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34

以逸待勞 | 34. 편안하게 지치기를 기다린다.

대서(大暑)가 지나고 얼마 있다가 천교와 보살이 태평호에 방문했다. 삭이 지나 달이 바뀌었다. 계낭은 우사첩보다는 한참 어리숙한 요괴였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조금 서툴렀다. 엉망이 된 부엌과 곳간을 보고 보살은 한참 계낭에게 잔소리를 했다.
“수확 철이 오기 전에 확인하러 왔더니 이게 무엇이야!”
계낭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울먹이며 보살의 잔소리를 들었다. 주자서는 보살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보살께서 이해하세요.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보살이 주자서의 손을 뿌리치고 주자서의 턱을 잡고 말했다.
“대체 이 꼴이 뭐야? 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보살이 잔소리하는 것을 재실 밖에서 보고 있던 천교가 지주에게 말했다.
“황룡께서 태평호를 그리워하셔서 잠시 들린 것인데….”

지주가 천교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 살던 우사첩이오?”
천교가 지주를 보고 눈을 굴리다 말했다.
“우사첩이었는데 이제는 잔나비입니다. 저희는 황룡 밑에서 영력을 수련하고 있어요.”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까닥 하더니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하늘의 이름은 없으십니까?”
천교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있습니다만… 천교라고 불러 주십시오.”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주라 합니다. 그대가 천교라면 저쪽은 보살이겠군요. 과연 들은 대로 미인이오.”
천교가 눈썹을 찌푸리고 지주를 보았다. 지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미인을 아주 좋아합니다.”
천교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교와 보살은 그나마 계낭 중에 제일 영력이 높은 입하와 입추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백택 안을 정리한 뒤에 날이 다 져서 삼하궁으로 향했다. 천교가 주자서의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말했다.
“유서. 사당 안에 있는 것은 이제 모두 너의 것이니 마음대로 써도 좋다. 날이 추워지면 거처는 정전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교가 하는 말에 다소곳이 대답했다. 보살이 옆에서 천교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어. 황룡께 부탁드려서 여기 와 있어야겠어.”
천교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수련해서 등선한다며.”
보살이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꼴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칠칠치 못해서. 이 놈 서방은 대체 뭘 하는 것인지.”

주자서가 얼굴을 붉히자 지주가 보살에게 말했다.
“현무 노릇 하느라 죽을 맛일 테니 용서하시오.”
보살은 삼하궁에서 고상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온객행도 주극성에서 혼자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살이 한숨을 쉬자 천교가 보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한 갑자뿐이라니 정말 다행이지.”
보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천교가 보살의 뺨을 쓰다듬고 말했다.
“이렇게 정이 많아서 언제 등선하려고?”
보살이 천교의 손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나 혼자 보낼 거야?”
천교가 웃으며 말했다.
“혼자 가려구?”
보살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보살이 주자서를 쏘아보며 말했다.
“시끄러워! 너는 입 닫고 있어.”

주자서가 입을 꾹 다물자 지주가 말했다.
“온공자는 그대들이 유서에게 이러는 것을 아는가?”
보살이 지주를 쏘아보며 말했다.
“알면 뭐요?”
지주가 멍하니 보살을 보고 말했다.
“성내는 모습도 정말 아름답소.”
천교가 보살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보보.”
보살이 천교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교교. 걱정 마. 거미 따위 밟아버리면 그만.”
지주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밟아주시오. 그대에게 밟힌다면 소원이 없겠소.”
보살이 표정을 구기고 천교의 허리를 안고 보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천교가 ‘아’ 하더니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유서. 홍상(洪商) 예부인을 아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주가 말했다.
“현리 말씀이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리낭자께서 촉룡께 갈 때 배를 태워 주셨습니다.”
주자서는 천교가 건넨 서신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천교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서신을 먼저 전해야 했는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
주자서가 종이봉투에 든 서신을 열어 읽어 보았다. 주자서의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하자 천교와 보살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모친… 모친께서….”
천교는 주자서가 들고 있는 서신을 읽어보았다. 보살은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도 네 서방 닮아 울보가 되려나 보다.”
주자서가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말했다.
“저를 찾아 멀리 장강까지 오신 모양입니다. 현리낭자를 만나신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룡께 말씀드려서 다시 돌아올게. 유서. 혼자서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 너는 아직 영력이 한참 부족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보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예부인께서 같이 계시면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다. 괜히 움직여서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 섣불리 나서지 마라.”
주자서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하지만….”
지주가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지금 너는 요괴의 먹잇감 정도이니 시키는 대로 해라. 계낭도 마음먹으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교가 지주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저희가 다시 올 동안 유서를 부탁합니다.”
보살도 천교를 놓아주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지주와 주자서도 공수하여 인사했다.

