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1

走爲上 | 1. 도망치는 것이 상책

온객행은 공공(共工) 상류(相柳)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목놓아 울었다.
“영지초(靈地草)를 영지초를 먹이면…”
공공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고작 몇 날을 더 살리고자 곤륜산(崑崙山)의 노금(露禽)을 번잡스럽게 하겠다는 것이냐?”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고 목놓아 울었다.
“아서… 아서! 흑흑”
상류가 말했다.
“그대는 사사로이 영력(靈力)을 사용하여 인간의 생애(生涯)를 어지럽혔으니, 그대를 다섯 갑자(甲子; 60년) 동안 태평호(太平湖)에 봉(封)한다.”
온객행은 반항하지 않고 그저 사졸들이 그를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눈에서는 한 갑자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태평호 위에 부유(浮游)하는 누각 위에 그는 물 밖을 벗어 날 수 없는 징벌에 묶여 있다.

고상(顾湘)은 공공께서 온객행을 감시하기 위해 붙여 둔 화사(花蛇)이다. 이제 막 다섯 갑자를 살아낸 이 어린 요괴는 궁금한 것이 많아 태평호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다른 요괴들을 귀찮게 했다. 무지기(無支祁)는 원래 태평호에 살고 있던 아주 오래된 물의 요괴로 얼마나 살았는지 아는 요괴가 없다. 그는 좀 알 수 없는 취향을 가진 요괴였다. 여인을 아주 좋아하였는데, 그래서 스스로를 여인처럼 꾸미고 다녔다. 그렇다고 여색(女色)을 밝혀 겁탈하거나 취하는 것이 아니고 돌보아주고 아껴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남아준 여인은 없었다.

예전에는 태평호 근처에도 사람이 많았었다고 하지만 모두 옛날이야기다. 사람의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구강(九江)의 물길이 붉어졌다 맑아진 이후로 태평호는 물론이고 남쪽에 있는 황산까지 사람의 씨가 말랐다. 깊은 골짜기 사이에 있는 태평호는 옛날부터 산세가 험해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아 물고기가 많고 짐승이 많이 살았다. 환란을 피해 산속으로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호수 근처에 작은 마을을 몇 개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하나둘 조금씩 보였는데, 벌써 세 번의 가을이 지나는 동안 고상은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누각에 파사공자께서는 요즘 어때?”
무지기가 고상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고상은 옆에 있는 풀꽃을 뜯어 꽃잎을 하나둘 떼고는 말했다.
“똑같지 뭐. 그래도 이제 울지 않으니까 괜찮아.”
무지기가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모르겠네.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걸지도.”
고상이 고개를 돌려 무지기를 보며 물었다.
“주요(朱幺) 그게 무슨 소리야? 우는 게 낫다니?”
주요가 돌아간 고상의 머리를 바로 하고 말했다.
“앞에 봐.”
그리고 또 한참 고상의 머리를 매만지다 말했다.
“차라리 눈물이 나면, 알 수 있잖아.”
고상은 인상을 쓰며 다시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았다. 무지기는 가끔 파사와 꼭 같은 표정을 한다. ‘흥!’하고 고상이 코웃음을 친 다음 주요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 태평호 안으로 들어갔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상을 보며 말했다.
“곧 단오절인데 우리도 술이라는 것을 마셔 볼까?”
고상이 주요를 보며 말했다.
“단오절에 술을 마시면 본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주요가 방금 예의 그 표정을 설핏 짓고는 금방 얼굴색을 바꾸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내 본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어.”
고상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승천이라도 할 셈이야?”
주요가 고상이 뽑아 놓은 꽃을 주우며 말했다.
“하늘에 가면 그는 나를 알아볼까?”
고상은 이 노인네의 헛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태평호에 묶여 있는 이 요괴들은 하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지 못할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미련한 것들이다.

고상은 누각 위로 뛰어올라 몸에 있는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파사(巴蛇)!”
온객행이 장지문을 열어 고상을 힐끗 보고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고상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로 누각 위로 올라오자 온객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몸을 다 말리고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고상은 온객행을 못마땅하게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온객행은 얼어 죽을.”
그녀는 온객행이 막 마시다 남은 차를 들고 마시며 말했다.
“대체 태평호에 있는 요괴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미련한지…”
온객행이 고상의 앞자리에 앉으며 영견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고상은 온객행이 하는 대로 시중을 받다가 말했다.
“이제 곧 다섯 갑자가 다가오는데 어찌 하시겠소?”
온객행이 비워진 고상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말했다.
“주요가 사는 곳은 어떠하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노인네는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사는 곳 같소.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소. 그것도 사람의 길이 끊겨 이제 구할 길도 없게 되었소.”
온객행이 고상을 보며 물었다.
“길이 끊기다니 무슨 소리야?”
고상이 탁상에 턱을 괴고 고심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났는가 보오. 왜 몇 해 전에 구강의 물길이 붉지 않았소? 그것은 사람의 피였소.”
온객행은 태평호에 갇혀 있었으니 구강의 물이 붉어진 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고상은 구강은 물론이고 황산 근처에 있던 커다란 성곽에도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일 뿐, 예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은 고상을 탐탁지 않게 만들었다.


