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霖鈴 第11

11. 憶昔當年
오래 전에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다.

주자서가 혼절하는 것을 본 주구전은 얼른 침상으로 가서 부러 큰소리로 부산을 떨었다. 주구전은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와 맥을 짚으며 찬바람을 맞아 중병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니 어서 의원에 가봐야겠다며 주자서를 일으켰다. 온객행이 눈치껏 주자서를 엎으려고 다가갔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방금 신겨준 척을 하며 봇짐을 찾았다.

조왕이 온객행을 막으며 말했다. “멈추시게. 내가 의원을 불러 주겠네.” 하고 하인을 보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업은 채로 서서 주구전의 눈치를 봤다. 주구전은 더 이상 황자 전하께 폐를 끼칠 수 없다며 극구 사양하였지만 진왕이 거들었다. “조왕께서 부르신 의원을 헛걸음하게 할 수 없으니 일단 진맥이라도 해보시게.” 그 말에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침상위에 올려 놓았다. 신발을 벗겨서 몸을 침상위에 눕히자 얼마 안 있어 의원이 들어왔다. 괜히 주구전만 아쉬워서 옆에 서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조왕은 주구전에게 주자서를 잘 보살피라 말한 뒤 진왕과 방을 나갔다. 의원이 주자서의 맥을 짚고 한참 생각하더니 머리를 갸우뚱하며 주구전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주구전은 괜히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같은 말을 하며 의원의 눈치를 보았다. 의원은 놀라서 기혈이 상했고 조금 지쳐 있는 것 같다는 흔한 진단을 하고는 그에 맞는 흔한 재료가 적힌 처방전을 주고 방을 나갔다.

의원이 나간 방문을 닫기 전 주구전은 내원에서 조왕과 진왕이 주자서가 있는 처소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주구전은 주자서의 부모 중에 주희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자서가 모친인 경무장공주를 닮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벌써 셋이 그렇다고 말하니 주구전은 경무장공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눈치를 채는 것은 아닌가 겁이 났다.


주자서는 그날 서국공의 저택에 있었다. 오랜만에 도성으로 돌아오신 부친은 급하게 모친을 찾았다. 두 분이 내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아이는 오늘 저녁은 양친과 함께 먹겠구나 싶어서 조금 신이 났다. 내원에 앉아 모친이 주석을 달아 놓은 서책을 읽었다. 아직 글자와 뜻을 연결하지 못해 읽는 것이 더딘 아이는 서책에 정신이 팔려 그날 다른 날과 다르게 집안이 어수선한 것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하인이 아이를 데리고 내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아이의 당숙과 숙부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이 기꺼워 아이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평소라면 밝게 그를 맞이했을 숙부와 당숙의 얼굴이 어둡다. 무거운 기척을 느낀 아이는 모친을 찾았다. 내실의 어른들은 말없이 앉아 한숨만 쉬었다.

경무장공주는 아들을 부군에게 맡기고 내실을 나갔다. 아이를 안아 든 서국공이 입을 열었다. “아직 모를 일이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면 되네.” 당숙이 말했다. “형님은 그가 어떻게 천자에 자리에 앉았는지 잊으셨습니까?” 숙부가 당숙을 말리며 말했다. “일이 커질 수 있다. 입조심해라.” 어른들은 또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무장공주가 친히 찬합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찬합을 내려 놓자 서국공은 아들을 내려 놓고 직접 차를 끓였다. 경무장공주가 말했다. “사람이 정결하면 욕보이기 쉽고, 스스로를 아끼는 자는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며, 남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못할 짓을 한다 했습니다. 상대가 간사하고 악독하니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47) 당숙과 숙부는 그 말을 듣고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방을 나갔다.

장공주가 아이에게 음식을 주고 옆에 앉아 서국공에게 말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례하고 모두 내보내었습니다.” 서국공은 장공주에게 차를 따른 잔을 내밀었다. 장공주는 찻잔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곧 잔을 비웠다. 밥을 다 먹은 아이가 부친에게 물었다. “부친! 아버님께서는 이 서책에서 어떤 구절이 제일 좋으십니까?” 서국공은 아이가 들고 있던 책을 보았다. 스러져간 옛 역사의 관련된 책이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말로 수식하지 않으며 논의로 누를 끼치지 않고 어진자는 남과의 사귐을 가볍게 끊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남의 공을 버리지 않는다.”(48) 아이는 책을 뒤지며 책에 없는 내용이라고 투정했다. 서국공은 허허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공주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영이는…” 서국공이 말했다. “기별해 놓았으니 곧 올 것입니다. 일이 벌어 지기 전에 와야 할 텐데요.” 그리고는 사람 좋게 ‘허허허’하고 웃었다.

그날 밤 서국공의 저택에 군부가 들이 닥쳤다. 장공주는 시기 좋게 사람들을 잘 내보내었다고 생각하며 금위군에게 호송되어 나가는 서국공을 보았다. 서국공은 집 밖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뒤돌아 경무장공주를 보았다. 장공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외실 밖에 돌처럼 서서 나가는 서국공을 보았다. 아이가 놀라 부친을 따라가며 울자 금위군 하나가 거칠게 아이를 떼어 냈다. 장공주가 계단을 내려와 서자 아이가 모친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었다.

장공주가 방금 거친 손속으로 아이를 떼어낸 금위군을 쏘아보았다. 집 밖에 서있던 금위군의 대장군 범무구가 교지를 들고 들어왔다. “장공주는 황제의 명을 받으시오.” 장공주는 금족령을 받고도 말했다. “황제의 자애함에 망극 하나이다.” 그리고 금위군이 나가면서 문을 닫고 그 틈에 종이를 붙여 서국공의 저택을 봉하였다. 장공주는 외실 밖에 서서 닫히는 문을 보았다. 문이 닫히자 장공주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교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치마를 붙들고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외실 안으로 들어갔다.

장공주는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서국공이 끓인 차가 아직 남아 있어 새로운 잔에 차를 따라 아이에게 주고 자신도 차를 마셨다. 아이가 장공주의 눈치를 보며 훌쩍였다. “어머니, 부친께서는…?” 장공주가 아이의 말을 끊었다. “걱정할 것 없다, 부친의 일이니 네 부친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평소와 달리 달래주지 않는 모친이 원망스러워 아이는 입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래도 모친의 침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어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장공주가 말했다. “영아. 몸을 잊고 총명을 버려라.(49) 무위에 머무르면 사사로운 부모자식의 관계도 덧없다.” 이제 막 울음을 그친 아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모친…?” 장공주가 말했다. “어버이의 죄는 자식의 죄이니, 나는 혈육의 정을 끊고자 한다.”

장공주의 말에 아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모친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울었다. “모친 왜 그러십니까? 부친은 왜 고초를 겪으십니까? 모친… 소자는 모르겠습니다. 모친께서 알려주세요. 흑흑” 장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어서 이 어미에게 약속하세요. 유교의 덕으로 살지 않겠다고.” 아이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는 아이를 안아 주었다.

모친의 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부드러운 비단천이 아이의 뺨을 간질였다. 밖에서 나는 작은 인기척에 장공주가 일어나 아이를 뒤쪽으로 숨기며 말했다. “누구냐!” 창호문이 살짝 열렸다 닫히고 검은 옷에 복면을 쓴 남자가 장공주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사계산장 장문 진회장 경무장공주를 뵈옵니다.” 그리고는 복면을 벗었다. 장공주가 운을 띄웠다. “사계절 꽃이 만발하는 곳에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진회장이 답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에서 왔습니다.” 장공주는 마음이 놓였다. 서국공은 오래도록 사계산장과의 관계를 소원이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일을 염두해두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장공주는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어서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었다. “사부께 인사 올리거라.” 정신이 없는 아이는 모친의 말을 듣지 않으면 혹여 자신을 버릴까 그 말을 듣자 마자 들어온 남자에게 바닥에 머리를 붙여 절했다. 아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장공주의 입에서 모진 소리가 나왔다. “이 아이는 이제 이름이 없소. 주씨도 사마씨도 아니오.” 절을 하던 아이의 머리가 번쩍 들려 장공주를 보았다. 

장공주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안색이 바뀌지 않았다. 아이는 다시 모친의 치마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장공주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모질게 아이를 떼어내고 말했다. “가시오. 내 아들 주영은 오늘 우물에 빠져 죽었소.” 장공주의 단호한 태도에 무릎걸음으로 그녀를 쫓는 아이가 들려 나간다. 아이는 소리를 내서 울다가 곧 입을 막고 외실에 홀로 남은 모친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친의 눈은 눈물이 차서 반질반질 했던 것도 같다.


주자서는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는데, 눈가가 붉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주구전은 침상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었다. 주구전은 뭘 더 묻기도 전에 조왕을 보자마자 알아 버렸다. 무림과 관계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것은 조왕 사마륜이다. 그의 눈빛은 분노하지 않았는데도 노기를 띄었다. 평소 조왕과 가까이하는 주변 인물들을 정리하면 정확하게 누가 어떻게 관에 관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왕과 조왕이 주자서를 두고 꿍꿍이가 있는 듯하니 주구전은 일단 앉아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줄 요량이었다.

그러다 문득 온객행을 보았다. 엽백의의 제자라는 이 소년은 온씨라고 했다. 주구전이 알고 있는 온씨는 많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온씨 중에 그를 닮은 이가 있다. “온공자. 부모님께서는 온공자가 이리 낙양에 머무는 것을 알고 있소?” 온객행이 울상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고 있다. 그는 주구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오.” 주구전은 멋쩍어서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온공자가 온씨라 하여 기억나는 이가 있는데 혹 아는지 들어 보겠소?” 온객행은 대답하지 않고 주자서의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익주 청성곡에 의술이 밝은 자들이 기거하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의 마지막 곡주가 내 기억으로 견…견…” 주구전은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청성곡은 견곡주가 의술이 뛰어난 자들을 문하로 받아 만든 작은 집성촌이었다. 마음이 좋은 견곡주는 돈이 없어도 도리로 사람들을 고치는 일을 하여 무림에서는 그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년전에 물난리가 크게 일어 전염병으로 청성곡의 대다수가 죽었다 들었다.

전염병인지라 강호에 있던 사람들도 손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온객행은 주구전의 말을 듣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갔다. 주구전은 나중에 검선에게 더 자세한 일을 물어야겠다 하고 생각한 뒤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본디 이미 적고 그가 맡은 일은 매우 많으니 어찌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어 일을 고사하고 싶어도 이미 발을 뺄 수 없으니...” (39) 주자서가 작게 모친을 불렀다. 주구전은 혹여 들은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자서는 또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언제인가 와 본 것 같은 곳이다. 서당인지 경을 읽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커다란 대전 앞에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잡힌 손을 보니 푸른색 비단옷을 입은 기왕(紀王) 사마영(司馬潁)이다. 기왕은 주자서가 계단을 오르는 것이 귀여운지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영이는 계단도 잘 오르는 구나.” 기우뚱 아이의 몸이 기울자 기왕이 뒤에서 아이를 받으며 안아 주며 웃었다.

계단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진왕(晉王) 사마연(司馬連)이 계단을 내려와 기왕에게 말했다. “누가 보면 네가 낳은 자식인 줄 알겠구나.” 그 말을 들은 기왕이 활짝 웃으며 주자서에게 물었다. “영아 우리 아들 할까?” 아이는 기왕품에 안겨 머리를 도리질하며 말했다. “형님!” 그러자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천자께서 손황자로 만들어 주겠다 하시거든 그렇게 고개를 흔들며 싫다 하거라.” 기왕의 표정이 굳었다. 주영은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위에 계단을 아직 내려오지 않은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보라색 옷을 입었다. 그들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서당에서 편전에서 조왕과 진왕을 자주 보았지만, 그들은 아이를 보기만 했다. 틀려도 고쳐주지 않았고, 맞아도 칭찬해주지 않았다. 아직 그런 눈치를 볼 줄 몰랐던 아이는 그냥 그러 한가보다 했다. 그들 말고도 아이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차고 넘쳤으니. 아이는 기왕과 함께 화림원을 거닐거나 양안전에서 황후의 예쁨을 받았다. 아니면 모친과 함께 외조부께 방문했던 것 같다.

커다란 선실전에 들어가면 외조부께서는 항상 밝은 색 중의 차림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탁상 앞에 앉아 글을 읽었다. 죽간도 있었고 서간도 있었고, 비단으로 만든 책도 있었다. 아이가 오면 보던 책을 멀리 치워 두고 번쩍 들어 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서 모과 절임을 꺼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모과 절임에서는 생강냄새가 났다.

최근에 먹었던 모과 절임은 향긋하고 그 끝 맛도 쌉사름하니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자서의 입에도 잘 맞았다. 괜히 아쉬워 입맛을 다시자 온객행이 나타나 주자서의 입 앞으로 모과 절임을 가지고 왔다.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서 그대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 그리고는 모과 절임을 입안으로 넣어 주었다.

그 모과 절임은 쓴맛 하나 없이 입안의 혀가 다 녹을 만큼 달기만 했다. 주자서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온객행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제야 주자서는 이것이 꿈인 것을 눈치 챘다. 진짜라면 분명 흰소리를 했을 것이다. ‘내게 모과를 주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28) 모과도 패옥도 모두 온객행에게 받았다. 굳이 갚지 않아도 된다며 사이 좋게 지내보자며….


온객행은 처소를 나와 내원에서 외실로 자리를 옮긴 진왕과 조왕을 보았다. 엽백의가 주구전을 만나기 전에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눈치가 좋으니 처신을 조심하라고 말이다. 온객행은 매우 자신이 있었는데 주구전이 청성곡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어찌 할 줄 몰라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이라는 사계산장은 그 세가 작긴 하였으나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과연 그 명색이 헛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엽백의가 부탁하고 갔던 일은 대충 마무리 지었다. 중명원은 진왕의 거처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낙양성과 공의성 일대에 사람을 사서 황자들의 관계에 대해 떠보았다. 조왕은 황후의 첫 아들이지만 수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황제의 제종형제인 유격장군 사마량과 낭야왕 사마운을 가까이했는데 그들은 전대 황제에게서 구석(50)을 받아 그럭저럭 꽤 큰 병권도 쥐고 있는 듯했다. 진왕은 무관보다는 문관들과 더 자주 어울렸는데 작위만 있는 재당숙인 장사왕 사마예와 산기상시 석중과 친했다. 석중은 황후 왕씨의 동생인 후장군 왕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 둘의 사치는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녹봉을 삭감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황제는 종친이 많아 그 덕에 황족이 매우 많아졌다. 어떤 황족은 나라를 위해 정치에 힘을 쓰고 백성을 보살피는가 하면 어떤 황족은 높은 자리를 얻고자 아첨했으며 또 어떤 황족은 다른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것은 온객행이 생각해야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온객행 스스로가 원하는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성곡의 물난리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 곳은 애초에 물난리가 날만큼 큰 물이 있지도 않았고, 전염병이 돌 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도 않았다. 온객행이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엽백의가 청성곡에 필요한 약재가 있어 그것을 부탁하기 위해 잠시 방문했기 때문이다. 당시 엽백의는 장명산에서 칩거하고 있었는데, 그의 친우가 중병에 걸려 그를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후 망백(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온객행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주었다. 그것이 마음에 안든 엽백의는 온객행을 괴롭혔다. 그가 죽고 장명산에 처박힌 엽백의를 밖으로 끄집어 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온객행은 시작하면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떠한 변수도 중간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47) 국어 優施敎驪姬遠太子 우시와 여희가 태자를 쫓아내도록 교사하다.
精潔易辱 重僨可疾 不忍人 必自忍也
사람이 정결하면 욕보이기 쉽고, 자중자애하면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며, 남에게 차마 못할 짓을 못하면 반드시 자신에게는 차마 못할 짓을 합니다.
진나라 우시와 여희가 태자를 없애기 위해 태자의 유약한 성격을 이용하여 태자를 모함한다.

(48) 전국책 31권 燕王喜使栗腹 연왕 희가 율복을 사신으로 삼다.
論不脩心, 議不累物, 仁不輕絶, 智不簡功
논하면서는 마음을 수식하지 않으며 정당한 의논은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며 어진자는 남과의 사귐을 가볍게 끊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남의 공을 버리지 않는다.
연왕 희가 진나라에 대패한 조나라를 치려고 창국군 낙문을 불러 물었으나 낙문은 전쟁에 반대하였다.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조나라와 전쟁을 했고 낙승에게 군사를 주어 진을 막도록 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대패한다. 위 내용은 연왕이 낙문과 낙승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낙문과 낙승의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어서 돌아오라는 뜻이지만 둘은 조나라에 망명하여 답신도 하지 않는다.