보살과 천교가 가고 난 이후에 주자서는 한껏 풀이 죽어서 수련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지주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고 말했다.
“수련할 마음이 없으면 말게. 마음이 없는데 뭐가 되겠나?”
주자서가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말했다.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지주가 주자서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영력은 세월이 쌓아 주는 것이네. 갑자기 쌓고 싶으면 가서 사람을 먹고 미치는 방법 말고 없어.”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고 지주를 보자 지주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혼을 먹으면 영력이 갑자기 높아지기는 하지. 하지만 영원히 삼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 그러다 미치지.”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자 지주가 말했다.
“사람의 육신을 먹는 것은 좀 그것보다는 덜한데 영 맛이 없어서 못 먹겠더라고.”
주자서가 지주를 보자 지주가 웃으며 말했다.
“천룡은 사람 먹는 것을 좋아했거든 근데 그는 좀 취향이 독특해서….”

지주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일은 낚시나 하러 가자.”
그리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영력을 쌓는 것은 낚시와도 같지.”
주자서는 지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재실로 향했다. 지주가 주자서를 따라가며 말했다.
“야!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그날은 계낭과 같이 산에서 길경(吉更; 도라지)을 캤다. 커다란 도라지를 캔 계낭에게 상으로 그럴듯한 옷을 주었다. 계낭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홑겹으로 된 옷을 입고 신발도 신지 않았는데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의복을 갖추는 것을 어색해했다. 우수(雨水)는 주자서가 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아이들이 입는 옷이라 알록달록하여 아주 귀여웠다. 우수가 웃으며 주자서에게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주인님. 이 옷은 주인님이랑 비슷합니다.”
주자서가 계낭의 앞섶을 쓸고 말했다.
“그래. 앞으로 일을 잘하는 아이에게는 옷과 신발을 선물로 주어야겠다.”
계낭은 고개를 조아려 주자서에게 인사하고 재실을 나가 다른 계낭에게 입은 옷을 자랑했다.

며칠이 지나자 백택에서 지내는 계낭 중 의복을 갖추지 않은 계낭은 몇 없었다. 주자서는 일부러 그 아이들을 불러 정전을 치우게 하고 상으로 옷과 신발을 주었다. 의복을 갖춘 계낭은 그 전보다 더 똑똑하고 일을 잘했다. 지주가 계낭에게 옷을 입혀주며 말했다.
“너희는 정말 좋은 주인을 뒀구나. 어쩌면 주인보다 먼저 등선할지도 모르겠어.”
상강(霜降)이 눈을 반짝이며 지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저희도 등선할 수 있습니까?”
지주가 상강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그럼! 내 제자 할 테냐?”
상강이 눈썹을 찌푸리고 한참 고민하더니 물었다.
“그럼 주인님은 누가 돌봅니까?”
지주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 주인 역시 나의 제자이니 너에게는 사형(師兄)이 되는 것이다.”
상강은 기쁘다는 듯이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사형?”
지주는 상강을 지긋이 보고 있다가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계낭은 정말 귀엽구나.”


주자서는 저녁 수련을 마치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태평호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 주자서는 부유각에서 잤다. 온객행이 지내던 때와는 다르게 조금 어질러지고 어수선한 것은 주자서가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정리했기 때문이다. 내실에 등롱을 밝히고 주자서는 휘장을 모두 내렸다. 태평호 물에 간단히 소세하고 몸을 닦았다. 대서가 지났지만 아직 더위가 꺾인 것은 아니라 낮에는 땀을 많이 흘렸다. 주자서는 등롱을 들고 누각 위로 올라가서 나무함을 보았다. 온객행이 다녀간 이후로 주자서는 목간에 오늘 한 일에 대해 적거나 산에서 찾은 꽃을 넣어 두었다. 주자서가 넣어 놓은 것들은 모두 금방 없어졌지만 온객행에게서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라지를 캐면서 딴 보라색 꽃을 한참 보던 주자서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바쁘겠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주자서는 등롱을 내려놓고 나무함을 열어보았다. 나무함 안에는 능각(菱殼; 마름열매)이 들어 있었다. 주자서는 편연주에서 현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칠석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능각을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네!’ 주자서는 벌써 칠석이 됐구나 싶어서 하늘을 보았다. ‘오늘 밤에 직녀가 견우를 만나겠구나.’ 주자서는 가지고 온 꽃에 입을 맞추고 나무함에 넣었다.

