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尾註

미주목록

(1) 이백 장진주 술을 권하는 노래
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廻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 위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又不見 高堂明鏡悲白髮 朝如靑絲暮如雪
또 보지 못하였는가? 높은 집의 맑은 거울 앞에 백발을 슬퍼함을. 아침에는 푸른 실(검은머리) 같더니 저녁에는 눈(백발) 같네.
人生得意須盡歡 莫把金樽空對月
인생이 의미가 있으려면 모름지기 즐겨야 할지니 그 누구도 저 비싼 술잔을 빈 채로 달을 마주하게 하지 말게.
天生我材必有用 千金散盡還復來
하늘이 나에게 재주를 주어 반드시 쓸 곳이 있으니, 천금은 다 흩어져도 다시 돌아오는 것.

(2) 이하 장진주 술을 권하는 노래
琉璃鍾, 琥珀濃. 小槽酒滴眞珠紅
유리 술잔에 호박(琥珀) 빛깔 술이 짙으니 작은 술통에는 술방울이 진주처럼 붉구나.
烹龍炮鳳玉脂泣, 羅幃綉幕圍香風.
용(龍) 삶고 봉황 구워 옥 같은 기름 흐르고 비단 휘장과 수놓은 장막에는 향기로운 바람 에워쌌네.
吹龍笛, 擊鼉鼓. 皓齒歌, 細腰舞.
용적(龍笛) 불고 악어가죽 북 치니 하얀 이의 미인 노래하고 가는 허리의 미녀 춤 춘다오.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더구나 화창한 봄에 해가 장차 저물려 하니 복숭아꽃 어지러이 떨어져 붉은 비 같구나.
勸君終日酩酊醉, 酒不到劉伶墳上土.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실컷 취하라 술은 유영(劉伶)의 무덤 위 흙에는 이르지 않나니.

(3) 이상은 무제 봉황무늬비단 얇게 겹치고
鳳尾香羅薄幾重, 碧文圓頂夜深縫.
봉황꼬리 무늬의 향라(香羅) 얇게 몇 겹을 치고 푸른 무늬, 둥근 장식의 장막을 깊은 밤에 꿰맨다.
扇裁月魄羞難掩, 車走雷聲語未通.
달 모양의 부채는 부끄러움을 다 가리지 못하였고 수레 소리 우레 같아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지.
曾是寂寥金燼暗, 斷無消息石榴紅.
촛불 다 탄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보냈었는데 석류 붉게 핀 시절에도 소식조차 없구나.
斑騅只繫垂楊岸, 何處西南待好風.
그대의 반추마는 수양버들 언덕에 매어 있는데 어디서 서남풍 불어오기 기다릴거나.

(4) 조식 칠애시 밝은 달 누각을 비추니
明月照高樓,流光正徘徊.
밝은 달은 높은 누각을 비치니 달빛은 흘러 누각의 주위를 배회한다.
上有愁思婦,悲歎有餘哀.
누각의 우수에 잠긴 부인의 슬픈 탄식소리 애처로움이 넘친다.
借問歎者誰,雲是宕子妻.
탄식하는 이 누구냐고 물으니 집 떠난 사람의 처라고 한다.
君行逾十年, 孤妾常獨棲.
당신이 집을 떠난지 10년이 넘었어요. 외로운 첩은 항상 외롭게 지내고 있어요.
君若清路塵, 妾若濁水泥.
당신이 만약 맑은 길 위의 먼지라면 첩은 흐린 물속의 진흙이에요.
浮沉各異勢,會合何時諧.
떠다니고 가라앉음은 서로 처지가 다르지요. 만나더라도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願爲西南風,長逝入君懷.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
君懷良不開,賤妾當何依.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천첩은 어디에 기대야할까요?

(5) 이백 월하독작 달빛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 1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꽃밭 한가운데에서 한 병 술 홀로 마시며 친한 이 한명 없다.
舉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까지 모두 세 사람.
月既不解飲 影徒隨我身
은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나를 따라할 뿐.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한동안 달과 그림자 벗하고 즐거움은 모름지기 봄에 누리자.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어지럽다.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깨었을 때 함께 사귀고 즐기나 취한 뒤에는 나뉘어 흩어진다.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무정한 놀이 길이 맺어 멀리 은하수 두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자.

마치며

각 화의 소제목은 반첩여의 원가행이다. 주자서의 황궁에서의 지위가 첩여가 된것은 내가 반첩여를 상상해서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단 시작은 그렇다. 뭔가 흥퍽한 상황으로 쓰고 싶어서 이런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어째서.. 어째서 겨우 이따위의 글이 나온걸까? 으아아아아 너무 괴롭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들만 어떻게 잘 풀어내면 될것 같은데 막상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원하는데로 써지지가 않는다. 정말 누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대신 써줬으면 좋겠다.

텀을 적게 두고 쓴것들은 앞뒤가 잘 맞는다. 집중해서 썼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을 썼기 때문이다. 하기 싫어도 일단 등장인물이 끌고나가는 스토리를 그냥 어거지로 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집안에 이런저런 이벤트가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나오는 분량도 적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어정쩡한 엔딩을 원한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쓰다 마는 것 보다는 일단 끝내놓고 추후에 뭔가를 추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따위로 끝났다. 으아아아 너무 괴롭다. 스크랩한 부분이 엄청 많다. 중간중간 내용이 계속해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기 설정에서는 주첩여가 황릉을 지키는 느낌으로 시작했었다.

제대로 된 보급품을 하사 받은 적이 있었던가? 매달 보급품을 받을 때도 선황릉을 함께 지키는 무제의 내관이었던 조절(曹節)의 주머니에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하인들이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남는 것이 주자서 몫이었다. 보급품이 뜸해지자 하인들도 대부분 떠나가 조절과 그가 데려온 시종들만 남았다. 조절이 들인 양자는 황궁에서 내관을 하는 모양이라 무릉(무제의 황릉)에서 가장 큰 재실의 저택에서 지내는 그는 딱히 보급품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예년보다 빨리 쌀쌀해진 날씨에 주자서는 다 떨어진 낡은 이불에 솜을 좀 넣어 볼까 싶어서 보급품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올해도 조용하다. 주자서를 모시던 하인들은 모두 떠나고 없어서 주자서는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다.

무릉의 제향을 지내는 정각 옆 비각 한 켠에 있는 주자서의 거처는 재실 저택에 있는 하인들이 지내는 방보다 못했다. 비각(碑閣) 자체가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겨울에 몹시 추웠다. 더운 것은 어떻게 버티다 보면 버텨지지만 남쪽에서 온 주자서에게 함양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의지할 곳 없는 주자서만 애가 타서 비각에 앉아 무제의 위패 앞에 향을 올리고 무릎 꿇고 빌었다. 혹시라도 보급품을 받지 못하면 대신 올 겨울은 조금 덜 춥게 해달라고 말이다. 주자서는 조금은 바랜 회색 무명 장포를 털고 일어나 앉아 신위를 모신 곳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비각을 나왔다. 비각을 나와도 갈 곳이 없어 주자서는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 걷다가 무릉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숨을 고르고 저 멀리 흐르는 위하(渭河)를 구경했다. 위수의 상류에 있는 무릉은 날이 좋으면 저 멀리 함양(咸陽)이 보였다. 함양 넘어 주자서는 해가 다 질때까지 위수를 구경하다가 비각으로 돌아갔다. 정각 옆에 있는 재실이 떠들썩한 것을 보니 보급품이 온 모양이다.

주자서는 서둘러 비각으로 향하다가 상자를 잔뜩 들고 있는 하인과 부딪혔다. 주자서는 얼른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한 켠으로 비켜섰다. 하인은 땅에 있는 물건을 줍지도 않고 주자서를 위아래로 보더니 말했다. “어디서 일하는 하인인데 감히 정자각으로 향하는 신도(神道)를 걸으시오?” 주자서는 하인의 시선을 피한 채로 몸을 돌려 비각으로 향했다. 조절이 부리는 시종 중에 주자서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는 아마도 하사품을 전달하러 황궁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주자서가 서둘러 비각으로 향하는 것을 멀뚱히 보고 있던 하인은 콧방귀를 끼고는 바닥에 떨어진 제사용품을 주워 다시 정자각으로 향했다.

온객행이 아버지의 성화에 무릉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흔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그 집의 셋째 아들로 가장 똑똑했으나 가장 나랏일에 관심이 없는 자식이었다. 오히려 고명딸인 온아상(溫娥湘)이 가장 야망이 컸다. 온아상은 황제와 풍문이 있었던 화부인(嬅夫人)의 아들 조위녕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가 황제의 사생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장안의 비밀이었다. 애초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황제를 모셨던 내관이기 때문이다.

중추절이라고 한껏 들뜬 장안을 뒤로하고 온객행이 함양으로 온 이유는 그 떠들썩함을 조금 피하기 위해서이다. 무릉까지 온여옥이 선물을 보내게 된 이유는 새로 황제로 등극한 유흔은 변덕이 아주 심했지만 조절의 아들인 조등(曹謄)에게 연줄을 대보고자 밑밥을 까는 것이다. 온여옥은 조절뿐만 아니라 조등의 친부인 조숭(曹崇)에게도 막대한 양의 선물을 보냈다.

왜 중간에 스토리가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할말이 없다. 나도 잘 모르기 떄문이다. 분명히 반첩여가 말년에 황태후를 모시겠다며 스스로 장신궁(長信宮)으로 가고, 후에 중산왕의 아들 유연을 황제로 올리고 한성제의 무덤을 지키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뭔가 그런 느낌으로 쓰려고 했었는데 다이나믹한 부분이 부족했다고 할까.. 추선이라는 말은 반첩여가 지은 원가행에 나오는 말로, 철이 지나 쓸모 없어진 부채를 가리켜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이다.

주자서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내명부는 아주 조용했다. 주첩여는 태액지에 빠져 죽은 것이 되었고 주첩여의 위패는 황실사당에 안치되는 대신 파양군으로 보내졌다.

사실 촉경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치르고 싶었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주서의 목덜미가 보였다.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덜미. 온객행은 그 목덜미에 자신의 자국을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온객행과 주서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입을 열었다. “공자. 아직도 돌아봐야 할 점포가 많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객잔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온객행은 주서를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나부몽을 보고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냥 배에 있지 뭐. 내가 객잔에서 머물면 호위가 필요하잖아.”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온 보표를 다시 배로 돌려보냈다. 사근사근한 주서의 행동이 온객행은 반갑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주서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가면을 쓴 것 같아서 낯설었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물었다. “아서. 바람이 찬데… 춥지 않아?” 창문 밖을 보고 있던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장강과 문수(汶水)가 만나는 풍경을 구경했다. 온객행은 장강을 바라보는 주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문수(汶水)를 거슬러 올라가면 금방 촉경에 닿을 텐데….” 온객행은 시작한 말을 마치지 못했다.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의 차로 입을 축였다.

온객행은 맞닿았던 주서의 메마른 입술이 떠올라서 헛기침을 하고 차를 마셨다. 주서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넓은 소매를 걷어 끓고 있는 찻물을 찻주전자에 담았다. 온객행은 주서가 차를 내리는 모스븡ㄹ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온객행은 주서가 말한 ‘촉경까지만….’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고 싶었지만 물었다가 온객행이 우려하는 일이 현실이 될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쉬는 온객행을 보고 주서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촉경에 가본 적이 없어요. 치수(治水)로 유명한 도강언(都江堰)에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홍수가 잦아서 매년 제방을 쌓아야 했거든요.”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신기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이대(離碓)에 대해서는 읽은 적이 있어. 별로 관심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읽으라고 하니까….” 주서가 웃으며 물었다. “노온께서는 서책을 읽는 것을 즐기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서원에서 읽으라고 하니까 읽었지. 다 재미없어.”

주자서는 서원에 다닐 때 읽었던 책들이 무엇이었나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함께 수학하던 이들은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까? 그들 중에 과연 주자서를 기억하는 이가 있기는 할까? 주자서는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셋째 형님과 막내 동생이 학문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온객행이 말한대로 서원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대체로 과거의 궤적을 돌이켜 흥망의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주자서는 서출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나도 부친의 관직을 세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았을뿐더러 주자서는 외당숙인 양주자사(揚州刺史)의 병사를 관리하는 병조종사(兵曹從事)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문서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다 유경을 읽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던 중명원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서는 서책 읽는 것을 좋아해?”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상한 취미다. 서책은 황궁에서조차 쉽게 구해지지 않는 사치품이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여 찻잔을 보고 작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보고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보였다. 만약 온객행이 물었다면 주자서는 전부 대답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배로 돌아갈 때까지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자서는 그런 온객행의 호의가 고맙고 기쁘다.

온객행은 일을 다 마치고도 객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근처를 배회하던 온객행은 객실에서 등롱을 가지고 나오던 나부몽과 마주쳤다. “부몽!” 온객행이 다가가자 나부몽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공자.” 온객행이 나부몽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아서는 어때? 쉬고 있어? 벌써 잠들었어?” 나부몽이 얼굴을 구기고 온객행을 보며 말했다. “공자. 어쩔 셈이십니까?” 나부몽을 보고 있던 온객행의 표정이 점점 없어졌다. 나부몽이 손을 들어 온객행을 멈추고 말했다. “공자의 호위로 말씀드리면 주서는 수상한 인물입니다. 공자께 해로움이나 손실을 끼치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상하다니 아서는….” 나부몽이 온객행의 말을 끊고 말했다. “예. 양주 서현에서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장안으로 상경한 유생이지요.”

온객행의 눈썹이 점점 늘어지더니 축 쳐져서는 울상을 하고 말했다. “부몽… 아서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나부몽이 온객행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가주께서 아시면 주서를 그냥 둘까요?” 온객행의 시선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나부몽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주서를 위해서도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은 한동안 나부몽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부몽이 작게 한숨을 쉬자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몽. 주제 넘지 마.” 나부몽은 온객행의 웃음에 그동안의 걱정이 공포로 변했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다급하게 말했다. “공자! 주서 같은 이는 장안에 가면 많이 있으니 꼭 주서일 필요는….” 온객행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부몽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온객행이 객실로 향하며 나부몽에게 말했다. “부몽이 걱정할 것 없어.”

온객행은 살금살금 침상으로 다가갔다. 주서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온객행이 다가가 주서 옆에 앉았다. 주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이 주서에게 기대며 말했다. “응. 아서.”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온객행을 보았다. 슬픈 주서의 얼굴이 보인다. 온객행은 팔을 둘러 주서의 어깨를 안고 말했다. “아서. 오늘은 너무 바빠서 함께 있지 못했네.” 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말했다. “아서. 내 옆에 있어.”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아서. 추워?” 주서는 몸을 돌려 온객행을 끌어안았다. 온객행의 어렴풋한 시야에 하얀 옥비녀가 흔들린다. 온객행은 주서를 품에 안고 어르며 말했다. “아서. 나 여기 있어. 나만 두고 가지 마.” 주서는 온객행을 꼭 끌어안았다가 다시 놓아주며 말했다. “노온.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온객행이 주서의 뺨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온객행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주서의 말에 오히려 불안해졌다. 온객행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 주서는 낯설었지만 좋았다. 그러다 전부 드릴 테니 놓아달라는 주서의 말이 떠올랐다. 끓어오르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다.

