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35

調虎離山 | 35. 호랑이를 산에서 나오게 한다.

지주는 백종절이 다가오자 천주서원에서 지내는 태일초례(太一醮禮)를 돕기 위해 태평호를 떠나야 했다. 지주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신월(申月; 음력 7월)은 지관(地官)이 오셔서 여귀(厲鬼)와 망혼(亡魂)을 구원하는 달이니 귀신이 많은 달이다. 되도록 태평호 밖을 벗어나지 말고 어디를 가더라도 꼭 입하와 입추를 데려가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곡식을 다 먹어 갑니다. 황산에 다녀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주가 ‘흠’하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백종절이 끝나고 되도록 바로 올 테니 사나흘 후에는 돌아올 것이다. 내가 서원에서 얻어오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했다. 지주는 제자로 받은 계낭 몇을 데리고 천주서원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백택에 들어가서 곳간을 살펴보았다. 백택에서 일하는 계낭은 절기의 이름을 모두 채울 만큼 늘어났다. 계낭은 딱히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자서는 자기가 먹을 때 그들도 챙겨서 먹였다. 그러니 전보다 곳간이 비는 속도가 빨라졌다. 주자서와 함께 식사를 시작한 계낭은 사람의 아이가 크는 것처럼 몸집도 영력도 쑥쑥 자랐다.

입춘(立春)이 다가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주인. 오늘은 연근을 따러 갈까요?”
주자서가 입춘을 보고 말했다.
“연근? 나는….”
입춘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부유각으로 이끌며 말했다.
“나어나 소어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주인께서 부유각에 계실 때 주인을 모시고 싶다고 한 나어가 있었어요.”
주자서는 장강에서 보았던 소어가 생각나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 나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옆에서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설(小雪)이 말했다.
“수선의 부인인데요?”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부인이 아니라니까.”
소설이 주자서의 반대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연근은 진흙 속에 있어서 산정인 저희는 못해요.”
입춘이 말했다.
“보살께서 연근을 좋아하세요.”
입하와 입추가 정전의 마당을 쓸고 나와 그들을 발견하고 주자서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주인.”
주자서가 얼른 다가가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것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한 식구니까.”
입추가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소설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말했다.
“어서 연근을 캐러 가요.”
입하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연근을 캐시게요?”
입추가 하늘을 보고 말했다.
“또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물이 불어 위험할지도 모르니 날이 좋을 때 가시지요.”
입하가 입추를 거들며 말했다.
“올해는 늦장마인지 전달에 오지 않은 비가 오는 모양입니다. 벌써 신월인데 비가 많네요.”
제때 곡식을 심지 못했어도 비가 덜 왔으니 작년보다는 덜 굶겠구나 주자서는 생각했다. 소설이 입을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보살께서 연근을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입하가 소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신월은 근신하는 달이라 아마 유월(酉月; 음력 8월)이 돼야 오실 거예요.”
주자서가 입춘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날이 좋아지면 나어에게 부탁해서 연근을 캐러 가요.”
입춘이 주자서를 힐끔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유각 내실은 너무 더러워요. 주인님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주자서가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아…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입하와 입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말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너무 위험하니 정전에서 지내세요. 그동안 저희가 정리해 두겠습니다.”
주자서가 입하와 입춘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니오. 내가 하겠소. 내가 해야 하오.”
계낭은 모두 미덥지 않은 표정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하는 백택 근처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열매와 근채(根菜)를 정리해서 목간에 적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계낭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을 나는 동안 글을 가르치기로 했다. 입추는 주자서와 함께 재실에 앉아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했다. 입추가 말했다.
“저희는 산정이라 추위를 타지 않으니 이런 옷이나 신발은 주인님만 있으면 됩니다.”
주자서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정리된 목간을 실로 엮으며 말했다.
“주인. 주인께서는 주인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곡우(穀雨)도 제 앞가림은 주인보다 나아요.”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정말 모자란 사람이네요.”

