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常鬼 | 무상귀
무구는 축 늘어진 필안의 몸을 뒤졌다. 무구와 필안은 형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귀곡에 들어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서로를 의지했다. 따지면 필안은 무구의 은인이었다. 필안은 무구보다 머리가 좋았다. 사람을 부리는 것도 더 잘했다. 백무상과 흑무상의 이름을 얻었을 때도, 무구는 흑무상이 아니라 백무상이 되고 싶었다. 필안의 앞섶에서 전혼사갑이 나왔다. 곡주는 대체 어떤 변덕이 생겨서 이것을 찾아오라고 시킨 것일까? 아니면 귀곡에서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자신들을 치운 것일 수도 있다. 백무상의 수하가 다가와 말했다.
“백명이 죽었습니다.”
무구가 고개를 들어 귀면을 쓴 잡귀를 보았다. 잡귀가 대답했다.
“양연입니다.”
무구는 전혼사갑을 품에 넣고 말했다.
“설비는 어디 있지?”
잡귀가 고개를 흔들었다. 무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필안의 시체를 보았다. 이제 형제가 없으니 무상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설비와 새로운 개심귀 양연이 청성곡 입구에 닿자 잡귀 여럿이 나와 그들을 포위했다. 양연이 웃으며 말했다.
“히히히. 적사귀는 어디 있는가?”
잡귀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곡주께서 찾으시오.”
설비가 혀를 차고 다시 물었다.
“적사귀도 오는가?”
잡귀가 고개를 흔들며 귀신들만 사용하는 샛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들은 대전에 다 닿기도 전에 곡주와 만났다. 곡주 옆에는 적사귀와 식시귀가 서 있었고, 바닥에는 설비의 동생인 계가가 쓰러져 있었다. 설비가 다가가 계가를 끌어안았다.
“소가(小架)!”
곡주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아주 끈질긴 자입니다.”
설비가 곡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것이 뭐요!”
곡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에 근심이 있다하고, 나를 모르는 이는 무엇을 찾느냐 하네. 하늘이여, 이것은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한다는 말인가?”(6)
온객행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식시귀가 피식 웃었다. 온객행이 보아를 보고 함께 웃었다. 적사귀가 바닥에 있는 설비에게 물었다.
“네가 백명을 죽였나?”
설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소!”
적사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곡주에게 포권하고 자리를 떠났다.
온객행이 설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무구가 돌아오면, 앞으로 그의 말을 잘 들으세요. 그와 함께 설단의 머리를 가져오는 겁니다. 그럼 제가 그대와 그대의 동생에게 악귀자리를 드리지요.”
설비가 식시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흑무상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온객행이 일어나며 말했다.
“앞으로는 설비가 아니라 계비겠군요.”
그리고 식시귀와 새로운 개심귀 양연과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설비는 계가의 몸을 살펴보았다. 고문을 당한 것 같은데 죽을 만큼은 아니다. 백명 그 놈이 무슨 일을 꾸며 놓았던 것이다. 곡주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가를 찾아 냈을까? 새파랗게 어린 놈이 누구를 주물러서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젯밤에 주자서가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고상도, 유이도 목란도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까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온객행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게다가 새벽 댓바람부터 설비가 돌아오는 바람에 박정부에 뭔가 물어볼 새도 없이 대전으로 왔다. 대전에 앉아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식시귀와 개심귀는 대전을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설단과 무구에 대해 떠들어댄다. 하인이 내온 차를 마시자 온객행이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독이 들어 있다. 이 독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머리를 몽롱하게 했다. 온객행은 짜증이 나서 찻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귀왕좌에서 일어났다. 한참 말을 하고 있던 개심귀와 식시귀가 무릎을 꿇었다. 온객행은 아무 말없이 다시 박정부로 향했다. 빨리 설단을 죽여 정리하고 주자서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주자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손목이 머리위에 묶여 축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몸에 힘을 주어 일어나자 좀 나아진 것 같다. 컴컴한 석실에 피워 둔 횃불로 공기가 매캐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의 지하인 것 같다. 주자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목이 깔끄러워 기침을 했다. 잘게 몇 번 기침을 했더니 점점 심해졌다. 그러더니 울컥 피가 솟구쳐올랐다.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보고 주자서의 다리가 풀썩 꺾이고 작게 신음을 뱉었다. 주자서가 막히는 목구멍을 열어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밖에서 잡귀 하나가 들어왔다. 주자서가 피를 토한 것을 보고 놀랐는지 금방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얼마 동안 조용하더니 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나고 희상귀와 목란 그리고 하인 몇 명이 들어왔다. 희상귀가 손짓하자 하인들이 주자서를 풀어주었다. 주자서는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다가가려는 목란을 희상귀가 막고, 어멈 한 명이 다가와 주자서의 맥을 짚었다. 어멈이 주자서의 얼굴과 눈을 살피고 다시 희상귀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자서의 팔을 풀었던 하인과 어멈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희상귀가 말했다.
