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猫鼠同處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
엽백의는 주구전의 처소로 와서도 죽엽청을 두 단지나 더 마셨고, 진왕은 결국 취기가 올라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하인들이 들어와서 음식을 치우는 것을 보고 있던 주구전이 ‘휴’ 하고 한숨을 쉬자, 남은 술을 마시고 있던 엽백의가 말했다. “나는 노쇠하여 좀 쉬어야겠으니, 나가보거라.” 하인들이 나가자 엽백의가 주구전을 보고 말했다. “너는 안 가냐?”
엽백의는 주자서가 곱게 펴 놓은 침상위의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며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비단 이불도 덮어 보는구나.” 주구전은 의자에서 일어나 엽백의의 이불을 고쳐 덮어 드리며 말했다. “이 곳의 물은 깨끗한 듯합니다.” 엽백의가 실눈을 떠 주구전을 힐끔 올려보며 말했다. “내 점을 쳐보니 이곳은 바라는 바가 커서 곤궁한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구나.” (45) 주구전은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중명원에서 어떻게 나가나 고민하며 방을 나왔다. 시간이 꽤 늦었는지 달이 밝았다. 청명이 지났으니 저 달은 기우는 달이다.
나온 방 바로 옆에 있는 처소로 들어가니 주자서는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온객행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침상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옷과 신발이 보였다. 하는 짓이 이러니 괜한 시기와 시샘을 받았다. 그래도 모나지 않게 행동하고 그런 사제가 있으면 잘 다독이고 스스로 참아서 원만히 지냈다. 가끔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소림사에서 양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오늘은 주구전이 주자서의 잘 곳을 봐 주었다. 그리고 나와 그 옆에 있는 방이 비어 있어 주구전은 그곳에서 눈을 붙였다. 몸이 고단하여 눈을 붙이면 금방 잠이 올 것 같았는데,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주자서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밖이 어두웠다.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들었던 터라 주자서는 진시(辰時) 전에는 일어나는 편이었다.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다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비단의 촉감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밖이 조용했다. 몸을 뒤척이다 이불이 묵직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온객행이 이불 위에서 자고 있었다. 주자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에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주자서가 멍하게 온객행을 보고 있자, 온객행이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자서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하는 행동이 이제 막 충년이 지난 사제를 떠올리게 했다. 추운 겨울 밤이 길어지면 무섭다는 핑계로, 춥다는 핑계로, 자기 이불 속을 파고 들어오는 그 귀여운 녀석과 이 커다란 놈이 겹쳐 보이다니, 주자서는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의 몸을 조심스럽게 넘어 신발을 신고 옷을 입었다. 풀어 내린 머리는 다시 하나로 높게 울려 묶고 뒤돌아보니, 온객행은 아예 이불을 둘둘 말고 침상을 다 차지했다.
주자서는 어젯밤 이부자리를 펴드린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물동이를 가지고 나왔다. 어제 하인들이 알려준 곳에 가서 물을 떠다 소세할 물을 대야에 담았다. 화로에 불씨가 얼마 없어 방안을 뒤져 탄을 조금 더 넣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저도 모르게 부산을 떨었는지 인기척에 침상에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주자서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 “조부, 기침하셨습니까?” 그러자 ‘흥’ 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나더니 엽백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지극 정성이구나” 주자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려 침상을 봤다.
신선같이 하얀 옷을 입은 엽백의가 주자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엽백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어르신, 저희 조부께서는 어디에…?” 엽백의는 주자서가 떠다 놓은 대야에 얼굴과 손을 씻었다. 대답이 없어서 주자서는 곧 물러가겠다 고하고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어젯밤 자신이 머물렀던 방 옆에 다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침상이 있는 쪽을 보니 조부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안심의 한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조부께서 자길 버리고 갈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면 낙양성이 가까워 마음이 불안한 것일 수도 있다.
조부께서 머무는 방안의 물독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주자서는 또 우물물을 길러 갔다. 하인들이 일어났는지 물을 뜨고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녀들의 손끝이 찬물에 빨갛다. 주자서는 우물 근처에 서서 하인들에게 한참 물을 퍼주고 날이 다 밝아서야 주구전이 잠을 잤던 방에 물동이를 들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이미 일어나 옷을 입고 화로에 탄을 채워 넣고 있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에게 손을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종조부, 기침하셨습니까.”
