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着得去
세속에서 얻은 모든 것을 그대로 지고 가시게.
주구전은 지객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소림사에서 초대한 사람은 주구전 혼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는 일부러 숭산 논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강호에 이야기를 흘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논의에 참가하고자 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자들일 지도 몰랐다. 그러니 보름내로 무림맹에 관여한 문파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던 엽백의가 엉덩이를 붙이고 처소에 앉아 주자서의 차시중을 받으며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래서 공의는 언제 가냐?”라고 물으며 주구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온객행은 또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를 시중든다고 아주 시끄러웠다. 생각에 집중을 할 수 없어진 주구전이 크게 한숨을 쉬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낙양성은 구경하고 가자.” 그리고는 짐을 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내내 짐을 정리하고 떠나는 준비로 바빴다. 숭산에서 북쪽으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공의다. 공의까지 마차로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날이 풀려 들짐승도 있을 테니 날이 밝을 때 출발하려고 길을 서둘렀다. 짐을 챙기느라 바쁜 주자서 옆에서 온객행이 그를 도왔고, 주지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기위해 처소를 나왔다. 엽백의도 주구전의 뒤를 따랐다.
주구전은 심통이 나서 말했다. “엽선배께서는 무림맹에 대해 조사하러 가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그러자 엽백의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데 무얼 더 찾는다는 말인가?” 주구전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 찾으셨단 말입니까?” 엽백의가 말했다. “개미구멍 하나로 둑이 터지고 높은 산도 원숭이 토굴로 허물어지니,(33) 어차피 무림맹의 윗머리라고 하는 것들은 귀족일 가능성이 크니, 그쪽을 먼저 들쑤셔 놓으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구전은 앞으로도 계속 엽백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엽백의는 그런 복잡 미묘한 주구전의 얼굴을 보고 ‘하하하’ 웃을 뿐이었다.
주구전과 엽백의가 방장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자서는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가지고 온 것도 별로 없고, 지낸 날도 많지 않아 딱히 챙길 것은 없었다. 그동안 입었던 옷들을 잘 정리해서 시간이 나면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낙양성으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하여 평소와 다르게 흰소리를 늘어놓지 않는 온객행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자서의 기억속의 공의라… 공의라면 주가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이다. 어릴 때 그곳에서 헤엄치는 것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흐릿하여 그런 곳에 갔었던가 싶은 기분만 들었다.
주구전은 인사를 하러 나가기 전 주자서에게 이제 심의를 입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호복을 입는 것이 움직이기 훨씬 편했으니 주자서도 부러 뜻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머리도 내려 묵지 않고 하나로 올려 묶었다. 상투를 틀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주자서가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빤히 보고 있는 온객행의 시선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두었다. 그런데 또 무엇이 서운한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웃어버렸다. 그의 행동이 참 어린아이 같다.
과거를 들추는 것은 정말 무섭고 송구스러운 일이었으나 들뜨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주구전이 주자서의 사정에 대해 말해 놓았으니 주자서는 그냥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조부께서 읽고 계시던 불경에서 보았다. 마음속에 있는 번뇌, 갈등, 집착, 원망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으라.(34) 이미 지나간 일이니 끄집어내어 헤집어 놓을 필요 없었다. 그냥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지금은 주구전의 재종손 주자서이면 될 일이다. 사계산장과의 인연을 조금 흐리게 하면 될 일이다.
주구전은 혹시 사계산장에서 연통이 올지도 모르니 가는 곳에서 다시 서신을 보낸다는 말로 앞으로의 일을 보고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주지 여운과 도감 혜립이 그들을 배웅하러 나왔다. 오랜만에 본 도감의 얼굴이 핼쑥하다. 아직도 숭산을 떠나지 않은 객이 많았으니 바쁜 것이다. 짐을 챙긴 주자서는 심아스님을 찾아 타고 왔던 마차를 찾고 맡겨 놓았던 말을 마차에 매어 두었다. 오시가 막 지나가고 있던 참이라 아직 끼니때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신세를 진 주방장이 대나무로 엮은 찬합에 요기거리를 들고 나와 직접 그들을 배웅했다.
