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肉計 | 28. 스스로를 괴롭힘.
지주는 별궁 외실에 들어온 온객행과 주자서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다가 현무의 명령을 받고 지주를 데리러 온 문귀(文龜)를 따라 주극성으로 향했다. 외실을 나가면서 지주가 말했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기다려 주겠나? 어쩌면 현무께서 그대를 부를지도 모르겠어.”
그리고는 온객행이 아니라 주자서를 힐끔 보았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주를 배웅하며 말했다.
“나를? 현무께서? 알겠네. 여기에서 기다리지.”
지주가 온객행을 한참 보다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온객행에게 말했다.
“그래. 필요한 것은 시위에게 말하게.”
지주는 나가면서 시위에게 별궁의 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고 신당으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있는 주자서는 많이 지쳐 보여서 온객행이 다가가 물었다.
“유서. 왜 그러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려 울상을 만들자 주자서는 그 모습이 조금 반가워서 피식 웃었다. 온객행이 의자를 끌어다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말했다.
“유서. 어찌 여기 있는가?”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자 온객행은 애가 타서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유서 그래도 잘 먹고 잘 잤는지는 말해주게. 그대에게 다들 잘 대해 주었나?”
주자서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데 밖에서 하인이 소반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이 음식이 내려 놓는 것을 도왔다.
하인이 외실을 나가자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젓가락을 들어 음식 이것저것을 집어 주자서의 앞접시에 놓고 말했다.
“유서. 어서 먹어봐.”
주자서는 온객행이 쥐여준 젓가락을 들고 한참 망설이더니 온객행이 집어준 음식을 조금 먹었다. 온객행은 탁상에 고개를 괴고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고 말했다.
“유서. 입에 맞지 않은가?”
주자서는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도 음식을 몇 개 집어 온객행의 앞접시에 올려 놓고 말했다.
“흑랑께서도 드세요.”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가 집어준 음식을 입에 넣고 말했다.
“응. 유서도 많이 먹어.”
말없이 음식을 먹던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 할 말이 있네.”
주자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도 젓가락을 놓고 주자서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온객행이 망설이자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온객행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주자서가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내치라고 한 것은 저이니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웃으며 말했다.
“그대를 내치다니 내가 왜 그대를 내치는가?”
주자서가 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자 온객행이 탁상 아래에 있는 주자서의 손을 찾아 잡고 말했다.
“유서… 내가 내쳐줬으면 좋겠는가?”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얼른 손을 들어 그의 미간을 쓸며 말했다.
“유서. 내가 부족한 것은 잘 알고 있네. 나 때문에 모진 말을 들은 것도 정말 미안해.”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많이 부족하지요. 저는 흑랑께 입은 은혜를 갚을 길이 막막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유서! 은혜라니? 아니야. 나는….”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흑랑. 저의 효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내치신다 하셔도 그것은 제가 부족한 것이니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절했다. 온객행은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유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곁에 남으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떠나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떠나다니? 안 돼. 절대 안 돼.”
주자서는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흑랑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 우리는 벌써 혼인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서가 나를 거두어 줘야지.”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이 의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하인이 음식을 치우러 다시 들어오는 기척에 서로를 놓아주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유서.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뭐냐 하면….”
온객행이 주자서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 갑자 동안이 아니라….”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표정을 보고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그러니까 한 갑자 동안이 아니라 더 오래 같이 하고 싶은데….”
주자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온객행이 자신의 소매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대에게 줄 것이 있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흑랑.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받았는데 또 빚을 지우십니까?”
온객행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빚이라니?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인데. 나에게 받는 것은 모두 원래 그대의 것이니 그런 생각하지 마시오.”
그러더니 소매에서 복숭아를 꺼내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복숭아와 온객행을 번갈아 보고 물었다.
“이것은…?”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서. 유서가 이걸 먹으면 나와 함께 아주 오래 살 수 있어.”
