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王 | 귀왕
주자서는 휘우듬하게 기우는 몸에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아… 빠지겠다… 옷이 젖으면 내가 사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고 힘을 뺐는데 순간 누군가 그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았다. 거의 다 뒤로 넘어간 주자서의 몸이 일으켜지고 주자서를 붙잡은 사람을 보았다. 햇빛에 가려 그림자진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남자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고…고맙습니다.”
남자가 물었다.
“괜찮아요?”
주자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연못을 다시 보았다. 짙은 물색은 안보이고 연꽃이 가득하다. ‘연꽃이 있었나?’ 같은 생각을 하며 난간에서 내려와 일어섰다. 남자는 한발짝 물러나며 주자서의 몸에서 손을 뗐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주자서보다 키가 컸는데, 평소 주자서보다 키가 큰 사람은 모델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그도 모델인가 했다. 남자가 말했다.
“촬영 끝났는데, 옷을 갈아 입으시겠어요?”
주자서는 조금 정신이 없어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주자서를 간이 탈의실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옷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남자는 주자서의 어깨에 있는 머리를 살짝 쓸었다. 주자서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 ‘잘 생겼네.’ 라고 생각하며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왕.”
남자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옷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자서가 오늘 입었던 옷은 파는 옷이 아니었나 보다. 물에 빠지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전통복식사를 연구하는 어느 대학의 문화인류학과에서 자료를 만들기 위한 촬영이라고 한다. 주자서가 입은 옷은 후한 말, 송나라의 도의라고 한다. 남자는 신이 나서 주자서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주자서는 대부분 모르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 네.’ 같은 어색한 말로 호응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계속 한참 떠들다 말했다.
“키가 크다고 다 모델을 하는 건 아닌가 봐요. 제가 입고 찍은 건 다 이상했는데…”
주자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하자 남자가 말했다.
“소요건이나 하엽건 같은 꼬리가 긴 모자를 쓰면…”
촬영 관계자가 주자서를 발견하고 팔을 들어 그를 불렀다.
주자서는 말을 걸던 남자에게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촬영기사에게 갔다. 촬영 기사는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다음 일에 대해 제안했다. 대학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라면 돈을 떼일 일은 없을 것 같아 주자서는 흔쾌히 허락했다. 주자서가 옷을 갈아입고 촬영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진행스텝 한 명이 다가와 주자서에게 앞으로 자주 보자고 인사하며 입금은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중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공손히 인사한 뒤에 고궁을 나왔다. ‘바로 입금이 아니구나. 오늘 저녁에 해줬으면 좋겠다. 배고파…’ 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주자서씨!”
주자서는 햇빛에 인상을 쓰며 뒤로 돌아섰다. 시야가 잠시 뿌옇게 흐려지더니 몸이 휘청였다. 주자서를 부른 사람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주자서씨 괜찮아요?”
주자서를 난간에서 잡아준 사람이다. ‘목소리가 참 좋네.’ 생각하고 눈을 뜨니 역시 그 남자다. 주자서가 자기도 모르게
“배고프다.”
라고 말한 순간 주자서의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났다.
남자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배고파요? 저랑 밥 먹으러 갈까요?”
주자서가 인상을 쓰고 남자를 보았다. 주자서의 표정을 본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종종 볼 건데 친해지면 좋잖아요.”
주자서가 대답없이 남자를 보자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혹시 체중 조절 중이라서 못 먹는 거예요? 이렇게 말랐는데…”
그리고는 주자서의 손목과 팔을 만졌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남자는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내가 살게요. 뭐 좋아해요?”
주자서가 대답이 없자 남자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 근처에 마라탕 맛있는 집 있는데 우리 거기로 가요.”
주자서는 남자가 ‘마라탕’이라고 말하는 순간 식욕이 돌며 갑자기 남자가 엄청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주자서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먹는 걸 주는 사람이야.”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했다.
“네?”
주자서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되려 물었다.
“네?”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낮게 웃더니 말했다.
“내가 사랑스러워요?”
주자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남자가 주자서에게 가깝게 다가서며 말했다.
“방금… 제일 사랑스럽다고…”
주자서가 남자를 올려보며 말했다.
“내가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붙였다. 주자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 제가 편견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이건 좀…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하하하’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주자서가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 일단 고백을 하고… 좀 더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간 다음에… 마음을 먼저 연 다음에…”
주자서의 말에 남자가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일단 우리 마라탕 먹으러 가요. 내가 사 줄게요. 나를 사랑스럽게 봐주세요.”
