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14

14. 問鼎輕重
솥의 무게를 묻다.

진왕을 따라 행렬을 호위하던 군관들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구경했다. 나풀거리는 얇은 장포를 입은 주자서는 마치 소녀가 단정한 심의를 입은 것 같았는데 온객행이 그의 머리를 올려주자 그 분위기가 더 묘했다. 하늘하늘한 얇은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희고 가녀리다. 온객행은 군관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질투가 일어 기껏 공을 들여 묶은 머리를 다시 풀었다. 반으로 나눠 목덜미를 가리고 남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영문을 모르는 주자서는 남이 머리를 만져주는 일에 나른하여 정신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저 저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객행이 막아주어 덜 춥다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진왕이 왜 비단으로 만든 내의를 준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식이 지나 곡우가 지나면 금방 여름이다. 양주는 남쪽에 있어서 청명이 지나면 더운 날도 있었는데 도성은 그보다 북쪽인데다가 계속 강바람이 부는 길을 따라 이동하니 주자서는 추웠다.

진왕은 마차에서 쉬는 동안 한번도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주구전은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마차 안에는 엽백의가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주구전은 옆에 앉아 눈치를 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진왕의 하인들과 공의성에서 만난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를 했다. 조왕은 황제가 본인을 태자 삼지 않은 일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했다. 게다가 진왕에게 누명을 씌운 일에 대해 입조심을 시키지 않았는지 중명원에 있는 하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중명원에서 지내는 동안 주구전이 진왕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그는 가끔 초무관이라는 기루에 가서 채미공자라는 사람의 월금을 들으러 가는 정도였다. 초무관이라는 기루는 그 뒷배에 화산파가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화산파 장문인 우달은 여색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다들 초무관이 그렇고 그런 가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왕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또 다른 일이다.

엽백의가 자세를 바로 하고 한쪽 눈만 힐끔 떠서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황보세가, 개방, 화산파, 종남파…”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 엽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주는 도성에서 머니 엽백의가 그 곳까지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양파가 남궁세가의 지시로 움직였으니 이 일에 남궁세가가 관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양파가 그러했다면 남궁세가와 평소에 관계를 잘 유지하던 문파들은 모두 연루된 것이다.

양주 일대에서 남궁일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는 손에 꼽혔다. 아주 작은 문파라 남궁세가에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 관계하지 않는 사계산장 정도였다. 일이 이렇게 크면 수습하기도 힘들고 하나하나 찾아서 벌하기도 곤란하다. 주구전은 양주를 떠나면서 이 일이 큰일 이기는 하나 분명 피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와서 상황을 겪어보니 그것이 아주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었다. 주구전이 낮게 읊조렸다. “권력과 부귀를 가진 자들은 용처럼 다투고 영웅들은 호랑이처럼 싸운다 하니…”(53) 엽백의가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개미와 파리인 것을…”


진왕 일행은 중간중간에 늑장을 부려 신시(申時)가 거의 다 되어서야 정주성에 도착했다. 정주성 앞에는 병졸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확인했는데 딱히 막지는 않았지만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한 것들을 물었다. 그렇게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묻는 통에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왕의 일행을 이끄는 무관 하나가 말을 달려 정주성 앞으로 가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내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길을 바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 옆으로 길을 내어 정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마차에 드리워진 휘장을 옆으로 치워 밖을 구경했다. 정주성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 중에는 강호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누가 봐도 귀해 보이는 마차가 지나가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말을 타고 있던 무관들이 모두 말을 내려 어디로 인가 사라지고 마차는 사람이 많고 복잡한 길을 피해 평락원(平樂園)에 도착했다. 진왕이 탄 마차가 제일 앞에 멈추었다.