주자서는 능각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이제 막 능각 꽃이 피었을 텐데….’ 주자서는 온객행의 배려가 기꺼워 부스스 웃고 두손으로 능각을 부러뜨려 껍질을 벗기고 안에 들어 있는 과육을 먹었다. 쪄서 말려 둔 것인지 조금 달았다. 주자서는 능각을 몇 개 집어먹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은하수를 찾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할 것 같소.”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각이 들어있는 그릇을 들고 내실로 향했다. 보통 먹을 것을 얻으면 지주, 계낭과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주자서는 이 능각을 남들과 나누어 먹고 싶지 않았다. 침상 곁에 있는 협탁에 능각을 올려 놓고 장포를 벗었다. 슬슬 갈아입을 내의가 없어서 내일이나 모레에는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날이 더우니 옷을 벗고 잘까도 생각했지만 온객행의 침상 위에 옷을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조금 뒤척이다가 침상 뒤편에 있는 휘장을 걷었다. 내실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조금 축축해서 비가 올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에 조금 고분고분해졌다. 문귀는 변함없이 온객행의 일 처리에 대해 잔소리를 했지만 그 전처럼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은 찾아서 했다. 일을 곧잘 하게 되니 별로 할 말이 없어진 문귀는 온객행과 그 전보다는 조금 거리가 생겼다. 이제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잔소리하지 않아도 곧잘 했기 때문이다. 구국당(拘國堂)에 앉아 흑룡이 보낸 서신을 읽고 있던 온객행은 방 안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용슬(龍蝨)에게 물었다.
“마름 열매는 아직인가?”
용슬이 온객행에게 조아리며 말했다.
“능각은 아직 철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이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칠석 전까지 꼭 찾아 주시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니.”
용슬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주방에 전해 놓겠습니다.”
온객행은 소매에 손을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즉저가 소반에 서책을 쌓아 가지고 구국당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이 즉저가 가지고 온 서책을 보고 말했다.
“검영은 의외로 흑룡 자리가 어울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무께서 북해 일로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저가 서책을 온객행의 서안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북해에서 보내온 제향품(祭享品) 목록입니다. 확인하시고 필요한 것이나 불필요한 것을 말씀해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보고 있던 서신을 잘 접어서 서신을 모아두는 함에 넣었다. 즉저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온객행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천룡. 혹시 마름 열매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아는가?”
즉저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몸을 세우더니 말했다.
“능각을?”
온객행이 허둥대며 말했다.
“특별히 쓸데가 있어서 그러하네.”
즉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서호의 파사였으니 파촉(巴蜀)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따르겠군.”
온객행이 입술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즉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칠석에 능각을 같이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지?”
온객행이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래서 아는가 모르는가?”

