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 성글어도 놓치는 것이 없다.
처소에 가만히 있는 것이 심심했던 주자서와 온객행은 주방에서 간식을 얻어먹고 소림사 여기 저기를 들쑤시며 구경하는 중이었다. 논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승려들 모두가 바빠 이 두 사람이 어슬렁 거리는 것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그 날 오후, 소림사는 더 찾아온 사람과 이미 머무는 객으로 북적이고 시끄러웠다. 산문 앞까지 온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아마 귀하신 누군가가 온 모양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낙양으로 놀러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소매를 흔들며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말했다.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 다면 부질없이 내 소매만 저버리게 되리라, 이 한스러운 것은 죄가 많으니 그대는 마땅히 취한 나를 용서하오.”(22) 숭산에서 낙양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한시진이면 닿는 곳이다. 주자서는 새삼 궁금했지만 또 불안한 마음이 있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온객행이 몸을 붙여 오더니 주자서의 이마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이제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아파?”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부루퉁하게 괜찮다고 했다. 온객행은 또 옆에서 찬바람을 맞으면 안되니 들어가자는 둥 옷을 더 입어야 한다는 둥 흰소리를 하며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다 주자서의 심의 소매를 들어 보이며 꼭 새 옷을 사야 한다고 말하던 온객행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섰다.
법주 혜고 스님이 갑옷을 입은 남자와 비단 옷을 입은 공자와 함께 서있었다. 회주는 그들을 본당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법주스님이 먼저 인사했다. “아미타불 처사님들께서는 거처로 돌아가시지요.” 주자서는 법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공수하며 인사했다. 그가 절하는 것을 멀뚱히 보고 있던 온객행도 포권했다. 갑옷을 입은 무관과 비단옷을 입은 공자는 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법주에게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다시 본당으로 향하고 난 뒤에야 주자서는 힐끔 고개를 들어 그들이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저들은 누구지?”
주자서는 그들의 신발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황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았다. 공자는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고, 무관은 가죽을 덧댄 말을 타는 장군이 신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주자서의 아버지가 예전에 신던 것과 같은 것이다. 주자서는 허리를 펴고 서서 한동안 무관과 공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도 언제인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자가 입고 있는 옷도 예전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입었던 것 같아 괜히 울적했다.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저 멀리 가던 무관이 그들을 힐끔 뒤돌아봤다. 그 무관은 주자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커다래지더니 가던 길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부러 길을 다시 돌아서 주자서와 온객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몸을 뒤로 돌려 다급히 처소로 향했다.
온객행도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무관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공자, 잠시 멈추시오.” 주자서가 우뚝 멈춰서 발끝을 봤다. 귀족이 말을 걸었으니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죽어도 모를 일이다. 주자서는 몸을 숙이며 뒤돌았다. 다시 소매를 올려 공수하려는데 무관이 그의 팔뚝을 잡아채며 그를 일으켰다. 무관의 행동에 놀란 주자서는 한동안 얼어 있다가 무관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온객행이 무관을 웃는 낯으로 보며 팔을 떼어 냈다. “대인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말로 하시지요.”
주자서는 괜히 온객행 뒤쪽에 서서 그의 소매 끝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숭산에 온 이후로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고 종조부의 중의나 장포를 심의처럼 둘러 입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주자서는 몸이 작았는데 그래서 더욱 어려 보였다. 온객행은 신이 난 듯 소매를 펄럭이며 주자서를 온몸으로 가리고 무관에게 말했다. “우리 아서는 아직 어려서 낙양근처에 온 일은 처음이니 너무 놀리지 마소서.” 무관이 온객행 뒤에 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다시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아서? 명이요 휘요? 공자 혹 주(朱)씨가 아니오?” 온객행이 답했다. “아서는 주(周)씨요. 아서, 혹시 휘가 있어?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자서는 고개만 흔들어 아니라고 답했다.
무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공자와 법주도 다시 두 사람 앞으로 왔다. 오는 길에 심아스님이 나타나 법주에게 주자서와 온객행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그들과 함께 있던 공자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가오자 무관은 함께 온 공자의 눈치를 봤다. 약관을 조금 넘긴 것 같은 공자는 무관에게 말했다. “유교위 무례를 멈추시게.” 공자의 말에 무관이 말했다. “혁란(赫蘭), 이 아이 좀 보게, 당이모님이랑 닮았어.” 그 말에 혁란이라고 불린 그 공자가 온객행 앞에 와서 섰다.
