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31

遠交近攻 | 31. 멀리 사귀고 가깝게 공격한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운신할 수 있게 되자 온객행은 주자서를 지백에게 부탁하고 주극성 여기저기를 다니며 현무의 가신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다. 임시직이라고 해도 지내는 동안 괜히 척을 질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도 문귀가 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초조하게 구는 온객행을 보고 문귀가 타박했다.
“지금 주극성을 얕보는 건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문귀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아 정전 뒤쪽에 있는 의풍전(懿風殿)으로 향하며 말했다.
“감히 누가 주극성에 들어와 그대의 내자를 괴롭히겠는가? 걱정 마.”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니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지 그런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귀가 온객행을 흘려보더니 ‘흥’하고 코웃음 쳤다.

처음에는 시력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은 그 전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으나 멀리 있는 것은 뿌옇게 보였다. 주자서는 여러 번 눈을 비볐다. 주자서가 눈을 불편해하는 것을 처음 눈치챈 것은 지백이었다. 붉게 변한 눈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백은 주자서가 뭘 보고 있는 것인지 몰랐으나 자리에 앉아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네다섯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 사물이나 사람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잘 보이지 않으니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지고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하다 보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백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서? 괜찮은가?”
주자서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백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죄인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네. 내가 수선께 부탁드려서….”
주자서가 고개를 들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다음은 청각이었다. 날카로워진 청각은 주자서를 더 예민하게 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감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서투른 주자서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놀라는 일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주자서는 온객행이 돌아오면 그런 내색을 아주 잘 감추었다. 지백은 몇 번이나 주자서에게 신열에 대해 말해주려고 하다가 온객행의 눈치가 보여 그만두었다.

주자서는 열병에 걸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병을 앓고 난 사람이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가까이에 있는 것은 보이니 문제가 없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주자서에게 너무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라 주자서는 한숨만 늘어갔다. 눈이 잘 안 보여서 청각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볼 때마다 입을 달싹이며 태평호로 언제 돌아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하인들이 들어와 온객행에게 서간과 서책을 나르면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중을 들다가 밤새 서안에 앉아 죽간을 읽었다. 저를 위해 불도 켜지 않고 서안에 앉아 죽간을 읽고 있는 온객행을 보고 있으면 주자서는 죄스러워졌다. 주자서의 몸이 점점 나아지니 지백도 곧 서귀를 따라 천주서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지백은 원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익숙하여 그렇게 됐다. 지백이 온객행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사라각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숫자가 줄었다. 주자서는 내실이나 내원에 앉아 온객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날 아침도 온객행은 주자서를 한참 안고 있다가 말했다.
“유서. 정말 가기 싫어. 근데 아직도 인사해야 할 가신들이 너무 많아. 내 가신들도 아닌데 내가 왜 만나야 하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한참 주자서에게 투정을 하고 문귀가 내원 안까지 들어와서 온객행을 찾아야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문에서 멀어지는 온객행의 모습이 희미해서 주자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주자서가 갈 수 있는 범위는 사라각 내부가 전부였고 그 조차도 외실과 내실을 제외하면 익숙하지 않아 부딪히기 일쑤였다. 주자서는 내실로 돌아와 탁상에 앉아 또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의 기척을 읽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기척이 사라져 서야 주자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객행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떻게 그 말을 전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니 답답한 것이다. 짐이 될 것 같으니 떠나겠다고 그동안 감사했으니 이 벽옥(璧玉)을 받아 주시라고. 주자서는 품속에서 벽옥을 꺼내 보았다. 벽옥을 다시 품속에 넣다가 본 주자서의 팔은 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주자서는 눈을 비비고 다시 팔을 보았다. 손을 들어 만져보니 비늘의 촉감이다. 비늘을 만지는 손등에도 비늘이 보였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면경을 찾았다. 내실에는 어디에도 면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자서는 등잔을 켜서 물을 담아 놓는 항아리를 보았다. 물 항아리에 비치는 등잔을 들고 서 있는 남자의 눈은 눈동자 없이 붉다.