즉저가 온객행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내가 석유황(石硫黃; 웅황)을 사람을 시켜 팔게 한 것은 뱀을 노린 것이 아니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즉저를 보았다.
“한석산(寒石散)을 유통하려고 석유황을 옮긴 것뿐이야.”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한석산?”
즉저가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한석산에 중독된 자들은 행산이라 하여 계속 걸어서 독기를 빼내야 하지. 약에 취한 이들이 산으로 들어오면 취하기 쉬우니까.”
온객행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는 등선할 마음이 없는가?”
즉저가 웃으며 말했다.
“지네가 감히 어찌 등선한다는 말인가? 나는 자네보다 몇십 갑자는 더 살았네. 내 처지를 봐.”
온객행이 즉저를 보고 물었다.
“자네 처지가 어때서? 신뢰받는 현무의 가신이 아닌가?”
즉저가 온객행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현무뿐이었네. 나의 능력을 봐준 건 현명대선뿐이었어!”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천룡. 이름이 아깝군.”
즉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당연히 자네는 모르겠지.”
온객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네 사정에 관심 없네.”
즉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즉저가 몸을 돌려 장지문으로 향했다. 온객행이 즉저에게 말했다.
“그래서 마름 열매는?”
즉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즉저가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 버들개지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온객행이 즉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와 나의 사이가 틀어진 것과 유서는 상관이 없으니 괜한 소리 말게.”
즉저는 이 상황이 허탈해져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삼하궁은 동정호와 가까우니 황룡께 부탁해보시오.”
즉저는 온객행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정전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흑룡과 문귀를 들들 볶아서 마름 열매 한 소쿠리를 얻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나고 온 이후에 거처를 옮길 마음이 없어졌다. 주자서가 해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작 한 갑자 편하게 하자고 평생 주극성에 갇힐 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주자서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꼭 해야 할 말은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보낸 목간을 소매에서 꺼내 수십 번 읽었다. 주자서가 보낸 목간 중에 군자양양(君子陽陽)(7)이라고 쓰인 것은 예쁘게 다듬어 술을 달아 요대에 달았다. 주자서가 보고 싶을 때마다 만지고 쓸었더니 주자서가 쓴 글씨가 조금 벗겨졌다. 온객행은 무심결에 요패를 만지려고 하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지워지면 안되니 음각(陰刻)을 하고 옻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가 태평호로 떠난 이후로 문귀는 온객행이 꼭 쉬어야 할 때 말고는 계속해서 일을 시켰다. 온객행은 문귀에게 사정했다.
“문귀. 아무리 그래도 칠석날 일을 시키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오?”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직 칠석까지 며칠 남았는데…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이틀이오! 이틀밖에 안 남았소.”
문귀는 ‘그래서 뭐?’라는 표정으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문귀의 소매에 매달려 말했다.
“유서를 잠깐이라도 만나고 오게 해주시오. 정말 잠깐이면 되오.”
문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헛소리! 네가 무슨 직녀야? 칠석날 만나서 뭐하게?”
온객행이 입을 꾹 다물자 문귀는 다시 백종절 일에 대해 말했다. 문귀는 그전보다 집무 시간이 늘어난 온객행을 갸륵히 여겨 말했다.
“견연.”
온객행이 서신을 보다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겠나?”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리고 문귀를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제발. 무궁형. 벌써 못 본 지 보름이 넘었소.”
문귀가 온객행을 뿌리치고 말했다.
“보름은 무슨 열흘 정도 지났구먼.”
온객행이 문귀에게 들러붙어 말했다.
“보름이 맞소. 15일.”
문귀가 혀를 차고 말했다.
“하루 종일은 안되네. 우리도 일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칠석날 술시부터 다음날 인시까지. 서둘러야 겨우 한 시진 볼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괜찮나?”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귀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궁형 진짜 고맙소. 내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리다.”
문귀가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어쩌면 대보름 때까지 못 만날 수도 있어.”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자 문귀가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은 자네 상공한테나 통하지. 나한테는 안 통해.”
온객행이 말했다.
“내가 쉬는 시간을 줄이겠소. 못해도 보름에 한번은 만나게 해주시오.”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백종절을 잘 마치면 내가 기룡께 말씀드려 보겠네.”

온객행이 다시 문귀를 안으려고 들자 문귀가 몸을 피하며 말했다.
“어허! 자네 원래 이렇게 끌어안는 것을 좋아했던가?”
온객행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주요랑 아상이 종종 안아줬거든요. 울지 말라고.”
문귀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운다고? 정말로?”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무극형 저는 울보예요. 유서를 만나지 못하면 매일 울지도 모르겠어요.”
문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을 하고 말했다.
“제발 그것은 참아주게. 사내가 울다니….”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슬퍼서 우는데 사내가 어디 있고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둘 다 똑같이 슬퍼서 우는 것인데….”
문귀가 기가 막혀서 말했다.
“자네 수원대선께서 하실 법한 말을 하는군.”
온객행이 문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이고 말했다.
“무극형도 슬프면 우시오. 내가 달래드리리다.”
문귀가 온객행을 빤히 보다가 그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울 여유가 어디 있나!”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피해 다시 서안으로 가서 앉고 말했다.
“지금 합니다. 지금 해요.”

