蛇苺 第36完

打草驚蛇 | 36. 풀을 때려 뱀을 놀라게 한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해서 주자서는 계낭과 함께 구기자를 따러 갔다. 길이 없어 험한 산길을 요리조리 잘도 타는 계낭의 꽁무니를 겨우 따라잡고 있었다. 함께 나온 입춘이 말했다.
“보살께서 오시면 술을 담그겠네요. 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올해는 일손이 많으니 일단 많이 따서 말려 둡시다. 구기자는 말려서도 먹는다고 하니.”
입춘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주인. 주인은 홍주를 좋아합니까?”
주자서는 아직 마셔보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가져온 망태기가 절반 정도 찼을 때 소설이 급하게 달려왔다.
“주인! 주인! 홍상… 홍상께서… 예부인께서 오셨어요.”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입춘이 주자서의 망태기를 받아 들고 말했다.
“주인 어서 백택으로 가보세요.”
주자서는 조금 허둥대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 그래. 부탁합니다.”
소설이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주자서의 손을 잡았다. 주자서는 소설의 등을 쓸어주고 말했다.
“어디로 오셨습니까?”
소설이 크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청익강… 쪽으로 오셨어요.”
주자서가 소설을 백택이 있는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혼자 오셨습니까?”
소설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니요. 손님이 엄청 많아요.”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입하는요? 입추는요?”
소설도 빠르게 백택으로 향하며 말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예부인은 지주대인께서 맞으셨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백택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입하가 불쑥 나타나 주자서를 멈췄다.
“주인. 그러고 가시게요?”
주자서가 입은 옷을 보았다. 평소에는 편한 호복을 입고 여기저기 쏘다녔기 때문에 얼룩과 흙먼지가 묻어 있어 손님을 맞기에는 부족했다. 입하가 주자서를 부유각으로 이끌며 말했다.
“일단 제일 좋은 옷으로 입으십시오. 머리는 제가 정리해 드릴 테니 어서 가서 갈아입고 오세요.”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하가 시키는 대로 했다. 주자서는 부유각 내부에 있는 함을 뒤져서 온객행이 입었던 푸른색 비단 장포를 꺼내서 입었다. 요대를 하고 온객행이 주었던 백동 요패를 매고 갑판으로 나오니 선창에 입하와 입추가 서 있었다.

주자서가 선창으로 나오자 입추가 주자서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말했다.
“손님들은 정전에 모셨는데 같이 온 하인들은 어떡할까요?”
입하는 근처에 있는 나무 밑동에 주자서를 앉히고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재실에 있는 객실은 치웠어?”
입추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직 자는 애들도 있어.”
입하가 ‘흠’하고 말했다.
“어제 번을 선 애들이지?”
입추가 고개를 끄덕이고 주자서의 소매를 폈다.
“백택은 큰 줄 알았는데 좀 좁은 것 같아.”
입하가 주자서의 머리를 요리조리 돌려보고 주자서를 일으키며 말했다.
“주인. 백택을 증축하는 것은 어떠세요?”
주자서는 입하와 입추의 손에 이끌려 백택으로 향하며 말했다.
“필요하면 합시다.”
입추가 주자서를 쏘아보고 말했다.
“주인! 뭐든 다 좋다고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필요한 일이잖아요.”
입하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손님이 올 줄은 몰랐어요.”
주자서와 입추도 동의하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주는 백로(白露)와 상강이 가져온 연잎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예부인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현리가 지주를 향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협각. 왜 모르는 척이야?”
지주가 현리를 보고 말했다.
“자예! 진짜 좀 잊어라. 그 이름은 어떻게 하며 잊히는 건데.”
현리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지주를 보고 물었다.
“대인께서 제 아들을 알고 계십니까?”
현리가 여인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주부인(周婦人). 저를 못 믿으세요? 자서는 여기 있으니 걱정 마세요.”
주부인이 현리를 보고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지주가 현리와 여인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남문이 소란스럽더니 입하와 입추가 들어와 문을 열고 주자서가 정전의 외실로 들어왔다. 차를 마시고 있던 주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자서에게 다가갔다. 주자서는 소매를 들어 인사를 하려다 누군가에게 안겼다.

“자서!”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주부인을 보았다.
“모친!”
주부인은 활짝 웃으며 주자서의 얼굴을 한참 쓸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지 않았구나. 살았구나.”
주자서가 주부인을 당겨 안고 말했다.
“모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세요.”
주부인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살았으니 됐다. 살아 있으니 됐어.”
주자서가 주부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모친. 녕이는요?”
주부인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북쪽 변방으로 징집을 당했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부인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너는 걱정 마라. 내가 가르쳤으니 꼭 살아 돌아올 거야.”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주부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주부인이 주자서의 어깨를 쓸며 말했다.
“너는 돌아올 수 없다. 군법이 지엄하여 돌아오면 나도 녕이도 위험하다.”
주자서가 주부인을 보고 말했다.
“모친. 여기서 같이 살아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주부인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럼 녕이가 돌아올 곳이 없잖니.”
주자서가 울상을 하여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을 하자 주부인이 주자서를 놓고 말했다.
“나는 내 아들을 울보로 키운 적 없다. 어찌 어미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데!”
주자서가 얼른 무릎을 꿇고 훌쩍이며 소매를 들어 주부인에게 인사했다.
“불효자 자서 모친께 인사드립니다.”
주부인은 주자서의 인사를 받고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주자서는 절을 하고 주부인이 앉은 옆자리로 가려다 입하와 입추에게 소매를 붙잡혀 상석에 앉혀졌다.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자서야. 너희 모친은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잘 모시도록 하마.”
주자서가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현리낭자께서 어찌….”
현리가 주부인과 어깨를 붙이고 말했다.
“주부인께서 금을 아주 잘 타는 것을 너도 알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리가 주부인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귀한 손이 여태 험한 일을 했다니, 정말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파.”
그리고 주부인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주부인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뺨을 붉히고 말했다.
“제가 가진 재주 중에 보잘 것 없는 것을 아껴 주시니 황송합니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부인이 앉은 의자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모친 무슨 말씀이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현리가 주자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주부인의 고금을 매일 들을 수 있다면 너를 양자로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현리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주부인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예부인의 양자가 되면 새로운 신분을 가질 수 있으니 그렇게 해라.”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주부인을 보았다.
“모친… 저는… 저는….”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유서. 주부인께서는 사람이시네.”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모친… 저는….”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일으키고 말했다.
“주부인. 자서가 아직 혼란스러운 것 같으니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지주가 눈치껏 일어나 말했다.
“주부인. 백택을 둘러보시겠습니까?”
지주가 주부인과 계낭을 데리고 외실을 나갔다.


현리가 주자서의 소매를 놓고 말했다.
“너 미쳤어?”
주자서가 현리에게 말했다.
“모친께 말씀드리지 않으셨습니까?”
현리가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구강에 요괴라고? 멀리하지 않으면 잡아먹을 거라고?”
주자서가 현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모친을 드시게요?”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면 안 돼? 아주 잘 익은 홍시 같잖아. 사랑스러워.”
주자서가 현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미쳤소! 모친은 사람이오!”
현리가 주자서의 손길을 뿌리치고 말했다.
“알아! 이번이 처음인 줄 알아?”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모친을… 모친을 어쩔 셈이오?”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껴주고 사랑할 거야. 우리의 추억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현리를 보자 현리가 주자서에게 가깝게 다가와 그의 턱을 잡고 말했다.
“너 따위가 뭘 알겠어. 고작 몇십년 산 미물 주제에.”
주자서가 현리를 밀어내고 말했다.
“모친께서는 발의 후손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생이 끝나면 천궁에 머무르실 수 있습니다.”
현리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네. 너희 모친도 발의 후손이지. 그것도 너처럼 반푼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주자서가 현리를 보고 말했다.
“모친께서 원하는 일이오?”
현리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거야 앞으로 그렇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나를 찾았으니 낙읍으로 돌아가실 거요.”
현리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 앉고 말했다.
“그럼 따라가면 되지. 오랜만에 땅을 밟겠군.”
주자서가 현리를 보고 말했다.
“모친에게 강요할 셈이오?”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왜? 너희 서방은 그랬나 보지?”
주자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무슨 뜻이오! 객행은 그런 적 없소!”
현리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강제하고 강요하는 건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지.”
주자서가 자리에 주저앉아 말했다.
“나는 말씀드려야 하겠소.”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왜? 어차피 죽어서 삼원에 가면 알게 될 텐데 왜?”

주자서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모친을 속일 수는 없소. 내 처지를 말씀드리고 모친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현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쓸데없긴.”
주자서가 현리를 보고 말했다.
“모친께서는 정직한 사람을 좋아해요. 저도 항상 정직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내가 말린다고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잖아.”
주자서가 현리에게 무릎 꿇고 소매를 들어 말했다.
“현리낭자. 그러니 양자로 들이겠다는 말은 거두어 주세요. 저는 이미 모친이 두 분이나 계십니다.”
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다른 모친은 황룡이 되었다지? 정말 너는 모친 복이 넘치는구나.”
주자서는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조아려 절했다.

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일으키고 말했다.
“자서. 자네 모친을 내게 주게.”
현리가 주자서의 양손을 붙잡고 말했다.
“삼원에 가는 날까지 행복하게 해주겠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것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제가 모친의 거취를 정한다는 말입니까?”
현리가 주자서의 손을 놓고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는 주건(周建)의 아들이니까.”
주자서가 놀라서 말했다.
“감히 모친의 이름을!”
현리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사이인 거야.”

주자서가 현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저는 태평호에서 모친과 함께 살고 싶어요.”
현리가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낙읍은 멀지만 구강은 가까워.”
주자서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하자 현리가 말했다.
“나는 주건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줄 거야. 편연주를 버려야 한데도 그렇게 하겠어.”
현리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어차피 너는 태평호를 떠날 수 없잖아. 너의 서방이 돌아올 때까지는.”
주자서가 말했다.
“모친께 말씀드렸습니까?”
현리가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사람의 세상에서는 사내끼리 혼인 못한다며.”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현리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더 충격일지 모르겠네. 요괴가 된 것일지 사내랑 혼인한 것일지.”


주자서는 정전의 내실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가 주부인이 들어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조금 휘청거렸다. 주부인이 다가와 주자서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자서야.”
주자서는 주부인을 상석에 모시고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손을 잡았다. 주부인이 웃으며 주자서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이곳에서 잘 지냈나 보구나. 도망한다고 고생할 줄 알았는데….”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친이 계시는데 양자로 가고 싶지 않아요.”
주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 계속 숨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주자서가 한참 망설이자 주부인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네가 싫으면 그렇게 해라. 내가 너를 보러 이곳에 오마.”
주자서는 한참 망설이다가 손을 놓고 머리에 한 은관에 손을 가져갔다.

주부인은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팔이며 어깨를 연신 쓸었다. 관을 고정한 비녀를 빼자 주자서의 머리가 흐트러져 내렸다. 주자서가 눈을 감고 말했다.
“모친. 저는 이제 사람의 세상에 갈 수 없어요.”
주부인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자서?”
주자서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뜨고 말했다.
“모친의 자서는 죽었어요.”
주부인은 새빨간 주자서의 눈을 보고 놀라서 말이 없었다.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주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모친. 저는 이제 사람이 아니에요.”
주자서의 차가운 체온에 놀란 주부인이 흠칫 몸을 떨자 주자서는 주부인의 손을 놓고 눈물을 흘렸다.
“모친….”
주부인은 한참 눈물을 흘리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조금은 서늘한 그의 손을 잡았다.
“자서?”
주자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날이 어두워져 주자서는 내실 안에 있는 등롱을 찾아 밝혔다. 평상에 앉아 있는 주부인 앞에 무릎 꿇고 앉자 주부인이 주자서를 일으켜 평상에 앉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주자서는 주부인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 기대오는 주부인의 체온을 느꼈다. 조금은 뜨거울 지도 모르겠다. 주부인은 발의 이야기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을 찾고 있던 후토에게 들켜 주자서의 부친은 참소를 당하여 죽었다. 후토가 그를 참소했다. 주부인도 아이를 낳고 많이 놀랐다고 했다. 주씨를 세습하는 그들은 항상 딸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들이었던 주자서를 주씨 종친들은 불길하게 생각했다. 주자서가 싫다던 종친들이 돕지 않았다면 그들은 기산에서 후토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부인이 주자서의 손등에 비늘을 쓸고 말했다.
“너를 낳은 날 진성(辰星)을 보았어.”
주부인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동생을 많이 낳아주려고 했는데….”
주자서가 벽옥을 꺼내 주부인에게 내밀고 말했다.
“모친의 소원이 제 소원이에요.”
주부인이 벽옥을 다시 주자서의 품에 넣고 말했다.
“너를 위해 써라. 나 역시 하늘의 죄에 동참했으니 받을 수 없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모친의 죄가 아니에요.”
주부인은 주자서에게 팔을 둘러 안았다.
“너는 내 아들이야. 그것이면 됐다.”


내실의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조금 흐트러진 차림의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여인과 부둥켜안고 있는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은 얼른 다가가 주자서를 여인에게서 떼어내고 말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주자서가 당황하며 온객행을 말리고 말했다.
“객행.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인도 온객행을 보고 놀랐는지 주자서의 소매를 당겨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무례를 범하는가?”
주자서가 여인을 감싸기 위해 다가가자 온객행이 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나의 부군에게 무례를 범하시오?”
여인이 온객행을 빤히 보고 말했다.
“부군?”

주자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허둥대고 말했다.
“객행. 그러지 마시오.”
여인이 주자서의 소매에 있는 온객행의 손을 치우고 주자서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는 내 아들을 혼인시킨 기억이 없소.”
온객행이 주자서와 여인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모친?”
온객행은 한참 두사람을 보고 있다가 한발짝 물러서 여인에게 무릎 꿇고 소매를 들어 절하며 말했다.
“존고(尊姑), 자부(子婦)가 인사드립니다.”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고 하자 주부인이 말했다.
“자서. 이게 무슨 소리냐?”
주자서는 온객행과 주부인을 번갈아 보다가 온객행 옆에 무릎 꿇고 소매를 들어 절하며 말했다.
“모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현리와 지주가 내실 안으로 들어왔다. 주부인은 놀라서 주자서를 감싸 안고 말했다.
“예부인.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현리는 온객행을 보고 조금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온객행?”
지주가 눈치껏 현리의 소매를 잡아 내실을 나가며 말했다.
“저녁을 외실에 준비해 두었으니 준비가 끝나면 나와서 드십시오.”
지주가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주부인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이 모습을 예부인께 보일 수는 없지 않느냐.”
주자서가 배시시 웃으며 주부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주부인은 혀를 차고 주자서를 안고 등을 쓸었다. 온객행이 주부인을 보고 말했다.
“존고. 은관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주부인이 온객행을 빤히 보았다.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서는 아직 영력을 잘 다루지 못해 은관을 해야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부인이 주자서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자서. 이게 무슨 소리냐.”
주자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부인이 주자서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아니! 왜 저 치가 나를 존고라 부르는 것이냐?”

주자서가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리자 온객행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촉룡께서 허락하셔서 혼인을 치렀습니다. 제가 일이 바빠 부군께 소홀하였으니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주부인이 놀라서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촉룡? 촉음(燭陰)께서?”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평호의 수선이세요. 저를 계속 돌봐주셨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숙이고 주부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제가 강요하여….”
주자서가 놀라서 온객행의 손을 잡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객행! 객행은 그런 적 없어요.”
주부인이 평상으로 가서 앉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주부인 앞에 무릎 꿇었다.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모친. 수선께 인륜으로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디 내치라는 말은 하지 마소서.”
주부인은 온객행을 보고 한숨만 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존고. 제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은혜는 제가 유서에게 입었어요. 존고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는….”
주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가 많지 않으니 네가 아이를 많이 낳았으면 했는데….”
온객행이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존고. 미자하의 샘물을 마시고 제가 낳겠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 드리겠습니다.”
주부인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주부인이 말했다.
“그래? 자손을 낳아 주겠다고?”
그러더니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부인에게 말했다.
“모친. 신선과 요괴의 자식은 삼청의 허락이 없으면 안 돼요.”
온객행이 주부인을 보고 말했다.
“제가 삼청께 아뢰겠습니다.”
주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주부인은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보았다. 은관으로 머리를 고정하자 주자서의 붉은 눈과 비늘이 다시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주부인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예부인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온객행이 주부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리라면 걱정 마십시오.”
주부인이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예부인을 아시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저의 누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부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말했다.
“모친. 그러니까… 예부인께서는….”
주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예부인께서도?”
온객행이 주부인 앞에 앉아 주부인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태평호에 사람은 모친뿐일 겁니다.”
주자서가 주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모친께 아무 일도 없게 할 겁니다.”
주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력을 더하면 나를 이길 성싶으냐?”
주자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는 요괴 먹잇감 정도라고 하십니다.”
주부인이 주자서의 얼굴을 쓰다듬고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 먹잇감이라니?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했느냐?”
주자서가 일어나 주부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지주대인께서 제 스승님입니다. 가서 인사드려요.”
주자서는 주부인의 손을 잡고 외실로 향했다. 그 뒤를 온객행이 따랐다.


외실에 가니 문귀가 언제 왔는지 자리에 앉아 현리가 내놓은 다과를 집어먹으며 푸념하고 있었다. 장지문이 열리고 주부인과 주자서가 들어왔다. 문귀는 고개를 들어 그 뒤에 있는 온객행을 보고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견연! 너 이 자식! 말도 없이 미쳤어?”
지주가 문귀에게 다가가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문귀 어르신. 어르신 참으세요. 유서의 모친께서 와 계십니다.”
문귀가 주부인을 발견하고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부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주극성의 상시(常侍) 문귀 인사드립니다.”
주부인도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공손히 인사했다.
“기산 주가 건이라 합니다.”
온객행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주부인의 소매에 매달려 말했다.
“모친. 제가 부군을 모실 수 없는 것도 다 문귀 때문이에요.”
문귀가 콧방귀 끼며 말했다.
“천존께서 사하신 일을 어찌 내 탓 하시오. 애초에 자네가….”
지주가 달려와 문귀의 입을 막고 말했다.
“주부인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식사하시지요.”
문귀가 지주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지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문귀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시군요. 제가 배웅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문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주부인이 지주에게 말했다.
“자서의 스승님인지 몰라뵈었습니다.”
지주가 문귀와 나가며 말했다.
“문귀를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탁상에 마련한 음식은 평소 주자서가 먹는 간소한 음식과는 조금 달랐다. 주자서가 찬을 보고 현리에게 말했다.
“현리 낭자께서 준비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현리가 주부인에게서 온객행을 떼어내고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그래. 너희 모친께서 꿩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현리가 준비한 음식은 편연주에서 먹었던 음식과는 달리 담백하고 달지도 않았다. 주부인과 주자서가 오손도손 식사하는 것을 턱을 괴고 보고 있던 현리가 말했다.
“양자로 들여도 괜찮을 지도. 주부인이 낳았다 하니 자서도 예뻐 보이는군.”
온객행이 앞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부인에게 권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유서는 벌써 모친이 두 분이나 계시네.”
주부인이 눈썹을 찌푸리자 온객행이 고상에 대해 말했다. 주부인이 주자서의 뺨을 쓸고 말했다.
“우리 자서를 구해 주셨으니 정말 은인이구나.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천선이 되셔서 만나 뵙기 힘들 겁니다.”
주자서가 맞장구 치며 말했다.
“발의 힘으로 황룡이 되셨어요.”
주부인은 주자서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가 외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수선, 자정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문귀가 삼청에 보고할 거라 하네. 임기를 늘리고 싶지 않으면 잘 생각하시게.”
온객행이 고개를 숙이고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우는소리를 했다. 현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왜 등선은 왜 해서는.”
현리가 주부인의 시선을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
“여기 수선은 오래전부터….”
주부인이 말했다.
“수선의 누이 이시니… 예부인께서도 신선이십니까?”
현리가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누이? 이거랑?”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 네가 말했어?”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현리를 보고 뚱한 표정을 짓자 현리가 말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보내준 화첩이 더 필요 없는 모양이지?”
온객행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머리와 손을 젓고 말했다.
“아니! 아니네. 그런 것이 아니네.”
주자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온객행을 보았다. 그것을 본 현리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뭐야? 아직도 안 했어?”
온객행이 현리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자예! 보통 그런 얘기는….”
주부인과 주자서는 그 둘이 실랑이하는 것을 보다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온객행은 부유각에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주극성으로 돌아갔다. 문귀는 지주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딱히 온객행을 나무라지 않았다. 단지 내자를 너무 구속하려고 하면 좋지 않다는 말만 했다. 현리와 주부인은 태평호에 보름 정도 머물다 다시 구강으로 돌아갔다. 주자서의 당질인 주울녕(周蔚寧)은 징집되긴 했지만 나라에 전쟁이 없어 1년 동안 부역(賦役)을 살다 다시 낙읍으로 돌아왔다. 낙읍에서 주부인과 함께 주울녕을 기다린 현리는 그 둘과 함께 홍호로 돌아갔다. 온객행은 주극성에서 현무 노릇을 했고, 주자서는 태평호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주자서를 태평공이라 불렀다.

