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5

欲擒姑縱 | 5. 잡고자 하면 먼저 놓아주어라.

주요는 자신을 뒤따라온 천룡(天龍)를 보고 작게 혀를 찼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금모원군께 여쭈려고 했을 뿐인데 혹을 달게 되었다. 천룡은 주요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수원대선 저에게 이리 모질게 구십니까? 한때 총신(寵臣)이었던 이 천룡을 잊으셨어요?”
주요는 천룡을 힐끔 보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덕분에 태평호에 머물게 되었지요.”
천룡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어찌 저 때문입니까? 미천한 사람 때문이지요.”
주요는 가던 길을 멈추고 천룡을 쏘아보았다. 천룡은 웃는 얼굴로 주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벌써 몇십 갑자 전의 일인데….”
주요가 말없이 천룡을 노려보자 천룡이 웃으며 말했다.
“천존께서 흑망공자(黒蟒公子)의 죄를 사(赦)한다는 좋은 소식을 두고 왜 과거를 꺼내십니까?”
주요는 크게 한숨을 쉬고 다시 태평호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주요가 백택에 돌아왔을 때, 백택은 비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것이, 천룡은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독충을 잡아서 만드는 고독(蠱毒)은 사람뿐만 아니라 요괴나 신선에게도 위험한 독이었으니 선계에서 지네 요괴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드는 갖은 이유 중에 하나기 때문이다. 지네는 딱히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따로 날을 만들어 지네를 몰아내거나 잡아 말려서 약으로 쓰고는 했다. 토룡(土龍)과 달리 사람에게나 요괴에게나 신선에게나 취급이 좋지 못한 천룡은 열등감이 많았다. 그 열등감을 종종 유약한 요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풀었으니 그가 북방의 현명대선(玄冥大仙)의 가좌(假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꽤 의심스럽고 이상한 일이다. 태평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으니 고상이 주워 온 아이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혹여 천룡이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한다면 금모원군께 들은 이야기가 있으니 아무리 천룡이라도 유서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주요가 정전으로 들어오자 고상이 서투른 모양으로 차를 내왔다. 주요를 보고 ‘주인’하고 다소곳이 인사한 고상이 천룡을 보고 인사했다.
“오공공(蜈蚣公)”
천룡은 고상을 위아래로 흘겨보더니 말했다.
“누구?”
주요가 ‘흥’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상 노인네 잘못은 노망(老妄)인 셈 치렴.”
주요의 말에 천룡이 고상을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화사가 옥산을 나와 있다니 신기하군.”
고상이 주요가 앉은 평상의 협탁에 찻잔을 놓고 평상 아래에 있는 자리에 천룡의 몫의 차를 두었다. 천룡이 물었다.
“흑망공자는 어디 계시오?”
고상은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서 파사를 부르는 이름을 들었다. 파사는 커다랗고 검은 뱀이었으므로 흑망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동정호(洞庭湖)에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고상이 본 파사는 온객행 뿐이었으므로.

천룡은 고상이 차를 내려놓은 자리에 가서 앉아 차를 마셨다. 차향을 맡더니 말했다.
“연꽃 향이 아주 그윽합니다. 한창 철이지요?”
주요는 천룡을 무시하고 고상에게 물었다.
“천교와 보살은?”
고상이 다소곳이 공수하고 답했다.
“황산에 곡물을 사러 갔습니다.”
주요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고상을 내보냈다. 천룡이 물러나는 고상을 붙잡으며 말했다.
“화사, 가서 흑망공자를 불러오게.”
고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흑망공자께서는 공공(共工)께 벌을 받아 태평호에…”
천룡이 고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공공의 상전이신 천존께 존명(尊命)을 받고 온 나에게 감히!”
주요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놓으며 말했다.
“즉저(蚣蝮).”
주요의 부름에 천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요를 보았다. 즉저는 천룡을 천하게 부르는 멸칭(蔑稱)으로 보통 사람들이 천룡을 그렇게 불렀다. 주요가 고상에게 고갯짓하여 그녀를 물렸다.

천룡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흑망공자는 봉인이 거둬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주요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노망이 들었는가? 흑망은 스스로를 태평호에 가둔 것이지 정말 공공께서 가두셨다고 생각하는가?”
천룡이 주요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고 물었다.
“대선…?”
주요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공공께서 흑망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룡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어째서…?”
주요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았어요.”
주요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윽한 연꽃향이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떠오르게 만든다.