주구전이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가서 대야를 들고 물독이 있는 쪽을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너도 잘 쉬었느냐?” 주자서가 물독에서 물을 퍼 대야에 담았다. 주자서의 손이 얼어서 빨갛다. 주구전이 대야를 놓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이 씻은 물을 내원에 버리고 들어오자 하인들이 물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이미 소세했다며 주자서에게 어서 씻으라고 말했다. 대야를 내려놓은 하인이 주자서를 보며 웃었다. 대야의 물은 따뜻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엽백의가 있는 객실로 갔다. 엽백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로 근처에 앉아 엽백의를 기다리는데 하인들이 조찬(朝餐)을 가지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주자서에게 가서 온객행을 깨워 오라고 시켰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인이 이미 다녀갔는지 대야에 물을 받아 놓았다. 물을 만져보니 이미 식어 있었다.
아직도 침상위에서 이불을 말아 자고 있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온공자, 일어나시오. 온공자….”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던 온객행이 눈을 뜨고 주자서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온공자 어서 일어나시오. 아침을 듭시다.” 온객행이 버둥대며 일어나 앉았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누워 잤으니 그대로 벌떡 일어나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니! 아서 그러니까 어젯밤은….”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주구전이 있는 방으로 갔다. 하인들을 물려 주구전이 혼자 탁상 앞에 음식을 두고 앉아 있었다. 주자서도 옆에 가서 앉았다. 주구전이 물었다. “어제 온공자는 어디서 잤느냐?”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제 방에서…” 주구전이 ‘허허허’ 웃었다. 곧 온객행이 방금 소세한 맑은 얼굴로 들어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주구전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가 매우 비싸고 귀한 차인 것은 알았지만 영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어떤 핑계가 있어야 중명전을 나갈 수 있을까…’ 장명산 검선정도는 되어야 인사도 없이 훌쩍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주구전이 그러면 진왕은 군을 이끌고 사계산장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주구전은 아예 팔짱을 끼고 한숨을 연거푸 쉬어 가며 골똘히 생각했다.
진왕이 아니면 첫째 황자인 조왕이다. 그가 무림맹과 관계한 것이다. 진왕이야 지금 처지가 곤란하여 운 좋게 만났지만 조왕은 아직 낙양성에 머물고 있으니 만날 방도가 없다. 만나더라도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낙양성에 얽히고 설킨 군신관계를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 참 애매하다. 그렇다고 이 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괜히 화를 당할 것 같았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따뜻하게 잘 자서 그런지 몸상태가 좋아 보인다.
주구전은 주자서에게 무림맹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중이다. 그래도 이 곳은 듣는 귀가 많으니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주구전은 그래도 떠난다는 말이라도 꺼내 볼까 싶어서 진왕을 찾았다. 하지만 진왕은 이미 출타하고 중명원에 있지 않았다. 주구전은 중명원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주자서는 내원을 걷고 있었다.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아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정원을 걷는 주자서의 옆에 온객행이 계속 입을 벙긋거렸다. 할말이 있으면 하면 될 것을 저렇게 뜸을 들인다. 눈썹이 축 쳐져 한껏 울상으로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혹시 화났어? 내가 함부로… 함부로…, 어젯밤에는 말이야….” 주자서가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무엇을 말이요.” 온객행이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우리가 한 침상에서 밤을 보낸 것은 말이야….” 주자서가 가던 길을 멈춰서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아무일 없었소.” 남자 둘이 한 침상에서 잘 일이야 없다면 없고 또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러나 싶었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정표도 주지 못했는데….”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을 지나쳐 앞서 걸었다. 온객행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오늘 공의성 시장에 같이 가서 사자. 아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내가 살게. 금이 좋아 은이 좋아? 아니면 청옥이나 취옥? 너무 비싸면 첨정석이나 감람석이라도…”
주자서가 말했다. “필요 없소. 그렇게 비싼 것은 받을 수 없소.”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아서의 침상에 오른 사람인데 그 정도는….” 주자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누가 처음이라 하였소?” 온객행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그런 그를 두고 주구전이 있는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가 객실로 들어오자 주구전은 뜬금없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 혹시 몸이 좋지 않느냐?” 주자서는 주구전의 물음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어젯밤에 잠을 충분히….”까지 말한 주자서의 말을 끊으며 주구전이 말했다. “그래. 요 며칠 여독에 어제 독한 술을 마시고 찬바람을 맞았으니 몸이 좋지 않지?” 주자서는 주구전을 보고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온객행이 뛰어 들어와 말했다. “아서! 그럼 대체 처음은 누구야?” 온객행의 질문에 주구전이 주자서를 빤히 보았다. ‘무엇의 처음?’ 주자서는 주구전의 말 대로 정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온객행이 더 입을 열기전에 주자서가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 상대하기 곤란하니 이만 상선께 가보시오.”