주구전은 보시(報施)라는 목적으로 가지고 있던 노자돈 중에 반을 덜어 주지에게 내놓았다. 기껏 거둔 고아들을 굶기지 말라는 뜻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고될지도 모르나 또 그건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지 생각했다. 서로의 상황을 아는지라 여운도 그냥 고맙게 받았다. 주지 여운이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대지처럼 다투지 않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아라한에게 생사가 없기를…”(35) 주구전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그저 다투지 않으면 허물도 없으리…”(36) 말을 주고받은 두사람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다 떨어졌다.
엽백의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명예를 목적으로 하지 마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마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마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마라. 하지 말라면 그렇게 더 하고싶어 진다는 말이다. 스스로 얻은 바가 없거늘 얻었다 생각한 이가 이리 많을지 누가 알았겠느냐”(37) 주지와 함께 나온 스님들이 합장하여 인사했다. “아미타불.” 주구전은 먼저 마차에 오른 엽백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주자서도 스님들께 공수하여 인사한 뒤 말고삐를 잡았다. 온객행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가 말을 몰아 숭산의 초입을 지나갈 즈음 어떤 사람이 경공으로 마차의 지붕에 올라섰다. 온객행이었다. “빌어먹을 노야! 나를 두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엽백의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네놈은 계율원에 처박혀서 불경이나 읽고 써야 그 성질머리를 고칠 텐데 말이다.” 온객행이 지붕에서 내려와 말을 모는 주자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으며 말했다. “나는 출가하기 싫소! 이 비단 같은 머리결을 보고도 나를 중 만들 생각을 하다니 노야 그새 눈이 먼 것이 아니오?”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주자서가 힐끔 보자 정말 햇빛을 받은 온객행의 머리가 반질반질했다. 온객행의 말에 마차 안에서 콧방귀 끼는 소리가 났다. 주구전인지 엽백의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주자서는 별로 상관없었다. 단지 너무 들러붙은 이 치의 표정이 좋아진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가는 길 중간에 소림사에서 준비해준 찬을 먹고 길을 재촉하여 미시가 되기 전에 공의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길을 지나니 금방 공의성과 저 멀리 낙수(洛水)가 보였다. 낙수가 흐르는 이곳은 정주성과 낙양 중간에 위치하여 환란의 시기에 매번 이곳의 거점을 놓고 다투었지만, 항상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황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번화했다. 연주와 예주의 농산품이 낙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러 문파가 시정잡배 마냥 여기저기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열린 성문 앞에는 사람을 딱히 확인하는 병졸도 없었다. 느긋하게 성안으로 들어온 마차는 성문 근처를 맴돌다 허름한 마구간을 빌려 마차와 말을 맡겼다.
주구전은 주자서와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엽백의와 온객행이 껄끄러웠다. 딱히 말못할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이들이 괜히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었기에 주구전은 사계산장에 서신을 보낸다며 주자서를 데리고 황산은장(黃山銀葬)으로 향했다. 황산은장은 남궁세가가 예주, 서주 일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표국(鏢局) 겸 전당(典當) 업소이다. 그 규모가 꽤 커져 남궁세가의 방계가족이 정주(鄭州)와 낙양에 머물며 따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질자의 처가 아마 이 방계 가족 출신이었던 것 같다.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고 누군가가 일을 이어받아 은장은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남궁세가인지 아니면 그새 주인이 바뀌었는지 주구전은 솔직히 별로 상관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물건을 맡기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켠에 앉아 작은 천조각에 서신을 쓰며 주구전이 말했다. “너희 조부의 이름은 주구단이다. 단양의 현승이었으며, 그의 아들 주개(周愷)는 단양의 현위였다. 너의 모친은 남궁세가 방계당주의 서녀이고 둘 다 전란에 휘말려 세상에 없구나. 비록 질자 내외에게 자식이 없었으나 이렇게 새로운 연을 만났으니 나는 여한이 없다. 혹 네가 이름을 찾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너는 우리 주가(周家) 종손이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전이 해준 이야기를 곱씹었다.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질자 내외는 단양에서 사계산장이 있는 곳까지 피난을 하다가 화를 당하여…” 주구전은 글을 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 주구단의 서신을 받고 걱정도 되었지만 기쁘기도 했다. 가족이 생기는 것 같아 들떴던 것도 사실이다.
