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道有升降
길에는 오르고 내림이 있다.
목욕을 마치고 간단히 요기한 주구전과 주자서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객실에 앉아 있었다. 청명이 지난 공의는 날이 좋아 햇빛이 객실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따뜻한 기운이 돌자 나른 해진 주자서는 다시 침상에 가서 눕는 대신 주구전 옆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자꾸 고개가 꺾이는 주자서의 어깨를 주구전이 이리저리 만져보며 말했다. “자서야 그새 좀 자란 것 같구나.” 중명원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때보다 잘 자고 잘 먹어서 그런지 키가 조금 큰 것 같았다.
이제 자라는 나이는 다 지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주자서의 등을 쓸었다. 내원에 온객행이 들어온 것을 본 주구전이 ‘흠’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사내놈들이 서로 정다운 꼴을 보는 것 보다는 주방에서 일하는 어멈의 손주얘기를 듣는 편이 더 흥미로웠다. 주구전이 방을 나가자 주자서는 어디 가시냐고 묻지도 않고 탁상에 엎어져서 눈을 붙였다.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나른한 기운이 가실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구전이 객실을 나가면서 주변에 있던 하인들을 데리고 주방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저 노인네는 돈 한푼 안들이고 사람마음을 사는 재주가 좋았다. 사계산장에서 수집한다는 정보는 보통 저런 식으로 모으는 모양이다.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아는 것은 보통 그 주인을 모시는 하인들이었으니 온객행이 돈으로 사서 모은 정보보다 더 수완이 좋을 것이다. 괜히 심통이 난 온객행은 열어놓은 객실문을 등지고 탁상에 앉아 엎드려 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자기 마음이 어떠 한지 아는지 모르는지 괜히 답답하여 부러 소리를 내며 탁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는 주자서가 미워서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잔에 차를 따라 마셨다. 인기척을 느낀 주자서가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온객행이 언제 왔는지 흰 소매를 마구 펄럭이며 시끄럽게 차를 마셨다. 주자서는 그 모습이 모래목욕을 하는 참새 같아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누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답답해진 것은 온객행이다. 온객행은 탁상위에 놓여있는 요패를 보았다. 비싼 것은 받을 수 없다 하여 일부러 흔해 보이는 것 중에 귀한 것을 찾았다. 엽백의는 쓰지도 않을 패물을 잔뜩 장명산에 쌓아 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그러니 그것들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던 온객행은 보통사람보다 눈이 높았다.
귀한 것을 보는 안목도 좋았다. 상인이 꺼내서 보여준 것 중에 유독 붉은 나무로 만든 패가 있기에 물었더니 주목이라 했다. 은은하게 붉은 빛이 나는 이 나무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붉어 진다고 했다. 보석보다 훨씬 쌌지만 은은한 붉은 빛이 마음에 들어 그 패를 사다가 청금석을 갈아 무늬를 채운 것으로 화려한 매듭을 지어 흰색의 술을 달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투박하여 그 값을 알기 어려운 이 물건은 대체 언제부터 이 탁상 위에 버려져 있었을까 괜히 서글퍼졌다. 고개를 기대고 잠든 주자서의 얼굴이 옥같이 고와서 괜히 주목 요패가 초라해 보였다. “한스럽고, 슬프다! 나를 버리고 헤어져 새 사람에게 가다니. 너무나 가난한 이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가다니…”(52) 온객행이 말했다. 그리고 탁자에 있던 요패를 품속에 넣었다.
일각쯤 눈을 붙이고 있었던 주자서가 눈을 뜨자 온객행이 일어났다. 주자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진왕전하께서 내일 정주로 가실 때 저희를 데리고 가신다 합니다. 온공자도 함께 가십니까?” 의연한 주자서의 행동에 온객행은 입을 앞으로 쭉 내밀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공자, 주공자도 부귀와 영화를 쫓는 부류의 사람이오?” 주자서는 뜻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혹 상선 어르신께 연락이 닿으면 진왕전하께서 정주에 있는 낙수 하구에서 배를 빌려 놓았다 하니 중천이 되기 전에 그리로 오시라고 전해 주시오.”