蛇苺 第35

調虎離山 | 35. 호랑이를 산에서 나오게 한다.

지주는 백종절이 다가오자 천주서원에서 지내는 태일초례(太一醮禮)를 돕기 위해 태평호를 떠나야 했다. 지주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신월(申月; 음력 7월)은 지관(地官)이 오셔서 여귀(厲鬼)와 망혼(亡魂)을 구원하는 달이니 귀신이 많은 달이다. 되도록 태평호 밖을 벗어나지 말고 어디를 가더라도 꼭 입하와 입추를 데려가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곡식을 다 먹어 갑니다. 황산에 다녀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지주가 ‘흠’하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백종절이 끝나고 되도록 바로 올 테니 사나흘 후에는 돌아올 것이다. 내가 서원에서 얻어오마.”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했다. 지주는 제자로 받은 계낭 몇을 데리고 천주서원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백택에 들어가서 곳간을 살펴보았다. 백택에서 일하는 계낭은 절기의 이름을 모두 채울 만큼 늘어났다. 계낭은 딱히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자서는 자기가 먹을 때 그들도 챙겨서 먹였다. 그러니 전보다 곳간이 비는 속도가 빨라졌다. 주자서와 함께 식사를 시작한 계낭은 사람의 아이가 크는 것처럼 몸집도 영력도 쑥쑥 자랐다.

입춘(立春)이 다가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주인. 오늘은 연근을 따러 갈까요?”
주자서가 입춘을 보고 말했다.
“연근? 나는….”
입춘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부유각으로 이끌며 말했다.
“나어나 소어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주인께서 부유각에 계실 때 주인을 모시고 싶다고 한 나어가 있었어요.”
주자서는 장강에서 보았던 소어가 생각나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 나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옆에서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설(小雪)이 말했다.
“수선의 부인인데요?”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부인이 아니라니까.”
소설이 주자서의 반대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연근은 진흙 속에 있어서 산정인 저희는 못해요.”
입춘이 말했다.
“보살께서 연근을 좋아하세요.”
입하와 입추가 정전의 마당을 쓸고 나와 그들을 발견하고 주자서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주인.”
주자서가 얼른 다가가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것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한 식구니까.”
입추가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소설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끌며 말했다.
“어서 연근을 캐러 가요.”
입하가 주자서에게 말했다.
“연근을 캐시게요?”
입추가 하늘을 보고 말했다.
“또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물이 불어 위험할지도 모르니 날이 좋을 때 가시지요.”
입하가 입추를 거들며 말했다.
“올해는 늦장마인지 전달에 오지 않은 비가 오는 모양입니다. 벌써 신월인데 비가 많네요.”
제때 곡식을 심지 못했어도 비가 덜 왔으니 작년보다는 덜 굶겠구나 주자서는 생각했다. 소설이 입을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보살께서 연근을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입하가 소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신월은 근신하는 달이라 아마 유월(酉月; 음력 8월)이 돼야 오실 거예요.”
주자서가 입춘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날이 좋아지면 나어에게 부탁해서 연근을 캐러 가요.”
입춘이 주자서를 힐끔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유각 내실은 너무 더러워요. 주인님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주자서가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아…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입하와 입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말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너무 위험하니 정전에서 지내세요. 그동안 저희가 정리해 두겠습니다.”
주자서가 입하와 입춘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니오. 내가 하겠소. 내가 해야 하오.”
계낭은 모두 미덥지 않은 표정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하는 백택 근처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열매와 근채(根菜)를 정리해서 목간에 적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계낭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을 나는 동안 글을 가르치기로 했다. 입추는 주자서와 함께 재실에 앉아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했다. 입추가 말했다.
“저희는 산정이라 추위를 타지 않으니 이런 옷이나 신발은 주인님만 있으면 됩니다.”
주자서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정리된 목간을 실로 엮으며 말했다.
“주인. 주인께서는 주인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곡우(穀雨)도 제 앞가림은 주인보다 나아요.”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정말 모자란 사람이네요.”

입하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주인께서는 정말 이상해요. 본인 먼저 생각하세요. 저희는 여기 주인을 모시기 위해 있는 겁니다.”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내 하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식구잖아요.”
입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인. 그러니까 저희는 산정이라 산에 있기만 하면 먹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주자서가 입추를 보고 말했다.
“혼자 먹는 건 너무 쓸쓸하잖아요.”
입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지기께서도 항상 같이 드셨잖아.”
입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난 내가 뭘 잘못한 줄 알았어.”
입하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무지기께서는 우리가 불편할까 봐 자주 부르지는 않으셨지만 명절에는 같이 식사를 했어요.”
주자서가 곤란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불편하십니까?”
입추가 주자서에게 기대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안 불편해서 위화감이 있어요.”
입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추가 몸을 바로 하고 주자서에게 말했다.
“아직 어린 계낭의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지 마세요.”
입하가 거들었다.
“너무 아무나 다 받아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입추가 말했다.
“태평호 근처에 있는 계낭은 모두 백택에 삽니다. 아세요?”
주자서가 입추가 엮어 놓은 목간을 보고 말했다.
“아이들이 지낼 객실을 조금 더 정리할까요?”
입하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이들이 아니라니까요!”
주자서가 입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같이 먹으니 이렇게 많이 자랐잖아요.”
입하와 입추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여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입하와 입추는 다른 계낭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우사첩이 있을 때에도 백택의 잡일을 맡아 하느라 다른 계낭보다는 영력이 많이 쌓였었는데 이러다 정말 주인보다 먼저 등선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지주에게 들었다.

입하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비가 오는 동안은 정전에서 지내세요. 제가 태평호에 가서 나어와 소어에게 의사를 묻고 오겠습니다.”
입추가 말했다.
“사자형제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태평호에 온지 벌써 달포가 다 되어가니.”
입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사자형제께서는 포도를 좋아합니다. 작년에 담근 홍주가 남았으면 홍주와 함께 가져가면 좋아하실 겁니다.”
입추가 말했다.
“신월에는 어디 나가지 않으실 테니 비가 그치면 유사혈에 다녀오세요.”
입동(立冬)이 재실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올해는 여제(厲祭)를 안 지냅니까?”
입하가 답했다.
“지주대인께서 괜히 여귀(厲鬼)가 모이면 위험하니 수선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하셨네.”
입동이 주자서 곁에 다가가 앉고 말했다.
“주인 포도 좋아하십니까? 뒷산에 포도가 열렸어요.”
주자서가 입동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입동은 포도를 좋아합니까?”
입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입추가 입동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리광을 받아 주지 마세요!”
입동이 혀를 차며 말했다.
“부러우면 부럽다 하시오.”
입하가 입동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찌 주인께 인사도 안 하고!”
입동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매일 보는데 무슨 인사요! 쓸데없는 짓.”
주자서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 오시면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혼나요.”
입동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주인님께서 혼나면 안되죠. 주의하겠습니다.”
입하는 어쩌면 주자서가 부유각에서 지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저는 태평호에 다녀올 테니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빨랫감은 가져다 두셨습니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입하가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아니요. 제가 오는 길에 가져오겠습니다.”
주자서가 입을 달싹이다 말했다.
“날이 추워지면 옮길 테니 그전까지는 부유각에 있게 해주시오.”
입동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승선을 허락해 주시면 제가 겨울에도 지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안 돼요. 부유각은… 부유각에는….”
입추가 말했다.
“수선께 허락 없이 승선했다가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입동이 주자서의 소매를 흔들고 말했다.
“수선께서는 주인 말씀은 다 들어주시잖아요.”
주자서가 멋쩍게 웃고 말했다.
“그건 제가 싫어요.”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희미한 주자서가 강하게 싫다고 말한 것은 많지 않아 계낭은 할 말이 없었다.

백종절이 지나고 나서도 태평호에는 비가 많이 왔다. 태평호에 사는 나어 중에 천교와 보살과 친하게 지내던 나어 몇이 물고기며 연근 조개 등을 과일로 바꾸어 갔다. 물속에 사는 그들이 구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어들의 도움으로 유사혈을 찾아간 주자서를 보고 사자형제는 그를 아주 신기해했다.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요괴가 된 사람은 그들도 본 적이 없어서 사자형제는 주자서를 붙들고 사람들의 이야기와 요대, 주극성에서 있던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자서는 최대한 아는 대로 답했다. 사자형제는 주자서에게 요괴와 신선에 관련된 서책들을 건네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지주는 천주서원에서 구름 마차 한가득 곡식을 얻어 왔다. 포도를 따고 연실을 따고 수확 철이 다가오자 주자서는 수련할 사이도 없이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태평호 근처에서 수확한 과일과 근채를 씻고 말리고 하는 새에 신월이 모두 지났다. 주자서는 매일 무슨 일을 했는지 간단히 적은 목간과 그날 딴 것 중에 제일 크고 좋은 것을 나무함에 넣어 두었다. 온객행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칠석에 주자서를 만나고 돌아온 온객행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백종절에 천주서원의 제사를 돕기 위해 온 지주는 너무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다. 중원(中元)이 지나고 지관의 접대를 마친 주극성은 다시 하원(下元)을 준비해야 해서 바빴다. 중원은 사령과 오룡이 주최하는 제사이기 때문에 사방신은 그나마 일이 적었다. 하지만 하원에는 현무의 상관인 수관이 주극성으로 내려오시기 때문에 백종절보다 훨씬 준비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용슬은 부쩍 말수가 줄어든 온객행이 조금 걱정되었다. 가끔 소매에서 꺼내는 들꽃을 보고 한숨을 쉬거나 소매에 손을 넣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항상 요대에 매어 두었던 옻칠한 요패도 요즘엔 자주 꺼내지 않았다.

문귀가 천연당(天淵堂)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견연. 흑룡께서 하원의 일을 돕기 위해 보름 안에 주극성으로 오신다고 하는군. 북해에 부탁할 것이 없나?”
온객행이 읽고 있던 서안에서 눈을 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금을 부탁합니다.”
문귀가 서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소금은 내가 현무께 부탁해 두었네. 동해의 소금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
온객행이 작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시선을 서안으로 내리며 말했다.
“저는 북해의 소금이 좋아요.”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겠네. 소금을 부탁해두지.”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견연. 다른 것은 없나? 사형이 오신다는데 기쁘지 않아?”
온객행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뻐요.”
문귀가 고개를 돌려 용슬을 보았다. 용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일이 많아 통 쉬지 못하셨습니다.”

문귀가 다시 온객행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라각은 지낼 만 한가?”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문귀가 혀를 차고 말했다.
“정말 천변당으로 옮길 생각이 없는가?”
온객행은 고개를 젓고 답했다.
“안 갑니다.”
문귀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대체 버들개지가 뭐라고 한 거야?”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유서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문귀가 조금 날카로워진 온객행의 심기를 느끼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태평공(太平公)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문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십 갑자동안 일했던 천연당을 구경하며 말했다.
“견연. 기분 전환할 겸 소요지에 갈까?”
온객행이 읽던 죽간을 잘 말아 옆에 두고 다시 새로운 죽간을 펼치며 말했다.
“어차피 일할 텐데 천연당이면 어떻고, 소요정(逍遙亭)이면 어떻습니까?”
문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연실이 잘 익었는데 그대도 먹어 보겠나?”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온객행의 표정에 놀라서 말했다.
“견연! 제발! 참아주게.”

온객행은 코를 훌쩍이고 눈을 감더니 한참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괘념치 마소서.”
온객행은 내심 주자서가 자기에게 왜 그 말을 많이 했을까 고민했다. 정말 할 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불편해서 그랬던 것인지. 주자서는 다정하니 에둘러서 자기를 거절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객행은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객행이 얼굴을 양손에 묻고 훌쩍이기 시작하자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기룡께 태평호에 대해 말씀드렸네.”
온객행이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가 다시 자리에 앉아 온객행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고 말했다.
“기룡께서는 삼하궁에 머무시니 흑룡을 마중하러 삼하궁에 가는 날 만나 뵙고 오게.”
온객행이 소매로 눈물을 닦고 물었다.
“흑룡을 맞이하러 제가 갑니까?”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네. 용왕이니까.”
문귀는 품에서 영견을 꺼내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흑룡께서는 하원까지 머무실 거야. 그럼 너도 여유가 좀 생기겠지.”
온객행이 문귀의 영견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귀가 한참 온객행을 보다가 말했다.
“안아줄까?”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문귀가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용슬을 불렀다.
“용슬. 이리 와서 견연을 안아주게.”
용슬은 문간에 서 있다가 당황하여 문귀를 보고 다시 물었다.
“네?”
온객행이 입을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주극성에 있는 이들은 모두 너무 메말랐소. 차가워.”
문귀가 코웃음 치고 말했다.
“자네가 너무 격렬한 것은 아닌가?”
온객행이 문귀의 영견을 곱게 접어 서안 위에 올려 두고 말했다.
“제가 현무가 되면 교대할 때마다 서로 안아줘야 한다는 법을 만들겠어요.”
문귀가 표정을 구겼다. 서안으로 다가온 용슬이 멀뚱히 서 있자 문귀가 온객행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용슬. 어서 안아주게.”
온객행이 다가온 용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대신 차를 준비해주세요.”
용슬은 얼른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이 다시 서안을 보며 말했다.
“무극형. 권력 남용입니다.”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고 말했다.
“주극성은 정말 좀 삭막한지도 모르겠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고 물었다.
“가십니까? 오늘은 일 더 안 시키십니까?”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아!’ 하고는 소매에서 죽간을 꺼내 온객행의 서안 위에 올려 놓았다.
“서귀와 지백이 천주서원에서 올린 보고이네. 지백은 정말 대단해 간결한 것 보게. 겨우 한 책이야.”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금모원군께 부탁드려서 현무의 가신 삼으시오. 어차피 요대로 다시 돌아가 봐야 수구문 지키는 일이나 하게 될 테니.”
문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수구문을 지킨다고? 수구문을 왜?”
온객행은 말없이 죽간을 펼쳐서 읽었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나가며 말했다.
“우리도 수구문을 지켜야 하나?”


문귀는 삼하궁으로 향하는 온객행에게 연신 당부했다.
“자네는 수선이네. 수선다운 행동을 보여주게. 아! 맞아 자네는 현무네. 주극성의 얼굴이야. 주극성에 먹칠하는 일을 하면 정말 앞으로의 생을 고달프게 만들어주지.”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부탁이던 위협이던 하나만 하시오.”
문귀가 서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용궁형(茸弓兄) 이 모자란 놈을 부탁드립니다. 말 안 들으면 때리세요.”
서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문귀. 어찌 때린다는 말인가? 말로 잘 타일러야지.”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용궁형의 잔소리는 한두 시진으로 끝나지 않으니 각오하는 게 좋아. 차라리 맞는 게 나을 걸.”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반나절인데 무슨 걱정이시오.”
문귀도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황룡께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하셔서 일정을 넉넉하게 잡았으니 서두를 필요 없네. 안부도 전해드리고.”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구름을 만들어 탔다. 곧 현무의 가신들도 구름 마차를 타고 삼하궁으로 향했다.

삼하궁의 대문 앞에 백룡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조금 기다렸다가 현무의 가신들과 함께 삼하궁으로 들어갔다. 백룡이 인사했다.
“수선. 어서 오세요.”
온객행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오윤왕을 뵙습니다.”
백룡이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룡과 흑룡께서는 중앙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객행과 서귀는 백룡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다른 가신들은 주극성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들고 삼하궁의 하인들을 따라갔다. 커다란 호수 위로 높은 누각이 보였다. 정원이라기 보다는 호수 같은 곳에 흑룡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온객행이 흑룡을 불렀다.
“사형!”
흑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하여 인사했다.
“현무 대리. 잘 지냈는가?”
온객행이 웃으며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말했다.
“번듯한 흑룡이 되셨습니다. 스승님께 가보셨습니까?”
흑룡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서. 하원이 지나면 정월에 찾아뵈려고.”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럼 그때….”
흑룡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현무는 정월에 바쁘실 테니 나 대신 힘 써주시오.”
온객행 옆에 서 있던 서귀가 흑룡에게 인사했다. 흑룡은 서귀의 인사를 받고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참 차를 마시던 서귀가 흑룡에게 물었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흑룡이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동이 트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서귀가 하늘을 보고 다시 물었다.
“천선은 뵈셨습니까?”
흑룡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구경하며 말했다.
“연꽃 질 때가 다 되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한창입니다.”
흑룡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삼하궁의 연꽃은 사시(四時) 모두 제철이지요.”
온객행이 웃으며 연꽃을 보았다. 서귀는 흑룡과 차를 마시며 하원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객행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정원을 거닐며 연꽃을 구경했다. 넓은 잎사귀 끝이 축 처진 것을 보고 연잎을 따던 주자서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반 시진 정도 기다리자 백룡이 헐레벌떡 정원으로 들어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선께서 지금 성숙원(星宿苑)에 계십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흑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온객행을 불러 성숙원으로 향했다. 성숙원에는 고상과 주요 기룡이 서안에 앉아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고상이 기룡에게 말했다.
“왜요! 왜 안됩니까?”
주요가 옆에서 고상의 소매를 잡고 연신 기룡에게 사과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아직 상선께서 어려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기룡이 붓을 들고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
“나는 내가 가본 곳만 그릴 수 있다니까? 태평호에 가본 적이 없는데 어찌 그리라는 것이야?”
고상이 기룡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갑시다. 지금 갑시다.”
주요가 고상을 멈추고 말했다.
“어르신. 꼭 태평호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황산도 괜찮습니다.”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황산에서 태평호까지는 한 시진도 안 걸리니까.”
기룡이 다시 자리에 앉아 붓을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황산이라….”

백룡이 성숙원의 외실로 들어가 말했다.
“상선. 손님들께서 벌써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온객행과 흑룡이 성숙원의 외실로 들어가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상선을 뵙습니다.”
고상이 몸을 바로 하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현무. 오순왕.”
주요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상선께서 기룡께 부탁이 있으셔서….”
온객행이 흑룡과 서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기룡께 부탁이 있는데….”
주요가 온객행을 쏘아보았다. 고상이 그림 그리는 것을 망설이는 기룡 옆에 서서 말했다.
“태평호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아시오? 이맘때 백택 북쪽에 포도가 나는데 올해는 비가 많지 않아서 엄청 맛있을 겁니다.”
기룡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황산이 아니라 태평호를 그려보고 싶군.”
고상이 기룡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나랑 갑시다. 지금쯤 구기자가 다 익었을 거에요.”
주요가 고상을 말리고 말했다.
“기룡께서 태평호에 방문하고 싶다면 노유(猱狖)와 미원(獼猿)을 데려가세요.”
고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보살이랑 천교는 가도 되고 나는 왜 안돼?”
주요가 고상을 쏘아보고 말했다.
“상선께서는 하셔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온객행이 입을 달싹이며 끼어들려고 하자 주요가 온객행도 쏘아보고 말했다.
“현무 대리께서도 바쁘실 테니 기룡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기룡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자네가 현무 대리 수선이군. 문귀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온객행이 다시 소매를 들어 공손히 인사하자 기룡이 웃으며 말했다.
“예를 거두게. 적송자께서는 안녕하신가?”
옆에 서 있던 서귀가 앞섶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우사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슬슬 돌아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만….”
그리고 주요를 힐끔 보았다. 주요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얼른 소매를 들고 서귀에게 말했다.
“서귀. 저희는 아직도 일손이 많이 부족합니다. 청룡께서 동해로 돌아가셔서 기룡께서도 돌아가 버리시면 저희는….”
고상이 눈치껏 소매를 들어 서귀에게 조아렸다. 온객행이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우사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수원대선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서귀가 몸을 바로 하고 온객행을 보았다. 백룡이 눈치껏 다가와 기룡에게 말했다.
“어르신. 서원에서 정무가 아직 남았습니다.”
기룡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룡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상선. 틈이 나는 대로 노유와 미원을 데리고 태평호에 다녀오겠습니다.”
고상이 기룡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요. 언제든지 태평호에 가는 일을 우선으로 하시게.”
주요가 얼른 와서 기룡에게 말했다.
“어르신. 농입니다. 정무에 힘써주십시오.”
고상이 입을 삐죽였다. 백룡이 기룡과 나가면서 서귀도 데리고 나갔다. 성숙원 외실에는 고상과 주요, 온객행과 흑룡만 남았다.

