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6

樹上開花 | 6. 나무에 꽃을 피운다.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마친 주요는 재실에서 느껴지는 작은 기척에 눈을 떴다. 막 명상을 마친 터라 그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눈을 감고 조금 더 숨을 고르던 주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측백나무숲을 나왔다. 부엌이 있는 재실의 남쪽을 지나 내실로 가자, 옷을 보관해 놓은 함을 이리저리 열어보는 고상이 보였다. 주요는 고상이 반가워서 말했다.
“아상, 옷을 갈아입으려고?”
주요를 발견한 고상이 웃으며 인사했다.
“주요! 주요, 분홍색 옷은 없어요? 나는 분홍색이 좋은데.”
주요가 능숙하게 함들 사이에서 분홍색 장포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 아상은 분홍색이랑 정말 잘 어울려.”
고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아니야. 나 입을 거 아니에요. 유서 입힐 거예요.”
주요가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다시 얼굴을 꾸며 말했다.
“유서에게…?”
고상이 주요가 들고 있는 옷을 받으며 말했다.
“화사는 붉은색 옷을 입잖아요. 유서는 아직 아기이니까 분홍색을 입히려구요.”

주요가 고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상. 내가 서왕모께 여쭤봤는데….”
고상이 고개를 들어 주요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왕모께서는 아신대요? 우리 유서는 화사이지요? 요괴이지요?”
주요가 고상을 평상으로 이끌어 앉힌 뒤에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니야. 유서는 사람이야.”
고상이 눈썹을 축 늘어뜨려 울상을 짓고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내 피를 한 말(斗)은 마셨을 텐데 어떻게 사람이에요?”
주요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희주씨(姬周氏; 주나라의 왕족)의 후손인 것 같아.”
고상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게 뭐요?”
주요가 작게 웃고는 말했다.
“아상, 내가 읽으라고 했던 책을 읽지 않았지?”

고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책 읽는 것이랑 우리 유서랑 무슨 상관이야?”
주요가 아상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고는 말했다.
“아상. 요괴와 사람이 구분 없이 살았을 때, 삿된 것을 물리치고 왕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고상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대답이 없다.
“천존께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삿된 존재를 물리친 요괴와 사람을 신선으로 만드시고, 그를 도운 사람을 왕으로 만드셨는데, 그중 하나가 희주씨야.”
고상은 더욱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요를 보았다. 주요는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그는 과거 천존이 황룡의 힘을 허락한 왕족의 후예인 것 같아. 정확히 누구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상이 주요를 보고 말했다.
“유서가…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구요?”
주요는 고상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주요가 고상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 어쩌다 전쟁에 휘말렸을까? 그는 분명히 시랑(豺狼)을 봤을 텐데….”


주자서는 앵두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세수를 한 것 같은 맑은 얼굴의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온객행을 마주 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온객행은 바구니를 힐끔 보고 앵두 몇 개 집어 손에 올려 놓은 뒤에 탁상에 앉아 앵두를 먹었다. 주자서도 따라서 온객행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공공께서 왔다고 하는데….”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나는 지네가 정말 싫어요. 어릴 때 발가락을 물려서….”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가 안고 있는 바구니에서 앵두 몇 개를 더 꺼냈다. 주자서는 바구니를 탁상 위에 올려 놓고 온객행에게 붙어 앉으며 말했다.
“여긴… 여기에는 없겠지요?”
온객행이 입안에 든 씨를 뱉고 말했다.
“지네는 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다 먹은 앵두 바구니를 들고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따라 일어났지만 감히 휘장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난간에 기대어 태평호를 보았다. 금방 온다던 고상에게 소식이 없다.