후발 부대와의 통신이 끊겼다. 산속에 잠복하고 있던 정예부대의 기척이 사라졌다. 민심이 들끓어 전쟁만은 안된다고 울부짖던 그의 부친과 백부는 형장에서 그 생을 마감하였고, 고향에 남은 모친과 이미 전장(戰場)에서 스러진 종형제의 어린 당질을 위해 주자서는 전장으로 향했다. 벌써 몇 해 동안 지지부진(遲遲不進)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병법을 모르는 사졸이 보아도 이 전쟁은 탐욕에 의해 사사롭게 발발(勃發)했다.

구강을 중심으로 천 리 밖까지 사람이 없다. 흉년으로 배급으로 나오는 마른 쌀은 하루에 한 번이면 다행이고, 기병(騎兵)이 타던 말의 반 이상을 벌써 잡아먹었다. 지원을 나왔다는 보병은 이제 갓 지학을 넘은 소년들이고, 장군이라는 자는 우유부단하고 지세(地勢)를 읽지 못해 번번이 패한다. 여기서 멈추고 도성(都城)으로 돌아가면 장군의 목이 달아날 테니, 으레 겁을 먹고 서로의 나라를 좀먹고 있는 이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자서는 기병 정예부대 일원 중의 하나였으나, 그가 말을 잃은 지는 몇 해가 지났다.

그는 있는 자리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영(陣營)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가 숲속에서 이리를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수컷 이리는 주자서를 보자마자 주둥이를 찌그러뜨려 위협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은 조금 무딘 장검과 예리한 단검이 전부라서 주자서는 어쩔 수 없이 숲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숲을 나오자마자 적군의 진영에서 그를 발견하여 그가 있는 쪽으로 화살을 쏘아 댔다. 주자서는 화살과 이리를 동시에 피하려다 발을 잘못 디뎌 절벽에서 떨어져 호수로 강으로 떨어졌다. 마구 쏘아 대는 화살에 어깨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그가 떨어진 곳은 호수였는지 ‘풍덩’하는 큰 소리와 함께 주자서의 의식도 점멸하다 희미해졌다.

주자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뭍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주자서는 가슴과 어깨 사이에 맞은 화살의 끝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맞은 허벅지를 보았다. 화살을 맞은 줄 알았으나 그저 스쳤을 뿐인지 열상에 출혈이 심했다. 그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다리를 물 밖으로 빼냈다. 원하지 않는 ‘끙’하는 소리와 함께 주자서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주자서는 눈꺼풀을 계속해서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금방 허사가 되었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온객행은 주요가 가져온 술을 부유각에서 함께 마셨다. 과거 그와 지내던 어느 재주 많은 여인네가 그에게 술 담그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태평호의 맑은 물과 구기자(枸杞子)로 담근 홍주로 불리는 이름도 없었다. 그저 그 여인이 이 술을 태평홍주라 불렀으니 그들도 그렇게 불렀다. 주요가 술잔을 비우더니 ‘킁킁’하고 냄새를 맡았다. 온객행은 빈 주요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무엇을 달래시려고 단양절(端陽節) 밝은 햇살에 술잔을 비우십니까?”
주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고상은 어디 갔지요?”
온객행이 주요의 불편한 기색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어디에서 혼을 부르고 있겠지요.”
그리고 자기 잔에 홍주를 따라 마셨다. 주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피 냄새가 납니다. 사람의 피 냄새예요.”
온객행은 주요의 말에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주요는 곧 태평호로 몸을 던져 피 냄새가 나는 근원을 찾았다. 청강하(靑崗河)의 물길은 황산에서 시작되어 태평호로 흘러 들어온다. 황산은 산세가 험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람의 인기척은 매우 드문 일이다. 주요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뭍에 걸려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가죽을 덧댄 찰갑을 입었다. 허벅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근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인간에게 다가간 주요는 상처를 살폈다.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심해졌는지 안색이 파리하다. 어깨에 맞은 화살은 뽑지 않아 출혈이 심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두면 이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태평호는 앞으로도 별일 없이 아주 평화로울 것이다. 주요는 쓰러진 사람을 앞에 두고 멀뚱히 그 사람을 보기만 했다. 햇살 아래 창백한 사내는 여인처럼 퍽 가녀리다. 마치 며칠 아니 보름은 피죽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고상이 불쑥 물속에서 나타나 사내를 보며 말했다.
“사람이네?”
주요가 고상을 보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상이 눈을 굴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사내인가 보군.”
주요가 고상 곁으로 다가갔다. 고상은 물 밖으로 나와 옷에 물기를 털어내고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요는 고상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태평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운명은 거기까지 인 것이다. ‘여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인이었다면….’이라고 생각한 주요는 다시 태평호를 부유하는 누각으로 갔다. 온객행은 이미 가져온 술 한단지를 모두 마셨는지 새로운 단지의 붉은 천을 걷고 있었다. 그가 술병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사람입니까?”
주요는 영력으로 물기를 날려버린 후에 다시 자리에 앉아 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요를 힐끔 보고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웠다.