온객행은 주서의 뺨에도 목덜미에도 흘러내린 머리를 치운 어깨에도 입을 맞추고 주서를 놓아주었다. 주서가 멀어지는 온객행의 팔을 잡았다. “노온.”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나는 아서를 놓아줄 수 없어. 그러니까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괜찮아.” 주서가 온객행의 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노온.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물었다. “아서. 정말 다 줄 거야? 내가 놓아주면?” 주서는 작게 웃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뺨에 있는 주서의 손에, 손목에 입을 맞추고 물었다. “그럼 끝까지 안 하면 다 준 게 아니지?” 주서가 온객행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미(蛾眉).” 주서가 온객행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서 자신의 눈썹을 만졌다. 온객행은 얼굴을 붙여 주서의 눈썹에도 입을 맞췄다. 눈두덩이에도, 코에도, 뺨에도 그리고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온객행의 손이 주서의 앞섶을 쥐었다. 몸을 움츠리는 주서에게 물었다. “아서. 싫어?” 주서는 앞섶을 쥔 온객행의 손을 양손으로 잡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온객행의 손이 앞섶을 너머 내의 안으로 들어갔다. 굶어서 난 발진은 모두 없어졌는지 매끄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온객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발진이 전부 없어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겠어. 아서.” 주서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온객행의 어깨를 안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몸을 이곳 저곳 더듬으며 말했다. “발진이 어디까지 있었는지 모르니까 전부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네.” 온객행의 어깨를 끌어안았던 손이 어깨를 넘어 등 뒤로 허리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은 주서도 자신을 만지면서 마음이 가득차는 느낌인지 묻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만 닿아도 좋았는데 더 많이 닿을수록 더 많이 주서를 원한다. 주서를 갈급하는 마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온객행이 주서를 침상에 눕히고 침상에 오르려고 하는데 객실 밖에서 나부몽이 기별했다. “공자 장안에서 서신입니다.”

온객행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고는 바로 아래 어둠 속에 보이는 주서를 보았다. 앞섶이 전부 흐트러져 온객행의 아래에 누워있는 주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객행은 주서의 몸 위에 겹쳐 누워 주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내일 받아 보겠네.” 나부몽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가주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온객행이 팔을 괴고 일어나 장지문을 보고 다시 물었다. “강주에서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인가?” 나부몽은 답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한숨을 쉬고 따라 일어난 주서를 보았다. 흐트러진 옷차림새에 온객행은 정욕이 일었다가 장지문 밖에서 나는 나부몽의 헛기침 소리에 혀를 찼다. 주서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앞섶을 다시 잘 여며 주었다. 신발을 신고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피풍의를 주서에게 둘러주었다. 온객행이 장지문 근처로 다가가자 나부몽이 문을 열었다. 온객행의 흐트러진 옷차림새를 보고 나부몽이 얼굴을 구겼다. 온객행은 어깨너머로 힐끔 침상에 앉아 있는 주서를 보고 객실을 나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몸이라도 탐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다. 온객행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해서 싫지 않았다. 도리어 좋았다.

“공자.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온객행은 짜증이 나서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안 먹어.” 객실 밖에서 나부몽이 말했다. “주공자께서도 오늘 드신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아서, 오늘 밥 안 먹었어?”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말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아 물었다. “아서? 혹시 또 속이 안 좋아?” 주서도 곧 팔을 괴고 비스듬히 일어나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아… 아닙니다. 원래 많이 먹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온객행은 흐트러진 주서의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장지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부몽.” 나부몽이 찬합을 들고 장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부몽은 가지고 나갔던 제등의 등롱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탁자 근처에 있는 등롱에도 불을 붙였다. 나부몽은 침상을 등지고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놓았다. 온객행은 얼른 옷걸이에 걸어 놓은 여우털 피풍의를 가져다 주서에게 둘러주었다. 주서는 온객행의 시중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온객행의 다 벌어진 앞섶을 잡아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태도가 부드럽고 친근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왜일까 왜 통속적인 부분이 전혀 쓰여지지 않는걸까? 정말 자괴감이 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고 다이애나 센세의 아이 기브 유 마이 바디를 읽었다. 읽었는데 정말 적나라하고 신체 여러부위의 명칭을 제대로 알게 되었달까... 그리고 다이애나 센세가 왜 센세인지 알것 같다. 나따위가 감히 센세의 깊은 뜻을 이해할리가 없는 것이다. 뭔가 센세께서 주시는 팁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막상 당장 쓰려고하면 어디서부터 어떤식으로 써야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이애나 센세의 성애씬은 감각적이면서도 수위가 꽤 높다. 

그런걸 쓰다보면 열정이나 흥분 따위가 사그라들고 평정심, 초탈, 무념무상, 허무함과 같은 감정이 찾아오는 시간이 와버린다. 보통 무순을 심거나 찔때 제일 필요없는 것이 평정심, 초탈, 무념무상, 허무함... 그리고 제정신 같은게 아닐까? 썸네일이 중간에 바뀌었는데 솔직히 다른 것들 찾아본것보다 합환선 검색으로 정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아니 쿨럭애들은 지들 오리지날인 합환선이나 단선을 왜 안밀고 자꾸 고려 접선을 들이 미는지 모르겠다. 니들이 원조라고 말하고 싶으면 레퍼런스를 가져오라구요. 고려 쥘부채가 사치의 최정점이라는 기록은 니들이 했잖아요.

秋扇 第10完

恩情中道絶 은혜로운 정 중도에 끊어질까 하노라.

온객행은 달라진 주서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주서가 전부 주겠다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서는 강주에서와 달리 가주에서 계속 온객행과 붙어 있었다. 시중을 들어 보려고 이것 저것 해보았지만 남의 시중을 드는 일은 처음인 것인지 어설프고 허술했다. 가깝게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일 때면 온객행은 가주로 오는 길에서 자신을 놓아달라고 말했던 주서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온객행은 주서와 가까워진 거리만큼 동떨어지고 어그러진 기분이다. 가주는 예로부터 비단으로 유명하다. 가주의 비단은 장강 유역에서도 비싸지만 황하 유역에서는 아주 귀한 물품이다.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가 크다 보니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다. 상단의 일을 하느라 주서와의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한 온객행은 마음이 떨떠름하다. 온객행은 다과(茶菓)가 유명하다는 객잔에 앉아 주서와 차를 마시며 장강과 문수가 만나는 하구를 보았다. 창가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저 멀리 보이는 양산(凉山)에 해가 걸려있다. 내일은 일찍 촉경으로 향한다. 주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인다. 온객행은 흩어질 것 같은 주서의 모습에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다. 주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알아채고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차의 맛이 아주 좋습니다.”
온객행은 다정한 주서의 말에 마음이 이들이들하게 무르는 기분이다. 마시고 있는 차의 맛 따위가 어떠한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배로 돌아온 온객행은 주서와 같은 객실에 있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주서가 머무르는 객실 바로 옆방에 머물렀다. 온객행이 주서가 지내는 객실 쪽의 장지문 가까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렇게 애가 타시면 같은 객실에 머무시지 왜 갑자기 내외하십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아서를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나부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번은 한군데만 서고 싶으니 어서 객실로 돌아 가십시오.”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양손에 묻고 말했다.
“너무 참기 힘들어. 자꾸 만지고 싶고, 나를 만져 줬으면 좋겠어.”
나부몽이 몸을 부르르 떨고 온객행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가서 주서에게 말하시오.”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주공자. 손님께 무슨 무례인가?”
나부몽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
“주공자… 저도 아서라고 부를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부몽에게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부몽이 온객행의 손가락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실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공자. 이제 침수에 드십시오.”
온객행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 주서가 있는 객실의 장지문을 보고 말했다.
“불이나 꺼줘. 알아서 할 테니.”
나부몽이 등롱의 불을 끄며 말했다.
“좀 주무십시오. 주서 곁에 계시느라 장안에서부터 편히 주무시지 못하셨잖아요.”
온객행이 장지문 쪽으로 귀를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아서만 보면 하나도 안 힘들어.”
온객행의 말에 나부몽이 피식 웃었다. 온객행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나부몽을 보았다. 나부몽은 침상 근처에 있는 등롱을 제외한 모든 등롱을 끄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침상에 다가가 등롱을 들고 주서가 머무는 객실 쪽의 협탁에 올려 놓았다.

배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객실에 혼자 두고 배 안을 여기저기 다니며 부산을 떨었다. 주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까워서 온객행과 붙어 다니고 싶었지만 온객행이 거절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부몽이 객실의 창을 닫고 방 이곳 저곳에 밝혀 두었던 등롱을 끄기 시작했다. 포구에서 통행을 금지하는 북을 친다. 벌써 이경(二更; 21-23시)이다. 나부몽이 화로에 탄을 조금 더 채우며 물었다.
“춥습니까?”
주자서는 두르고 있는 피풍의를 매만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으로 가서 이불을 폈다. 주자서는 평상에서 일어나 옷걸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온객행이 언제인가 주자서에게 둘러주었던 검은색 피풍의가 걸려있다. 나부몽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시중이 필요하십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힐끔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쉬세요.”
나부몽은 주자서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탁자에 앉아 찻물로 목을 축였다. 주자서가 환복을 하고 평상으로 다가가자 나부몽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침상으로 이끌고 말했다.
“공자께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주자서는 다급하게 나부몽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촉경…. 촉경까지만.”
나부몽이 얼굴을 구기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나부몽이 잡은 소매를 빼고 말했다.
“온공자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촉경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부몽이 주자서를 빤히 보더니 피식 웃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끝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부몽은 침상에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탁자 위에 남아있던 등롱을 가지고 객실을 나갔다. 사위에 어둠이 깔린다. 마치 주자서의 처지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문수는 산에서 시작되어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라 강 폭이 넓지 않았다. 촉경으로 들어가는 금수(錦水)와 이어진 문수는 촉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장강으로 날랐다. 장안에서 촉경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험준한 진령산맥(秦岭山脈)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파촉에서 나는 생산품은 대체로 장강을 따라 강동에서 많이 거래되었다. 본래 파촉 출신이었던 온여옥은 진령고도(秦岭古道)를 통해 장안으로 들어오는 서역의 물건을 파촉에서 거래하며 재화를 모았다. 진령고도를 넘기 위해서는 상단을 호위할 호위무사도 많이 필요했지만 물건을 지고 나를 수 있는 노련한 짐꾼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신의상단에는 다른 상단보다 담부(擔夫)가 많았고 상단 내에서 지위도 높았다. 촉경은 신의상단의 지점 중에 가장 크고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온객행이 촉경의 지점에서 일을 돕겠다는 제안을 온여옥이 거절할 리 없었다. 만약 주서만 좋다고 하면 주서와 촉경에 살든지 아니면 일엽선 같은 호화 여객선을 축조하여 장강을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서의 고향은 장강의 물줄기가 닿는 곳 같으니 유람을 하다보면 그의 고향에도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온객행은 주서가 있을 객실의 장지문을 보았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지 객실이 어둡다.

바람이 좋았는지 아니면 노꾼이 훌륭했는지 표국의 배는 이틀만에 금수에 닿았다. 가주에서 금수로 향하는 내내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지 못했다. 음식을 가져오거나 등롱을 끄고 켜는 일을 하는 하인들은 주자서가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이다. 주자서는 가주에서 온객행에게 전보다는 더 친밀하게 굴었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량이 조금 늘어서 온객행을 따라다니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목소리가 낯설어서 혹여 듣지 못할까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이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의 귓속말에 몸을 움츠리거나 깜짝 놀랐다. 주자서는 그래서 더 말을 줄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주보고 웃는 것 만으로도 좋아서 어쩌면 주자서의 목소리가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방의 불을 모두 끄고 나가는 하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에 침상에 모로 누웠다.

습하고 따뜻한 장강의 날씨는 주자서에게 익숙하다. ‘현월(玄月; 음력 9월)이 이렇게 추웠던가?’ 주자서는 뺨에 닿는 비단 이불의 감촉이 중명원에서 쓰던 해진 이불보다 부드럽고 도톰해서 어색하다. 어서 온객행이 와서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진득하고 검질기게 들러붙어 오면 주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주자서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당장 객실문을 열고 온객행을 찾으러 나가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주자서는 내심 촉경까지 갈 것도 없었구나 싶었다. 여인도 아닌 볼품없는 사내에게 온객행의 관심은 분수에 넘치는 것이다. 주자서는 이제야 처지에 맞는 위치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침상 곁에 피운 화로에 불빛이 아른거리다 모두 꺼졌다. 온객행의 관심이 떨어진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이 얼마나 자신에게 정성을 쏟았는지 알게 되었다. 주자서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주자서는 지나온 문수를 구경하려고 금수와 맞닿은 곳을 잠시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객실에 얼마 남아있지 않던 온기가 흩어졌다. 주자서의 부질없고 순진한 일부가 말했다. 죽기야 하겠냐고 황실에서 벗어나 장안에서 멀어졌으니 제 한 몸 치레하는 것이 어렵기야 하겠냐고 말했다. 주자서는 한숨을 쉬고 구름 속에 가느다란 달을 보았다. 계추월이 되었다 하니 저 달은 차는 달이겠구나 생각하며 신월(新月; 초승달)을 보았다.

중천이 지나서 촉경에 닿았다. 문수에서 갈라져 나온 금수는 물길이 평탄하고 수위가 낮았기 때문에 촉경의 물길을 아는 조항사(操航士)가 길을 이끌었다. 선원들이 모두 나와 배를 조종하느라 배 안이 어수선했다. 온객행은 주서가 머무르는 객실 근처를 맴돌았지만 가주에서 촉경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나부몽은 촉경에 닿으면 상단의 일로 바쁘니 괜히 떨어져 있지 말고 주서와 함께 있어서 호위의 손포를 늘리지 말라며 온객행을 타박했다. 온객행은 표정을 꾸며 싫은 내색을 했지만 마음은 이미 객실 안에 있는 것 같았다. 포구에는 신의상단 익주부(益州府) 행수가 미리 나와 정박 절차를 밟고 있었다. 온객행은 배의 갑판에 서서 행수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하갑판으로 내려가 하역(荷役)을 준비하는 물품을 확인했다. 배가 선창에 닿자 확인이 끝난 물품을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선원과 일꾼의 구분이 모호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배에 익주의 하인들까지 들랑날랑하다 보니 배 안은 더 분주해졌다. 배에서 누가 내리고 타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아 짐을 내리는 것을 우선으로 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객실에 온객행의 손님이 있다는 사실은 선장과 나부몽 그리고 주서의 시중을 들었던 하인 몇 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 촉경에 도착해서 배 안이 붐비기 시작하고 주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이 배에 싣고 온 화물을 모두 내리고 익주의 행수에게 인사를 한 뒤에 객실로 향했다. 온객행은 객실 주변을 지키는 호위가 한 명도 없는 것이 의아해서 나부몽에게 물었다.
“부몽. 호위는 모두 어디 갔어?”
나부몽이 객실 근처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배를 정박하는데 손포가 부족하여 모두 그리 갔나봅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 문 앞에 섰다. 온객행은 장지문에 손을 올려 놓고 작은 목소리로 주서를 불렀다.
“아서. 많이 기다렸지?”
안에서 들리는 기척이 없어서 온객행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지문을 밀어 열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리고 얼른 가서 창문을 닫고 침상 옆에 싸늘하게 식어 있는 화로를 보았다.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부몽. 손님 대접이 어찌 이리 인색한가?”
부몽이 장지문 근처에 놓아둔 탄을 넣은 바구니에 손짓하며 말했다.
“일이 바빠 잠시 소홀했습니다.”
온객행은 가득 찬 바구니를 보고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객실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휘장을 걷지 않은 침상으로 갔다. 찬바람에 혹시 또 몸이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침상의 휘장을 걷고 걸터앉아 말했다.
“아서. 바람이 찬데 어찌 창문을 열어 두었어?”
사용한 흔적이 없는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침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옷걸이에 주서가 입었던 옷이 걸려있다. 주서가 둘렀던 피풍의가 옷을 넣는 커다란 함 위에 어설프게 개여 놓여있다. 온객행은 피풍의를 개켜 놓으려고 씨름하는 주서를 상상하다 웃음이 나왔다. 장지문 곁에 서있던 나부몽이 바닥에 무릎 꿇고 말했다.
“당장 찾아오겠습니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벌써 세번째야.”