온객행은 삼하궁에서 얻은 마름 열매를 나무함에 넣어 놓았다. 아직 오늘 주자서가 넣어 놓은 것이 없어 나무함은 비어 있었다. 온객행도 목간에 천 자락에 종이에 그의 마음을 담아 보내고 싶었지만 쉴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옆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용슬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신을 쓸 수가 없었다. 주자서에게 보내는 서신을 주자서 말고 다른 이가 먼저 보는 것도 싫었고 작은 목간에 온객행의 마음을 모두 담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뭘 보내야 할지 항상 고민하다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주자서가 보낸 꽃은 온객행이 일하는 서안 위를 잠시 장식했다가 종이 서책 사이에 끼워 말렸다. 용슬이 사라각 내실로 들어와 말했다.
“수선. 홍호의 현리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슬이 들고 들어온 나무함을 보고 말했다.
“드디어!”
온객행은 나무함을 열어 현리가 보낸 서신을 읽어보았다. 종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종이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현리가 홍상의 일로 바빠서 서신을 받는 것이 늦어졌다는 말과 함께 마름 열매와 종이로 만든 화첩이 같이 왔다. 온객행은 아무 생각 없이 종이 화첩을 펼쳤다가 깜짝 놀라 화첩을 덮었다. 화첩 사이에 끼워진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용슬이 떨어진 종이를 주워 온객행에게 건넸다. ‘용양(龍陽)’ 온객행은 얼른 종이를 서신이 들은 봉투에 넣고 말했다.
“나… 나는 나가서 내일 돌아올 테니 용슬도 가서 쉬세요.”
용슬이 얼굴이 새빨개진 온객행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조아리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현리에게 받은 함을 들고 내실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침상의 베개 옆에 두고 북극문으로 향했다. 일단은 주자서를 만나는 것이 제일 시급했다. 보통 두세시진 걸릴 거리를 온객행은 한 시진 반 만에 날아서 태평호에 도착했다. 확실히 흑룡이 된 이후에 그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해시가 넘어 어둑한 태평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백택으로 향하려다 혹시 오늘 주자서가 또 뭔가를 넣어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유각으로 갔다.


휘장을 모두 내린 부유각의 누각 위에 나무함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온객행은 저렇게 두면 누각 탁자를 쓰는 것이 불편할 텐데 같은 생각을 하며 누각에 올라 상자를 열어 보았다. 보라색 도라지꽃이 두송이 들어있었다. 온객행은 꽃을 꺼내려 하다가 내일 주극성에서 꺼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누각에서 내려와 백택으로 향하는데 침상이 있는 쪽 휘장이 열려 있었다. 온객행은 내실 안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 부유각에 올라 내실로 들어갔다. 부유각 내부는 뭔가 조금 어수선하게 생활감이 있었다. 한쪽에 모아 놓은 빨랫감과 탁상 위에 늘어놓은 찻잔, 침상 앞에 놓인 병풍에는 장포가 뒤섞여 있었다. 온객행이 병풍을 넘어 침상으로 다가가자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마름 열매가 보였다. 침상에 휘장도 내리지 않고 주자서가 몸을 작게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은 잠든 주자서를 한참 보고 있다가 침상 뒤편의 휘장을 다시 내렸다. 온객행이 휘장을 내리는 기척에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누구냐?”
온객행이 침대로 다가가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침상으로 끌어당겨 눕히고 말했다.
“누구야?”
온객행은 놀라서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온객행의 목덜미에 겨눴던 현망검을 치우고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고 말했다.
“대체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침상으로 끌어 들인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객행.”
그리고 온객행을 끌어안았다. 한참 끌어안고 있던 주자서가 일어나 협탁 위에 올려 놓은 마름 열매를 까서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어서 드시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가 건넨 마름 열매를 먹었다.
“맛있어.”
주자서는 마름 열매를 몇 개 더 까서 온객행과 나누어 먹었다. 주자서가 침상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빤히 보고 말했다.
“이건 내 꿈이니 아직 칠석이오. 우리는 칠석날에 같이 마름 열매를 먹었으니 우리 사랑은 꼭 이루어질 것이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응. 자시가 되지 않았으니 아직 칠석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객행. 너무 보고 싶어.”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아주고 온객행의 얼굴을 잡고 한참 쳐다보고 말했다.
“꿈에서 말고 진짜 온객행이 보고 싶어.”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라면 날 보자마자 울었을 걸.”
온객행은 정말 눈물이 조금 나올 것 같아서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면서 말했다.
“이런 꿈이라면 매일 꾸고 싶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싫어. 꿈에서 말고 현실에서 매일 만나고 싶어.”
온객행의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에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까 정말 온객행같다.”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입을 맞추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라니까.”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다 말했다.
“힘내. 잘하고 있어. 많이 좋아해.”


(7) 시경 국풍 왕풍 君子陽陽 임은 즐거워라!
君子陽陽, 左執簧, 右招我由房. 其樂只且.
임은 즐거워라, 왼손에 생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불러 방중 춤을 추시게 하신다 아, 즐거워라.
君子陶陶, 左執翿, 右招我由敖. 其樂只且.
임은 즐거워라, 왼손에 무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불러 오하 춤을 추시게 하신다 아, 즐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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