주자서는 물끄러미 복숭아를 보았다. 온객행이 소매에서 칼을 꺼내 복숭아를 얼기설기 깎아 내밀었다. 주자서는 한참 내민 복숭아를 보다가 부유각에서 그랬던 것처럼 받아먹었다. 이 복숭아 역시 달고 향긋하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도 권하자 온객행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눠 먹으면 어떻게 될까? 아니야. 이건 유서 다 먹게.”
그리고 남은 복숭아도 모두 주자서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주자서가 복숭아를 다 먹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를 가져와 함께 손을 씻었다. 주자서는 종화산에서 함께 손을 씻었던 것이 생각나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온객행이 수건을 가져와 주자서의 손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가 수선이 되었으니 이제 아무도 그대에게 물비린내 난다는 소리는 못할 것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수선이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낮게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의 수선이 되었는데… 유서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백택을 고쳐서 삽시다.”
주자서는 손을 닦고 대야를 치우는 온객행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흑랑? 수선이요? 무슨 뜻입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흑랑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손을 들어 그의 미간을 쓸고 말했다.
“하늘에서 가져다 붙이는 이름 말고 내가 듣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 주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나는 유서가 너무 좋아.”
주자서는 한참 안겨 있다가 팔을 들어 온객행을 마주 안았다.
온객행과 주자서는 외실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지주를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인들이 다가와 온객행에게 물었다.
“객실을 정리할까요? 주무시겠습니까?”
온객행이 평상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주자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탁드립니다.”
하인이 시위들과 여기저기 구르며 조금 꼬질꼬질해진 주자서를 힐끔 보고 물었다.
“세목(洗沐)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하인에게 물었다.
“세목을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까?”
하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지 않을까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준비해 주시오.”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내원 오른편 객실에 준비하겠습니다. 한식경(一食頃)만 기다려 주십시오.”
온객행이 하인에게 말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지주는 오늘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니 천천히 하세요.”
하인은 온객행에게 조아리고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다시 탁상으로 가서 하인이 내온 차를 마시며 평상에 기대어 앉은 주자서를 구경했다. ‘군영에 있었을 때에 저런 옷을 입었을까? 상투를 튼 것도 좋군.’
주자서는 저를 보는 시선이 따가워서 힐끔 눈을 떴다가 온객행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고 조금 몸을 틀어 앉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한 말뜻을 찾느라 피곤도 잊은 채로 생각 중이다. 온객행이 처음에 희첩이니 내자니 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발의 영력을 비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주자서에게 발의 영력이 없으니 그 비호는 더 이상 필요 없다. 태평호에 온 이후로 주자서의 처지를 대체로 표현한 말인 한낱 미물, 주자서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말이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곁에 두려고 하는 이유를 주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사모하고 연모하는 이가 있는데.’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갈 곳이 없고 곁에 있으라 하니 곁에 있겠지만 주자서는 대체 어떤 태도로 온객행을 대해야 할지 몰랐다. 은하수에서 만난 남자는 주자서가 뭐라고 그에게 온객행을 부탁했을까? 이제는 요괴도 아니고 번듯한 신선이 된 모양이니 그 전보다 더 주자서의 형편과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주자서가 남의 사정을 돌보아 줄 만한 처지인가? 태평호 이후로 주자서는 남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면 받았지 누구를 보살펴줄 여력이 없었다. 어쩌면 그를 돌보는 사람이 되라는 뜻일까? ‘부하가 되라는 건가?’ 그러다 보통 부하와 혼인까지 하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주자서는 눈을 뜨고 생각을 멈췄다. 온객행이 저에게 싫증이 날 때까지 버텨보자. 내쳐지면 그때 서쪽으로 향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서쪽으로 떠나기 전에 낙읍에 계신 모친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당산에서 낙읍까지는 말을 빌려 가면 하루, 걸어가면 나흘이 걸렸다. 멀지 않은 곳에 계신다고 하니 괜히 더 그리워진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힐끔 보고 부탁을 해볼까 하다 말았다. 모친께 온객행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자서가 평상에서 일어나 온객행이 있는 탁상의 자리에 앉았다.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우고 조금 식은 차를 마셨다.