온객행은 몸을 돌려 주자서를 마주보고 말했다. “아서. 나는…, 나는 생각보다 속이 좁은 사람이었나 봐.” 침울해진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 혹시 무슨 일이 있었소?” 다정한 주자서의 목소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온객행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공자께서 미천한 저와 진왕을 두고 저울질하시는 중이시라면…” 온객행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주자서는 ‘하하하’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온객행은 더욱 울상이 되어 눈물이 찬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제가 어찌 장명산 상선의 제자이신 온공자와 천자의 아들이신 진왕전하를 두고 감히 저울질을 하겠습니까?” 주자서의 말에 어리둥절한 온객행이 말했다. “주공자는 진왕의 수청을 드는 것이 아니오?”
주자서는 도리어 당황하여 물었다. “제가요?” 온객행은 표현을 잘못한 것 같아 다시 물었다. “주공자는 진왕전하께 첩지를 받는 것이 아니오?” 주자서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자꾸 사람들이 별안간 자신을 시집안간 처녀처럼 취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찡그린 주자서가 조용히 그 말을 되새겼다. “첩지…” 진왕이 정말 첩지를 주면 주자서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자의 말을 거절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자께서 취하시고자 하면 제가 어찌…” 눈을 내리 깔며 말하는 주자서가 처연하여 온객행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품 안에 안아버렸다. 주자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아서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 거야. 아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주자서는 살면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이가 몇이나 될까 세어보았다.
양친과 사부님을 제외하면 꼽아지는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 이런 말을 온객행에게 들었다는 것이 아까워 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어내었다. 밀어내는 주자서의 손을 꼭 잡은 온객행이 말했다. “사주는 우리가 이미 주고받았으니 되었고, 상견례는 노야와 주대인이 만났으니 생략해도 돼.” 그리고는 품에 아까 넣은 요패를 꺼내어 주자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 것 알 수가 없어 얼떨결에 그 요패를 받고 말았다.
온객행이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서 이건 예단이야. 다른 납폐는 생략하고 일단 내 예단을 받아줘.”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오…온공자? 진정하시오.” 그리고는 일어나 주자서를 일으켰다. 주자서 손에 쥐어진 요패를 들어 요대에 매달아 주었다. 주자서는 허리깨에 달리는 요패를 보고만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온객행의 손속을 물리며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주자서가 입고 있는 하인들의 옷과 요패는 어울리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주자서가 요대에 매인 요패를 풀어 온객행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온공자 국법으로 사내는 사내와 혼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온객행은 또 울상이 되어 말했다. “우리는 강호에서 연을 맺었으니 국법은 필요 없어.” 온객행이 조르듯 말하자 주자서는 처음으로 요패를 자세히 보며 말했다. “온공자.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소.” 그리고 요패를 다시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은 요패가 들려있는 주자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주자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는 소름이 돋았다. 셀 수도 없이 불린 이름인데 온객행 입에서 나오면 낯설었다. 주자서가 아연하여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온객행은 눈썹을 한껏 내려 불쌍한 표정으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또 어리광을 피우는 사제가 떠올랐다.
이렇게 떼를 쓰는 아이는 따뜻한 기운이 눈을 녹이듯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42) 온객행의 광증은 펄펄 끓는 물을 부어도 녹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남색은 고칠 수 있는 병인가?’ 따위 생각을 하며 가만히 서 있는 주자서에게 온객행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주자서가 ‘얼굴이 가깝네’ 라고 생각한 다음 온객행과 주자서의 입술이 맞부딪혔다. 그리고 기별없이 객실에 들어왔던 진왕이 둘이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진왕은 하인을 시켜 만든 옷이 완성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옷을 들고 객실로 갔다. 가는 길에 주방 쪽이 시끄러워 가보았더니 무엇이 재미 있는지 주구전이 하인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저 노인네는 위 아래도 없는지 하인들이며 집을 지키는 병졸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제 중명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진왕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딱히 여색을 탐하지도 않는지 어린 하녀들도 그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진왕을 보면 고개를 조아리기 바쁜 하인들이 주구전에게 웃는 낯으로 이것 저것 챙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놈들의 상전은 진왕이 아닌 것 같았다. 진왕은 ‘쯧’혀를 차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 인지…’ 진왕이 하는 일을 세세하게 아는 하인은 없으니 별로 걱정되지 않았지만 저 여우 같은 노인네는 그런 하찮은 것들을 주워 정보를 만드는 사계산장에서 온 자다. 다시 객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정주로 갈 때 데려갈 하인들은 사가에서 데려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객실 주변에 하인이 없기에 혹시 사람이 없나 하여 기별도 없이 들어간 객실안에서 주자서는 검선의 제자라는 놈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외모가 동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잠시 가지고 놀아볼까 했던 장난감이 남에 손에 들려 있으니 괜히 탐이 났다. 입술을 뗀 온객행이 진왕을 발견하고 주자서 손에 들려 있던 요패를 주자서 앞섶에 밀어 넣었다. 주자서는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온객행이 진왕에게 포권하여 인사했다.