온객행의 소매에 매달려 있는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뭐야? 사내 잖아?” 목을 가다듬더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사례의 군왕 진사왕(晉沙王), 이쪽은 월기교위 유연(劉硏)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놓고 공수하며 인사했다. “저는 양주에서 온 주자서라 하옵니다.” 온객행도 포권하며 인사했다. “나는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이오.” 온객행의 인사를 들은 진사왕은 크게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 혹 장명산 상선의 제자요?” 온객행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장명산 노인네는 어쩌다 같이 살게 된 사람이지 스승이 아닙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유교위도 진사왕과 함께 웃었다.
진사왕은 주자서가 손을 내리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 온객행에게 붙어 서자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 자서라고 했던가? 무슨 자에 무슨 서자를 쓰나?” 주자서는 내렸던 소매를 다시 들어올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소매를 위로 올려 얼굴을 가리며 대답했다. “사람(子) ‘자’에 집오리(舒鳧; 서부)할 때 ‘서’ 입니다.” 공자는 ‘흠’ 하고 말았다. 대답이 끝났으니 어쩔 수 없이 소매를 내린 주자서가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진사왕이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는가? 혹 연동인가?” 그 말에 주자서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그 질문을 한 진사왕을 보았다. 그는 둘째 황자 진왕(晉王), 사마연(司馬連)이다. 그는 주자서를 알지도 몰랐다. 어릴 적 황궁에서 황자들과 함께 수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주자서는 막 글자를 읽기 시작한 어린아이였고, 황자들은 이미 유교경을 모두 깨친 후였다. 어린 마음에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어 뜻도 모르는 어려운 유경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진왕은 주자서를 기억할까? 그의 내종형제이며 황제의 생질인 주영(朱嬴)을.
주자서의 얼굴을 본 진사왕은 “흠… 정말 고모님을 닮았네.” 그때 법주가 끼어들었다. “주공자는 양주에서 오신 주대인의 종손이시라구요?” 주자서는 괜히 그 참견이 기꺼웠다. 어서 진왕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법주스님의 말에 진사왕이 말했다. “주대인?” 법주가 그에게 양주 사계산장에서 온 장로라고 이야기하자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주자서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자서는 사마연을 보고 놀라서 방금 나누었던 불경한 이야기를 잊었지만 그것을 잊지 않은, 잊지 못한 온객행이 주자서와 마주서며 물었다. “아서…? 정말 화동이야? 주대인의 화동이냐구!” 대답 없는 주자서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며 얼굴을 붙이고 말하는 온객행이 부담스러워 주자서는 대답도 없이 고개만 도리질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고 있던 법주는 괜히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고는 진사왕과 월기교위의 길을 재촉했다. “주지께서 본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그들은 다시 본당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공수하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멍하니 바라보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주대인의 화동이야? 주대인의 화동이었어...?”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자서는 목이 타서 물을 연거푸 마셨다. 주구전은 주지를 만나러 갔고, 장명산 검선께서도 함께 가셨으니 진사왕과 월기교위 역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월기교위의 얼굴은 낯선 얼굴이다. 그가 황자의 이름을 부를 정도라면 필히 왕족일 것이다. 월기교위는 성밖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이니, 황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대체 그들은 소림사에 무슨 일로 온 것일까? 주자서는 주구전이 의논하러 가기전에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주자서는 문간 옆에 며칠 동안 선잠을 자야 했던 의자에 앉았다. 뭔가 어딘 가에 당장 기대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온객행이 앉아 있는 주자서에게 침상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아서… 아직도 아픈거야? 얼굴이 새하얘.” 그리고는 주자서의 뺨을 쓸었다. 주자서는 또 미간을 찌푸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자, 무릎에 덥혀 있던 이불이 아래로 쏟아졌다. 온객행은 그 이불을 들어 덮어준다는 핑계로 주자서를 이불로 감싸며 자기 팔 안으로 안았다.