“귀하신 분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주자서가 희상귀를 보고 뭔가 말하려고 했다.
“주…주인…”
희상귀가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어찌 주공자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주자서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내공도 없이 귀곡엔 어떻게 들어왔지?”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몰라요…”
희상귀가 주자서의 턱을 밀어 놓자. 주자서는 그 힘에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희상귀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는 정말 진왕의 시위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반항조차 하지 않을까? 귀곡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다면 분명히 누군가와 접촉했을 텐데, 망서는 박정부에 들어온 이후로 박정부의 인물 외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뭔가를 찾으러 왔다면 뒤지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하인들이 피하는 일을 찾아 도왔다. 정말 망서인가? 달에서 그를 보내 귀신들의 마음을 채운 것인가? 희상귀가 조용히 목란을 불렀다. 목란이 다가가 희상귀 앞에 무릎 꿇었다. 희상귀가 말했다.
“곡주께서는 그를 한담에서 찾으셨다고 하니, 한담에 가보자.”
목란이 뒤에 쓰러진 주자서를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상귀가 작게 코웃음을 치고 강리와 두형을 불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와 주자서를 눕히고 보살폈다. 박정부에서 망서를 싫어하는 자는 없다. 그게 문제였다.
온객행이 다시 텅 빈 처소로 돌아왔다. 장포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온객행이 나간 사이에 혹시 주자서가 돌아오지 않았나 보았다. 이미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사람의 기척을 읽지 못했으면서도 주자서를 찾았다.
“아서…”
주자서의 이름을 부르던 온객행이 처소 밖으로 나갔다. 박정부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부엌에 앉아 일을 돕고 있는 유이를 발견했다.
“유이!”
유이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조아렸다.
“곡주.”
온객행이 조금은 날카롭게 물었다.
“염귀는 어디 있지?”
유이가 주변의 눈치를 보자 온객행이 유이의 소매를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유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온객행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염귀는 어디 있어?”
유이가 바닥에 엎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주인님과 함께 계십니다.”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희상귀는 어디 있지?”
온객행이 박정부 안에서 소란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근처에 있던 어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하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온객행이 다시 말했다.
“희상귀!”
벽선이 응접실 지붕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희상귀께서는 한담에 계십니다.”
온객행은 벽선이 말을 마치자 마자 한담으로 향했다.
한담수옥의 입구에 닿은 희상귀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왠만한 경공으로는 밖에서 들어올 수 없겠군.”
목란에게 고갯짓으로 한담의 아래를 가리켰다. 목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훌쩍 한담으로 뛰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첨벙’하고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나고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목란이 옷을 들고 입구로 올라왔다. 목란은 손에 들린 옷을 희상귀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인, 이상합니다.”
희상귀가 목란이 내민 옷을 받아 들어 만져보았다. 희상귀는 알지 못하는 천이다. 얇고 투명하며 색도 진하다. 손으로 당겨보니 늘어나기까지 한다. 희상귀가 고개를 들어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고개를 흔들어 물을 털어내고 말했다.
“내공도 없는 자가 함부로 내려가고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희상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옷을 한담 안으로 던졌다.
“아무래도 그를 보내 주어야 하겠구나.”
