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12

12. 好物不在多
좋은 물건이 반드시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

주자서가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어두웠다. 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면 아주 이른 시간일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직도 중명원에 있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자서는 신발을 신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상에서 졸고 있는 주구전을 발견하여 주자서는 자신이 덮고 있던 비단 이불을 덮어 드렸다. 어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옛날 낙양성에서 양친을 뵌 것 같은데 또 그런 것 같지 않고 머리속이 복잡했다. 조왕을 보았을 때 느껴졌던 그 불편함과 답답함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선황제께서 승하하시고 난 이후로 진왕과 조왕은 자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아주 어릴 때 만났던 것 말고는 기억이 없다. 그 일도 이제 너무 오래전 일이라 희미하기만 했다. 뭔가 무거웠던 짐을 내려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든 주자서는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벗어 놓았던 옷을 찾아 입었다.

장지문이 살짝 열리더니 온객행이 살금살금 주변을 살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밤새 밝혀 놓은 등잔이 꺼질 듯 말 듯하여 방안이 어두웠는데 탁상에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고 숨을 ‘허’하고 들이 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옷을 다 입은 주자서가 다 꺼져가는 등잔의 불을 켜지 않은 다른 등잔으로 옮겨 불을 밝혔다. 온객행은 작게 한숨 쉬며 탁상에 앉아 다 식은 찻물을 찻잔에 따라 마셨다. 주자서는 침상 근처에 있는 화로 중에 탄이 제일 많이 남은 화로를 조부의 근처로 옮기고 그 위에 물을 끓이는 주전자를 올려 두고 탁상에 앉았다. “어디 들보 위에 다녀 오셨소?” 주자서가 물었다.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훔치고 싶은 것이 들보 위에 없는데?” 주자서가 ‘흠’ 하더니 말했다. “그럼 훔치고 싶은 것이 있긴 있다는 말이오?” 온객행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어깨를 붙이고 주자서의 귀에 속삭였다. “엷은 구름에 가린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51)

온객행의 흰소리에 질린 주자서가 몸을 기울여 온객행과 거리를 벌리자 온객행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여태 침상에 들인 이들은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는가 보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면서 대꾸하지 않자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아침 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주구전이 헛기침을 하면서 자리에서 돌아 누웠다. 주자서와 온객행은 주구전을 힐끔 보고 소리 없이 마주보고 웃었다.

주구전은 조금 더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온객행이 들어오는 바람에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주자서 저놈도 반정도 넘어갔는지 행동이 퍽이나 정답다. 주구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자서가 일어나서 주구전의 시중을 들었다. 주구전은 이미 옷도 다 입고 머리도 올려 묶은 주자서를 보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옷을 벗기며 말했다. “자서야 너는 그냥 계속 아픈 편이 좋겠다.” 주구전의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하자는 대로 하고 있는 주자서를 보고 있던 온객행이 불쑥 물었다. “주대인께서도 아서의 침상에 오르셨습니까?” 주구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자서를 침상 쪽으로 밀어 눕히고 벗긴 옷을 정리하여 주자서의 발치에 두었다.

주구전은 침상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천자께서 뜻이 있으시니 우리는 그 장단에 좀 맞춰야 할 것 같구나.” 다시 침상에 누운 주자서에게 평상에 있던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며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이미 침상에 오른 이가 많으면 하나 더 추가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그리고 침상으로 올라가려는 온객행을 막으며 주구전이 말했다. “온공자 엽선배께서 가시기 전에 일러 두신 것이나 시키신 일은 없습니까?” 온객행이 주구전의 손을 뿌리치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주구전을 한번 힐끔 본 온객행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왕의 측근 중에 독을 쓰는 자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한숨을 쉬던 주구전이 그 말을 듣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서 입은 옷을 펄럭이며 정리했다.


