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장명산 검선의 입에서 제령이 언급되었으니 다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혼란한 시기가 지나 명맥이 끊어진 문파는 어쩔 수 없어도 그나마 남아 있던 문파는 남은 제자들을 추슬러 문파를 그럭저럭 꾸려갔다. 혼란한 시기인 만큼 사파도 정파도 모두 조용히 그저 먹고 살 걱정만 하면 되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동안 다들 자기 앞가림 하느라 바빴던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호가 관가와 엮이는 것은 그 저의가 무엇이던 바닥에는 탐욕이 깔려 있다.
태보는 시끄럽게 무관까지 대동하여 등장한 것 치고는 조용히 앉아 이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傲崍子)와 개방의 분타주 황학(黃鶴)이 과거의 연원을 끄집어내어 논지를 흐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사소한 원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옛말에 큰 원망은 화해해도 남는 미움이 있다했다.(15) 그나마 개방과 태산파는 통일을 이룩한 나라의 국민이었으니 이렇게 목소리 높여 싸울 수라도 있다. 망한 나라의 전란에 스러져간 문파들은 이미 가고 없는데 저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 질까?
오래자와 황학이 떠드는 소리에 주지 여운이 그 둘을 중재한다고 소란스럽다. 정작 제령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검선은 그들의 기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주구전은 검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꼭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눈치 챘다. 오래자와 황학의 찻잔에 들은 찻물 같은 기세가 어찌 흐르는 강의 기세를 꺾겠는가? 검선은 그 둘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장을 떠나버렸다. 주구전이 검선을 잡으려고 일어났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만 샀다. 어디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일어나셨으니 사람들은 괜히 주구전을 쳐다봤다.
검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나 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논의라고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주구전은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회장을 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와 화산파의 장문 우달(于達)은 어떻게 아는 사이이길래 저렇게 붙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곤륜파(崑崙派)와 공동파(崆峒派)는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이는 지금 이 소란이 정말 온전히 강호의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소림사의 회주는 태보 강상과 단양파의 장문 육해방(陸奚方)과 함께 단상위에 남아 있었고, 주구전이 않아 있는 동쪽자리에는 개방장로 여장(呂孜)과 해백(海伯)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개방의 본거지인 기주(冀州)가 아니라 낙양이 있는 사례(司隷)지역 출신이라 지금 개방 장주와는 관계가 소원한 자들이다. 방주가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의로 왔는지 아니면 주지 여운이 초대한 것인지 주구전은 괜히 궁금했다.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처소로 돌아가려고 산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데 여운이 그를 불러 세웠다. “주대인 잠시 기다리시지요.” 주구전은 주지 옆에 서서 회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볼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지 여운은 태보 강상과 태보가 데려온 무관, 단양파 장문 육해방, 그리고 주구전을 데리고 방장실로 향했다. 회주들이 단상에 남아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개방 장로들도 회주들과 할 이야기가 있는지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다. 방장실로 가는 길은 매우 조용했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구전이 마지막으로 방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주지는 방장실의 문을 닫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았다. 무관은 끝내 자리를 사양하고 들어오는 문 입구에 가서 섰다.