넋이 나간 주자서가 움직이지 않자 온객행이 직접 손을 모아 올려주고 등을 누르며 말했다. “주자서와 온객행 진왕전하를 뵙습니다.” 진왕이 ‘큼큼’ 목을 몇 번 가다듬고 탁상위에 옷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심술이 일어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 그런 관계인 줄은 진왕이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온객행이 배시시 웃었다. 진왕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주자서는 소매사이로 얼굴을 감추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진왕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벼슬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받을 수 없고, 첩지는 온공자 때문에 받을 수 없는 것입니까?” 온객행은 본인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이 좋아져서 자리에 앉아 진왕 차시중을 들었다.
주자서는 공수한 손도 내리지 못한 채로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씻겨 놓았더니 말간 얼굴이 괜히 더 예뻐 보여 진왕은 입안이 썼다. 진왕이 취하고자 들면 못 취할 것도 없었지만 당장 뒷배가 없어 아쉬운 진왕은 검선과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흥이 깨진 진왕은 주자서에게 내일 정주로 갈 때 입을 옷이라며 가져온 옷으로 화두를 돌렸다. 주자서는 황공하다며 진왕이 가져온 옷을 힐끔 보았다.
무명천으로 만든 연한 쪽빛 장포, 흰색 중의와 내의였다. 연한 쪽빛 장포는 안이 다 비칠 정도로 얇다. 주자서는 이 옷이 자기 옷인 줄 알았지만 부러 진왕에게 물었다. “진왕전하의 은혜에 황공하옵니다. 이것은 조부의 옷입니까?” 진왕이 주자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옷이오.” 그러자 주자서가 무릎을 꿇고 넙죽 엎드려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조부께서 헌 옷을 입으시는데 저 혼자 새 옷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진왕이 일어나며 말했다. “주대인께서는 이미 입어보고 계시오.” 그리고는 인사도 받지 않고 자리를 나가버렸다. 주자서는 진왕이 나가고서도 한참을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붙여 절을 하고 있었다.
온객행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하고 있는 주자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일배요!” 그리고 한번 더 절했다. “이배요!” 온객행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가 하는 모습을 본 주자서가 일어났다. 온객행도 절을 다하고 일어서서 주자서 앞에 서서 말했다. “맞절 했으니 이제 어서 손을 씻자.” 주자서는 사계산장에서 사형이 장가들 때 하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온객행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온객행은 마치 혼례를 치르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러다 진왕이 들어오기 전에 입을 맞춘 것이 생각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온객행!” 온객행은 주자서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기꺼워 “응” 하고 대답하며 주자서에게 몸을 가깝게 붙여왔다. 이미 한번 입맞춤을 당한 주자서는 온객행의 몸을 밀면서 말했다. “아직 기러기를 주지 않았으니 이 혼례는 무효요.” 그러자 온객행이 ‘하하하’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좋지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좋아.”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온객행이 환하게 웃으며 주자서를 안아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뿌리칠 줄 알았지만 주자서는 뿌리치지 않고 온객행을 마주 안아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진왕을 거절할 좋은 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 치가 자기를 좋다고 말하는 이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주자서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좋다니… 그에 비하면 진왕은 본인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쥐어 숨통을 조여올 것 같았다. 주자서가 가진 모든 것을 쥐고 흔들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 같았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진 주자서가 기대오자 온객행인 그것이 기꺼워 더욱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주자서의 목덜미에 대고 말했다. “근데 아서. 아서의 사주를 보면 아서는 지학(15세)이 아닌데 왜 주대인께서는 지학이라고 거짓말을 하신 거야?” 주자서는 뜨끔하여 온객행의 앞섶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조부께서 하시는 생각을 내가 전부 알 수 없네.” 온객행이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나는 이제 주가에 시집왔으니 말씀을 편히 하소서.”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을 나오며 말했다. “아직 기러기를 주지 않았다니까.” 그러자 온객행이 주자서가 어려워하는 울상으로 말했다. “부군.” 그 말에 허탈해진 주자서는 그냥 웃어버렸다.