(49) 장자 11편 재유
汝 徒處無爲 而物自化. 墮爾形體 吐爾聰明 倫與物忘 大同乎涬溟.
그대가 무위에 머물기만 하면 만물이 저절로 감화될 것이다. 그대의 몸을 잊어버리고 그대의 총명을 버리고 세상의 규범이나 외물을 잊어버리면 혼돈한 도와 완전히 같아질 것이다.

(50) 구석(九錫)은 중국 한나라 때 천자가 공이 큰 신하나 황족에게 준 9가지 특전이다.
  1. 거마(車馬) 행차할 때 항시 두 대의 수레가 움직이는데, 그중 큰 수레는 제후 본인이 타고 작은 수레는 무장을 한 호위병들을 태운다. 그 수레들을 이끄는 짐승들은 검은 소 두 필, 누런 말 여덟 필인데, 이는 황제의 행차에 준하는 격식이다.
  2. 의복(衣服) 곤복과 면류관을 착용하고 붉은 신발을 신는다. 이는 왕의 예복(禮服)에 준하는 복식이다.
  3. 악기(樂器)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이나 가무(歌舞)를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는 황제나 왕의 행사에 준하는 격식이다. 천자 앞에서는 팔일무(八佾舞), 왕 앞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추도록 한다.
  4. 주호(朱戶) 거처하는 집의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하도록 한다. 이 역시 일반 신하들은 사용할 수 없는 천자의 격식이다.
  5. 납폐(納陛)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에 오르내릴 수 있다. 원래 전상(殿上)에 오르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어야 된다.
  6. 호분(虎賁) 천자처럼 늘 곁을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3백명가량의 호분 병력을 사사로이 부릴 수 있다.
  7. 궁시(弓矢) 역적을 마음대로 토벌해도 좋다는 권한의 상징으로 붉은 활 한 벌, 붉은 화살 백 개, 검은 활 열 벌, 검은 화살 3천 개를 하사한다.
  8. 부월(斧鉞) 왕의 의장행사에 쓰이는 도끼로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다만 이것은 구석으로서가 아니라도 출정하는 장수에게 군권을 맡긴다는 의미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 '출정하는 장수에게 부월, 절월(節鉞)을 주었다'는 표현을 쓰는데, 절월은 권위를 상징하는 부절과 생사권을 의미하는 부월을 합쳐 이르는 것으로, 출정하는 장수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9. 거창규찬(秬鬯圭瓚) 거창(검은 수수로 빚은 술)과 규찬(옥으로 만든 제기)을 조상의 제사에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천자의 태묘 제사 때 사용되는 것이다.

雨霖鈴 第10

10. 猫鼠同處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

엽백의는 주구전의 처소로 와서도 죽엽청을 두 단지나 더 마셨고, 진왕은 결국 취기가 올라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하인들이 들어와서 음식을 치우는 것을 보고 있던 주구전이 ‘휴’ 하고 한숨을 쉬자, 남은 술을 마시고 있던 엽백의가 말했다. “나는 노쇠하여 좀 쉬어야겠으니, 나가보거라.” 하인들이 나가자 엽백의가 주구전을 보고 말했다. “너는 안 가냐?”

엽백의는 주자서가 곱게 펴 놓은 침상위의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며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비단 이불도 덮어 보는구나.” 주구전은 의자에서 일어나 엽백의의 이불을 고쳐 덮어 드리며 말했다. “이 곳의 물은 깨끗한 듯합니다.” 엽백의가 실눈을 떠 주구전을 힐끔 올려보며 말했다. “내 점을 쳐보니 이곳은 바라는 바가 커서 곤궁한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구나.” (45) 주구전은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중명원에서 어떻게 나가나 고민하며 방을 나왔다. 시간이 꽤 늦었는지 달이 밝았다. 청명이 지났으니 저 달은 기우는 달이다.

나온 방 바로 옆에 있는 처소로 들어가니 주자서는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온객행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침상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옷과 신발이 보였다. 하는 짓이 이러니 괜한 시기와 시샘을 받았다. 그래도 모나지 않게 행동하고 그런 사제가 있으면 잘 다독이고 스스로 참아서 원만히 지냈다. 가끔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소림사에서 양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오늘은 주구전이 주자서의 잘 곳을 봐 주었다. 그리고 나와 그 옆에 있는 방이 비어 있어 주구전은 그곳에서 눈을 붙였다. 몸이 고단하여 눈을 붙이면 금방 잠이 올 것 같았는데,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주자서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밖이 어두웠다.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들었던 터라 주자서는 진시(辰時) 전에는 일어나는 편이었다.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다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비단의 촉감에 얼굴을 비볐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밖이 조용했다. 몸을 뒤척이다 이불이 묵직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온객행이 이불 위에서 자고 있었다. 주자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에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주자서가 멍하게 온객행을 보고 있자, 온객행이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자서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하는 행동이 이제 막 충년이 지난 사제를 떠올리게 했다. 추운 겨울 밤이 길어지면 무섭다는 핑계로, 춥다는 핑계로, 자기 이불 속을 파고 들어오는 그 귀여운 녀석과 이 커다란 놈이 겹쳐 보이다니, 주자서는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의 몸을 조심스럽게 넘어 신발을 신고 옷을 입었다. 풀어 내린 머리는 다시 하나로 높게 울려 묶고 뒤돌아보니, 온객행은 아예 이불을 둘둘 말고 침상을 다 차지했다.

주자서는 어젯밤 이부자리를 펴드린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물동이를 가지고 나왔다. 어제 하인들이 알려준 곳에 가서 물을 떠다 소세할 물을 대야에 담았다. 화로에 불씨가 얼마 없어 방안을 뒤져 탄을 조금 더 넣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저도 모르게 부산을 떨었는지 인기척에 침상에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주자서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 “조부, 기침하셨습니까?” 그러자 ‘흥’ 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나더니 엽백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지극 정성이구나” 주자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려 침상을 봤다.

신선같이 하얀 옷을 입은 엽백의가 주자서를 보고 씨익 웃었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엽백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어르신, 저희 조부께서는 어디에…?” 엽백의는 주자서가 떠다 놓은 대야에 얼굴과 손을 씻었다. 대답이 없어서 주자서는 곧 물러가겠다 고하고 방을 나갔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어젯밤 자신이 머물렀던 방 옆에 다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침상이 있는 쪽을 보니 조부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안심의 한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조부께서 자길 버리고 갈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면 낙양성이 가까워 마음이 불안한 것일 수도 있다.

조부께서 머무는 방안의 물독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다. 주자서는 또 우물물을 길러 갔다. 하인들이 일어났는지 물을 뜨고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녀들의 손끝이 찬물에 빨갛다. 주자서는 우물 근처에 서서 하인들에게 한참 물을 퍼주고 날이 다 밝아서야 주구전이 잠을 잤던 방에 물동이를 들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이미 일어나 옷을 입고 화로에 탄을 채워 넣고 있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에게 손을 모아 인사하며 말했다, “종조부, 기침하셨습니까.”

주구전이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가서 대야를 들고 물독이 있는 쪽을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너도 잘 쉬었느냐?” 주자서가 물독에서 물을 퍼 대야에 담았다. 주자서의 손이 얼어서 빨갛다. 주구전이 대야를 놓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주자서가 주구전이 씻은 물을 내원에 버리고 들어오자 하인들이 물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이미 소세했다며 주자서에게 어서 씻으라고 말했다. 대야를 내려놓은 하인이 주자서를 보며 웃었다. 대야의 물은 따뜻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엽백의가 있는 객실로 갔다. 엽백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로 근처에 앉아 엽백의를 기다리는데 하인들이 조찬(朝餐)을 가지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주자서에게 가서 온객행을 깨워 오라고 시켰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머물렀던 방으로 들어갔다. 하인이 이미 다녀갔는지 대야에 물을 받아 놓았다. 물을 만져보니 이미 식어 있었다.

아직도 침상위에서 이불을 말아 자고 있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온공자, 일어나시오. 온공자….”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던 온객행이 눈을 뜨고 주자서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주자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온공자 어서 일어나시오. 아침을 듭시다.” 온객행이 버둥대며 일어나 앉았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누워 잤으니 그대로 벌떡 일어나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니! 아서 그러니까 어젯밤은….”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주구전이 있는 방으로 갔다. 하인들을 물려 주구전이 혼자 탁상 앞에 음식을 두고 앉아 있었다. 주자서도 옆에 가서 앉았다. 주구전이 물었다. “어제 온공자는 어디서 잤느냐?” 주자서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제 방에서…” 주구전이 ‘허허허’ 웃었다. 곧 온객행이 방금 소세한 맑은 얼굴로 들어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주구전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차가 매우 비싸고 귀한 차인 것은 알았지만 영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어떤 핑계가 있어야 중명전을 나갈 수 있을까…’ 장명산 검선정도는 되어야 인사도 없이 훌쩍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주구전이 그러면 진왕은 군을 이끌고 사계산장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주구전은 아예 팔짱을 끼고 한숨을 연거푸 쉬어 가며 골똘히 생각했다.

진왕이 아니면 첫째 황자인 조왕이다. 그가 무림맹과 관계한 것이다. 진왕이야 지금 처지가 곤란하여 운 좋게 만났지만 조왕은 아직 낙양성에 머물고 있으니 만날 방도가 없다. 만나더라도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낙양성에 얽히고 설킨 군신관계를 아는 것이 없으니 그것 참 애매하다. 그렇다고 이 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괜히 화를 당할 것 같았다. 주자서는 오랜만에 따뜻하게 잘 자서 그런지 몸상태가 좋아 보인다.

주구전은 주자서에게 무림맹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중이다. 그래도 이 곳은 듣는 귀가 많으니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주구전은 그래도 떠난다는 말이라도 꺼내 볼까 싶어서 진왕을 찾았다. 하지만 진왕은 이미 출타하고 중명원에 있지 않았다. 주구전은 중명원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주자서는 내원을 걷고 있었다.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아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정원을 걷는 주자서의 옆에 온객행이 계속 입을 벙긋거렸다. 할말이 있으면 하면 될 것을 저렇게 뜸을 들인다. 눈썹이 축 쳐져 한껏 울상으로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혹시 화났어? 내가 함부로… 함부로…, 어젯밤에는 말이야….” 주자서가 ‘허’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무엇을 말이요.” 온객행이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우리가 한 침상에서 밤을 보낸 것은 말이야….” 주자서가 가던 길을 멈춰서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아무일 없었소.” 남자 둘이 한 침상에서 잘 일이야 없다면 없고 또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러나 싶었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정표도 주지 못했는데….”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을 지나쳐 앞서 걸었다. 온객행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오늘 공의성 시장에 같이 가서 사자. 아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내가 살게. 금이 좋아 은이 좋아? 아니면 청옥이나 취옥? 너무 비싸면 첨정석이나 감람석이라도…”

주자서가 말했다. “필요 없소. 그렇게 비싼 것은 받을 수 없소.” 온객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아서의 침상에 오른 사람인데 그 정도는….” 주자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누가 처음이라 하였소?” 온객행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그런 그를 두고 주구전이 있는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자서가 객실로 들어오자 주구전은 뜬금없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자서야 너 혹시 몸이 좋지 않느냐?” 주자서는 주구전의 물음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어젯밤에 잠을 충분히….”까지 말한 주자서의 말을 끊으며 주구전이 말했다. “그래. 요 며칠 여독에 어제 독한 술을 마시고 찬바람을 맞았으니 몸이 좋지 않지?” 주자서는 주구전을 보고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온객행이 뛰어 들어와 말했다. “아서! 그럼 대체 처음은 누구야?” 온객행의 질문에 주구전이 주자서를 빤히 보았다. ‘무엇의 처음?’ 주자서는 주구전의 말 대로 정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온객행이 더 입을 열기전에 주자서가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 상대하기 곤란하니 이만 상선께 가보시오.”

점잖게 내쫓는 말에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주자서의 몸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서 또 아파? 어디가 아픈데? 이리와, 우리 아서 내가 맥을 짚어 보게.” 잡힌 손목을 뿌리치며 주자서가 말했다. “어젯밤 악몽을 만나 그런 것이니 이쯤 하고 가시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찻잔을 가져다 차를 따르며 말했다. “우리 아서는 미인등이네 미인등. 바람만 불면 꺼질 듯하네.” 그 말에 주자서는 어이가 없었고 주구전은 ‘허허허’하고 웃었다. 온객행 이놈은 정말 걱정하나 없이 만사가 태평하다.

그렇게 갑자기 아프게 된 주자서는 어젯밤 머물렀던 처소의 침상에 또 누웠다. 주구전이 옆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주자서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하인들이 오고 가며 약재탕과 구리로 만든 손난로에 향초를 태워왔다. 극진한 대접에 주구전이 의아할 정도였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발 밑에 앉아 울상으로 그런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주구전은 한숨을 쉬며 저 온객행을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했다.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제 말한 그 모과 절임은 맛이 어떠 하오?” 주자서의 말에 벌떡 일어난 온객행이 말했다. “우리 아서 모과절임이 먹고 싶어? 알겠어! 내가 얼른 가서 사올게!” 그리고는 바람처럼 방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주자서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종조부.” 주구전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의 처지가 초나라의 회왕과 같구나.”(46) 또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주자서가 말했다. “양주에 매화가 피었나요?” 사계산장에 보낸 서신은 공의성에 들어와서 황산은장에서 부친 서신이 전부다.

주구전은 또 한참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랏님을 상대로 이길 수 없으니 패전계인데….” 주구전은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이럴 때는 도망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수인데, 그럴 수도 없으니 쫓겨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진왕을 번거롭게 하여 중명원을 나갈 수 있을까?

주구전은 주자서에게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면서 하인들에게 풍한이 든 것이니 옮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진왕은 점심때가 좀 지나서 중명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조왕(趙王)과 함께 왔다. 주구전은 엎친데 덮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조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주구전은 일부러 주자서를 두고 혼자 조왕을 알현하러 갔다.

처소에 누워있던 주자서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옷을 벗었다. 내의만 입은 채로 앉아서 운기 조식을 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보법을 연습했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혹시 이 불안이 사라질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처소를 돌아다녔다. 그동안 긴 여행길에 몸이 좋지 않아 몸이 많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또 몸을 움직이니 마음이 편안하다.

몸을 좀 움직이니 그새 땀이 났다. 방안에는 화로가 세 개나 있어서 숨쉬기가 조금 텁텁했다. 숨을 몰아쉬고 호흡을 정리하려고 다시 침상에 가서 앉았다. 곧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놀라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아서! 내가 모과 절임을 사왔어! 아서!” 침대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주자서의 얼굴은 몸을 움직여 혈색이 돌았고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온객행은 모과 절임을 주자서의 머리맡에 놓고 품속에서 영견을 꺼내 주자서의 땀을 닦아주었다. “아서, 정말 아픈 거야?” 그리고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주자서의 손목을 잡았다. 주자서가 손목을 빼며 눈을 떴다. “온공자, 옮을 수 있으니….” 온객행은 빠져나가는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다 좋아.” 주자서를 보고 웃는 온객행의 눈썹에 걱정이 걸려있다. 주자서는 거짓말이 미안하여 온객행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온객행이 모과 절임이 들은 작은 찬합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주자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서, 내가 장에 가서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어…. 우리 아서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선물하고 싶었는데….” 주자서가 입에 들어온 모과 절임을 먹으며 온객행이 장에 나가서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자서도 나가서 보고 싶었는데. 어릴 때는 마차를 타고 오가느라 도성의 시장에는 가본적이 없는 주자서는 괜히 아쉬웠다. 사람도 더 많고 물건도 더 많다고 들었다. 그러니 신기한 것도 신기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주자서가 씹는 것을 멈추자 온객행이 모과 절임 하나를 더 집어 주자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또 그것을 받아먹었다. 달콤하면서 쌉사름하고 향긋하다. 온객행이 신이 나서 중명원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것을 말했다. 주자서가 손을 뻗어 모과 절임 하나를 집어 온객행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온객행이 떠드는 소리에 조금 질린 참이었다.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모과 절임을 입술로 물고 있다가 곧 입안에 넣어 씹어 먹었다. 옥 같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주자서를 마주봤다.