온객행은 누각에 두었던 화로와 냄비를 가져와 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 그리고 씨만 남은 앵두 바구니에 물고기를 잡아 왔다. 이미 정갈하게 손질된 물고기를 나무 막대에 끼워 화로에 걸어 놓고 주자서에게 차를 건넸다. 주자서가 차의 향을 맡아보더니 말했다.
“온공자, 이건 저번에 딴 연잎으로 만든 차입니까?”
온객행이 자기 앞에 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는 차로 입을 축이고 온객행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온공자. 저는… 저는 사람입니까?”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주자서를 보며 말했다.
“그것은 주요에게 들으시지요.”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주요?”
온객행이 조금 놀란 눈치로 말했다.
“태평호의 주인 무지기 주요 말이오. 설마 주요가 아직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소?”
그리고는 ‘하하하’하고 낮게 웃었다. 주자서는 멋쩍어서 고개를 백택 쪽으로 돌렸다가 즉저가 떠올라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은 접시에 갓 구운 생선을 올려 놓은 온객행이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처음 왔을 때는 주는 대로 아주 잘 먹었는데,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먹는 속도가 느려지고 방법이 많이 고상해졌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언제 마지막이었더라?’ 온객행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마저 구운 생선을 내밀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권했다. 온객행은 변덕이 일어 생선을 자기 앞으로 가져와 주자서가 먹는 것처럼 해보았다. 내장은 써서 먹지 않고, 가시와 비늘을 발라 먹는다. 구워서 그런지 은은하게 연기 냄새가 났다. 온객행은 이렇게 구워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화로와 다구(茶具)를 정리하고 주자서는 바구니에 접시와 젓가락을 담아 태평호에서 설거지를 했다. 요리에 재주가 없는 주자서는 종종 군영에서도 설거지를 하곤 했는데 구리나 나무로 된 그릇이 아니라 도자기로 된 그릇을 구경하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하얀 도자기는 중원(中原)의 수도인 낙읍(洛邑) 출신인 주자서도 몇 번 본적 없는 고급품이다. 주자서는 깨끗하게 씻은 식기를 가지고 내실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입구 근처에 서 있다가 그가 들고 온 바구니를 받아서 잘 씻은 그릇을 영견으로 닦아 함에 넣었다. 온객행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고상이나 천교, 보살과 함께 있을 때는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온객행과 둘이 있으면 정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온객행은 식기를 정리한 뒤에 태평호 쪽의 난간의 휘장을 걷었다. 주자서는 그 난간에 기대서 태평호를 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일렁이는 물 위로 햇빛이 쏟아진다. 마치 부서진 파편 같아서 손에 만져질 것 같다. 주자서가 수면위로 손을 뻗자 언제 다가왔는지 온객행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서서 말했다.
“수영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소?”
또 어정쩡하게 안기게 된 주자서는 온객행이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발이 닿는 곳이면 괜찮습니다. 이곳은 선창이지 않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내실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아상에게 내가 혼이 납니다.”
주자서가 어색하게 ‘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작은 대야를 찾아 물을 퍼 담아 주자서에게 주었다. 주자서는 그 물에 세수를 하고 손을 씻었다.

주자서는 문득 고상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온객행이라는 파사는 흑룡이라 했다. 흑룡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긴장이 됐다. 주자서는 무관(武官)의 집에서 태어나 무관이 되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기 때문에 신화나 설화 같은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들었던 방패와 검에도 신화의 신수(神獸)가 새겨져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 지는 모를 일이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의 그다지 높지 않은 신분의 무관이란 신수가 아무리 영험(靈驗)한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그런 주자서도 음양오행 사상은 알고 있다. 흑룡. 검은색이라면 북방의 신일 것이다. 천교와 보살이 주인에 대해 말해준 것을 생각해보면 요괴와 신수는 그 위치가 비슷한 것 같다. 주자서는 의미 없이 세월을 보내기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상이 말했던 주자서가 죽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안타깝게도 현재로서는 주자서의 능력으로 요괴들의 눈을 속이고 태평호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해가 중천을 막 넘었을 즈음 주요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같이 부유각으로 왔다. 고상은 주요의 바로 뒤에 서서 주요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주자서는 부유각 기둥에 몸을 숨기고 온객행이 내실을 나가 갑판에 서는 것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선창 위로 나아가는 것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앞섶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남자의 손에 작은 두루마리가 있었다.

남자는 두루마리를 손짓으로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천존께서 그대의 죄를 사하셨으니 봉인을 풀고 천존의 명을 받드시오.”
온객행은 갑판 끝에 서서 선창을 한참 바라보더니 선창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앞에 무릎 꿇어 두루마리를 받았다.
“서호의 흑망. 천존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온객행 주변으로 구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주자서는 휘장을 걷고 갑판으로 나와 온객행이 표풍(飆風)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고상이 갑판으로 나온 주자서를 발견하고 얼른 부유각으로 가서 주자서의 몸을 붙잡았다. 표풍은 한동안 계속되더니 검은 구름과 함께 곧 사라졌다. 온객행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랗고 푸른빛이 도는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방금 두루마리를 건넨 즉저를 향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즉저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선창에서 한발짝 물러섰다. 주요가 뱀에게 말했다.
“그쯤 하시오. 봉인이 풀린 것을 축하하오. 흑망.”
뱀이 하늘 높이 고개를 치 들더니 곧 큰 뱀이 연기처럼 쏟아져 내려 온객행이 되었다. 온객행은 뱀으로 변하기 전에 입었던 장포보다 더 짙은 검은색에 푸른색 실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장포를 입고 즉저가 건네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온객행은 발걸음을 옮겨 땅에 발을 내디뎠다.