고상은 사람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주요가 마지막에 데리고 있던 여인은 어부와 눈이 맞아 주요가 아끼는 비단 천을 들고 도망갔다. 주요는 며칠 자신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더니 며칠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나와 온객행과 술을 마셨다. 그 전보다 조금 더 자주 온객행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서 술을 마셨다. 고상은 파사와 무지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대체 이 미물(微物)의 어느 부분이 좋아 사랑이라는 것을 한다는 말인가? 고작 한 갑자의 인생도 겨우 살아내는 못난 미물을.

고상은 쪼그리고 앉아 사내의 코에 손을 가져갔다. 미미하게나마 아주 작게 몰아쉬는 숨이 느껴졌다. 고상은 그렇게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미물의 숨이 흩어지는 것을 구경했다. 얼마나 그렇게 구경했을까 갑자기 사내의 몸이 덜컥거리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고상은 내버려 두려고 하다가 조금 겁이 났다. 혹시라도 서왕모께서 미물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벌을 하실 지도 모를 일이다. 고상은 ‘쯧’하고 혀를 찬 다음 손가락을 물어 뜯어 그 피를 사내에게 먹였다. 요괴를 죽여 취하는 피는 보통 사람에게 독이지만 요괴가 원하여 베푸는 피는 영약(靈藥)이다.
“나의 다섯 갑자 영력이 모인 피이니 너는 내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고상은 입안 가득 피를 짜낸 뒤에 사내의 목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사내는 목이 말랐는지 금방 화사의 피를 삼켰다.

고상은 사내의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을 조심스럽게 뽑아내고, 그의 갑옷을 벗겼다. 얼마 동안 밥을 먹지 못했는지 사내의 몰골은 조금 불쌍할 정도였는데 고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옷을 찢어 상처가 난 곳을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내의 상처를 모두 동여맸을 때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고상은 ‘흠’하고 고민한 후에 사내를 태평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자는 사내이니 주요가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태평호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한 곳은 주요가 지내는 백택(栢宅)이 아니면 부유각(浮游閣)뿐이다. 주요는 사내를 싫어하니 그래도 온객행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주요는 고상이 사내를 데리고 부유각으로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온객행이 그를 배웅하려 했지만 주요는 온객행의 인사도 받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고상이 낑낑대며 사내를 부유각에 올려 놓았다.
“파사! 내 선물이야.”
온객행은 고상의 호칭에 작게 웃고는 말했다.
“단양절 선물이라면 어쩌지… 난 사람을 먹지 않아.”
고상이 물을 털며 말했다.
“사람을 먹으면 영력이 강해진다 하던데 정말이야?”
온객행이 쓰러진 사내를 심드렁하게 보며 말했다.
“…아마?”
고상이 물었다.
“몇십 갑자 살면서 사람도 안 먹어 봤어?”
온객행이 고상의 옷에 묻은 물을 영력으로 날리며 말했다.
“아상, 사람을 먹은 요괴는 영원히 죽지 못해.”
고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만해! 이제 그만해!”
온객행은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고상은 낑낑대고 사내를 온객행의 처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이렇게 삐쩍 말랐는데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뱃속에 금이라도 들었나?”
그러더니 사내를 내려놓고 사내의 배를 꾹꾹 눌러보았다. 사내는 움찔하더니 ‘윽’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자신의 배를 만지는 소녀를 발견한 사내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몸을 틀었다가 그대로 다시 풀썩 쓰러졌다. 고상은 바닥에 거의 헐벗은 채로 쓰러진 사내를 물끄러미 보다가 처소의 문간에서 고상을 바라보는 온객행을 보았다.
“실내에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왜 이리로 데려온 거야? 백택으로 데려가야지.”
고상이 몸을 작게 떨며 말했다.
“안돼. 그럼 무지기가 잡아먹을지도 몰라.”
온객행이 ‘하’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주요는 사내라서 안 먹을 걸?”
고상이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쯧쯧. 이렇게도 모른다니까. 여인이면 아까워서 못 먹지만 사내라면 아마 고민할 걸?”
온객행은 고상의 말에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고상이 처소를 나가며 말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먹일 것을 가지러 백택에 다녀올 테니 그동안 내 아이를 잘 돌봐주시오.”
온객행은 고상이 사내를 부르는 호칭에 고개를 꺾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사내를 들어 평상에 눕혔다. 제법 묵직한 것이 영력을 가진 모양이다. 다 헝클어진 머리에 천을 얼기설기 둘러 놓은 몸, 바지만 겨우 입은 모양새가 이상하여 온객행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제일 낡은 내의 장포를 꺼내 사내에게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실내라고 해도 거의 사방이 다 뚫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부유각에 이렇게 엉망으로 다친 사람이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고, 고상이 ‘내 아이’라고 말하며 감싸고 도는 것이 못마땅해 온객행은 처소에서 나와 누각을 올랐다.