주요는 외실에 있는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장지문을 닫았다. 장지문을 닫자마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늘어져 앉았다. 흑룡이 말했다.
“정말 더러워서 못 해 먹겠소.”
주요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말 당장 때려 치고 싶어.”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눈을 감고 말했다.
“차라리 어디 봉인되는 편이 훨씬 낫소.”
고상이 서안에 고개를 괴고 말했다.
“난 진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주요와 흑룡,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고상을 보았다. 고상은 눈치를 보다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뭐? 모르겠다니까?”
주요와 온객행은 고상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흑룡은 한참 고상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오광군(敖廣君)께서 용케 널 두고 동해로 가셨구나.”
주요가 웃으며 말했다.
“청룡은 거의 포기 상태야.”
흑룡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미흡한데도 별말씀 안 하시더라구요.”
온객행이 물었다.
“청룡께서 북해궁에 갔었어?”
흑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가 다행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문귀도 그랬어. 검영이라 다행이라고.”

蛇苺 第34

以逸待勞 | 34. 편안하게 지치기를 기다린다.

대서(大暑)가 지나고 얼마 있다가 천교와 보살이 태평호에 방문했다. 삭이 지나 달이 바뀌었다. 계낭은 우사첩보다는 한참 어리숙한 요괴였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조금 서툴렀다. 엉망이 된 부엌과 곳간을 보고 보살은 한참 계낭에게 잔소리를 했다.
“수확 철이 오기 전에 확인하러 왔더니 이게 무엇이야!”
계낭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울먹이며 보살의 잔소리를 들었다. 주자서는 보살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보살께서 이해하세요.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보살이 주자서의 손을 뿌리치고 주자서의 턱을 잡고 말했다.
“대체 이 꼴이 뭐야? 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보살이 잔소리하는 것을 재실 밖에서 보고 있던 천교가 지주에게 말했다.
“황룡께서 태평호를 그리워하셔서 잠시 들린 것인데….”

지주가 천교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 살던 우사첩이오?”
천교가 지주를 보고 눈을 굴리다 말했다.
“우사첩이었는데 이제는 잔나비입니다. 저희는 황룡 밑에서 영력을 수련하고 있어요.”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까닥 하더니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하늘의 이름은 없으십니까?”
천교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있습니다만… 천교라고 불러 주십시오.”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주라 합니다. 그대가 천교라면 저쪽은 보살이겠군요. 과연 들은 대로 미인이오.”
천교가 눈썹을 찌푸리고 지주를 보았다. 지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미인을 아주 좋아합니다.”
천교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교와 보살은 그나마 계낭 중에 제일 영력이 높은 입하와 입추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백택 안을 정리한 뒤에 날이 다 져서 삼하궁으로 향했다. 천교가 주자서의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말했다.
“유서. 사당 안에 있는 것은 이제 모두 너의 것이니 마음대로 써도 좋다. 날이 추워지면 거처는 정전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교가 하는 말에 다소곳이 대답했다. 보살이 옆에서 천교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어. 황룡께 부탁드려서 여기 와 있어야겠어.”
천교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수련해서 등선한다며.”
보살이 주자서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꼴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칠칠치 못해서. 이 놈 서방은 대체 뭘 하는 것인지.”

주자서가 얼굴을 붉히자 지주가 보살에게 말했다.
“현무 노릇 하느라 죽을 맛일 테니 용서하시오.”
보살은 삼하궁에서 고상이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온객행도 주극성에서 혼자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살이 한숨을 쉬자 천교가 보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한 갑자뿐이라니 정말 다행이지.”
보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천교가 보살의 뺨을 쓰다듬고 말했다.
“이렇게 정이 많아서 언제 등선하려고?”
보살이 천교의 손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나 혼자 보낼 거야?”
천교가 웃으며 말했다.
“혼자 가려구?”
보살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자서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보살이 주자서를 쏘아보며 말했다.
“시끄러워! 너는 입 닫고 있어.”

주자서가 입을 꾹 다물자 지주가 말했다.
“온공자는 그대들이 유서에게 이러는 것을 아는가?”
보살이 지주를 쏘아보며 말했다.
“알면 뭐요?”
지주가 멍하니 보살을 보고 말했다.
“성내는 모습도 정말 아름답소.”
천교가 보살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보보.”
보살이 천교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교교. 걱정 마. 거미 따위 밟아버리면 그만.”
지주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밟아주시오. 그대에게 밟힌다면 소원이 없겠소.”
보살이 표정을 구기고 천교의 허리를 안고 보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천교가 ‘아’ 하더니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넸다.
“유서. 홍상(洪商) 예부인을 아는가?”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주가 말했다.
“현리 말씀이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리낭자께서 촉룡께 갈 때 배를 태워 주셨습니다.”
주자서는 천교가 건넨 서신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천교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서신을 먼저 전해야 했는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
주자서가 종이봉투에 든 서신을 열어 읽어 보았다. 주자서의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하자 천교와 보살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모친… 모친께서….”
천교는 주자서가 들고 있는 서신을 읽어보았다. 보살은 주자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도 네 서방 닮아 울보가 되려나 보다.”
주자서가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말했다.
“저를 찾아 멀리 장강까지 오신 모양입니다. 현리낭자를 만나신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천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룡께 말씀드려서 다시 돌아올게. 유서. 혼자서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 너는 아직 영력이 한참 부족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보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예부인께서 같이 계시면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다. 괜히 움직여서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 섣불리 나서지 마라.”
주자서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하지만….”
지주가 주자서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지금 너는 요괴의 먹잇감 정도이니 시키는 대로 해라. 계낭도 마음먹으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교가 지주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저희가 다시 올 동안 유서를 부탁합니다.”
보살도 천교를 놓아주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지주와 주자서도 공수하여 인사했다.

보살과 천교가 가고 난 이후에 주자서는 한껏 풀이 죽어서 수련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지주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고 말했다.
“수련할 마음이 없으면 말게. 마음이 없는데 뭐가 되겠나?”
주자서가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말했다.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지주가 주자서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영력은 세월이 쌓아 주는 것이네. 갑자기 쌓고 싶으면 가서 사람을 먹고 미치는 방법 말고 없어.”
주자서가 얼굴을 구기고 지주를 보자 지주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혼을 먹으면 영력이 갑자기 높아지기는 하지. 하지만 영원히 삼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 그러다 미치지.”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자 지주가 말했다.
“사람의 육신을 먹는 것은 좀 그것보다는 덜한데 영 맛이 없어서 못 먹겠더라고.”
주자서가 지주를 보자 지주가 웃으며 말했다.
“천룡은 사람 먹는 것을 좋아했거든 근데 그는 좀 취향이 독특해서….”

지주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일은 낚시나 하러 가자.”
그리고 주자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영력을 쌓는 것은 낚시와도 같지.”
주자서는 지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재실로 향했다. 지주가 주자서를 따라가며 말했다.
“야!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그날은 계낭과 같이 산에서 길경(吉更; 도라지)을 캤다. 커다란 도라지를 캔 계낭에게 상으로 그럴듯한 옷을 주었다. 계낭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홑겹으로 된 옷을 입고 신발도 신지 않았는데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의복을 갖추는 것을 어색해했다. 우수(雨水)는 주자서가 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아이들이 입는 옷이라 알록달록하여 아주 귀여웠다. 우수가 웃으며 주자서에게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주인님. 이 옷은 주인님이랑 비슷합니다.”
주자서가 계낭의 앞섶을 쓸고 말했다.
“그래. 앞으로 일을 잘하는 아이에게는 옷과 신발을 선물로 주어야겠다.”
계낭은 고개를 조아려 주자서에게 인사하고 재실을 나가 다른 계낭에게 입은 옷을 자랑했다.

며칠이 지나자 백택에서 지내는 계낭 중 의복을 갖추지 않은 계낭은 몇 없었다. 주자서는 일부러 그 아이들을 불러 정전을 치우게 하고 상으로 옷과 신발을 주었다. 의복을 갖춘 계낭은 그 전보다 더 똑똑하고 일을 잘했다. 지주가 계낭에게 옷을 입혀주며 말했다.
“너희는 정말 좋은 주인을 뒀구나. 어쩌면 주인보다 먼저 등선할지도 모르겠어.”
상강(霜降)이 눈을 반짝이며 지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저희도 등선할 수 있습니까?”
지주가 상강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그럼! 내 제자 할 테냐?”
상강이 눈썹을 찌푸리고 한참 고민하더니 물었다.
“그럼 주인님은 누가 돌봅니까?”
지주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 주인 역시 나의 제자이니 너에게는 사형(師兄)이 되는 것이다.”
상강은 기쁘다는 듯이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사형?”
지주는 상강을 지긋이 보고 있다가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계낭은 정말 귀엽구나.”


주자서는 저녁 수련을 마치고 부유각으로 향했다. 태평호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 주자서는 부유각에서 잤다. 온객행이 지내던 때와는 다르게 조금 어질러지고 어수선한 것은 주자서가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정리했기 때문이다. 내실에 등롱을 밝히고 주자서는 휘장을 모두 내렸다. 태평호 물에 간단히 소세하고 몸을 닦았다. 대서가 지났지만 아직 더위가 꺾인 것은 아니라 낮에는 땀을 많이 흘렸다. 주자서는 등롱을 들고 누각 위로 올라가서 나무함을 보았다. 온객행이 다녀간 이후로 주자서는 목간에 오늘 한 일에 대해 적거나 산에서 찾은 꽃을 넣어 두었다. 주자서가 넣어 놓은 것들은 모두 금방 없어졌지만 온객행에게서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라지를 캐면서 딴 보라색 꽃을 한참 보던 주자서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바쁘겠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주자서는 등롱을 내려놓고 나무함을 열어보았다. 나무함 안에는 능각(菱殼; 마름열매)이 들어 있었다. 주자서는 편연주에서 현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칠석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능각을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네!’ 주자서는 벌써 칠석이 됐구나 싶어서 하늘을 보았다. ‘오늘 밤에 직녀가 견우를 만나겠구나.’ 주자서는 가지고 온 꽃에 입을 맞추고 나무함에 넣었다.

주자서는 능각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이제 막 능각 꽃이 피었을 텐데….’ 주자서는 온객행의 배려가 기꺼워 부스스 웃고 두손으로 능각을 부러뜨려 껍질을 벗기고 안에 들어 있는 과육을 먹었다. 쪄서 말려 둔 것인지 조금 달았다. 주자서는 능각을 몇 개 집어먹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의 은하수를 찾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할 것 같소.”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각이 들어있는 그릇을 들고 내실로 향했다. 보통 먹을 것을 얻으면 지주, 계낭과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주자서는 이 능각을 남들과 나누어 먹고 싶지 않았다. 침상 곁에 있는 협탁에 능각을 올려 놓고 장포를 벗었다. 슬슬 갈아입을 내의가 없어서 내일이나 모레에는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날이 더우니 옷을 벗고 잘까도 생각했지만 온객행의 침상 위에 옷을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조금 뒤척이다가 침상 뒤편에 있는 휘장을 걷었다. 내실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조금 축축해서 비가 올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에 조금 고분고분해졌다. 문귀는 변함없이 온객행의 일 처리에 대해 잔소리를 했지만 그 전처럼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은 찾아서 했다. 일을 곧잘 하게 되니 별로 할 말이 없어진 문귀는 온객행과 그 전보다는 조금 거리가 생겼다. 이제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잔소리하지 않아도 곧잘 했기 때문이다. 구국당(拘國堂)에 앉아 흑룡이 보낸 서신을 읽고 있던 온객행은 방 안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용슬(龍蝨)에게 물었다.
“마름 열매는 아직인가?”
용슬이 온객행에게 조아리며 말했다.
“능각은 아직 철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이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칠석 전까지 꼭 찾아 주시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니.”
용슬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주방에 전해 놓겠습니다.”
온객행은 소매에 손을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즉저가 소반에 서책을 쌓아 가지고 구국당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이 즉저가 가지고 온 서책을 보고 말했다.
“검영은 의외로 흑룡 자리가 어울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무께서 북해 일로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저가 서책을 온객행의 서안 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북해에서 보내온 제향품(祭享品) 목록입니다. 확인하시고 필요한 것이나 불필요한 것을 말씀해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보고 있던 서신을 잘 접어서 서신을 모아두는 함에 넣었다. 즉저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온객행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천룡. 혹시 마름 열매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아는가?”
즉저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힐끔 보고 다시 몸을 세우더니 말했다.
“능각을?”
온객행이 허둥대며 말했다.
“특별히 쓸데가 있어서 그러하네.”
즉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서호의 파사였으니 파촉(巴蜀)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을 따르겠군.”
온객행이 입술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즉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칠석에 능각을 같이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지?”
온객행이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래서 아는가 모르는가?”

즉저가 온객행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내가 석유황(石硫黃; 웅황)을 사람을 시켜 팔게 한 것은 뱀을 노린 것이 아니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즉저를 보았다.
“한석산(寒石散)을 유통하려고 석유황을 옮긴 것뿐이야.”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한석산?”
즉저가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한석산에 중독된 자들은 행산이라 하여 계속 걸어서 독기를 빼내야 하지. 약에 취한 이들이 산으로 들어오면 취하기 쉬우니까.”
온객행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는 등선할 마음이 없는가?”
즉저가 웃으며 말했다.
“지네가 감히 어찌 등선한다는 말인가? 나는 자네보다 몇십 갑자는 더 살았네. 내 처지를 봐.”
온객행이 즉저를 보고 물었다.
“자네 처지가 어때서? 신뢰받는 현무의 가신이 아닌가?”
즉저가 온객행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현무뿐이었네. 나의 능력을 봐준 건 현명대선뿐이었어!”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천룡. 이름이 아깝군.”
즉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당연히 자네는 모르겠지.”
온객행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네 사정에 관심 없네.”
즉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즉저가 몸을 돌려 장지문으로 향했다. 온객행이 즉저에게 말했다.
“그래서 마름 열매는?”
즉저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즉저가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 버들개지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온객행이 즉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와 나의 사이가 틀어진 것과 유서는 상관이 없으니 괜한 소리 말게.”
즉저는 이 상황이 허탈해져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삼하궁은 동정호와 가까우니 황룡께 부탁해보시오.”
즉저는 온객행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정전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흑룡과 문귀를 들들 볶아서 마름 열매 한 소쿠리를 얻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만나고 온 이후에 거처를 옮길 마음이 없어졌다. 주자서가 해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작 한 갑자 편하게 하자고 평생 주극성에 갇힐 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주자서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꼭 해야 할 말은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보낸 목간을 소매에서 꺼내 수십 번 읽었다. 주자서가 보낸 목간 중에 군자양양(君子陽陽)(7)이라고 쓰인 것은 예쁘게 다듬어 술을 달아 요대에 달았다. 주자서가 보고 싶을 때마다 만지고 쓸었더니 주자서가 쓴 글씨가 조금 벗겨졌다. 온객행은 무심결에 요패를 만지려고 하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지워지면 안되니 음각(陰刻)을 하고 옻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가 태평호로 떠난 이후로 문귀는 온객행이 꼭 쉬어야 할 때 말고는 계속해서 일을 시켰다. 온객행은 문귀에게 사정했다.
“문귀. 아무리 그래도 칠석날 일을 시키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오?”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직 칠석까지 며칠 남았는데…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이틀이오! 이틀밖에 안 남았소.”
문귀는 ‘그래서 뭐?’라는 표정으로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문귀의 소매에 매달려 말했다.
“유서를 잠깐이라도 만나고 오게 해주시오. 정말 잠깐이면 되오.”
문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헛소리! 네가 무슨 직녀야? 칠석날 만나서 뭐하게?”
온객행이 입을 꾹 다물자 문귀는 다시 백종절 일에 대해 말했다. 문귀는 그전보다 집무 시간이 늘어난 온객행을 갸륵히 여겨 말했다.
“견연.”
온객행이 서신을 보다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았다. 문귀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겠나?”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리고 문귀를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제발. 무궁형. 벌써 못 본 지 보름이 넘었소.”
문귀가 온객행을 뿌리치고 말했다.
“보름은 무슨 열흘 정도 지났구먼.”
온객행이 문귀에게 들러붙어 말했다.
“보름이 맞소. 15일.”
문귀가 혀를 차고 말했다.
“하루 종일은 안되네. 우리도 일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칠석날 술시부터 다음날 인시까지. 서둘러야 겨우 한 시진 볼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괜찮나?”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귀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궁형 진짜 고맙소. 내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리다.”
문귀가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어쩌면 대보름 때까지 못 만날 수도 있어.”
온객행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자 문귀가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은 자네 상공한테나 통하지. 나한테는 안 통해.”
온객행이 말했다.
“내가 쉬는 시간을 줄이겠소. 못해도 보름에 한번은 만나게 해주시오.”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백종절을 잘 마치면 내가 기룡께 말씀드려 보겠네.”

온객행이 다시 문귀를 안으려고 들자 문귀가 몸을 피하며 말했다.
“어허! 자네 원래 이렇게 끌어안는 것을 좋아했던가?”
온객행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주요랑 아상이 종종 안아줬거든요. 울지 말라고.”
문귀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운다고? 정말로?”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무극형 저는 울보예요. 유서를 만나지 못하면 매일 울지도 모르겠어요.”
문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을 하고 말했다.
“제발 그것은 참아주게. 사내가 울다니….”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슬퍼서 우는데 사내가 어디 있고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둘 다 똑같이 슬퍼서 우는 것인데….”
문귀가 기가 막혀서 말했다.
“자네 수원대선께서 하실 법한 말을 하는군.”
온객행이 문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이고 말했다.
“무극형도 슬프면 우시오. 내가 달래드리리다.”
문귀가 온객행을 빤히 보다가 그의 팔뚝을 때리며 말했다.
“우리에게 울 여유가 어디 있나!”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피해 다시 서안으로 가서 앉고 말했다.
“지금 합니다. 지금 해요.”

온객행은 삼하궁에서 얻은 마름 열매를 나무함에 넣어 놓았다. 아직 오늘 주자서가 넣어 놓은 것이 없어 나무함은 비어 있었다. 온객행도 목간에 천 자락에 종이에 그의 마음을 담아 보내고 싶었지만 쉴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옆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용슬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신을 쓸 수가 없었다. 주자서에게 보내는 서신을 주자서 말고 다른 이가 먼저 보는 것도 싫었고 작은 목간에 온객행의 마음을 모두 담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뭘 보내야 할지 항상 고민하다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주자서가 보낸 꽃은 온객행이 일하는 서안 위를 잠시 장식했다가 종이 서책 사이에 끼워 말렸다. 용슬이 사라각 내실로 들어와 말했다.
“수선. 홍호의 현리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슬이 들고 들어온 나무함을 보고 말했다.
“드디어!”
온객행은 나무함을 열어 현리가 보낸 서신을 읽어보았다. 종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종이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현리가 홍상의 일로 바빠서 서신을 받는 것이 늦어졌다는 말과 함께 마름 열매와 종이로 만든 화첩이 같이 왔다. 온객행은 아무 생각 없이 종이 화첩을 펼쳤다가 깜짝 놀라 화첩을 덮었다. 화첩 사이에 끼워진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용슬이 떨어진 종이를 주워 온객행에게 건넸다. ‘용양(龍陽)’ 온객행은 얼른 종이를 서신이 들은 봉투에 넣고 말했다.
“나… 나는 나가서 내일 돌아올 테니 용슬도 가서 쉬세요.”
용슬이 얼굴이 새빨개진 온객행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조아리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현리에게 받은 함을 들고 내실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침상의 베개 옆에 두고 북극문으로 향했다. 일단은 주자서를 만나는 것이 제일 시급했다. 보통 두세시진 걸릴 거리를 온객행은 한 시진 반 만에 날아서 태평호에 도착했다. 확실히 흑룡이 된 이후에 그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해시가 넘어 어둑한 태평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백택으로 향하려다 혹시 오늘 주자서가 또 뭔가를 넣어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유각으로 갔다.