주요가 즉저에게 말했다.
“천룡. 천존께서 시키신 일은 끝이 난 것 같으니 어서 천궁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떠한가?”
즉저는 두루마리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먼저 존명을 읽어 보시지요.”
온객행이 두루마리를 들고 즉저를 보며 말했다.
“내가 천룡에게 존대를 다 받고,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는가 보오?”
즉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에 사는 분들께서는 어찌 과거를 들추는 일을 즐기십니까?”
온객행이 두루마리에 감겨 있는 끈을 풀며 말했다.
“어디 쉽게 잊히는 과거여야지.”
즉저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두루마리를 읽으며 말했다.
“그동안 오룡(五龍)이나 사령(四靈)이라도 된 줄 알았지.”
즉저가 작게 혀를 찼다. 주요는 온객행의 말을 듣고 ‘하’ 하고 헛웃음 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다 읽은 두루마리를 주요에게 건네며 즉저에게 말했다.
“천존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에 내가 너무 부족하여 먼저 공공께 아뢰고 답변해도 되겠는가?”
즉저가 ‘쯧’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공공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한시가 급하니 결정을 명확히 하시어….”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현명대선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소?”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선께서는 원래 광택왕과 동창으로….”

온객행이 즉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도예는 어떠하오?”
도예의 이름에 즉저가 펄쩍 뛰며 말했다.
“어찌 감히 사흉(四凶)의 이름을 입에 올리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꺾어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광택왕이 어찌 북해 용왕이 되었는지 벌써 잊었는가? 정말 그새 노망이라도 난 건가?”
주요가 온객행의 말에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즉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어떻게 하실지 정하시지요.”
그리고 눈을 굴리다 갑판 위에 부둥켜안고 있는 고상과 주자서를 발견했다.

즉저가 선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갑판을 보고 말했다.
“저자는 사람이 아닙니까?”
고상이 얼른 주자서를 자기 몸 뒤로 숨겼지만 고상보다 몸이 한참 큰 주자서를 가릴 수는 없었다. 즉저가 주요를 보며 물었다.
“여인들만 취하는 것 아니셨습니까?”
주요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무엇을 취한다는 말인가? 나는 사람의 그 무엇도 취한 적이 없네.”
즉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요를 위아래로 보더니 선창에 올라 갑판 가까이 다가갔다. 고상이 벌떡 일어나 공수하고 말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이에요. 화사입니다!”
즉저가 고상의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화사 중에 사내가 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었소.”

주자서도 눈치껏 일어나 고상의 뒤에 섰다. 고상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주요가 말했다.
“그는 황제의 후손이요. 나의 사당에 빌 것이 있어서 왔다가 상처를 입어 내가 돌보고 있었소.”
즉저가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고 물었다.
“빌 것?”
주요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는 사람들의 나라에 전쟁이 난 것을 모르시오?”
즉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사람과 교류가 끊어진 지 열 갑자가 넘었는데 어찌…?”
그러다 고상을 보고 말했다.
“화사는 또 무슨 말이오?”

주요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화사가 구해서 화사의 아이가 된 것이오. 일이 끝나면 사람의 세상으로 다시 보낼 것이니 상관치 마시오.”
주자서가 주요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의 세상?’ 즉저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정말 영력이 있군.”
주자서는 눈치를 보다가 고상을 따라 공손하게 공수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즉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력이 있는 사람은 정말 맛있는데 말이야.”
고상이 그 소리를 듣고 힐끔 고개를 들어 즉저를 보았다. 즉저가 고상의 시선을 눈치채고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온객행이 선창을 지나 다시 갑판 위에 올라가 고상 앞에 서서 즉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들은 모두 내 휘하에 있는 아이들이니 행동을 조심하시게. 그대가 혹시 기억 못할까 해서 하는 말인데. 나의 상전은 종화산(鐘火山) 촉룡(燭龍)이시네.”
즉저가 빙글빙글 웃으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 저 아이가 새로 얻은 희첩(姬妾)입니까? 퍽 고상한 취미인지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온객행은 즉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주요가 즉저에게 말했다.
“흑망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말 상대나 되어주게. 한동안 태연에 머물렀다 했지? 금모원군께서는 강녕하신가?”
즉저가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 온객행을 한번 보고 몸을 돌려 다시 땅을 밟고는 주요에게 말했다.
“금모원군께서는 건강하시지요. 요즘 오룡과 사령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주요가 즉저의 소매를 잡아 백택으로 이끌며 말했다.
“그것은 어제 다 말해주지 않았나? 올해 새로 딴 잎으로 덖은 연잎 차가 있으니 내게 원군의 말씀을 들려주세요.”
그리고는 갑판에 서 있는 고상을 보고 말했다.
“아상! 와서 차시중을 들어야겠다.”
고상이 갑판에 서 있는 주자서와 온객행을 한번 보고 주요의 뒤를 따랐다.