방금 전까지 주요와 마시던 술이 그대로 탁상 위에 남아있다. ‘단양절이 지났으니 점점 무더워지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이맘때 복숭아가 참 맛있지.’ 또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홍주는 언제 담근 홍주일까? 구기자가 열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객행은 술잔에 담긴 붉은 홍주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그리던 이의 얼굴도 이름도 희미하다. 온객행은 겁이 많아 그를 따라가지도 못했다.
“사람과 요괴가 가는 저승은 다르다고 하던데. 그대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사람의 저승은 견딜만하오…?”
온객행은 술잔을 들어 비웠다.
“술로써 그대를 잊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술을 전부 마셔 없앨 텐데.”
온객행은 작게 웃었다.


주자서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는 한참 주자서에게 무언가 설명해 주었지만, 주자서는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자서는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다시 꺼지려는 정신을 힘겹게 다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주자서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한참 기침을 했다. 불쑥 내밀어진 찻잔을 받아 마시고 조금 더 기침을 한 후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ㄴ…누…누구시오?”
주자서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근처에 있던 탁상에 가서 앉은 남자는 새파랗게 시린 옷을 입고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주자서를 보았다. 순간 살기를 읽은 주자서가 뭔가 더 말하려고 했으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고상이 방안에 들어오자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기침을 하고 있었다. 고상이 사내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아이야! 일어났느냐?”
사내는 고개를 들어 고상을 보았다. 사내의 입가에 피가 맺힌 것을 본 고상이 말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은 모두 베풀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주자서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고상을 보았다. 고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아이. 너는 내 아이다. 앞으로 내가 아껴주마.”
그리고는 사내를 덥석 끌어안았다. 사내는 어안이 벙벙하여 탁자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는 온객행을 보고 기시감이 들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지?’ 소녀는 주자서를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살렸으니 앞으로 너는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거라.”
주자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소녀가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왜? 이제 와서 봇짐이라도 내놓으라고 할 참이냐? 이래서 미물이란….”
뒤에 있던 남자가 소녀에게 말했다.
“그러게 왜 구하였느냐?”
소녀가 뒤돌아 남자를 보며 말했다.
“서왕모께서 왜 베풀지 않았냐고 묻지 않으실까?”
남자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의 생애를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자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어쩌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만약 죽었다면 지금 주자서가 느끼는 이 고통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온 세상이 새카맣게 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자서는 상태가 조금 나았다. 일단 뜨겁게 달아오르던 상처가 조금 가라앉았고 꼼짝할 수 없었던 몸이 조금이나마 움직였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주자서는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물을 가져다 놓았다. 주자서는 무심결에 다친 팔을 뻗다가 ‘윽’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장지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주자서를 보더니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아직 기혈이 미비하니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좋겠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남자는 주자서의 팔을 잡아 벌떡 일으켜 평상에 앉혔다. 남자는 협탁에 있는 물잔을 들어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다치지 않은 팔로 물잔을 잡고 마셨다. 남자는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물 주전자를 들어 몇 번 더 물잔을 채워 주었다.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나는… 주자서라 합니다.”
남자는 ‘흠’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이 없다.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 주자서가 다시 말했다.
“살려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주인은 어디 계십니까?”
남자는 주자서의 호칭에 ‘하’하고 작게 웃은 뒤에 답했다.
“그대의 주인이라면 아상 말이오?”
주자서가 작게 말했다.
“아…아상?”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평상 위에 눕히며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고상이오. 내 상전이지.”
주자서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부러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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