온객행은 촉경에 내리지 않고 배를 돌려 다시 가주로 향했다. 가주에서 촉경으로 이어진 물길을 뒤지며 여러 시신을 찾았지만 그 중에 주서는 없었다. 온객행은 주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혹시라도 정말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고 싶어서 종일 마음이 널뛰었다. 이레가 넘도록 물길을 찾았지만 주서는 찾지 못했다. 온객행이 다시 촉경으로 돌아갔을 때, 장안에서 온여옥이 보낸 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서신을 읽지 않았다. 화공(畫工)을 불러 주서를 닮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주서와 닮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고 생떼를 써서 화공 서넛을 갈아치우고 나서야 온객행은 얼추 비슷한 주서의 그림을 얻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그림을 가주와 촉경의 상단 지점에 붙여 놓고 현금(懸金)까지 걸었다. 양월(陽月; 음력 10월)과 상월(霜月; 음력 11월)이 지나는 동안 주서를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온객행은 촉경의 상단 사택(私宅)에 틀어박혀 주서의 그림만 보았다. 나부몽은 강호의 지인들까지 동원하여 주서를 찾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부몽은 간단한 음식을 가지고 온객행이 머무는 사랑(舍廊)으로 향했다. 방 안에 편액(扁額)을 걸어 놓는 자리에 주서의 그림을 걸어 두었다. 나부몽이 찬합을 탁자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공자. 식사하십시오.”
온객행은 나부몽이 한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서가 이렇게 생겼던가? 아무래도 화공을 불러서 다시 그리라고 해야겠어.”
나부몽이 온객행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서서 그림을 보고 말했다.
“공자의 의뢰를 받아줄 화공이 익주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아서는 혹시 신선은 아니었을까? 다시 선계로 돌아가 버린걸까?”

나부몽이 한숨 쉬고 말했다.
“가주께서 보내신 서신을 어서 읽어 보시고 조공자를 데리러 현중관(玄中觀)으로 갑시다. 온상아가씨께서도 정월 전에는 혼약자를 만나보고 싶어 하셨어요.”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았다. 축처진 눈썹에 울상을 한 온객행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나부몽은 장안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온객행이 입을 쭉 내밀고 말했다.
“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익주부에 있는 사람 중에 아무나 하나 골라서 부탁하지 뭐.”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공자. 가주와 약속하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탁자에 고개를 괴고 말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부몽이 온객행을 달래며 말했다.
“일단 맡으신 일이니 상단의 신용을 위해서라도 완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온객행이 탁자에 완전히 엎드리고는 말했다.
“뭐하러?”
나부몽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공자. 나중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힘내십시오.”
온객행이 바로 앉아 나부몽이 꺼낸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얼른 해치워 버리고 아서를 찾는 일에 더 힘을 모아야겠어.”
나부몽은 말없이 온객행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을 들었다.

며칠 후 온객행은 사택에서 나와 현중관으로 향했다. 현중관은 익주에서 가장 큰 십방총림(十方叢林)으로 신분이나 종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도교 수행도장이다. 조위녕은 황후의 방계이기는 했으나 부친의 관직이 낮은데다 다른 황후의 권당과 비교하면 조금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인척을 맺으려는 집안이 많지 않았다. 몇 해 전에 그의 부친의 관직이 신도현(新都縣) 현장(縣長)에서 현령(縣令)으로 직위와 녹봉이 올랐지만 세습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도현의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고, 조위녕에게는 형제가 많고 그들 스스로 급제하여 작은 지방 관직으로 있었기 때문에 도관에서 수학하는 조위녕의 위치는 여러모로 위태로웠다. 현중관 산문(山門)에 도착해서 하인에게 기별했다. 곧 어린 수행자 하나가 나와서 온객행을 데리고 혼원전(混元殿)으로 향했다. 혼원전에서 도사를 만나 인사한 온객행은 어린 수행자를 따라 현중관 내에 있는 여사(旅舍)로 향했다. 여사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무술을 연습하는 이들이 보였다.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관에서 무술도 가르치던가?”
나부몽이 수행자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강호에는 도교를 수학하는 이가 많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름한 여사에 도착한 수행자가 온객행을 향해 인사하고 말했다.
“조공자께서 거처하는 곳입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수행자의 목소리에 처소 안에서 부산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이 수행자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장지문을 열었다. 조위녕이 푸른 도포(道袍)를 입고 나와 인사했다.
“청성문파(靑城門派) 조위녕, 신의상단 소가주께 인사드립니다.”
온객행은 조위녕의 호칭에 표정을 구겼지만 소매를 들어 조위녕의 인사를 받았다.
“신의상단 온객행입니다.”
조위녕이 서책과 목간으로 흐트러진 탁자위를 정리하며 자리를 권했다. 온객행은 탁자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처소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월(正月; 음력 1월) 전에 온가주께서 뵙기를 청하시니 납월(臘月; 음력 12월)에는 장안으로 출발할까 합니다. 그간 사용하셨던 세간은 정리하셨습니까?”
조위녕이 화로 위에 찻물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원래 짐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물건들도 함께 수학하던 이들에게 나누어 줄 예정이라 저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온객행이 조위녕이 탁자에 내려놓은 낡은 다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조위녕이 몽산차(蒙山茶)를 꺼내 찻주전자에 넣고 말했다.
“온공자께서 친히 마중을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매를 아끼시는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온객행이 말했다.
“저희 영매께서는 이번 혼인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많으니 조공자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조위녕이 끓은 물을 찻주전자에 넣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과연 온낭자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어 송구합니다.”
조위녕이 온객행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온객행은 조위녕이 대접한 차를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잘 찾아보세요. 저 역시 저의 소중한 동생이 미망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부몽이 여사의 장지문을 열고 먼저 나갔다. 온객행은 조위녕을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문지방을 넘어 여사를 나갔다.

나부몽이 산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조황후에게 저런 토끼 같은 당질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방계에 가난하고 다복한 집안이니까.”
나부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이 몇 보였습니다. 과연 서경의 현중관입니다.”
온객행 역시 주변을 보고 말했다.
“그래?”
온객행은 산문을 넘기 전에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납월 초하루에 장안으로 출발할까?”
나부몽이 손가락으로 셈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열흘 정도 밖에 시간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다시 여사로 향하며 말했다.
“조위녕도 짐이 없고 나도 짐이 없으니 언제든 출발할 수 있지 않은가?”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을 따랐다. 조위녕의 여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끓이던 차와 다기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위녕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처소에 장지문이 열려 있었다. 온객행은 조위녕이 어디에 갔는지 물을 심산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실내가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안에서 조위녕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겠지요?”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조위녕을 위로했다. 조위녕이 차를 권하며 말했다.
“몽산차는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차였는데 매부의 성에 차지 않았나봅니다.”
차를 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조위녕이 말했다.
“주형의 글씨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온객행이 장지문의 문지방까지 닿았다. 온객행을 먼저 발견한 조위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모으고 인사했다. 서안에 이불을 두르고 앉아 있는 사내의 머리에 하얀 벽옥으로 만든 비녀가 있다. 진귀한 보옥으로 장식한 것은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골랐던 수수하고 단아한 옥비녀다.

주자서는 행장함을 뒤져 소매가 짧은 옷을 골라 입었다. 온객행이 둘러준 하얀 여우털 피풍의를 잘 개어 두고 싶었지만 해본적이 없어서 잘 되지 않았다. 함 안에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처음으로 빌려주었던 가죽신발이 있었다. 가벼워진 옷차림에 바람이 차다. 객실 주변을 지키던 호위가 모두 사라졌다. 주자서는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미리 객실을 나갔다. 낭수를 건넜던 배보다는 작았지만 배의 구조를 잘 모르는 주자서는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헤맸다. 주방에서 일하던 어멈이 주자서를 발견하고는 먹을 것을 조금 먹이고 선원들이 입는 장포를 둘러주며 말했다.
“이렇게 말라서 뱃일을 어떻게 한다니?”
주자서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멈의 도움으로 선원들이 짐을 내리는 하갑판에 도착했다. 장부를 보고 물품을 확인하는 온객행이 보였다. 주자서는 한동안 선 자리에 멈춰서 온객행을 보았다.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온객행을 보고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온 선원이 말했다.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꽤 서글서글한 공자인 것 같아.”
주자서가 화들짝 놀라며 선원을 보자 선원이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는가? 익주부에서 보낸 하인인가?”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은 주자서를 선창으로 밀며 말했다.
“삼공자께서 저렇게 서두르시니 우리도 어서 서두르세.”
주자서는 익주부의 하인들 틈에 섞여서 일을 하다가 유시(酉時; 17-19시)가 다 되어서야 부두에서 나와 시장이 있는 쪽으로 나왔다.

주자서는 시장에서 운 좋게 글자를 파는 사람을 만났다. 주자서는 궁궐에서 지내면서 다양한 서체로 되어있는 책을 읽었고, 부태후는 악필로 유명했기 때문에 부태후를 대신해서 서신을 쓰거나 부태후가 쓴 초서를 번역하는 일을 종종 했던 주자서는 장안으로 처음 왔을 때보다 아는 글자도 많았고 쓸 수 있는 서체도 많았다. 글자를 파는 사람은 주자서를 현중관에 소개했고, 마침 고대의 서책을 해서(楷書)로 고쳐 쓰는 작업을 하고 있던 현중관에서 주자서를 고용한 것이다. 주자서는 도교를 수학하는 수행자들이 머무는 여사에 머무르며 죽간에 쓰여 있는 도경(道經)을 목간에 적고, 검수 받은 내용을 다시 종이에 옮겨 적어 서책을 엮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현중관에서 수행하는 이들 중에는 학자도 있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태후를 대신해서 불경을 베껴 쓰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던 주자서라 가끔 지나는 삼청전(三淸殿)에 향을 피워 부태후의 건강을 빌었다. 황궁에 있을 때는 누가 시켜서 한 일이었는데 향을 피우고 여사로 돌아가는 동안 주자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자서가 머무는 처소 근처에 현령의 아들이라는 조위녕이 머문다. 그는 부잣집의 데릴사위가 되어 촉경을 떠나 도성으로 떠난다고 한다. 원래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는지 도관내에서 그를 따르는 수행자가 많았다. 그는 청성문파의 무술도 수학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단련한 조위녕은 주자서가 그리워하는 과거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부러웠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주자서에게 한참 어린 조위녕은 아낌없이 나누었다.
“나는 곧 도관을 떠나니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쓰세요.”
조위녕이 베풀기 시작하니 그와 함께 수학하던 이들도 하나 둘 자신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황궁에서 지낼 때와 비교하면 보잘것없고 낡은 세간살이는 주자서의 보물이 되었다. 갑자기 도관으로 굴러 들어온 주자서를 싫어하는 학사들이 있었다. 주자서를 비아냥대며 그가 하고 있는 일을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주자서는 황궁에서 버텼을 때처럼 몸을 움츠리며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계추월, 맹동월(孟冬月; 음력 10월)을 지나 중동월(仲冬月; 음력 11월)이다. 동지(冬至)가 멀지 않았다. 사용하고 남은 탄을 가져다주던 이들이 줄었다. 확실히 겨울이 되니 강북(江北)은 강남(江南)보다 춥다. 주자서는 도관을 떠난다는 이가 두고 간 낡은 솜이불을 덥고 서안에 앉아 서책을 베껴 적었다. 목간에 옮겨 쓸 때 쓰는 먹이 아까워 글자를 작게 쓰느라 주자서의 자세가 구부정하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처소라 장지문을 열어 놓지 않으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조위녕이 물주전자와 다기를 들고 처소로 들어왔다. 부산을 떨며 잿빛으로 변한 화로에 탄을 넣고 물주전자를 올렸다. 주자서는 글자를 옮겨 적으며 조위녕의 푸념을 듣느라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조위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온공자.”
주자서는 두르고 있던 이불을 걷고 몸을 돌려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성큼 한 걸음에 처소 안으로 들어와 서안에 앉아 있는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조위녕은 주자서와 온객행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더니 장지문에 서있는 나부몽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며 바깥으로 턱짓했다. 조위녕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주형께 가져다주라고 한 서책을 깜빡했습니다.”
나부몽이 조위녕의 뒤를 따라 처소 밖으로 나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서. 보고 싶었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장에 정신이 얼떨떨하여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노온. 왜 여기 계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세번이나… 내가 그렇게 싫었어? 도망치지 못하게 어디 가둬야 하겠어.”
주자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눈썹을 매만지며 물었다.
“주서는 정말 아서의 이름이 맞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탄식했다.
“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매만지고 말했다.
“진짜 이름을 말할 때까지 입맞추겠다고 하면 싫어?”
고개를 돌린 주자서의 뺨이 빨갛다. 온객행은 얼굴을 붙여 주자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입을 막고 말했다.
“노온. 혼약자 분께 무례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온객행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 놀라서 주자서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위녕이 왜?”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온객행이 장지문 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내동생의 혼약자가 조위녕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동생?”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여동생이 여월에 혼인해.”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가져가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주자서.”
온객행이 얼굴을 가깝게 붙이고 물었다.
“무슨 자에 무슨 서를 쓰십니까?”
주자서가 잡힌 손을 빼고 온객행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람할 때 子(당신이란 뜻도 있다.)에 펼칠 舒(여유롭다는 뜻도 있다.)를 씁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그대에게 여유가 필요했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어디에 가두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마음에.”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짜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라서 한참 고민했는데 요따우로 끝난다구요? 네.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걸 어찌합니까ㅠㅠㅠ크흐뷰ㅠㅠㅠ이번에도 흥퍽하는건 못썼네... 미주랑 후기 정리는 내일 하는걸로
+요즘 랑야방 재탕중인데 진짜 너무 재밌다. 어떻게 10년전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지? 묘하게 퍼렁퍼렁한 화면도 노랑노랑한 화면에 비하면 나은것 같기도... 나도 랑야방 같은거 써보고 싶은데 아마 안될꺼야...
+더 쓰고 싶은게 있긴한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생각이 더 많이 들어서 갑자기 정리함. 천월때도 그랬지만 어쩔수 없는거류ㅠㅠㅠ내가 그거밖에 안돼ㅠㅠㅠㅠ

秋扇 第9

棄捐篋笥中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

나부몽은 주서의 올린 머리를 보고 온객행을 힐끔 쳐다봤다. 시기 한번 적절하다.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내리면서 장안에서 데려온 하인들과 호위들은 급한 물자를 배달하기 위해 동천(東川)으로 향했다. 갑자기 머리를 올린 주서를 보고 온객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사람은 나부몽정도다.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한숨을 쉬자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활짝 웃었다. 화창한 가을 날씨에 옥같이 고운 얼굴이지만 나부몽은 섬뜩하여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객행의 간절한 구애를 받고 있는 주서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흐르는 장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장강이 흐르는 곳 출신인가 싶어 물었지만 역시나 주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주로 향하는 배는 이주에서 탔던 배보다 그 규모는 작았지만 신의상단의 표국(鏢局)이었기 때문에 배에서 일하는 모든 선원이 보표(保鏢)의 역할도 겸했다. 배에 실은 물건들도 작지만 값이 많이 나가는 귀중품이다. 조위녕이 유학하는 촉경에도 조씨의 방계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 실은 물품 중의 대부분은 그들에게 보내는 폐물이다.