온객행은 갑판에 서서 즉저와 주요가 백택의 송문을 지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팔을 낚아채서 다시 부유각 내실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왜 나왔소? 내가 몇 번이나 당부하지 않았소?”
주자서는 벌벌 떨다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는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온객행이 겁을 먹은 주자서를 보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황제의 자손이라구?”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황제(黃帝)…?”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평상에 앉히고 말했다.
“그대는 희주씨(姬周氏)인가? 어째서 황룡의 기운이 없소?”
주자서의 눈동자가 한참 이리저리 흔들리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저… 저는 기산(岐山) 주가(周家) 자서(子舒)입니다.”
온객행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기산?”
주자서는 흠칫 몸을 웅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물었다.
“혹 기산을 계곤산(係昆山)이라 부르지 않소?”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한참 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모친의 성을 따르는 것이오?”
주자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객행과 거리를 벌리고 말했다.
“그… 그대는 누구십니까?”
온객행은 일어난 주자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사내가 아니오? 어찌…?”
주자서는 영문을 몰라 뒤로 물러나다 기둥에 부딪혔다. 온객행이 자리에 앉아 다 식은 찻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계곤산에 살고 있는 황제의 후예는 그의 딸 발(妭)뿐이오.”
발은 황제의 딸로 태양의 힘을 다루는 여신이다.

발은 천계의 왕이 되고 싶었던 치우(蚩尤)와 싸울 때 비와 구름의 신을 무찌르고 큰 공을 세웠지만 점점 강해지는 태양의 기운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가 가는 곳은 항상 메마르고 가물었는데 양기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운은 농작물을 시들게 했고, 날씨를 덥고 건조하게 했다.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한 그녀는 하늘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후에 천존께서 그녀의 상태를 발견하고 돌로 만들어진 계곤산에 그녀의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발은 천녀(天女)였기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전달이 된다. 애초에 온객행은 발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기둥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주자서의 모습은 조금 가늘고 연약해서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온객행이 불쑥 물었다.
“혹 동복(同腹)의 누이가 계시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온객행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혹 그대의 모친께서 불혹(不惑)을 넘기셨소?”
주자서는 온객행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가 발의 자손이라면 문제가 조금 큽니다.”
그리고 온객행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는 말없이 다시 기둥에 몸을 기대고 생각했다. 사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해준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갑판에서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졌던 온객행이 커다란 뱀이 되었다 다시 안개처럼 사람이 되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온객행이 움직이고 그를 볼 때마다 주자서는 흠칫흠칫 놀랐다. 주자서의 경계하는 기색을 읽은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그제야 기둥에서 떨어져 탁상에 놓여있는 찻물을 들이켰다. 연거푸 타는 목을 축이고 난 후에야 차를 마신 잔이 방금까지 온객행이 사용하던 잔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주자서는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탁상 위에 떨어진 찻잔은 다행히 깨지지 않았다. 주자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
“발? 대체 그게 뭔데?”


즉저는 정전에 앉아 한참 영귀(靈龜)와 현무(玄武)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둘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모시는 상전이 다르니 같은 지역에 산다 한들 의견이 맞을 수가 없었다. 주요는 즉저의 말을 들으며 그가 천궁을 떠나와 있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오룡과 사령은 삿된 것을 함께 퇴치하며 생활과 전투를 반복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이 있어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사흉이라 불리는 요괴 역시 신선(神仙)이 되지 못한 영력이 높은 요괴로 사람을 잡아먹어 미쳤거나 천존에게 벌을 받아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영(靈)으로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하늘과 땅을 오갈 수 있는 대선(大仙)의 영력을 가진 영물은 하늘에 머무르며 더 이상 땅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땅의 일에 상관하는 대선은 주요처럼 미련이 많은 요괴가 되는 것이다.

주요는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즉저에게 차를 권하고 재실로 향했다. 재실에는 고상이 하방탕을 끓이고 있었다. 주요가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고상에게 말했다.
“아상.”
고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주요.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해봤는데….”
주요가 고상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은 금방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주요… 유서는… 유서는….”
그때 송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요와 고상이 밖으로 나와 측백 숲을 지나쳐 다가오는 온객행을 보았다. 고상은 온객행을 보고 달려가 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파사… 파사….”
주요가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무슨 일인가?”
온객행이 고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고상의 아이는 좀 많이 귀한 것 같아.”

주요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상이 어깨에 올려진 온객행의 손을 잡고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요를 보고 말했다.
“그는 발(妭)의 후손이야.”
주요가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발? 그는 사내가 아닌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가 퍼뜩 놀라더니 온객행에게 말했다.
“유서를 혼자 두고 왔나?”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부유각을 보며 말했다.
“어지간히 정신없는 영(靈)이 아니고서 나의 부유각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없어.”
주요는 헛웃음을 짓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고상이 주요를 부르며 말했다.
“주요! 하방탕 먹고 가!”
온객행이 재실 안에서 끓고 있는 구리냄비를 보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온객행을 심각하게 보며 물었다.
“근데 파사… 발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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