중명원의 객실에서 주구전은 온객행과 아침을 먹었고, 주자서는 하인이 떠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혼자 먹으려는 것을 주구전이 눈치를 주어 그냥 그렇게 얌전히 침상에 몸을 기대고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을 하려고 하니 좀이 쑤신 주자서는 몸을 이리 엎치락 저리 뒤치락댔다. 아침을 먹은 주구전은 온객행을 데리고 객실을 나갔는데, 객실에 혼자 남은 주자서는 혹시 누가 또 들어올까 싶어 눈치를 보며 침상위에 누워있었다.

할 것이 없어 심심한 주자서는 객실을 뒤져 온객행이 모서리를 찢었던 서책을 찾아서 읽었다. 이것은 삼국지 오서 중 비빈에 관련된 내용을 모은 것이다. 평소에 별로 관심있게 두었던 내용은 아니지만 이 책을 보니 주자서는 괜히 우울했다. 후대 역사서에 양친의 이름은 남게 될까? 나중에 사부님께서 양친의 장례는 나라에서 치러 주었다고 들었다.

부친의 시호는 베풀 선(宣)으로 서선공이며, 모친의 시호는 맞이 세(世)로 경세장공주이다. 주자서는 문득 자신에게도 혹시 시호가 있었을까 궁금하다. 다시 양주로 돌아가기 전에 양친이 묻히셨다는 곳에 향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진왕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장지문이 열리고 진왕이 들어왔다. 주자서는 보던 책을 옆에 놓고 마치 방금 일어난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진왕이 들어오자 주자서는 양손을 모아 얼굴에 붙이고 절하듯이 침상위에 바짝 엎드렸다. 진왕은 침상을 다가와 절하는 주자서를 친히 일으키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몸은 좋아 졌는가?”

주자서는 손을 내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대답했다. “진왕전하와 조왕전하의 은혜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주자서의 말에 진왕이 웃으며 방금 주자서가 읽다가 내려 놓은 책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서 비빈전이군.” 주자서가 고개를 조아리고 대답이 없자, 진왕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대인께서는 출타하셨나?” 주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조부께서 하실 법한 말을 골라했다. “쓸모없는 소인을 걱정하시어 어제 의원께서 일러 주고가신 약재를 구하러 가셨습니다.” 진왕이 ‘흠’ 하고 들고 있던 책을 내려 놓았다.

한참 말없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하인이 차를 준비하겠다며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주자서와 진왕 둘 뿐이다. 진왕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대인께서 그대는 양주 단양 현승의 종손이라 들었는데 맞는가?” 주자서가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진왕이 다시 물었다. “문칙선생의 제자였다고?” 주자서가 또 똑같이 그러하다 대답하자 또 한동안 말이 없던 진왕이 물었다. “그대도 주역을 공부했는가?”

주자서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소인은 부족하여 아직 괘도 전부 알지 못합니다.” 진왕이 다시 물었다. “흠… 그럼 벼슬에 뜻이 있는가?” 주자서는 진왕의 뜻을 알 수 없어 힐끔 진왕을 보았다. 두사람의 시선은 아주 잠깐 마주 닿았다 떨어졌다. 주자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진왕은 그를 의심할 것이다. 벼슬에 뜻이 없다고 하면 주구전이 그를 유생이라고 소개한 것이 말이 안되게 되고, 그렇다고 뜻이 있다고 하여 벼슬을 준다면 그 벼슬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주자서가 머뭇거리자 진왕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공자. 그대는 이제부터 내 사람이니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 진왕이 모두 주겠네.” 그리고는 주자서의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주자서는 조금 당황하여 고개를 들어 진왕을 보았다. 진왕은 사람 좋게 웃으며 잡고 있던 주자서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손을 어깨로 가져가 그 근처를 쓰다듬었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주자서는 도성 근처에는 남색을 밝히는 자들만 있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진왕이 무엇이라 더 말하기 전에 갑자기 객실의 문이 열렸다. “아서! 이 요패는 어때? 이건 주단이라는 나무로 만든….” 온객행이 침상에 있는 주자서와 진왕을 보았다. 주자서는 진왕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온객행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꺾어 온객행을 보았고, 진왕은 그런 주자서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온객행은 문을 열고 들어온 자리에 서서 한참 침상 쪽을 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곧 문을 닫고 나갔다.