조왕을 알현하러 간 주구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의 첫 화두가 주자서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계산장에서 온 주구전이라고 조왕에게 인사를 하자 조왕은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왕이 주자서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주구전이 풍한이 들어 옮을지 모르니 나으면 뵙겠다고 사정해보았지만 진왕이 옆에서 조왕을 부추겼다. “유연과 소림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발견한 아이인데, 고모님과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조왕이 흥미가 있는지 말했다. “그래? 요즘 유교위와 자주 어울리는구나” 진왕이 멋쩍게 ‘하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 지금 객실에서 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인을 불렀다. 주구전이 따라 나가면서 말했다. “황자 전하 귀중한 옥체 보전 하시옵소서. 혹여 우리 아이 때문에 병이라도 얻으시면….”

진왕이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걱정마시게 형님께서는 무공이 높으시니.” 주구전은 뒤에서 진왕을 쏘아보았다. ‘이것이 저 놈의 속셈이었구나.’ 객실에 다다라 하인이 주자서의 방에 기별하고 주자서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화로에 끓은 물을 차주전자에 따르던 온객행이 조왕과 진왕과 마주쳤다.

조왕이 물었다. “네가 주자서인가?” 온객행이 주전자를 내려놓고 포권하여 인사했다. “저는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입니다.” 조왕은 ‘흠’하더니 말했다. “자네는 장명산 상선의 제자인가?” 온객행이 공손히 손을 내리고 대답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진왕이 말했다. “맞습니다 형님. 어젯밤 장명산 상선과 죽엽청으로 대작했지요.” 그리고는 침상 쪽으로 조왕을 안내했다. 주자서는 선잠이 들어 있던 터라 사람들의 인기척에 잠이 깬 상태였다.

조왕이 누워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사내냐?” 주구전이 답했다. “아이고 전하. 우리 종손인데 당연히 사내지요.” 주구전은 그냥 여자아이라고 할 걸 그랬나 순간 고민했다. 주자서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침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왕을 보고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왕이 침상에 앉아 주자서의 얼굴을 가까이 보았다.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좋구나. 아주 좋아.” 그리고는 일어나 주구전을 찾았다. “이 아이 올해 몇 살이오?” 주구전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지학입니다.” 온객행이 대답하는 주구전을 보았다. 조왕이 대답했다. “그래?” 진왕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아이가 살아 있으면 올해 방년이니…” 그 말을 들은 주자서는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하여 숨을 헐떡이더니 곧 침상에 풀썩하고 쓰러졌다.

(45) 국어 89. 公子重耳夷吾出奔 공자 중이와 이오가 망명하다.
진나라에 쫓기던 중이가 백곡에 이르러 초나라로 갈지 제나라로 갈지 점쳐보았다. 어디로 가든 바라는 바가 커서 귀의하여 도망치기 어렵고 곤궁한 처지에 찾아갔다가 후회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진나라 근처에 있는 적나라로 망명한다.

(46) 진나라와 초나라는 전쟁 중이었는데 진나라왕이 초나라 회왕에게 초나라의 8개성을 놓고 맹약을 맺는 자리에 그를 불렀다. 의심하여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들의 설득으로 진나라로 간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다시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

雨霖鈴 第9

9. 懷玉有罪
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가 된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우물에서 길어온 물에 간단히 관수(盥漱; 세수하고 양치질함)하고 객실을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처소는 3개였는데, 침상위에 놓인 금침이 비단이었다. 주구전은 침상에 있는 비단을 만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비단 금침 하나면 몇 달 사계산장은 먹고 마시며 놀아도 될 텐데….’ 이불을 만지는 주구전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이불을 펴서 주구전이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주구전은 침상에 앉으며 말했다. “아직 안 잔다.” 주자서가 정리를 마치고 일어났다. 주구전이 주자서가 펴 놓은 자리를 보고 말했다. “어째 잠자리가 아니라 묫자리 같구나.” 지혜로운 자는 맡은 일이 적으니 살피지 않는 것이 없고, 어리석은 자는 아는 것은 없고 일이 많으니 어찌 혼란하지 않을까?(39) 주구전은 스스로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분수에 비해 맡은 일이 너무 많다.

일이 많으면 어려움도 많다. 도를 닦는 일은 스스로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므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계속해서 채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주구전은 주제를 아는 사람이다. 지금 이 일은 아는 것이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것이다.

언제 밖에 나갔다 왔는지 온객행이 찬합을 들고 주구전과 주자서가 있는 처소로 들어왔다. 문 앞에 있는 탁상에 찬합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주대인 와서 요기하시지요.” 그리고는 찬합에서 음식을 꺼냈다. 술을 마신 주구전은 식욕이 없었으나 그래도 일어나 주자서와 온객행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온객행은 요리를 먹으며 이건 무슨 요리이며 이건 무슨 요리라며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댔다.

평소에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주자서도 온객행이 설명하는 음식을 잘도 집어먹었다. 온객행이 먹어보라며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찬을 놓아주면 주자서가 그것과 같은 찬을 집어 주구전의 밥그릇에 얹어 주었다. 주구전은 헛웃음이 나는 것을 참고 말했다. “그만해라 배부르구나.” 둘이 하는 모양새가 퍽이나 다정하여 주구전은 정말 대가 끊어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저녁을 마치고 찬합을 정리하고 있는데 엽백의와 진왕이 처소로 들어왔다. 중명원 담밖에서 보사가 북을 치며 해시가 되었음을 알렸다. 숭산에서 공의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독한 술을 마신 주구전은 피곤했다. 주구전이 일어나 진왕과 엽백의에게 인사하자 정리하고 있던 주자서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나 인사했다. “예를 거두십시오.” 진왕이 서둘러 말했다. 그리고는 탁상에 있는 의자에 앉자 밖에서 하인들이 음식과 술을 들고 들어왔다.

주구전은 요 근래 이렇게 많은 음식을 본적이 없다. 임해에서 사례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피난민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오늘도 굶주리고 있을 텐데 이 많은 음식은 대체 다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구전도 진왕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찬바람을 맞았으니 또 앓아 눕기 전에 어서 가서 쉬도록 해라” 주자서는 주구전의 침상자리를 다시 한번 살핀 뒤에 주구전과 검선, 진왕에게 공수하여 인사한후 방을 나갔다.

그 뒤를 온객행이 따라 나가려고 하자 엽백의가 막으며 말했다. “네놈은 어디를 가느냐.” 온객행은 진왕의 눈치를 힐끔 본 뒤에 포권하여 엽백의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스승님 병은 만나기는 쉬워도 고치기 어렵다 하였으니 중병이 들기 전에 보살피고자 함입니다.” 주구전은 온객행을 만난 이후 온객행이 이렇게 멀쩡하게 엽백의를 스승 대접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도 나랏님이 무서운 줄은 아는 것인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 신기하여 온객행을 보자 엽백의가 ‘하하하’웃으며 말했다. “그래. 중병을 얻으면 안되지.” 그리고는 흘끔 주구전을 보고 말을 이었다. “여행하느라 기혈이 상했으니 가서 모과가 있으면 달여주어라.”(28)

온객행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엽백의를 빤히 보았다. 엽백의가 온객행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 가 보아라.” 온객행이 머리를 땅에 붙이고 절하며 인사했다. 주구전은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엽백의를 빤히 보았다. ‘떡 줄 사람은 아직 생각도 없는데 이게 무슨…’

온객행이 나가자 진왕이 엽백의에게 물었다. “주공자의 병이 깊습니까?” 엽백의가 웃으며 말했다. “진왕께서는 그것이 왜 궁금하십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심려 놓으세요.” 주구전은 진왕과 엽백의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겁이 났다. 주자서가 자기 침상을 봐주고 나갔으니 이 둘을 내쫓아야 좀 쉴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피곤이 몰려왔다. 주구전이 작게 한숨을 쉬자 엽백의가 그것을 보고 ‘하하하’ 웃었다.


주구전이 머무는 방,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온 주자서는 괜히 으슬으슬 몸이 추워 화로 위에 물을 올렸다. 객으로 있는 처지이니 뭘 부탁하기가 송구스러워 봇짐에 있는 차함의 녹모단을 조금 꺼내 주전자안에 넣었다. 화로 앞에 앉아 물 끓기를 기다리고 있자 곧 온객행이 주자서를 찾으며 들어왔다. “아서! 어디 있어? 아서! 내일은 시장에 나가서 모과 절임을 사 줄게, 꿀에 절인 것은 정말 맛있어.”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이 놀라서 다가오며 말했다. “아서 왜 그래? 추워? 그러니까 옷을 더 입어야 한다니까.” 그리고는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비단 금침을 망칠까 주자서는 온객행을 말리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그 금침은 비단으로 만든 것이니 불에 닿으면….”

주자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불을 다시 침상위에 곱게 내려놓은 온객행이 자신의 흰색 장포를 벗었다. 주자서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 처소를 쓸 것이라면 내가 나가겠소.” 방을 나가려는 주자서의 손목을 잡아챈 온객행이 화로 근처에 있는 의자에 주자서를 앉히고 자기 장포를 덮어주며 말했다. “이 옷은 더럽혀도 괜찮으니 아서가 입어.” 주자서는 기분이 이상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화로를 움직여 주자서 근처로 옮겨주고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옷을 걸쳐 입고 화로의 불을 쬈다. 온객행은 의대에 달려 있던 옥패를 풀어 주자서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아서 있잖아…. 나는 말이야….” 주자서가 그 옥패를 보고 입을 열었다. “온윤 하면서도 윤택함은 어질고, 치밀하면서도 견고함은 지혜와 같고, 모나면서도 상해를 입지 않음은 의와 같고 드리우면 떨어질 듯함은 예와 같고…”(40)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온객행이 말을 이었다. “아이 아서! 그런 것이 아니야.” 주자서는 의아하여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옥패와 온공자가 잘 어울린다 생각하였소.” 거짓말이다. 주자서는 공자께서 어찌 옥이 옥돌보다 더 귀한 것인지 설명하는 구절을 생각하고는 온객행이 옥돌 같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주자서 속내를 모르니 또 기분이 좋아 헤벌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옥패가 마음에 들면 아서에게 줄게.”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소.” 온객행이 주자서의 의대를 잡아 옥패를 매달아주며 말했다. “아이 일단 받아. 혹시 태어난 연, 월, 일, 시가 어떻게 돼?” 주자서는 미간을 찡그리고 별 생각없이 본인의 사주를 말해주었다.

온객행은 부산을 떨며 근처에 보이는 서책 모서리를 찢어 지필묵으로 주자서가 이야기한 것을 적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나보다 형님이었네?” 그리고는 종이를 입으로 후후 불어 말린 후 곱게 접어 염낭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주를 주자서에게 말해주었다. 과연 온객행은 주자서보다 두살이나 어렸다. 허리춤에 달린 옥패를 만져보았다. 옥은 온객행이 쥐고 있었어서 그런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푸른색 술을 달아 장식한 하얀 옥패는 영 주자서가 입고 있는 옷과 어울리지 않았다.

온객행이 말했다. “사주를 알았으니 이제 단자에 넣어 사계산장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겠다.” 온객행의 말에 옥패를 만지작대던 주자서가 물었다. “사주단자라니? 온공자 혼인하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이 혼인하는데 왜 본인의 사주를 묻고 그걸 사계산장으로 보내나 싶었다. 그러자 온객행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서가 나에게 시집와야지.” 주자서가 ‘하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시집을 간단 말이오. 시집이 아니라 장가를 들어야지요.” 온객행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래? 아서 장가 들고 싶어? 알았어. 그럼 내가 시집가지 뭐.”

주자서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허리춤에 달려 있던 옥패를 풀어 온객행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온공자. 희롱은 그대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옥패를 받지 않기 위해 벌떡 일어나 저 멀리 떨어지며 말했다. “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는 내가 싫어?” 주자서는 솔직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조금 귀찮고 어려운 사람이지 좋고 싫음도 없었다. 주자서가 대답이 없자 온객행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아서! 그럼 여태까지 날 가지고 논거야?”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기가 막혔다. 온객행이 말했다.

“간절한 정 품으니 그리워하는 마음 절실하여라, 두려운 것은 나를 속일까 하는 것으로 정보교가 버림받은 이야기와 같으니 슬퍼져 망설이고 주저한다. 온화한 얼굴과 고요한 마음을 거두어 예로서 스스로 지키니 이에 낙신이 느끼는 바 있어 이리저리 헤매는데 빛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 그늘도 되었다 밝아졌다 하니, 가벼운 몸으로 발돋움하여 나는듯 날지 않고 향기 자욱한 길 사뿐히 밟고 걸으니 꽃 향기 퍼진다. 읊어 본다 영원히 사랑하니 맑은 그 소리 서러워 길고 길다.”(41)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과연 낙수를 보니 복비가 떠오름은 당연한 일이지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울상으로 바라보았다. 주자서는 괜히 멋쩍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에게 다가갔다. 온객행의 요대를 끌어당겨 옥패를 다시 그의 허리춤에 걸어주니 거리가 가까웠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옥패를 다 달은 주자서가 자신과 멀어지자 그냥 와락 안아버렸다. 그리고는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으앙’하고 울어버렸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붙잡혀서 안겨 있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버겁다. 사계산장의 어린 제자들 중에도 있었다. 이렇게 떼쓰는 아이는 봄바람이 얼어붙은 것을 녹이듯, 온화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 하여야 한다.(42) 오늘 깨닫지 못하면 내일 다시 일러주면 될 일이다. 이 치가 자신보다 어린 것을 안 주자서는 전처럼 모질게 그를 뿌리치기가 곤란하였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당연히 자신을 뿌리칠 줄 알았다.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이런 거짓 울음에 자기 몸을 내맡기고 여지를 주는 것이 너무 귀여웠다. 아는지 모르는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져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졌다. 어깨에 얼굴을 부비자 주자서가 팔을 들어 온객행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게 또 기꺼워 온객행은 더 크게 훌쩍였다.

둘이 그러고 있는데 방밖에서 하인이 기별하였다. “주공자 진왕전하께서 내리신 모과차입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달래 떼어 놓고 문을 열어 소반에 닮긴 모과차를 받았다. 하녀가 들어와 차시중을 들려고 하자 주자서가 괜찮다면서 하인들을 물렸다. 묘하게 의젓한 것이 하인들에게 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온객행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소반을 내려놓은 탁상 앞에 앉았다.

주자서는 차를 한잔 따라서 앉아 있는 온객행에게 주며 말했다. “온공자는 다정하여 곧 마음을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자서의 잔인한 소리에 벌개진 눈으로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대체 자기가 뭘 했길래 이 치가 저를 좋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뭐 며칠이나 봤다고…’ 온객행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눈동자가 반질반질 하였다. “나는 그대를 보면 기뻐서 미치겠는데, 그대는 나를 보아도 우물쭈물.”(43) 주자서가 웃으며 온객행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보기 전엔 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못난이라니.”(44) 그렇게 말하며 온객행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온객행의 눈꼬리가 접히더니 곧 웃어버렸다. 온객행의 마음이 점점 더 기운다.


진왕은 주구전의 처소에서 술을 마시며 상황을 보고 있었다. 장명산 검선이야 관가에 참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 피하면 될 일이지만, 이 주구전이라는 노인네는 생각보다 더 이용하기 버거운 사람이었다. 폐관수련한다기에 명이 얼마 남지 않아 오늘 내일 할 줄 알았는데, 저보다 배로 어린 손주놈보다 정정하다.

진왕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꼭 그 무고를 열어야 했다. 서국공이 보고한 내용을 보았던 진왕은 무고의 위치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열기 위해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그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음 같아서는 사계산장으로 쳐들어가 진회장의 목덜미를 조여 열쇠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지만 황후의 섣부른 행동때문에 조왕도 진왕도 바람 앞에 등잔이 되고 말았다.

서선공의 일은 의문점이 많은데, 대체 왜 황제가 그렇게 급작스럽게 주희를 죽였는지 이유를 아는 이가 적었다. 게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주영의 시신은 서선공의 주택(朱宅)에 있는 모든 우물을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혹시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아이가 열쇠를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주영을 닮은 주자서는 진왕에게 아주 좋은 수였다. 총기가 흐려진 황제의 환심을 사기 좋은 수다.