주자서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주자서는 남자와 발 맞춰 걸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밥 먹을 건데…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주자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온, 온객행이요.”
주자서는 내심 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가 웃었으면 좋겠다.
온객행은 자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주자서를 보고 재빨리 몸을 움직여 설비의 목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 바로 한담의 아래를 보았다. 한담은 고요했다. 방금 사람이 빠졌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서… 아서…”
무구가 설비의 머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곡주.”
온객행은 대답없이 한담수옥 입구에 주저 앉아 주자서를 불렀다. 무구가 온객행에게 다가가자 고상과 목란이 나타나 그를 막았다. 고상이 말했다.
“어서 가서 백무상과 흑무상을 고르시오.”
무구는 고상과 목란은 흘겨보다 곧 바위산을 내려갔다. 무구의 기척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숲 속에서 춘매와 추국이 나왔다. 그들은 주저앉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바위산의 접근을 막는 것이 좋겠네.”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곡주를 보았다. 고상이 곡주에게 다가 가려는 것을 목란이 막으며 말했다.
“시간이 필요할 거야. 우리가 망서를 잊기 위해 필요한 시간 보다는 조금 더 많이.”
고상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망서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추국이 말했다.
“분명 한담에 빠졌는데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춘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기척도 같이 사라졌어.”
목란이 고상을 데리고 바위산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는 정말 망서였는지도 모르겠어.”
온객행은 다음날 무상귀 설단의 거처였던 등활처(等活處)의 귀신을 모두 죽였다. 계가 역시 곧 형제의 뒤를 따랐다. 온객행은 대전에 7명의 악귀를 불러 세워놓고 새로 무상귀가 된 무구에게 웃으며 말했다.
“무형이 원하는 곳에 새로 거처를 지으세요. 이름은… 무간(無間)이라고 합시다. 내가 직접 현판을 쓰겠소.”
무구는 떨리는 손을 다잡고 온객행에게 조아리며 포권했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나는 한동안 좀 쉬어야겠으니, 다들 알아서 처신하세요. 거처 하나 불태우는 일을 귀찮게 아랫사람 시키지 않을 테니…”
온객행은 한동안 박정부에 있다가 그 거처를 한담으로 옮겼다. 한담 위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염귀가 입었던 검은 장포를 덮고 어떨 때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또 어떨 때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귀곡에서 한담을 쉽게 오르고 내릴 만한 경공을 가진 자는 드물어 다른 악귀들은 감히 살수를 보내지도 못했다. 그 사이 나부몽은 저잣거리에서 모욕을 당하던 류천교를 데려와 염귀로 삼았고, 무구는 자기가 부리던 수하들 중 두 명을 골라 백무상과 흑무상으로 만들었다. 고상은 목란에게 경공을 배웠다. 고상의 경공으로 한담을 오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만월의 밤이 찾아왔다. 귀곡에서 명절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챙기는 사람이 없었지만, 박정부의 몇 어멈이 홍화 꽃잎에 곡식가루를 섞어 노랗게 부친 달 모양 떡을 만들어 먹었다. 망서가 좋아하는 떡이라며.
온객행은 배위에 누워 검은 장포를 끌어안고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보았다. 망(望)이다. 온객행은 밝은 달빛 아래 스스로가 죄스러워서 서러워졌다. 그리고 그리웠다. 온객행은 그를 가뒀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그가 싫다고 했던 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추악한 자신의 마음이 그를 놓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늘이 데려가 버리신 거라고 온객행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자서는 마치 귀곡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온객행은 내심 그가 주자서를 놓아주면 그가 다시 한담으로 돌아올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서, 달에서 행복해? 나는 너무 보고싶어.”