강주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온객행의 일행은 가주로 향했다. 짙은 안개를 보며 표국의 우두머리 표사(鏢士)가 말했다.
“날씨가 추워질 모양입니다.”
온객행은 대답없이 갑판에서 가주로 향하는 경로를 확인했다.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요 몇 년은 날씨가 이상하게 춥습니다.”
표사가 말이 없는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날씨는 추워도 바람이 좋으니 가주까지는 하루면 닿겠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이 배로 촉경까지 가는가?”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힐끔 옆에서 안개가 자욱한 장강을 보는 주서를 보았다. 불편한 침묵이 깔리고 물이 흐르는 소리와 세차게 부는 강바람 소리만 들린다. 나부몽이 주서의 피풍의를 털며 말했다.
“날이 차니 어서 객실로 들어갑시다.”
주서는 고개를 돌려 온객행과 표사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나부몽과 함께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나부몽의 생각과 달리 온객행은 바로 객실로 내려오지 않고 표사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객실은 이주에서 타고 왔던 배에 비하면 조금 작았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객실들과 붙어있어서 번을 서거나 호위하기에도 좋았다. 나부몽은 주서를 평상에 앉히고 객실의 퇴로와 배의 구조를 확인했다. 주서가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려는 주서를 말리며 나부몽이 말했다.
“날이 더 밝으면 여십시오. 강바람이 차고 습합니다.”
주서는 창문에 손을 올려 놓고 한참 생각하더니 결국 열지 않았다.

온객행은 객실의 장지문 밖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부몽은 온객행이 들어오자 마자 배의 내부를 확인한다며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평상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서에게 다가갔다. 아직 어젯밤의 오해를 풀지 못해 답답한 온객행이 주서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주서의 손을 잡았다.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부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온객행은 애가타서 주서를 올려보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계속 무례하게 굴어서….”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서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말했다.
“아서가 너무 좋아서….”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뺨에 닿았다. 온객행은 눈을 감고 주서의 손에 고개를 기댔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같이 있는데도 천리 밖에서 부르는 소리보다 희미하다.
“응… 응. 아서. 나 여기 있어.”
온객행은 주서에게 끊임없이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온객행은 어디든 주서가 가는 곳에 따라가리라고 다짐했다.

주서가 고개를 숙여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온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온객행은 귓가에 닿는 주서의 숨결이 간지러워 고개를 들고 주서를 보았다. 잠시나마 광채가 돌았던 눈동자는 또 언제 저렇게 죽었는지 온객행은 주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작게 탄식했다.
“아… 아니야. 아서. 그런게 아니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주서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아서 온객행이 얼른 주서의 양 뺨을 잡고 말했다.
“아서. 아니야.”
주서의 눈동자는 온객행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텅 빈 주서의 눈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서남풍이 되면 어디로 갈 거야?”
온객행의 질문에 주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은 손을 들어 눈썹을 쓸고 말했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
주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떠다니고 가라앉음은 서로 처지가 다르지요.”
온객행이 주서의 양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4)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주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온. 제 품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온객행은 조금 젖은 듯한 주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서. 나한테만 열어. 다른 사람 말고 나에게만.”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 나 여기 있어. 나만 두고 가지 마. 아서.”

주자서는 밀기로 했다. 그동안 당기기만 했으니 온객행이 원하는 것을 줘버리면 나부몽의 말한대로 금방 지쳐서 질려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온객행이 당기기 시작했다. 몸 이곳 저곳에 닿는 온객행의 손길은 못 견딜만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눈이야 떠나면 다시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매달리고 조르는 말을 할까 조심하다 보니 말 수가 줄었다. 그랬더니 온객행의 말 수도 줄어들어 버렸다. 온객행의 조심스럽고 다정한 행동에 주자서는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메마른 자신의 품으로 날아오려는 온객행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주자서에게 기대겠다는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전부 주겠다고 말했더니, 온객행은 자신만 봐 달라고 답한다. 마치 주자서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두고 가지 말라고 답한다. 주자서는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나부몽이 한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는 사람….’

촉경에 혼약자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 ‘촉경에서 혼약자를 만나면….’ 주자서는 온객행의 연정이 자신을 향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온객행이 방탕하고 점잖지 못한 사람이라 주자서를 마음껏 흔들고 탐했다면 주자서는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온객행과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변덕이 심한 사람 치고 태도가 썩 진중하다. 덕분에 주자서만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온객행은 긴장이 풀렸는지 주자서가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잠이 든 것 같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주자서의 허리에 매달린 온객행은 주자서가 생각한 것 보다는 조금 무거워서 주자서는 고개를 숙여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온. 평상으로 올라오세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안돼. 나는 아서의 마음이 갖고 싶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노온. 좀 더 편히 쉬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뒤로 밀어 평상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몸이야 마음을 가지면 언제든지….”
주자서는 조금 당황했지만 온객행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더니 어깨를 베고 축 늘어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머리를 끌어안고 뺨을 쓰다듬었다. 이미 온객행에게 마음을 다 줘버렸는데 마음을 달라고 하니 막막하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조금 억울했다.

간단한 요기거리를 찬합에 들고 객실로 들어간 나부몽은 침상 위에 정답게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부몽은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다시 찬합을 들고 객실을 나갔다. 배로 이동한 이후 온객행은 계속 주서의 침상에 꼭 붙어서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벌써 사흘, 나흘째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니 고단 할 것이다. 그런 온객행을 주서가 밀어내려고 했으면 밀어냈을 것이다. 저렇게 꼭 붙어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주서도 온객행에게 아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나부몽은 생각했다. 그래서 나부몽은 주서를 향한 온객행의 관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연정이라는 것은 봄바람처럼 왔다가 꽃샘추위에 떨어지는 꽃잎 같은 것이니 손에 쥐고 흔들면 금방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처음이라 조금 특별한 것이라고 아마 금방 다른 사람으로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그 애정이 옮겨 갈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도 온객행에게 관심이라는 것을 받아보았던 사람 중에 주서가 제일 무던한 사람이기는 했다. 씀씀이가 헤프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지도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조금 이상했지만 점잖기까지 했다. 나부몽은 내심 주서를 기점으로 온객행의 가벼운 취향이 조금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은은한 동백꽃 냄새에 눈을 떴다.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따뜻해서 온객행은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 마셨다. 온객행의 품에 있는 것은 조금 움직이더니 온객행을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졸음으로 뿌옇던 머릿속에 갑자기 찬물을 들이 부은 것처럼 온객행은 눈을 번쩍 뜨고 품에 안은 사람을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모습도 좋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좋다. 온객행은 주서의 몸에 둘러진 팔을 풀어 몸을 일으켰다. 주서를 몸으로 거의 덮고 있는 온객행은 혹시 주서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주서는 아직 잠결인지 온객행의 앞섶을 꼭 쥐고 얼굴을 비볐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주서를 다시 품 안에 가뒀다. 온객행의 움직임에 주서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주서는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온객행은 품속에 있는 사람이 경직된 것을 느끼고 주서를 놓아주었다. 주서가 눈을 뜨고 온객행을 올려보았다. 온객행은 정욕이 일어서 몸을 반쯤 비키고 말했다.
“아서. 싫으면 어서 거절해.”
주서는 말없이 눈을 꼭 감아버렸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주서의 입술을 찾았다. 처음 온객행의 입술이 닿은 곳은 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차오른 뺨, 굶주림으로 생긴 발진이 있던 목덜미 그리고 예전보다는 보드라워졌을지도 모르는 가칠한 입술을 탐했다.

온객행의 앞섶을 쥔 주서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프게 안 해.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드러난 목덜미를 조금 핥고 빨다가 옷깃 사이로 보이는 주서의 어깨에도 입술을 맞췄다. 해가 졌는지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주서의 목덜미가 붉게 변한 것이 보였다. 온객행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으로 주서의 앞섶을 쥐었다. 가쁘게 내쉬던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의 손길에 주서의 중의가 벌어졌다. 주서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온객행의 손이 중의를 지나 내의 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주서의 목덜미를 희롱하다 귓가에 속삭였다.
“혼인 했었다며….”
주서는 맨살에 닿는 온객행의 손에 놀라서 그를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주서의 허리춤을 잡아 끌어당기고 말했다.
“아서. 좋아해.”
주서가 자신의 앞섶을 모아 쥐고 고개를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객행은 주서의 요대를 풀었다.
“온공자.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호칭에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몸을 더 가깝게 붙이고 주서의 귓가를 희롱하며 말했다.
“아서의 혼대(婚對)는 죽었다며….”
온객행의 손이 주서의 고개를 돌려서 온객행을 보게 했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객실은 밖에서 나는 장강의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부몽은 등롱을 밝히기 위해 객실에 들어왔다가 평상에 엉켜 있는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나부몽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아주 가깝게 붙어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는지 주서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다. 나부몽은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나가려고 했는데 들고 왔던 화절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절자가 떨어지는 소리에 온객행의 고개가 장지문으로 돌아갔다. 나부몽은 들고 있던 등롱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객실을 나가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나부몽은 장지문을 닫고 나와 문 밖에 서서 객실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부몽은 작게 한숨을 쉬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사를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아마 온객행이 부를 때까지 객실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주서는 대체 어쩌고 싶어서 온객행의 감흥에 응하게 된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분명 나부몽은 온객행과 거리를 둘 수 있게끔 이런 저런 말들을 흘렸는데도 어째서인지 전보다 더 가까워진 듯하다.

온객행이 주서를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오히려 온객행이 주서의 형편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남자. 온객행이 대접하는 사치품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익숙하다. 온객행이 그를 찾은 것은 장안성 부용지이다. 부용지로 흐르는 곡강은 황궁에서 시작하는 물길이다. 나부몽은 황궁에서 죽었다는 선황의 첩여 성씨가 주서와 같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사연을 가졌든 복잡할 것이다. 첩여가 된 시점을 보면 그는 선황을 모시기도 전에 선황이 승하했을 것이다. 사내로 후궁이 되었는지 아니면 누굴 속이고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황실을 속인 죄는 일족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 그것이 무엇이던 괜히 온가와 얽혀봐야 주서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특히 황실과 연을 대고 싶어하는 가주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장안에서 멀어졌으니 촉경에 데려다 놓고 여비를 넉넉히 쥐여 주면 될 일이다. 주서의 병은 황실에 갇혀서 생긴 병이니 궁에서 멀어질수록 나을 것이다. 나부몽은 딱히 오래 두어도 상관없을 만한 다과를 골라서 객실 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날이 늦어 바람이 차다. 나부몽은 화로를 들여 놓을까 하다가 어차피 둘이 붙어 있으면 추울 일은 없겠다 싶어서 금방 생각을 털어버렸다.

나부몽이 객실의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온객행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등롱 빛에 객실 안이 밝아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대로 손을 내려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온객행의 손이 닿은 곳에서 주자서의 심장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주자서는 이런 기분과 감정이 낯설어서 초조하고 불안했다. 온객행은 점점 거리를 좁히더니 주자서의 귓가에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는 살갗에 닿는 자극이 따뜻하고 축축해서 피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이 손을 들어 주자서가 고개를 돌린 쪽의 어깨를 잡았다.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니고 밀기로 마음먹고 난 이후에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헤아려 보긴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태껏 온객행의 손길은 이렇게 진득하거나 검질기게 들러붙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주자서의 손끝이 저릿하고 간질간질하다. 온객행은 거리를 벌리려는 주자서를 당겨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서. 거절할 것이라면 지금 해. 입맞추고 나면 멈추지 않을 거야.”
주자서의 어깨에 있던 손이 견갑골을 지나 등허리로 내려갔다. 온객행의 손이 풀어진 요대 틈으로 주자서의 몸을 쓸어내렸다.

부태후의 곁에서 후궁의 인사를 받을 때, 숙비 소씨(淑妃 蕭氏)가 재인(才人)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장안성에는 남색이 유행이라고 했다. 지위가 높은 고관부터 학식이 높은 학자, 돈이 많은 부호까지 기루에서 즐기는 자부터 아예 집에 들여 첩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황제의 총애를 사내와 다퉈야 한다며 내전에 있는 여인들은 비역질하는 사내들을 헐뜯었다. 주자서는 후궁이 했던 말들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온객행에게 있어 주자서는 잠깐 즐기는 유흥일까? 아니면 온객행도 주자서를 가둬 놓고 탐하고 싶어 하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싫지 않았지만, 솔직히 온객행이 좋았지만 온객행에게 구속당해 또다시 어디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는 앞섶을 잡고 있던 팔을 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놔주세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비비고 물었다.
“응?”
주자서는 온객행의 어깨에 잠깐 기대 눈을 감았다가 손을 들어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전부 드릴 테니 놓아주십시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미는대로 밀려서 주자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서?”
주자서는 숙인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거절하지 않을 테니 저를 놓아주십시오.”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서?”
주자서가 숨을 고르고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온객행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서. 무슨 소리야? 놓아달라니?”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었다. ‘놓아주세요.’ 처음에는 끌어안고 있으니 놓아달라는 말인 줄 알았다. 전부 준다 하기에 가슴이 부풀어서 드디어 주서도 저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주서가 밀어내는대로 놓아주었다. 온객행을 똑바로 쳐다보는 주서의 눈동자는 온객행이 근래에 보았던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아니라서 온객행의 마음이 술렁거렸다. 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주서는 온객행이 처음 보는 모습이라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서?”
놓아달라는 말을 하는 주서의 표정이 결연해서 온객행은 그제야 주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주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이 주서를 쥐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척했다. 온객행은 웃는 얼굴을 꾸며 다시 물었다. 주서는 한참 말없이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전부 드릴 테니 저를 놓아주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돼. 싫어.”
온객행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날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주서의 표정이 금방 울 것 같이 변했다. 온객행은 주서의 얼굴에 드러난 슬픔이 안타까워서 손을 들었다.