주자서는 주구전의 멈춘 손을 잡고 그를 보았다. 주구전이 주자서를 보며 힘겹게 웃었다. “화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으나, 내가 단이에게 받은 서신에 단양 현령의 직인이 찍혀 있으니, 너는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주자서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네 이름을 찾겠느냐?” 주구전을 바라보던 얼굴에 눈물이 맺히더니 결국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주구전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지금 답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잡고 있던 붓을 놓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주자서는 자기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종조부, 저는 주(周)가입니다. 제 이름은 자서구요. 한번도 다른 이름으로 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구전이 깊이 한숨을 쉬고 주자서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이라 하였다.(38) 잘했다. 잘했어. 모두 내려 놓자 구나.” 주구전이 주자서를 당겨 안았다. 두사람은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주구전이 주자서를 놔주고 점원이 있는 곳에 가서 서신을 부쳤다. 간단히 소림사를 나왔다는 내용과 과거에 휘말려버렸다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흘렸다. 진회장은 똑똑한 놈이니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황산은장을 나와 다시 엽백의와 온객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두사람은 어디서 산 것인지 손에 군것질 거리를 들고 있었다.
온객행이 저 멀리 봇짐을 들고 걸어오는 주자서를 발견하고는 나풀거리는 흰색 소매를 크게 흔들며 불러 댔다. “아서! 아서!! 여기야! 아~서!” 주구전은 저 온객행이라는 놈은 세상 태평하게 사람 맥을 끊어 놓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저 놈이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구나.” 주자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온공자의 흰소리를 다 믿으십니까?” 주자서가 가볍게 대답하자 주구전이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상선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구나. 저놈은 끈질겨서 없는 마음도 만들어낼 놈이라고.”
주자서는 조금 놀랐는지 한참 말이 없다가 온객행과 가까워지자 결의에 차서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자서 앞으로 마음을 단련하는 일에도 힘쓰겠습니다.” 주구전이 그 말에 ‘허허허’하고 웃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을 지는 모르나 대충은 들었을 엽백의도 옆에서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두 늙은이가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까서 주자서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아서 먹어봐 벌꿀사탕이래.” 입안에 들어온 사탕을 뱉을 수는 없어서 냉큼 먹은 주자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소, 온공자.” 온객행이 서운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서! 왜 자꾸 온공자라고 부르는 거야? 더 친근하게 부를 수도 있잖아.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낸 날이 며칠인데…”
옆에서 온객행을 보고 있던 엽백의가 말했다. “그래! 검선이라고 좀 부르지 마라! 지들이 재주가 부족한 것을 겨우 나 따위에게 검선이라니!! 상선이라니!!” 온객행이 엽백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러게 그 정도 도 닦았으면 이쯤에서 어서 하늘로 승천 하시오.” 주구전은 그 말에 웃음이 나왔으나 엽백의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으로 웃음을 감추었다. 엽백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 훌쩍 경공으로 저 멀리 사라졌다.
주구전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온공자 어찌 스승에게 그런 모진 언사입니까?” 온객행이 주구전의 말에 주대인의 손 위에도 사탕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주대인 말씀을 낮추세요. 저 노인네는 망령이 들어 스스로의 흠을 알지 못하니 괘념치 마소서.” 그리고는 ‘히히’웃으며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섰다. 주구전은 그냥 ‘허허허’ 사람 좋게 웃고 말았다.
낙수가 보이는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진왕과 약속한 장소인 중명원이 보였다. 주구전은 별원이겠거니, 싶어서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규모를 보니, 그냥 별원이 아니라 별궁 같았다. 예전에 와보았을 때 보았던 것 같은데 그새 그 크기가 커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컸는데 주구전이 관심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중명원에 도착하자 하인 한 명이 그들을 외실로 안내했다. 지나오는 길에 보았던 하인만 수십이다.
일각이나 걸어 들어가니 낙수가 보이는 곳에 높게 지어진 누각 위에서 진왕이 그들을 맞이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두 손을 모아 공수하여 진왕에게 인사했다. “주가 진왕을 뵈옵니다.” 두 사람이 무릎 꿇고 절하려고 하자 진왕이 누각에서 내려와 말리며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가르침을 청한 것은 저인데 어찌 절을 받겠습니까.” 그리고는 누각 위로 올라 자리를 권했다. 주자서는 자리를 거절해야 하나 주구전의 눈치를 보았지만 주구전은 별말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주자서도 따라서 옆에 앉았다.