입하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주인께서는 정말 이상해요. 본인 먼저 생각하세요. 저희는 여기 주인을 모시기 위해 있는 겁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내 하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식구잖아요.”
입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인. 그러니까 저희는 산정이라 산에 있기만 하면 먹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주자서가 입추를 보고 말했다.
“혼자 먹는 건 너무 쓸쓸하잖아요.”
입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지기께서도 항상 같이 드셨잖아.”
입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난 내가 뭘 잘못한 줄 알았어.”
입하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무지기께서는 우리가 불편할까 봐 자주 부르지는 않으셨지만 명절에는 같이 식사를 했어요.”
주자서가 곤란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불편하십니까?”
입추가 주자서에게 기대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안 불편해서 위화감이 있어요.”
입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몸을 바로 하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직 어린 계낭의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지 마세요.”
입하가 거들었다.
“너무 아무나 다 받아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입추가 말했다.
“태평호 근처에 있는 계낭은 모두 백택에 삽니다. 아세요?”
주자서가 입추가 엮어 놓은 목간을 보고 말했다.
“아이들이 지낼 객실을 조금 더 정리할까요?”
입하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이들이 아니라니까요!”
주자서가 입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같이 먹으니 이렇게 많이 자랐잖아요.”
입하와 입추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여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입하와 입추는 다른 계낭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우사첩이 있을 때에도 백택의 잡일을 맡아 하느라 다른 계낭보다는 영력이 많이 쌓였었는데 이러다 정말 주인보다 먼저 등선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지주에게 들었다.

입하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정전에서 지내세요. 제가 태평호에 가서 나어와 소어에게 의사를 묻고 오겠습니다.”
입추가 말했다.
“사자형제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태평호에 온지 벌써 달포가 다 되어가니.”
입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사자형제께서는 포도를 좋아합니다. 작년에 담근 홍주가 남았으면 홍주와 함께 가져가면 좋아하실 겁니다.”
입추가 말했다.
“신월에는 어디 나가지 않으실 테니 비가 그치면 유사혈에 다녀오세요.”
입동(立冬)이 재실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올해는 여제(厲祭)를 안 지냅니까?”
입하가 답했다.
“지주대인께서 괜히 여귀(厲鬼)가 모이면 위험하니 수선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하셨네.”
입동이 주자서 곁에 다가가 앉고 말했다.
“주인 포도 좋아하십니까? 뒷산에 포도가 열렸어요.”
주자서가 입동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입동은 포도를 좋아합니까?”
입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입추가 입동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리광을 받아 주지 마세요!”
입동이 혀를 차며 말했다.
“부러우면 부럽다 하시오.”
입하가 입동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찌 주인께 인사도 안 하고!”
입동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매일 보는데 무슨 인사요! 쓸데없는 짓.”
주자서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 오시면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혼나요.”
입동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주인님께서 혼나면 안되죠. 주의하겠습니다.”
입하는 어쩌면 주자서가 부유각에서 지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저는 태평호에 다녀올 테니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빨랫감은 가져다 두셨습니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입하가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아니요. 제가 오는 길에 가져오겠습니다.”
주자서가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날이 추워지면 옮길 테니 그전까지는 부유각에 있게 해주시오.”
입동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승선을 허락해 주시면 제가 겨울에도 지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안 돼요. 부유각은… 부유각에는….”
입추가 말했다.
“수선께 허락 없이 승선했다가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입동이 주자서의 소매를 흔들고 말했다.
“수선께서는 주인 말씀은 다 들어주시잖아요.”
주자서가 멋쩍게 웃고 말했다.
“그건 제가 싫어요.”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희미한 주자서가 강하게 싫다고 말한 것은 많지 않아 계낭은 할 말이 없었다.