온객행은 방을 나오자 마자 갑자기 머리로 열이 모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주구전에게 말했던 것처럼 마음만 가지면 몸은 얼마든지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자서가 다른 남자와 한 침상에서 정답게 있는 것을 보니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서 숨쉬기가 곤란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맑은 얼굴로 진왕을 꿰어 내고 있는 주자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또 그래서 더 좋았다. 아니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뭔가 그 전까지는 손안에서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신이 주자서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 같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크게 한숨을 쉬자, 객실로 걸어오던 주구전이 아는 척을 했다. “온공자 들어가지 않으시고 예서 뭐하십니까?” 온객행이 손을 내리고 가지고 온 요패를 주구전에게 주며 말했다. “남의 정사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소.” 주구전이 요패를 받으며 되물었다. “저…정사??” 주구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온객행은 훌쩍 경공으로 지붕위로 올라가버렸다. 주구전은 어안이벙벙하여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객실안으로 들어갔다.

객실안에 들어가니 진왕이 침상 앞에 서서 주자서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주구전은 들고 있던 요패와 탕약재료를 탁상위에 올려 두고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주구전 진왕전하를 뵈옵니다.” 진왕은 들어온 주구전을 한번 보고 뭐라뭐라 더 말하고 ‘하하하’웃었다. 그리고 탁상으로 걸어와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주구전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주구전이 자리에 앉자 진왕이 말했다. “그대의 종손은 아주 강직한 자라서 쉽게 얻어지는 벼슬 자리는 내키지 않는가 보오.” 주구전이 침상 쪽을 흘끔 보며 말했다. “군자로써 지조와 절개를 잃으면 이름을 잃는다 하였으니 비록 보잘것없는 주가라도 어찌 그것을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주자서는 얼이 빠져서 침상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진왕이 주구전이 내려놓은 약재와 요패를 보더니 물었다. “약방에 다녀오시는 길인가 보오?” 주구전이 약재를 풀며 말했다. “아직 길이 낯설어 약방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진왕이 풀어진 약재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런 일은 하인들을 불러 시키면 되는 것을…” 주구전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어찌 천한 제가 사람을 부리겠습니까? 여기서 일하시는 하인분들도 다 귀한집의 자제분들이신데.”

황자를 모시는 이들이니 노비라 할지라도 왠만한 평민보다 귀한 출신일 것이다. 그리고 주구전은 시장에 나간다는 핑계로 할 일이 있었으니 좋은 구실이다. 진왕은 약재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니 하인을 불러 주구전이 사온 약재를 달이게 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며 주자서에게 몸을 보중하라는 당부를 했다. 진왕의 말에 주자서는 양손을 바닥에 붙여 넙죽 엎드려 절했다.

진왕이 나가고도 한참을 절하고 있던 주자서에게 주구전이 다가갔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어깨를 짚자 흠칫 떨더니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잡은 것이 주구전인 것을 본 주자서가 한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얼굴을 들어 울상을 하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조부, 도성에는 남색이 유행입니까?” 주구전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주자서는 침상에 풀썩 누우며 말했다. “재주가 없어 벼슬이 싫으면 첩지라도 주겠다 합니다.”

주구전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뭣이? 첩지? 그 아녀자들이 윗머리 장식할 때 쓰는 그 첩지 말이냐?” 주자서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놀란 얼굴로 침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니 용양군이 이리 많단 말이냐?” 진왕이 주자서를 보는 눈이 그런 것일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주구전은 정말 놀랐다. 이건 온객행이 주자서를 희롱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일이었다.

주자서는 양주에 있을 때도 잘생긴 얼굴과 의젓한 행동으로 뭇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니 그의 외모를 탐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소녀들이나 여인이 아니라 남자들이! 그것도 벌써 둘이나! 괜히 안쓰러워 누운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그것 말고 따로 더 하신 말씀은 없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희는 진왕의 사람입니까?”