온객행은 문귀에게 사정사정해서 주자서와 점심을 먹으려고 잠깐 사라각에 들렀다. 지백의 말로는 주자서가 하인들을 불편해하니 하인을 많이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온객행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주자서의 시중을 드는 것이 싫었다. 외실에 있는 하인이 온객행을 보고 인사하며 물었다.
“수선. 점심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내실로 향하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내원에서 먹겠습니다.”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내실의 장지문을 열고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같이 점심 먹으려고….”
실내는 평소와 달리 조금 부산스러웠는데 주자서가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보통 내원에 앉아 있거나 내실에 앉아서 온객행이 읽던 죽간을 보았다.
“유서?”
온객행은 물동이 옆에 깨진 등잔을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객행은 내실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당황하며 밖으로 나갔다. 사라각 문을 지키는 별주부에게 온객행이 물었다.
“유서가 어디 나갔는가?”
별주부는 온객행을 보고 포권하며 고개를 흔들고 대답했다.
“하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온객행은 사라각에 있는 후문에 호위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지만 같은 대답을 들었다. 온객행은 다시 내원으로 돌아와 서실과 별실, 주방까지 모두 뒤졌지만 주자서가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은 한참 사라각을 찾다가 주자서가 현녀께 받은 벽옥이 생각났다. 주자서가 아니라 벽옥의 기운을 찾으니 벽옥은 내실에 있었다. 침대 옆에 침구를 보관하는 함 옆에 무릎을 안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주자서는 정말이지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가여워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서… 왜 여기 있어?”
주자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마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자서 옆에 앉았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유서, 왜 여기 있어?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곳에.”
주자서가 소매에 얼굴을 비비더니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저는 괴물이에요.”
울먹이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듣고 온객행은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흔들고 주자서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유서,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주고 말했다.
“저는 이제 사람이 아닙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쁜 비늘이네.”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조금 화가 나서 그를 밀쳤다.
“이 꼴로 이제 어디를 간다는 말이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소매에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이 꼴이 어때서? 예쁘기만 한데.”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노려보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응’하고 대답하고 다시 주자서를 품에 안았다. 주자서는 바르작거리며 밀어내더니 온객행을 마주 안고 그의 어깨에 기대 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을 쓸며 서귀와 지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불안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설명해주면 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빨리 화사의 모습이 나타날 줄은 온객행도 몰랐다.
“운기조식하여 마음을 다스리면 모습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소.”
주자서의 끄덕임이 온객행의 어깨에 느껴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나는 유서가 어떤 모습이라도 다 좋아하니 걱정 마세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아주고 몸을 물리며 말했다.
“저는… 저는 이제 사람을 먹습니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니오. 영력을 쌓는 방법은 많으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소.”
주자서는 팔에 있는 비늘을 보며 물었다.
“나도 집채만 해지는 것이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뺨에 난 눈물 자국을 지우며 말했다.
“화사는 보통 그렇게 커지지는 않소. 나는 파사라 큰 것이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자서의 뺨을 감싸고 눈물 자국을 보고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유서. 울지 마세요. 뱀이 된 것이 그렇게 싫으셨습니까?”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보았다. 그러다 온객행이 놀라며 물었다.
“유서… 혹시 뱀을 싫어합니까?”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손목을 잡아 얼굴에서 그의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주자서의 물음에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서. 밥은 먹었어요?”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잡아 돌리고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겹쳐 잡고 말했다.
“유서. 나는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쏘아보다가 얼굴을 놓아주며 말했다.
“거짓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유서는 어떤 모습이던 아름다우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을 흘겨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이 내실에 기별했다.
“수선.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내원으로 이끌자 주자서가 하인의 눈치를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내원으로 나가며 말했다.
“저들은 모두 두꺼비이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점심을 준비하던 하인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를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먹어 치우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치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웃으며 다시 주자서의 허리를 잡았다.
“응. 유서.”


둘이 옥신각신하는 도중에 외실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문귀께서 오셨습니다.”
온객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벌써?”
문귀가 내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밥 챙겨주러 간다더니….”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문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온객행이 하인을 시켜 문귀의 몫을 준비하게 시켰다. 문귀가 정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말했다.
“나는 굳이 먹을 필요는 없는데….”
온객행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가시오.”
그리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옆에 앉혔다. 온객행은 작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눈을 힐끔 들어 아직도 서 있는 문귀를 보았다. 문귀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더니 ‘흠’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인이 앞접시와 젓가락을 가져와 문귀 앞에 놓았다. 문귀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덜어 먹기 시작하자 주자서도 젓가락을 들어 온객행이 집어준 음식을 먹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괴고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문귀가 음식을 먹다가 말했다.
“영력을 쌓으려면 스승이 필요하겠군.”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스승? 여기 내가 있는데 스승이 왜 필요합니까?”
문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유서는 스승을 모시도록 하게. 하늘에서 지내려면 인맥이 중요하지 않은가?”
온객행이 몸을 바로 하고 정색하며 말했다.
“유서라 부르지 마시오! 온부인이나 수선부인이나 그런 걸로 부르시오. 어디 감히 남의 내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문귀 어르신.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런 법도 들어본 적 없소.”
문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천룡이나 지주를 붙여줄까 생각하는데….”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귀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무극형! 미쳤소?”
문귀가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천룡은 문안(文案)이 빨라서 정전의 일에서 뺄 수 없으니 일단은 지주를 사라각으로 보내겠소.”