백종절이 지나고 나서도 태평호에는 비가 많이 왔다. 태평호에 사는 나어 중에 천교와 보살과 친하게 지내던 나어 몇이 물고기며 연근 조개 등을 과일로 바꾸어 갔다. 물속에 사는 그들이 구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어들의 도움으로 유사혈을 찾아간 주자서를 보고 사자형제는 그를 아주 신기해했다.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요괴가 된 사람은 그들도 본 적이 없어서 사자형제는 주자서를 붙들고 사람들의 이야기와 요대, 주극성에서 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자서는 최대한 아는 대로 답했다. 사자형제는 주자서에게 요괴와 신선에 관련된 서책들을 건네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지주는 천주서원에서 구름 마차 한가득 곡식을 얻어 왔다. 포도를 따고 연실을 따고 수확 철이 다가오자 주자서는 수련할 사이도 없이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태평호 근처에서 수확한 과일과 근채를 씻고 말리고 하는 새에 신월이 모두 지났다. 주자서는 매일 무슨 일을 했는지 간단히 적은 목간과 그날 딴 것 중에 제일 크고 좋은 것을 나무함에 넣어 두었다. 온객행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칠석에 주자서를 만나고 돌아온 온객행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백종절에 천주서원의 제사를 돕기 위해 온 지주는 너무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다. 중원(中元)이 지나고 지관의 접대를 마친 주극성은 다시 하원(下元)을 준비해야 해서 바빴다. 중원은 사령과 오룡이 주최하는 제사이기 때문에 사방신은 그나마 일이 적었다. 하지만 하원에는 현무의 상관인 수관이 주극성으로 내려오시기 때문에 백종절보다 훨씬 준비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용슬은 부쩍 말수가 줄어든 온객행이 조금 걱정되었다. 가끔 소매에서 꺼내는 들꽃을 보고 한숨을 쉬거나 소매에 손을 넣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항상 요대에 매어 두었던 옻칠한 요패도 요즘엔 자주 꺼내지 않았다.

문귀가 천연당(天淵堂)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견연. 흑룡께서 하원의 일을 돕기 위해 보름 안에 주극성으로 오신다고 하는군. 북해에 부탁할 것이 없나?”
온객행이 읽고 있던 서안에서 눈을 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금을 부탁합니다.”
문귀가 서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소금은 내가 현무께 부탁해 두었네. 동해의 소금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시선을 서안으로 내리며 말했다.
“저는 북해의 소금이 좋아요.”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네. 소금을 부탁해두지.”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견연. 다른 것은 없나? 사형이 오신다는데 기쁘지 않아?”
온객행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뻐요.”
문귀가 고개를 돌려 용슬을 보았다. 용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일이 많아 통 쉬지 못하셨습니다.”

문귀가 다시 온객행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라각은 지낼 만 한가?”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문귀가 혀를 차고 말했다.
“정말 천변당으로 옮길 생각이 없는가?”
온객행은 고개를 젓고 답했다.
“안 갑니다.”
문귀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대체 버들개지가 뭐라고 한 거야?”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유서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문귀가 조금 날카로워진 온객행의 심기를 느끼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태평공(太平公)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문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십 갑자동안 일했던 천연당을 구경하며 말했다.
“견연. 기분 전환할 겸 소요지에 갈까?”
온객행이 읽던 죽간을 잘 말아 옆에 두고 다시 새로운 죽간을 펼치며 말했다.
“어차피 일할 텐데 천연당이면 어떻고, 소요정(逍遙亭)이면 어떻습니까?”
문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연실이 잘 익었는데 그대도 먹어 보겠나?”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온객행의 표정에 놀라서 말했다.
“견연! 제발! 참아주게.”

온객행은 코를 훌쩍이고 눈을 감더니 한참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은 내심 주자서가 자기에게 왜 그 말을 많이 했을까 고민했다. 정말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불편해서 그랬던 것인지. 주자서는 다정하니 에둘러서 자기를 거절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객행은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객행이 얼굴을 양손에 묻고 훌쩍이기 시작하자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기룡께 태평호에 대해 말씀드렸네.”
온객행이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가 다시 자리에 앉아 온객행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고 말했다.
“기룡께서는 삼하궁에 머무시니 흑룡을 마중하러 삼하궁에 가는 날 만나 뵙고 오게.”
온객행이 소매로 눈물을 닦고 물었다.
“흑룡을 맞이하러 제가 갑니까?”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네. 용왕이니까.”
문귀는 품에서 영견을 꺼내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흑룡께서는 하원까지 머무실 거야. 그럼 너도 여유가 좀 생기겠지.”
온객행이 문귀의 영견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귀가 한참 온객행을 보다가 말했다.
“안아줄까?”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귀가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용슬을 불렀다.
“용슬. 이리 와서 견연을 안아주게.”
용슬은 문간에 서 있다가 당황하여 문귀를 보고 다시 물었다.
“네?”
온객행이 입을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주극성에 있는 이들은 모두 너무 메말랐소. 차가워.”
문귀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자네가 너무 격렬한 것은 아닌가?”
온객행이 문귀의 영견을 곱게 접어 서안 위에 올려 두고 말했다.
“제가 현무가 되면 교대할 때마다 서로 안아줘야 한다는 법을 만들겠어요.”
문귀가 표정을 구겼다. 서안으로 다가온 용슬이 멀뚱히 서 있자 문귀가 온객행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용슬. 어서 안아주게.”
온객행이 다가온 용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대신 차를 준비해주세요.”
용슬은 얼른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이 다시 서안을 보며 말했다.
“무극형. 권력 남용입니다.”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고 말했다.
“주극성은 정말 좀 삭막한지도 모르겠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고 물었다.
“가십니까? 오늘은 일 더 안 시키십니까?”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아!’ 하고는 소매에서 죽간을 꺼내 온객행의 서안 위에 올려 놓았다.
“서귀와 지백이 천주서원에서 올린 보고이네. 지백은 정말 대단해 간결한 것 보게. 겨우 한 책이야.”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금모원군께 부탁드려서 현무의 가신 삼으시오. 어차피 요대로 다시 돌아가 봐야 수구문 지키는 일이나 하게 될 테니.”
문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수구문을 지킨다고? 수구문을 왜?”
온객행은 말없이 죽간을 펼쳐서 읽었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나가며 말했다.
“우리도 수구문을 지켜야 하나?”