양심당 안에는 지주와 항렬이 같은 회주스님, 그리고 그들보다 항렬이 높은 고승과 노승 몇몇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양심당은 계지원 안에 있는 전각으로 소림사의 장로들이 보다 높은 불법을 수련하는 장소이다. 방장실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어떠 한지 대충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들어가며 주구전은 공수하여 노승에게 인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까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주구전의 항렬이 제일 낮았다.
주구전은 오늘도 혹시 단양파의 육해방이 오지 않았을까 눈으로 힐끔거리며 둘러보았다. 인사를 마치고 문간에 서서 혹시 누가 더 올까 싶어 밖을 보고 있자 장명산 검선이 노승과 하던 대화를 멈추고 주구전을 데려다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할 말은 하겠네.” 주구전은 모르는 척하며 검선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보니 소림사 내부에서는 이미 말을 마친 것 같았다. 개방 장로들이 신나게 떠들어댄 이야기로 처신을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검선은 곧 명상을 시작했고, 노승중 몇 명은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 양심당 안으로 지주 여운이 들어왔다. 젊어 보이는 무관과 비단 옷을 입은 공자였는데, 그 옆에 태보와 태보와 함께온 무관도 같이 서 있었다. 태보와 함께온 무관은 젊어 보이는 무관과 아는 사이인지 꽤 친밀해 보였다. 비단옷에 게다가 비단 신발을 신은 공자가 들어오자 앉아 있던 노승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미타불 진왕을 뵙습니다.”
그 말에 앉아 있던 주구전도 눈치껏 일어나 손을 공수하여 인사했다. 진왕이라면 황제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강호와 결탁했다는 의심을 사서 황제에게 축객령을 받아 지금은 도성 밖에 있는 신세라 하더니, 그것이 정말인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시켰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만큼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주구전은 조용히 입을 닫고 마치 스님이 된 마음으로 주변에 스며들었다.
인사를 주고받던 진왕이 장명산 검선과 주구전을 발견했다. 그가 검선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장명산 상선이오?” 검선은 못마땅하다는 듯 한껏 심술이 난 얼굴로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장명산 엽백의(葉白衣)요.” 그러자 진왕이 손을 모아 공수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영광이오. 그대가 세상에 난지 벌써 몇 백 년이 흘렀다 하던데, 겉모습은 마치 내 또래인 듯하여 무례를 범할 뻔 하였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에게 엽백의가 말했다.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하니, 마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오.”(23) 진왕이 대답했다. “환히 비추는 저 해와 달도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의 일이야, 좋고 나쁨에도 일이 많으니 어긋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24) 엽백의는 그 대답에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진왕을 봤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주구전만 손에 땀이 났다.
그들은 중앙에 있는 불단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았다. 태보와 진왕도 서쪽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저 자리는 분명 태보가 유교경전을 들이대며 노승들의 자리를 뺏은 것이다. 그래서 주구전은 방금 진왕이 한 이야기가 더 의아하였다. 천자의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천자가 보통 사람인냥 맞고 틀릴 수 있다니 황제가 들었다면 경을 칠 이야기다. 옆에 앉아 있던 엽백의는 어젯밤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당산에 다녀온 모양이다. 무당파의 장문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며,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눈치였고, 무당파가 그러하다면 더 멀리 있는 공동파, 곤륜파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아미파는 어찌되었든 불심으로 도를 닦으니 소림사와 비슷한 목소리를 낼 것이 틀림없다. 강호를 대표하는 무림정파의 이름 없이 만들어진 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조직은 대체 목적이 무엇이기에 천자의 일에까지 관여하려 하는가?
주구전은 괜한 의심이 일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말 할 수 없는 그 무림맹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소림사는 불가를 믿는 강호 정파들 중 가장 오래 되었고 그 숫자도 개방에 뒤지지 않는다. 소림사 제자 모두가 불심이 깊지는 않다. 개방 장로라고 하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그저 배만 채우면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자기들 안위부터 찾는 자들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며 빌어먹고 사는 것이다. 사계 산장도 개방만큼이나 염탐이나 세작 관련하여 유명하였으나, 사실 개방처럼 세세하게 모든 일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저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다 들어지는 것들과 보아진 것들을 잘 조합해서 유추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산장은 제자들에게 사기나 춘추 같은 역사서도 가르쳤다. 보통 사람의 일이란 시대가 바뀌어도 반복되는 법이라 사계산장에서 유추한 것들이 대체로 틀린 적이 없었을 뿐이다.