자리에 앉은 여운이 운을 뗐다. “아무래도 무림맹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육해방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희야 일개 작은 문파일뿐인데 어디 감히 무림맹의 일원이겠습니까?” 주구전은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앉게 됐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태보가 입을 열었다. “부군은 안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처는 바깥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16) 주지의 얼굴색이 평온 한 것을 보아 소림사 중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인가보다. 뜻을 몰라 헤매는 것은 육해방 혼자다.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있자 육해방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보 강상이 그를 흘끔 보더니 주지에게 물었다. “이자는 알고 있습니까?” 주지가 답했다. “지금부터 물으시지요.” 육해방은 당황하여 무릎 꿇으며 말했다. “이 육모는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태보는 차근차근 단양파 내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의 이야기도 나왔고 사계산장의 이야기도 나왔다. 사계산장은 예전부터 구주의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그들이 황실에서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은근하게 떠보기 위함이다. 다행인 것은 요 몇 년 사계산장은 정말 먹고 살기 바빠서 관과의 연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단양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관가의 일을 하거나 관리의 호송 호위 등을 하며 그나마 나은 살림을 꾸려왔는데, 자주 관에 들락날락 했으니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태보는 단양파가 자주 호위하였던 관리들과 낙양성에 머물 때 지냈던 곳 같은 것들을 물었다. 그러다 태보가 서선공의 이야기를 물었다. “사계산장은 예전에 서선공이 유학하던 곳이 아닙니까?” 주구전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왕래한지 오래 되었는데 왜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주구전을 보더니 말했다. “황후와 강호가 연을 맺게 된 것이 서선공 덕분 아닙니까?” 주구전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것은 서선공께 물어야지 어찌하여 이 주모에게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콧방귀를 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지가 태보의 눈치를 보며 서국공의 비보를 전했다. 주구전은 서국공의 비극을 알았지만, 그가 충심을 다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은 몰랐다. 그의 부인인 장공주 역시 곧 그를 따라가는 바람에 함께 국장을 치러 줬다고 하는데 어째 주구전이 진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주자서는 결국 장경각에서 서간을 한 책도 읽지 못하고 온객행의 등에 업혀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지객당 안에는 검선이 앉아서 좌선하고 있었는데 온객행을 보고 의아 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누구 시중도 드는구나.”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검선에게 말했다. “노야 아서가 아픈 것 같으니 맥이라도 짚어봐.” 온객행을 쳐다보던 검선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하’ 하고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누운 침상으로 갔다. 주자서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본 검선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디 무산(巫山)이라도 다녀온 거냐?”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와 맥을 짚었다. 온객행은 검선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무산은 앞으로 가야지 구름도 되었다 비도 되었다.”
검선은 주자서의 손목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앞섶을 풀어 해쳤다. 온객행이 놀라 검선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아니 무산은 내가 아서랑 가야지 노야가 왜 이래? 노야도 소매를 자르려구?” 검선은 온객행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열이 오르니 식혀 주어야지!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서 시중은 내가 들 테니 노야는 가서 그 밥통이나 채우고 오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검선은 한껏 찡그린 얼굴로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의 중의를 마저 벗기던 온객행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선을 보며 말했다. “내 아무리 염치없는 사람이라도 어찌 아픈 사람을 상대로…!” 검선은 온객행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혀를 ‘쯧’ 하고 차며 방을 나가버렸다. 온객행은 벗긴 주자서의 옷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내의만 입은 그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아서… 아서라… 그래 아서라고 불러야지. 우리 아서.” 그리고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참 얼굴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찡그려진 표정을 본 온객행이 부산을 떨며 주자서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작은 물동이에 물을 받아 품속에 있던 영견에 물을 적셔 빨갛게 열로 익은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열이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주자서는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슴아슴한 꿈속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났던 것도 같은데 얼굴이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부르려고 하다가 지금 있는 곳이 사계산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입이 그를 멈추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주자서는 누군가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모친… 모친…” 사계산장에 온 이후로 주자서는 크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양주의 날씨는 온화했고, 주자서는 매일 수련하고 일하며 자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앓았던 것은 경무장공주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사계산장에 왔을 때이다. 