고상은 정전의 장지문 앞에 서서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파사를 칠석이 아니라 오늘 풀어주려는 모양인데 그것을 전하기 위해 즉저가 직접 하늘에서 온 것 같았다. 그 많은 요괴 중에 왜 하필 즉저를 보냈을까? 그는 저 멀리 북해에 사는 탐욕스러운 늙은 지네인데, 분수도 모르고 모시는 현명대선의 힘만 믿고 자기보다 약한 요괴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고도 했다. 고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남문을 나와 재실로 향했다. 유서가 먹을 만한 것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던 고상은 앵두가 담긴 작은 소쿠리를 들고 백택을 나왔다. 앵두를 하나둘 입에 넣고 씨를 뱉으며 선창에 매여 있는 부유각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등롱 하나 밝히지 않은 내실은 바깥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어두워졌는데 이불 속에 숨은 주자서의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온객행은 물속에서 나와 잠시 누각에 올라가 차를 조금 더 마시다가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손짓으로 불을 밝히고 탁상에 고개를 괴고 앉아서 그리운 그를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 괜히 화가 났다. 태평호로 오고 난 뒤에 그는 단 한 번도 온객행의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참으로 모진 사람.’ 온객행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자형제의 서고에는 그럴듯한 정리 방법이 없어서 여기저기 정보가 널려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자형제들의 시간은 매우 비쌌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온객행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며칠 전 만들었던 백련 봉우리를 말려 만든 연꽃 차 정도이다. 온객행은 품에 안아 보았던 사람을 생각했다. ‘그를 안아 보았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다섯 갑자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몇 백 몇 천 갑자를 사는 요괴에게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벌써 이렇게나 많이 그를 잊었다니.

온객행은 슬퍼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갔다. 한동안 침상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가 떠오를 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겉에 입은 푸른 장포와 검은색 중의를 벗고 하얀 내의 차림으로 침상으로 갔다. ‘오늘 아침에 휘장을 걷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신발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이불도 개지 않은 모양이다. 온객행은 이불을 펴려고 하다가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가여워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한동안 자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온객행은 사람 옆에 몸을 뉘어 이불 째 사람을 껴안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아이야. 여기 내가 함께 있어 주마.”
오르락내리락 작게 바르작대는 사람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심장 소리를, 살갗에 피가 부딪혀 나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온객행일지도 모르겠다.

고상은 앵두를 들고 부유각에 올랐다. 내실에서 등롱을 밝혔는지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온다. 그 빛으로 몰려드는 하루살이를 입김으로 태워버린 고상이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걸어서 병풍을 넘어 침상으로 갔다. 침상 옆에 있는 옷걸이에 온객행이 입는 푸른색 장포가 걸려있다. 고상은 내실 안을 살펴보며 유서를 찾았다. ‘유서가 어디 갔지?’ 고상은 손에 들고 있던 앵두를 침상 옆에 협탁에 놓아두고 휘장을 걷었다. 금침에 둘둘 말린 유서를 온객행이 안고 있었다. 고상은 조금 웃음이 났다. 온객행은 항상 고상이 불쌍하다며 데려온 미물들을 살뜰하게 보살폈다. 막 태어난 두꺼비 요괴도 그랬고, 남쪽을 찾아 날아간 나비도 그랬다. 떠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고상은 그럴 수 없어서 매번 눈물을 쏟았다. 그러면 온객행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상,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유서는 주요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면 다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했다. 고상은 왜 그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도 좋아하고 천교랑 보살도 좋아하고 이제 파사도 좋아하는데 왜 같이 살면 안돼?’ 고상은 침상의 휘장을 내리고 휘장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유서를 바라보다가 내실 밖으로 나갔다. 태평호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동이 틀 무렵 주자서는 몸이 답답하고 조금 더워서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리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하’ 하고 작게 숨을 들이켠 주자서는 몸을 굳혔다. 이불에 매여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즉저를 피하기 위해 파사공자의 침상 위에 숨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이는 파사공자일 것이다.

주자서는 몸에 힘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장 사이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주자서가 몸을 움직여 팔을 빼려고 하자 파사공자는 주자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주자서의 목덜미에 그의 차가운 입술이 스쳤다. ‘앗’하고 움츠러든 그의 목덜미에 파사공자가 뺨을 맞대어 문질렀다. 조금 서늘한 파사공자의 체온은 마침 이불에 싸여 조금 더웠던 주자서에게 딱 좋았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살을 그에게 맞붙였다.

온객행이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그는 그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주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피어나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뒤척이는 주서의 몸이 따뜻하여 온객행은 입술이 데인 것처럼 아리었다. 온객행이 아픈 것이 끔찍이도 싫었던 주서는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게 했었다. 대신 아프고 싶다고도 했었다.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달가울 것이라고도 했었다. 온객행은 그의 사랑이 두려웠다. 온객행은 주서가 사랑하는 만큼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서는 안식을 얻었고, 온객행은 고통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서의 사랑은 모두 다 타서 세상에 없지만, 타다가 만 온객행의 사랑만 세상에 남은 것이다. 온객행은 서글퍼져서 울었다.
“아서…아서….”