휘장을 모두 내린 부유각의 누각 위에 나무함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온객행은 저렇게 두면 누각 탁자를 쓰는 것이 불편할 텐데 같은 생각을 하며 누각에 올라 상자를 열어 보았다. 보라색 도라지꽃이 두송이 들어있었다. 온객행은 꽃을 꺼내려 하다가 내일 주극성에서 꺼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누각에서 내려와 백택으로 향하는데 침상이 있는 쪽 휘장이 열려 있었다. 온객행은 내실 안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 부유각에 올라 내실로 들어갔다. 부유각 내부는 뭔가 조금 어수선하게 생활감이 있었다. 한쪽에 모아 놓은 빨랫감과 탁상 위에 늘어놓은 찻잔, 침상 앞에 놓인 병풍에는 장포가 뒤섞여 있었다. 온객행이 병풍을 넘어 침상으로 다가가자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마름 열매가 보였다. 침상에 휘장도 내리지 않고 주자서가 몸을 작게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은 잠든 주자서를 한참 보고 있다가 침상 뒤편의 휘장을 다시 내렸다. 온객행이 휘장을 내리는 기척에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자서는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누구냐?”
온객행이 침대로 다가가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침상으로 끌어당겨 눕히고 말했다.
“누구야?”
온객행은 놀라서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자서가 온객행의 목덜미에 겨눴던 현망검을 치우고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고 말했다.
“대체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침상으로 끌어 들인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객행.”
그리고 온객행을 끌어안았다. 한참 끌어안고 있던 주자서가 일어나 협탁 위에 올려 놓은 마름 열매를 까서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어서 드시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가 건넨 마름 열매를 먹었다.
“맛있어.”
주자서는 마름 열매를 몇 개 더 까서 온객행과 나누어 먹었다. 주자서가 침상에 앉아 있는 온객행을 빤히 보고 말했다.
“이건 내 꿈이니 아직 칠석이오. 우리는 칠석날에 같이 마름 열매를 먹었으니 우리 사랑은 꼭 이루어질 것이오.”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응. 자시가 되지 않았으니 아직 칠석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객행. 너무 보고 싶어.”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아주고 온객행의 얼굴을 잡고 한참 쳐다보고 말했다.
“꿈에서 말고 진짜 온객행이 보고 싶어.”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라면 날 보자마자 울었을 걸.”
온객행은 정말 눈물이 조금 나올 것 같아서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면서 말했다.
“이런 꿈이라면 매일 꾸고 싶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싫어. 꿈에서 말고 현실에서 매일 만나고 싶어.”
온객행의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에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까 정말 온객행같다.”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의 입을 맞추고 말했다.
“진짜 온객행이라니까.”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다 말했다.
“힘내. 잘하고 있어. 많이 좋아해.”


(7) 시경 국풍 왕풍 君子陽陽 임은 즐거워라!
君子陽陽, 左執簧, 右招我由房. 其樂只且.
임은 즐거워라, 왼손에 생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불러 방중 춤을 추시게 하신다 아, 즐거워라.
君子陶陶, 左執翿, 右招我由敖. 其樂只且.
임은 즐거워라, 왼손에 무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불러 오하 춤을 추시게 하신다 아, 즐거워라.

蛇苺 第33

假痴不癲 | 33. 어리석은 척하되 미치지 않는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내면서 지주에게 말했다.
“협각. 무슨 일이 생기면 죽여버릴 거야.”
지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온공자. 무섭게 왜 그러는가?”
주자서가 온객행의 옆에 가깝게 붙어 서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를 빤히 보고 말했다.
“협각이 유서에게 반하면 어쩌지?”
지주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고 말했다.
“나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네.”
온객행이 지주를 쏘아보며 말했다.
“유서는 이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지주가 온객행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내는 싫어!”
온객행이 지주를 빤히 보다가 다시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도 사내는 싫다고 했는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안 가면 안 돼? 유서가 없으면 나는 못 버틸 것 같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객행은 할 수 있어요. 제가 태평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뺨을 비비고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온객행이 소매에서 짧은 검을 꺼냈다.
“이건 스승님의 비늘로 만든 현망검(玄芒劍)인데 아주 예리하니 조심하시오.”
주자서가 검을 받아 검집에서 검을 뽑아 보았다. 예리하게 벼려진 짧은 검은 근접전에 용이하다.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촉룡의 가호가 있는 물건이니 이것에 무언가 베이면 내가 알 수 있소. 유서는 나의… 나의 반려(伴侶)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요대에 꽂았다.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겠습니다.”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응. 시간이 날 때마다 태평호로 갈게. 날아가면 두세시진 밖에 안 걸리니까.”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객행.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언제나 태평호에 있을 테니. 그대의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걱정이 기꺼워서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하며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문귀와 지주를 쏘아보았다.


문귀는 주자서를 태평호로 배웅하기 위해 구름 마차를 준비해 놓았다. 발의 능력이 사라지고 화사가 된 주자서는 이제 혼자서도 구름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온객행은 북극문까지 나와 주자서가 구름 마차로 태평호로 향하는 것을 한참 보았다. 너무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자서가 날아간 쪽을 보고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말했다.
“유서는 정말 좋은 사람이군. 자네도 좀 배우게.”
온객행이 고개를 휙 돌려 문귀를 보고 말했다.
“유서라고 부르지 마시오. 나의 상공이니 무극형도 상공이라 부르시오.”
문귀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상공? 어디의 상공인가?”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가 날아간 쪽을 보고 말했다.
“나의 상공이오. 견연의 상공.”
문귀는 질린 기색으로 헛기침하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제 사라각에 머무를 필요가 없으니 거처를 천변당으로 옮기는 것은 어떠한가? 정전과도 가깝고 사당과도 가까워서….”
온객행이 몸을 돌려 사라각으로 향하며 말했다.
“싫소. 유서가 머물던 곳에 머물겠소.”
문귀가 온객행을 따라가며 말했다.
“천변당으로 옮기면….”

온객행이 발걸음을 멈추고 문귀를 보았다.
“옮기면?”
문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적송자께서 천거하신 기룡(虁龍)께서 염화(染化)에 능한 것을 알고 있는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귀를 보았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극문과 천주서원을 잊는 사당의 그림은 기룡께서 그리셨네.”
온객행이 문귀의 어깨를 덥석 잡고 말했다.
“기룡께서는 어디 계시오?”
문귀가 어깨를 털어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기룡께서는 아주 바쁘시네. 그러니까 천변당으로 거처를 옮기면 내가 잘 말씀드려보겠네.”
온객행이 분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문귀를 노려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사라각으로 향했다. 문귀가 온객행과 발걸음을 맞추고 말했다.
“천주서원에서 바치는 공물과 제사에 대한 내용을 먼저 숙지해두는 것이 좋겠군.”
온객행은 문귀를 힐끔 보다가 말했다.
“생각해보겠소.”
문귀가 온객행을 타박하며 말했다.
“뭘 생각한다는 말인가?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네!”
온객행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일 말고 거처 옮기는 것 말이오.”
문귀는 그저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다시 요대를 방문하게 됐다. 이번에는 현무로 오는 것이라 흑망이었을 때 입었던 옷보다 더 시커멓고 은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장포를 입었다. 머리 장식을 바꾸겠다고 하기에 온객행은 억지를 부려서 주자서가 골라준 용머리를 조각한 비녀만 했다. 주자서가 태평호로 떠난 이후로 온객행은 천도연에 참석하기 위해 너무 바빠서 태평호에 갈 수 없었다. 온객행은 기분이 좋지 않아 모든 일에 심드렁했다. 현무의 가신을 이끌고 온객행이 옥산에 도착하자 요대로 향하는 구름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처에는 삼족오가 호위를 하고 있었고 요대로 향하는 길을 화사가 안내하고 있었다. 구름길 끝에서 요대로 들어오는 손님을 기린이 맞이하고 있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읍강과 희발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읍강이 말했다.
“견연. 환영하네.”
희발이 물었다.
“내자는 왜 데려오지 않았나?”
온객행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유서는 아직 등선하지 못해서….”
읍강이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 일을 당했는데 설마 원군께서 뭐라고 하시겠나?”
온객행이 몸을 돌려 다시 나가려고 하자 문귀가 온객행을 막으며 말했다.
“안돼. 요대에서 태평호까지 어느 세월에 다녀오겠다는 것인가?”
희발이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미리 전했어야 하는데… 미흡했네.”
문귀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치 않습니다.”
온객행도 깊게 한숨 쉬며 문귀의 장단을 맞추었다.

등선한 신선에게도 등급이 있어서 막 등선한 수선인 온객행은 원래대로라면 남궁의 연회장에 초대되는 것이 맞았으나 그는 현무 대리였기 때문에 중궁의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문귀는 중궁으로 향하는 회랑에서 온객행의 옷깃을 잡고 한 식경 정도 잔소리를 퍼붓고 온객행을 놓아주었다. 온객행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중궁으로 들어갔다. 적송자는 온객행보다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이미 중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풍백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초록색 옷을 입은 하인이 온객행에게 다가와 그의 자리를 안내했다. 금모원군에게서 멀지 않은 분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온객행은 어찌할 바를 몰라 조금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주요가 온객행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온공자.”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요를 보았다. 주홍빛의 장포를 둘러 입은 주요 옆에 금색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옷을 입은 고상이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온객행이 말했다.
“아상! 주요!”
주요가 웃으며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온객행도 소매를 들고 인사했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소?”
주요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대체 천존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아상을 황룡으로 봉하신 것인지 모르겠어.”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주요가 고생이 많겠네.”
고상이 주요의 눈치를 보다가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유서는 어디 있소?”
온객행이 고상의 손길을 뿌리치고 말했다.
“버리고 갔으면서 왜 찾는가?”
고상이 온객행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소리야! 우리 아이를 내가 왜 버려!”
고상의 큰 소리에 주변에 있던 다른 신선들이 그들을 보았다. 주요가 웃으며 온객행에게 조아리자 온객행도 눈치껏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주요는 한참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가 온객행에게 손을 펴서 중궁 남쪽에 있는 정원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자리를 옮길까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펼치고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선들의 눈총을 받으며 중궁을 나왔다.

고상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안 버렸어. 우리 유서는 내 아이란 말이야.”
주요가 고상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진정해. 약속을 어겼으니 삼하궁으로 돌아가면 서책을 베껴 쓰도록 해.”
고상이 눈썹을 늘어뜨려 울상을 하고 말했다.
“이거는!”
주요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큰 소리 내지 않기로 했잖아.”
고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았어.”
고상이 고개를 획 돌려 온객행을 보고 씩씩대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유서는 어디 있어?”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쭉 내밀고 말했다.
“태평호에….”
주요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혼자?”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고 답했다.
“아니. 지주랑.”
고상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망충! 그놈이랑?”
주요가 고상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상! 정말….”
고상이 주요의 눈치를 보며 온객행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왜? 왜 같이 안 있어? 설마 내쳤어? 온객행 이 나쁜놈.”
온객행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미쳤어? 유서를 왜 내쳐?”
주요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 진짜….”
주요는 온객행과 고상의 말을 멈추고 신선으로서의 몸가짐과 예절에 대해 한참 잔소리를 했다.


구름마차를 타고 태평호에 도착한 주자서는 일단 백택을 조금 정리했다. 천교와 보살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가 내부를 정리하는 것을 구경하던 지주가 물었다.
“그냥 주극성에 있지 굳이 왜 사서 고생인가?”
주자서가 어깨너머로 지주를 보고 말했다.
“답답해서….”
지주가 주자서가 정리해 놓은 탁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답답하면 뭐? 도망이라도 가려고 했나?”
주자서는 대답 없이 방을 치웠다. 지주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디 감히 화사가 주극성에서 도망친다는 말인가?”
주자서가 어깨너머로 지주를 보고 말했다.
“수선께 올려진 보고서에 주극성 축조(築造)와 배치(排置)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소. 동쪽의 북극문 말고도 주극성에서 무당산으로 통하는 길은 남문, 서문, 수구문을 제외하고도 서넛은 더 있었습니다.”
지주가 주자서를 빤히 보고 말했다.
“그… 그런가?”
지주는 주극성과 천주서원에서 몇 갑자동안 살았지만 북극문 이외에 주극성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글을 읽는 것과 같네.”
주자서가 몸을 돌려 지주를 보았다. 지주가 말을 이었다.
“글자만 안다고 뜻이 되는 것은 아니지. 같은 글자이지만 그 글자의 위치와 순서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처럼 영력도 같은 것이지만 위치나 순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어. 실체 하는 무엇인가 일 수도 아니면 그냥 허상일 수도 있지.”
주자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지주가 말했다.
“이것도 아닌가?”

주자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는 글 읽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풍류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주가 탁상에 팔을 괴고 말했다.
“근데 자네는 사람이었을 때 뭐 하는 사람이었나?”
주자서가 탁자로 가서 지주 앞에 앉으며 말했다.
“기병(騎兵)이었습니다.”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병사(兵士)였군.”
주자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기병인데 말을 잃은 지 오래되어 죽기 전에는 정예병이었습니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정예병이었다고?”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도망치는 것을 제일 잘합니다.”
지주가 몸을 바로 하고 말했다.
“그럼 활을 쓰는가? 검을 쓰는가?”
주자서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검을 씁니다.”
지주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나는 몸 쓰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나와보게.”
주자서가 실내를 보고 말했다.
“조금만 더 치우면 될 것 같은데 먼저 치워도 되겠습니까?”
지주가 눈을 굴리고 말했다.
“그래. 뭐 시간은 많으니까.”

지주는 재실 근처에 모아 놓은 불쏘시개 중에 길쭉하고 두꺼운 나뭇가지를 찾아 늘어놓았다. 측백나무 숲을 둘러보다 산의 정령인 계낭(溪囊) 몇이 재실 쪽을 보는 것을 발견했다. 지주가 다가가 말했다.
“너희는 왜 여기 있느냐?”
무리 중 가장 큰 아이가 나와 말했다.
“우리는 무지기를 모시는 계낭이오! 저 치는 주인께서 보살피던 아이인데….”
지주가 어깨너머로 재실을 정리하는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여기 살던 우사첩은 어디 갔소?”
계낭이 답했다.
“주인을 따라 삼하궁으로 가셨습니다. 화사의 아이가 돌아오면 잘 보살피라 하셨습니다.”
지주가 주자서 쪽으로 고갯짓하며 말했다.
“가서 보살피시오.”
계낭이 지주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망충께서는 왜 여기 계십니까?”
지주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지주대인이라 부르게. 내가 저 화사의 스승이니.”
계낭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재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주자서는 한참 만에 나와 지주에게 말했다.
“어찌 아이들에게 일을 시킨다는 말입니까?”
지주가 재실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밥을 준비하는 계낭을 보고 말했다.
“저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산정(山精)이니 너보다 몇 갑자는 더 살았을 것이다.”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지주가 주자서의 팔을 잡고 정원에 늘어놓은 나뭇가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골라봐. 나와 검술을 겨뤄서 이기면 네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마.”
주자서가 지주의 팔을 뿌리치고 나뭇가지를 고르며 말했다.
“지주대인께서는 주방일을 하실 줄 아십니까?”
지주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겠는가? 나는 생식을 선호하네.”
주자서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말했다.
“제가 이기면 지주께서 아이들을 좀 도와주십시오.”
지주가 ‘허’하고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 이기면 말이지.”
지주도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주자서와 마주 섰다.

주자서의 공격은 예리하고 삼엄했다. 지주가 뻗은 나뭇가지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와 빈틈을 공격했다. 주자서는 전장에서 오래 구른 티가 나는 공격을 했다. 지주가 주자서의 공격을 피하며 말했다.
“이게 검이었으면 너는 벌써 베였을 것이다.”
주자서가 지주의 빈틈을 공격하며 말했다.
“압니다.”
급작스럽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지주는 어쩔 수 없이 영력을 사용했다. 지주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말했다.
“너 꽤 하는구나?”
주자서가 지주의 거미줄이 붙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말했다.
“뭔가 그 전보다 감각이 더 민감해진 것 같습니다.”
지주가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시력이 나빠졌다고 했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가 주자서의 머리 위에 있는 관을 보고 피식 웃었다. 주자서가 지주의 가슴을 나무막대로 찌르며 말했다.
“제가 이긴 겁니까?”
지주가 눈을 굴리고 말했다.
“그렇다 치지 뭐. 계낭을 도와주라고?”
주자서는 지주가 늘어놓은 나뭇가지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잘 정리하고 지주의 소매를 잡고 주방으로 이끌었다.
“지주대인께서도 같이 드세요.”
지주는 주자서를 돌보는 계낭에게 입하(立夏), 입추(立秋)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에 백택 주변에 있던 계낭 몇이 더 백택 안으로 들어와 주자서를 모시는 것을 청했고 지주는 차례로 그들에게 절기(節氣)의 이름을 붙였다. 지주는 주자서의 무공 실력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영력을 모으는 방법을 무공에 빗대어 설명했다. 칼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주자서에게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몸에 영력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주는 주자서의 몸에 발의 영력 만큼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보통 영력을 쌓기 시작한 요괴와는 조금 시작점이 달랐고, 그릇이 크기 때문에 그 영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영력이 필요하기도 했다. 주자서는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영력을 쌓았다. 지주도 항상 자기보다 영력이 높고 신분이 높은 요괴와 신선들 사이에서 긴장하고 있다가 태평한 태평호에 오니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막 열흘 넘게 태평호에 있으면서 그들에게 위기란 주자서가 한 맛없는 밥 정도였다.


천도연이 지나고 사흘 뒤에 온객행이 찾아왔다. 구름 마차에 보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온객행은 부유각으로 갔다가 주자서가 부유각에 없는 것을 알고 조금 서운해하며 백택으로 들어왔다. 주자서는 재실 지붕 위에서 지붕을 수리하는 중이었다. 지주가 마당에 늘어져 있다가 온객행을 발견하고 말했다.
“현무 대리. 오랜만입니다.”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다 지붕 위에 있는 주자서를 발견하고 놀라며 말했다.
“유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온객행의 목소리를 들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객행!”
주자서는 들고 올라온 연장 도구를 정리하고 제계(梯階)를 밟고 내려왔다. 온객행이 안절부절못하며 팔을 뻗자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객행. 땀을 흘려서 더럽습니다.”
온객행이 거의 다 내려온 주자서의 허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대에게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자서가 웃으며 온객행을 마주 안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유서 너무 보고 싶었소.”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지주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어찌 오셨소? 백종절 준비로 바쁠 텐데?”
온객행은 지주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말했다.
“유서. 다시 주극성으로 가자.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
뒤따라 들어온 문귀가 온객행이 가져온 선물을 마당에 내려놓고 말했다.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군.”
지주가 문귀에게 다가가 도우며 말했다.
“문귀 어르신. 상전은 한 분만 모시는 게 좋습니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딴 게 상전이라니!”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얼른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문귀에게 인사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제발… 다시 현악으로 가자.”
문귀가 소매를 들어 주자서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동안 별고 없었는가? 영력이 늘었군?”
그리고 지주를 보았다. 지주는 인사도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얼른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제자가 훌륭하여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주자서가 놀라서 지주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아닙니다. 지주대인께서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문귀가 몸을 바로 세우고 말했다.
“백종절까지 따로 틈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왔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당의 외실로 가시겠습니까?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지주가 얼른 주방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차를 준비할 테니 어서 사당으로 모시게.”
주자서가 손님을 정전으로 안내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찰싹 붙어서 계속 우는소리를 했다. 주자서는 웃으면서 온객행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차를 마시던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가 수원대선께서 머무시던 사당이군. 지주 사당 구경 좀 시켜주게.”
지주가 계낭을 부르려다가 애절하게 주자서를 쳐다보고 있는 온객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곳은 측백나무가 많아 백택이라 부른다 합니다.”

문귀와 지주가 나가자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 옆으로 가서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제발 나랑 같이 있어.”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객행. 그럼 태평호를 버려 둘까요?”
온객행은 입을 달싹이기만 하고 답하지 못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를 상공으로 임명하셨잖아요. 태평호를 잘 돌보겠습니다.”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만들어 말했다.
“나를 돌봐주세요. 이제 태평호에게도 질투가 납니다.”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크게 웃는 것을 보고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그을린 얼굴과 밝은 표정이 주자서가 얼마나 태평호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온객행은 좋으면서도 싫었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객행. 부유각으로 갑시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를 따라 외실을 나갔다. 온객행이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매일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어깨를 붙이고 말했다.
“저도요.”
온객행은 전처럼 쉽게 다시 주극성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침울해진 온객행을 보고 있던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객행! 부유각은 객행의 소매 안에 있는 것이지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각에 도착한 주자서는 누각 위로 온객행을 잡아 끌며 말했다.
“그럼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온객행은 잘 정리된 누각 탁자 위에 나무함을 발견했다. 온객행이 다가가 나무함을 열자 안에는 목간(木簡)과 천 자락이 들어 있었다. 온객행이 집어 들어 읽으려고 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객행! 부끄러우니까 주극성에 돌아가면 읽어 보세요.”
볼을 빨갛게 물들인 주자서가 사랑스러워서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여 입술을 찾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몸을 돌려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만나면 해주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았는데….”
주자서가 말했다.
“서신을 주고받으면 더 보고 싶어질까요?”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자서가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한 갑자는 정말 짧을 것 같았는데….”
주자서가 온객행을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고 말했다.
“제가 길다고 했잖아요.”
온객행이 조금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응. 정말로.”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아주고 말했다.
“앞으로 보고 싶을 때마다 여기에 서신을 넣어 놓겠습니다. 객행도 전할 것이 있으면 이 나무함에 넣어주세요.”
온객행이 상자를 보고 말했다.
“너무 작아서 나는 못 들어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화사라면 들어갈지도.”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보고 싶으면 저도 보러 가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며 말했다.
“지금 나랑 가자.”
주자서가 한참 온객행을 안고 있다가 말했다.
“객행은 정말 현무가 되실 참입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도리질하며 말했다.
“절대 싫어. 온종일 일만 해. 유서가 없으니까 쉴 시간도 없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저는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맞아. 유서가 다 맞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쓸며 말했다.
“객행. 호랑이 굴로 스스로 들어가는 미친 돼지가 돼서는 안 됩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뭐? 유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의자에 앉히고 그의 양 뺨을 잡고 자기를 보게 한 뒤 말했다.
“현무가 되면 돌이킬 수 없어요. 어리석은 척하되 미쳐서는 안 됩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는 명성이나 권력 같은 것은 관심 없어요.”
주자서가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그런 말은 명성과 권력을 가진 뒤에 하는 겁니다. 촉룡처럼.”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객행. 제가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세요.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짐까지 될 수는 없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는 짐이 아니야.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는데….”
주자서가 팔을 둘러 온객행을 안고 말했다.
“저도 객행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객행이 겁이 나면 저에게 도망쳐 올 수 있도록.”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하자 주자서가 온객행의 입에 입술을 맞추고 말했다.
“조금 귀여울지도.”

