에게 물어도 온객행은 말없이 차만 마실 뿐이었다.
보살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유서, 오늘은 백련잎을 따러 가자. 수영은 할 줄 아시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천교가 커다란 소쿠리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파사공자께 부탁하면 되지. 어차피 헤엄쳐서 다 가지고 오지도 못해.”
보살이 얼른 가서 천교를 도우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교교 말이 다 맞지.”
주자서도 눈치껏 소쿠리를 들고 백택을 나섰다.
파사공자의 부유각은 아직도 소령의 선창에 닿아 있었다. 천교와 보살이 소쿠리를 내려놓고 소매를 들어 공수하며 말했다.
“파사공자.”
주자서도 둘을 따라 소매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이 실내에서 휘장을 걷고 나와 말했다.
“무슨 일이오?”
보살이 말했다.
“백련잎을 딸까 합니다.”
천교가 말을 이었다.
“파사공자께서는 연잎 차를 좋아하시지요?”
파사공자는 잠깐 쓸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여 그들이 승선하는 것을 허락했다.
천교와 보살은 영력으로 하얀 연꽃이 가득 핀 습지로 향했다. 주자서는 갑판에 앉아 태평호의 물을 보았다. 천교와 보살은 한참 부유각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갑판을 연꽃 근처에 대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가 놀라서 그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자서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높은 누각에 앉아 보고 있던 온객행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들은 우사첩이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우…우사첩?”
온객행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대는 요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주자서의 눈동자가 한참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뭔가 깨달은 듯 작게 ‘아’하고 말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주자서가 며칠 요양했던 내실로 이끌었다. 그리고 병풍 너머 침상 뒤쪽에 있는 난간에 있는 연잎을 손짓하며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올해 새로 난 백련잎이오.”
주자서가 한참 백련잎을 보고 있다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백련잎을 따러 온 것이 아니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파사공자 감사합니다.”
온객행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온객행.”
주자서는 또 한참 소매를 들고 온객행을 보다가 말했다.
“온공자.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부스스 웃었다. 살이 차오른 주자서의 얼굴은 사경을 헤매던 주자서의 얼굴과 달라서 온객행은 신기했다. 왜 고상이 그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떼를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주자서는 난간을 넘어 걸터앉고는 연잎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조금 작은 연잎의 줄기를 잡았다. 온객행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멈추시오. 맨손으로 따면 가시에 찔립니다. 연대에는 작은 가시가 있어요.”
온객행이 작은 칼을 주자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너무 어린 잎이 아니라 조금은 큰 것으로 잎의 가장자리가 늘어진 것이 가장 좋습니다.”
주자서는 연잎을 놓고 온객행에게서 칼을 받았다. 잔뜩 올라온 대를 몇 개 헤치고 넓은 연잎 아래를 칼로 잘랐다. 연꽃 진액이 실처럼 늘어져 하늘에 나부꼈다. 주자서는 처음 봤다는 듯이 연잎을 들어 온객행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온객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자서를 따라 웃고 있었다. 주자서가 연잎을 따서 옆에 두고 또 다른 연잎을 땄다. 손이 닿는 위치에 있는 연잎을 모두 딴 주자서가 자리를 옮기려고 난간을 넘으려다 발을 헛디뎠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나아가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챘다.
“아! 온공자 고맙습니다.”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주자서가 당황한 듯 말했다. 온객행은 자신의 품에 들어온 주자서의 온기가 기꺼워서 한참 안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안았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에게서 방금 딴 백련잎의, 하얀 연꽃의 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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