주서가 뭔가 더 말하려고 하기에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서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주서가 하려고 했던 말이 온객행의 입맞춤에 흩어졌다. 온객행은 이 입맞춤으로 주서가 하려고 했던 말이 주서가 하고 있는 생각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붙여오는 입술을 주서는 피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에게 이렇게 무언가를 대가로 조건을 걸고 싶지 않았다. 차오르는 숨을 어쩌지 못하고 참고 있던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겹쳐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싫어. 아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주서는 숨을 몰아쉬더니 말했다.
“노온… 제발….”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주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서는 온객행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힘에 부쳐 온객행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온객행은 돌아가는 주서의 턱을 손으로 잡아 고정하고 나머지 팔을 주서의 허리에 둘러 몸을 밀착시켰다.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짚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턱과 목덜미를 희롱하며 흘러내린 중의를 벗겼다. 주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살짝 밀고 말했다.
“촉경까지만….”
온객행은 주서의 어깨에 고개를 괴고 더 가깝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싫어… 싫어. 아서.”
주서는 양팔을 들어 온객행을 마주안고 말했다.
“서로의 사정에 연연하지 않는 사귐으로 길이 맺어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5)

온객행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서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싫어. 매달리고 조를래.”
주서가 온객행을 타이르듯 말했다.
“촉경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동안 모두 드리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서를 놓고 다급하게 말했다.
“다 주지 마. 싫어. 아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내 옆에 있어.”
울먹이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서의 표정이 흔들렸다. 온객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벗겼던 중의를 다시 둘러주고 앞섶을 여며주었다.
“아서. 그냥 옆에 있어. 내 옆에.”
주서의 얼굴이 허물어져 내려앉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다시 주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아서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주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등을 쓰다듬었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소매로 젖은 눈가를 얼른 훔쳤다. 그리고 웃는 얼굴을 꾸며서 말했다.
“아서. 촉경에 가지 말까? 가주에 도착해서 장안으로 서신을 쓸게.”
주서가 복잡한 얼굴로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노온. 혼약자를 데리러 가셔야죠.”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아서가 촉경에 가기 싫으면 나도 안 갈래.”
주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고 싶습니다. 촉경. 저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어요.”
온객행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주자서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온객행이 가여워 다시는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 흐트러졌다. 그러다 주자서는 과연 온객행 옆에서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육궁에서 사는 동안 주자서는 많은 여인들이 황제의 총애를 다투며 했던 모의(謀議)와 술수(術數)를 보았다. 어떤 이는 정말 황제를 사랑해서 그렇게 했고, 또 어떤 이는 권력과 재화가 탐나서 그렇게 했다. 총애를 다툴 대상이 없던 주자서는 업신여김 당하기는 했지만 후궁의 성권(聖眷)을 위한 모략(謀略)에 빠질 일은 없었다. 온객행의 곁에 있다는 말은 스스로 진흙탕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일 남의 눈치를 보며 매일 들킬까 조마조마한 황궁에서의 고단한 삶에서 겨우 벗어난 주자서는 다른 사람과 겨루거나 다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옆에 있으라는 말에 다시한번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직감했다. 주자서는 촉경까지만 촉경에 가서 온객행이 혼약자를 만날 때 까지만 그의 옆에 있기로 했다. 이제 서남풍이 되어도 날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행동거지가 수상하고 매달리며 의지하는 그에게 허락된 것은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온객행의 애처로운 매달림이 가엾다.

촉경까지만 함께 하겠다고 했더니 촉경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혼약자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했더니 꼭 온객행이 아니어도 된다고 한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공감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꼭 내가 아니어도 노온 곁에 있어 줄 사람은….’ 주자서는 그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주자서는 자신의 옷을 추슬러 여며주는 온객행의 손길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마음을 다 내어 주었으니 몸을 내어 주는 것은 온객행이 말한 것처럼 언제든지 별일 아니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려면 전부 내어 줘야 질려버릴 텐데.’ 입술을 맞대는 일은 처음도 아니고 온객행의 입술은 부드러워서 싫지 않았다. 오히려 까슬까슬한 주자서의 입술이 온객행에게 불편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온객행이 힘겹게 꾸민 얼굴을 보고 주자서는 힘껏 웃어 주었다. 멀지 않은 이별까지 주자서는 온객행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이니….”
온객행이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주자서는 축 늘어진 온객행의 눈썹을 손으로 쓸며 생각했다. ‘비싼 금 술잔이 빈 채로 달을 마주하지 마시오.’ 온객행의 술잔을 채울 이는 많으니 한순간 그 술잔을 채웠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주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표국의 배는 장강을 따라 흘러 늦은 밤 가주에 도착했다. 나부몽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객실에서 나온 온객행이다. 나부몽은 객실 근처에서 번을 서다가 장지문을 열고 나오는 온객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나부몽을 발견한 온객행은 품에서 비단봉투를 꺼내 나부몽에게 건네고 말했다.
“장안으로 급히 보내게.”
자세히 보니 온객행의 눈가가 발갛게 짓물렀다.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비단봉투를 받았다. 온객행이 다시 객실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나부몽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멈추고 말했다.
“공자. 가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촉경까지 사나흘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온객행은 장지문으로 몸을 돌려 서고는 한참 아무 말이 없다. 나부몽은 장지문 앞에 두었던 찬합을 들어 온객행의 손에 들려주고 말했다.
“일단 요기부터 하십시오. 곧 화로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들려준 찬합을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부몽이 장지문을 열어 온객행을 객실로 밀어 넣고 말했다.
“강주의 행수가 구해준 귀한 흑차가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부몽을 보았다. 나부몽은 조금 우울해보이는 온객행의 얼굴이 의아해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 옷 입고 계십시오.”
온객행은 나부몽의 말에 피식 웃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와 한편남았는데 무슨 수로 수습하지?
+새드는 아닌건 확실한데 대충 어떻게 끝낼지 마음으로는 알고 있는데 자꾸 머리가 거부함ㅋㅋ
+표지 너무 바꾸고 싶다 대체 왜 합환선 이미지중에 무료로 쓸수 있는게 없냐 진짜ㅠㅠㅠㅠ쿨럭애들은 진짜 웃긴게 지들 전통문화를 왜 자꾸 다른 나라 전통문화로 덮으려고 하지? 아니 문헌에서 접는부채는 고려발이라잖아 그게 싫으면 얼른 역사적 근거를 가져오라고

매미

蟬 李商隱(이상은)
매미

本以高難飽 徒勞恨費聲
본성이 청고하여 배부르기 어려운데, 부질없이 힘쓰며 한스럽게 소리만을 허비한다.
五更疏欲斷 一樹碧無情
오경에 소리 잦아들어 끊어지려 하는데, 한 그루 나무는 푸르러 무정하기만 하다.
薄宦梗猶汎 故園蕪已平
낮은 벼슬이라 물 위의 나뭇가지처럼 떠돌아다니니, 고향의 전원은 이미 황폐했으리.
煩君最相警 我亦擧家淸
번거롭게도 그대는 나를 가장 잘 일깨워주지만 나 역시 온 집안이 청빈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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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本以高難飽 : 매미가 높은 나무에 서식하며 이슬을 먹고 삶을 말한 것으로, 李商隱이 자신의 고결함을 중의적으로 표현하였다. 한나라 趙曄(조엽)의 《吳越春秋(오월춘추)》 〈夫差內傳(부차내전)〉에

    秋蟬登高樹 飮淸露 隨風撝撓 長吟悲鳴 自以爲安
    “가을 매미가 높은 나무에 올라 맑은 이슬을 먹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오래도록 노래하고 슬프게 울며 스스로 편안하게 여긴다. ”라고 하였다.

  2. 박환(薄宦)은 낮은 벼슬이며, 채유범(梗猶汎)은 나무가 물 위를 떠다니는 것으로, 지방의 낮은 벼슬아치로 여러 곳을 이직하여 다닌다는 뜻이다. 《戰國策(전국책)》에는 진(秦)나라로 가려는 맹상군(孟嘗君)을 만류하며 소진(蘇秦)이 들려준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臣來 過於淄上 有土偶與桃梗相與語 桃梗謂土偶人曰 子西岸之土也 埏子以爲人 至歲八月 降雨下 淄水至 則汝殘矣 土偶曰 不然 吾西岸之土也 土則復西岸耳 今子 東國之桃梗也 刻削子以爲人 降雨下 淄水至 流子而去 則子漂漂者將何如耳

    “제가 오다가 치수(淄水)가를 지나는데 흙 인형과 복숭아 나뭇가지가 서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복숭아 나뭇가지가 흙 인형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서쪽 언덕의 흙이니 그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일 년 중 8월에 이르러 비가 내려 치수가 닥쳐오면 그대는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니, 흙 인형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서쪽 언덕의 흙이니, 부서지면 서쪽 언덕의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동쪽 나라의 복숭아 나뭇가지, 그대를 깎아 사람으로 만든다 하여도 비가 내려 치수가 닥쳐오면 그대를 떠내려가게 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 위에 표류하며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에 대한 소개는 이 게시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출처는 동양고전DB 당시삼백수 卷三 五言律詩 156 蟬 이다. 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벽무정(碧無情)이다. 파랗게 무정하다라는 표현인데 현대적인 감각으로도 시적이고 절묘한 표현이다. 무정하다라는 말을 색깔로 표현한 이 시는 유독 한시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매미라는 제목이다.

이 시는 이상은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위해 쓴 시이다. 자신을 매미에 비유하여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뜻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초반에 그리고 그 포부를 꺽으려는 장애물인 말단 관직에 있는 고단한 삶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끝맺었다. 이 시는 유명한 고사 한 구, 유명한 싯구 한 구절, 들어가지 않은 이상은 고유의 창작이란 점도 당시의 자유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시에서 매미는 참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보통 이슬만 먹는다고 해서 청렴하고 고고한 이미지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매미에 빗대어 설명하는 사람도 많고 매미날개같은 얇은 옷을 입은 야살스러운 여인을 표현하기도 한다.

제목없음

無題 李商隱(이상은)

당시삼백수 卷四 七言律詩 210 無題
昨夜星辰昨夜風
어젯밤 별들이 총총하고 바람 불 적에
畫樓西畔桂堂東
화루(畫樓)의 서편 계당(桂堂)의 동편이었지
身無綵鳳雙飛翼
몸에는 채색 봉황의 두 날개 없지만
心有靈犀一點通
마음은 신령한 무소뿔의 흰 줄처럼 하나로 통했지
隔座送鉤春酒暖
나뉘어 앉아 송구(送鉤)놀이할 때 봄 술은 따뜻했고
分曹射覆蠟燈紅
패 갈라 사복(射覆)놀이할 때 등잔불이 붉었는데
嗟余聽鼓應官去
아, 경고(更鼓) 소리 듣고서 입조(入朝)하기 위해 가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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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서(靈犀)는 신령한 짐승이다.

    《南州異物志》(남주이물지)에 이르기를 “서(犀)는 신리(神異)함을 지니고 있어서 뿔로써 그 신령함을 드러낸다.[犀有神異 表靈以角]”고 하였다. 구설에는 무소의 뿔 속에 하얀 실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대뇌를 지나 뿔의 양 끝을 이어준다고 한다. 여기서는 두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 마치 양 끝이 서로 통하는 무소뿔 같음을 말한 것이다.

  2. 送鉤(송구) : 옛 놀이의 하나로 장구(藏鉤)라고도 하는데, 고리를 보내어 그것을 감추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술을 마실 때 즐기는 유희로 이를 통해 벌주를 먹이기도 하였다.

    주처(周處)의 《風土記》(풍토기)에
    義陽臘日飮祭之後 叟嫗兒童爲藏鉤之戲 分爲二曹 以校勝負……一鉤藏在數手中 曹人當射知所在
    “의양(義陽)에서는 섣달에 음복한 후에 노인들과 아이들이 장구(藏鉤)놀이를 하는데, 두 조로 나뉘어 승부를 가린다.……고리 하나를 여러 사람의 손 가운데 감추어두고 상대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맞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 分曹(분조)는 조(組)를 나눈다는 뜻이다.
  4. 射覆(사복?사부?) 역시 고대의 놀이로 두건이나 그릇에 물건을 넣어두고 그것을 맞히게 하는 것이다.
  5. 蠟燈(납등)은 蠟燭(납촉; 밀랍으로 만든 초)이다.
  6. 鼓(고)는 늦은 밤 시간을 알려주는 북 소리, 更鼓(경고)를 가리킨다.
  7. 聽鼓應官(청고응관)은 백관이 경고가 울리는 것을 듣고 入朝(입조)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卯時(묘시), 즉 새벽 5시에서 7시 사이에 입조하였다.
  8. 蘭臺(난대)는 秘書省(비서성)을 지칭하는데, 도서와 秘籍(비적)을 관리하던 곳이다. 唐(당) 高宗(고종) 龍朔(용삭) 연간에는 비서성을 난대라고 불렀다. 이때 시인은 비서성 正字(정자)를 맡고 있었다.
  9. 斷蓬(단봉)은 轉蓬(전봉)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는데, 마른 쑥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말한다.
당시삼백수 卷四 七言律詩 212 無題 二首之一
來是空言去絶蹤 月斜樓上五更鐘
다시 온다는 빈말을 남긴 뒤 발길을 끊으시니 달 기운 누대 위에서 오경의 종소리 듣는다.
夢爲遠別啼難喚 書被催成墨未濃
꿈속에서 멀리 떠나보낼 때 우느라 불러보지도 못했건만 편지도 급히 서둘러서 먹빛도 진하지 못하구나.
蠟照半籠金翡翠 麝熏微度繡芙蓉
촛불은 금비취 휘장에 반쯤 가려져 있는데 사향은 연꽃 휘장 너머로 은은히 스며온다.
劉郎已恨蓬山遠 更隔蓬山一萬重
유랑(劉郎)은 봉래산이 멀다고 한탄했지만 봉래산 보다 만 겹 멀리 떨어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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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五更(오경)은 황혼부터 새벽까지의 저녁을 5등분하여 甲夜, 乙夜, 丙夜, 丁夜, 戊夜 또는 一更, 二更, 三更, 四更, 五更 등으로 지칭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막 동이 틀 무렵을 뜻한다. 一更이 지날 때마다 종이나 북 등을 쳐서 시간을 알렸으므로, ‘오경종’은 저녁의 마지막 종소리, 즉 밤을 꼬박 새웠음을 뜻한다.
  2. 金翡翠(금비취) : 비취새가 그려진 장막을 뜻한다. 금색 실로 비취새 문양을 수놓은 장막의 일종으로, 잠잘 때 촛불의 빛을 가리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3. 麝熏(사훈)은 사향을, 繡芙蓉(수부용)은 부용꽃을 수놓은 장막을 지칭한다. 微度(미도)는 장막을 통과하여 향기가 은은하게 넘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4. 劉郎(유랑) : 당나라 때 남자를 郎(랑)이라고 불렀다.

    東漢(동한) 永平(영평) 연간에 劉晨(류신)이 阮肇(완조)와 함께 천태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우연히 桃源洞(도원동)의 선경에 들어가 선녀를 만나서, 반년을 살다 돌아오니 자손이 칠세대가 지난 후였다. 그 뒤 다시 도원동을 찾아가려 했으나 종전의 길이 묘연하여 찾을 수 없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남조시대 송나라의 劉義慶(유의경)이 지은 《幽明錄》유명록에 실려 있다.

  5. 惠然肯來(혜연긍래): 즐거운 마음으로 온다는 뜻으로, 《詩經》 〈邶風 終風〉시경 패풍 동풍의

    ‘하루내내 바람불고 또 흙비가 내리지만 순순히 즐겨 오기도 한다.[終風且霾 惠然肯來]’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후대에 손님의 내방을 환영하는 말로 쓰였다.