온객행이 눈을 감고 검은 장포를 꼭 껴안았다. 온객행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진왕궁의 기도위 주자서는 금군에게 쫓기고 있었다. 진왕은 부러질지언정 굽지 않는 주자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왕의 세력을 키우는 것을 주도한 그의 가문을 멸하였으니 주자서 역시 사라지는 것이 진왕의 도의(道義)에 맞았다. 주자서는 피식 웃으며 나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부친과 연이 닿은 사계산장의 장주가 보낸 서신에는 ‘귀곡(鬼谷)’이라는 두 글자 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곤주에서 익주까지 오는 길은 멀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경계하며 도착한 청성산은 왜 인지 인기척이 없었다. 그를 바짝 뒤쫓고 있는 금군을 따돌리기 위해 가파른 절벽 위로 올라 바위산에 올랐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금군이 그를 포위했다. 당황한 주자서가 숲을 나와 평지로 나가자 금군 몇이 달빛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주자서가 그들을 경계하자 그들 중 한 명이 주자서를 향해 활을 쏘았다. 어깨와 가슴 사이에 화살에 맞은 주자서가 발을 헛디뎌 한담에 빠지고 말았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가 가라 앉는 것을 본 금군이 한담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담 아래에는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금군은 깊이를 가늠하더니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온객행은 ‘풍덩’하고 물에 무언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고상이 또 자신을 귀찮게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 온객행이 덮고 있던 검은 장포를 치우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물결이 시작된 곳을 보는데 고상이 수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담 입구를 보았다. 고상과 항상 같이 오는 목란이 보이지 않는다. 온객행은 장포를 벗고 한담 안으로 몸을 던졌다. 밝은 달빛에 맑은 물에 인영이 가라 앉는 것을 본 온객행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람에게 다가갔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정신을 잃은 듯했다. 고상이 아닌 것을 확인한 온객행은 그를 내버려 둘까 하다가 염귀를 만났을 때 일었던 그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너는 한담에 빠진 것일까? 온객행이 사람을 데리고 뭍으로 갔다.
남자는 기침을 하며 물을 뱉다가 이내 정신을 잃었다. 남자는 비단 피풍의에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살수 같았다. 그가 입은 옷은 그동안 온객행이 보았던 살수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질이 좋아 보였다. 온객행은 저에게 보낸 살수를 바위산을 지키는 박정부의 하인들이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하다 남자가 맞은 화살을 보았다. 온객행은 깃을 만져보았다. 매의 깃털이다. 온객행이 다시 한담의 입구를 한번 보고 남자의 얼굴에 있는 복면을 벗겼다.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 정말 그는 망서일까? 온객행은 드디어 꿈에서 그를 만난 줄 알고 그를 끌어안았다.
“아서…”
남자의 입에서 ‘윽’하고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화살을 맞은 부분을 보다가 덜컥 겁이 나서 그를 놓아주었다. 그를 놓지 못하는 온객행을 벌하기 위해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온객행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더 스미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는다. 인상을 쓰던 온객행이 피가 묻은 손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만졌다. 온객행은 피로 얼룩진 주자서의 얼굴을 보았다. 주자서의 얼굴은 피와 어울리지 않는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안고 한담을 나와 박정부로 향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안고 나타난 다음날 아침, 박정부는 박정부답지 않게 소란이었다. 처소에서 주자서의 상처를 돌보던 어멈이 그의 가슴에 박혀 있던 화살을 희상귀에게 건내며 말했다.
“이건 황궁에서 쓰는 화살입니다.”
희상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머리에 관을 하고 벗은 몸위로는 피로 얼룩진 면포로 가득했다. 희상귀가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주자서의 몸에 이불을 덮으며 말했다.
“망서는 이런 상처들이 없었어요.”
희상귀가 인상을 쓰며 유이를 보았다. 유이가 젖은 영견으로 주자서의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희상귀가 ‘허’하고 헛웃음 치고 물었다.
“곡주는?”
목란이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한담에…”
희상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게 대체…”
주자서는 사흘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가 맞은 화살에 독이 들어 있었는지 의술을 아는 하인들이 모두 들러붙어 그를 보살폈다. 망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박정부 하인들이 하나둘 망서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꽃을 들고 귀왕의 처소를 찾아왔다. 귀왕은 한담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희상귀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했다. 희상귀도 딱히 그들을 막을 이유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
주자서는 옅은 약탕의 냄새에 눈이 떠졌다. 살을 잘 붙게 해준다는 탕약의 냄새다. 주자서는 또 이렇게 살아남은 자신이 우스워서 작게 웃었다. 주자서의 웃는 소리에 목란이 다가와 말했다.
“망서! 정신이 드는가?”
졸면서 탕약을 다리던 유이가 벌떡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와 말했다.
“망서!”
주자서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망서라고 부르는 소녀들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자서는 순간 자신이 유곽에 온 줄 알고 이불을 들어 몸을 가렸다.