진왕이 주구전과 주자서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이 술은 죽엽청으로 그 청향이 매우 그윽하니 어서 맛보시지요.” 그리고 진왕이 잔을 들어 비웠다. 주구전은 주자서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술을 들어 진왕에게 보인 후 잔을 비웠다. 이 술은 분주로 매우 독한 술이다. 향이 좋고 맛이 부드러워 뭣 모르고 마시면 금방 취해버린다. 주자서도 주구전과 함께 잔을 들었지만 입술에만 댔다가 다시 내려놨다.
진왕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주공자는 술을 즐기지 않는가?”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대신 답했다. “제 종손이 요 며칠 여독이 풀리지 않아 제가 마시지 말라 하였습니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께서 이리 정정하신데 몸이 그리 허약해서야…” 주구전이 진왕의 장단에 맞추어 말했다. “귀한 독자인지라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요.” 그러자 진왕이 물었다. “그럼 주공자도 사계산장에서 무공을 수학하였습니까?” 주구전은 아까부터 진왕이 주자서를 쳐다보는 눈이 기분 나빴다. 사냥하는 사람이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주구전이 대답했다. “이 아이는 글만 읽을 줄 알지요. 폐관수련하는 동안 제 수발을 든다고 게을리했지만, 양주 회계에 계신 문칙선생께 수학을 했었습니다.” 오범은 양주에서 알아주는 역술가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 여기저기 천거되었지만 나라가 망한 후 그 거처를 동정호 근처로 옮겨 주역을 연구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다. 악양에 도착했을 때 갔던 여관은 주귀라는 형주 특유의 술로 유명한데, 주구전은 아주 옛날에 오범을 방문했을 때 그가 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몇 단지 선물한 적이 있다. 그 날도 그의 이름으로 술을 사고 서신을 남겨 놓았다. 술을 좋아하는 그이니 곧 발견하여 혹여 진왕이 확인하고자 한다면 술값으로 말을 맞춰줄 것이다.
문칙 오범선생은 주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폐관수련 하시면서 주역에 빠진 주구전의 취향덕에 주자서도 여기저기 서책을 얻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구전과 연배가 비슷한 문칙선생은 서로 자주 왕래하였는데, 사계산장에 일년에 한 번 대보름 즈음에 와서 꼭 양주에서 유명한 황주를 수레 가득 실어가고는 했다. 주자서는 진왕과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상에 차려진 음식을 구경했다. 색색에 화려하고 정갈하게 빚은 떡부터 기름에 튀겨낸 전병도 있었다. 평소에 별로 음식에 관심이 없던 주자서였지만, 처음보는 음식은 신기하고 향긋했다. 하지만 주구전이 젓가락을 들지 않으니 전부 그림의 떡이다.
주구전과 진왕은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왕은 정말 농사일에 관심이 있었는지, 어떤 농기구를 쓰며 어느 시기에 어떤 날씨가 좋은 것인지 등을 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날씨 이야기로 주제가 튀었고, 하늘의 별 이야기가 시작되니 또 주구전이 신이 나서 주역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진왕은 마치 주구전이 하는 이야기가 정말 재미 있다는 듯이 맞장구를 맞추어 주었는데, 그럼에도 주구전 옆에 앉아 술 한잔을 가지고 한 시진째 목만 축이고 있는 주자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시가 다가오자 사위에 황혼이 내려 앉으며 바람이 쌀쌀해졌다. 이제 막 청명을 지났으니 대낮의 햇빛은 따뜻했으나 밤바람은 아직 많이 쌀쌀했다. 얼마 뒤 시기 적절하게 주자서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기침을 하고 저가 더 놀랐는지 그대로 멈춰버린 주자서를 보고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진왕전하, 아무래도 어서 머무를 처소를 찾아 자서를 좀 쉬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례의 날씨는 양주와 달라 큰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입니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등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주자서는 손을 공수하여 무례를 범했다고 사과했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머무르실 곳을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럼 여기 중명원에 머무십시오.”