황제의 동생인 기주의 낭야왕이 열쇠를 찾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다. 게다가 진왕은 솔직히 누가 황후에게 강호의 술을 구해다 주었는지 모른다. 일단 대외적으로 진왕은 형인 조왕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으나 조왕은 진왕을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조왕의 뒤에 강호의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장 쥐고 있는 세력이 없는 진왕은 초조했다. 낙릉군공이 기주에서 낭야왕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추후에 어떻게 될지 상황을 봐야 할 것이다.

(39) 순자집해 王霸篇 왕패편 第十一
故孔子曰 知者之知 固以多矣 有以守少 能無察乎, 愚者之知 固以少矣 有以守多 能無狂乎.
그러므로 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의 지식은 본디 이미 풍부하고 그가 맡은 일은 매우 적으니 어찌 분명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본디 이미 적고 그가 맡은 일은 매우 많으니 어찌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0) 공자가어 36편 問玉 옥에 대해 묻다.
溫潤而澤 仁也 縝密以栗 智也 廉而不劌 義也 垂之如墜 禮也
옥의 성질이 온윤(溫潤)하면서도 윤택함은 어질고 치밀하면서도 견고함은 지혜와 같고, 모나면서도 상해입지 않음은 의리와 같고 드리우면서 떨어질 듯함은 예의 같다.
옥을 군자에 비유하고 옥돌과 비교하는 내용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군자가 옥을 귀하게 여기고 옥돌을 천하게 여기는 이유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해 답한 내용이다.

(41) 조식 낙신부
執眷眷之款實兮,懼斯靈之我欺。感交甫之棄言兮,悵猶豫而狐疑。
간절한 정을 지녔으나 그 속음을 두려워하니 정교보의 버림받은 말생각하고 슬퍼져 머뭇거리며 의심하네
收和顏而靜志兮,申禮防以自持。於是洛靈感焉,徙倚彷徨,神光離合,乍陰乍陽。
온화한 얼굴 거두고 뜻을 조용히 가지며 예의를 차려 자신을 지키니 이에 낙신이 느낀 바 있어 이리 저리 헤매는데 광채가 흩어졌다 모이며 그늘이 되었다 밝아졌다 하니
竦輕軀以鶴立,若將飛而未翔。踐椒塗之郁烈,步蘅薄而流芳。超長吟以永慕兮,聲哀厲而彌長。
날렵한 자태 발돋움하여 나는 듯 날지 않고 향기 자욱한 길을 밟고 방향을 퍼트리니 길게 읊어 영원히 사모하니 그 소리 서러워 더욱 길어지네/

(42) 채근담 전집 96 如春風解凍 如和氣消氷 纔是家庭的型範
봄바람이 얼어붙은 것을 녹이듯, 온화한 기운이 얼음을 녹이듯 하라. 이것이 곧 가정을 다스리는 법도이다.

(43) 자야가 35번째 시
我念歡的的. 子行由豫情.
나는 그대를 보면 기뻐서 미치겠는데, 그대는 나를 보아도 우물쭈물거립니다.

(44) 시경 정풍 山有扶蘇 산의 부소나무
山有扶蘇 隰有荷華 不見子都 乃見狂且. 山有橋松 隰有遊龍 不見子充 乃見狡童.
산에는 부소나무 있고 늪에는 연꽃이 피었네. 보기 전엔 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미치광이라니.
산에는 우뚝 솟은 소나무 갯벌엔 말여뀌 자랐네. 보기 전엔 호남이라 하더니 이 같은 못난이라니

雨霖鈴 第8

8. 着得去
세속에서 얻은 모든 것을 그대로 지고 가시게.

주구전은 지객당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소림사에서 초대한 사람은 주구전 혼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는 일부러 숭산 논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강호에 이야기를 흘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논의에 참가하고자 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자들일 지도 몰랐다. 그러니 보름내로 무림맹에 관여한 문파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던 엽백의가 엉덩이를 붙이고 처소에 앉아 주자서의 차시중을 받으며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래서 공의는 언제 가냐?”라고 물으며 주구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온객행은 또 시중을 들고 있는 주자서를 시중든다고 아주 시끄러웠다. 생각에 집중을 할 수 없어진 주구전이 크게 한숨을 쉬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자서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낙양성은 구경하고 가자.” 그리고는 짐을 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내내 짐을 정리하고 떠나는 준비로 바빴다. 숭산에서 북쪽으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공의다. 공의까지 마차로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날이 풀려 들짐승도 있을 테니 날이 밝을 때 출발하려고 길을 서둘렀다. 짐을 챙기느라 바쁜 주자서 옆에서 온객행이 그를 도왔고, 주지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기위해 처소를 나왔다. 엽백의도 주구전의 뒤를 따랐다.

주구전은 심통이 나서 말했다. “엽선배께서는 무림맹에 대해 조사하러 가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그러자 엽백의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데 무얼 더 찾는다는 말인가?” 주구전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 찾으셨단 말입니까?” 엽백의가 말했다. “개미구멍 하나로 둑이 터지고 높은 산도 원숭이 토굴로 허물어지니,(33) 어차피 무림맹의 윗머리라고 하는 것들은 귀족일 가능성이 크니, 그쪽을 먼저 들쑤셔 놓으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구전은 앞으로도 계속 엽백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엽백의는 그런 복잡 미묘한 주구전의 얼굴을 보고 ‘하하하’ 웃을 뿐이었다.

주구전과 엽백의가 방장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자서는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가지고 온 것도 별로 없고, 지낸 날도 많지 않아 딱히 챙길 것은 없었다. 그동안 입었던 옷들을 잘 정리해서 시간이 나면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낙양성으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복잡하여 평소와 다르게 흰소리를 늘어놓지 않는 온객행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자서의 기억속의 공의라… 공의라면 주가의 여름별장이 있는 곳이다. 어릴 때 그곳에서 헤엄치는 것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흐릿하여 그런 곳에 갔었던가 싶은 기분만 들었다.

주구전은 인사를 하러 나가기 전 주자서에게 이제 심의를 입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호복을 입는 것이 움직이기 훨씬 편했으니 주자서도 부러 뜻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머리도 내려 묵지 않고 하나로 올려 묶었다. 상투를 틀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주자서가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빤히 보고 있는 온객행의 시선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두었다. 그런데 또 무엇이 서운한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웃어버렸다. 그의 행동이 참 어린아이 같다.

과거를 들추는 것은 정말 무섭고 송구스러운 일이었으나 들뜨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주구전이 주자서의 사정에 대해 말해 놓았으니 주자서는 그냥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조부께서 읽고 계시던 불경에서 보았다. 마음속에 있는 번뇌, 갈등, 집착, 원망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으라.(34) 이미 지나간 일이니 끄집어내어 헤집어 놓을 필요 없었다. 그냥 사계산장의 제자 주자서, 지금은 주구전의 재종손 주자서이면 될 일이다. 사계산장과의 인연을 조금 흐리게 하면 될 일이다.

주구전은 혹시 사계산장에서 연통이 올지도 모르니 가는 곳에서 다시 서신을 보낸다는 말로 앞으로의 일을 보고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주지 여운과 도감 혜립이 그들을 배웅하러 나왔다. 오랜만에 본 도감의 얼굴이 핼쑥하다. 아직도 숭산을 떠나지 않은 객이 많았으니 바쁜 것이다. 짐을 챙긴 주자서는 심아스님을 찾아 타고 왔던 마차를 찾고 맡겨 놓았던 말을 마차에 매어 두었다. 오시가 막 지나가고 있던 참이라 아직 끼니때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신세를 진 주방장이 대나무로 엮은 찬합에 요기거리를 들고 나와 직접 그들을 배웅했다.

주구전은 보시(報施)라는 목적으로 가지고 있던 노자돈 중에 반을 덜어 주지에게 내놓았다. 기껏 거둔 고아들을 굶기지 말라는 뜻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고될지도 모르나 또 그건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지 생각했다. 서로의 상황을 아는지라 여운도 그냥 고맙게 받았다. 주지 여운이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대지처럼 다투지 않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아라한에게 생사가 없기를…”(35) 주구전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그저 다투지 않으면 허물도 없으리…”(36) 말을 주고받은 두사람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다 떨어졌다.

엽백의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명예를 목적으로 하지 마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마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마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마라. 하지 말라면 그렇게 더 하고싶어 진다는 말이다. 스스로 얻은 바가 없거늘 얻었다 생각한 이가 이리 많을지 누가 알았겠느냐”(37) 주지와 함께 나온 스님들이 합장하여 인사했다. “아미타불.” 주구전은 먼저 마차에 오른 엽백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주자서도 스님들께 공수하여 인사한 뒤 말고삐를 잡았다. 온객행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가 말을 몰아 숭산의 초입을 지나갈 즈음 어떤 사람이 경공으로 마차의 지붕에 올라섰다. 온객행이었다. “빌어먹을 노야! 나를 두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엽백의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네놈은 계율원에 처박혀서 불경이나 읽고 써야 그 성질머리를 고칠 텐데 말이다.” 온객행이 지붕에서 내려와 말을 모는 주자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으며 말했다. “나는 출가하기 싫소! 이 비단 같은 머리결을 보고도 나를 중 만들 생각을 하다니 노야 그새 눈이 먼 것이 아니오?”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주자서가 힐끔 보자 정말 햇빛을 받은 온객행의 머리가 반질반질했다. 온객행의 말에 마차 안에서 콧방귀 끼는 소리가 났다. 주구전인지 엽백의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주자서는 별로 상관없었다. 단지 너무 들러붙은 이 치의 표정이 좋아진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가는 길 중간에 소림사에서 준비해준 찬을 먹고 길을 재촉하여 미시가 되기 전에 공의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길을 지나니 금방 공의성과 저 멀리 낙수(洛水)가 보였다. 낙수가 흐르는 이곳은 정주성과 낙양 중간에 위치하여 환란의 시기에 매번 이곳의 거점을 놓고 다투었지만, 항상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황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번화했다. 연주와 예주의 농산품이 낙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러 문파가 시정잡배 마냥 여기저기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열린 성문 앞에는 사람을 딱히 확인하는 병졸도 없었다. 느긋하게 성안으로 들어온 마차는 성문 근처를 맴돌다 허름한 마구간을 빌려 마차와 말을 맡겼다.

주구전은 주자서와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엽백의와 온객행이 껄끄러웠다. 딱히 말못할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이들이 괜히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었기에 주구전은 사계산장에 서신을 보낸다며 주자서를 데리고 황산은장(黃山銀葬)으로 향했다. 황산은장은 남궁세가가 예주, 서주 일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표국(鏢局) 겸 전당(典當) 업소이다. 그 규모가 꽤 커져 남궁세가의 방계가족이 정주(鄭州)와 낙양에 머물며 따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질자의 처가 아마 이 방계 가족 출신이었던 것 같다.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고 누군가가 일을 이어받아 은장은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남궁세가인지 아니면 그새 주인이 바뀌었는지 주구전은 솔직히 별로 상관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물건을 맡기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켠에 앉아 작은 천조각에 서신을 쓰며 주구전이 말했다. “너희 조부의 이름은 주구단이다. 단양의 현승이었으며, 그의 아들 주개(周愷)는 단양의 현위였다. 너의 모친은 남궁세가 방계당주의 서녀이고 둘 다 전란에 휘말려 세상에 없구나. 비록 질자 내외에게 자식이 없었으나 이렇게 새로운 연을 만났으니 나는 여한이 없다. 혹 네가 이름을 찾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너는 우리 주가(周家) 종손이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구전이 해준 이야기를 곱씹었다. 주구전이 말을 이었다. “질자 내외는 단양에서 사계산장이 있는 곳까지 피난을 하다가 화를 당하여…” 주구전은 글을 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 주구단의 서신을 받고 걱정도 되었지만 기쁘기도 했다. 가족이 생기는 것 같아 들떴던 것도 사실이다.

주자서는 주구전의 멈춘 손을 잡고 그를 보았다. 주구전이 주자서를 보며 힘겹게 웃었다. “화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으나, 내가 단이에게 받은 서신에 단양 현령의 직인이 찍혀 있으니, 너는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주자서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네 이름을 찾겠느냐?” 주구전을 바라보던 얼굴에 눈물이 맺히더니 결국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주구전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지금 답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잡고 있던 붓을 놓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주자서는 자기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종조부, 저는 주(周)가입니다. 제 이름은 자서구요. 한번도 다른 이름으로 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구전이 깊이 한숨을 쉬고 주자서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이라 하였다.(38) 잘했다. 잘했어. 모두 내려 놓자 구나.” 주구전이 주자서를 당겨 안았다. 두사람은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주구전이 주자서를 놔주고 점원이 있는 곳에 가서 서신을 부쳤다. 간단히 소림사를 나왔다는 내용과 과거에 휘말려버렸다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흘렸다. 진회장은 똑똑한 놈이니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황산은장을 나와 다시 엽백의와 온객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두사람은 어디서 산 것인지 손에 군것질 거리를 들고 있었다.

온객행이 저 멀리 봇짐을 들고 걸어오는 주자서를 발견하고는 나풀거리는 흰색 소매를 크게 흔들며 불러 댔다. “아서! 아서!! 여기야! 아~서!” 주구전은 저 온객행이라는 놈은 세상 태평하게 사람 맥을 끊어 놓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구전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저 놈이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구나.” 주자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온공자의 흰소리를 다 믿으십니까?” 주자서가 가볍게 대답하자 주구전이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상선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구나. 저놈은 끈질겨서 없는 마음도 만들어낼 놈이라고.”

주자서는 조금 놀랐는지 한참 말이 없다가 온객행과 가까워지자 결의에 차서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자서 앞으로 마음을 단련하는 일에도 힘쓰겠습니다.” 주구전이 그 말에 ‘허허허’하고 웃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을 지는 모르나 대충은 들었을 엽백의도 옆에서 ‘하하하’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두 늙은이가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사탕을 까서 주자서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아서 먹어봐 벌꿀사탕이래.” 입안에 들어온 사탕을 뱉을 수는 없어서 냉큼 먹은 주자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맙소, 온공자.” 온객행이 서운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서! 왜 자꾸 온공자라고 부르는 거야? 더 친근하게 부를 수도 있잖아.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낸 날이 며칠인데…”

옆에서 온객행을 보고 있던 엽백의가 말했다. “그래! 검선이라고 좀 부르지 마라! 지들이 재주가 부족한 것을 겨우 나 따위에게 검선이라니!! 상선이라니!!” 온객행이 엽백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러게 그 정도 도 닦았으면 이쯤에서 어서 하늘로 승천 하시오.” 주구전은 그 말에 웃음이 나왔으나 엽백의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으로 웃음을 감추었다. 엽백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 훌쩍 경공으로 저 멀리 사라졌다.

주구전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온공자 어찌 스승에게 그런 모진 언사입니까?” 온객행이 주구전의 말에 주대인의 손 위에도 사탕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주대인 말씀을 낮추세요. 저 노인네는 망령이 들어 스스로의 흠을 알지 못하니 괘념치 마소서.” 그리고는 ‘히히’웃으며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섰다. 주구전은 그냥 ‘허허허’ 사람 좋게 웃고 말았다.


낙수가 보이는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진왕과 약속한 장소인 중명원이 보였다. 주구전은 별원이겠거니, 싶어서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규모를 보니, 그냥 별원이 아니라 별궁 같았다. 예전에 와보았을 때 보았던 것 같은데 그새 그 크기가 커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컸는데 주구전이 관심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중명원에 도착하자 하인 한 명이 그들을 외실로 안내했다. 지나오는 길에 보았던 하인만 수십이다.

일각이나 걸어 들어가니 낙수가 보이는 곳에 높게 지어진 누각 위에서 진왕이 그들을 맞이했다. 주구전과 주자서는 두 손을 모아 공수하여 진왕에게 인사했다. “주가 진왕을 뵈옵니다.” 두 사람이 무릎 꿇고 절하려고 하자 진왕이 누각에서 내려와 말리며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가르침을 청한 것은 저인데 어찌 절을 받겠습니까.” 그리고는 누각 위로 올라 자리를 권했다. 주자서는 자리를 거절해야 하나 주구전의 눈치를 보았지만 주구전은 별말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주자서도 따라서 옆에 앉았다.

진왕이 주구전과 주자서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이 술은 죽엽청으로 그 청향이 매우 그윽하니 어서 맛보시지요.” 그리고 진왕이 잔을 들어 비웠다. 주구전은 주자서를 힐끔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술을 들어 진왕에게 보인 후 잔을 비웠다. 이 술은 분주로 매우 독한 술이다. 향이 좋고 맛이 부드러워 뭣 모르고 마시면 금방 취해버린다. 주자서도 주구전과 함께 잔을 들었지만 입술에만 댔다가 다시 내려놨다.