목란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도착했을 때, 한담수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과 길이 엇갈렸나 싶다가 의심이 일어 한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담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온객행은 안심이 되어 바닥에 주저 앉았다. 희상귀가 온객행을 해치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귀곡에서 살아남도록 도와준 그녀가 이제 와서 곡주까지 된 온객행을 배신할 리는 없다. 온객행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작게 신음했다. 악귀들을 갈아 치우는 것은 온객행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겁을 먹은 노곡주 덕에 귀곡의 악귀과 잡귀들은 해이해졌고, 덕분에 온객행은 노곡주를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곡주가 되고 나면 그 다음은 더 쉽다. 인간의 본성에서 탐욕은 지울 수 없는 것이라 그것을 잘 이용하면 온객행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차치하고 주자서는 온객행이 가장 원하고 가지고 싶은 것이다. 모래를 쥔 것처럼 꼭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박정부로 향했다. 희상귀는 곡주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희상귀는 박정부에 들어오자마자 곡주가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붙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희상귀는 춘매와 추국을 불러 목란에게 붙여주고 응접실로 가서 마음을 다잡았다. 무상귀에게 받은 서신을 두고 곡주를 기다렸다. 목란은 춘매와 추국을 데리고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강리와 두형이 주자서를 보살피고 있었다. 주자서가 파리하게 질려서 쓰러져있다. 강리가 일어나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 이상해요. 망서가 정신을 못 차려요.”
두형이 주자서의 얼굴을 젖은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열도 없고, 맥도 정상인데 일어나지 못하는 게 이상해요.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했어요.”
목란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뺨을 툭툭 치고 말했다.
“망서. 망서!”
주자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떠지지 않았다. 목란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
춘매와 추국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목란이 주자서를 등에 업고 감옥을 나가며 말했다.
“망서는 사람으로 살아야 해.”
목란을 따라 나오던 강리와 두형이 그 말을 듣고 목란을 지나쳐 밖으로 먼저 나갔다. 춘매가 말했다.
“한담으로 나가는가?”
목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다시 박정부에 도착했을 때, 박정부 내부는 한산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온객행은 훌쩍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서!”
희상귀는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희상귀의 양 옆에 있는 계손과 벽선을 제외하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객행이 고개를 꺾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이모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시는 거에요?”
희상귀가 온객행의 호칭에 작게 웃고는 자리를 권했다. 곧 유이가 온객행 몫의 차를 올리고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갓 내온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있다가 다가가 그것을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염귀는 어디 있소?”
희상귀는 여상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마치 방금 온객행이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러다 웃으며 말했다.
“설비가 돌아왔다고요? 아, 이제 계비라고 불러야 할까요?”
온객행이 희상귀에게 다가오자 옆에 서있던 계손과 벽선이 희상귀에게 더 바짝 다가가 섰다. 온객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희상귀.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아요.”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에 있는 서신을 손에 들었다. 희상귀는 호갑투로 서신을 몇 번 쓸다가 온객행에게 건넸다. 온객행은 호갑투를 쓸어내리는 나부몽의 손에서 초조함을 읽었다.
설단은 갑작스럽게 돌아온 무구의 손에 이끌려 한담수옥으로 끌려 가고 있었다. 설단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목숨을 애원하기도하고 무구를 욕하기도 했다. 무구가 한담수옥이 있는 바위산 입구에 닿았을 때, 설비가 나타났다. 무구가 설단의 머리채를 바닥에 팽개치고 말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아비를 구하러 오신게요?”
설비가 무구에게 말했다.
“무형, 내가 언제 무형을 서운하게 했습니까?”
무구가 ‘하하하’ 웃었다. 설단이 설비에게 다가가 말했다.
“비야! 아들아 이 아비를 구해다오!”
설비가 자신의 다리춤에 매달린 설단을 걷어 차며 말했다.
“아비? 누가 내 아비요? 내 아비는 그대가 죽이지 않았소?”
설비가 설단의 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는 계(契)씨지 설(契)씨가 아니오.”
그리고 설단을 무구 쪽으로 던졌다. 무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계비라 불러야 겠군요.”
설비가 손을 모아 포권하며 말했다.
“새로운 무상귀가 되실 분이니 예를 거두세요.”