옆에 앉아 있던 장명산 검선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무림맹과 관여한 자는 누구요?” 숭산 논의를 꿰뚫는 질문이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모두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엽백의를 보았다. 검선은 평소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으나, 그 기세가 조금 화나 있었다. 환난이 끊이지 않던 시절부터 세상을 떠돌던 이 노인네의 눈에는 강호와 관이 손을 잡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걸로 보셨으리라. 주구전은 괜히 나섰다가 혹여 책임을 지게 될까 앉은 자리에서 전전긍긍했다.
엽백의가 소리첬다. “이 자리에 그 누구도 관여한 자가 없는 모양이니, 나는 그대들을 믿겠소. 만에 하나 거짓이면, 이 엽모보다 먼저 삼도천을 건너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주구전은 엽백의가 문파를 돌아다니며 같은 질문을 하고 다닐까 봐 얼른 일어나 검선을 붙잡았다. “엽선배! 엽선배, 진정하고 일단 자리에 앉아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그러자 주지도 검선을 말리며 말했다. “아미타불, 상선. 방법을 모르는 중생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 멉니다. 캄캄한 어둠속에 모두 헤매고 있으니 가르침 주시지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25) 검선이 가던 길을 멈추고 주구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자리로 와 앉았다. 주지 여운이 말했다. “이번 일은 황실과 상관있으니, 태보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하십시오. 소림사에는 스스로 통발안에 들어가는 물고기는 없습니다.”(26)
태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왕을 보았다. 사실 이 자리에서 제일 의심스러운 자는 진왕이다. 대체 어떤 연유로 그가 이 곳에 와 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듯했다. 일단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당사자가 아닌가. 부러 찾아와 태보가 황제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장명산 검선이 운을 뗐으니 누구든 이 일에 대답을 하던지 대책을 내 놓아야 했다. 기세 좋게 일어난 것치고 태보는 별말 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황실의 상황을 알고 있어서 별말이 아닌 것일 수도 있었다. 엽백의는 대충 상황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어떠한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얼굴에 ‘고작 이런 일로 강호에 사람을 쓰다니 멍청한 것들’이라고 쓰여 있는 듯하여 주구전은 괜히 황실의 사람들 눈치를 보았다. 다 늙어서 누군가의 시중을 들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엽백의의 시중은 그 누구보다 고되다.
소림사 중놈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주구전은 당장이라도 날 좋은 양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한 해 먹고 살 농사나 잘되면 그만인 안락하고 평탄한 삶으로. 아마도 주지는 사계산장에게 이 일의 배후를 물어볼 요량인 것 같다.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필 멀리 있는 양주 임해의 사계산장에 의뢰하다니 지주도 꽤나 여기 저기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황실의 일이라 시끄럽게 떠들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개방은 괜한 의심을 사기 딱 좋으니, 조용히 사람을 움직이는 사계산장에 부탁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주구전은 아까 검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 말릴 것이 아니라 같이 따라 나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태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진왕의 눈치를 보며 황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그리고 진왕은 마치 그것이 남의 일 인양 태연한 얼굴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딱히 억울하다 거나 부인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어쩌면 저 속에 사람이 아니라 교활한 여우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2) 도연명 飮酒 술을 마시다
만약 다시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다면 부질없이 머리 위의 두건만 저버리게 되리라.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잘못이 많으니 그대는 마땅히 술취한 사람 용서해주오.
도연명은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술을 걸러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23) 굴원 懷沙賦 회사부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마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이상한 사람 있어 짖는 것이고
(24) 송옥 九變 구변
환히 비추는 저 해와 달도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 데 한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일이야 선악에도 일이 많으니 어긋날 적도 있으리라.
(25) 법구경 우암품 60
잠 못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도 멀다.
(26) 법구경 애욕품 20
탐욕의 그물로 스스로를 가리고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으며 스스로 방자하여 감옥에 갇힌다. 마치 물고기가 통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