진왕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주공자는 술을 즐기지 않는가?” 주구전이 ‘허허허’웃으며 대신 답했다. “제 종손이 요 며칠 여독이 풀리지 않아 제가 마시지 말라 하였습니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주대인께서 이리 정정하신데 몸이 그리 허약해서야…” 주구전이 진왕의 장단에 맞추어 말했다. “귀한 독자인지라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요.” 그러자 진왕이 물었다. “그럼 주공자도 사계산장에서 무공을 수학하였습니까?” 주구전은 아까부터 진왕이 주자서를 쳐다보는 눈이 기분 나빴다. 사냥하는 사람이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주구전이 대답했다. “이 아이는 글만 읽을 줄 알지요. 폐관수련하는 동안 제 수발을 든다고 게을리했지만, 양주 회계에 계신 문칙선생께 수학을 했었습니다.” 오범은 양주에서 알아주는 역술가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 여기저기 천거되었지만 나라가 망한 후 그 거처를 동정호 근처로 옮겨 주역을 연구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다. 악양에 도착했을 때 갔던 여관은 주귀라는 형주 특유의 술로 유명한데, 주구전은 아주 옛날에 오범을 방문했을 때 그가 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몇 단지 선물한 적이 있다. 그 날도 그의 이름으로 술을 사고 서신을 남겨 놓았다. 술을 좋아하는 그이니 곧 발견하여 혹여 진왕이 확인하고자 한다면 술값으로 말을 맞춰줄 것이다.

문칙 오범선생은 주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폐관수련 하시면서 주역에 빠진 주구전의 취향덕에 주자서도 여기저기 서책을 얻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구전과 연배가 비슷한 문칙선생은 서로 자주 왕래하였는데, 사계산장에 일년에 한 번 대보름 즈음에 와서 꼭 양주에서 유명한 황주를 수레 가득 실어가고는 했다. 주자서는 진왕과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상에 차려진 음식을 구경했다. 색색에 화려하고 정갈하게 빚은 떡부터 기름에 튀겨낸 전병도 있었다. 평소에 별로 음식에 관심이 없던 주자서였지만, 처음보는 음식은 신기하고 향긋했다. 하지만 주구전이 젓가락을 들지 않으니 전부 그림의 떡이다.

주구전과 진왕은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왕은 정말 농사일에 관심이 있었는지, 어떤 농기구를 쓰며 어느 시기에 어떤 날씨가 좋은 것인지 등을 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날씨 이야기로 주제가 튀었고, 하늘의 별 이야기가 시작되니 또 주구전이 신이 나서 주역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진왕은 마치 주구전이 하는 이야기가 정말 재미 있다는 듯이 맞장구를 맞추어 주었는데, 그럼에도 주구전 옆에 앉아 술 한잔을 가지고 한 시진째 목만 축이고 있는 주자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시가 다가오자 사위에 황혼이 내려 앉으며 바람이 쌀쌀해졌다. 이제 막 청명을 지났으니 대낮의 햇빛은 따뜻했으나 밤바람은 아직 많이 쌀쌀했다. 얼마 뒤 시기 적절하게 주자서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기침을 하고 저가 더 놀랐는지 그대로 멈춰버린 주자서를 보고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진왕전하, 아무래도 어서 머무를 처소를 찾아 자서를 좀 쉬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례의 날씨는 양주와 달라 큰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입니다.” 주구전이 주자서의 등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주자서는 손을 공수하여 무례를 범했다고 사과했다. 진왕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머무르실 곳을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럼 여기 중명원에 머무십시오.”

주구전은 벌떡 일어나 손사래 치며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어찌 미천한 저희가 별궁에 머무른다는 말입니까? 그런 법도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주자서도 조부를 따라 일어나 옆에 섰다. 진왕도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술시가 다 되어가는데,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공의는 해시부터 통금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인을 불러 손님이 머물 처소를 청소하라 일렀다. 주구전은 자리를 피하기위해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밖에서 엽선배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가보아야 합니다.” 진왕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찌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진왕에게 끌려가고 있는데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진왕이 주구전에게 실례라며 잠시 소란을 확인하러 갔다. 문 앞에는 엽백의와 온객행이 서 있었다. 주구전은 엽백의를 다시 보는 일로 안심을 할 줄은 본인도 몰랐다. 엽백의가 말했다. “주가놈아! 어찌 혼자 여기 와 있느냐!” 주구전과 주자서가 얼른 문 밖으로 나갔다. 주구전이 말했다. “엽선배, 아무리 찾아도 없어 이 주모 진왕전하와의 약속을 깰 수는 없어 이리 왔지요. 어서 가서 머물 곳을 찾을 테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 말에 진왕이 끼어들었다. “아직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신 거라면 상선께서도 제자와 함께 이곳에 머무시지요.” 주구전은 황당하여 진왕을 보았다. 물론 중명원은 별궁처럼 넓었지만, 주구전은 또 같은 방을 쓰며 엽백의의 시중을 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진왕이 덧붙였다. “상선께서는 청주를 좋아하십니까? 낙양의 죽엽청은 맛보셨는지요.” 엽백의의 얼굴이 환해지며 진왕에게 말했다. “죽엽청이라 했소? 그 귀한 술이 있단 말이오?” 진왕이 문 밖으로 나가 엽백의의 팔을 끌어당겨 집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저야 이제 주객정도의 실력밖에 안되니 주례(酒醴)에 밝으신 상선께 배움을 청합니다.” 엽백의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술의 진미를 알았구려, 나야 더불어 유유자적하고자 할 뿐이니, 어서 가서 집안에 모든 술을 꺼내 오시오. 오늘 열반주에 오릅시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진왕과 누각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에 진왕의 명령으로 객의 처소를 살피러 갔던 하인이 와서 주구전과 주자서 그리고 온객행을 데리고 내실 근처에 있는 전각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현판이 없는 전각에는 처소 몇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인은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께서 마음가시는 데로 머무소서.” 그리고는 누각이 있는 쪽으로 갔다. 처소에 들어가니 시녀 몇 명이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구전과 주자서가 들어오자 시녀들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세할 물을 대령할까요?” 그러자 주구전이 허허 웃으며 주머니에 염낭을 꺼내 동전 몇 개를 꺼내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했다. “내 시중은 이 아이가 할 테니, 우물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시오.” 시녀들은 주구전에게 다소곳이 인사하고는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물동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들고 시녀들을 따라 나갔다. 온객행과 주구전만 덩그러니 처소에 남아 있었다.

“주대인, 아서는 정말 종손이오?” 주구전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저와 닮지 않았습니까?” 온객행이 주구전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요! 주대인 말씀 편히 하시라구요!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 줄 알고 이러십니까.” 온객행의 말에 헛웃음이 난 주구전이 말했다. “손바닥도 맞대야 소리가 납니다. 제 귀에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만…”

온객행이 주구전을 쏘아보며 말했다. “노야가 또 무슨 소리를 한거요? 걱정 마시오 아서가 원하면 내가 사람을 찾아 대를 이어 주리다!” 주구전은 그건 또 무슨 불경한 소리인가 하여 미간을 찌푸리며 온객행을 보았다. “주대인, 저는 마음만 제 것이면 몸은 얼마든지 남과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객행이 히히 웃었다. 주구전은 도를 닦는 놈 치고는 발랑 까졌다고 생각했다. 엽백의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스승과 제자였다.

(33) 임종시 공융
涓涓江漢流 天窗通冥室
가늘게 흐르는 물이 흘러 강으로 가고하늘을 보는 창 어두운 방과 통해 있으며,
讒邪害公正 浮雲翳白日
모함하는 말들이 바르고 곧은 이를 해치고 흘러가는 구름이 밝고 따뜻한 빛을 가리네.
靡辭無忠誠 華繁竟不實
듣기만 좋은 화려한 말 충성스런 마음 없고 수많은 꽃들이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데,
人有兩三心 安能合爲一
사람들이 마음속에 딴마음을 품는다면 어떻게 하나처럼 합쳐질 수 있겠는가?

(34) 방하착(放下着)은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내려 놓아라 라는 뜻이고,착득거(着得去)는 마음에 있는 모두를 그대로 지니고 떠나라' 라는 불가의 가르침.

(35) 법구경 나한품 95
不怒如地 不動如山 眞人無垢 生死世絶
땅처럼 서로 다투지 않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진흙이 없는 연못과 같은 아라한에게는 생사가 없다.

(36) 도덕경 8장 上善若水 夫唯不爭 故無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저 다투지 않으니, 허물도 없다.

(37) 장자 내편 7응제왕
无爲名尸, 无爲謀府, 无爲事任, 无爲知主, 體盡无窮, 而遊无朕, 盡其所受乎天 而无見得.
명예의 표적이 되지 말라, 모략의 창고가 되지 말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라, 지혜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 무궁한 도를 잘 터득하고, 자취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하게 하고, 스스로 얻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지 말라.

(38) 진공묘유 眞空妙有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

雨霖鈴 第7

7. 運否天賦
좋은 운명이건 나쁜 운명이건 모두 하늘의 뜻.

양심당은 태보의 설명으로 시끌시끌했다. 진왕이 입을 열었다. “천자께서 진왕을 의심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한무제가 여태자를 의심했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27) 나는 자식이니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천자께 가서 아뢰고 무죄를 증명하고 싶으나 만나주지 않으시니 다른 방도가 없어 이 곳에 온 것입니다.” 시끄럽게 떠들던 소림사의 노승들이 조용해졌다.

주구전은 그럼 어서 가 목을 메 결백을 증명하고 이 일을 모두 끝냈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생각을 했다. 주지가 사계산장에 의뢰할 만한 일도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엽백의가 진왕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기왕이 마셨다는 그 술은 강호의 술인데 대체 어떻게 황실로 흘러 들어갔는지… 떼지도 않은 아궁이에서 연기가 나겠습니까?” 그러자 노승들이 여기 저기서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주구전은 엽백의 바로 옆에 앉아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유시와 술시 사이의 어중간한 시간대에 자리는 파하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주구전을 진왕과 그와 함께 온 젊은 무관이 잡았다. “주대인.” 엽백의와 양심당을 나와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주방에 들러 요기할 것을 챙기려고 했던 주구전은 엽백의 눈치를 보며 진왕에게 인사했다. “양주 임해의 주구전 진왕께 인사 올립니다.” 엽백의는 옆에서 보고 있다가 포권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진왕이 말했다. “사계산장에서 오셨다고요? 사계절 꽃이 만발하고 세상의 모든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 (四季花常在, 九州事盡知.)” 주구전이 고개를 들어 진왕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사계산장의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니면 주구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사계산장의 명성이 높은 것일수도 있다. “저희 고숙께서 사계산장에서 수학하셨다 들었는데 혹 알고 계십니까? 씨는 주, 휘은 희, 자는 회암(晦庵)… 그리고 시호는 서선공(署宣公)입니다.” 주구전은 그 시호라는 선이 무슨 선자인지 궁금했다. 愃(잊을 선)일지, 熯(태워 없앨 선)일지, 아니면 燹(들불 선)일지.

나이 들어 좋은 것은 변죽만 늘어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주구전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인지 까마득하여 소인 기억나지 않아 송구스럽습니다.” 엽백의가 옆에서 보고 서있다 말했다. “노인네의 잘못은 그저 노망인 셈 치시오. 한참 어린 것이 벌써부터 그렇게 망령이 들어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주구전은 옆에서 허허 웃었다.

엽백의가 주방으로 가려고 하자 주구전도 그 뒤를 따르려 다시 진왕에게 물러남을 고하려 했다. 옆에 서있던 젊은 무관이 입을 열었다. “주자서라고 했던가? 그 자는 주대인의 종손이라 하던데 맞소?” 주구전은 몸을 돌리려던 것을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황실에서 온 자들이 어찌 자서를 알고 있단 말인가?’ 주구전은 괜히 머뭇거려 의심을 사는 것보다 미리 말하는 것이 나을 듯싶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제 동생인 주구단(周求丹)의 손주놈입니다. 제 동생은 양주 단양의 현위 말단관직에 있었는데 환란에 명을 달리 했지요. 저의 질자 내외 역시 동생과 함께...”

이 것은 사실이다. 단지 주구전의 질자 내외는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었다. 황실의 높으신 분들의 권위 싸움에 휘말려 단양에서 사계산장이 있는 임해로 피난을 오다가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주구단의 서신에는 질자 내외에게 아이가 생겼으니 부디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주구전의 눈에 슬픔이 서렸다. 그의 눈빛이 무거워진 것을 발견한 무관은 괜히 씁쓸하여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분과 닮은 것 같아 물은 것이오. 실례했소. 하도 얼굴을 가리기에 주대인의 연동인가 하였소.” 주구전은 화가 일었지만 그저 허허 웃었다. 옆에서 보고 듣고 있던 엽백의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진왕이 물었다. “혹 숭산에 머무르실 계획이십니까? 주대인?” 주구전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논의가 끝나면 어서 양주로 돌아 가야지요. 청명이 지났으니 곡우가 되기전에 밭에 거름을 주어야 하는데, 그전에 돌아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왕이 반색하며 말했다. “주대인께서 농사일에 조예가 있으십니까? 모자란 진왕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진왕은 주구전의 거절을 거절하며 그를 굳이 낙양성 밖 공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초대했다.

진왕은 왕에게 축객령(逐客令)을 받아 낙양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진왕이 낙양성 제일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선문관이 있는 공의 였다. “낙양까지 오셨으니 낙수는 보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를 띄워 강을 거슬러 황하를 유람하는 것도 좋지요.” 주구전은 그 제의를 거절하기 위해 애썼으나 오히려 엽백의가 그 말에 더 관심을 보였다. “황하를 강물 위에서 유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진왕도 신이 나서 대답했다. “장명산 상선께서도 함께 오신다면 모두 진왕의 복이지요.”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주구전은 저녁으로 먹을 것을 주방에서 얻어 찬합에 담아들고 처소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 처소안에 불을 밝히지 않았다. 아직도 밖을 헤매는 것인가 생각한 주구전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자 주자서는 침상 위에서, 온객행은 침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침상에 몸을 기대고 자고 있었다. 주구전을 뒤따라 온 엽백의가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저놈이 네 질종손이 마음에 든 것 같으니 조심하게, 아주 끈질긴 놈이라 혹여 자네 질종손이 마음이 없더라도 놔주지 않을 걸세.” 주구전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말했다. “주가 대를 끊을 수는 없지요. 나이도 다 찼으니 어서 혼처를 알아봐야 할건데…”

주구전의 말에 언제 깨어난 건지 온객행이 벌떡 일어나 주구전을 보며 말했다. “아서는 주대인의 화동이오?” 그 말에 옆에 서있던 엽백의가 호탕하게 ‘하하하’ 웃었다. 주구전은 어이가 없어서 ‘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온공자. 우리 귀한 종손에게 그게 무슨 말이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구전 앞에 무릎 꿇더니 소매와 품에서 염낭을 꺼내며 말했다. “정말 종손일 뿐이오? 화동이 아니오? 만일 아서가 그대 화동이라면,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줄 테니 내게 파시오.” 주구전은 정말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웃고 있던 엽백의가 온객행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네가 주가 대를 끊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온객행은 맞은 머리를 감싸며 엽백의에게 말했다. “노야! 이 온모 그리 오래 살지 않았지만 일평생 이렇게 옥돌 달아주고 싶은 이는 처음이오. 아직 패옥도 구슬도 주지 않았으나, 어서 찾아 보내겠소.”(28) 주구전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 자서를 며칠이나 봤다고 이리 성급하게 구시오.” 소란에 주자서가 일어났는지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서 일어나려는 주자서를 말리며 주구전이 그를 다시 눕히고 이마에 손등을 데어 보았다. 열은 없었으나 얼굴이 창백했다.

주구전의 뒤에 바짝 붙어 주자서를 보던 온객행이 주구전과 엽백의가 가져온 찬합을 열며 부산을 떨었다. 주구전은 할 말이 많았으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창백한 얼굴을 보니, 이미 진왕을 만난 것 같았다. 황제의 생질이니 황실에서 황족으로써 법도를 배우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다. ‘알아보고 놀란 것이지.’ 주구전의 눈을 맞춰오는 주자서의 눈에 질문이 가득하다. 주구전은 대답을 할 수 없어 한숨만 쉬었다. 주자서의 손을 잡고 주구전이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두 사람을 탁상에 앉아 지켜보던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부러 이것을 가져오라, 저것을 가져오라며 시끄럽게 굴었다. 온객행도 주가의 눈치를 보며 엽백의가 하자는 대로 장단을 맞추었다.