주구전은 벌떡 일어나 손사래 치며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어찌 미천한 저희가 별궁에 머무른다는 말입니까? 그런 법도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주자서도 조부를 따라 일어나 옆에 섰다. 진왕도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술시가 다 되어가는데,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공의는 해시부터 통금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인을 불러 손님이 머물 처소를 청소하라 일렀다. 주구전은 자리를 피하기위해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밖에서 엽선배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가보아야 합니다.” 진왕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찌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진왕에게 끌려가고 있는데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진왕이 주구전에게 실례라며 잠시 소란을 확인하러 갔다. 문 앞에는 엽백의와 온객행이 서 있었다. 주구전은 엽백의를 다시 보는 일로 안심을 할 줄은 본인도 몰랐다. 엽백의가 말했다. “주가놈아! 어찌 혼자 여기 와 있느냐!” 주구전과 주자서가 얼른 문 밖으로 나갔다. 주구전이 말했다. “엽선배, 아무리 찾아도 없어 이 주모 진왕전하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어 이리 왔지요. 어서 가서 머물 곳을 찾을 테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 말에 진왕이 끼어들었다. “아직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신 거라면 상선께서도 제자와 함께 이곳에 머무시지요.” 주구전은 황당하여 진왕을 보았다. 물론 중명원은 별궁처럼 넓었지만, 주구전은 또 같은 방을 쓰며 엽백의의 시중을 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진왕이 덧붙였다. “상선께서는 청주를 좋아하십니까? 낙양의 죽엽청은 맛보셨는지요.” 엽백의의 얼굴이 환해지며 진왕에게 말했다. “죽엽청이라 했소? 그 귀한 술이 있단 말이오?” 진왕이 문 밖으로 나가 엽백의의 팔을 끌어당겨 집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저야 이제 주객정도의 실력밖에 안되니 주례(酒醴)에 밝으신 상선께 배움을 청합니다.” 엽백의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술의 진미를 알았구려, 나야 더불어 유유자적하고자 할 뿐이니, 어서 가서 집안에 모든 술을 꺼내 오시오. 오늘 열반주에 오릅시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진왕과 누각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에 진왕의 명령으로 객의 처소를 살피러 갔던 하인이 와서 주구전과 주자서 그리고 온객행을 데리고 내실 근처에 있는 전각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현판이 없는 전각에는 처소 몇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인은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께서 마음가시는 데로 머무소서.” 그리고는 누각이 있는 쪽으로 갔다. 처소에 들어가니 시녀 몇 명이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구전과 주자서가 들어오자 시녀들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세할 물을 대령할까요?” 그러자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주머니에 염낭을 꺼내 동전 몇 개를 꺼내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했다. “내 시중은 이 아이가 할 테니, 우물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시오.” 시녀들은 주구전에게 다소곳이 인사하고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물동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들고 시녀들을 따라 나갔다. 온객행과 주구전만 덩그러니 처소에 남아 있었다.
“주대인, 아서는 정말 종손이오?”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저와 닮지 않았습니까?” 온객행이 주구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요! 주대인 말씀 편히 하시라구요!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 줄 알고 이러십니까.” 온객행의 말에 헛웃음이 난 주구전이 말했다. “손바닥도 맞대야 소리가 납니다. 제 귀에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만…”
온객행이 주구전을 쏘아보며 말했다. “노야가 또 무슨 소리를 한거요? 걱정 마시오 아서가 원하면 내가 사람을 찾아 대를 이어 주리다!” 주구전은 그건 또 무슨 불경한 소리인가 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주대인, 저는 마음만 제 것이면 몸은 얼마든지 남과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객행이 히히 웃었다. 주구전은 도를 닦는 놈 치고는 발랑 까졌다고 생각했다. 엽백의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스승과 제자였다.
(33) 임종시 공융
가늘게 흐르는 물이 흘러 강으로 가고하늘을 보는 창 어두운 방과 통해 있으며,
모함하는 말들이 바르고 곧은 이를 해치고 흘러가는 구름이 밝고 따뜻한 빛을 가리네.
듣기만 좋은 화려한 말 충성스런 마음 없고 수많은 꽃들이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마음속에 딴마음을 품는다면 어떻게 하나처럼 합쳐질 수 있겠는가?
(34) 방하착(放下着)은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 놓아라 라는 뜻이고,착득거(着得去)는 마음에 있는 모두를 그대로 지니고 떠나라' 라는 불가의 가르침.
(35) 법구경 나한품 95
땅처럼 서로 다투지 않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진흙이 없는 연못과 같은 아라한에게는 생사가 없다.
(36) 도덕경 8장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저 다투지 않으니, 허물도 없다.
(37) 장자 내편 7응제왕
명예의 표적이 되지 말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말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 무궁한 도를 잘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하게 하고, 스스로 얻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지 말라.
(38) 진공묘유 眞空妙有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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