무구가 바닥에 널브러진 설단을 보며 말했다.
“한담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비가 왔으니 놀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무구의 말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설단이 일어나 한담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구와 설비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설비가 말했다.
“이것은 무상귀의 자리를 놓고 하는 다툼입니까?”
무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설마요. 필안은 죽었습니다.”
설비가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무구를 보았다. 무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탐욕이라는 것은 은인도 죽이게 하더군요.”
설비가 재빨리 다시 포권하며 말했다.
“새로운 무상귀를 뵙습니다.”
무구가 하하하 웃으며 훌쩍 뛰어 설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설비도 그를 따라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희상귀가 건넨 서신을 다급하게 열어 보았다. 종이에 들어 있는 서신은 보통 부자이거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서신을 펼치자 주자서를 닮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얼굴이 구겨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서신을 쓸었다. 그리고 밑에 쓰여 있는 글을 읽었다. ‘진왕궁 기도위 주자서.’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희상귀를 보았다. 희상귀는 다시 찻잔을 들고 말했다.
“설단이 그대에게 보내는 작별이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희상귀! 염귀는 어디 있소?”
희상귀가 차를 마시고 한참 뜸을 들인 뒤에 말했다.
“아행.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해.”
온객행은 숨을 가쁘게 몰아 쉬더니 서신을 접어 앞섶에 넣고 응접실을 나가려고 돌아섰다.
희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의 뒷모습에 소리쳤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네. 그대의 바람은 어디로 불고 있는가?”(7)
온객행이 나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희상귀가 상석에서 내려와 온객행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곡주. 스스로 약점을 만들지 마세요. 망서는 달에서 왔으니, 달에서 가장 안전합니다.”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져 울상이 되자 희상귀가 다가와 온객행의 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행.”
온객행이 나부몽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아직… 아직…”
희상귀가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희상귀가 깊게 한숨을 쉬고 다시 상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강리와 두형이 들어와 온객행을 부축해 응접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넋이 나간 듯 눈초리에 눈물을 달고 하인들이 하는 대로 두었다.
온객행이 객실로 돌아오자 고상이 나타나 온객행을 부축했다. 온객행을 의자에 앉히고 차를 따라 그에게 마시게 했다. 아직 나가지 않은 강리와 두형에게 고상이 물었다.
“목란언니는?”
강리가 조금 울먹이며 말했다.
“아상… 망서가 이상해…”
고상이 강리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두형이 고상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맥도 호흡도 정상인데 눈을 뜨지 못 했어…”
강리가 소매로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해.”
두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망서는 귀신이 아니니까.”
강리가 훌쩍이며 말했다.
“유이가 말한 것처럼 정말 달의 신이었나 봐. 우리 때문에… 우리 때문에…”
앉아 있던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목란은 어디로 갔지?”
고상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주인!”
온객행이 고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보내 주고 싶어.”
두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망서가 귀왕을 계속 찾았어요.”
두형의 말에 온객행이 울상이 되었다. 강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담으로 갔어요.”
두형이 강리를 날카롭게 보며 말했다.
“강리!”
고상이 두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 주인이 보내주지 않으면, 내가 보내주고 올 게.”
그리고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한담으로 향했다.
목란이 바위산 꼭대기에 거의 닿았을 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자서를 업고 있던 추국이 재빨리 몸을 숨기고 목란과 춘매가 주변을 살폈다. 무상귀 설단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춘매가 목란을 보고 말했다.
“죽일까?”
목란이 기척을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단은 정신이 없는지 그들의 기척을 읽지 못하고 달렸다. 목란이 고개를 들어 추국을 찾자 춘매가 그녀를 멈추며 한담으로 올라오는 돌계단을 가리켰다. 무구와 설비가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목란과 춘매는 기척을 없애고 추국이 먼저 간 곳을 보았다. 추국은 기척을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한담 입구 근처에 있는 곳에 몸을 숨겼다. 설단도 뒤이어 무구와 설비가 보이자 추국은 조금 당황했다. 등에 업은 주자서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구와 설비는 설단을 잡아 죽일 생각에 흥분했는지 추국의 기척을 읽지 못한 듯했다. 설비가 설단의 길을 막았다. 무구가 천천히 설단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설형, 설형…”
설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설비에게 다가가 매달리며 말했다.