해시가 거의 다 되어 소등시간이 가까워지자 주구전은 괜히 초조했다. 온객행은 찬합을 반납하고 돌아와 주자서 옆에 꼭 붙어 그의 시중을 들었고, 주구전은 엽백의가 다른 문파로 가서 소동을 벌일까 싶어 그를 붙잡아 두고 있는 중이었다. “엽선배, 아직 확실히 누가 이 일에 연관되어 어떤 목적으로 일을 벌이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조사한다는 기미를 알려주어 무엇이 좋다고. 부러 성난 벌집을 들쑤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런 일일수록 조용하게 움직여야 탈이 없을 것이니…” 엽백의가 탁상을 ‘탁’치며 말했다. “성난 벌집쯤이야 들쑤셔 태우면 그만인 일에 무엇을 조용히 움직인다는 말이냐.” 엽백의의 말이 끝나자 제등을 들은 심아와 함께 처소로 주지 여운이 들어왔다. 주구전이 일어나 인사하자 엽백의도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 시늉을 했다.

엽백의가 온객행에게 소리쳤다. “쓸모없는 놈아 손님 오셨으니 차 내오너라.” 온객행은 주자서가 누워있는 침상 옆에 붙어 찬물에 적신 영견으로 주자서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주자서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를 준비하려고 했다. “아이, 아서 내가 할 테니 누워있어.” 온객행은 그렇게 말하고 주자서를 침상에 눕혔다. “노야는 손이 없소? 발이 없소? 망령이 들었나 차정도는 알아서 마시시오.” 온객행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주전자를 찾아 화로에 올려놓고 사계산장의 짐꾸러미 속에서 찻잎을 찾아 우렸다.

엽백의가 주지 여운에게 말했다. “저놈이 다른 것은 다 시원치 않은데 차 맛은 꽤 좋네.” 주구전이 자리를 비켜 탁상에 자리를 마련하자 여운이 가서 앉았다. 심아는 문간에 제등을 놓고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침상에 있는 주자서를 보고 있었다. 아까 낮에 진왕을 뵙기 전까지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안색이 좋지 않다. 여운이 운을 띄웠다. “아미타불, 논의하자고 부른 사람은 몇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이지경이 된 것인지… 관세음보살.”

엽백의가 말했다. “간모를 활용하는 것에 다섯가지가 있으니, 향간(鄕間; 같은 출신의 사람을 이용한다.), 내간(內間; 벼슬한 사람을 이용한다.), 반간(反間; 적의 세작을 이용한다.), 사간(死間; 적의 세작을 사지로 몰아 정보를 부러 누설시킨다.) 생간(生間, 직접 보고 돌아와 보고한다.)이 있다 했소.(29) 그러니 반간을 할지, 사간을 할지 그것은 소림사 역량에 달린 일이오.” 주지 여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 그들도 알고 있으리라, 소림사 내부에도 누군가가 있다.

주구전이 여운에게 말했다. “사계산장은 지금 어떤 일을 의뢰 받을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주지 여운도 그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림사의 상황도 사계산장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환란으로 밭과 논이 모두 폐허가 되어 농사짓는 농민은 모두 피난 갔거나 죽었다. 부모를 잃어 불가에서 거둬드린 고아는 또 몇인가? 당장 목구멍이 관청인 수많은 제자들을 먹이려면 소림사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일에 관여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했을 것이다. 떠돌며 굶는 난민을 그저 바라만 볼 중놈들은 아니다.

서운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껄끄러운 주구전은 거절을 말을 이미 꺼내 놓고도 안절부절하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엽백의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대의를 위해 전쟁한다던 귀족놈들은 다 자기 잇속을 채우느라 백성에게는 관심이 없더구나.” 그리고는 혀를 좀 더 찼다. 주구전도 같은 마음이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흑탕물에 옷이 젖을까 염려해서가 아니고 몸을 굽히는 것은 무엇에 부딪칠까 염려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가 두려워서도 아니다.(30) 세속의 그 어느 것도 부질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계산장에서 수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세속의 잣대를 잊고 도를 닦기 위함 이지 이렇게 복잡하게 실타래 얽힌 듯한 판에서 주판을 튀기며 사람 목숨으로 셈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주구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엽백의가 여운에게 말했다. “강호의 일은 내게 맡기시오. 내게 보름의 시간을 주면 이곳 저곳 다녀보며 무림맹에 연관된 문파에 대해 알아 오겠소.” 여운이 화색으로 말했다. “상선께서 그리 하시겠습니까?” 주구전은 주지에게 아까 양심당에서의 일을 기억하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여운은 부러 모른척하며 엽백의를 부추겼다. “선배께서 어찌…” 주구전의 말이 끊으며 엽백의가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하여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이번엔 나도 같이 취해 보려 하오.”(31) 주구전은 왠지 그 말이 엽백의가 자기명을 재촉하는 말로 들려 불안해졌다. 주구전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발견한 엽백의가 무거운 미소로 대답했다. “아직 안 죽는다. 네놈은 정말 쓸데없이 눈치가 좋구나.”

엽백의가 나서는 바람에 주구전은 곤란하게 되었다. 일이 길어질 것 같다는 연락은 이미 해 놓았으니 양주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마음이 자꾸 양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것을 하는 일은 주구전은 좀처럼 잘 하지 못했다. 그가 사계 산장에서 수학하게 된 것도 그의 집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있으니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한 것이었고, 사계산장 내부에서도 그는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아 그저 강호인의 본분인 도만 열심히 닦았다.

사실 사계산장 장문자리도 원래대로라면 주구전의 것이었다. 사계산장 내에서 가장 오래 수학한 이도 그렇고, 시끄러운 세상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게 중심을 잡은 것도 주구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구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형과 사제, 사백과 사숙이 스러져 가는 것을 지켜본 주구전은 겁이 나서 장문직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그 책임을 짊어질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구전은 스승님이 아끼던 손제자 하나를 아무나 찍어 장문으로 세웠다. 이제 사계산장에서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진회장은 그렇게 사계산장의 장문이 되었다.

하늘아래 이로움은 있음에서 비롯되나 있음은 없음에서 비롯된다. 있음의 의로움 이란 없음의 쓰임 덕분이다.(32) 그래서 주구전은 빈 채로 무엇이든 담고자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구전은 주자서가 걱정되었다. 진왕을 본 것 만으로 앓아 눕는 저 순한 것을 데리고 독사가 득실대는 황실이니 귀족사회로 들어 가려 하니 호랑이 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미친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먼저 보낸다고 저를 두고 갈 아이도 아니다. 검선이 강호의 일을 맡았으니 주구전은 어쩔 수 없이 황실에서 강호와 연을 맺고 일을 벌이는 자들을 찾게 될 것이다. 마침 때 좋게 진왕을 만나 도성 근처로 갈 명분도 있으니 저 중놈이 알고 저러는 것이다.

주자서 앞에서 셈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사계산장에 의뢰를 하시는 거라면, 장문과 협의해야 하니, 연통을 넣게 해주시지요.” 그러자 여운이 말했다. “이 일과 사계산장을 엮으시겠습니까?” 주구전은 울컥 화가 일었지만 한참 눈을 굴리다 말했다. “그럼 이 일은 나의 일이니 우리 종손은 양주로 보내주시게.”

그러자 옆에서 눈치를 보며 대화를 엿듣던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종조부! 조부 곁에 있게 해주세요.” 주구전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어른들의 차시중을 들던 온객행도 옆에 덩달아 무릎 꿇으며 주구전에게 말했다. “주대인, 아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세요. 제가 잘 보살필게요.” 주자서와 주구전이 온객행을 동시에 보았다. 대체 이 치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여운이 시끄럽게 헛기침을 했다.

(27) 대학연의 大學衍義 卷22 格物致知之要(二) 辨人材 憸邪罔上之情
한무제의 아들 여태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를 시기하는 간신배가 여태자와 그의 어머니 위태후가 찬탈을 시도한다는 모함을 하여 여태자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목을 멘다. 그가 죽은 후 간신배들의 간사함을 알게 된 한무제는 모함한 이들을 다 죽이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다.

(28) 시경 위풍 木瓜 던진 모과
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모과를 주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복숭아를 주기에 어여쁜 구슬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내게 자두을 주기에 어여쁜 옥돌로 보답하였지. 굳이 갚자고 하기보다 길이길 사이좋게 지내보자며
패옥은 좋아하는 정인에게 주는 것이고 구슬은 혼인할 때 사주단자에 넣는 것이며, 옥돌은 혼인할 때 머리에 다는 장식이다.

(29) 손무자직해 하권 제 12 用間; 간첩의 활용
故 用間有五 有鄕間 有內間 有反間 有死間 有生間 五間俱起 莫知其道 是謂神紀 人君之寶也
이는 다섯 가지 간첩의 조목이다. 다섯 가지 간첩을 순환으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 이치를 측량할 수 없으면, 이것을 일러 신묘한 기강이라 하니, 군주의 소중한 보배이다
鄕間者 因其鄕人而用之 內間者 因其官人而用之 反間者 因其敵間而用之 死間者 爲誑事於外 令吾間知之 而傳於敵間也 死間者는 爲誑事於外 令吾間知之 而傳於敵間也 生間者 反報也.
1. 향간이란 적지의 고장 사람을 이용하여 후하게 대우해서 사용하는 것,
2. 내간이란 적의 벼슬한 사람을 이용하여 은밀히 뇌물을 주어서 결탁한 다음, 적국의 실정을 정탐해서 적국의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여, 적으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고 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
3. 반간이란 적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와서 첩자 노릇을 하는 자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고, 후하게 뇌물을 주어서 도리어 우리에게 쓰임이 되게 하는 것,
4. 사간이란 거짓으로 허황된 일을 밖에서 만들어 우리 간첩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해서 적의 간첩에게 전달하여 누설하게 하는 것이다.
5. 생간이란 돌아와서 적의 실정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는 것.

(30) 순자집해 修身篇 수신편 第二
行而供冀 非漬淖也, 行而俯項 非擊戾也, 偶視而先俯는 非恐懼也.
길을 걸을 적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진창에 옷이 젖을까 염려해서가 아니고, 길을 걸을 적에 목을 숙이는 것은 무엇에 부딪칠까 염려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마주볼 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31) 굴원 漁父辭 어부사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이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소”

(32) 도덕경 11장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고로 있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없음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있음에서 비롯되나, 있음은 없음에서 비롯된다.

雨霖鈴 第6

6. 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 성글어도 놓치는 것이 없다.

처소에 가만히 있는 것이 심심했던 주자서와 온객행은 주방에서 간식을 얻어먹고 소림사 여기 저기를 들쑤시며 구경하는 중이었다. 논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승려들 모두가 바빠 이 두 사람이 어슬렁 거리는 것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그 날 오후, 소림사는 더 찾아온 사람과 이미 머무는 객으로 북적이고 시끄러웠다. 산문 앞까지 온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아마 귀하신 누군가가 온 모양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낙양으로 놀러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소매를 흔들며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말했다.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 다면 부질없이 내 소매만 저버리게 되리라, 이 한스러운 것은 죄가 많으니 그대는 마땅히 취한 나를 용서하오.”(22) 숭산에서 낙양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한시진이면 닿는 곳이다. 주자서는 새삼 궁금했지만 또 불안한 마음이 있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온객행이 몸을 붙여 오더니 주자서의 이마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이제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아파?”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부루퉁하게 괜찮다고 했다. 온객행은 또 옆에서 찬바람을 맞으면 안되니 들어가자는 둥 옷을 더 입어야 한다는 둥 흰소리를 하며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다 주자서의 심의 소매를 들어 보이며 꼭 새 옷을 사야 한다고 말하던 온객행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로 돌아섰다.

법주 혜고 스님이 갑옷을 입은 남자와 비단 옷을 입은 공자와 함께 서있었다. 회주는 그들을 본당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법주스님이 먼저 인사했다. “아미타불 처사님들께서는 거처로 돌아가시지요.” 주자서는 법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공수하며 인사했다. 그가 절하는 것을 멀뚱히 보고 있던 온객행도 포권했다. 갑옷을 입은 무관과 비단옷을 입은 공자는 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법주에게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다시 본당으로 향하고 난 뒤에야 주자서는 힐끔 고개를 들어 그들이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말했다. “저들은 누구지?”

주자서는 그들의 신발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황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았다. 공자는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고, 무관은 가죽을 덧댄 말을 타는 장군이 신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주자서의 아버지가 예전에 신던 것과 같은 것이다. 주자서는 허리를 펴고 서서 한동안 무관과 공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도 언제인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자가 입고 있는 옷도 예전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입었던 것 같아 괜히 울적했다. 주자서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저 멀리 가던 무관이 그들을 힐끔 뒤돌아봤다. 그 무관은 주자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커다래지더니 가던 길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부러 길을 다시 돌아서 주자서와 온객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주자서는 당황하여 몸을 뒤로 돌려 다급히 처소로 향했다.

온객행도 주자서의 뒤를 따랐다. 무관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공자, 잠시 멈추시오.” 주자서가 우뚝 멈춰서 발끝을 봤다. 귀족이 말을 걸었으니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죽어도 모를 일이다. 주자서는 몸을 숙이며 뒤돌았다. 다시 소매를 올려 공수하려는데 무관이 그의 팔뚝을 잡아채며 그를 일으켰다. 무관의 행동에 놀란 주자서는 한동안 얼어 있다가 무관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온객행이 무관을 웃는 낯으로 보며 팔을 떼어 냈다. “대인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말로 하시지요.”

주자서는 괜히 온객행 뒤쪽에 서서 그의 소매 끝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숭산에 온 이후로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고 종조부의 중의나 장포를 심의처럼 둘러 입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주자서는 몸이 작았는데 그래서 더욱 어려 보였다. 온객행은 신이 난 듯 소매를 펄럭이며 주자서를 온몸으로 가리고 무관에게 말했다. “우리 아서는 아직 어려서 낙양근처에 온 일은 처음이니 너무 놀리지 마소서.” 무관이 온객행 뒤에 있는 주자서의 얼굴을 다시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아서? 명이요 휘요? 공자 혹 주(朱)씨가 아니오?” 온객행이 답했다. “아서는 주(周)씨요. 아서, 혹시 휘가 있어?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에게 물었다. 주자서는 고개만 흔들어 아니라고 답했다.

무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공자와 법주도 다시 두 사람 앞으로 왔다. 오는 길에 심아스님이 나타나 법주에게 주자서와 온객행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그들과 함께 있던 공자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가오자 무관은 함께 온 공자의 눈치를 봤다. 약관을 조금 넘긴 것 같은 공자는 무관에게 말했다. “유교위 무례를 멈추시게.” 공자의 말에 무관이 말했다. “혁란(赫蘭), 이 아이 좀 보게, 당이모님이랑 닮았어.” 그 말에 혁란이라고 불린 그 공자가 온객행 앞에 와서 섰다.

온객행의 소매에 매달려 있는 주자서를 힐끔 보더니 “뭐야? 사내 잖아?” 목을 가다듬더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사례의 군왕 진사왕(晉沙王), 이쪽은 월기교위 유연(劉硏)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소매를 놓고 공수하며 인사했다. “저는 양주에서 온 주자서라 하옵니다.” 온객행도 포권하며 인사했다. “나는 장명산에서 온 온객행이오.” 온객행의 인사를 들은 진사왕은 크게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대 혹 장명산 상선의 제자요?” 온객행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장명산 노인네는 어쩌다 같이 살게 된 사람이지 스승이 아닙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유교위도 진사왕과 함께 웃었다.

진사왕은 주자서가 손을 내리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 온객행에게 붙어 서자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 자서라고 했던가? 무슨 자에 무슨 서자를 쓰나?” 주자서는 내렸던 소매를 다시 들어올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소매를 위로 올려 얼굴을 가리며 대답했다. “사람(子) ‘자’에 집오리(舒鳧; 서부)할 때 ‘서’ 입니다.” 공자는 ‘흠’ 하고 말았다. 대답이 끝났으니 어쩔 수 없이 소매를 내린 주자서가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가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진사왕이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는가? 혹 연동인가?” 그 말에 주자서는 고개를 번쩍 들어 그 질문을 한 진사왕을 보았다. 그는 둘째 황자 진왕(晉王), 사마연(司馬連)이다. 그는 주자서를 알지도 몰랐다. 어릴 적 황궁에서 황자들과 함께 수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주자서는 막 글자를 읽기 시작한 어린아이였고, 황자들은 이미 유교경을 모두 깨친 후였다. 어린 마음에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어 뜻도 모르는 어려운 유경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진왕은 주자서를 기억할까? 그의 내종형제이며 황제의 생질인 주영(朱嬴)을.