그러자 주구전이 ‘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중명원에 있는 동안은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그리 해야지.” 그러자 주자서의 얼굴이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저는 진왕의 첩지를 받습니까?” 주구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는 그러고 싶으냐?” 그러자 주자서가 일어나 손사래 치며 말했다. “싫습니다.” 고개까지 흔들며 말하는 주자서를 보자 주구전은 괜히 그를 놀리고 싶었다. 탁상 위에 올려놓은 요패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그럼 온가의 패옥은 받겠느냐?” 주자서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더 흔들었다. 주구전이 그런 주자서를 보고 ‘허허허’ 웃었다.

주구전은 주자서에게 대충의 일을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계산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 빗대어 황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주자서는 질문이 있었으나 함부로 묻지 않았다. 곧 하인들이 요기할 음식을 들고 주구전이 사온 탕약을 들고 객실에 들락날락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감추는 기색 없이 엿듣는 하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듣기에는 주구전과 주자서는 양주의 친인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렸다.

주자서가 물었다. “당숙은 그럼 아직도 침상에 누워 계시나요?” 주구전이 답했다. “너의 백부가 약재를 구하러 갔으니 당분간은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것이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양주에 기별을 넣으러 황산은장에 가야겠다. 주자서가 말했다. “저는… 저는 양주에 언제 돌아가나요?” 주구전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종손은 이 할애비와 도성을 더 구경하다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허허허’웃었다.


하인들이 보기에는 그저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였다.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로는 소년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와 둘이 살아왔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지 않아도 남을 잘 돕고 깍듯했다. 몸이 약한 것인지 잠시 내원을 걸었다고 기침을 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면 양주에서 도성까지 여행을 하면서 병을 얻은 것 같았다.

주대인은 밖에 나갔다 오면서 뭘 사왔는지 하인들을 빙 둘러 놓고 당과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도성에서는 흔해 빠진 당과지만 누가 하인들을 위해 부러 그것들을 사올까? 그러니 진왕이 내실에서 하인들을 닦달해도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주대인이나 그 소년에 대해 별로 나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정말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왕은 신경질 적으로 아랫것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한식이 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황제는 공의나 정주에 가서 낚시를 할 것이다. 낚시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아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진왕은 그곳에 주자서를 데려갈 참이었다. 하지만 조왕은 정확하게 어느 날짜에 어디로 가는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정명원 객실에 묶어 둔 주자서를 보았으니 진왕 모르게 그만 데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진왕은 낙양성에 있는 황후에게 서신을 보내 고모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을 물었다. 진왕은 한참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고모께서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진왕은 유연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주자서와 고모님을 연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왕은 명절때가 아니면 고모님을 자주 뵙지도 못했고 게다가 내종형제인 주영과도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지금의 황제는 그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조부이신 선황께는 주영을 아끼다 못해 매일 끼고 살았다. 게다가 기왕 사마영은 시간이 날때마다 그 아이를 데리고 낙양성 남궁 화원에서 보란듯이 선황께 예쁨을 받았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애가 잘 모르는 어려운 글자를 읽어대며 저를 보고 웃는 것은 꽤 거슬리는 일이다. 그 때 그 아이는 푸른색 옷을 입었었던 것도 같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사마영과 같이 걷는 모습은 수도 없이 보았다. 그 둘은 푸른색 계열의 옷을 자주 입었던 것 같다. 진왕은 사람을 시켜 옅은 쪽빛의 옷을 짓게 했다. 유생들이 걸치는 유삼 같은 형태의 옷으로 부러 비치는 얇은 천을 사용하라고도 일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진왕은 낙양에서 온 서신을 받았다. 당숙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에게 온 서신이다. 서신에는 오늘 오후에 황제 일행이 정주로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낙양에서 정주까지는 말로 두 시진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기 때문에 황제가 만약 행렬을 이루어 간다면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다. 진왕은 서신을 화로에 던져 넣고 일어나 주자서가 있는 객실로 갔다.