蛇苺 第32

假途滅虢 | 32. 길을 빌려 괵(虢)을 멸하다.

온객행은 정전으로 향하는 길에 현무의 거처인 천계당(天雞堂) 옆에 있는 천변당(天弁堂)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주극성에 지내는 동안 절대로 사라각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당의 관료들과 인사했다. 천도연이 멀지 않아 요대에서 정식으로 현무와 현무의 가신을 초대하는 서신을 영귀께서 직접 들고 찾아왔다. 천도연은 등선한 신선들에게 금모원군께서 옥산의 천도를 베푸는 연회로 신선이 금모원군의 천도를 먹으면 영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참가하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문귀는 온객행 옆에 서서 두루마리에 쓰인 주극성의 신하들 중에 천도연에 참가할 수 있는 이들을 골라내는 중이었다. 영귀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할 만 한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영귀 어르신….”
영귀가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손을 들어 온객행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자네는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네. 삼하궁은 지금 아주 난리야.”
온객행은 고상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문귀가 두루마리를 온객행에게 내밀며 말했다.
“요대에서 초대한 신하의 숫자와 주극성에서 천도연에 참가할 수 있는 신하의 숫자를 잘 보고 누가 얼마나 많이 천도연에 참가했는지도 모두 기록해 놓았으니….”
온객행이 두루마리를 받지 않고 말했다.
“문귀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문귀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현무의 인장이 필요한 일이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계당에 가져다 놨으니 필요할 때 꺼내쓰시오.”
문귀가 온객행의 팔을 때리고 말했다.
“견연! 몸에 지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가?”
그러더니 영귀께 인사하고 서둘러 천계당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맞은 팔을 쓰다듬으며 입을 삐죽였다. 영귀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자네 내자는 요즘 괜찮은가?”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서는….”

적송자가 석척과 함께 정전의 외실로 들어왔다. 영귀와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송자에게 인사했다. 적송자가 팔을 내젓고 말했다.
“예를 거두게.”
석척이 얼른 적송자의 자리를 만들어 시중을 들었다. 적송자는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주극성 대부분의 일을 적송자가 처리하고 있었다. 온객행은 천주서원에 관련된 일과 현무의 날인이나 직인이 필요한 일들을 겨우 해내고 있을 뿐이다. 석척은 현무를 모시듯 살뜰히 적송자를 모셨다. 적송자는 과거 치우를 모실 때 함께했던 신하와 전우를 찾아 천거했다. 대부분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요괴들이었기 때문에 주극성은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영귀가 자리에 앉아 적송자에게 말했다.
“스승님께서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적송자가 ‘허허허’ 웃으며 석척이 내민 찻잔을 들고 말했다.
“현무를 가르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영귀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적송자가 차를 마시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나도 촉룡은 무섭네. 그 분은 정말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안돼.”
온객행도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저도 새로운 스승을 모실 마음은 없습니다.”
적송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이런 제자는 별로….”
영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명은 동해에서 산천대제를 모시고 있으니 아마 조금은 깨닫는 것이 있겠지요.”
적송자가 웃으며 말했다.
“현명은 일은 아주 잘했던 것 같네. 일손이 조금 부족한 정도였지.”
영귀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후토의 잔당은 어찌 처리했나?”
온객행이 차를 마시며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짓자 적송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서귀와 지백이 고생 중이네.”
적송자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
문귀가 외실로 헐레벌떡 들어오며 말했다.
“견연! 앞으로 인장은 내가 가지고 있겠네.”
문귀가 적송자를 발견하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적송자가 팔을 휘젓고 말했다.
“문귀 자네가 정말 고생이 많아.”

즉저가 소반에 죽간을 잔뜩 쌓아 외실로 들어왔다. 눈을 바친 즉저는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원래도 시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눈을 바치기 전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현무가 책임을 지고 동해로 쫓겨났기 때문에 즉저와 지주의 처벌이 크지 않을 수 있었다. 석척이 다가가 소반을 받자 즉저가 소매를 들고 인사하며 말했다.
“백종절 제례(祭禮) 때 삼원에 바칠 제악(祭樂)과 문무(文舞)를 정리했습니다.”
적송자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나는 풍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자네가 힘써주게.”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척이 들고 있는 소반 위의 죽간을 펼쳐보고 말했다.
“저도 잘 모르는데….”
문귀가 즉저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 말했다.
“그동안 천룡이 맡아 해왔으니 걱정하지 말게.”
온객행이 즉저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석척에게서 소반을 받아 서안에 옮겨 두었다. 영귀가 적송자에게 말했다.
“원군께서 우사 어르신을 특별히 초대하셨으니 꼭 천도연에 와주세요.”
적송자가 놀라며 말했다.
“내가?”
영귀가 웃으며 말했다.
“운사(雲師)께서도 오신다고 하셨으니 꼭 와주세요.”
적송자가 말했다.
“풍백(風伯)이? 그럼 가야지.”

영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뇌공께 가봐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적송자가 일어나 영귀를 배웅하며 말했다.
“뇌공은 힘들 거야. 도예를 두고 가려고 하지 않을 테니.”
영귀가 씁쓸하게 웃으며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외실을 나갔다. 적송자가 석척에게 물었다.
“천도연에 가려면 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는가?”
석척이 빠르게 적송자 곁에 가서 작은 목소리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문귀가 온객행의 팔을 잡아 서안 앞에 앉히고 말했다.
“너는 오늘 천도연에 갈 명부(名簿)를 만들기 전까지는 사라각 근처도 못 갈 줄 알게.”
적송자가 외실을 나가며 말했다.
“천도연에 가려면 좀 바빠지겠어. 나는 먼저 가보겠네.”
온객행과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즉저도 적송자를 향해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적송자가 나가자 외실의 분위기가 조금은 이상해서 문귀가 온객행과 즉저를 보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앞으로 계속 얼굴 봐야 하는데 괜히 불편할 필요 없지 않은가?”
온객행이 즉저를 힐끔 보고 작게 코웃음 쳤다. 문귀가 온객행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견연!”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이참! 무극형 원래 이렇게 폭력적이셨습니까? 세상 아정(雅正)하신 무극형은 어디 가셨소?”
문귀가 온객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천룡은 주극성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훌륭한 가신이네. 만약에 너희 둘이 싸우면 난 천룡의 편이니 그런 줄 알게.”
즉저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문귀를 힐끔 보았다. 문귀가 즉저를 서안 앞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천룡. 그대는 주극성의 신하들에 대해 잘 알 테니 이 모자란 놈을 좀 도와주시오.”
천룡이 고개를 들어 무귀를 보고 답했다.
“맡겨주십시오.”

온객행이 투덜거리며 서안 앞에 가서 앉고 말했다.
“그러니 모자란 놈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이오.”
문귀가 외실을 나가며 혀를 차고 말했다.
“오늘 사라각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게.”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문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며 말했다.
“그럼 천룡을 사라각으로 데려가던지. 명부는 오늘 안에 마무리하게.”
문귀가 나가자 온객행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즉저는 서안 위에 올려진 문귀가 정리한 신하들의 두루마리를 보았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일단 천도연에 한번도 참석한 적 없는 신하와 공을 세운 신하를 나눠서 생각해봅시다.”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최근에 주극성에서 등선한 신하는 많지 않으니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자 즉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주극성에서 그동안 포상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주자서는 내원에 앉아 지주가 낮잠 자는 것을 보았다. 이 치는 주자서가 영력을 쌓는 것에 대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는데 처음 만난 날부터 벌써 사흘 동안 지주는 먹고 자기만 했다. 외실 왼편에 있는 객실에 머무는 지주가 주자서에게 영력에 관련되어 해준 말은
“영력은 세월이 쌓아주는 것이네.”
정도이다. 아직도 멀리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았고 청각은 날카롭고 예민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이 서툰 주자서는 내원에 앉아서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여 거리를 가늠하는 것을 연습했다. 주자서는 내원과 외실에서 일하는 나흘마의 기운과 온객행, 지주의 기운이 다르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만큼 하인들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지주가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목이 마르군. 차를 준비해라.”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고 지주를 보았다. 지주가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차 마시자고.”
주자서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온 주자서를 보고 하인이 놀라며 말했다.
“마님!”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님?”
하인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조아리며 말했다.
“마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내원과 외실에 있는 하인에게 하명하시면 됩니다.”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저… 저는 마님이 아닌데….”
주자서가 먹고 마시는 것의 대부분은 온객행이 직접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대부분의 하인을 잘 알지 못했다. 온객행의 시중도 어색한 주자서는 하인들이 자신에게 조아릴 때마다 황황(遑遑)했다. 그들이 두꺼비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주자서는 그들이 귀엽고 가여워서 한번도 하인 부리듯 부려본 적이 없었다. 얼른 다가가 하인의 소매를 잡아 일으킨 주자서가 말했다.
“예를 거두세요. 저는 마님이 아닙니다.”
하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자서를 보자 주자서가 ‘큼’ 하고 헛기침하고 말했다.
“지주대인께서 차를 찾으셔서 왔습니다.”
하인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외실에 차를 준비할까요?”
주자서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요. 어떻게… 제가….”
하인이 얼른 일어나 소반에 다구를 준비했다. 주자서는 곁에 서서 하인이 하는 것을 허둥대며 보고 있다가 하인과 함께 내원으로 나왔다.

하인이 내원에 내놓은 탁상 위에 소반을 올려놓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끓인 물을 가져올까요? 화로를 가져올까요?”
주자서는 하인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아…”
지주는 내원 돌난간에 벌렁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주자서가 쩔쩔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차 한번 얻어 마시기 힘들군.”
하인은 허둥대는 주자서를 의자에 앉히고 다시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여러 곡절 끝에 주자서가 내린 차를 마신 지주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정말 더럽게 맛없군. 자네는 다예(茶藝)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는가?”
주자서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지주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차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것이 아니네. 특징, 색, 맛, 향,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지주가 주자서가 찻주전자에 넣은 찻잎을 보고 말했다.
“벽봉(碧峰)이군. 먼저 모양을 보고, 색을 본 다음에 우린 차의 색을 보고 맛을 보고 향을 느끼는 거지.”
그러더니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영력을 쌓는 것도 이것과 같아. 영력의 존재를 알고 크기를 가늠하고 흐름을 느낀 다음에….”
지주가 도자기 찻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찻잔에 담는 것처럼 담는 거야.”

주자서가 표정을 구기며 지주를 보자 지주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가 내린 차를 한잔 따라 주자서에게 권하며 말했다.
“자 마셔봐.”
주자서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지주는 주자서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주자서가 우린 차를 모두 내원에 버리고 다시 차를 내렸다. 지주는 주자서의 찻잔을 빼앗아 안에 든 차를 버리고 자기가 내린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자 마셔봐. 내가 내린 건 더 맛있을 거야.”
주자서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주자서가 내린 차보다 조금 더 향기로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덤덤한 주자서의 반응에 지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방법은 아닌 것 같군.”
주자서가 찻잔을 내려놓고 지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주대인.”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래 치며 말했다.
“미안해 말게. 덕분에 내가 이렇게 편히 지내지 않는가? 되도록 오래 내 제자가 되어주게.”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지주를 보자 지주가 말했다.
“이게 얼마 만에 쉬는 것인 줄 아는가? 자네는 꼭 상전은 한 분만 두게.”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말했다.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네는 그릇이 커서 영력이 모일 거야.”
주자서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주가 주자서 곁에 가깝게 붙어 앉으며 말했다.
“자네는 너무 말이 없어. 그건 좋지 않아. 궁금하면 물어보게.”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지주를 보고 입을 달싹였다. 지주가 답답하다는 듯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말하라니까! 괜찮아.”
주자서가 한참 망설이다 물었다.
“눈을 바치셨다 들었는데….”
지주가 눈을 깜빡이며 주자서를 보다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지 천존께 눈을 바쳤지 하지만 나는 거미라 홑눈이랑 겹눈이 있거든 홑눈을 바쳐서 겹눈이 남았지. 천룡은 겹눈밖에 없어서 눈을 바치기는 했지만 뭐 있으나 없으나 별반 다르지 않는 눈이었으니 상관없지. 벌이라고 하지만 그냥 명분이야. 천존께서 무슨 생각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자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눈이 없는데 어찌 보입니까?”
지주가 주자서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탁상에 고개를 괴고 말했다.
“아… 거기서부터? 흠…”
주자서가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자 지주가 자세를 바로 하며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괜찮아! 모르면 배우면 되지. 너는 사람이었으니까 배움이 빠를 거야.”


온객행은 해가 질 무렵에 즉저에게 사정하여 잠깐 사라각에 들렸다. 명부만 내놓으면 된다고 했던 문귀는 또 어디서 일을 잔뜩 만들어서 온객행의 서안 위에 올려 놓았다. 일 처리를 위해 참고해야 하는 것들은 모두 의풍전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 봐야 했다. 온객행은 입을 잔뜩 내밀고 서둘러 사라각으로 왔다. 지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자서만 내원에 앉아 온객행의 죽간을 읽고 있었다. 온객행이 얼른 주자서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끌어안고 말했다.
“유서. 보고 싶었어.”
주자서는 깜짝 놀라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 옆에 앉아 주자서가 보고 있던 서간을 보고 물었다.
“뭘 보고 있었는데 내가 온 줄도 몰랐어?”
주자서가 얼른 서간을 치우고 말했다.
“서안에 있던 서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고 말했다.
“전부 재미없는 내용이지? 밥은 먹었어?”
주자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지주는?”
주자서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찾아볼 것이 있으시다고 장서각에 가셨습니다.”
풀이 죽은 주자서의 얼굴을 잡고 온객행이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주자서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온객행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하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제가 잘 몰라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유서는 몰라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주자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탁상 위에 올려놓은 죽간을 잘 말아 들고 일어나 온객행을 내실로 이끌며 말했다.
“오늘도 서간을 읽으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아니. 오늘은 의풍전에 다시 가야 해. 유서도 같이 갈래?”
주자서가 고심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즉저가 생각난 온객행이 말했다.
“아니야. 일하러 가는 건데 유서가 있으면 일 못해.”
주자서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자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는 쉬고 있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도… 저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유서는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아주 큰 도움이야. 유서가 주극성에서 제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유서가 아니었으면 나는 도망가버렸을 거야. 차라리 봉인되는 것이 낫지.”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평호에는 언제 갑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태평호에 가고 싶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주인이랑 아상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주자서를 침상 쪽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너를 버리고 간 주요랑 아상은 왜 찾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온객행의 양손을 잡고 말했다.
“객행. 말씀드렸잖아요. 저를 버리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버리고 간 거야. 다음에 만나면 잔소리를 퍼부어야지.”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흔들며 그를 불렀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도 태평호로 돌아가고 싶어. 여긴 너무 답답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흘 후면 천도연인데 유서도 같이 가자. 주요랑 아상도 올 거야.”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지주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등선한 신선만 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온객행이 입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유서가 안 가면 나도 가고 싶지 않아.”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를 안고 말했다.
“고작 하루 아닙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나는 한순간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주자서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의풍전에 갈까요?”
온객행이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
“의풍전에 즉저가 있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뺨을 비비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 사람이 아니잖아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를 잡아 떼어놓고 말했다.
“유서! 즉저는 요괴도 먹는다구. 특히 유서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화사라면 즉저에게 한 입감도 안되니까 조심해야 해.”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한 입감….”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나도 유서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하는 일은 많이 알면 알수록 주극성에서 떠나기 힘들어서 그래.”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그럼 객행은 어떡합니까?”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야 사고를 쳐서 벌을 받고 쫓겨나면 되지.”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객행! 나도 그대가 다치고 아픈 것은 싫습니다.”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헤벌쭉거리며 웃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객행이 있는 곳에 있으면 어디든지 상관없어요.”
온객행이 놀란 얼굴로 주자서를 보다가 얼굴을 붙여오자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객행. 부탁이 있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입 맞춰 주면 뭐든 들어드리리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마주 보고 있다가 눈을 감고 온객행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주자서가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춘 것은 처음이라 온객행은 낮게 웃으며 주자서의 얼굴을 잡았다. 주자서는 온객행과의 입맞춤이 점점 익숙해지는지 가끔 온객행의 입술을 핥거나 입안에서 그의 혀를 밀어내기도 했다. 그러면 온객행은 그 작은 변화에 흥분해서 주자서를 한참 괴롭혔다. 이마를 맞붙이고 온객행이 말했다.
“하아. 현리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소식이 없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서신을 보내셨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그럼. 내가 보낸다고 했잖소.”
주자서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에 묻고 말했다.
“객행. 정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주극성에 그대가 나의 반려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왜 부끄러워 하시오? 혹시 내가 부끄럽습니까?”
주자서가 대답 없이 깊게 한숨을 쉬자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말했다.
“하인들이 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하고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나흘마가?”
주자서는 허리를 감싼 온객행의 팔을 떼어내고 온객행을 탁상에 앉히며 말했다.
“마님이래요.”

온객행이 웃음을 참으며 주자서의 눈치를 보자 주자서가 온객행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를 부인이나 내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두시라 말씀드렸는데….”
온객행이 얼굴에 웃음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며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아이참! 내가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오. 남들이 유서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둘 수는 없지 않소?”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왜 안됩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유서는 외갓집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부인이라 부르지 마시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알겠소. 알겠소. 내가 부인하리다. 부군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부군?”
주자서가 온객행의 부름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차라리 부하로 삼으시오. 서리(胥吏)나 아전(衙前)같이 낮은 직책도 상관없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찌 그런 미천한 일을 시키라는 말이오? 상공(相公)하시오. 상공.”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에 코웃음 치고 말했다.
“어디의 상공이요 대체?”
온객행이 주자서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의 상공이지요.”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가만히 안겨 있다가 말했다.
“저는 태평호로 가면 안됩니까?”
온객행이 한참 생각하고 말했다.
“혼자서?”
주자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더 꼭 끌어안고 말했다.
“싫어. 내 옆에 있어.”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객행. 나는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요. 태평호로 가도 쓸모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여기 있으면 너무 많은 분들께 누(累)가 됩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말했다.
“싫어….”
온객행이 물었다.
“누구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객행….”
온객행이 주자서의 양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누구야? 대체 누가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한 거야? 유서가 얼마나 중요한데. 정말이야. 나에게 유서가 제일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잡고 말했다.
“주극성에서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은 저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계속 누를 끼칠 수는 없어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누가 아니야. 나는 유서가 더 기대줬으면 좋겠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우리 둘….”
주자서가 온객행의 뺨을 쓸고 말했다.
“꼭 주극성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 하셨습니다. 저를 보러 태평호로 오세요.”
온객행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싫어… 가지 마. 천도연이 끝나면 가… 아니 중원(中元)이 끝나면 가.”
주자서가 웃으며 온객행의 눈가를 쓸고 말했다.
“객행께서는 태평호의 수선이시니 제가 객행을 대신해서 태평호를 지키고 있으면 안됩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나의 상공이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온객행의 뺨을 쓰다듬었다.