주자서는 흐느끼는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이 깨었다. 주자서의 머리에 기대어 울고 있는 것은 온객행이다. 주자서는 몸을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았다. 일그러져 울상이 된 온객행의 얼굴은 애달파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자서는 이불 속에서 팔을 들어 온객행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온객행의 뺨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서늘했는데, 그래서 손에 닿는 느낌이 시원했다. 주자서는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는 솜씨가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의 얼굴을 당겨 안았다. 주자서의 어깨가 서늘하게 젖을 때까지 훌쩍이던 온객행은 눈을 파르르 뜨고 주자서를 보았다.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이 부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객행의 목소리가 애처롭고 쓸쓸해서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말했다.
“연모(戀慕)해. 사모(思慕)해… 사랑해….”
온객행의 목소리는 점점 축축하게 젖더니 마지막에는 울먹였다. 주자서는 안타까웠지만 이 이상 받아주면 그를 기만(欺瞞)하는 것 같아서 몸을 떼고 말했다.
“이만 놓아주시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끌어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온공자.”
주자서의 부름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그를 보며 말했다.
“온공자….”
주자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온객행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쓸쓸해 보이는 그가 가여웠다. 동정(同情)일까? 시혜(施惠)일까? 이곳에서 주자서보다 미천한 것은 없을 텐데 말이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고 침상에서 나오려고 했다. 온객행은 일어나려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그를 다시 침상 위에 앉혔다. 주자서가 자신의 소매를 잡은 온객행의 손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소매를 놓고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연잎을 따던 그날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스스로의 눈을 속이면서. 주자서는 한참 안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온공자. 이만 놓아주시오.”
주자서는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자신을 놓아주라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놓아주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무례를 범했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밖으로 나갔다. 침상에 홀로 남은 주자서는 몇 백 몇 천년을 산다는 요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온객행은 벗어 놓은 중의와 장포를 입고 내실 밖으로 나왔다. 쪼그리고 앉아 태평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잔뜩 젖은 못생긴 얼굴을 유서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퍽이나 다정한 사람이다. 싫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기꺼운 위로다. 화사나 우사첩이 만질 때는 그렇게 경계하더니 자신이 만지는 것은 그대로 둔다. ‘바보같이.’ 온객행은 태평호의 물에 얼굴을 씻었다. 그가 세수를 마치고 일어나자 고상이 물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파사! 오공공 즉저가 왔어. 봉인을 풀러 왔데.”
온객행이 백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필 즉저가 왔어?”
고상이 훌쩍 물 위로 나오며 말했다.
“주요는 천궁(天宮)에 다녀온 거야?”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태연(太淵), 서왕모께 다녀왔을 걸.”
고상이 ‘흠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자형제가 모르는 것을 서왕모께서 아실까?”
온객행이 내실을 보며 말했다.
“금모원군께서 모르는 일은 없지.”

고상이 온객행에게 다가가 서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어쩌지?”
온객행이 누각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주요에게 다 생각이 있겠지.”
고상이 우물쭈물하며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고상을 보고 물었다.
“왜?”
고상이 쪼르르 온객행의 곁에 가서 소매를 잡고 말했다.
“온객행, 봉인이 다하면 태평호를 떠날 거야?”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상을 보았다.
“에이, 즉저가 왔다니까! 천존의 명령이래.”
온객행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상을 보며 말했다.
“천존?”
고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화로에 불을 피웠다. 물 주전자에 물을 담고 예쁜 항아리에 담아 두었던 백련 꽃잎을 찻주전자에 넣었다. 여상히 앉아서 차를 내리는 온객행을 보고 있던 고상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에이! 파사!”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며 말했다.
“가서 네 아이를 지켜. 즉저는 감히 부유각까지 오지 못할 테니까.”
고상은 입을 삐쭉이다 누각을 내려가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실 안에 들어가자 주자서가 병풍 뒤에 서서 협탁 위에 있는 앵두 소쿠리를 보고 있었다. 고상이 다가가 앵두 소쿠리를 주자서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뭘 보고 있어. 너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어서 먹어봐.”
주자서는 얼떨떨하게 소쿠리를 받아들였다. 내실로 들어오는 쪽을 힐끔 보고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즉저는…?”
고상이 주자서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아이참! 너는 즉저라고 부르면 안되지. 오공공이라고 불러.”
그리고 주자서의 입을 막고 있던 손으로 앵두를 들어 주자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주자서는 앵두를 씹다가 씨를 손에 뱉어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공공?”
고상이 앵두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 현명대선의 가좌니까. 지네 주제에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 갔을까?”
고상의 말에 주자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네는 정말 싫어요.”
고상이 앵두 씨를 뱉으며 말했다.
“왜? 지네가 얼마나 맛있는데?”
주자서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주인, 설마 나 지네도 먹었어요?”
고상이 앵두를 더 집어먹으며 말했다.
“사람은 지네를 그냥 먹으면 죽잖아.”
주자서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주인, 저는 아직 사람인가요?”
고상이 주자서의 입에 앵두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이참! 아상이라고 부르라니까.”