진왕이 내리자 진왕이 타고 있던 마차가 비키고 엽백의가 탄 마차가 문 앞에 멈췄다. 제일 바깥쪽에 앉아 있던 온객행이 마부가 계단을 내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에 주자서가 내리고 뒤따라 내리는 엽백의와 주구전의 손을 잡아 드렸다. 엽백의는 손을 뻗어오는 주자서의 모습을 처음 봤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흥’하고 코웃음 쳤다. 뒤에 내린 주구전은 주자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진왕이 엽백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평락원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손님들이 머무는 객실로 안내를 받은 네 사람은 둥근 탁상에 모여 앉았다. 주구전은 엽백의에게 황제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엽선배께서는 매년 한식 이후에 황제폐하께서 풍년제사를 지내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엽백의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혹여 황제를 만나면 엽백의의 몫까지 눈칫밥을 먹어야 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즈음 평락원이 소란스러워졌다. 주구전은 평락원에서도 하인들의 일을 참견하고 도우며 인심을 샀다.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분주하여 주구전은 주자서도 데리고 나와 이것 저것 일을 돕게 했다. 거추장스럽게 긴 소매를 긴 끈으로 어깨에 걸어 뒤로 고정했다. 귀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이 확실한 무거운 함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 하인들을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교사원에서도 사람을 보냈는지 흰색 옷을 입은 유생과 도사와 함께 섞여 이리저리 움직이니 주구전은 곧 주자서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엽백의는 온객행의 시중을 받으며 객실에 있는 것 같았다. 또 언제 흥이 일어 떠날지 모르는 분이니 주구전은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객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하인을 발견하여 용무를 물으니 천자가 오셨으니 인사를 해야 한다며 객실에 이는 손님들을 외실로 불렀다. 주구전은 입고 있던 옷을 바로 하고 주자서를 찾았다.

저 멀리서 유생들의 짐을 들어 사당으로 옮기는 것을 발견한 주구전이 주자서를 불렀다. “자서야! 자서야 이리 오너라.” 저를 부르는 소리에 유생들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주구전에게 갔다. 주구전은 다가오는 주자서의 뒤에 묶인 끈을 풀어 옷을 정리해 주고 끈은 소매안에 넣었다. 주자서의 등에 손을 올린 주구전이 그를 외실로 이끌면서 말했다. “너는 양주 회계 주가(周家) 종손이다.” 주자서가 주구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실에 들러 엽백의와 온객행을 데리고 주구전은 외실로 향했다.


진왕은 때를 잘 맞췄다고 생각했다. 주가 노인네가 평락원의 하인들을 구워 삶기 전에 부황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왕이 도착하고 한시진이 되기도 전에 황제의 일행이 평락원에 도착했다. 일부러 사람을 써서 시간을 맞춰 도착했기 때문에 진왕은 가져온 짐을 정리하는 척 평락원의 하인이 그를 부를 때까지 괜히 부산을 떨었다.

황제가 정주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진왕은 부러 평락원 대문 앞에 나가 황제를 알현했다. “진왕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진왕의 인사를 시큰둥하게 받은 왕이 손을 들어 진왕을 일으켜 세웠다. 황제의 뒤에 있는 조왕이 진왕에게 말했다. “진왕은 예를 거두시게.” 황제가 내실로 발걸음하자 조왕은 그 뒤를 따르며 진왕을 보았다. 진왕은 머리를 끄덕 하더니 하인들을 시켜 객실에 기별했다.

주구전이 도착하자 내실 옆에 서있던 내관이 그들을 보더니 하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는 내실 안쪽을 향해 말했다. “장명산 검선 엽백의가 천자의 알현을 청합니다.” 주구전은 뒤쪽에 서있는 엽백의의 눈치를 보았다. 엽백의는 내키지 않는 다는 듯이 내실 문 앞으로 가서 섰다. 곧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은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엽백의가 강호식으로 양손을 포권하여 황제를 향해 인사했다. “장명산 엽백의 천자를 뵈어 감격 무지합니다.” 뒤에 서있던 주구전과 주자서 온객행도 양손을 모아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황제도 검선의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엽백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대가 장명산 상선인가?” 엽백의가 손을 내리고 황제를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황제가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을 보자 엽백의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이 자는 저의 손제자 온객행이고, 이쪽에 이 자는 양주에서 온 저의 사제 주구전입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엽백의의 소개에 소매를 들어 깊게 인사했다. 황제는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엽백의를 탁상 쪽으로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황제는 병을 얻어 총기를 잃었다 했지만, 부러 집안의 일을 들춰내어 본인의 체면을 깎는 일은 하지 않았다.