蛇苺 第31

遠交近攻 | 31. 멀리 사귀고 가깝게 공격한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운신할 수 있게 되자 온객행은 주자서를 지백에게 부탁하고 주극성 여기저기를 다니며 현무의 가신들에게 인사를 다녀야 했다. 임시직이라고 해도 지내는 동안 괜히 척을 질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온객행도 문귀가 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초조하게 구는 온객행을 보고 문귀가 타박했다.
“지금 주극성을 얕보는 건가?”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문귀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아 정전 뒤쪽에 있는 의풍전(懿風殿)으로 향하며 말했다.
“감히 누가 주극성에 들어와 그대의 내자를 괴롭히겠는가? 걱정 마.”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니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지 그런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귀가 온객행을 흘려보더니 ‘흥’하고 코웃음 쳤다.

처음에는 시력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은 그 전보다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으나 멀리 있는 것은 뿌옇게 보였다. 주자서는 여러 번 눈을 비볐다. 주자서가 눈을 불편해하는 것을 처음 눈치챈 것은 지백이었다. 붉게 변한 눈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백은 주자서가 뭘 보고 있는 것인지 몰랐으나 자리에 앉아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네다섯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 사물이나 사람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잘 보이지 않으니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지고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하다 보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백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서? 괜찮은가?”
주자서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백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죄인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네. 내가 수선께 부탁드려서….”
주자서가 고개를 들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다음은 청각이었다. 날카로워진 청각은 주자서를 더 예민하게 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감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서투른 주자서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놀라는 일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주자서는 온객행이 돌아오면 그런 내색을 아주 잘 감추었다. 지백은 몇 번이나 주자서에게 신열에 대해 말해주려고 하다가 온객행의 눈치가 보여 그만두었다.

주자서는 열병에 걸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병을 앓고 난 사람이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가까이에 있는 것은 보이니 문제가 없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주자서에게 너무 답답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라 주자서는 한숨만 늘어갔다. 눈이 잘 안 보여서 청각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볼 때마다 입을 달싹이며 태평호로 언제 돌아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하인들이 들어와 온객행에게 서간과 서책을 나르면 온객행은 주자서의 시중을 들다가 밤새 서안에 앉아 죽간을 읽었다. 저를 위해 불도 켜지 않고 서안에 앉아 죽간을 읽고 있는 온객행을 보고 있으면 주자서는 죄스러워졌다. 주자서의 몸이 점점 나아지니 지백도 곧 서귀를 따라 천주서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지백은 원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익숙하여 그렇게 됐다. 지백이 온객행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사라각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숫자가 줄었다. 주자서는 내실이나 내원에 앉아 온객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날 아침도 온객행은 주자서를 한참 안고 있다가 말했다.
“유서. 정말 가기 싫어. 근데 아직도 인사해야 할 가신들이 너무 많아. 내 가신들도 아닌데 내가 왜 만나야 하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한참 주자서에게 투정을 하고 문귀가 내원 안까지 들어와서 온객행을 찾아야 온객행은 주자서를 놓아주었다. 문에서 멀어지는 온객행의 모습이 희미해서 주자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주자서가 갈 수 있는 범위는 사라각 내부가 전부였고 그 조차도 외실과 내실을 제외하면 익숙하지 않아 부딪히기 일쑤였다. 주자서는 내실로 돌아와 탁상에 앉아 또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의 기척을 읽은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기척이 사라져 서야 주자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객행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떻게 그 말을 전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니 답답한 것이다. 짐이 될 것 같으니 떠나겠다고 그동안 감사했으니 이 벽옥(璧玉)을 받아 주시라고. 주자서는 품속에서 벽옥을 꺼내 보았다. 벽옥을 다시 품속에 넣다가 본 주자서의 팔은 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주자서는 눈을 비비고 다시 팔을 보았다. 손을 들어 만져보니 비늘의 촉감이다. 비늘을 만지는 손등에도 비늘이 보였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면경을 찾았다. 내실에는 어디에도 면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자서는 등잔을 켜서 물을 담아 놓는 항아리를 보았다. 물 항아리에 비치는 등잔을 들고 서 있는 남자의 눈은 눈동자 없이 붉다.


온객행은 문귀에게 사정사정해서 주자서와 점심을 먹으려고 잠깐 사라각에 들렀다. 지백의 말로는 주자서가 하인들을 불편해하니 하인을 많이 두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온객행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주자서의 시중을 드는 것이 싫었다. 외실에 있는 하인이 온객행을 보고 인사하며 물었다.
“수선. 점심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내실로 향하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내원에서 먹겠습니다.”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내실의 장지문을 열고 온객행이 주자서를 불렀다.
“유서! 같이 점심 먹으려고….”
실내는 평소와 달리 조금 부산스러웠는데 주자서가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보통 내원에 앉아 있거나 내실에 앉아서 온객행이 읽던 죽간을 보았다.
“유서?”
온객행은 물동이 옆에 깨진 등잔을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객행은 내실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당황하며 밖으로 나갔다. 사라각 문을 지키는 별주부에게 온객행이 물었다.
“유서가 어디 나갔는가?”
별주부는 온객행을 보고 포권하며 고개를 흔들고 대답했다.
“하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온객행은 사라각에 있는 후문에 호위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지만 같은 대답을 들었다. 온객행은 다시 내원으로 돌아와 서실과 별실, 주방까지 모두 뒤졌지만 주자서가 보이지 않았다.

온객행은 한참 사라각을 찾다가 주자서가 현녀께 받은 벽옥이 생각났다. 주자서가 아니라 벽옥의 기운을 찾으니 벽옥은 내실에 있었다. 침대 옆에 침구를 보관하는 함 옆에 무릎을 안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주자서는 정말이지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가여워서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서… 왜 여기 있어?”
주자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마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자서 옆에 앉았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유서, 왜 여기 있어?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곳에.”
주자서가 소매에 얼굴을 비비더니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저는 괴물이에요.”
울먹이는 주자서의 목소리를 듣고 온객행은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흔들고 주자서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유서, 그게 무슨 소리야.”
주자서가 소매를 걷어 팔을 보여주고 말했다.
“저는 이제 사람이 아닙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쁜 비늘이네.”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조금 화가 나서 그를 밀쳤다.
“이 꼴로 이제 어디를 간다는 말이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소매에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다시 주자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이 꼴이 어때서? 예쁘기만 한데.”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노려보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응’하고 대답하고 다시 주자서를 품에 안았다. 주자서는 바르작거리며 밀어내더니 온객행을 마주 안고 그의 어깨에 기대 울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을 쓸며 서귀와 지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불안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설명해주면 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빨리 화사의 모습이 나타날 줄은 온객행도 몰랐다.
“운기조식하여 마음을 다스리면 모습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소.”
주자서의 끄덕임이 온객행의 어깨에 느껴졌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나는 유서가 어떤 모습이라도 다 좋아하니 걱정 마세요.”
주자서가 온객행을 놓아주고 몸을 물리며 말했다.
“저는… 저는 이제 사람을 먹습니까?”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니오. 영력을 쌓는 방법은 많으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소.”
주자서는 팔에 있는 비늘을 보며 물었다.
“나도 집채만 해지는 것이오?”
온객행은 주자서의 뺨에 난 눈물 자국을 지우며 말했다.
“화사는 보통 그렇게 커지지는 않소. 나는 파사라 큰 것이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자서의 뺨을 감싸고 눈물 자국을 보고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유서. 울지 마세요. 뱀이 된 것이 그렇게 싫으셨습니까?”
주자서가 눈썹을 찌푸리고 온객행을 보았다. 그러다 온객행이 놀라며 물었다.
“유서… 혹시 뱀을 싫어합니까?”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손목을 잡아 얼굴에서 그의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주자서의 물음에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서. 밥은 먹었어요?”
주자서가 온객행의 얼굴을 잡아 돌리고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겹쳐 잡고 말했다.
“유서. 나는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주자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쏘아보다가 얼굴을 놓아주며 말했다.
“거짓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자서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말했다.
“유서는 어떤 모습이던 아름다우니 걱정 마시오.”
주자서는 온객행을 흘겨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이 내실에 기별했다.
“수선.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내원으로 이끌자 주자서가 하인의 눈치를 보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를 잡아 내원으로 나가며 말했다.
“저들은 모두 두꺼비이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점심을 준비하던 하인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를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먹어 치우시오.”
주자서가 온객행을 밀치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이 웃으며 다시 주자서의 허리를 잡았다.
“응. 유서.”


둘이 옥신각신하는 도중에 외실에서 하인이 기별했다.
“문귀께서 오셨습니다.”
온객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벌써?”
문귀가 내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밥 챙겨주러 간다더니….”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문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온객행이 하인을 시켜 문귀의 몫을 준비하게 시켰다. 문귀가 정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말했다.
“나는 굳이 먹을 필요는 없는데….”
온객행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가시오.”
그리고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옆에 앉혔다. 온객행은 작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자서에게 내밀었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눈을 힐끔 들어 아직도 서 있는 문귀를 보았다. 문귀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더니 ‘흠’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인이 앞접시와 젓가락을 가져와 문귀 앞에 놓았다. 문귀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덜어 먹기 시작하자 주자서도 젓가락을 들어 온객행이 집어준 음식을 먹었다. 온객행은 고개를 괴고 주자서가 먹는 것을 보았다.

문귀가 음식을 먹다가 말했다.
“영력을 쌓으려면 스승이 필요하겠군.”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스승? 여기 내가 있는데 스승이 왜 필요합니까?”
문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유서는 스승을 모시도록 하게. 하늘에서 지내려면 인맥이 중요하지 않은가?”
온객행이 몸을 바로 하고 정색하며 말했다.
“유서라 부르지 마시오! 온부인이나 수선부인이나 그런 걸로 부르시오. 어디 감히 남의 내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말이오?”
주자서가 온객행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문귀 어르신.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런 법도 들어본 적 없소.”
문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천룡이나 지주를 붙여줄까 생각하는데….”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귀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무극형! 미쳤소?”
문귀가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천룡은 문안(文案)이 빨라서 정전의 일에서 뺄 수 없으니 일단은 지주를 사라각으로 보내겠소.”

온객행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즉저가 일을 그렇게 잘합니까?”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치는 욕심이 과해서 그렇지, 일은 잘해.”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앞으로 계속 부딪히겠군요. 제가 등선했으니 그쪽도 배알이 뒤틀릴 텐데….”
문귀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지금은 천도연 때문에 아주 급한 현안 빼고는 모두 미뤄둬서 한가한 편이네. 백종절… 하아….”
온객행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정말 괜한 일을 맡은 것 같소.”
문귀가 주자서를 빤히 보고 말했다.
“화사이니 어쩌면 옥산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르겠군.”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럼 나도 옥산으로 가겠소.”
문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지백도 보내주셨으니 원군께 청해 봅시다.”

주자서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제가 알아 두어야 할 내용이 담긴 서책은 없습니까?”
문귀가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글을 읽을 줄 아시오?”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귀가 ‘흠’ 하더니 말했다.
“남쪽 별각에 장서각이 있으니 드나들 수 있게 통행패를 전하라 하겠소.”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감은하옵니다.”
문귀가 주자서가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예를 거두시오. 지금은 견연이 나의 상전이니 예법은 생략합시다.”
문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일어나 있는 주자서의 허리를 안고 주자서의 팔에 뺨을 비볐다. 고개를 숙이고 온객행의 희롱을 받아주는 주자서의 눈가가 붉어서 문귀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입 안이 썼다.

문귀가 말했다.
“오늘은 그럼 사라각에서 보고를 받게. 일단 정전의 관헌(官憲)은 모두 만났으니 사당(四堂)의 관료는 따로 날을 잡아 정전에서 보는 것으로 하지. 주극성은 크기 때문에 정무(政務)에 따라 일하는 장소가 다르니 오늘은 내자를 데리고 성 내부를 돌아보도록 하게.”
그리고 품속에서 금으로 만든 거북이가 달린 옥패를 꺼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자 문귀가 온객행을 흘겨보고 말했다.
“빌려주는 것이네. 내일 돌려주게.”
온객행이 문귀 손에 있는 옥패를 낚아채고 말했다.
“어차피 모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아니오.”
문귀가 온객행을 못마땅하게 보며 말했다.
“그래도 웬만한 데는 다 갈 수 있네. 북쪽 후원에 있는 소요지(逍遙池)에 연꽃이 아주 많이 피었겠군.”
문귀가 소매를 들어 인사하자 온객행도 소매를 들어 문귀에게 인사했다. 서 있던 주자서도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한번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
“많이 먹어 유서. 아직 완전히 화사가 된 것이 아니야.”
주자서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온객행에게 물었다.
“모습은 언제 바꿀 수 있습니까?”
온객행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부끄러워서 그래? 아주 예뻐.”
주자서가 헛웃음 치고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사람도 요괴도 아닌 모습을 한 것이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흠….”
식사를 마치고 온객행은 하인을 시켜 내실에 면경을 들이게 했다. 온객행은 소매를 뒤져 현리에게 받은 장신구 함을 꺼내 주자서에게 보여주었다.
“유서 이리 와서 골라봐.”
주자서는 화려한 장신구가 들은 함을 보고 조금 주눅 들어서 말했다.
“이건 왜요?”
온객행이 주자서를 면경 앞에 앉히고 말했다.
“관을 올리고 싶다고 했지? 마음에 드는 관을 골라봐.”

주자서는 감히 비싸 보이는 관을 만질 수 없어 말했다.
“저는….”
주자서가 머뭇거리자 온객행은 태평호에서 하고 있던 은으로 만든 관을 집어 주자서의 머리에 대보고 말했다.
“그럼 내가 하던 것을 하게.”
그러더니 온객행의 눈이 검게 변했다. 손에 든 은관에 ‘후’하고 입김을 불자 은의 색깔이 조금 어둡게 변했다.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더니 말했다.
“내가 검은색이라 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주자서는 내심 조금은 바랜 듯한 느낌이라 더 좋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면경 앞에서 한참 주자서의 머리를 매만지더니 은관을 해주었다. 머리를 은관으로 고정하자 주자서의 눈이 다시 사람의 눈으로 바뀌었다. 주자서는 소매를 걷어 팔을 보았다. 붉게 보이는 비늘도 사라지고 사람의 모습이었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수련을 해서 영력을 쓸 수 있을 때 까지는 이렇게 하자.”
주자서는 고마운 마음이 울컥 치밀어서 온객행의 손을 찾아 잡았다.
“흑랑….”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맞잡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호칭도 좀 정리해야겠다.”
온객행이 주자서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기대 앉아 말했다.
“유서. 나는 태평호의 견연입니다. 하지만 온객행이라는 이름이 제일 좋아요.”
주자서가 기대 앉은 온객행의 등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저는 기산 주가 자서입니다. 이제는 유서라는 이름도 익숙해요.”
주자서의 말에 온객행이 부스스 웃었다.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물었다.
“온랑(溫娘)이라고 부를까?”
주자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저도 온랑(溫郞)이라고 부릅니까?”
온객행은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너무 헷갈리겠다.”
온객행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객행이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어. 나는 서호에 정착하기 전에 정말 많이 떠돌았거든.”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꼭 잡았다. 온객행이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와도 갈 곳이 없고. 안에 들어도 머물 곳이 없네.” (6)
주자서가 팔을 들어 온객행의 허리를 안았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 해준 말인데… 좋아한다는 말도 못했는데 죽었어.”
주자서는 은하수에서 만났던 남자가 떠올랐다.
“알고 계실 겁니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온객행이 행복하기를 바라실 거에요.”

온객행은 한참 말이 없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객행이라고 불러줄래?”
주자서가 온객행의 품에서 나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행.”
주자서는 품속에서 현녀에게 받은 벽옥을 꺼내 온객행에게 내밀고 말했다.
“이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온객행은 주자서가 내민 벽옥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아 손 위에 벽옥을 올려놓고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모자란 사람이라… 이제 사람도 아니오. 예전에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치세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유서. 은혜라니 서로 좋아하는데 은혜가 다 무슨 말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응?”
주자서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제가… 제가 수선을 좋아합니까?”
온객행은 울상을 하고 주자서에게 물었다.
“내가 싫은가?”
주자서는 얼른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 하지만….”

온객행이 주자서를 다시 끌어안고 말했다.
“알아. 사내는 싫다고 했지. 유서가 싫은 것은 안 할 거야. 우리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천천히 찾으면 돼. 일단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먼저야.”
주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ㅈ…해요….”
온객행이 얼굴을 붙이며 물었다.
“응?”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요. 온객행.”
온객행은 텅 비었던 마음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더 바짝 끌어안고 말했다.
“나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 사랑해.”
주자서는 부끄러워서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사실은 유서에게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벽옥을 돌려주고 말했다.
“나는 유서 마음이 가지고 싶어.”
주자서는 벽옥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마음 따위를 어디에 쓰시게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뺨에 손을 올려 자기를 보게 하고 말했다.
“나는 벽옥보다 유서 마음이 더 가지고 싶어. 나한테는 이 벽옥보다 그게 훨씬 더 소중해.”
주자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온객행의 눈빛이 뜨거워서 부끄러워졌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온객행이 말했다.
“유서 사랑해.”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다시 온객행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말했다.
“드리겠소. 내 마음 전부 가지시오.”
온객행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좋아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당겨 안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핥고 입안에서 뜨거운 살덩이를 찾아 핥고 빨았다.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온객행도 주자서도 조금 금방 숨이 차올랐다. 온객행이 이마를 맞대고 부스스 웃자 주자서도 온객행을 따라 웃었다.

온객행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자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내는 싫은 줄 알았는데….”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뭐가 좋았나? 핥는 것? 빠는 것?”
주자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온객행은 주자서가 사랑스러워서 다시 그의 입안을 희롱했다. 숨이 찬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물어볼 걸 그랬어.”
주자서가 숨을 몰아쉬며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변했다. 전에는 무서웠는데 주자서는 이제 별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끼리 어떻게 정을 통하는지 말이야.”
주자서는 부끄러워져서 온객행의 어깨를 밀었다. 온객행이 웃으며 주자서를 끌어당겨 안았다.
“현리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주자서가 질색하며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낮게 웃으며 답했다.
“응.”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을 닦아주고 문귀가 추천했던 후원으로 갔다. 소요지라는 연못은 그 규모가 커서 태평호를 생각나게 했다. 주자서는 주극성을 돌아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는데 그제야 온객행은 주자서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은 한참 주자서를 닦달하여 주자서의 시력이 나빠진 것을 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튀며 놀라는 그의 행동으로 그의 청각이 전보다 예민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유서. 나는 정말 바보야.”
주자서는 희미하게 보이는 연못의 연꽃을 보며 말했다.
“객행이 바보면 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멀리서 후원을 정리하는 나흘마의 기척에 주자서는 또 어깨를 튀며 놀랐다. 온객행은 그 전보다 더 자주 주자서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유서, 객행은 모자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바보야.”
그러면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객행. 앙탈이 너무 과하십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퍼붓는 애정이 정말 자기가 좋아서 였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라 얼떨떨했다.


(6) 조식(曹植) 雜詩 잡시
悠悠遠行客 去家千里餘
멀리 멀리 떠나온 나그네여. 집을 떠나 천리쯤 이로다.
出亦無所之 入亦無所止
밖으로 나와도 갈 곳이 없고 안에 들어도 머물 곳이 없네.
浮雲翳日光 悲風動地氣
뜬구름은 햇빛을 가리고 쓸쓸한 바람은 회오리를 일으키네.

蛇苺 第30

圍魏救趙 | 30. 위나라를 위협해 조나라를 구한다.

적송자는 대전의 중앙에 무릎 꿇고 있는 현무와 그의 가신을 보고 있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즉저와 지주는 천궁으로 가서 눈을 바치고 오게.”
즉저와 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요대로 향했다. 택귀와 화귀가 다가와 현무를 부축했다. 적송자가 현무를 보고 말했다.
“나는 너의 스승의 스승이니 네가 싫어도 어쩔 수 없다.”
현무는 울상이 되어 적송자에게 말했다.
“우사! 정말 억울해요. 저는 단지….”
적송자가 손을 들어 현무의 말을 끊고 말했다.
“방법이 틀렸어. 그건 내가 아주 잘 알지.”
문귀가 다가와 무릎 꿇고 말했다.
“현무. 제가 동해까지 따르겠습니다.”
현무가 문귀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다. 나에게 내려진 처벌이니 너의 일이 아니다.”
택귀와 화귀도 무릎 꿇고 말했다.
“주인을 잘못 모신 것은 저희의 죄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현무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희는 남아서 견연을 도와라.”
그리고 몸을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엎드려 있는 주자서를 일으키고 옷을 털었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현무가 되시는 겁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태평호로 돌아가야지 현무는 무슨.”
적송자가 온객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원래 현무는 거북이랑 뱀 한 쌍이니 딱 좋군.”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우사께서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이제 막 등선한 제가 어찌….”
적송자가 현무 쪽으로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 치가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하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적송자를 보고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북쪽은 추워서 싫은데….”
현무가 다가와 온객행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주극성을 부탁하네.”
그리고 품에서 아주 짙은 붉은색의 옥수(玉髓) 인장을 꺼내 온객행에게 내밀었다. 온객행은 인장을 받지 않고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현명대선. 제발 가지 마세요.”