고상이 주자서를 침상으로 데려가 앉히고 침상의 휘장을 걷었다. 멀뚱히 앉아 있는 주자서의 입에 또 앵두 몇 개를 넣어주고 말했다.
“즉저는 파사랑 사이가 안 좋아. 즉저가 파사를 질투하거든.”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앵두를 먹었다. 고상이 손에 들고 있던 씨앗을 태평호로 던지며 말했다.
“즉저는 고작 벌레인데, 파사는 용이잖아.”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 고상을 보며 물었다.
“용?”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벌을 받지 않았으면 흑룡이 되었을 거야. 봉인이 풀리면 아마 곧 흑룡이 되겠지. 그럼 즉저가 모시는 현명대선의 현무(玄武) 자리를 놓고 싸울 걸.”
주자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현무?”
고상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유서, 앵두로는 배가 안 차지? 물고기라도 잡아먹을까?”
주자서는 방금까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해 놓고 밥으로 무엇을 먹겠냐는 평범한 질문을 한 고상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하고 헛웃음 지었다.

고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풍 너머 내실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더니 함안에 들어 있는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불평했다.
“죄다 파랗고 까만 옷.”
고상이 다시 주자서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서, 너는 화사야. 옥산의 화사.”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상을 보았다.
“그러니까 흰옷은 안돼. 여기서 기다려 내가 백택에 다녀와야겠어. 일어나봐.”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상이 주자서를 올려보더니 이리저리 몸을 만져보고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집어 이리저리 재보더니 말없이 내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앵두 소쿠리를 안고 멀뚱히 서서 고상이 나가는 것만 보았다. 감히 화사가 무엇인지 흑룡은 또 무엇인지 묻기 겁이 났다. 흑룡과 화사가 어려워하는 사당의 주인 무지기는 그럼 정체가 대체 무엇일까?


주요는 천룡에게 천궁(天宮)에 관해 물을 것이 있었다. 그를 붙잡고 요리조리 피하려는 천룡을 잘 구슬려 천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력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방신(四方神)과 오룡(五龍)은 산천대제(山川大帝) 성신(星辰)의 휘하(麾下)에 있다. 그런데 사령(四靈)은 금모원군(金母元君)인 서왕모의 휘하에 있으니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북방 흑룡 광택왕(廣澤王)이 승하하여 자리가 공석이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북해의 용왕인 광택왕은 용왕이 되기 전에 사흉(四凶) 중 하나인 도예(檮杌)의 부하였는데 노망이 와서 미친 도예를 백룡(白龍)이 봉인할 때 그를 도와 도예를 봉인하는데 공을 인정받아 신선이 되었고 후에 북쪽 바다의 용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산 출신으로 바다에서 살던 영(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요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요는 천룡에게 홍주를 대접하며 사령(四靈)과 오룡(五龍)에 대해서도 물었다.

천룡이 잔뜩 취해 평상 위에서 잠들었다. 주요는 일부러 오래 묶은 독한 술을 대접했다. 천룡이 자고 있는 동안은 태평호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주요는 정전을 나와 재실과 백택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백택에는 우사첩 말고도 산의 정령인 계낭(溪囊) 몇이 측백나무 숲 여기저기에 모여 살았는데 천룡과 함께 돌아온 뒤로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천교와 보살이 황산으로 사람의 물건을 사러 갔다면 한동안 들떠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천존이 파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필 북해 용왕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파사가 떠나면 파사를 감시한다고 붙여 놓은 화사도 옥산으로 떠날테지….’ 주요는 벌써 고상이 그리웠다. 파사의 시혜로 요괴가 된 고상은 그 은혜를 갚겠다고 옥산을 나와 온객행을 따라 태평호에 왔다. 아마 고상이 그 유서라는 사람에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이 주요가 고상에게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작고 연약하고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사랑받을 줄 아는 작은 아이는 주요의 자식과도 같았다. 주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웃어버렸다. 태평호에서 주요의 자식 같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인간조차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태평호는 앞으로도 별일 없이 아주 평화로울 것이다. 홀로 남은 무지기, 주요가 있는 태평호는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주요는 그것이 내심 아쉬워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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