  6. 膠漆(교칠) : 아교와 옻칠로 우애가 두터움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삼백수 卷四 七言律詩 213 無題 四首其二
颯颯東風細雨來 芙蓉塘外有輕雷
살랑 동풍 불며 가랑비 내리더니 연꽃 핀 연못 너머로 가벼운 우레 소리
金蟾齧鏁燒香入 玉虎牽絲汲井迴
두꺼비 향로 닫혀 있어도 향 넣어 사르고 범 장식 도르래의 줄로 우물물 길을 수 있건만
賈氏窺簾韓掾少 宓妃留枕魏王才
가씨(賈氏)는 주렴 너머 미소년 한연(韓掾)을 엿보았고 복비(宓妃)는 재주 있는 위왕(魏王)에게 베개 남겨주었건만
春心莫共花爭發 一寸相思一寸灰
꽃 핀다고 다투듯 춘심(春心) 내지 말지어다 한 조각 그리움이 한줌 재되고 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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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颯颯(삽삽)은 바람 부는 소리를 나타낸 의성어이다.
  2. 芙蓉塘(부용당)은 남조(南朝)의 악부(樂府)와 당시(唐詩) 가운데 남녀가 만나는 곳으로 항상 언급되는 장소이다.
  3. 輕雷(경뢰)는 사마상여(司馬相如)의 〈長門賦(장문부)〉에 “우레 소리 우르릉 울리니 님의 수레 소리 닮았네.[雷殷殷而響起兮 聲象君之車音]”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4. 金蟾(금섬)은 두꺼비 모양의 香爐(향로)를 말한다.
  5. 鏁(쇄)는 鎖(쇄)와 같은 말로 여기서는 향로에 태울 향을 넣을 수 있는 여닫이 장치를 말한다.
  6. 玉虎(옥호)는 물을 길을 수 있는 도르래 장치인데, 특히 도르래 장치에 조각된 호랑이 장식을 들어 말한 것이다.
  7. 牽絲(견사)는 도르래에 달린 줄을 말한다.
  8. 賈氏(가씨)는 賈充(가충)이고, 韓掾(한연)은 한수(韓壽)를 가리킨다. 少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말한다. ≪世說新語(세설신어)≫ 〈惑溺(혹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진(晉)나라 한수(韓壽)는 용모가 뛰어났는데 사공 가충(司空 賈充)이 그를 불러 자신의 하급관리[연:掾]로 삼았다. 가충(賈充)이 모임을 가질 때마다 가충(賈充)의 딸이 주렴 너머에서 한수(韓壽)를 엿보며 마음에 들어 하였다. 그 후 자신의 하녀를 그의 집에 보내 연락을 주고받다가 급기야는 한수(韓壽)의 집에서 정을 나누게 된다.
    한수(韓壽)에게서는 남과 다른 좋은 향내[奇香(기향)]가 났는데, 서역에서 온 이 향은 황제가 가충(賈充)에게 내려준 것으로 가충(賈充)의 딸이 몸에 지니고 있다가 한수(韓壽)에게 준 것이었다. 이 향 때문에 둘 사이가 탄로나 가충(賈充)은 딸을 한수(韓壽)에게 시집보냈다.

  9. 전설에 따르면 ‘宓妃(복비)’는 원래 복희씨(伏羲氏)의 딸로 낙수(洛水)에 빠져죽어 낙수의 신(神)이 되었는데, 조식(曹植)의 〈洛神賦(낙신부)〉에도 그 기록이 보인다.

    ‘魏王(위왕)’은 조식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인용한 고사는 ≪文選(문선)≫ 〈洛神賦(낙신부)〉의 이선(李善) 주(注)를 따른 것이다. 이선(李善)의 주(注)에 따르면 복비(宓妃)는 조비(曹丕)의 황후 견후(甄后)를 가리킨다.
    견후(甄后)는 견일(甄逸)의 딸로, 조식(曹植)이 그녀와 결혼하려 했는데 조조(曹操)가 조식(曹植)의 형 조비(曹丕)에게 시집보낸다. 조식은 그녀를 잊지 못해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 후에 조정에 들어가니 황제 조비가 동생 조식에게 견씨의 금대침(金帶枕) 등을 보여주자 조식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때는 이미 황후 견씨가 세상을 떠난 후였으므로 조비는 금대침(金帶枕)을 조식에게 주었다.
    자신의 봉지(封地)로 돌아가다 낙수(洛水)를 건너게 되었는데 그날 꿈에 견씨가 나타나 ‘저는 본래 당신께 마음을 주었는데 그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 베개는 제가 처녀 때부터 가지고 있다 시집가서도 썼던 것입니다. 전에 五官中郞將(오관중랑군=조비)에게 드렸는데 이제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삼백수卷四 七言律詩 215 無題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서로 만나기 어렵더니 헤어지기 또한 어려워 동풍은 힘 없건만 온갖 꽃 시들게 하네.
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干
봄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다 뽑아내고 초는 닳고서야 눈물을 처음으로 멈추는구나.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
새벽에 거울 들여다보며 풍성한 머리 변한 것을 걱정하고 밤에 읊조리다가 달빛이 차가워짐을 깨닫는다네.
蓬萊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看
봉래산을 예서 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파랑새야, 살짝 날아가서 엿보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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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東風(동풍) : 春風(춘풍)을 말한다.
  2. 絲(실 사)와 思(생각 사)는 같은 음으로 동음어이다. 봄누에가 죽어야 실을 토하는 것이 끝나듯, 굳건한 애정 역시 죽어서야 끝남을 비유하였다.
  3. 淚(누,루)는 촛농과 눈물을 뜻하는 중의어이다. 이 구절 역시 초가 다 타서 재가 되어야 촛농이 마르듯, 애정이 변하지 않음을 비유하였다.
  4. 雲鬢(운발)은 젊은 여인의 구름과 같은 검은 머리를 형용한다.
  5. 改(개)는 용모가 초췌하게 바뀌었음을 말한다.
  6. 蓬萊(봉래) : 蓬山(봉산)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봉래는 동해의 선산인데 여기서는 애인이 있는 곳을 지칭한다.
  7. 靑鳥(청조) : 西王母(서왕모)에게 소식을 전해주던 전설상의 神鳥(신조)인데, 여기서는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삼백수 卷四 七言律詩 217 無題 二首之二
鳳尾香羅薄幾重 碧文圓頂夜深縫
봉황꼬리 무늬의 향라(香羅) 얇게 몇 겹을 치고 푸른 무늬, 둥근 장식의 장막을 깊은 밤에 꿰맨다.
扇裁月魄羞難掩 車走雷聲語未通
달 모양의 부채는 부끄러움을 다 가리지 못하였고 수레 소리 우레 같아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지.
曾是寂寥金燼暗 斷無消息石榴紅
촛불 다 탄 적막한 어둠 속에서 보냈었는데 석류 붉게 핀 시절에도 소식조차 없구나.
斑騅只繫垂楊岸 何處西南待好風
그대의 반추마는 수양버들 언덕에 매어 있는데 어디서 서남풍 불어오기 기다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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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鳳尾(봉미)는 봉황의 꼬리 깃털로 여기서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칭한다.
  2. 香羅(향라)는 가벼운 고급 비단을 미화한 말이다.
  3. 碧文圓頂(벽문원정)은 녹색 무늬에 둥근 장식을 단 비단 장막을 지칭하는데, 혼례를 치를 때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4. 縫(봉)은 장막을 깁거나 또는 여미는 것으로 해석한다. 밤 깊어 이 장막을 깁거나 여민다는 것은 연인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5. 扇裁月魄(선재월백) 여자가 사용하는 부채로, 달 모양을 본뜬 것을 지칭한다.

    月魄(월백)은 달이 기울어 빛나지 않는 부분이나 달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혹 도가에서 해는 양이므로 魂(혼)으로 칭하고, 달은 음이므로 魄(백)으로 칭했다는 설도 있다. 班睫妤(반첩여)의 〈怨歌行(원가행)〉에 “재단하여 합환선을 만드니, 동글동글 밝은 달과 같네.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라고 하였다.

  6. 雷聲(뇌성)은 마차가 달릴 때 나는 소리를 천둥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石榴紅 : 여름 5월 즈음 석류꽃이 필 시기를 뜻한다.
  7. 語未通(어미통)은 마차와 수레 소리 때문에 서로의 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8. 金燼暗(금신암): 등촉이 꺼져 어두워짐을 뜻한다. 金燼(금신)은 燈花(등화) 즉 불꽃이 타는 심지이다.
  9. 石榴紅(석류홍): 여름 5월 즈음 석류꽃이 필 시기를 뜻한다.
  10. 斑騅(반추): 청색과 백색이 섞인 준마를 지칭한다.
  11. 何處西南待好風(하처서남대호풍) : ‘어느 곳에서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좋은 바람을 타고 그대의 품에 날아갈 수 있을까.’라는 뜻이다.

    조식(曹植)의 〈七哀詩(칠애시)〉에 “부침이 각자 형세가 다르니, 어느 때 만나 함께할 수 있을까. 원하노니 서남풍이 되어, 길이 그대의 품에 들고 싶어라.[浮沈各異勢 會合何時諧 願爲西南風 長逝入君懷]”라고 하였다.

당시삼백수 卷四 七言律詩 218 無題 二首其二
重帷深下莫愁堂 臥後淸宵細細長
겹겹으로 휘장 깊이 드리운 막수(莫愁)의 방 잠자리 든 뒤 깊은 밤은 길기도 해라.
神女生涯原是夢 小姑居處本無郎
무산신녀(巫山神女)의 생애는 원래 꿈이었고 소고(小姑)의 거처엔 본래 임이 없었지
風波不信菱枝弱 月露誰敎桂葉香
바람과 물결은 마름 가지 연약한 걸 알지 못하고 누가 시켜 달과 이슬이 계수나무 잎을 향기롭게 했던가?
直道相思了無益 未妨惆悵是淸狂
그대 향한 그리움 아무리 무익해도 상관없어요 슬픈 가운데 애정에 눈멀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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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莫愁(막수): 원래는 고악부(古樂府)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다. 남조(南朝)시대 악부(樂府)로 양(梁) 무제(武帝) 소연(蕭衍)이 지은 〈河中之水歌(하중지수가)〉(〈河中曲(하중곡)〉이라고도 한다)에

    河中之水向東流 洛陽女兒名莫愁 莫愁十三能織綺 十四采桑東陌頭 十五嫁爲盧家婦 十六生兒字阿侯 盧家蘭室桂爲梁 中有鬱金蘇合香……
    “황하 강물 동쪽으로 흐르네, 막수(莫愁)라는 이름의 낙양 여자 있었지, 막수는 열셋에 비단 짤 수 있었고, 열넷에 동쪽 길머리에서 뽕잎 땄네, 열다섯에 시집가 노씨 집안 아낙 되었고, 열여섯에 아이 낳아 아후(阿侯)라 했네, 노씨 집은 난초향 나는 방에 계수나무 서까래에다, 집안에는 울금과 소합 향내 가득하네.
    ” 라고 보이는데, 미인이기도 해서 아름다운 여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2. 淸宵(청소)는 고요하고 깊은 밤을 말한다.
  3. 細細長(세세장)은 밤이 긴 것을 말한다. 이 말속에는 수심(愁心)이 오래간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細細(세세)는 강조하는 말로 쓰였다.
  4. 神女(신녀): ‘神女’는 초(楚) 양왕(襄王)과 꿈속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무산신녀(巫山神女)를 말한다.

    송옥(宋玉)의 〈高唐賦 幷序(고당부 병서)〉와 그 속편(續篇) 〈神女賦 幷序(신녀부 병서)〉에 보인다.

  5. 小姑居處本無郎(소고거처본무랑): 이 구절은 남조(南朝)시대 악부(樂府) 〈神弦歌(신현가) 淸溪小姑曲(청계소고곡)〉의 “小姑 사는 곳, 님 없이 홀로 있네. [小姑所居 獨處無郎]”에서 왔다.
  6. 淸狂(청광) : 욕심이 없고 미친 사람 비슷한 상태이다. 여기서는 치정(癡情)의 뜻으로 끝까지 애정을 지킨다는 의미로 썼다.

이상은(李商隱, 원화 7년(812년) 또는 원화 8년(813년)~대중 12년(858년))은 중국 당나라의 관료 정치가로 두목(杜牧)과 함께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한시인이다.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또는 달제어(獺祭魚)이다.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때로는 관능적이며, 때로는 상징적이다. 특히 연애시에서 이상은 시의 특색이 발휘된다. 그는 애정시 방면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을 포함해 이상은은 아예 제목을 짓지 않거나 혹은 간단히 시구에서 빌리는 정도로 제목을 붙였는데, 만당시의 경향인 유미주의를 보다 더 추구하여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을 구사하고, 몽롱하며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주제는 대개 '파국'으로 끝나버린 '불륜'의 연애의 회상, 감미로운 꿈 같은 청춘의 기억의 서술이다. 당연히 그 내용은 몹시 애수를 띠지만 그것을 우아한 시구나 댓구, 고전의 인용으로 장식하여 탐미주의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출처

당나라 이상은은 두목과 함께 만당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李杜(이두)라고 불린다. 당대(唐代)시인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 많고 또 한시의 최대 번성기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사용하는 문체나 소재가 매우 다양하다. 유독 애정시를 많이 쓴 이상은은 후대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대부분의 유교적 해석이 그러하듯 뜻대로 보지 않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끼워맞추어 쇄락해가는 당나라와 연관지어 그의 애정시를 사회적 통찰로 바꿔버렸다. 유교하는 애들은 다들 좀 인셀이었는지 왜들 그렇게 정치나 사회랑 연관 못시켜서 안달일까? 순수하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려고 한다. 다른 한시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시가들을 인용한 구절이 많기때문에 기본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7언율시이고 만당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시경이나 초사처럼 직관적인 뜻 유추가 어려운 부분이 별로 없다.

사실 처음으로 이상은의 시를 접한 것은 신조협려에 나온것이다. 양과가 소용녀와 자신의 처지를 촛불에 비유할 때, 황약사가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읊고 서재에 걸어둔 대련을 떠올리는 부분에 나오는 시이다.
“봄 누에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실이 다하고, (春蠶到死絲方盡) 촛불은 제 몸을 다 살라서야 눈물을 그치네. (燭炬成灰淚始干)”
이 구절은 후대의 시나 문학 작품에서도 종종 인용될 뿐만아니라 봄누에와 촛불이라는 단어에 애틋한 서사를 부여한 시이기도 하다.그 나라에서는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어서 현대에도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라고 한다. 해석및 참고는 출처를 참고해주세요.