온객행이 차를 마시는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유서. 덥지 않은가?”
주자서가 찻잔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말을 다 마치지 않고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눈썹이 축 처져서 서러운 얼굴을 하는 온객행을 보다 피식 웃었다.
“덥지 않습니다. 산이 높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주자서의 대답에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춥지는 않은가?”
주자서에게 다가와 주자서의 앞섶을 쓸며 말했다.
“이 옷은 불편하지는 않은가?”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상투를 트는 것도 나쁘지 않군. 관을 해도 되겠어.”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관례는 이미 치렀으니 못할 것도 없습니다.”
온객행이 물었다.
“관례를 치렀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군영에서 장군께….”
온객행이 급하게 입을 가리고 말했다.
“아!”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울상으로 말했다.
“또 실례를…. 용서하시오.”
주자서가 작게 웃고 답했다.
“아닙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라도 듣고 싶으시다면 해드리지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몸을 붙이고 앉아서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 중에 재미없는 것은 없으니 해주시오.”
온객행은 다시 고개를 괴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기산에서 도망하여 낙읍에 도착한 주자서의 가족들은 한동안 피난민처럼 거처를 이곳저곳 옮겨야 했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낙양성으로 들어가는 태곡관 밖에 있는 마을에서 품앗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모친과 종형제인 형님께서 고생하신 덕분에 주자서가 충년이 될 즈음에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거처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금을 타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친을 위해 칠현금을 사드리려고 몇 년이나 돈을 모았지만 결국 그 돈으로 형님께서 혼인을 하셨다. 혼인을 하고 당질이 태어나 얼마 동안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살았다. 조금 여유가 생겨서 주자서를 성안에 있는 서원에 보내기도 했다. 끼니 걱정을 하는 것이 제일 큰 걱정인 삶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나라에 일이 생겨 징집령이 내려졌다. 주자서의 집에 징집령에 응할 수 있는 것은 형님뿐이었다. 형님은 모친 몰래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을 가려고 하다가 잡혀서 전장으로 끌려갔다. 도망병인 형님의 처지가 군영에서 어땠을 지 지금의 주자서는 알고 있다. 형님께서 버티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정말로 형님께서 전장에서 전사하셨는지 아니면 사고로 돌아가셨는지 그들은 형님의 시신을 찾지도 못했다. 그리고 주자서가 징집이 되어 사분군으로 최전방에 있는 전장으로 온 것이다. 막 지학을 넘긴 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서원에서 배운 것들은 실전과는 너무 달랐다. 부친께서 무관이었기 때문에 모친께서는 병서를 읽게 하셨고 그에 걸맞은 무도를 갖추기 위해 형님께 배웠던 검술은 전장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비열하고 너저분한 전투는 살아남는 자를 승리자로 만든다. 그 승리자는 덕이 높을 필요도 어질거나 점잖을 필요도 없다.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도망치는 것을 제일 잘합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겁이 나면 알려주시오. 내가 달래주겠소.”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작게 웃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하지 않았소. 아주 귀여워.”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밀어냈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내게 도망쳐 오시오. 내가 지켜주겠소.”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흑랑에게서 도망치고 싶으면 어찌합니까?”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안돼. 내가 혹시 겁나게 하면 말해주시오. 나는 모자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바보니까.”
주자서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하인이 기별하며 말했다.
“온공자. 객실이 준비되었습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세목을 준비했다고 하니 가서 씻으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이끌려 객실로 향했다.
따끈한 물이 담긴 커다란 목욕통은 객실 오른편에 있는 곁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주자서는 세목이라 하여 간단히 영견에 물을 묻혀 몸을 닦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본격적인 목욕통을 이용할 줄은 몰라서 얼떨떨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곁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어서 씻게. 고상이 사나흘에 한번은 씻겨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야 그대를 씻기는군.”