점잖게 내쫓는 말에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주자서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서 또 아파? 어디가 아픈데? 이리와, 우리 아서 내가 맥을 짚어 보게.” 잡힌 손목을 뿌리치며 주자서가 말했다. “어젯밤 악몽을 만나 그런 것이니 이쯤 하고 가시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찻잔을 가져다 차를 따르며 말했다. “우리 아서는 미인등이네 미인등. 바람만 불면 꺼질 듯하네.” 그 말에 주자서는 어이가 없었고 주구전은 ‘허허허’하고 웃었다. 온객행 이놈은 정말 걱정하나 없이 만사가 태평하다.
그렇게 갑자기 아프게 된 주자서는 어젯밤 머물렀던 처소의 침상에 또 누웠다. 주구전이 옆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주자서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하인들이 오고 가며 약재탕과 구리로 만든 손난로에 향초를 태워왔다. 극진한 대접에 주구전이 의아할 정도였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발 밑에 앉아 울상으로 그런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주구전은 한숨을 쉬며 저 온객행을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했다.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제 말한 그 모과 절임은 맛이 어떠 하오?” 주자서의 말에 벌떡 일어난 온객행이 말했다. “우리 아서 모과절임이 먹고 싶어? 알겠어! 내가 얼른 가서 사올게!” 그리고는 바람처럼 방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주자서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종조부.” 주구전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의 처지가 초나라의 회왕과 같구나.”(46) 또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주자서가 말했다. “양주에 매화가 피었나요?” 사계산장에 보낸 서신은 공의성에 들어와서 황산은장에서 부친 서신이 전부다.
주구전은 또 한참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랏님을 상대로 이길 수 없으니 패전계인데….” 주구전은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이럴 때는 도망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수인데, 그럴 수도 없으니 쫓겨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진왕을 번거롭게 하여 중명원을 나갈 수 있을까?
주구전은 주자서에게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면서 하인들에게 풍한이 든 것이니 옮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진왕은 점심때가 좀 지나서 중명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조왕(趙王)과 함께 왔다. 주구전은 엎친데 덮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조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주구전은 일부러 주자서를 두고 혼자 조왕을 알현하러 갔다.
처소에 누워있던 주자서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옷을 벗었다. 내의만 입은 채로 앉아서 운기 조식을 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보법을 연습했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혹시 이 불안이 사라질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처소를 돌아다녔다. 그동안 긴 여행길에 몸이 좋지 않아 몸이 많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또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편안하다.