주자서의 얼굴을 본 진사왕은 “흠… 정말 고모님을 닮았네.” 그때 법주가 끼어들었다. “주공자는 양주에서 오신 주대인의 종손이시라구요?” 주자서는 괜히 그 참견이 기꺼웠다. 어서 진왕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법주스님의 말에 진사왕이 말했다. “주대인?” 법주가 그에게 양주 사계산장에서 온 장로라고 이야기하자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주자서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자서는 사마연을 보고 놀라서 방금 나누었던 불경한 이야기를 잊었지만 그것을 잊지 않은, 잊지 못한 온객행이 주자서와 마주서며 물었다. “아서…? 정말 화동이야? 주대인의 화동이냐구!” 대답 없는 주자서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며 얼굴을 붙이고 말하는 온객행이 부담스러워 주자서는 대답도 없이 고개만 도리질했다. 주자서와 온객행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고 있던 법주는 괜히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고는 진사왕과 월기교위의 길을 재촉했다. “주지께서 본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그들은 다시 본당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공수하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멍하니 바라보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주대인의 화동이야? 주대인의 화동이었어...?”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자서는 목이 타서 물을 연거푸 마셨다. 주구전은 주지를 만나러 갔고, 장명산 검선께서도 함께 가셨으니 진사왕과 월기교위 역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월기교위의 얼굴은 낯선 얼굴이다. 그가 황자의 이름을 부를 정도라면 필히 왕족일 것이다. 월기교위는 성밖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이니, 황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대체 그들은 소림사에 무슨 일로 온 것일까? 주자서는 주구전이 의논하러 가기전에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주자서는 문간 옆에 며칠 동안 선잠을 자야 했던 의자에 앉았다. 뭔가 어딘 가에 당장 기대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온객행이 앉아 있는 주자서에게 침상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아서… 아직도 아픈거야? 얼굴이 새하얘.” 그리고는 주자서의 뺨을 쓸었다. 주자서는 또 미간을 찌푸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 올려 얼굴을 묻자, 무릎에 덥혀 있던 이불이 아래로 쏟아졌다. 온객행은 그 이불을 들어 덮어준다는 핑계로 주자서를 이불로 감싸며 자기 팔 안으로 안았다.


양심당 안에는 지주와 항렬이 같은 회주스님, 그리고 그들보다 항렬이 높은 고승과 노승 몇몇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양심당은 계지원 안에 있는 전각으로 소림사의 장로들이 보다 높은 불법을 수련하는 장소이다. 방장실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어떠 한지 대충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들어가며 주구전은 공수하여 노승에게 인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까지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주구전의 항렬이 제일 낮았다.

주구전은 오늘도 혹시 단양파의 육해방이 오지 않았을까 눈으로 힐끔거리며 둘러보았다. 인사를 마치고 문간에 서서 혹시 누가 더 올까 싶어 밖을 보고 있자 장명산 검선이 노승과 하던 대화를 멈추고 주구전을 데려다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할 말은 하겠네.” 주구전은 모르는 척하며 검선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보니 소림사 내부에서는 이미 말을 마친 것 같았다. 개방 장로들이 신나게 떠들어댄 이야기로 처신을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검선은 곧 명상을 시작했고, 노승중 몇 명은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 양심당 안으로 지주 여운이 들어왔다. 젊어 보이는 무관과 비단 옷을 입은 공자였는데, 그 옆에 태보와 태보와 함께온 무관도 같이 서 있었다. 태보와 함께온 무관은 젊어 보이는 무관과 아는 사이인지 꽤 친밀해 보였다. 비단옷에 게다가 비단 신발을 신은 공자가 들어오자 앉아 있던 노승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미타불 진왕을 뵙습니다.”

그 말에 앉아 있던 주구전도 눈치껏 일어나 손을 공수하여 인사했다. 진왕이라면 황제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강호와 결탁했다는 의심을 사서 황제에게 축객령을 받아 지금은 도성 밖에 있는 신세라 하더니, 그것이 정말인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시켰다고 해서 무언가를 할 만큼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주구전은 조용히 입을 닫고 마치 스님이 된 마음으로 주변에 스며들었다.

인사를 주고받던 진왕이 장명산 검선과 주구전을 발견했다. 그가 검선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장명산 상선이오?” 검선은 못마땅하다는 듯 한껏 심술이 난 얼굴로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장명산 엽백의(葉白衣)요.” 그러자 진왕이 손을 모아 공수하며 그에게 인사했다. “영광이오. 그대가 세상에 난지 벌써 몇 백 년이 흘렀다 하던데, 겉모습은 마치 내 또래인 듯하여 무례를 범할 뻔 하였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에게 엽백의가 말했다.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하니, 마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오.”(23) 진왕이 대답했다. “환히 비추는 저 해와 달도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의 일이야, 좋고 나쁨에도 일이 많으니 어긋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24) 엽백의는 그 대답에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진왕을 봤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주구전만 손에 땀이 났다.

그들은 중앙에 있는 불단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았다. 태보와 진왕도 서쪽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저 자리는 분명 태보가 유교경전을 들이대며 노승들의 자리를 뺏은 것이다. 그래서 주구전은 방금 진왕이 한 이야기가 더 의아하였다. 천자의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천자가 보통 사람인냥 맞고 틀릴 수 있다니 황제가 들었다면 경을 칠 이야기다. 옆에 앉아 있던 엽백의는 어젯밤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당산에 다녀온 모양이다. 무당파의 장문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며,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눈치였고, 무당파가 그러하다면 더 멀리 있는 공동파, 곤륜파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아미파는 어찌되었든 불심으로 도를 닦으니 소림사와 비슷한 목소리를 낼 것이 틀림없다. 강호를 대표하는 무림정파의 이름 없이 만들어진 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조직은 대체 목적이 무엇이기에 천자의 일에까지 관여하려 하는가?

주구전은 괜한 의심이 일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말 할 수 없는 그 무림맹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소림사는 불가를 믿는 강호 정파들 중 가장 오래 되었고 그 숫자도 개방에 뒤지지 않는다. 소림사 제자 모두가 불심이 깊지는 않다. 개방 장로라고 하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그저 배만 채우면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자기들 안위부터 찾는 자들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며 빌어먹고 사는 것이다. 사계 산장도 개방만큼이나 염탐이나 세작 관련하여 유명하였으나, 사실 개방처럼 세세하게 모든 일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저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다 들어지는 것들과 보아진 것들을 잘 조합해서 유추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계산장은 제자들에게 사기나 춘추 같은 역사서도 가르쳤다. 보통 사람의 일이란 시대가 바뀌어도 반복되는 법이라 사계산장에서 유추한 것들이 대체로 틀린 적이 없었을 뿐이다.

옆에 앉아 있던 장명산 검선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무림맹과 관여한 자는 누구요?” 숭산 논의를 꿰뚫는 질문이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모두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엽백의를 보았다. 검선은 평소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으나, 그 기세가 조금 화나 있었다. 환난이 끊이지 않던 시절부터 세상을 떠돌던 이 노인네의 눈에는 강호와 관이 손을 잡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걸로 보셨으리라. 주구전은 괜히 나섰다가 혹여 책임을 지게 될까 앉은 자리에서 전전긍긍했다.

엽백의가 소리첬다. “이 자리에 그 누구도 관여한 자가 없는 모양이니, 나는 그대들을 믿겠소. 만에 하나 거짓이면, 이 엽모보다 먼저 삼도천을 건너게 될 것이오.” 그리고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주구전은 엽백의가 문파를 돌아다니며 같은 질문을 하고 다닐까 봐 얼른 일어나 검선을 붙잡았다. “엽선배! 엽선배, 진정하고 일단 자리에 앉아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그러자 주지도 검선을 말리며 말했다. “아미타불, 상선. 방법을 모르는 중생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 멉니다. 캄캄한 어둠속에 모두 헤매고 있으니 가르침 주시지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25) 검선이 가던 길을 멈추고 주구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자리로 와 앉았다. 주지 여운이 말했다. “이번 일은 황실과 상관있으니, 태보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하십시오. 소림사에는 스스로 통발안에 들어가는 물고기는 없습니다.”(26)

태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왕을 보았다. 사실 이 자리에서 제일 의심스러운 자는 진왕이다. 대체 어떤 연유로 그가 이 곳에 와 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듯했다. 일단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당사자가 아닌가. 부러 찾아와 태보가 황제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장명산 검선이 운을 뗐으니 누구든 이 일에 대답을 하던지 대책을 내 놓아야 했다. 기세 좋게 일어난 것치고 태보는 별말 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황실의 상황을 알고 있어서 별말이 아닌 것일 수도 있었다. 엽백의는 대충 상황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어떠한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얼굴에 ‘고작 이런 일로 강호에 사람을 쓰다니 멍청한 것들’이라고 쓰여 있는 듯하여 주구전은 괜히 황실의 사람들 눈치를 보았다. 다 늙어서 누군가의 시중을 들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엽백의의 시중은 그 누구보다 고되다.

소림사 중놈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주구전은 당장이라도 날 좋은 양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한 해 먹고 살 농사나 잘되면 그만인 안락하고 평탄한 삶으로. 아마도 주지는 사계산장에게 이 일의 배후를 물어볼 요량인 것 같다.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필 멀리 있는 양주 임해의 사계산장에 의뢰하다니 지주도 꽤나 여기 저기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황실의 일이라 시끄럽게 떠들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개방은 괜한 의심을 사기 딱 좋으니, 조용히 사람을 움직이는 사계산장에 부탁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주구전은 아까 검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 말릴 것이 아니라 같이 따라 나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태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진왕의 눈치를 보며 황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그리고 진왕은 마치 그것이 남의 일 인양 태연한 얼굴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딱히 억울하다 거나 부인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어쩌면 저 속에 사람이 아니라 교활한 여우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2) 도연명 飮酒 술을 마시다
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 但恨多謬誤 君當恕醉人
만약 다시 흔쾌히 술 마시지 않는다면 부질없이 머리 위의 두건만 저버리게 되리라.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잘못이 많으니 그대는 마땅히 술취한 사람 용서해주오.
도연명은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술을 걸러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23) 굴원 懷沙賦 회사부
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邑犬之群吠兮 吠所怪也
흰색을 바꾸어 검다고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한다.
마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이상한 사람 있어 짖는 것이고

(24) 송옥 九變 구변
彼日月之照明兮 尙黯黮而有瑕 何況一國之事兮 亦多端而膠加
환히 비추는 저 해와 달도 구름에 가리면 어두워지는 데 한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일이야 선악에도 일이 많으니 어긋날 적도 있으리라.

(25) 법구경 우암품 60
不寐夜長 疲倦道長 愚生死長 莫知正法
잠 못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어라.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은 길고도 멀다.

(26) 법구경 애욕품 20
以欲網自蔽 以愛蓋自覆 自恣縛於獄 如魚入苟口
탐욕의 그물로 스스로를 가리고 애욕의 덮개로 스스로를 덮으며 스스로 방자하여 감옥에 갇힌다. 마치 물고기가 통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雨霖鈴 第5

5. 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장명산 검선의 입에서 제령이 언급되었으니 다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혼란한 시기가 지나 명맥이 끊어진 문파는 어쩔 수 없어도 그나마 남아 있던 문파는 남은 제자들을 추슬러 문파를 그럭저럭 꾸려갔다. 혼란한 시기인 만큼 사파도 정파도 모두 조용히 그저 먹고 살 걱정만 하면 되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동안 다들 자기 앞가림 하느라 바빴던 까닭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호가 관가와 엮이는 것은 그 저의가 무엇이던 바닥에는 탐욕이 깔려 있다.

태보는 시끄럽게 무관까지 대동하여 등장한 것 치고는 조용히 앉아 이 난장판을 구경하고 있었다. 태산파의 장문 오래자(傲崍子)와 개방의 분타주 황학(黃鶴)이 과거의 연원을 끄집어내어 논지를 흐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사소한 원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옛말에 큰 원망은 화해해도 남는 미움이 있다했다.(15) 그나마 개방과 태산파는 통일을 이룩한 나라의 국민이었으니 이렇게 목소리 높여 싸울 수라도 있다. 망한 나라의 전란에 스러져간 문파들은 이미 가고 없는데 저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 질까?

오래자와 황학이 떠드는 소리에 주지 여운이 그 둘을 중재한다고 소란스럽다. 정작 제령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검선은 그들의 기세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주구전은 검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꼭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눈치 챘다. 오래자와 황학의 찻잔에 들은 찻물 같은 기세가 어찌 흐르는 강의 기세를 꺾겠는가? 검선은 그 둘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장을 떠나버렸다. 주구전이 검선을 잡으려고 일어났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만 샀다. 어디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일어나셨으니 사람들은 괜히 주구전을 쳐다봤다.

검선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나 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논의라고 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주구전은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회장을 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하와 화산파의 장문 우달(于達)은 어떻게 아는 사이이길래 저렇게 붙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곤륜파(崑崙派)와 공동파(崆峒派)는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이는 지금 이 소란이 정말 온전히 강호의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소림사의 회주는 태보 강상과 단양파의 장문 육해방(陸奚方)과 함께 단상위에 남아 있었고, 주구전이 않아 있는 동쪽자리에는 개방장로 여장(呂孜)과 해백(海伯)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개방의 본거지인 기주(冀州)가 아니라 낙양이 있는 사례(司隷)지역 출신이라 지금 개방 장주와는 관계가 소원한 자들이다. 방주가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의로 왔는지 아니면 주지 여운이 초대한 것인지 주구전은 괜히 궁금했다.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처소로 돌아가려고 산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데 여운이 그를 불러 세웠다. “주대인 잠시 기다리시지요.” 주구전은 주지 옆에 서서 회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볼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지 여운은 태보 강상과 태보가 데려온 무관, 단양파 장문 육해방, 그리고 주구전을 데리고 방장실로 향했다. 회주들이 단상에 남아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개방 장로들도 회주들과 할 이야기가 있는지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다. 방장실로 가는 길은 매우 조용했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구전이 마지막으로 방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주지는 방장실의 문을 닫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았다. 무관은 끝내 자리를 사양하고 들어오는 문 입구에 가서 섰다.

자리에 앉은 여운이 운을 뗐다. “아무래도 무림맹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육해방이 주구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희야 일개 작은 문파일뿐인데 어디 감히 무림맹의 일원이겠습니까?” 주구전은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앉게 됐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태보가 입을 열었다. “부군은 안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처는 바깥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16) 주지의 얼굴색이 평온 한 것을 보아 소림사 중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인가보다. 뜻을 몰라 헤매는 것은 육해방 혼자다.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있자 육해방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보 강상이 그를 흘끔 보더니 주지에게 물었다. “이자는 알고 있습니까?” 주지가 답했다. “지금부터 물으시지요.” 육해방은 당황하여 무릎 꿇으며 말했다. “이 육모는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태보는 차근차근 단양파 내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의 이야기도 나왔고 사계산장의 이야기도 나왔다. 사계산장은 예전부터 구주의 일이 알려져 끝나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그들이 황실에서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은근하게 떠보기 위함이다. 다행인 것은 요 몇 년 사계산장은 정말 먹고 살기 바빠서 관과의 연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단양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관가의 일을 하거나 관리의 호송 호위 등을 하며 그나마 나은 살림을 꾸려왔는데, 자주 관에 들락날락 했으니 의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태보는 단양파가 자주 호위하였던 관리들과 낙양성에 머물 때 지냈던 곳 같은 것들을 물었다. 그러다 태보가 서선공의 이야기를 물었다. “사계산장은 예전에 서선공이 유학하던 곳이 아닙니까?” 주구전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왕래한지 오래 되었는데 왜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주구전을 보더니 말했다. “황후와 강호가 연을 맺게 된 것이 서선공 덕분 아닙니까?” 주구전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것은 서선공께 물어야지 어찌하여 이 주모에게 물으시는지요?” 태보는 콧방귀를 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지가 태보의 눈치를 보며 서국공의 비보를 전했다. 주구전은 서국공의 비극을 알았지만, 그가 충심을 다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은 몰랐다. 그의 부인인 장공주 역시 곧 그를 따라가는 바람에 함께 국장을 치러 줬다고 하는데 어째 주구전이 진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주자서는 결국 장경각에서 서간을 한 책도 읽지 못하고 온객행의 등에 업혀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지객당 안에는 검선이 앉아서 좌선하고 있었는데 온객행을 보고 의아 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누구 시중도 드는구나.”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검선에게 말했다. “노야 아서가 아픈 것 같으니 맥이라도 짚어봐.” 온객행을 쳐다보던 검선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하’ 하고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누운 침상으로 갔다. 주자서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본 검선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어디 무산(巫山)이라도 다녀온 거냐?” 주자서의 손목을 가져와 맥을 짚었다. 온객행은 검선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무산은 앞으로 가야지 구름도 되었다 비도 되었다.”