하인에게 기별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주구전이 차를 끓이고 있었다. 주구전은 어젯밤에도 주자서와 함께 보냈는지 평상위에 이불이 놓여 있었다. 진왕은 주자서가 결코 혼자서는 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구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대인, 기침하셨는지요.” 주구전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했다. 진왕은 그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잡을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이용해먹기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주자서가 침상에서 일어나 절하려고 하기에 얼른 예를 거두라 말한 진왕은 탁자 앞에 앉았다. 주구전이 차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진왕에게 차를 올렸다.

진왕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주대인, 제가 약속한 황하에 유람을 갈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주구전이 침상 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아직 우리 아이가 아파서…” 진왕이 주자서 쪽을 보자 주자서는 다시 누웠는지 이불만 보였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 황하의 바람은 그리 차지 않습니다. 벌써 청명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주구전의 난처한 기색을 읽은 진왕은 거절할 수 없게 말을 이었다. “제가 숙부인 낭야왕께 배를 빌려 놓았으니 가서 보시지요. 주공자는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주구전은 주자서를 보살피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탐탁치 않아 곤란했다. 그래도 왕의 봉호를 가진 이에게 빌린 것이라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주구전이 입을 열었다. “진왕께서 권하시니 저도 즐겁습니다. 다만 엽선배께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 진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그러합니다. 제가 사람을 좀 풀어 연락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선의 제자라는 분은 어디에…?” 진왕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주구전이 말했다.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으니 상선께 가지 않았을까요?” 진왕이 동의하며 일어났다. “두 분께서는 푹 쉬시고 내일 아침 일찍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주구전과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하인을 따로 불러 두 사람의 목욕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목욕시중을 드는 하인들에게 두사람의 신체 치수를 대강이라도 알아오게 시켰다. 일이 촉박했지만 돈을 좀 쓰면 시간을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산기상시에게 편지를 보내고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벌써 오시가 넘었다. 잠시 내원을 거닐러 나갔는데 아랫것들 목욕하는 곳이 소란스럽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다 늙은 노인네와 어린 소년 하나 씻기는 일이 뭐가 저리 즐거운지 괜히 흥이 식은 진왕은 하인을 불러 기루에 갈 채비를 했다.


진왕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주구전과 주자서를 데리고 부엌 옆에 있는 간이 욕탕으로 데려갔다. 주구전이 시중이 필요 없다며 사양하자 하인들이 그들에게 욕의를 입히고 욕탕에 밀어 넣었다. 주자서는 얇은 욕의를 입고 떨고 있다가 옆에 있던 하인의 손에 달랑 들려 탕 속에 몸을 담갔다. 물은 조금 뜨거웠는데 그래서 딱 좋았다. 주구전이 좋다며 양주에서 유행하는 시가를 읊으니 그의 머리를 감겨주던 하인들이 ‘까르륵’하고 웃었다. 주구전은 하인들과 농담을 하며 목욕을 했다.

주자서는 머리를 빗겨주는 손길에 나른하여 물속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목욕물을 먹었다. 그것이 귀여워 또 한바탕 웃었다. 다 씻은 두 사람을 객실로 데려다 놓은 하인들은 또 머리를 말려 주겠다며 서너 명이 그들 뒤에 붙어 머리를 말리며 머릿기름을 발라 주었다. 혹여 두 사람이 목욕후에 풍한이라도 들까 객실로 화로를 더 들고 들어왔다. 목욕을 하고 원래 입고 있던 옷을 입을 수는 없어서 하인들에게 옷을 빌려 입었다. 주구전은 흰색 장삼에 소매가 넓고 깃이 푸른색인 옷으로 예전 유학자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주자서는 중명원의 하인들이 입는 회색 호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51) 조식 낙신부
髣髴兮若輕雲之蔽月 飄颻兮若流風之廻雪
엷은 구름에 싸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遠而望之 皎若太陽升朝霞 迫而察之 灼若芙蕖出淥波
멀리서 바라보니 아침 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가까이서 바라보니
녹빛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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