이유도 없이 달포를 앓았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전에 또 언제 아팠더라…?’ 생각하니 괜히 낙양성에서 살 때가 떠올라 서러워졌다. 곧 몸을 닦고 있던 차가운 물수건이 주자서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이미 울고 있었나 보다. 마음에 울컥 슬픔이 차오른다. 주자서는 괜히 응석이 부리고 싶어 얼굴을 닦는 물수건에 얼굴을 비볐다. ‘내 얼굴을 닦아주는 이 손길이 모친이었으면 좋겠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태보는 평원군의 이야기까지 꺼내 가며 육해방을 들들 볶았다.(17) 섬뜩해진 주구전은 주지의 눈치를 보았다. 주지가 그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육장문을 감싸며 말했다. “탐욕과 성냄은 세상의 병이요, 어리석음과 무지는 화의 문이라 하였소. 탐욕의 독은 몸을 망치고, 친족을 망하게 하는데, 어찌 그것이 거기에 그치겠습니까?”(18) 육해방은 덜덜 떨면서 시시콜콜 단양파의 내부 사정에 대해 털어 놓았다. 단양파가 관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궁세가의 입김 덕분이었다. 주구전은 아까 회장을 나가며 대화하던 남궁세가 소각주 남궁하와 화산파 장문 우달이 떠올랐다. 형주(荊州)와 예주(豫州)도 아닌 옹주(雍州)의 화산파 우달이라니 ‘아주 의심을 사러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주구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태보는 주구전에게 남궁세가에 대해 물었다. 남궁세가는 양주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혈족으로 이루어진 문파이다. 양주와 예주, 서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황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황산부터 포양호까지는 관에서도 남궁세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세가 큰 명문이다. 몇 차례 군신을 배출하여 관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 양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종종 작은 문파들과 소란이 있었지만 세가 많이 줄어든 사계산장은 꼭 필요한 일은 돕고 의심스러운 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단양파나 태호파 같은 양주에 있는 작은 문파들이 남궁세가의 기세를 얻어 낙양성을 오가며 다른 문파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보 강상은 무림맹의 존재를 떠보기 위해 부러 숭산 논의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곳에 온 것이다. 그는 태보가 되기 전 오랫동안 강호에서 사인(士人)으로 머물렀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을 테니, 황제는 태보를 보내 무림맹을 조사하게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구전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무림맹과 사계산장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존재하던 무당파, 곤륜파, 아미파(峨嵋派) 그리고 소림사가 주도하여 만들었던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던 크고 작은 문파들 중 과연 오늘까지 남은 문파는 몇이나 될까?
사계산장은 애초에 그렇게 대놓고 일을 벌이는 일에는 항상 조심스러운 문파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들 말하지 못하는 이 무림맹은 흔히 강호에서 중요시하는 의나 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뒤에서 덮어 몰래 만들게 아니라 모두에게 떠벌려 명성을 쫓았을 테니. 다들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개방의 장로 여장과 해백이 들어왔다. 주지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해백은 자리에 앉자 마자 말했다. “거지들이야 잘 빌어먹고 얼어 죽지나 않으면 그만인데, 언제부터 부귀와 영화를 탐하게 되었는지….”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러다 푸른 하늘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하늘이 일어나야 된다는 소리 나올까 무섭습니다.”(19) 태보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주지가 여장에게 말했다. “여기 태보께서 계시는데 말 좀 가려서 하게.” 그러자 벌벌 떨고 있던 육해방이 또 입을 열었다. “개방! 개방도 종종 저희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단양파는 사람도 적고 작으니 큰 일을 단독으로 할 수 없으면 남궁세가나 개방에서 사람을 빌려 일했습니다.” 그 말에 태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 말할 수 없는 무림맹은 과거의 무림맹보다 더 크고 가담한 세력이 많은 것 같다.
밤이 다 늦어서야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구전은 매우 피곤했다. 정말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든 것 같다. 태보 강상만 오지 않았다면 여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장 양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구전이 지객당 안으로 들어오자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가 보였다. 주구전이 놀라 그에게 다가가자 옆에 앉아 있던 온객행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주대인, 아서가 요 며칠 밤이슬에 잠을 이루지 못해 병이 난 듯합니다.” 주구전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온객행을 흘끔 봤다. 옥같이 잘생긴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다.
어처구니없어진 주구전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 손목의 맥을 짚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미열이 있었다. 주구전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아이참! 주대인 이미 약도 먹이고 열도 많이 떨어 졌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는 자기가 앉아 있던 침상 앞 의자에 주구전을 앉혔다. 온객행은 “요기는 하셨습니까?”라고 살갑게 물으며 그에게 만두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주구전은 갑자기 허기가 일어 만두를 하나 집어먹었다. “절간의 밥이라 맛이 덜하지만 급한 허기는 가시겠지요. 나중에 낙양성에 가서 그 모란연채라는 것을 먹으러 갑시다.”