문귀는 삼하궁으로 향하는 온객행에게 연신 당부했다.
“자네는 수선이네. 수선다운 행동을 보여주게. 아! 맞아 자네는 현무네. 주극성의 얼굴이야. 주극성에 먹칠하는 일을 하면 정말 앞으로의 생을 고달프게 만들어주지.”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부탁이던 위협이던 하나만 하시오.”
문귀가 서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용궁형(茸弓兄) 이 모자란 놈을 부탁드립니다. 말 안 들으면 때리세요.”
서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문귀. 어찌 때린다는 말인가? 말로 잘 타일러야지.”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용궁형의 잔소리는 한두 시진으로 끝나지 않으니 각오하는 게 좋아. 차라리 맞는 게 나을 걸.”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반나절인데 무슨 걱정이시오.”
문귀도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황룡께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하셔서 일정을 넉넉하게 잡았으니 서두를 필요 없네. 안부도 전해드리고.”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구름을 만들어 탔다. 곧 현무의 가신들도 구름 마차를 타고 삼하궁으로 향했다.

삼하궁의 대문 앞에 백룡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조금 기다렸다가 현무의 가신들과 함께 삼하궁으로 들어갔다. 백룡이 인사했다.
“수선. 어서 오세요.”
온객행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오윤왕을 뵙습니다.”
백룡이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룡과 흑룡께서는 중앙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객행과 서귀는 백룡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다른 가신들은 주극성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들고 삼하궁의 하인들을 따라갔다. 커다란 호수 위로 높은 누각이 보였다. 정원이라기 보다는 호수 같은 곳에 흑룡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온객행이 흑룡을 불렀다.
“사형!”
흑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하여 인사했다.
“현무 대리. 잘 지냈는가?”
온객행이 웃으며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번듯한 흑룡이 되셨습니다. 스승님께 가보셨습니까?”
흑룡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서. 하원이 지나면 정월에 찾아뵈려고.”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럼 그때….”
흑룡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현무는 정월에 바쁘실 테니 나 대신 힘 써주시오.”
온객행 옆에 서 있던 서귀가 흑룡에게 인사했다. 흑룡은 서귀의 인사를 받고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참 차를 마시던 서귀가 흑룡에게 물었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흑룡이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동이 트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서귀가 하늘을 보고 다시 물었다.
“천선은 뵈셨습니까?”
흑룡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구경하며 말했다.
“연꽃 질 때가 다 되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한창입니다.”
흑룡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삼하궁의 연꽃은 사시(四時) 모두 제철이지요.”
온객행이 웃으며 연꽃을 보았다. 서귀는 흑룡과 차를 마시며 하원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객행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정원을 거닐며 연꽃을 구경했다. 넓은 잎사귀 끝이 축 처진 것을 보고 연잎을 따던 주자서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반 시진 정도 기다리자 백룡이 헐레벌떡 정원으로 들어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선께서 지금 성숙원(星宿苑)에 계십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흑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온객행을 불러 성숙원으로 향했다. 성숙원에는 고상과 주요 기룡이 서안에 앉아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고상이 기룡에게 말했다.
“왜요! 왜 안됩니까?”
주요가 옆에서 고상의 소매를 잡고 연신 기룡에게 사과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아직 상선께서 어려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기룡이 붓을 들고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
“나는 내가 가본 곳만 그릴 수 있다니까? 태평호에 가본 적이 없는데 어찌 그리라는 것이야?”
고상이 기룡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갑시다. 지금 갑시다.”
주요가 고상을 멈추고 말했다.
“어르신. 꼭 태평호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황산도 괜찮습니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황산에서 태평호까지는 한 시진도 안 걸리니까.”
기룡이 다시 자리에 앉아 붓을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황산이라….”