“비야, 내 아들… 비야!”
무구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 비는 필안의 손에 죽었소.”
설단이 설비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설비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
“원수를 아비로 모시는 일은 별로 즐겁지 않았소.”
설비가 설단을 무구의 발치로 던졌다. 무구가 쓰러진 설단의 목을 쥐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필안은 내가 죽였으니 이제 나도 설형의 은인이오.”
설단이 목에 잡힌 손을 잡아 뜯으며 칵칵거렸다. 무구가 얼굴을 붙이고 물었다.
“설형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설형의 어디를 가져가야 할 것 같소?”
그리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주자서는 온몸이 아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주자서가 힘겹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자 주자서는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옆으로 돌아 누워 기침을 하자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주자서는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손목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있었다. 주자서가 일어나 앉아 몸을 살펴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주자서는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숲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끙’하고 한숨을 쉰 후에 기어서 사람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세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 손에 목이 잡혀 축 늘어져 있었다. 주자서가 잘게 기침을 하며 일어나려고 애를 쓰자 누군가 다가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넌 뭐야?”
주자서가 남자의 힘에 이끌려 자리에 일어섰다.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했다.
“배고파.”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잡귀야?”
무구가 손에 들린 설단의 시체를 내던지고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주자서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말했다.
“넌 누구지?”
주자서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팔을 잡고 있는 남자가 주자서를 재촉하듯 흔들자 주자서가 말했다.
“아… 그러게요. 저는 누굴까요?”
주자서를 붙잡고 있던 설비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주자서의 목을 쥐자 온객행이 나타나서 소리질렀다.
“아서!”
주자서는 낯설지만 친근한 호칭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설비, 지금 무슨 짓이지?”
설비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주자서의 목을 쥐었다.
“아…이게 그 염귀?”
주자서는 설비의 손을 잡아 때려고 몸부림쳤다. 온객행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는 염귀가 아니야. 애초에 귀신도 아니라고.”
설비가 주자서를 한담 쪽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곡주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구가 ‘하하하’ 웃으며 한발짝 떨어져 설비와 온객행의 대치를 구경했다.
설비가 주자서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대체 사내의 뭐가 좋다고 비역질을 하는지…”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고 울먹이며 말했다.
“흑흑, 왜… 왜 이러세요…”
온객행이 설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설비, 계가를 어디에 맡겨 두고 왔는지 잊었나?”
설비가 무구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이 자가 염귀가 아니면 곡주께서 왜 안달을 하실까?”
온객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설비가 멈칫하며 소매에서 칼을 꺼내 주자서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주자서는 무구가 던진 것이 시체인 것을 알고는 겁에 질려 얼굴을 구기고 울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왜…왜…”
온객행은 울고 있는 주자서가 안타까워 자기도 모르게 눈썹이 축 처졌다. 그 표정을 보고 설비가 재미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정말 이 놈에게 푹 빠졌나보군.”
설비가 칼끝을 아래로 내려 주자서의 앞섶을 헤치자 무구가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품에서 바르작대자 설비는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조금 동할지도…”
온객행이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어서 그 자를 놔줘.”
주자서는 바들바들 떨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눈앞에 붉은 옷을 입고 애절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익숙한 듯 낯설다. 그 순간 작은 암기가 날아들어 주자서를 겨누고 있는 칼을 떨어뜨렸다. 주자서는 칼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눈을 감고 붉은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달렸다. 왜 인지 그는 주자서를 지켜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주자서는 칼이 무서워 눈을 꼭 감아버린 탓에 바로 앞에 한담의 입구를 보지 못했고, 그대로 한담에 몸이 빠지고 말았다.
(6) 시경 왕풍 黍離 늘어진 이삭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何求 悠悠蒼天 此何人哉
나를 알아주는 자는 내 마음에 근심 있다 말하고 나를 모르는 이는 내가 무엇을 구한다 말한다네. 아득히 푸른 하늘이여 이것이 어떤 사람 탓인가!
(7)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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