주구전은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온객행이 어색했지만 자리를 비운동안 주자서를 돌 봐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온객행이 하는 데로 그냥 두었다. 만두를 하나 더 집어먹고 주구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선께서는 어디 가셨는가?” 온객행은 주자서가 누운 침상에 걸터앉아 그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노인네 망령은 고기로 고친다고 하니 어디서 밥통을 채우고 계시겠죠.” 불경한 온객행 소리에 주구전은 헛웃음만 나왔다. 간단히 관수(盥漱; 세수하고 양치질함)하고 침상에 올랐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침상을 봐주는 이가 없어 쓸쓸했다. 태보가 아직 소림사에 머물고 있으니 주구전은 떠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숭산에 묶여 있을지, 이 숭산 논의라는 촌극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한숨만 나온다.
다음날 어느때보다 일찍 일어난 주구전은 가져온 짐꾸러미에서 영견 하나와 지필묵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사계산장에 알려 두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계산장에서만 사용하는 짧은 암호문과 여정이 길어질 것 같다는 내용을 섞어 썼다. 진회장이 설마 사람을 보내지는 않겠지만 걱정할 것 같아 작은 영견에 깨알 같은 글씨를 모아 적었다. 점심을 가지러 가는 길에 산문에 보초를 서고 있는 승려에게 부탁하여 서신을 전하고 점심 찬합을 들고 다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주구전이 먼저 일어나 부산을 떨어도 깨지 않고 사시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찬합을 탁상위에 올려놓은 주구전이 주자서가 누운 침상 쪽으로 가서 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자서야 일어나 보거라.” 주구전의 부름에 눈을 파르르 떨더니 곧 눈을 뜬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주구전에게 공수했다. “태부!” 주자서의 목소리에 주구전이 괜히 탁상위에 찬합에서 점심을 꺼내고 있던 온객행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 그래, 자서야 이제 괜찮으냐?” 주자서는 횡설수설하다가 주구전이 이끄는 데로 탁상 앞에 앉아서 첫 끼니를 먹었다.
온객행이 그 옆에 앉아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놓아주며 부산을 떨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참 눈치를 보던 온객행이 주구전의 밥그릇에도 찬을 올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후 주구전은 온객행에게 찬합을 주방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둘만 남은 지객당에서 주구전은 먹은 음식을 정리하고 관수(盥漱)를 마친 주자서를 앞에 두고 말했다. “아무래도 얼마나 여기서 더 머물게 될지 모르겠구나. 우리야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일이지만, 또 남이 보기엔 다를 수 있으니…”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방장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한참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바람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구나.”(20) 주구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탁상 앞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둘이 앉아 있었다.
심아스님과 온객행이 같이 들어왔다. 온객행은 들어오자 마자 침울한 주자서의 표정을 눈치채고 쪼르르 옆으로 가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찌하여 우리 아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아서의 마음잡을까요? 아서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21) 온객행의 호칭에 주자서는 한동안 눈만 깜빡이며 온객행을 쳐다봤다. 온객행은 신이 나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서 또 흰소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지객당 안으로 장명산 검선이 들어오며 말했다. “어린애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 하니, 저 놈 헛소리는 때리는 것 말고 방법이 없네.” 하며 온객행을 주자서에게 떼어 놓더니 머리를 때렸다.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심아를 방패삼아 말했다. “이 노야가 굶어서 노망이 났나!” 심아는 한동안 검선과 온객행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무시하듯 주구전에게 공손히 말했다. “주대인, 주지스님께서 찾으십니다.” 주구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 못하니 몸을 보양하고 있거라.” 주자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구전과 심아가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주구전이 검선 쪽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엽선배께서도 가시지요.” 검선은 온객행을 나무라는 일을 멈추고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더니 밖으로 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래, 가지.” 그렇게 심아와 함께 주구전과 검선이 나가자 지객당에는 주자서와 온객행만 남아 있다. 주자서는 문간에 서서 한참 주구전이 양심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서 있었다. 온객행이 언제 다가왔는지 주자서의 등뒤에 바짝 붙어 서서 주자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묻지 않았는데 부러 말씀하셨다는 것은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양친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자서가 사계산장에 입문한 이후로 그 누구 와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고 하기 보다 하지 못했다. 낙양을 떠나는 그날 주자서가 기억하는 것은 주영의 손을 모질게 뿌리치는 경무장공주의 모습 뿐이다. 지금 주자서는 알고 있지만, 그날 낙양을 떠나오던 날 밤, 아직 어렸던 주자서는 그저 원망스러웠다. 본인을 떠나보내는 모친도, 자신을 안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사부님도.