현무가 온객행의 손을 잡아 인장을 건네고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아이들을 부탁하네.”
그리고 현무가 고개를 들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산천대제께서 그대가 싫어서 그리 하신 것이 아니네. 무례를 저질렀군. 내가 사과하지.”
그리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주자서도 얼른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예를 거두세요.”
현무가 몸을 바로 세우고 말했다.
“그대는 사람이니 견연을 도와주게. 천주서원은 나라의 대사를 결정하는 곳이기도 하니 사람과 부딪힐 일이 많네.”
주자서가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인사했다. 온객행이 현무에게 물었다.
“북쪽으로 안 갑니까?”
현무가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걱정 말게. 자네 사형이 흑룡이 되었으니 어떻게 되겠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형께서 버티실지 모르겠습니다.”
적송자가 말했다.
“장강의 물안개야 그 치가 없어도 피어오를 테니 걱정할 것 없네.”
현무가 적송자와 온객행에게 인사하고 대전을 나갔다. 택귀와 화귀가 현무의 뒤를 따랐다.

문귀가 온객행에게 다가와 소매를 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온객행이 얼른 문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무궁형(無弓兄)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문귀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이름 참 오랜만에 듣네. 이제 자네가 싫어하는 흑망이라고 못 부르겠군.”
온객행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견연이란 이름도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적송자가 웃으며 말했다.
“넓게 보라. 아주 잘 어울리는데 무슨 소리인가?”
나흘마가 다가와 고개를 조아리고 온객행에게 말했다.
“수선. 소신은 석척(蜥蜴)이라 합니다. 주극성의 살림을 맡아 보고 있습니다. 천도연이 멀지 않아 검정(檢定)하고 과단(果斷)하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온객행이 적송자에게 소매를 들어 말했다.
“모자란 파사가 우사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문귀가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어허. 못해도 흑룡이라 하게. 어디 감히 현무 대리가 파사라는 말인가?”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문귀를 보고 말했다.
“등선하지 말걸 그랬소.”
적송자가 손사래 치고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등선도 못한 요괴가 어찌 하늘의 일을 한다는 말이냐?”
적송자의 말에 온객행과 문귀가 웃음을 터뜨렸다.

현녀께 받은 벽을 보고 있던 주자서는 벽을 품속에 넣고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뿌옇고 열이 나는 것 같아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손에 닿는 살갗이 뜨거워서 주자서는 열을 좀 식혀보고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쳤다. 주자서는 적송자의 시선을 느끼고 바로 손을 내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잘 모르는 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었다.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흩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버티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주자서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유서. 꼭 주극성에서 지내지 않아도 된데. 어서 태평호로 돌아가자.”
주자서는 태평호라는 말이 반가워서 부스스 웃었다. 그리고 시야가 점멸하더니 새카맣게 꺼졌다. 온객행은 자기 품에 기대오는 주자서가 사랑스러워서 마주 안았다. ‘태평호로 돌아가서 여태까지 있던 일을 잘 설명해주고 그의 가족을 데려와 함께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온객행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주자서를 추슬러 안았다. 축 늘어진 그가 온전히 기대오는 것이 기꺼워서 온객행은 그렇게 주자서를 안고 있었다.

온객행과 주자서를 보고 있던 적송자가 말했다.
“수선, 자네 내자 아픈 것 같은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자 주자서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온객행이 놀라 다시 끌어안자 주자서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온객행이 놀라서 말했다.
“유서! 유서 왜 이러는가?”
석척이 다가와 물었다.
“사라각(謝羅閣)에 거처를 마련할까요?”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석척. 사라각을 정리하여 견연의 거처로 합시다.”
석척이 고개를 조아리더니 주변에 있던 나흘마에게 명령을 내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나흘마가 종종걸음으로 대전을 바쁘게 나갔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고 뺨을 쓸며 말했다.
“유서… 왜 이러는가? 나는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바보란 말이야.”
온객행이 애틋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있던 적송자가 고개를 문귀를 보고 말했다.
“이 치를 구슬리려면 버들개지를 휘저으면 되겠군.”
문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둘을 노려보고 말했다.
“휘저어 보시오! 당장 종화산으로 가겠소.”

적송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촉룡은 왜 언급하는가?”
문귀가 온객행에게 다가가 주자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농이네 농. 어찌 사람을 괴롭히겠는가? 어서 사라각으로 그대의 처(妻)를 옮기게. 그 곳은 대전과도 서원으로 나가는 북극문(北極門)과도 가까우니 잠시 지내는 거처로 사용하게.”
온객행이 문귀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만지지 마시오!”
문귀가 조금 날카로운 온객행의 영력에 당황하며 말했다.
“온공자. 진정해. 의원을 불러주지.”
적송자가 온객행과 문귀를 보더니 혀를 차고 석척을 앞세워 대전을 나갔다. 문귀가 석척을 따라 나가는 적송자를 보고 말했다.
“우사께서 도우시면 그리 어려울 일도 없을 거야. 어서 가서 처를 간병해야 하지 않겠나?”
온객행이 주자서를 팔로 안아서 들어 올렸다. 문귀가 대전 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멀지 않아. 가는 길에 서귀(筮龜)를 부르세. 그는 사람의 의학을 알고 있어.”
온객행은 문귀를 따라 대전을 나갔다.


사라각은 주극성 동쪽에 위치한 전각 중의 하나로 주극성의 동문은 무당산의 천주서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문인데도 왜인지 이름은 북극문이다. 문귀는 보초를 서고 있던 별주부(鼈主簿)에게 사라각으로 안내를 부탁한 뒤 남쪽 별각에 있는 서귀에게 향했다. 사라각에 도착하자 나흘마 여럿이 분주히 움직이며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흘마가 다가와 별주부에게 물었다.
“내실 정리는 모두 마쳤으니 내실로 가시겠습니까?”
별주부가 온객행에게 포권하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마는 몸을 돌려 장지문을 열고 내실로 향했고, 별주부는 외실 밖으로 나가 사라각 문 앞에 섰다. 내실에 도착한 온객행은 주자서를 침상 위에 올려 놓고 침상 주변에 있는 대야에 물을 채워 영견을 적셨다. 얼른 적신 영견으로 주자서의 얼굴이며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평소보다 주자서의 체온이 조금 더 뜨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붉기에 부끄러운 줄 알았다. 온객행은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 억울했다. 사람이었다면 미리 알 수 있었을까? 외부가 시끄럽더니 문귀가 서귀를 데리고 나타났다.

서귀가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의 맥을 짚었다. 손목에서도 느껴지는 열기에 서귀가 주자서의 앞섶을 잡아 벌리자 온객행이 놀라서 서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서귀가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열이 너무 많이 나지 않는가?”
그리고 다시 주자서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치는 사람인가?”
온객행이 주자서의 앞섶을 다시 잘 여미고 그의 뺨에 물을 적신 영견을 대고 서귀를 쏘아보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반도를 먹였거든요.”
서귀가 다시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감긴 눈을 열어 보더니 물었다.
“근데 왜 요괴의 기운이 있는가?”
온객행이 방금 서귀가 만졌던 주자서의 눈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말했다.
“화사가 피를 먹였어요. 살리려고.”
문귀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승천했다던 그 화사의 피를 먹었나?”
서귀가 덧붙여 물었다.
“취한 것이 아니라 화사가 자발적으로 준 것인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귀가 주자서의 손목을 놓고 자세를 바로 하고 앉으며 말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잘 모르겠군.”
문귀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그 화사가 황룡이 되었다던데 사실인가?”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과 손을 한참 닦다가 고개를 돌려 문귀를 보고 말했다.
“무극형! 요대의 지백을 불러주세요. 그는 유서를 진맥한 적이 있습니다. 그라면 알지도 몰라요.”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고 허둥거리며 내실을 나갔다.

서귀가 주자서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어쩌면 요괴가 되려고 신열(神熱)이 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
온객행이 서귀를 보고 물었다.
“신열?”
서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룡이 된 화사의 피를 마신 것이라면 그 화사도 보통 화사는 아닐 테니 사람이 요괴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온객행이 다시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아상의 피를 마신 것은 벌써 보름도 더 전의 일인데 왜 이제야….”
서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확한 원인과 이유를 모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군. 그래도 열이 나는 것은 사람에게나 요괴에게나 좋지 않으니 옷을 벗겨 열을 식혀주게.”
서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온객행이 서귀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어르신. 제발 우리 유서를 살려주세요.”
서귀가 뒤돌아 주자서를 보더니 온객행에게 물었다.
“이 치가 발의 후손인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귀가 다시 내실로 들어와 말했다.
“요대로 사람을 보냈으니 지백이 곧 올 거야.”
서귀가 문귀에게 가서 귓가에 뭔가를 작게 속삭였다. 온객행은 둘을 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침상에 걸터앉아 연신 주자서의 얼굴을 영견으로 닦으며 그를 불렀다.
“유서. 유서….”

문귀와 서귀가 내실을 나가며 말했다.
“견연. 열을 내리는 탕약을 올리라 할 테니 일단 열을 식혀주게.”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어서 가서 지백을 데려올까요?”
문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금귀자(金龜子)를 구름 마차로 보냈으니 날이 지기 전에 올 거야. 너무 걱정 말게.”
서귀가 온객행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장서각에 가서 확인할 것이 있네. 가서 확인해보고 다시 오지.”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서귀와 문귀도 온객행에게 인사하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다시 내실로 들어와 열에 들떠 숨을 몰아쉬는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은 내실을 둘러보고 닫힌 장지문과 창호를 모두 열고 옷걸이 근처에 있는 병풍을 가져와 침상 앞에 두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주자서의 요대를 풀고 장포를 벗겼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서늘한 체온이 좋았는지 온객행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온객행은 이불을 걷고 주자서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말했다.
“유서… 내가 잘 할게. 날 떠나지 마.”
주자서는 온객행의 손에 얼굴을 비비다 이내 축 늘어졌다. 온객행은 하인이 탕약을 들고 들어올 때까지 주자서를 안고 있다가 하인의 기척에 주자서를 놓아주고 탕약을 받았다. 하인이 침상이 있는 쪽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수빙(水氷)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고민하다 고개를 젓고 물었다.
“지백은 아직 인가?”
하인이 고개를 흔들더니 금방 인사하고 내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탕약이 담긴 소반을 들고 침상으로 갔다. 온객행은 협탁에 소반을 놓았다.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키고 협탁에 있는 탕약 그릇을 들어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작게 흔들며 말했다.
“유서. 잠깐만 일어나 봐. 유서.”

주자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눈을 뜨지는 못했다. 온객행은 숟가락을 들어 후후 불어 주자서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자서는 좀처럼 탕약을 삼키지 못했다. 입가에 흐른 탕약을 적신 영견으로 닦아낸 온객행은 애가 닳아 안절부절못하다가 탕약을 입에 머금고 주자서와 입을 맞췄다. 온객행은 기다란 혀로 탕약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약을 먹였다. 몇 번 입을 맞추자 탕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주자서도 목이 말랐는지 탕약을 머금은 온객행의 혀를 찾아 빨았다. 온객행은 화들짝 놀라 입을 떼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는 입을 벌리고 있다가 입맛을 다시더니 입술을 혀로 축였다. 온객행은 정염이 일어 주자서에게 얼굴을 붙였다가 주자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표식을 하는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핥고 빨다가 주자서를 놓아주고 남은 탕약을 입에 넣어주고 눕혔다. 온객행은 주자서 옆에 앉아서 가끔 영견에 물을 적셔 주자서의 입술을 축여 주었다. 주자서는 축 늘어져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뭔가를 웅얼거리다가 숨을 헐떡였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일으켜 앉아 등을 쓸어 주었다.


서귀가 중천이 넘어 사라각으로 들어왔다. 온객행은 서귀가 다가와 주자서를 진맥하는 것을 보았다. 서귀가 주자서의 뺨에 손을 대보더니 말했다.
“좀처럼 열이 떨어지지 않는군.”
온객행이 서귀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장서각에서 확인하신다는 것은 확인하셨습니까? 서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이 요괴가 되는 것들을 좀 찾아봤는데 말이야….”
온객행이 주자서의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은 신선이 되고자 하지 요괴가 되고자 하지 않아서 말이야. 죄를 지어 요괴가 된 사람이 대부분이네. 이 치는 그것에 해당되지 않지 않은가? 요괴가 은혜를 갚고자 요괴의 피를 바쳐 장수한 사람들의 내용도 있긴 했지만 흔하지 않은 일이네. 화사의 피를 얼마나 먹였나?”
온객행이 서귀를 보고 말했다.
“아상의 말로는 한 말 정도 먹였다고 한 것 같습니다. 사나흘… 거의 닷새 정도 일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서귀가 ‘흠’ 하더니 말했다.
“죽을 사람이었는데 살린 것일 수도 있겠군. 삼청(三淸)께서 별말 없는 것을 보면 하늘이 이 치에게 뭔가 잘못한 모양인데?”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아 영견으로 닦으며 말했다.
“정전에서 만난 현녀께서도 스승님께서도 원군께서도 하늘이 유서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셨습니다.”
서귀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너무 걱정 말게. 죽이기야 하시겠는가?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삼원으로 가겠지.”
온객행이 울상을 하고 말했다.
“안 돼요. 아직… 아직 유서랑 아무것도 못 했는데 삼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서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치랑 뭘 하려고 그러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구름이 많아 비가 오는 것도 밝게 뜬 가을밤의 달도 눈이 오는 산자락의 외로운 소나무도 봄비가 태평호를 채우는 것도 함께 보지 못했습니다.” (5)

서귀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애정시를 내가 들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서귀가 탁자로 나와 지필묵으로 나뭇조각에 처방전을 쓰며 말했다.
“만약 신열이라면 열이 올랐다 내렸다 며칠 앓을 테니 따로 간병할 사람을 두는 것이 좋겠네.”
온객행이 병풍 옆에 서서 서귀를 보고 말했다.
“우리 유서가 낫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서귀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석척에게 시급한 것부터 주극성과 천주서원의 일에 대해 보고하라 이르겠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탁상에 가서 앉았다.
“무슨 뜻입니까?”
서귀가 자리에서 일어나 처방을 적은 나무 조각을 내실 밖에 있는 나흘마에게 건네고 내실을 나가며 말했다.
“현명대선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으셨네. 이참에 좀 푹 쉬다 오셨으면 좋겠어. 잘 부탁하네. 현무 대리.”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나흘마에게 말했다.
“북해수(北海水)를 준비해 수선의 내자를 씻기게.”
나흘마가 고개를 조아리고 서둘러 내원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활짝 열어놓은 문간에 서서 서귀를 보고 말했다.
“우리 유서는….”
서귀가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보고 헛웃음 치고 말했다.
“열이 떨어지면 금방 깨어날걸세. 지백이 온다지? 그에게 묻게.”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서귀에게 인사했다.


해가 저물 즈음 구름 마차를 타고 무당산에 도착한 지백은 금귀자의 안내에 따라 북극문을 지나 주극성에 들어가 동쪽 별궁으로 향했다. 주극성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부가 어수선했다. 별궁은 별주부 몇이 호위를 서고 있었는데 금귀자와 지백이 나타나자 그들을 내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수선께서 오래 기다리셔서 조금 날카로우니 조심하십시오.”
내원에 있던 나흘마가 지백을 발견하고 그들을 내실로 안내했다. 내실에 도착해 나흘마가 지백의 도착을 고하자 안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내의만 입은 온객행이 나와 지백의 손을 잡았다.
“지백! 기다렸네.”
온객행은 지백의 손에 들린 의함을 대신 들고 그를 침상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열은 조금 떨어졌는데 벌써 몇 시진째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지백이 침상에 누워있는 주자서를 보았다. 온객행이 조금 흐트러진 주자서의 앞섶을 잘 여며 정리하고 말했다.
“서귀께서 진맥하셨는데 신열이 오른 것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백이 ‘아!’ 하고 자리에 앉아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맥을 짚었다.

지백은 한참 주자서의 손목을 붙들고 있다가 말했다.
“수선. 이미 사람의 맥이 아닙니다.”
온객행이 이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지백… 유서가 혹시 요괴가 되는 것을 오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면 어떡하지요?”
지백이 주자서의 손을 놓고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요괴가 되었다고 모두 오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온객행이 지백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반도를 먹였어요.”
지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자서를 보았다. 한참 말이 없던 지백이 말했다.
“이제 막 요괴가 되었는데 반도까지 먹었으니 정말 신열이 오른 것일 수도 있고, 그동안 피로와 긴장이 쌓여서 탈이 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저의 부족한 지식으로 알 수 없으나, 후자의 경우 푹 쉬면 좋아질 것입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등선하는 동안 고생을 한 것 같소. 주요와 고상에게 부탁해 놓았는데 정말….”
지백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황룡과 수원대선께서는 청룡과 백룡을 따라 삼하궁으로 가셨습니다.”
온객행이 입을 삐죽이고 말했다.
“자기 아이라 하더니 이렇게 버려 두고 말이야.”
지백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황룡께서도 얼떨떨하셔서 겨를이 없으실 테니 수선께서 용서하세요.”
온객행이 지백을 보고 말했다.
“수선 주제에 어찌 천선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지백이 의함에서 이런 저런 약초를 꺼내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열을 떨어뜨리는 해열 작용의 처방과 기를 돋우는 처방을 해드릴 테니….”
온객행이 지백의 곁에 붙어 서서 말했다.
“지백. 내가 한동안 주극성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는데 혹시 괜찮으면 여기에 와 있어 줄 수 있는가?”

지백은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수선?”
온객행이 지백이 꺼내 놓은 약재를 둘러보고 말했다.
“내가 원군께 청할 테니 그대만 괜찮으면 여기 와서 나를 도와주게.”
지백이 온객행에게 손을 모아 공수하며 말했다.
“수선. 제 처지가 좋지 못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온객행이 지백의 팔을 잡고 말했다.
“내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알지 않습니까?”
지백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이제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수선이 되셨다던데….”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천존께서 사람과 혼인했다고 벌을 내리셔서….”
지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부족한 약재에 대한 처방전을 천에 썼다. 온객행이 장지문 밖에 있는 하인에게 약재를 다릴 도구를 부탁하고 지백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현무 대리라니 차라리 다시 태평호에 봉인되는 편이 낫겠어.”
온객행의 말에 지백은 글자의 삐침을 잘못 썼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저를 보는 지백을 보고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임시직이오. 임시직.”
지백이 붓을 놓고 온객행에게 소매를 들어 공수하고 말했다.
“수선. 저를 곤란하게 하십니까?”
온객행이 지백의 팔을 잡고 말했다.
“좀 같이 곤란합시다. 저라고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서안에 가득 쌓인 죽간을 가리켰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먹여주는 탕약을 먹고 사라각에 있는 하인들과 지백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이틀 뒤에 정신을 차렸다. 아주 잠깐씩 정신이 돌아왔다 다시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서 잠을 잤기 때문에 온객행만 애가 타서 하인들과 지백을 들들 볶았다. 깨어난 주자서의 눈은 옥산의 화사처럼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겁을 먹을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지백도 온객행의 눈치를 보고 별말 하지 않았다. 온객행의 몸 위에 몸을 반쯤 걸쳐 놓은 채로 서늘한 가슴을 베고 자던 주자서는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깼다.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는 이제 막 날이 밝기 시작한 모양이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참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몸을 바르작대는 대도 그를 품으로 당겨 안을뿐 눈을 뜨지 않았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흑랑.”
온객행은 주자서를 가깝게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유서.”
주자서가 몸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온객행이 눈꺼풀을 반만 들어 눈을 뜨고 말했다.
“유서. 왜? 아파?”
주자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 목이 말라요.”
온객행은 잠결에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놓아둔 찻잔의 물을 마시고 주자서의 입을 맞췄다. 당황한 주자서는 온객행이 해주는 대로 입안에 들어온 물을 마셨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입술을 축이듯 혀를 내밀어 빨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찻잔을 들어 찻물을 마시려고 했다. 주자서가 얼른 손을 들어 온객행의 찻잔을 빼앗아 들고 마시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주자서가 물을 다 마시자 온객행이 입술을 붙여왔다. 주자서가 고개를 돌리자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유서. 나도 목말라.”
주자서는 열에 들떠 잠결에 수도 없이 온객행과 입을 맞췄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주자서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자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자서의 양 뺨을 잡고 말했다.
“유서. 또 열이 오르는가?”
주자서는 뺨에 닿은 온객행의 손이 예전만큼 서늘하지 않아서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고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찌푸려진 주자서의 미간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유서. 왜 그러는가?”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고 온객행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을 내려왔다.