온객행의 말에 하인이 주자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자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뭇거리자 하인이 물었다.
“시중을 들 아이들을 부를까요?”
주자서가 당황하며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온객행이 하인에게 물었다.
“시중이라니?”
주자서가 하인을 보고 말했다.
“세목이 끝나면 어찌할까요?”
하인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하며 말했다.
“그냥 두시면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내원에 있는 하인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곁방을 나갔다. 하인이 나가는 것을 빤히 보고 있던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병풍 너머에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통에 다가가 물을 만지고 말했다.
“아주 뜨겁네. 조심해야겠어.”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갔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멀뚱히 서 있자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정말 시중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면 저는 이만.”
온객행이 돌아 나가려는 주자서를 붙잡고 말했다.
“유서. 무슨 소리인가? 어서 씻으라니까?”
주자서가 목욕통과 온객행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제가요?”
온객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이자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덩달아 부끄러워져 놀란 듯이 말했다.
“아! 내가 자리를 비켜주겠네.”
그리고 곁방의 장지문을 닫고 나갔다. 온객행은 내원을 거닐다가 정원을 쓸고 있는 하인을 만났다. 온객행이 하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보게. 혹시 머릿기름을 좀 얻을 수 있겠는가?”
하인이 다가온 온객행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
“공자께서 쓰실 것입니까?" 온객행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자에게….”
하인이 빙긋 웃더니 말했다.
“객실로 가져다드리면 되겠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네.”
뒤돌아서 가려는 하인을 붙잡고 온객행은 품에서 염낭을 꺼내 은정을 쥐여 주고 활짝 웃었다.
주자서는 목욕통을 한참 보다가 결심을 하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런 황송한 대접을 또 언제 받아 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고,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조금 굳어 있는 몸과 마음이 풀어질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굉갑을 풀고 가죽 요대를 풀어 바닥에 놓았다. 주자서는 옷을 벗어 병풍에 걸어 두고 신발을 벗고 족건도 벗었다. 옷을 다 벗고 목욕통 안에 들어간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목욕통의 물은 뜨겁다고 하기보다는 미지근했는데 날이 춥지 않아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도자기 그릇에 조협(皂莢)이 들어 있었다. 주자서는 콩깍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상투를 튼 머리를 내리고 목욕통에 고개를 기댔다. 나른한 것이 잠깐 쉬었다가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반 시진이 넘도록 곁방에서 나올 기색이 없는 주자서에 애가 탔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장지문 앞에서 이리저리 부산을 떨며 움직이는데도 곁방에서 기척이 없으니 더 불안한 것이다. 그렇다고 들어가서 벗은 몸을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온객행은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원에서 만났던 하인이 곁방을 정리하러 왔는지 온객행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직도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장지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아직. 아직 조금 더 기다려주게.”
하인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물이 많이 식었을 텐데…. 갈아입으실 옷은 있으십니까?”
온객행이 놀란 듯이 하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맞아! 갈아입을 옷이 없네. 어쩌지? 그래서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야.”
하인이 온객행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뿌리쳤다.
“갈아입을 옷을 준비할까요?”
하인의 말이 끝나자 마자 장지문이 열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주자서가 하얀 내의만 걸치고 나왔다.
너무 놀란 온객행은 얼른 장포를 벗어 주자서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유서! 이게 무슨….”
주자서는 온객행이 법석을 떠는 것은 개의치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옷을 하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졸의 옷을 빌렸는데….”
하인이 옷을 받아 들며 말했다.
“옷을 준비해 드릴까요?”
주자서가 온객행이 둘러준 장포에 팔을 꿰며 말했다.
“아….”
온객행이 하인을 물리며 말했다.
“여기는… 어… 가보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조아리고 멀어지는 하인에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시위나 사졸이 입던 옷도 괜찮습니다.”
하인이 어깨너머로 주자서를 힐끔 보고 고개를 꾸벅하더니 외실 쪽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객실로 끌고 가며 말했다.