몸을 좀 움직이니 그새 땀이 났다. 방안에는 화로가 세 개나 있어서 숨쉬기가 조금 텁텁했다. 숨을 몰아쉬고 호흡을 정리하려고 다시 침상에 가서 앉았다. 곧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놀라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아서! 내가 모과 절임을 사왔어! 아서!” 침대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주자서의 얼굴은 몸을 움직여 혈색이 돌았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온객행은 모과 절임을 주자서의 머리맡에 놓고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의 땀을 닦아주었다. “아서, 정말 아픈 거야?” 그리고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주자서의 손목을 잡았다. 주자서가 손목을 빼며 눈을 떴다. “온공자, 옮을 수 있으니….” 온객행은 빠져나가는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다 좋아.” 주자서를 보고 웃는 온객행의 눈썹에 걱정이 걸려있다. 주자서는 거짓말이 미안하여 온객행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온객행이 모과 절임이 들은 작은 찬합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주자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서, 내가 장에 가서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어…. 우리 아서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선물하고 싶었는데….” 주자서가 입에 들어온 모과 절임을 먹으며 온객행이 장에 나가서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자서도 나가서 보고 싶었는데. 어릴 때는 마차를 타고 오가느라 도성의 시장에는 가본적이 없는 주자서는 괜히 아쉬웠다. 사람도 더 많고 물건도 더 많다고 들었다. 그러니 신기한 것도 신기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주자서가 씹는 것을 멈추자 온객행이 모과 절임 하나를 더 집어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또 그것을 받아먹었다. 달콤하면서 쌉사름하고 향긋하다. 온객행이 신이 나서 중명원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것을 말했다. 주자서가 손을 뻗어 모과 절임 하나를 집어 온객행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온객행이 떠드는 소리에 조금 질린 참이었다.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모과 절임을 입술로 물고 있다가 곧 입안에 넣어 씹어 먹었다.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주자서를 마주봤다.
조왕을 알현하러 간 주구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의 첫 화두가 주자서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계산장에서 온 주구전이라고 조왕에게 인사를 하자 조왕은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왕이 주자서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주구전이 풍한이 들어 옮을지 모르니 나으면 뵙겠다고 사정해보았지만 진왕이 옆에서 조왕을 부추겼다. “유연과 소림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발견한 아이인데, 고모님과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조왕이 흥미가 있는지 말했다. “그래? 요즘 유교위와 자주 어울리는구나” 진왕이 멋쩍게 ‘하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 지금 객실에서 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인을 불렀다. 주구전이 따라 나가면서 말했다. “황자 전하 귀중한 옥체 보전 하시옵소서. 혹여 우리 아이 때문에 병이라도 얻으시면….”
진왕이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걱정마시게 형님께서는 무공이 높으시니.” 주구전은 뒤에서 진왕을 쏘아보았다. ‘이것이 저 놈의 속셈이었구나.’ 객실에 다다라 하인이 주자서의 방에 기별하고 주자서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화로에 끓은 물을 차주전자에 따르던 온객행이 조왕과 진왕과 마주쳤다.
조왕이 물었다. “네가 주자서인가?” 온객행이 주전자를 내려놓고 포권하여 인사했다. “저는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입니다.” 조왕은 ‘흠’하더니 말했다. “자네는 장명산 상선의 제자인가?” 온객행이 공손히 손을 내리고 대답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진왕이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어젯밤 장명산 상선과 죽엽청으로 대작했지요.” 그리고는 침상 쪽으로 조왕을 안내했다. 주자서는 선잠이 들어 있던 터라 사람들의 인기척에 잠이 깬 상태였다.
조왕이 누워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사내냐?” 주구전이 답했다. “아이고 전하. 우리 종손인데 당연히 사내지요.” 주구전은 그냥 여자아이라고 할 걸 그랬나 순간 고민했다. 주자서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침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왕을 보고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왕이 침상에 앉아 주자서의 얼굴을 가까이 보았다.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좋구나. 아주 좋아.” 그리고는 일어나 주구전을 찾았다. “이 아이 올해 몇 살이오?” 주구전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지학입니다.” 온객행이 대답하는 주구전을 보았다. 조왕이 대답했다. “그래?” 진왕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아이가 살아 있으면 올해 방년이니…” 그 말을 들은 주자서는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하여 숨을 헐떡이더니 곧 침상에 풀썩하고 쓰러졌다.
(45) 국어 89. 公子重耳夷吾出奔 공자 중이와 이오가 망명하다.
진나라에
쫓기던 중이가 백곡에 이르러 초나라로 갈지 제나라로 갈지 점쳐보았다. 어디로
가든 바라는 바가 커서 귀의하여 도망치기 어렵고 곤궁한 처지에 찾아갔다가 후회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진나라 근처에 있는 적나라로 망명한다.
(46) 진나라와 초나라는 전쟁 중이었는데 진나라왕이 초나라 회왕에게 초나라의 8개성을 놓고 맹약을 맺는 자리에 그를 불렀다. 의심하여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들의 설득으로 진나라로 간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다시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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