황제는 아무도 관심 없는 날씨나 건강에 대한 일을 이것 저것 묻더니 그제야 주구전을 발견했다는 듯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주구전은 자기 뒤에 서있는 주자서를 한번 흘끔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이 다가가자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진왕이 나서서 말했다. “부황, 이들은 저의 객입니다. 상선께서 황하를 유람하시고자 하여 제가 초대하였습니다.” 진왕의 말을 들은 황제가 ‘흐흠’하고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에 연한 쪽빛 옷을 입고 고개를 살짝 숙인 주자서가 들어왔다.

황제는 엽백의에게 던지던 시선을 멈추고 돌아서서 주자서를 다시 보았다. 황제가 주구전을 지나 주자서 앞으로 가서 섰다. 당황한 주자서는 황제가 가까이 오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는 그런 주자서에게 직접 몸을 굽혀 팔꿈치를 잡아 일으키며 고개를 들라고 말했다. 주자서는 무릎을 꿇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주영의 외숙께서는 그동안 참 많이 늙으신 것 같았다.

황제는 주자서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허…헌아?” 주자서가 일어나자 황제는 주자서의 손을 잡고 그를 헌이라고 불렀다. 주자서는 기억하고 있다. 외조부께서 모친을 불렀던 이름을. 귀한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모친의 이름이다. 주자서가 놀라 황제를 보자 황제는 주자서를 덥석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어찌 할 수 없어 얌전히 황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주자서는 지금 그를 안고 있는 외숙께서 자신의 양친을 해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괜히 들춰서 마음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지만 주자서는 궁금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모친께서 천륜을 끊고자 하셨고, 무슨 일 때문에 양친이 목숨을 잃었는지. 주자서는 화가 났다. 그러다 옆에 서있던 주구전과 눈이 마주쳤다. 주구전은 황제를 측은하게 보고 있었다. 그를 안타깝게 보고 있다. 만인지상 천자인 황제를 불쌍히 보고 있다. 주자서는 잠시 일었던 원망이 수그러들었다. 황제는 주자서를 붙들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보이며 경무장공주의 아휘를 불렀다.

조왕은 눈치껏 방에 있던 하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내관이 방문을 닫았고 엽백의와 온객행은 영문을 몰라 황제가 주자서를 붙잡고 우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한참 울다 조금 진정이 되자 몸을 떼고 주자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헌이…. 헌아…. 이 오래비가 너를 많이 그리워하였다.” 주자서는 몸 둘 바를 몰라 황제가 하는 대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황제는 주자서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또 덥석 끌어안았다.

주자서는 주구전이 황산은장에서 이름을 찾겠냐고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막상 외숙부를 보니 화가 났지만 원망이 수그러든 시점에서 다시는 황제를 보고싶지 않았다. 군신과 신하만 있고 부모와 자식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매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사는 것이 당장 목숨을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 좋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주영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저기서 황제를 측은하게 보고 있는 조부와 다시 사계산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계산장 식구들이 그리웠다. 사계산장에 있는 동안 주자서는 단 한번도 낙양성의 종친을 그리워 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가 주자서를 놔주자 조왕과 진왕이 와서 주자서를 소개했다. “부황, 이 아이는 고모님이 아닙니다. 주대인의 종손 주자서에요.” 진왕이 황제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자 황제는 주자서에게 손짓하여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주자서는 조왕과 진왕의 눈치를 보다가 황제 옆에 서있던 조왕이 자리를 비켜주자 황제 곁에 다가가 섰다. “헌이가 아니란 말이냐?” 주자서는 황제 앞에 무릎 꿇고 공수하여 인사한후 말했다. “양주 회계 주가 종손 자서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하는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제 이름을 찾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였는데, 주자서는 다행이 마음을 먹은 듯했다. 양친 얘기만 나오면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지는 순한 주자서는 없고, 사계산장에서 수련할 때 보이는 단호하고 냉정한 주자서만 있었다. 황제는 주자서에게 양친에 대해 물었다. 주자서의 거침없는 대답에 정신이 들었는지, 황제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진왕이 주는 차를 마셨다.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피곤하다며 모두를 물렸다. 엽백의와 주구전이 다시 인사를 하고 주자서가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자 황제가 주자서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양쪽에 서있는 조왕과 진왕을 역시 물러가라 말했다.