유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망서가 부끄러워할 줄도 아네.”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유이를 보았다. 유이는 얼른 함으로 가서 내의를 가져왔다. 목란이 주자서의 이불을 뺏으며 말했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아는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주자서는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며 시중을 드는 이들이 낯설어 말을 하려다 기침을 했다. 유이가 얼른 가서 찻물을 받아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가 목을 축이고 말했다.
“소저들께서는 누구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목란과 유이가 행동을 멈추고 주자서를 보았다.
유이가 건넨 쓴 탕약을 불평도 없이 마시고 말없이 앉아 있는 주자서는 확실히 고상이 알고 있는 망서와는 앉은 자세부터 달랐다. 유이가 고상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찾은 것 같아.”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왜 우리를 기억 못하지?”
주자서가 탕약 그릇을 어디에 두어야 되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 목란이 다가가 그릇을 받으며 말했다.
“주인께서 당신을 보러 올 것이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이 곳은 귀곡이오?”
주자서의 입에서 귀곡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이와 고상이 ‘앗’하고 숨을 들이켜며 다시 속닥대기 시작했다. 장지문이 열리고 희상귀가 들어왔다. 목란은 희상귀를 보자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조아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희상귀는 주자서를 조심스럽게 보며 물었다.
“주자서?”
주자서가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기에 희상귀가 그를 멈추며 말했다.
“예를 거두시게.”
주자서가 신음을 참으며 목란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 무릎 꿇고 포권하여 말했다.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곡주를 뵙습니다.”
희상귀 뒤에 서있던 염귀가 놀라며 물었다.
“사계산장?”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염귀를 보았다. 희상귀가 말했다.
“나는 박정부주 희상귀, 곡주가 아니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받아줄 곳도 살아 갈 곳도 없어 귀곡으로 왔습니다.”
희상귀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귀곡에 입곡을 원하는 자는 반드시 맹파탕을 마셔야 합니다.”
고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안돼요! 나이모 안돼요! 망서가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
주자서가 고상의 호칭에 인상을 썼다. 유이가 말했다.
“곡주를 만나고 난 다음에 마시면 안될까요?”
희상귀는 헛웃음이 나서 그냥 웃어버렸다. 망서가 떠난 지 달포가 넘었는데, 아직도 박정부에는 망서를 싫어하는 자가 없다.
사흘정도 운신을 조심하고 몸을 보살핀 주자서는 혼자서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전에 입었던 하늘하늘한 옷을 보여주자 질색을 하며 입지 않겠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온객행이 입는 장포를 몇 개 골라 입혔다. 머리를 정리하는 것도 몸을 만지는 것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데다 뭐만 하면 ‘소저들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같은 점잖은 말로 거절하고 ‘소저들께서는 잘못하고 계십니다.’하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며칠 지내다 박정부 안에 여인들 밖에 없는 것을 알고 거처를 옮기겠다는 소리도 하였다. 그래도 사람의 본성이 달라지지는 않았는지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주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노파를 도왔다.
그는 박정부의 하인들이 자신 때문에 불편할까 대부분의 시간을 거처 안에서 지냈다. 목란과 유이가 남아 그의 시중을 들었고 하인들이 종종 찾아와 주자서를 만나고 갔다. 원래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아픈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고상이 찾아와 주자서에게 귀왕의 이야기를 하며 그를 망서라고 부르자 주자서가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망서는 달의 여신인데 어찌 저를 그리 부르십니까?”
주자서의 말에 고상이 울상이 되었다.
목란과 고상은 오랜만에 한담을 찾았다. 온객행은 배위에 검은 장포를 덮고 누워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한담 위에 그러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 봐온 참이라 목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상이 말했다.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위에서 찬합을 내려줘.”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상, 나는 안 내려 갈래.”
고상이 입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훌쩍 한담 아래로 내려갔다.
“주인!”
고상이 헤엄을 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배위에 착지했다. 고상은 노를 저어 해가 들어오는 한담 입구 아래로 갔다. 목란이 내려준 찬합을 받아 들고 고상이 목란에게 손을 저어 인사했다. 목란은 손을 흔들다 곧 자리를 떠났다. 고상이 누워있는 온객행의 발을 툭툭 차서 길을 만들어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주인! 밥 먹어요. 이제 그냥 박정부에 와서 드시면 안돼요?”
온객행이 장포를 내리고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서는 어때?”