땅거미가 내려 앉자 주구전은 주방 어멈과 함께 찬합을 들고 객실로 돌아왔다. 주자서는 탁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온객행은 그 옆에 조신하게 앉아 주자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의 시중을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겠구나 생각한 주구전은 찬합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어멈은 나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으며 진왕과 조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어멈은 두사람의 관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며 귀한 신분일수록 가족이 가족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주구전이 ‘허허허’하고 웃으며 고사이야기를 꺼내며 황실에서는 군왕과 신하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멈은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며 저녁 찬으로 나온 잉어의 살을 발라 주자서와 온객행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한식이 지나면 왕릉에서 제례를 마치고 황제가 공의의 중명원이나 정주의 평락원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제를 지낸다고 했다. 중명원으로 오시기 전에는 항상 기별을 하셨는데 올해 없는 것을 보면 정주로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주구전은 주자서를 힐끔 봤다. 주자서는 어멈의 말에 별 감흥이 없는지 온객행이 조잘조잘 떠들어 대며 밥그릇 위에 올려주는 반찬을 먹었다. 주구전의 시선을 느낀 주자서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주구전은 ‘저렇게 실없는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밥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주자서와 주구전은 진왕이 준비해준 옷을 입었다. 도톰한 무명천으로 만든 밝은 회색의 장삼에 검은색으로 옷깃을 덧대고 흰색 내의를 입었다. 푸른색 다회로 허리를 묶고 벼슬이 없어 관을 할 수 없으니 상투를 틀어 올려 영견으로 덮어 묶었다. 주구전이 옷 갈아입는 것을 도운 주자서는 그제야 진왕이 가져온 옷을 꺼내 보았는데 내의가 은조사로 짠 비단이었다.
사계산장에서 입던 낡은 내의를 입고 한참 고민하는 주자서를 보고 있던 주구전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주구전이 주자서가 보고 있는 내의를 보고 물었다. “이 내의는 비단으로 만든 옷입니다.” 주구전은 직조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주자서가 하는 말을 듣고 천을 만져 보았다. 얇게 짠 이 옷감은 무명천과 질감이 비슷했지만 확실히 조금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 주구전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하인 한 명이 무명천으로 만든 내의를 가지고 들어왔다. “제가 입던 것이지만 빨아 놓았으니 깨끗합니다.” 하고 말한 하인은 주구전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하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옷을 갈아 입었다. 하인의 몸이 주자서보다 컸는지 겉에 입은 연한 쪽빛 장포 바깥으로 흰색 내의가 나와 주자서의 손을 가렸다. 정리하겠다고 소매를 털면 팔꿈치까지 훤히 보였다. 시간이 촉박하여 머리를 어쩌지 못한 주자서는 주구전이 옆에 서있는 하인에게 빌린 노란 머리 끈으로 대충 정리하여 반만 묶었다.
객실을 나와 내원을 지나 문밖으로 나오자 진왕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왕은 귀족이 제례를 지낼 때 입는 검은색 옷에 붉은색 깃이 달린 옷을 입고 기다란 장관을 썼다. 제사를 지내는 곳에 가는 것을 알고있었으면서 주구전과 주자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입은 연한 쪽빛 장포를 보았다. 자신이 입은 연한 회색이야 가난한 백성이 염색을 덜한 옷을 입은 것 치면 되지만 저렇게 시커먼 제사복을 입은 귀족들 사이에서 주자서의 옷만 눈에 튈까 걱정이 되었다.
진왕은 마차로 한시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고 말하며 마차를 나누어 타고 정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여러 번 멈춰서 쉬었는데 쉬는 도중에 엽백의와 온객행이 주구전의 일행에 합류하였다. 엽백의는 진왕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주구전이 타는 마차안에 훌쩍 들어가서 앉아 눈을 감았다.
온객행은 엽백의가 그러던 말던 마차에서 내려 쉬고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와 그의 옷을 쓸며 말했다. “아서 입은 옷이 정말 날개 같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머리는 왜 묶지 않았어? 이리와.” 주자서가 순순히 온객행에게 머리를 내어주자 둘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주구전은 맥이 풀렸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주구전은 혀를 ‘쯧’차고 엽백의가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52) 송옥 구변 九變
愴怳懭悢兮 去故而就新 坎廩兮貧士失職 而志不平 廓落兮羇旅而無友生
한스럽고 슬프다 옛 사람과 헤어져 새사람에게 가다니, 너무나 가난한 선비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니 불평한 마음이 생겨나 멍하니 우뚝 서 있네, 벗도 없는 나그네 신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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