온객행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즉저가 일을 그렇게 잘합니까?”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치는 욕심이 과해서 그렇지, 일은 잘해.”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앞으로 계속 부딪히겠군요. 제가 등선했으니 그쪽도 배알이 뒤틀릴 텐데….”
문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지금은 천도연 때문에 아주 급한 현안 빼고는 모두 미뤄둬서 한가한 편이네. 백종절… 하아….”
온객행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정말 괜한 일을 맡은 것 같소.”
문귀가 주자서를 빤히 보고 말했다.
“화사이니 어쩌면 옥산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르겠군.”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럼 나도 옥산으로 가겠소.”
문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지백도 보내주셨으니 원군께 청해 봅시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제가 알아 두어야 할 내용이 담긴 서책은 없습니까?”
문귀가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글을 읽을 줄 아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귀가 ‘흠’ 하더니 말했다.
“남쪽 별각에 장서각이 있으니 드나들 수 있게 통행패를 전하라 하겠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감은하옵니다.”
문귀가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예를 거두시오. 지금은 견연이 나의 상전이니 예법은 생략합시다.”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일어나 있는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주자서의 팔에 뺨을 비볐다. 고개를 숙이고 온객행의 희롱을 받아주는 주자서의 눈가가 붉어서 문귀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 안이 썼다.

문귀가 말했다.
“오늘은 그럼 사라각에서 보고를 받게. 일단 정전의 관헌(官憲)은 모두 만났으니 사당(四堂)의 관료는 따로 날을 잡아 정전에서 보는 것으로 하지. 주극성은 크기 때문에 정무(政務)에 따라 일하는 장소가 다르니 오늘은 내자를 데리고 성 내부를 돌아보도록 하게.”
그리고 품속에서 금으로 만든 거북이가 달린 옥패를 꺼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문귀가 온객행을 흘겨보고 말했다.
“빌려주는 것이네. 내일 돌려주게.”
온객행이 문귀 손에 있는 옥패를 낚아채고 말했다.
“어차피 모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아니오.”
문귀가 온객행을 못마땅하게 보며 말했다.
“그래도 웬만한 데는 다 갈 수 있네. 북쪽 후원에 있는 소요지(逍遙池)에 연꽃이 아주 많이 피었겠군.”
문귀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온객행도 소매를 들어 문귀에게 인사했다. 서 있던 주자서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한번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
“많이 먹어 유서. 아직 완전히 화사가 된 것이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온객행에게 물었다.
“모습은 언제 바꿀 수 있습니까?”
온객행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부끄러워서 그래? 아주 예뻐.”
주자서가 헛웃음 치고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사람도 요괴도 아닌 모습을 한 것이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흠….”
식사를 마치고 온객행은 하인을 시켜 내실에 면경을 들이게 했다. 온객행은 소매를 뒤져 현리에게 받은 장신구 함을 꺼내 주자서에게 보여주었다.
“유서 이리 와서 골라봐.”
주자서는 화려한 장신구가 들은 함을 보고 조금 주눅 들어서 말했다.
“이건 왜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면경 앞에 앉히고 말했다.
“관을 올리고 싶다고 했지? 마음에 드는 관을 골라봐.”

주자서는 감히 비싸 보이는 관을 만질 수 없어 말했다.
“저는….”
주자서가 머뭇거리자 온객행은 태평호에서 하고 있던 은으로 만든 관을 집어 주자서의 머리에 대보고 말했다.
“그럼 내가 하던 것을 하게.”
그러더니 온객행의 눈이 검게 변했다. 손에 든 은관에 ‘후’하고 입김을 불자 은의 색깔이 조금 어둡게 변했다.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더니 말했다.
“내가 검은색이라 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주자서는 내심 조금은 바랜 듯한 느낌이라 더 좋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면경 앞에서 한참 주자서의 머리를 매만지더니 은관을 해주었다. 머리를 은관으로 고정하자 주자서의 눈이 다시 사람의 눈으로 바뀌었다. 주자서는 소매를 걷어 팔을 보았다. 붉게 보이는 비늘도 사라지고 사람의 모습이었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수련을 해서 영력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이렇게 하자.”
주자서는 고마운 마음이 울컥 치밀어서 온객행의 손을 찾아 잡았다.
“흑랑….”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맞잡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호칭도 좀 정리해야겠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기대 앉아 말했다.
“유서. 나는 태평호의 견연입니다. 하지만 온객행이라는 이름이 제일 좋아요.”
주자서가 기대 앉은 온객행의 등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저는 기산 주가 자서입니다. 이제는 유서라는 이름도 익숙해요.”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물었다.
“온랑(溫娘)이라고 부를까?”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저도 온랑(溫郞)이라고 부릅니까?”
온객행은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너무 헷갈리겠다.”
온객행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객행이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어. 나는 서호에 정착하기 전에 정말 많이 떠돌았거든.”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꼭 잡았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와도 갈 곳이 없고. 안에 들어도 머물 곳이 없네.” (6)
주자서가 팔을 들어 온객행의 허리를 안았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 해준 말인데… 좋아한다는 말도 못했는데 죽었어.”
주자서는 은하수에서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알고 계실 겁니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온객행이 행복하기를 바라실 거에요.”