秋扇 第8

凉飇奪炎熱 시원한 바람이 더위 빼앗아 가면

주자서가 눈을 떴을 때, 침상에 고개를 괴고 자고 있는 온객행의 얼굴이 보였다. 주자서는 혹시나 또 꿈인가 싶어서 온객행의 뺨을 쓸어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눈을 뜨지 않았다. 주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워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의 한숨소리에 온객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온객행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 나부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는 사람….’ 강주에서 동정호까지 장강을 따라 가면 사흘이 걸린다. 동정호에서 포양호까지 말을 달리면 하루면 도착이다. 어떻게 해도 멀기만 했던 장강의 물줄기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정말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황궁에서는 주첩여를 찾고 있을까? 육궁에서 후궁이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많지는 않았으나 없지도 않았다. 부태후는 드디어 눈엣가시가 사라졌다고 생각할까? 주자서는 신세를 한탄하느라 온객행이 눈을 뜬 줄도 몰랐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무슨 생각해?”
주자서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공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호칭에 눈썹이 축 처졌다. 주자서는 괜히 미안해서 눈썹을 손으로 쓸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배시시 웃었다. 주자서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온객행의 얼굴을 마주보고 부스스 웃어버렸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서,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아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이불을 주자서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주자서는 침상 곁에 놓인 화로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말했다.
“노온, 추운데 왜 여기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붙어 앉아 말했다.
“보고싶어서… 아서가 보고싶어서.”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꿈에서까지 제가 보고 싶으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주자서 쪽으로 기대며 말했다.
“응. 계속 보고싶어. 아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여기 있어.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보였던 추태가 떠올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부몽이 간단한 음식을 가지고 객실로 들어왔다. 나부몽은 침상에 나란히 앉아 졸고 있는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했다. 이미 다 꺼진 화로와 등롱을 보고 작게 한숨 쉰 나부몽은 탁자에 찬합을 내려놓고 부산을 떨었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화로에 탄을 채워 넣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몽. 언제 왔어?”
나부몽은 얼른 화로에 찻물을 올려놓고 탁자에 찬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탁자로 가서 찬합을 열어보았다. 주서도 온객행이 일어나는 기척에 금방 눈을 떴다. 온객행은 벗어 놓았던 장포를 걸치고 주서의 환복시중을 들었다. 주서가 작은 목소리로 거절을 했고, 온객행은 주서의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의 몸 이곳 저곳을 더듬으며 시중을 들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이 다른 사람에게 졸라대며 귀찮게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평소 타인에게 별로 큰 관심이 없는 온객행은 주서에게서 뭘 보고 있는 걸까?

온객행이 주서에게 골라 입히는 옷은 원래는 온객행의 옷이다. 계절별로 명절별로 매해 새로 짓는 옷은 온객행이 입을 때도 있고, 한번도 입지 않을 때도 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온객행의 취향에 맞게 색깔도 소재도 다양하다. 주서는 온객행이 골라준 밝은 벽색(碧色)옷을 입었다. 언젠가 온객행이 너무 수수해서 입지 않겠다고 했던 무늬 없는 옷이다. 온객행은 자꾸만 흐트러지는 주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서가 똑바로 몸을 세우면 온객행보다 한 치(약 3cm)정도 작다. 살짝 고개를 숙이면 눈이 마주치고 귓가에 입을 가져가 무언가를 속삭이기 딱 알맞다. 온객행은 주서의 등 뒤에 서서 요대에 말려 들어간 장포를 정리하고 허리를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서는 벽색이랑 잘 어울려.”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주서의 목덜미와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객행은 주서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서 주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아서는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
온객행의 말에 차를 준비하고 있던 나부몽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온객행은 주서를 탁자로 데려가 앉히고 찬합을 열어 음식을 꺼냈다. 갓 내린 찻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나부몽이 온객행을 도왔다. 나부몽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온객행이 주서를 희롱하는 것을 구경했다.

다 먹은 찬합을 정리해서 나부몽이 객실에서 나갔다. 금방 선장과 이주의 행수(行首)가 기별했다. 온객행은 그들을 방 안으로 들이는 대신 자신이 장지문을 열고 나갔다. 온객행은 주서를 혼자 객실에 두고 싶지 않아서 나부몽이 돌아 올때까지 객실 앞에 있다가 주서를 부탁하고 갑판으로 향했다. 나부몽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주서는 창문을 조금 열고 낭수의 물줄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부몽은 혹시 주서가 한증으로 또 앓아 누울까 걱정이 되어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고 화로에 탄을 조금 더 채워 넣었다. 주서는 나부몽의 한숨소리에 창문을 닫고 평상에 가서 앉았다. 나부몽은 그래도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주서를 두루두루 자세히 보며 상태를 살폈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남이 보기에 조금 민망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배에서 온객행을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부몽은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강주는 처음이십니까?”
주서는 나부몽의 질문을 듣고서도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부몽이 힐끔 주서를 보자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이 말했다.
“촉경에는 왜 가는 줄 아십니까?”
주서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나부몽은 끓고 있는 찻물을 찻주전자에 옮겨 담고 주서에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혼약자를 데리러 갑니다.”
나부몽이 다시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뿐 별말 하지 않았다. 주서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묻지 않으니 나부몽 역시 답해줄 수 없다.

강주로 향하는 내내 주서는 전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 일어나 앉아 있는 시간도 길었고 거동하는 것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온객행은 주서를 데리고 배의 이곳 저곳을 다녔다. 실은 짐들의 대부분은 관중에서 나는 특산물로 파촉에서는 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온여옥이 온객행을 촉경으로 보낸 이유는 촉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조위녕을 데려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파촉에 주문해둔 혼례물품을 공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주문 물품의 대금을 돈이 아닌 물건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파촉은 예로부터 비단이 유명했기 때문에 혼례복부터 예단과 폐물로 사용할 곳이 많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확인목록에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서 마음이 바빠졌다. 주서는 전과 다르게 온객행을 찾거나 온객행에게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온객행만 더 애가 닳아서 틈만 나면 주서에게 몸을 붙였다. 온객행의 손은 항상 주서의 몸 어디인가에 붙어 있었다. 지금도 차를 마시는 주서의 등허리를 쓸고 있는 온객행의 손이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보고 있는 나부몽이 민망했다. 주서도 나부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몸을 이리저리 틀어 보았지만 온객행은 불편하냐며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품에 안았다. 또 품에 안았다. 주서는 전과 달리 온객행과 거리를 두고 싶은 것 같았다. 눈만 마주치면 들러붙어 오는 온객행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고민하는 기색이다. 주서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거절과 거절을 거듭해야만 그제야 온객행은 주서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나부몽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온객행이 눈치를 주면 객실밖으로 쫓겨났다.

갑판 난간에 기대어 저 멀리 보이는 강주를 보고 있던 나부몽에게 선장이 다가와 물었다.
“셋째공자의 손님은 대체 누굽니까?”
나부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왜 궁금하시오?”
선장이 말했다.
“여인입니까? 사내입니까?”
나부몽은 선장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선장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선장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몸짓도 그렇고 말도 잘 안하고 입은 옷도….”
나부몽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해보았다. 자기 스스로도 몇 번이나 주서의 몸짓이 여인 같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선장을 나무라기도 난처했다. 나부몽은 목을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냥 다물어버렸다. 선장이 답답한지 나부몽에게 말했다.
“누구인지는 상관없으니 여인인지 사내인지나 말해보시오.”
나부몽은 선장을 빤히 보다가 다시 시선을 강주로 던지며 말했다.
“셋째공자께 물으시오.”
선장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신의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온가의 셋째공자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온객행의 부를 시샘했던 귀족집 자제의 가문이 갑자기 쇠하여 유배를 가거나 장안에 다니던 서원에서 온객행을 괴롭히던 학자들이 하나둘 좌천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온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꽤 높은 벼슬에 있는 첫째공자나 둘째공자보다 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셋째공자를 더 무서워했다. 나부몽이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시오. 내 기억으로 셋째공자께 미움을 샀던 이중에 편히 살고 있는 이는 없으니.”
선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던 선원들에게 정박(碇泊)할 준비를 하게 했다.

강주는 장강의 여러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 포구가 굉장히 컸다. 온객행은 배를 내리기 전에 물품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화물을 싣는 하갑판으로 내려갔다. 주서는 온객행 옆에 서서 배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배가 선창에 다리를 내릴 때까지 온객행은 이주의 행수와 장부를 보며 싣고 온 물건들에 대한 시세에 대해 대화했다. 해가 지기 전에 배가 강주에 닿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귀중한 물품이 대부분인 상단의 물건을 하역(荷役)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하루 더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강주의 행수가 보낸 호위와 아침에 하역을 도울 하인들로 조금은 한산했던 배가 북적북적했다. 이주와 강주의 행수에게 상단의 일을 일임하고 온가주에게 받았던 물품 목록을 확인한 온객행이 서둘러 객실로 향했다. 온객행은 너무 오래 주서를 혼자 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주에 닿았으니 이제 온객행을 알아보는 이들이 적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서와 함께 강주의 시내를 돌아볼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온객행이 객실로 들어오자 나부몽과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탁자로 다가가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아서! 나 보고 싶었어? 내일은 강주를 둘러보자.”
나부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유가 있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서의 옆자리에 앉아 주서가 마시던 찻잔을 빼앗아 입을 축이고 말했다.
“여유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 장강에 닿았으니 노(櫓)꾼이라도 부르지 뭐.”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요기는 하셨습니까? 저녁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아서. 저녁은 먹었어?”
주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아직 안먹었는데…. 혼자 먹기 싫으니까 아서가 도와줘.”
온객행의 말에 주서는 역시 대답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부몽은 인사도 하지 않고 장지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배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일하는 것을 보고 그가 실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 실감했다. 주자서를 보살펴주는 온객행과 상단의 일을 하는 온객행은 주자서가 알고 있는 감각과는 조금 달라서 낯설기까지 했다. 주자서는 혹시나 방해가 될까 객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온객행은 주자서를 떼어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나부몽이 아닌 다른 호위를 두어 주자서를 속박하려고 하지는 않아서 계속 온객행 곁에 있었다. 정박을 하고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늘 밤도 배에서 머무를 것 같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곁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주자서를 확실하게 불편하게 했지만 주자서가 머릿속을 헤매고 있을 때, 그를 다독이고 붙잡아준 것 역시 온객행이었다. 온객행의 옷깃에 얼굴을 묻고 잘못을 고백했던 것이 생각났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했던 말을 모두 들었을까? 주자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온객행은 뭐라고 말할까? 그러다 벌써 몇번이나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주자서의 나약한 마음이 온객행에게 매달리고 싶어했다. 혼약자를 데리러 간다고 한다. 관을 했으니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온객행이 혼례를 치르고 나면 주자서는 어디든 갈 수 있을까? 언제쯤 온객행의 흥미가 떨어질까? 혼례를 치르고 나면 주자서를 놓아줄까? 주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달리고도 싶었다. 부질없고 순진한 주자서가 되어 온객행에게 매달리고 의지하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고도 한참 동안 주자서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어 꿈속을 헤맸다. 주서를 좋아한다고 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침상에서 주자서에게 올라타 그의 몸을 만지던 온객행이 떠올랐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다 온객행의 연심이 주자서를 향하게 되었을까? 주자서는 다 부서지고 망가진 자신을 좋다고 하는 온객행이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 뺨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손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노온….”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주자서의 입술에 닿았다. 주자서는 ‘노온’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계속 입을 맞추겠다는 온객행의 맹랑한 엄포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따뜻했던 온객행의 품이 그리워서 말했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4)
그리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잡아 얼굴을 묻었다. 온객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서남풍 불어오길 기다린다오.(3)
주자서는 눈을 떠서 방금 그 말을 한 것이 정말 온객행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고단하여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나부몽이 아침 일찍 온객행을 깨우러 객실에 들어왔다. 평상을 보았으나 온객행은 없었다. 나부몽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침상을 보았다. 침상 곁에 엎어져 주서를 바라보고 잠든 온객행을 보고 나부몽은 헛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이 옷걸이에 걸어 놓은 장포를 들고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말했다.
“공자. 일어나세요. 곧 하역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았다.
“벌써?”
나부몽은 가져온 장포를 온객행에게 둘러주며 침상 위에 맞잡은 온객행과 주서의 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통금이 막 풀렸습니다. 가서 장부만 맞춰 보시면 됩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맞잡은 손을 쓸어 어루만지다 주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부몽이 얼굴을 구기는 것을 본 온객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아서를 잘 보고 있어.”
온객행은 주서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일어나며 말했다.
“보기만 해. 만지지 마.”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내려야 할 짐이 많았기 때문에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주서는 간단히 죽으로 요기를 하고 온객행이 골라 놓은 옷을 입었다. 나부몽은 혼자 할 수 있다 하기에 주서가 혼자 옷 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답답해서 다가가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나부몽이 주서의 요대에 구겨진 앞섶을 정리하는데 온객행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서!”
가깝게 붙어 서있는 나부몽과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온객행이 나부몽과 주서를 떨어뜨려놓고 말했다.
“부몽!”
나부몽은 얼른 찻잔에 차를 따라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배에서 내리십니까? 강주를 둘러보신다고요?”
나부몽의 말에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서. 강주는 처음이야?”
온객행은 주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객실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으니까 강주를 구경하자.”
온객행과 주서는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내렸다.

온객행은 강주에 도착해서 신의상단의 지점과 점포들을 둘러보며 주서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장안과 달리 온객행을 아는 이가 없어서 주서에게 더 친밀하게 굴었을 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폐물로 줄 여인의 장신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주서에게 말했다.
“아서. 이것 좀 봐.”
장인이 미리 주문해둔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온객행과 주서는 점포 안에 비치된 금은보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구경했다. 온객행이 옥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보며 말했다.
“포감(蒲甘; 미얀마)의 비취는 색이 정말 맑고 투명한 것 같아. 이렇게 선명한 자색의 자옥(紫玉)은 처음 봐.”
주서가 온객행이 가리킨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비단끈으로 묶은 주서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주서의 손을 잡고 옥으로 만든 관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가서 말했다.
“아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해.”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살포시 웃더니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말없이 온객행이 이것저것 고르는 것을 보고 있던 주서는 한 켠에 놓인 금으로 만든 각선(却扇)을 보았다. 혼례때 신부가 얼굴을 가리는 부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부채를 보고 있던 주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노온. 밖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온객행이 주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안돼. 아서는 보석에는 흥미가 없구나.”
주서는 대답없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서의 요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요패라도 하나 사 줄게.”
주서는 고개를 흔들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온객행은 그게 또 서운하고 아쉬웠다. 곧 장인이 들어와 온가에서 주문한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가주에게 받은 폐물목록이 적힌 장부를 펼쳐 장인이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주서는 옆에 앉아 온객행이 확인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다. 한 책이 넘는 장부를 모두 확인하는 동안 주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장인과 잠시 물건을 확인하러 가는 척하면서 주서에게 줄 하얀 벽옥으로 만든 비녀를 하나 샀다. 마음 같아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진귀한 장신구를 온객행의 취향에 맞춰 주문하고 싶었지만 주서는 뭘 주어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가장 수수하고 단아한 것으로 골랐다. ‘주서는 관례를 올렸을까? 비녀만 살 게 아니라 관을 샀어야 할까?’ 온객행은 검게 옻칠한 상자 속에 비녀를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품속에 비녀가 든 상자를 넣었다. 그 이후로도 비단을 주문한 포목점에 들렸다. 강주뿐만 아니라 가주(嘉州)에도 주문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주에 도착하면 문수(汶水)를 따라 촉경으로 갈 예정이다. 온여옥은 온객행에게 촉경에서 조위녕을 데리고 장안으로 오는 것과 온상의 혼례까지 얌전히 있을 것을 조건으로 일엽선을 온객행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온상의 혼례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여유롭게 장안으로 돌아가서 일엽선을 받으면 배를 타고 주서와 황하를 유람할 생각이다. 온객행은 머무는 객잔으로 향하며 말했다.
“혼례는 내년 여월(餘月; 4월)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싶어.”
뒤에 서있던 나부몽이 말했다.
“장안으로 돌아 가실 때는 육로로 가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몰라. 조가에게 물어봐야겠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한 온객행 일행은 각자의 객실로 돌아갔다. 온객행이 주서의 객실에 화로를 들고 들어가며 말했다.
“아서. 이곳은 남쪽이라 화로를 내놓지 않았나 봐.”
주서는 온객행이 들고 들어온 화로에 손을 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화로에 찻물을 올리고 행장함(行裝函)에서 검은색 피풍의를 꺼내 주서에게 둘러주었다.
“아서. 춥지? 밤바람은 차다.”
그리고 주서가 열어 놓은 창문을 닫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가져온 화로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이 끓는 찻주전자를 구경했다. 온객행이 다가가 주서를 일으켜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아서. 힘들어? 피곤해? 잘까?”
주서는 한동안 찻주전자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노온께서도 가서 쉬십시오.”
온객행이 차를 내리며 말했다.
“동정호에서 멀지 않아서 아주 좋은 흑차를 얻었어. 아서는 숙차를 좋아하지?”
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이 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다가가 등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서?”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노온께서도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가서 쉬세요.”
주서의 걱정이 기꺼워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응. 아서. 오늘은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아서도 피곤해?”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놓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객실을 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주서는 계속해서 온객행을 밀어냈다. 온객행은 주서가 잠이 들면 다시 돌아올 요량으로 일단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객실을 나가면서 주서의 객실 장지문과 창문에 호위를 두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혼례를 위한 물품을 고르는 것이 기쁘면서도 쓸쓸했다. 조가와 맺는 척분이니 온객행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루어질 혼인이다. 온객행이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주자서는 어서 온객행의 흥미가 떨어져 나가기를 주자서를 향한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밀어내도 밀리지 않는다. 밀리지 않으면 당기는 것도 방법이다. 전부 줘 버리면 금방 질려버릴까? 주자서는 장포와 중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 구리로 만든 면경 앞에 앉았다. 어두워진 실내에 면경 속 아른거리는 모습은 가냘프고 볼품없어서 주자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자서는 벌써 마음 속으로 온객행을 놓아주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 다짐은 온객행의 얼굴을 볼때마다 무너지고 무뎌진다. 주자서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이번엔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속을 헤맨다. 처음에는 그냥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정말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당장 옆에서 보고 만질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온객행이 원하는 대로 휘둘렸으면 좋았을까? 주자서는 익숙한 한숨을 내쉬었다. 뺨에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주자서는 또 같은 꿈을 꾼다.
“노온….”
주자서는 뺨을 어루만지는 손에 얼굴을 묻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온….”
주자서의 뺨에 닿는 숨이 간지럽다. 뺨에 느껴지는 이 감촉은 아마도 입술인 것 같다. 주자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묻은 온객행의 손으로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노온….”