둘만 남은 평락원 내실에서 황제는 한참동안 차를 마셨다. 무릎을 꿇은 채로 황제 앞에 있던 주자서는 슬슬 다리가 저려 왔다. 주자서의 불편한 기색을 읽은 황제가 주자서에게 물었다. “양주에서 왔다고?” 주자서가 답했다. “예 폐하.” 황제는 몸을 숙여 주자서를 가까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황제가 물었다 주자서는 조부께서 진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지학이라고 말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황제가 주자서의 생 연월일시를 물어왔다. 주자서는 당장 생각나는 것이 없어 온객행의 사주에서 연만 바꾸어 황제에게 답했다. 숨기는 기색 없이 답하는 주자서를 본 황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영이가 살아 있었다면 너와 나이가 비슷했겠구나…” 황제의 한탄에 주자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황제는 주자서를 떠보는 이야기를 하다가 경무장공주와 닮은 얼굴로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가여워 밖에 있는 내관을 불러 주자서를 배웅하게 했다. 주자서는 절뚝거리며 일어나 공수하여 인사한 뒤에 내실에서 나왔다. 내실 밖에는 진왕과 조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자서가 나오자 그들은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는 자신을 객실로 데려가는 내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따라 걸었다. 혹시 잘못하여 한숨이 나올까 싶어 숨소리를 조용히 하였더니 길을 가던 내관이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그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객실에 들어온 엽백의는 말없이 주구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구전은 마치 그런 시선이 항상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앉아 차를 마실 물을 끓였다. 온객행이 일어나 주구전의 시중을 들자 엽백의가 입을 열었다. “온가 네 놈이 아주 귀한 집 자식을 마음에 둔 듯하구나.” 엽백의의 말에 주구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온객행이 차주전자에 데운 물을 채우며 말했다. “노야, 내가 왜 온가요. 나는 주가에 시집갔으니 주가요.” 그 말에 주구전이 마시던 찻물을 뱉으며 사레가 들렸다.

엽백의가 웃으며 물었다. “네가 시집을 갔단 말이냐? 나는 사주단자를 받은 일이 없는데?” 그러자 온객행이 사레가 든 주구전의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사주는 저희 내외가 알아서 잘 교환하였고 예단도 했고 맞절도 했으니 이제 초야만 치르면 됩니다.” 그 말에 주구전이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을 보았다. ‘이놈이?’ 주구전의 표정을 보고도 해사하게 웃으며 온객행이 말했다. “이제 시조부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시조부.” 온객행의 말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주구전은 가슴을 쳤다.

주자서가 내관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들어왔다. 객실 안에는 실실 웃으며 주구전의 시중을 드는 온객행과 가슴을 치며 온객행의 시중을 거절하는 주구전, 그리고 그 둘을 보며 ‘하하하’웃고 있는 엽백의가 그를 반겼다. 내관이 자리를 뜨자 엽백의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천하에는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두가지 있으니 하나는 천륜이고 다른 하나는 인륜이다. 주가 네놈이 내 손제자와 인륜을 맺었으니…”(54)

주자서가 답지 않게 엽백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어르신 아닙니다.” 주자서가 혼인을 부정하는 말을 하자 주구전의 시중을 들던 온객행이 말했다. “서방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러기는 필요 없다니까?” 주자서가 당황하여 입만 벙긋 거리자 주구전이 온객행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게 지금 기러기의 문제냐!!” 엽백의는 주구전의 노기를 띈 목소리를 듣고도 ‘하하하’웃었다. 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하인들만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였다.

(53) 채근담 후집 72
權貴龍驤 英雄虎戰 以冷眼視之 如蟻聚羶 如蠅競血.
권세가들은 용처럼 다투고 영웅들은 범처럼 싸우나, 냉정한 눈으로 이를 보면 마치 개미가 비린 것에 모여들고 파리가 다투어 피를 빠는 것과 다름이 없다.

(54) 장자 내편 4인간세
天下 有大戒二 其一命也 其一義也
천하에는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천명이고 또 하나는 의리(인간사회의 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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