온객행은 한참 말이 없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객행이라고 불러줄래?”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행.”
주자서는 품속에서 현녀에게 받은 벽옥을 꺼내 온객행에게 내밀고 말했다.
“이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온객행은 주자서가 내민 벽옥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아 손 위에 벽옥을 올려놓고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모자란 사람이라… 이제 사람도 아니오. 예전에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치세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유서. 은혜라니 서로 좋아하는데 은혜가 다 무슨 말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제가… 제가 수선을 좋아합니까?”
온객행은 울상을 하고 주자서에게 물었다.
“내가 싫은가?”
주자서는 얼른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 하지만….”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끌어안고 말했다.
“알아. 사내는 싫다고 했지. 유서가 싫은 것은 안 할 거야. 우리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천천히 찾으면 돼. 일단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먼저야.”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ㅈ…해요….”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응?”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요. 온객행.”
온객행은 텅 비었던 마음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더 바짝 끌어안고 말했다.
“나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 사랑해.”
주자서는 부끄러워서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사실은 유서에게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벽옥을 돌려주고 말했다.
“나는 유서 마음이 가지고 싶어.”
주자서는 벽옥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마음 따위를 어디에 쓰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려 자기를 보게 하고 말했다.
“나는 벽옥보다 유서 마음이 더 가지고 싶어. 나한테는 이 벽옥보다 그게 훨씬 더 소중해.”
주자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온객행의 눈빛이 뜨거워서 부끄러워졌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 사랑해.”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다시 온객행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말했다.
“드리겠소. 내 마음 전부 가지시오.”
온객행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좋아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당겨 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핥고 입안에서 뜨거운 살덩이를 찾아 핥고 빨았다.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온객행도 주자서도 조금 금방 숨이 차올랐다. 온객행이 이마를 맞대고 부스스 웃자 주자서도 온객행을 따라 웃었다.

온객행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는 싫은 줄 알았는데….”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뭐가 좋았나? 핥는 것? 빠는 것?”
주자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온객행은 주자서가 사랑스러워서 다시 그의 입안을 희롱했다. 숨이 찬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물어볼 걸 그랬어.”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변했다. 전에는 무서웠는데 주자서는 이제 별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끼리 어떻게 정을 통하는지 말이야.”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온객행의 어깨를 밀었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았다.
“현리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주자서가 질색하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낮게 웃으며 답했다.
“응.”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고 문귀가 추천했던 후원으로 갔다. 소요지라는 연못은 그 규모가 커서 태평호를 생각나게 했다. 주자서는 주극성을 돌아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는데 그제야 온객행은 주자서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은 한참 주자서를 닦달하여 주자서의 시력이 나빠진 것을 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튀며 놀라는 그의 행동으로 그의 청각이 전보다 예민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유서. 나는 정말 바보야.”
주자서는 희미하게 보이는 연못의 연꽃을 보며 말했다.
“객행이 바보면 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멀리서 후원을 정리하는 나흘마의 기척에 주자서는 또 어깨를 튀며 놀랐다. 온객행은 그 전보다 더 자주 주자서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유서, 객행은 모자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바보야.”
그러면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객행. 앙탈이 너무 과하십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퍼붓는 애정이 정말 자기가 좋아서 였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라 얼떨떨했다.


(6) 조식(曹植) 雜詩 잡시
悠悠遠行客 去家千里餘
멀리 멀리 떠나온 나그네여. 집을 떠나 천리쯤 이로다.
出亦無所之 入亦無所止
밖으로 나와도 갈 곳이 없고 안에 들어도 머물 곳이 없네.
浮雲翳日光 悲風動地氣
뜬구름은 햇빛을 가리고 쓸쓸한 바람은 회오리를 일으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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