백룡이 성숙원의 외실로 들어가 말했다.
“상선. 손님들께서 벌써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온객행과 흑룡이 성숙원의 외실로 들어가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상선을 뵙습니다.”
고상이 몸을 바로 하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현무. 오순왕.”
주요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상선께서 기룡께 부탁이 있으셔서….”
온객행이 흑룡과 서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기룡께 부탁이 있는데….”
주요가 온객행을 쏘아보았다. 고상이 그림 그리는 것을 망설이는 기룡 옆에 서서 말했다.
“태평호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아시오? 이맘때 백택 북쪽에 포도가 나는데 올해는 비가 많지 않아서 엄청 맛있을 겁니다.”
기룡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황산이 아니라 태평호를 그려보고 싶군.”
고상이 기룡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나랑 갑시다. 지금쯤 구기자가 다 익었을 거에요.”
주요가 고상을 말리고 말했다.
“기룡께서 태평호에 방문하고 싶다면 노유(猱狖)와 미원(獼猿)을 데려가세요.”
고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보살이랑 천교는 가도 되고 나는 왜 안돼?”
주요가 고상을 쏘아보고 말했다.
“상선께서는 하셔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며 끼어들려고 하자 주요가 온객행도 쏘아보고 말했다.
“현무 대리께서도 바쁘실 테니 기룡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기룡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자네가 현무 대리 수선이군. 문귀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온객행이 다시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하자 기룡이 웃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적송자께서는 안녕하신가?”
옆에 서 있던 서귀가 앞섶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우사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슬슬 돌아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만….”
그리고 주요를 힐끔 보았다. 주요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얼른 소매를 들고 서귀에게 말했다.
“서귀. 저희는 아직도 일손이 많이 부족합니다. 청룡께서 동해로 돌아가셔서 기룡께서도 돌아가 버리시면 저희는….”
고상이 눈치껏 소매를 들어 서귀에게 조아렸다. 온객행이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우사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수원대선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서귀가 몸을 바로 하고 온객행을 보았다. 백룡이 눈치껏 다가와 기룡에게 말했다.
“어르신. 서원에서 정무가 아직 남았습니다.”
기룡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룡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상선. 틈이 나는 대로 노유와 미원을 데리고 태평호에 다녀오겠습니다.”
고상이 기룡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요. 언제든지 태평호에 가는 일을 우선으로 하시게.”
주요가 얼른 와서 기룡에게 말했다.
“어르신. 농입니다. 정무에 힘써주십시오.”
고상이 입을 삐죽였다. 백룡이 기룡과 나가면서 서귀도 데리고 나갔다. 성숙원 외실에는 고상과 주요, 온객행과 흑룡만 남았다.

주요는 외실에 있는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장지문을 닫았다. 장지문을 닫자마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늘어져 앉았다. 흑룡이 말했다.
“정말 더러워서 못 해 먹겠소.”
주요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말 당장 때려 치고 싶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말했다.
“차라리 어디 봉인되는 편이 훨씬 낫소.”
고상이 서안에 고개를 괴고 말했다.
“난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주요와 흑룡,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눈치를 보다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뭐? 모르겠다니까?”
주요와 온객행은 고상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흑룡은 한참 고상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오광군(敖廣君)께서 용케 널 두고 동해로 가셨구나.”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청룡은 거의 포기 상태야.”
흑룡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미흡한데도 별말씀 안 하시더라구요.”
온객행이 물었다.
“청룡께서 북해궁에 갔었어?”
흑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가 다행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문귀도 그랬어. 검영이라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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