(5) 도연명(陶淵明) 四時 사시사철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봄에는 물이 가득해 사방에 연못이 여름에는 구름이 많아 기이한 봉우리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가을 달은 밝은 빛을 휘날리고 겨울 산자락에는 외로운 소나무 아름답다.

蛇苺 第29

隔岸觀火 | 29. 강 건너 불 구경.

지주를 데리러 온 문귀가 말했다.
“스승님께서 우사(雨師)를 태부로 모시라 하셨네.”
지주가 문귀를 보고 물었다.
“그럼 우리도 적송자를 태부로 모십니까?”
문귀가 머뭇거리며 말을 아끼자 지주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스승님의 스승님이시니 원치 않아도 태부로 모시겠군요.”
문귀가 지주를 보고 물었다.
“현무께서 왜 그렇게 자리에 연연하시는지 모르겠어.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구망대선께서 너무 바쁘셔서 그렇지, 사방신에 오룡의 일까지… 어휴. 나는 하라고 해도 싫을 것 같은데.”
문귀가 혀를 차며 지주에게 말했다.
“현무께서 도움이 되고 싶으셔서 그렇지. 스승님께서 혼내고 가셨으니 기분이 안 좋으실 거야.”

지주가 문귀를 힐끔 보고 물었다.
“자네도 혼났나?”
문귀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뿐이겠는가? 택귀(澤龜)와 화귀(火龜)까지 혼났지.”
지주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몸만 힘들고 말았으니 다행인 걸까?”
문귀가 지주를 보고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왜 그 즉저와 친하게 지냈나?”
지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이참! 사형! 천룡이요. 천룡. 같은 상전 모시는데 그렇게 미워해서 무슨 득이 있다고.”
문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치는 너무 욕심이 많아.”
지주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욕심이야 세월이 흐르면 별일 아닙니다. 저는 그 치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문귀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사람 좋아하는 이가 어디 있나?”

지주가 문귀의 소매를 잡고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암튼 저는 현무께서 하시는 일을 전부 보고 했으니 그렇게 혼나지는 않을 겁니다.”
문귀가 말했다.
“그것은 또 모를 일이지만 너무 걱정 말게. 현무께서 벌 받는 것을 보고만 있으시겠는가?”
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도 걱정이지요. 무슨 벌을 누구에게 받으실지….”
대전(大殿)에 다다라 대전을 지키는 능리(鯪鯉)가 그들의 도착을 고했다. 문귀는 대전으로 들어가는 지주를 보고 말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게. 모두 자네 탓이네.”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모자란 탓이지요. 제가 어리석은 탓이지요.”
지주는 대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객행은 영력으로 주자서의 머리를 말리고 하인이 가져다 놓았다는 머릿기름을 찾았다. 세목을 하고 노곤한 주자서는 졸음을 쫓아보고자 탁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온객행은 방안 여기저기를 뒤지다 침상 옆에 협탁 위에 놓인 작은 도자기 병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수유(茱萸) 냄새가 났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다가가 병을 건네며 물었다.
“이것이 정발유(整髮油)입니까?”
주자서가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냄새를 맡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그것을 손에 조금 덜어 주자서의 머리를 매만졌다. 온객행이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하자 주자서는 정말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주자서가 연신 고개를 흔들어 잠을 떨치려 하자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고단하시오?”
주자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는 잠시 눈을 붙일 테니 지주대인께서 오시면 깨워주세요.”
그리고 탁상에 엎어졌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머리를 놓고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유서. 침상에 가서 주무세요. 지주가 온다고 해도 이 밤에 우리를 찾지 않을 테니 편히 주무세요.”
주자서는 별로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웅얼거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잠깐만 쉬면 됩니다.”
온객행은 다시 탁상에 엎어진 주자서를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주자서의 등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다시 머릿기름을 손에 덜어 꼼꼼히 발랐다. 조금은 푸석하고 갈라진 머리카락이 안타까워서 온객행은 앞으로 씻길 때마다 머릿기름을 발라줘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반도원의 반도를 먹였으니 앞으로 수련을 시키면 점점 더 먹고 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와 오래도록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주자서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앉아서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아무래도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주자서는 잠깐사이 깊게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순간 조금 당황하여 주자서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얕은 숨이 사랑스러워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았다.
“유서. 정말 좋아해요. 나를 좋아해 주세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를 들어 침상 위에 눕혔다. 신발을 벗기자 족건도 신지 않은 맨발이 나왔다. 온객행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찌….”
온객행은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찾아 주자서의 몸을 덮어 가렸다. 감히 입은 옷을 벗길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볼 때마다 일어나는 정욕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현리에게 물어볼걸 그랬어.’ 온객행은 침상 아래에 신발을 둔 곳에 앉아 잠이 든 주자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고개를 괴고 보고 있다가 주자서의 뺨을 쓰다듬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자는 것이 정말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주서와는 이렇게까지 친밀하지 못했다. 주서는 온객행이 그저 뱀인 줄 알았다. 너무 오래 살아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그런 뱀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단양절에 장강에서 커다란 파사가 되었을 때 주서는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주자서가 했던 말처럼 주서 역시 온객행이 집채만 한 뱀인 줄은 몰랐을 테니까. 비가 오는 날 사람의 기척을 읽지 못하고 밟힌 것은 온객행에게 조금은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뱀인 그를 잘 보살펴준 주서를 만났으니 더는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비가 오는 날 물이 불어 위험한 서호에 주서는 왜 온 것일까?

뱀이라는 것을 주서에게 들킨 이후로 주서는 온객행이 저를 만지는 것을 꺼렸다. 체온이 높은 자신을 만지면 다칠까 상처받을까 항상 온객행을 대할 때 매우 조심했다. 온객행이 아픈 것이 끔찍이도 싫었던 주서는 대신 아프고 싶다고도 했었다.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달가울 것이라고도 했었다. 온객행은 이제야 주서가 한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유서. 사랑해. 나를 사랑해 줘.”
온객행은 팔에 얼굴을 기대고 주자서를 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주자서의 눈썹을 코를 쓸어 보았다. 온객행의 손가락이 닿자 주자서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금방 표정이 풀어졌다. 온객행의 손가락 끝에 조금은 뜨거운 그 체온이 기꺼워서 웃음이 나왔다. 조금 데인 것처럼 아린 것도 전부 좋았다.


주자서는 어떤 꿈을 꾸고 있다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는 온객행이 침상 위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주자서는 너무 가까운 얼굴이 어색해서 몸을 뒤로 물렸다. 무슨 꿈을 꾸다 깼는데 무슨 꿈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밝혀 놓은 등잔의 불이 다했는지 객실 안이 어두웠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자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고 눈앞에 있는 온객행의 얼굴을 보았다. ‘이 치는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한 갑자가 아니라 더 오래? 어떻게?’ 온객행의 자는 얼굴은 너무 애리애리하여 주자서는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선이 되었다고 하니 못해도 몇 백 갑자는 살았을 이의 얼굴이 참으로 어리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의 한숨 소리에 온객행이 스르르 눈을 떴다. 서로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온객행이 주자서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온객행의 얼굴이 너무 기뻐 보여서 주자서도 부스스 웃고 말았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였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늘어지고 몸이 무거웠다.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유서 왜 벌써 일어났어? 조금 더 자게.”
주자서가 ‘끙’ 소리를 내며 겨우 팔에 기대 몸을 일으키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키며 물었다.
“유서. 왜 그래?”
주자서는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에 조금 화가 나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정말 오랜만에 몸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몸이 아팠을 때가 언제인지 너무 까마득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풀다 못해 늘어져서 풍한이라도 든 모양이다. 주자서는 낭패감에 또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유서. 왜 그러는가? 나는 바보라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겠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작게 웃고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이 손을 들어 주자서의 뺨을 만졌다. 주자서는 뺨에 다가온 온객행의 서늘한 체온이 좋아서 그의 손에 고개를 기댔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눈을 감고 고개를 기대고 있는 것을 한참 보다가 주자서를 품에 끌어안았다.
“유서. 무서워서 그래? 겁이 났는가? 내가 곁에 있어 주겠네.”
주자서는 작게 웃더니 온객행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 다시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날이 밝아 밖에서 하인이 기별을 할 때까지 침상 위에 주자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인이 장지문 밖에서 말했다.
“온공자. 주극성의 주인께서 부르십니다.”
온객행은 힘겹게 주자서를 놓아 침상 위에 잘 눕힌 뒤에 장지문 밖으로 나가 하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이라 하면 현명대선께서 나를 찾으시는가?”
하인이 온객행에게 맞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발의 아이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그는 발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내자요.”
하인이 온객행을 빤히 보다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조금 하더니 말했다.
“아… 주인께서 온공자 내외를 뵙고자 하십니다.”
온객행은 하인이 자기와 주자서를 내외라고 부른 것이 기분 좋아 말했다.
“지금 당장 말이오?”
온객행이 하늘을 보고 말했다.
“이제 진시가 방금 지난 것 같은데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밤새 주극성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현녀께서 오셨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의 내자는 아직 사람이라 자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게.”
하인이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온객행은 하인의 재촉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객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온객행은 침상으로 가서 자는 주자서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유서. 유서 일어나보게.”
주자서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끙’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눈을 뜨고 온객행을 보았다.
“유서. 잠시 가보아야 할 곳이 있어.”
눈을 뜨고서도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자 온객행이 주자서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현무께서 우리를 부르시니 가 봐야겠어.”
주자서는 온객행이 일으키는 대로 일어나 앉아 멍하니 있다가 이불을 걷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맨발을 보고 또 깜짝 놀라며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말했다.
“유서! 잠깐… 잠깐 그대로 있게.”
그리고는 법석을 떨며 방안을 뒤져 족건을 찾아왔다. 온객행은 침상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이불을 살며시 들어 주자서의 발에 족건을 신겼다. 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반으로 묶고 침상 아래 두었던 신발을 찾아 신겼다. 주자서는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고 온객행이 하는 시중을 모두 받아주었다. 온객행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는 주자서가 좋아서 신발을 다 신기고 일어나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한참 끌어안고 있어도 밀어내는 기색이 없으니 온객행은 계속 그러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객실 밖에서 하인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은 어깨너머로 장지문을 흘겨보다가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일으켰다. 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야 눈을 뜨고 몸에 힘을 줬다.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주자서의 뺨이 귀여워서 온객행이 그의 뺨을 쓸고 말했다.
“잠깐 다녀와서도 계속 고단하면 더 주무시게.”
주자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그대로 주자서를 데리고 나가려다 주자서가 입은 무명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평상 위에 앉히고 소매를 뒤져 옷을 찾았다. 현리에게 받은 옷 중에 주자서가 편연주에서 더울 때 입었던 아마포로 지은 옷을 꺼내 주자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유서. 아무래도 그 옷은 격식에 맞지 않으니 이것으로 갈아입게.”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요대를 풀었다.

온객행이 놀라서 그의 손을 잡고 병풍으로 그를 데려가며 말했다.
“아이참! 유서!”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병풍 뒤에 가서 입었던 호복을 벗고 중의도 없이 내의 위에 연한 쪽빛 장포를 걸쳐 입었다. 주자서가 옷을 갈아입고 소매를 털며 나오자 온객행이 얼른 주자서에게 다가가 말린 연잎이 들은 백동으로 만든 함이 달린 요패를 요대에 걸어주며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유서. 겁먹을 것 없어. 그대의 일은 나의 일이니 내가 지켜주겠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고 빙긋 웃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려는 데 밖에서 하인이 다시 기별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주자서와 이마를 맞대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서 다녀오자.”
그리고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장지문으로 향했다.

별궁을 나와 송문을 거쳐 신당 정전에 다다르자 거북이 몇이 나와 온객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귀가 말했다.
“흑망공자께서는 주극성 대전으로 가시지요.”
문귀 옆에 있던 나흘마가 주자서에게 다가왔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이건 무슨 뜻이오?”
문귀가 신당 안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나흘마가 문귀에게 포권하고 말했다.
“영귀 어르신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문귀가 나흘마를 보고 말했다.
“스승님께서?”
나흘마가 고개를 조아리자 문귀가 발걸음을 다시 옮겨 온객행에게 다가와 말했다.
“흑망은 걱정 말게. 현무께서 발의 아이에게 물을 것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온객행이 문귀를 보고 말했다.
“아직 듣지 못하신 것 같으니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제 흑망이 아니에요.”
문귀가 온객행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온객행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문귀에게 건네고 말했다.
“태평호의 수선 견연이오.”
문귀가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보더니 ‘흠’하고 다시 온객행에게 돌려주고 말했다.
“축하하네. 이름처럼 넓게 보시게.”
온객행이 표정을 구기자 문귀가 나흘마를 보고 말했다.
“장고(長股), 스승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흘마는 문귀에게 인사하고 송문 밖으로 나갔다. 문귀가 다시 신당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수선께서는 그럼 가시지요.”
온객행은 문귀의 뒤를 따라 신당에 걸려있는 편액 안으로 들어갔다.


주극성은 사방신의 성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컸다. 금모원군의 요대만큼은 아니지만 동해에 있는 동왕공의 궁전만큼 넓고 컸다. 하지만 현천상제의 조락 이후에 가신들이 많이 빠졌기 때문에 성안은 조금 어수선했다. 영귀의 제자였던 현명은 함께 수학한 이들을 등용했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영귀의 제자들이 머물기도 했다. 현명은 수귀 답지 않은 호방한 성격으로 신선과 요괴는 물론 사람과도 인맥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가 현무의 자리를 청했을 때 그의 어린 나이나 조금 모자란 영력에도 불구하고 금모원군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산천대제 역시 호방한 현무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현무는 미색에는 취미가 없어서 둘 사이를 타락한 황룡 후토가 이어주고 있었다. 후토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라에서 꽤 높은 관리직인 대부(大夫)가 되어 천주서원에서 역법(曆法)을 주관하고 계산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점을 치고 하늘을 연구하는 것은 궁궐에서는 아주 큰 대사(大事)였기 때문에 후토는 지식을 가지고 권력을 휘둘렀다. 부족한 영력을 채우기 위해서는 사람의 영혼이 아주 많이 필요했는데 사람들의 눈을 속여 취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는 전쟁이야 말로 아주 좋은 명분이었을 것이다. 후토를 먼저 찾은 것은 현무였는데 그는 처음에 후토를 숨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후토가 사방신의 수장자리에 대한 이로운 조건을 일부러 흘렸고, 후토의 말에 구슬린 현무가 속아서 산천대제와 함께 일을 꾸미게 된 것이다. 규산에 봉인된 후토가 대부분의 죄를 뒤집어쓰겠지만 그렇다고 현무와 산천대제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무는 발의 아이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전가(轉嫁)할 속셈이었다. 물론 영귀가 그 속셈을 눈치채고 미리 빼돌려 주요에게 보내려고 했는데 즉저가 먼저 주자서를 찾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것이다. 다행히 온객행이 와서 그것도 틀어졌다.

문귀는 뒤따라오는 온객행과 주자서를 힐끔 보고 말했다.
“지금 대전에 혜현녀(彗玄女)께서 천존의 별성으로 와 계십니다.”
주자서는 조금 늘어지는 듯하더니 온객행에게 조금씩 몸을 기대왔다. 온객행은 기대오는 주자서가 기꺼워서 문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자서를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전에 다다라 문귀가 능리에게 도착을 고했다. 곧 대전 안에서 나흘마가 나와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주자서는 몸을 세우고 온객행의 팔을 잡고 말했다.
“말로 부탁할 수 있는 일은 말로 하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그 괜찮다는 말 정말 싫어. 안 하면 안돼?”
온객행의 투정에 부스스 웃은 주자서가 온객행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대전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말로 부탁하셨으니 노력해 보겠습니다.”
온객행이 소매를 털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주자서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온객행을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도는 옻칠이 된 궁궐 내부는 날이 밝았음에도 어두웠는데 내부를 밝히는 촛대 마저 대전 중앙에서 쏟아지고 있는 햇빛을 제외하면 상석에 있는 것이 전부라 궁궐의 정전이라기 보다는 사람을 데려다 취조하는 관청 같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은 뱀의 모양으로 그것을 받치는 주춧돌은 거북이 모양이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데에 현무와 즉저, 지주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새하얀 두의(頭衣)를 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소매를 들어 인사했다. 주자서도 온객행에게 맞춰 소매를 들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대전 내부는 아주 조용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온객행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현무가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고 말했다.
“저는 발의 후손을 찾고자 한 것이지 후토를 도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즉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후토에게 쫓기고 있는 발의 후손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석에 있는 여인이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그만. 후토가 발의 후손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네.”
현무가 바닥에 조아리며 말했다.
“모두 저의 부덕함 때문입니다. 어찌 저의 허물의 죄를 솔정(率丁)에게 물으십니까?”
지주와 즉저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현녀. 현무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모두 부족한 저희의 불찰입니다.”
현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 이것이 그대들의 죄겠습니까? 천존께서 그대들에게 벌을 내리시니, 현무는 한 갑자동안 주극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금하고 동해로 가서 목공(木公)을 모시세요. 천룡과 지주는 천존께 눈을 바치세요.”
현무가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자비로우신 천존께 감은하옵니다.”
즉저와 지주도 현무를 따라 말했다.
“감은하옵니다.”

현녀가 다시 자리에 앉고 말했다.
“천존께서 현무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견연을 임시 현무의 자리에 봉하셨는데 어찌하겠소? 수선?”
온객행은 심드렁하게 서 있다가 깜짝 놀라며 무릎 꿇고 소매를 들어 말했다.
“저에게 너무 과분한 임무입니다. 어찌 이제 막 등선한 저에게 남분(濫分)한 책임을 지우십니까?”
주자서도 옆에 서 있다가 얼떨결에 같이 무릎을 꿇었다. 현녀는 코웃음 치더니 말했다.
“겨우 한 갑자도 못 버티겠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현무께서 하시는 막중한 과업을 가신 하나 없는 제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주극성에 계시는 그 어떤 가신들보다도 못난 제가 어찌… 부디 존명을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머리를 땅에 붙이고 넙죽 절했다. 주자서는 조금 멍하게 있다가 온객행을 따라 절했다.

현녀는 ‘흠’ 하더니 말했다.
“천존의 허락 없이 사람과 혼인한 것은 어찌 할 셈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현녀를 보고 말했다.
“그것은! 제가 내자를 맞은 것은 제가 아직 파사일때 천간을 구분하지 못했던 요괴의 치기를 벌하실 참입니까?”
현녀가 말했다.
“하늘의 법이 지엄(至嚴)하여 천존의 허락 없이 사람의 생애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도 잊었다는 말이오?”
온객행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제가 유서와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온객행의 말에 현녀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
“견연. 이것이 자손의 문제인가? 하늘의 법도에 대해 말하고 있네.”
온객행이 말했다.
“천존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을 할 마음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유서는 저의 몫의 반도를 먹었으니 이제 그는 온전히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벌을 내리시면 받겠습니다. 그 죄는 모두 저의 죄이니 저만 벌 하소서.”
주자서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다시 머리를 조아려 절했다. 현녀가 말했다.
“그러니 한 갑자 동안 현무 노릇을 하시오. 벌이라고 칩시다.”
온객행이 고개를 다시 들고 현녀를 보며 말했다.
“현녀! 통촉하소서!”

현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에서 내려와 주자서 앞에 서서 말했다.
“발의 아이. 기산의 주가 자서는 들어라.”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현녀를 힐끔 보고 소매를 들어 공수했다. 현녀가 말했다.
“하늘이 너에게 죄를 지었으니 너의 소원을 한가지 들어주도록 하겠다.”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현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객행은 얼른 주자서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꼭 지금 당장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니 조심해서 말하게.”
주자서가 온객행의 말을 듣고 다시 현녀를 보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인에게 시간을 주소서.”
현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발의 후손이니 네가 원하면 언제든 천궁에 머무를 수 있다. 지금 나와 가겠느냐?”

주자서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저희 모친께서는…?”
현녀가 고개를 젓고 말했다.
“사람의 생애가 끝나면 너희 모친께서도 올 것이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유서?”
주자서가 온객행을 빤히 보다가 다시 소매를 들어 말했다.
“소인에게 시간을 주소서.”
현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시간은 많으니.”
현녀가 품에서 비취로 만든 벽(璧)을 건네고 말했다.
“그 벽에 너의 결정을 말하면 된다.”
주자서는 양손을 들어 현녀가 건넨 벽을 받았다. 현녀는 상석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견연의 일을 적송자께서 도와주십시오.”
기둥 한쪽에 기대어 있던 적송자가 혀를 차며 나와 말했다.
“언제부터 아셨소?”
현녀가 상석에 서서 말했다.
“천존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새하얀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