그 원망은 머리가 커갈수록 죄책감이 됐고,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그리움만 더했다. 낙양성 근처로 자신을 보낸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었고, 이제 주자서는 주영이라는 천자가 주신 고귀한 이름보다 주자서라는 이름으로 산 세월이 더 길었다. 숭산으로 오는 길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 제령이라는 것은 강호가 천자의 일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숭산 회의에는 어쩌면 강호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여 왔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서 온객행을 봤다. 온객행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기만 할 뿐이다. “아서. 아까 주대인을 태부라고 부르던데, 아서도 무공을 배웠어?”라고 말하며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더듬었다. 팔뚝을 지나 등이며 허리를 쓸어 내리자 마치 두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치며 말했다. “말로 물으시오. 좀 떨어지는 것이 좋겠소.” 그전만큼 세게 밀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침을 먹으면서 종조부께서 어제의 일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장경각에서 지객당까지 꽤 거리가 있었는데 그 길을 주자서를 업고 왔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찌 물으시오?” 주자서가 탁상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온객행도 쪼르르 주자서를 따라 탁상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이 온모 또한 무공에 힘썼으니 그대와 겨루어 보고 싶어서 그러오.” 주자서는 생각했다. 만약 그가 종조부의 제자라면 사계산장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직 주자서는 이 온객행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종조부께서는 사인(士人)으로써 내 스승이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흐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짐꾸러미에 있는 호복은 누구 옷이오?” 주자서가 놀란 듯 온객행과 짐꾸러미를 번갈아 보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그대의 옷을 벗기고 입힌 것이 누구인지 잊었소? 그대가 탕약을 넘기지 못해 내가 입으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자서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하하하’ 크게 웃었다. “별일 없었으니 마음 놓으시게! 내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정신이 없는 사람을 희롱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오.”
주자서는 내심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들추시려는 것인가도 생각했다. 사부님이 들추시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어쩔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그 일에 대해 캐고자 하려는 것이다.
(15) 도덕경 79장
큰 원망을 풀어주더라도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으니, 어찌 가히 선하다 하겠는가?
(16) 예기 내칙 禮記‧內則
남자는 안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17) 사기 평원군열전: 평원군은 진나라의 장군 백기를 말한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으로 한나라가 수세에 몰리자 조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나라를 주고 보호를 부탁하였다. 조나라왕은 한나라의 땅이 탐나 한나라를 도왔는데, 이후 진나라가 군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르 멸망시켰다는 이야기. 여기서 조나라의 대신 평양군 조표가 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득을 보면 재앙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익에 어두워 형세를 읽지 못하고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망한다.
(18) 법구경 애욕품 18
탐욕이란 망하는 법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해치니, 사랑하는 탐욕의 마음은 밭이 되고 음욕, 성냄, 어리석음은 종자가 된다.
(19) 나관중 삼국연의 황건적의 슬로건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20)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21) 시경 패풍 日月 해와 달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옛날과는 다르게 차가울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아버님 어머님 그이는 나와 살지 않겠다 하네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게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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