고상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묻지 말고 가서 직접 봐요!”
온객행이 다시 장포를 덮어쓰고 누우며 말했다.
“안돼.”
고상이 찬합의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이 주자서라는 사람은 엄청 점잖고 다정한 사람이라 나도 기둥서방 삼고 싶어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기둥서방?”
고상이 ‘히히히’하고 웃으며 말했다.
“망서를 좋아했던 사람 중에 주자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주인이 내버려 두니까 다들 넘보는 거잖아요.”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지며 말했다.
“아서가 원하면… 그렇게 해.”
그리고는 다시 누워 버렸다. 고상은 음식 먹는 것을 멈추고 온객행의 다리를 꼬집었다.
“아야!”
온객행이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고상을 흘겨보았다.
“주인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고상이 버럭 온객행에게 소리질렀다.
“그럼 여기 그만 누워있고 주자서한테 보낼 혼서나 써줘요! 주인이 싫으면 내가 시집 갈 테니까!”
온객행도 고상과 같은 기세로 소리질렀다.
“싫어!”
목란은 고상이 이번에는 귀왕을 한담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귀왕을 나오게 만드는 것보다 주자서를 한담으로 밀어 넣는 것이 빠를 것 같아 목란은 박정부로 돌아와 내실로 향했다. 목란이 장지문을 소리가 나게 ‘탁’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실내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는다며 항상 처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목란이 주자서를 탁자로 손짓해 자리를 권하고 본인도 가서 앉아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주공자는 사내를 좋아하시오?”
목란이 건넨 찻잔을 놓친 주자서가 인상을 쓰며 목란을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목란이 떨어진 찻잔을 다시 바로 세워 두며 말했다.
“귀왕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주자서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것과 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목란이 깊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대가 귀왕의 정인과 닮았기 때문이오.”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입을 꾹 닫았다. 목란이 말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귀왕을 위해 그대가 귀왕의 정인이 되어 주시오.”
주자서가 말했다.
“어찌 사람을 속이라는 말이오. 사람의 마음을 농락할 수는 없소.”
목란이 낮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주공자의 경공은 어떠하오?”
주자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목란을 보았다. 목란이 주자서를 빤히 쳐다보자 주자서가 ‘큼큼’하고 목소리를 정리하고 말했다.
“아직 공력이 모두 돌아오지 않아 경공으로 운신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듯 하오.”
목란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소? 아주 좋소. 내일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으니 그리 알아 두시오.”
주자서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목란의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으로 다가가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목란은 고상을 데리러 한담에 갔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고상은 한참 귀왕의 욕을 했다. 목란이 고상을 달래며 말했다.
“꼭 귀왕이 만나러 올 필요는 없어. 아상.”
고상이 목란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그런 방법이 있었네.”
목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고상이 목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언니! 뭘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지금 당장.”
목란이 고상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지금?”
주자서는 한담 입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곳은 주자서가 화살을 맞고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주자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목란과 고상을 보았다.
“여기로 내려가라는 말이오?”
고상과 목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목란이 손을 펼쳐 아래를 가리키고 말했다.
“귀왕을 만나러 가시지요.”
귀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 것은 주자서인지라 주자서가 작게 인상을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덩’ 사람이 빠지는 소리에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낮에는 운이 좋아 배에 착지한 것인지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의 파동이 일어난 곳을 보았다. 사람의 인영이 수면 위로 불쑥 나오더니 배를 향해 물을 가로 질러오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어 황혼이 비추는 한담은 서정적이다. 온객행은 다시 장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배가 출렁하고 곧 사람이 배위에 올라탔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상.”
주자서가 말했다.
“그대가 귀왕이오?”
온객행이 장포를 걷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물에 젖은 주자서의 모습은 조금 처량해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장포를 덮어주며 말했다.
“아서,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귀왕의 호칭에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정인이 아니오.”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의 눈썹이 축 처져 울상이 되었다.
“아서…”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마주하고 말했다.
“그대 들어보지 못하였소?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은 아침 이슬과 같아 홀연히 사라져 가고 마는 것,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떠 하오?” (5)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붙여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그를 떼어내려다 들썩이는 온객행의 등을 보고, 흐느끼는 귀왕의 목소리를 듣고 멈추었다. 주자서는 손을 들어 울고 있는 귀왕의 등을 쓸며 말했다.
“그대는 어찌 귀왕이 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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