“유서. 어찌… 어찌….”
주자서는 온객행의 반응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입고 있는 장포를 여몄다.
“사내끼리 뭘 내외 하시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객실 안에 먼저 들여보내고 장지문을 닫으며 말했다.
“어찌! 당연히 내외해야지요!”
주자서는 온객행의 반응에 멋쩍어서 입고 있는 장포를 보았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온객행의 장포를 적시고 있었다. 주자서가 장포를 벗으려고 하자 온객행이 놀라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왜 이러시오?”
주자서가 장포가 젖은 부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옷이 젖습니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잡았다. 주자서가 ‘앗’하는 사이 온객행이 얼굴을 붙여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물고 핥고 빨더니 곧 입 안으로 온객행의 혀가 들어와 입안을 희롱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이럴 때마다 대체 뭘 어떡해야 하는지 몰랐다. 전에는 밀어냈지만 지금은 밀어내기도 곤란했고 무엇보다 예전만큼 그렇게 낯설지도 않았다. ‘희롱도 많이 하면 익숙해지는 구나’ 같은 생각을 하다 주자서는 숨이 막혀서 뺨에 얹어진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이 입을 떼고 이마를 맞붙이고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유서….”
주자서의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점차 평온해지자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자서의 손이 온객행의 어깨를 잡았다. 온객행은 밀어내는 기색 없이 얹어진 그 손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온객행이 한참 주자서의 입가를 희롱할 때 밖에서 하인이 기별해왔다.
“옷을 가져왔습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놔주고 싶지 않아서 입술을 떼고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거기 두고 가시오.”
하인이 말했다.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온객행은 하인의 기척이 없어질 때까지 주자서를 꼭 안고 있다가 하인이 내원에 다다랐을 때 다시 주자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흑랑. 옷을….”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조각자나무 냄새가 나.”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장지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조협을 사용해서 씻었으니까요.”
장지문을 열려는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당겨 멈춘 온객행이 말했다.
“저기 병풍 뒤에 가 계시오.”
주자서가 침상 옆에 놓여있는 병풍을 보고 온객행이 시키는 대로 병풍으로 갔다.
병풍 뒤에는 크고 작은 함과 옷걸이가 있었다. 주자서는 함을 열어 보았지만 옷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주자서가 함을 다 둘러보고 병풍에서 나오자 온객행이 하인이 가져온 옷을 펴보며 말했다.
“이것은 무명이 아니오? 소매도 짧고 이런 옷을 입힐 수는 없소.”
주자서가 온객행이 옷을 올려 놓은 탁상으로 가서 옷을 보며 말했다.
“이런 옷이 어때서요. 저는 편해서 좋습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장포를 벗고 옷을 입으려고 하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잡고 말했다.
“유서! 병풍 뒤에 가서 입으시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빨개진 온객행의 얼굴을 보고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하고 탁상에 놓인 옷을 들고 병풍으로 갔다. 입고 있던 온객행의 장포를 벗어 걸어 두고 내의 위에 서원 시위가 입는 옷 같은 호복과 바지를 입었다.
온객행은 병풍 뒤로 가는 주자서를 보았다. 자신의 장포를 입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주자서는 온객행에게는 조금 낯선 것이라 마음이 울렁거렸다. 객실 안을 비추는 은은한 불빛에 병풍 너머로 옷을 갈아입는 주자서의 그림자가 보였다. ‘저 치는 일부러 저러는 걸까?’ 병풍 뒤에 비치는 주자서의 모습이 너무 야살스러워서 온객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주자서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소.’ 온객행은 조금 슬퍼졌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고 하면 수선이니 흑룡이니 하는 것도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온객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서. 나를 좋아해 줘요. 좋아해 줘요. 유서.”
주자서가 옷을 다 갈아입고 온객행의 장포를 들고 말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젖은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어서 머리를 말려야겠어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의 옷을 들어 보이고 말했다.
“저 때문에 옷이 젖었네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조금은 슬프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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