검선은 주자서의 손목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앞섶을 풀어 해쳤다. 온객행이 놀라 검선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아니 무산은 내가 아서랑 가야지 노야가 왜 이래? 노야도 소매를 자르려구?” 검선은 온객행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열이 오르니 식혀 주어야지!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서 시중은 내가 들 테니 노야는 가서 그 밥통이나 채우고 오시오.” 온객행이 주자서의 장포를 벗기며 말했다. 검선은 한껏 찡그린 얼굴로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주자서의 중의를 마저 벗기던 온객행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선을 보며 말했다. “내 아무리 염치없는 사람이라도 어찌 아픈 사람을 상대로…!” 검선은 온객행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혀를 ‘쯧’ 하고 차며 방을 나가버렸다. 온객행은 벗긴 주자서의 옷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내의만 입은 그에게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아서… 아서라… 그래 아서라고 불러야지. 우리 아서.” 그리고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참 얼굴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찡그려진 표정을 본 온객행이 부산을 떨며 주자서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작은 물동이에 물을 받아 품속에 있던 영견에 물을 적셔 빨갛게 열로 익은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열이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주자서는 지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슴아슴한 꿈속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났던 것도 같은데 얼굴이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부르려고 하다가 지금 있는 곳이 사계산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입이 그를 멈추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주자서는 누군가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모친… 모친…” 사계산장에 온 이후로 주자서는 크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양주의 날씨는 온화했고, 주자서는 매일 수련하고 일하며 자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앓았던 것은 경무장공주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사계산장에 왔을 때이다. 이유도 없이 달포를 앓았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전에 또 언제 아팠더라…?’ 생각하니 괜히 낙양성에서 살 때가 떠올라 서러워졌다. 곧 몸을 닦고 있던 차가운 물수건이 주자서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이미 울고 있었나 보다. 마음에 울컥 슬픔이 차오른다. 주자서는 괜히 응석이 부리고 싶어 얼굴을 닦는 물수건에 얼굴을 비볐다. ‘내 얼굴을 닦아주는 이 손길이 모친이었으면 좋겠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태보는 평원군의 이야기까지 꺼내 가며 육해방을 들들 볶았다.(17) 섬뜩해진 주구전은 주지의 눈치를 보았다. 주지가 그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육장문을 감싸며 말했다. “탐욕과 성냄은 세상의 병이요, 어리석음과 무지는 화의 문이라 하였소. 탐욕의 독은 몸을 망치고, 친족을 망하게 하는데, 어찌 그것이 거기에 그치겠습니까?”(18) 육해방은 덜덜 떨면서 시시콜콜 단양파의 내부 사정에 대해 털어 놓았다. 단양파가 관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궁세가의 입김 덕분이었다. 주구전은 아까 회장을 나가며 대화하던 남궁세가 소각주 남궁하와 화산파 장문 우달이 떠올랐다. 형주(荊州)와 예주(豫州)도 아닌 옹주(雍州)의 화산파 우달이라니 ‘아주 의심을 사러 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주구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태보는 주구전에게 남궁세가에 대해 물었다. 남궁세가는 양주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혈족으로 이루어진 문파이다. 양주와 예주, 서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황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황산부터 포양호까지는 관에서도 남궁세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세가 큰 명문이다. 몇 차례 군신을 배출하여 관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다. 양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종종 작은 문파들과 소란이 있었지만 세가 많이 줄어든 사계산장은 꼭 필요한 일은 돕고 의심스러운 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니 단양파나 태호파 같은 양주에 있는 작은 문파들이 남궁세가의 기세를 얻어 낙양성을 오가며 다른 문파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보 강상은 무림맹의 존재를 떠보기 위해 부러 숭산 논의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곳에 온 것이다. 그는 태보가 되기 전 오랫동안 강호에서 사인(士人)으로 머물렀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을 테니, 황제는 태보를 보내 무림맹을 조사하게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주구전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무림맹과 사계산장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존재하던 무당파, 곤륜파, 아미파(峨嵋派) 그리고 소림사가 주도하여 만들었던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던 크고 작은 문파들 중 과연 오늘까지 남은 문파는 몇이나 될까?

사계산장은 애초에 그렇게 대놓고 일을 벌이는 일에는 항상 조심스러운 문파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들 말하지 못하는 이 무림맹은 흔히 강호에서 중요시하는 의나 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뒤에서 덮어 몰래 만들게 아니라 모두에게 떠벌려 명성을 쫓았을 테니. 다들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장실의 문이 열리고 개방의 장로 여장과 해백이 들어왔다. 주지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자리를 권했다.

해백은 자리에 앉자 마자 말했다. “거지들이야 잘 빌어먹고 얼어 죽지나 않으면 그만인데, 언제부터 부귀와 영화를 탐하게 되었는지….” 그 말을 듣고 있던 여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러다 푸른 하늘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하늘이 일어나야 된다는 소리 나올까 무섭습니다.”(19) 태보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주지가 여장에게 말했다. “여기 태보께서 계시는데 말 좀 가려서 하게.” 그러자 벌벌 떨고 있던 육해방이 또 입을 열었다. “개방! 개방도 종종 저희와 함께 일을 했습니다. 단양파는 사람도 적고 작으니 큰 일을 단독으로 할 수 없으면 남궁세가나 개방에서 사람을 빌려 일했습니다.” 그 말에 태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 말할 수 없는 무림맹은 과거의 무림맹보다 더 크고 가담한 세력이 많은 것 같다.

밤이 다 늦어서야 지객당으로 돌아온 주구전은 매우 피곤했다. 정말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든 것 같다. 태보 강상만 오지 않았다면 여운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장 양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구전이 지객당 안으로 들어오자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가 보였다. 주구전이 놀라 그에게 다가가자 옆에 앉아 있던 온객행이 포권하여 인사하며 말했다. “주대인, 아서가 요 며칠 밤이슬에 잠을 이루지 못해 병이 난 듯합니다.” 주구전은 온객행이 주자서를 부르는 호칭에 온객행을 흘끔 봤다. 옥같이 잘생긴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다.

어처구니없어진 주구전은 침상에 걸터앉아 주자서 손목의 맥을 짚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미열이 있었다. 주구전이 방을 나가려고 하자 온객행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아이참! 주대인 이미 약도 먹이고 열도 많이 떨어 졌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는 자기가 앉아 있던 침상 앞 의자에 주구전을 앉혔다. 온객행은 “요기는 하셨습니까?”라고 살갑게 물으며 그에게 만두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주구전은 갑자기 허기가 일어 만두를 하나 집어먹었다. “절간의 밥이라 맛이 덜하지만 급한 허기는 가시겠지요. 나중에 낙양성에 가서 그 모란연채라는 것을 먹으러 갑시다.”

주구전은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온객행이 어색했지만 자리를 비운동안 주자서를 돌 봐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온객행이 하는 데로 그냥 두었다. 만두를 하나 더 집어먹고 주구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상선께서는 어디 가셨는가?” 온객행은 주자서가 누운 침상에 걸터앉아 그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노인네 망령은 고기로 고친다고 하니 어디서 밥통을 채우고 계시겠죠.” 불경한 온객행 소리에 주구전은 헛웃음만 나왔다. 간단히 관수(盥漱; 세수하고 양치질함)하고 침상에 올랐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침상을 봐주는 이가 없어 쓸쓸했다. 태보가 아직 소림사에 머물고 있으니 주구전은 떠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숭산에 묶여 있을지, 이 숭산 논의라는 촌극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한숨만 나온다.


다음날 어느때보다 일찍 일어난 주구전은 가져온 짐꾸러미에서 영견 하나와 지필묵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사계산장에 알려 두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계산장에서만 사용하는 짧은 암호문과 여정이 길어질 것 같다는 내용을 섞어 썼다. 진회장이 설마 사람을 보내지는 않겠지만 걱정할 것 같아 작은 영견에 깨알 같은 글씨를 모아 적었다. 점심을 가지러 가는 길에 산문에 보초를 서고 있는 승려에게 부탁하여 서신을 전하고 점심 찬합을 들고 다시 지객당으로 돌아왔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주구전이 먼저 일어나 부산을 떨어도 깨지 않고 사시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찬합을 탁상위에 올려놓은 주구전이 주자서가 누운 침상 쪽으로 가서 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자서야 일어나 보거라.” 주구전의 부름에 눈을 파르르 떨더니 곧 눈을 뜬 주자서가 벌떡 일어나 주구전에게 공수했다. “태부!” 주자서의 목소리에 주구전이 괜히 탁상위에 찬합에서 점심을 꺼내고 있던 온객행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 그래, 자서야 이제 괜찮으냐?” 주자서는 횡설수설하다가 주구전이 이끄는 데로 탁상 앞에 앉아서 첫 끼니를 먹었다.

온객행이 그 옆에 앉아 주자서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놓아주며 부산을 떨었다. 주구전이 온객행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한참 눈치를 보던 온객행이 주구전의 밥그릇에도 찬을 올려놓았다. 점심을 마친 후 주구전은 온객행에게 찬합을 주방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둘만 남은 지객당에서 주구전은 먹은 음식을 정리하고 관수(盥漱)를 마친 주자서를 앞에 두고 말했다. “아무래도 얼마나 여기서 더 머물게 될지 모르겠구나. 우리야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일이지만, 또 남이 보기엔 다를 수 있으니…” 주구전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구전은 방장실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한참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바람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구나.”(20) 주구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탁상 앞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둘이 앉아 있었다.

심아스님과 온객행이 같이 들어왔다. 온객행은 들어오자 마자 침울한 주자서의 표정을 눈치채고 쪼르르 옆으로 가서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찌하여 우리 아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아서의 마음잡을까요? 아서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21) 온객행의 호칭에 주자서는 한동안 눈만 깜빡이며 온객행을 쳐다봤다. 온객행은 신이 나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서 또 흰소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지객당 안으로 장명산 검선이 들어오며 말했다. “어린애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 하니, 저 놈 헛소리는 때리는 것 말고 방법이 없네.” 하며 온객행을 주자서에게 떼어 놓더니 머리를 때렸다.

온객행은 검선의 손을 피하며 심아를 방패삼아 말했다. “이 노야가 굶어서 노망이 났나!” 심아는 한동안 검선과 온객행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무시하듯 주구전에게 공손히 말했다. “주대인, 주지스님께서 찾으십니다.” 주구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 못하니 몸을 보양하고 있거라.” 주자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구전과 심아가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주구전이 검선 쪽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엽선배께서도 가시지요.” 검선은 온객행을 나무라는 일을 멈추고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더니 밖으로 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래, 가지.” 그렇게 심아와 함께 주구전과 검선이 나가자 지객당에는 주자서와 온객행만 남아 있다. 주자서는 문간에 서서 한참 주구전이 양심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서 있었다. 온객행이 언제 다가왔는지 주자서의 등뒤에 바짝 붙어 서서 주자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묻지 않았는데 부러 말씀하셨다는 것은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양친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자서가 사계산장에 입문한 이후로 그 누구 와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고 하기 보다 하지 못했다. 낙양을 떠나는 그날 주자서가 기억하는 것은 주영의 손을 모질게 뿌리치는 경무장공주의 모습 뿐이다. 지금 주자서는 알고 있지만, 그날 낙양을 떠나오던 날 밤, 아직 어렸던 주자서는 그저 원망스러웠다. 본인을 떠나보내는 모친도, 자신을 안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사부님도.

그 원망은 머리가 커갈수록 죄책감이 됐고,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그리움만 더했다. 낙양성 근처로 자신을 보낸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었고, 이제 주자서는 주영이라는 천자가 주신 고귀한 이름보다 주자서라는 이름으로 산 세월이 더 길었다. 숭산으로 오는 길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그 제령이라는 것은 강호가 천자의 일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숭산 회의에는 어쩌면 강호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여 왔다. “아서. 주대인은 종조부야 태부야?”

주자서가 고개를 휙 돌려서 온객행을 봤다. 온객행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기만 할 뿐이다. “아서. 아까 주대인을 태부라고 부르던데, 아서도 무공을 배웠어?”라고 말하며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더듬었다. 팔뚝을 지나 등이며 허리를 쓸어 내리자 마치 두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치며 말했다. “말로 물으시오. 좀 떨어지는 것이 좋겠소.” 그전만큼 세게 밀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침을 먹으면서 종조부께서 어제의 일을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장경각에서 지객당까지 꽤 거리가 있었는데 그 길을 주자서를 업고 왔다면 꽤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찌 물으시오?” 주자서가 탁상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온객행도 쪼르르 주자서를 따라 탁상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이 온모 또한 무공에 힘썼으니 그대와 겨루어 보고 싶어서 그러오.” 주자서는 생각했다. 만약 그가 종조부의 제자라면 사계산장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직 주자서는 이 온객행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종조부께서는 사인(士人)으로써 내 스승이오.” 온객행은 주자서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흐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저 짐꾸러미에 있는 호복은 누구 옷이오?” 주자서가 놀란 듯 온객행과 짐꾸러미를 번갈아 보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그대의 옷을 벗기고 입힌 것이 누구인지 잊었소? 그대가 탕약을 넘기지 못해 내가 입으로…!”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자서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온객행이 말을 멈추고 ‘하하하’ 크게 웃었다. “별일 없었으니 마음 놓으시게! 내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정신이 없는 사람을 희롱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오.”


주자서는 내심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들추시려는 것인가도 생각했다. 사부님이 들추시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어쩔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그 일에 대해 캐고자 하려는 것이다.

(15) 도덕경 79장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큰 원망을 풀어주더라도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으니, 어찌 가히 선하다 하겠는가?

(16) 예기 내칙 禮記‧內則
男不言內 女不言外
남자는 안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바깥의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17) 사기 평원군열전: 평원군은 진나라의 장군 백기를 말한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전쟁으로 한나라가 수세에 몰리자 조나라에 가서 자신들의 나라를 주고 보호를 부탁하였다. 조나라왕은 한나라의 땅이 탐나 한나라를 도왔는데, 이후 진나라가 군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르 멸망시켰다는 이야기. 여기서 조나라의 대신 평양군 조표가 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득을 보면 재앙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익에 어두워 형세를 읽지 못하고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망한다.

(18) 법구경 애욕품 18
貪爲敗處故 害人亦自害, 愛欲意爲田 婬怨癡爲種.
탐욕이란 망하는 법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또 자신을 해치니, 사랑하는 탐욕의 마음은 밭이 되고 음욕, 성냄, 어리석음은 종자가 된다.

(19) 나관중 삼국연의 황건적의 슬로건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런 하늘이 이제 일어나리.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20) 한서열전 孔子出行 공자출행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풍수지탄의 어원. 여기서 풍수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뜻한다.

(21) 시경 패풍 日月 해와 달
日居月諸 照臨下土 乃如之人兮, 逝不古處 胡能有定 寧不我顧.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옛날과는 다르게 차가울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日居月諸 下土是冒 乃如之人兮 逝不相好 胡能有定 寧不我報.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이 세상을 비추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 말도 하지 않으니.
日居月諸 出自東方 乃如之人兮 德音無良 胡能有定 俾也可忘.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어찌하여 우리 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을까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당신을 잊을 수 없으니.
居月諸 東方自出 父兮母兮 畜我不卒 胡能有定 報我不述.
저 하늘 해와 달은 오늘도 동녘에 떠오르건만 아버님 어머님 그이는 나와 살지 않겠다 하네요. 어찌해야 님의 마음잡을까요? 내게는 차갑게만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