온객행은 손에 입을 맞추는 주서가 사랑스러워서 팔을 둘러 주서를 끌어안았다.
“아서. 정말 좋아해.”
주서의 숨소리는 금방 평온해졌다. 온객행의 심장이 주서의 입술이 닿은 손바닥에서 뛰는 것 같았다. 잠결에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침상 위로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주서를 끌어안고 자고 있는 모습을 온객행을 깨우러 온 나부몽이 보았다. 나부몽은 온객행을 어떻게 깨워야 하나 침상 앞에 서서 고민하고 있다가 주서와 눈이 마주쳤다. 나부몽은 주서를 한참 보고 있다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기침하셨습니까?”
나부몽의 목소리에 주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자고 있던 온객행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직… 무슨 일이야?”
온객행의 잠긴 목소리에 주서가 몸을 움츠리며 온객행을 밀어냈다. 주서의 바르작대는 몸짓에 온객행이 주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윽’ 하는 주서의 신음소리에 온객행의 눈이 반짝 떠졌다. 고개를 돌려 침상을 내려보고 있는 나부몽을 보고 온객행이 말했다.
“어… 왜?”
나부몽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가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이 찾아왔습니다. 장안에서 전령을 보냈습니다. 주문 목록을….”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부몽. 고마워. 금방 나갈게.”
나부몽은 온객행의 말을 듣고 별말 없이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끌어안고 있던 주서를 놓아주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주서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아서. 그러니까….”
주서가 침상아래 있는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잠결에 잠자리를 착각하셨나봅니다.”
온객행이 주서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주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옷을 입었다. 온객행도 일어나 주서를 따라가며 말했다.
“이거는… 내가….”
주서는 말없이 묵묵히 중의를 입었다. 온객행이 주서를 멈추고 말했다.
“아서. 아니야 오늘은 이 옷 말고….”
온객행이 회백색의 얇은 무명 옷을 꺼내 주서에게 입히며 말했다.
“강주는 아직 날이 차지 않으니까….”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의 시중을 받아주었다. 온객행은 내의가 다비치는 얇은 중의를 입히고 요대를 매준 뒤 조금 두꺼운 장포를 입혔다. 온객행이 옷걸이에 걸어 둔 피풍의로 손짓하며 말했다.
“추우면 피풍의를 두르면 되니까….”
주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가 옷을 갈아입는 온객행의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온객행은 어제 사두었던 옥비녀가 떠올라서 주서를 면경 앞에 앉혔다.

지금 그리고 그때

Now and then Beatles


I know it's true
It's all because of you
And if I make it through
It's all because of you

And now and then (Ah-ah)
If we must start again (Ah-ah)
Well, we will know for sure
That I love you

I don't wanna lose you, oh no, no
Abuse you or confuse you
Oh no, no, sweet darlin'
But if you have to go (Go), away (Ah-ah-ah)
If you have to go, well you the reason...

Now (Now) and then (And then)
I miss you (I miss you)
Oh, now (Now) and then (And then)
I want you to return to me
'Til you return to me

I know it's true
It's all because of you
And if you go away
I know you could never stay

Now (Now) and then (And then)
I miss you (I miss you)
Oh, now (Now) and then (And then)
I want you to return to me
Now (Now) and then (And then)
I miss you (I miss you)
Oh, now (Now) and then (And then)
I want you to return to me
Now (Now) and then (And then)

내 살아 생전 비틀즈 신곡이 나오는걸 보고 죽을 줄은 몰랐지.. 살아있길 잘했다.

秋扇 第7

常恐秋節至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철 이르러

온객행은 들썩이는 주서의 몸을 감싸 안고 그를 달래 보려고 했다. 울다가 혼절이라도 할까 온객행은 계속해서 주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서. 진정해. 괜찮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온객행은 한참을 달래느라 객실의 등롱이 꺼지는 것도 몰랐다. 주서가 조금 진정되었을 때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무례했지? 미안해.”
주서는 대답없이 온객행의 앞섶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온객행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아서. 나는 신의상단 셋째아들 온객행이야. 나는 형제들 중에 제일 못나서 벼슬도 없고, 아마 상단을 잇지도 못할 거야.”
주서는 조용히 온객행이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황실이니 귀족이니 그런 것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
온객행의 말에 주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그 몸짓이 반가워서 말했다.
“아서도 지위나 신분은 상관없지?”
온객행은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서를 좀더 가깝게 추슬러 안고 말했다.
“부친께서는 모친이 돌아가시고 조금 이상해지셨어.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었는데… 언제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뀌신걸까?”

신의상단은 주자서도 들어본 이름이다. 조황후의 당질과 혼약을 맺고 내전에 있는 모든 후궁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부태후와 조황후에게서 아무런 트집도 잡히지 않았던 것은 양도 양이었지만 부태후와 조황후의 취향을 적절히 맞추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첩여가 받은 선물은 후궁들이 모두 나누어 가지고 난 후에 남은 묵은 차와 아무도 원하지 않은 색깔의 비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주첩여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품질이 좋았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대단한 집의 자제였다. 그의 집에서 길을 잃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다. 귀동냥으로 들었던 신의상단의 재력이 사실이라면 온택에서 별탈없이 빠져나온 것 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금방 다시 잡혔지만.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축축해진 온객행의 앞섶을 놓고 주자서는 몸을 바로 하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품에서 떨어지는 주자서를 놓아주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주자서는 자신의 뺨에 닿은 온객행의 손에 얼굴을 잠시 기댔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손을 들어 축축해진 온객행의 옷깃을 쓸었다. 잘생긴 얼굴과 잘 어울리는 푸른색 비단. 머리를 장식한 은으로 만든 관 역시 아주 잘 어울렸다. 주자서도 한 때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다. 출신 상관없이 능력을 가장 중요시한 부친 덕분에 주자서는 서출임에도 다른 형제자매와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주자서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다. 황궁에서 매일 원치 않아도 봐야 했던 면경 속의 서부인은 주자서가 아니었다. 창백하게 야위고 구부정한 여인은 빈말로라도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자서는 면경 속에서 보았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온객행이 보고 있을 까봐 부끄러워졌다.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달 모양의 부채로는 부끄러움을 다 가리지 못하니….(3)
그러다 주자서는 여태 온객행에게 보인 추태가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서남풍 불어오길 기다린다오.(3)
주자서는 다정한 온객행의 답변에 자기도 모르게 온객행의 품에 들어가고 싶어 졌다. ‘서남풍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4)주자서는 온객행을 밀어내고 넙죽 엎드려 말했다.
“온공자께서 베푸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오나 저는 이미 혼인한 몸으로 온공자의 마음에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주자서는 그동안의 친절이 어쩌면 온객행이 주자서를 여인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온객행이 그동안 자신을 희롱한 것이라며 주자서의 멱살을 쥐어도 주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주자서의 행동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많았다. 매달리고 의지하는 무르고 멍청한 여인의 억지를 받아준 온객행은 어떻게 보면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온객행은 되려 미안하다며 몇차례나 주자서에게 사과했다.

주자서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온공자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온객행이 주자서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서. 무슨 소리야 아니야. 폐라니.”
주자서가 고집스럽게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자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는 나에게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았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휘두르기만 했는걸.”
주자서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온공자. 주서는 저의….”
온객행이 주자서의 양 뺨을 손으로 잡았다. 주자서가 당황하여 말을 멈춘 사이 온객행이 입을 맞춰왔다. 주자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밀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온공자! 저는 여인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여인이라니? 아서가 왜 여인이야?”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은 다시 얼굴을 붙여 주자서에게 입술을 붙이며 말했다.
“노온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계속 할 거야.”
주자서는 손을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온공자! 잠시만요. 잠시만.”
온객행은 주자서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술을 붙여왔다. 주자서는 조금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리쳤다.
“노온!”
온객행은 주자서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과 거리를 조금 벌리고 말했다.
“노온. 잠시만요.”
온객행은 소란으로 바닥에 떨어진 피풍의를 털어 주자서에게 둘러주고 말했다.
“아서. 내가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주자서는 눈썹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신의상단의….”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대를 잇거나 상단을 잇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런데 아서는 벌써 혼인을 했어?”
주자서는 조금 멍한 얼굴로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의 눈썹이 축 쳐져서 울상을 하고 주자서에게 물었다.
“누구랑?”
주자서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객행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죽었어?”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온객행이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상관없네.”
주자서는 웃는 온객행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에 고개를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 주자서는 눈썹을 찌푸리고 온객행의 뺨을 꼬집었다. 온객행이 깜짝 놀라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야! 아서!”
주자서는 소매를 걷어 온객행에게 팔을 내밀고 말했다.
“꼬집어 보시오.”
온객행은 자신의 뺨을 잡고 주자서가 내민 팔을 한참 보더니 다시 소매를 내려주고 주자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서. 심통이 나서 그래?”

주서가 직접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보인 팔뚝은 온객행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하얗고 가늘다. 온객행은 혹여나 잘못 만지면 부러질까 조심스럽게 소매를 내리고 주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혹시 화가 났는지 물었다. 주서는 그동안 보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를 정확히 바라보는 기색이 없던 눈동자에 광채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쩌면 그의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한쪽에 밀어 두었던 이불을 다시 펴서 주서를 눕히고 말했다.
“아서. 몸이 피곤해서 그래. 마차로 이동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잖아.”
주서는 온객행이 하는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객행?”
온객행은 주서가 부르는 이름이 좋아서 웃으며 말했다.
“응. 아서가 불러주니 더 좋다 그 이름.”
주서는 침상에 걸터앉은 온객행의 얼굴을 양손으로 더듬더니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그를 멈추며 말했다.
“아서! 이러지 마. 난 지금 엄청 참고 있단 말이야. 내가 아서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온객행의 말에 주서의 예쁜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온객행은 부스스 웃었다.

주서가 온객행에게 물었다.
“여기… 여기가 어디입니까?”
온객행은 주서를 다시 침상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피풍의까지 덮어주고 말했다.
“여긴 이주야. 우리 촉경에 가고 있잖아.”
주서는 고개를 숙이고 온객행이 한 말을 되새겼다.
“이주….”
온객행은 고개를 숙인 주서를 보고 있다가 탁자 위에 꺼진 등롱을 보았다. 밖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으로 주서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온객행은 신발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 전에 했던 것처럼 이불을 덮고 있는 주서를 끌어안고 자려는데 주서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다. 온객행은 주서의 머리에 고개를 기대고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서. 나 너무 졸려.”
주서는 한참 온객행의 품에서 바르작대다가 온객행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행동이 귀여워서 주서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주서를 가깝게 끌어안았다.

다음날 아침 주자서가 먼저 눈을 떴다. 푹 자고 일어나니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주자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온객행을 보았다.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에게 보였던 추태가 떠올라서 눈을 꼭 감고 ‘끙’하고 신음했다. 온객행이 정말로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주자서는 여태까지 죽음을 눈앞에 둔 죄인에서 행동거지가 수상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주자서도 딱히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했다. 그러다 여태 온객행에게 했던 매달리는 행동이 떠올라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주자서는 잠깐 자신이 베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로 뺨을 비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자서의 머리 위로 낮게 웃는 소리가 났다. 주자서는 이불을 슬쩍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온객행이 주자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서. 벌써 일어났어?”
주자서는 다정한 온객행의 아침 인사에 되려 죄스러워졌다. 온객행만은 속이고 싶지 않았는데 주자서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는 나찰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밖에서 하인이 기별을 하고 들어왔다. 주자서는 온객행과 한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부끄러워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나부몽이 탕약을 탁자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공자. 탕약입니다.”
나부몽의 목소리에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를 침상에 눕히고 말했다.
“부몽. 강주로 가는 배는 어떻게 됐어?”
나부몽이 꺼져가는 화로에 탄을 채우고 찻물을 올리며 말했다.
“신의상단의 화물선인데 크기가 커서 객실도 있습니다. 가주께서 준비하신 길이라 거절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서도 탕약 덕분인지 조금 회복한 것 같아. 오늘은 언제 출발해?”
나부몽이 객실의 창문을 열고 해를 가늠하더니 말했다.
“어서 준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위에 올려 놓은 탕약을 들고 주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서. 일어났어?”
나부몽은 침상 위에 이불더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이 나가는 나부몽에게 말했다.
“부몽. 간단히 요기할 것 좀 준비해줘. 배 위에서 먹을게.”
나부몽은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장지문을 닫았다.

온객행이 침상의 이불을 걷으며 말했다.
“아서. 일어나. 아무도 없어.”
주서는 눈을 뜨고 객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은 항상 하던대로 탕약을 한술 떠서 후후 불어 주서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주서는 온객행을 한참 보고 있다가 온객행이 들고 있는 탕약 그릇을 빼앗아 들고 후후 불어 마셨다. 온객행은 주서가 자의로 뭔가를 먹거나 마시는 것을 본적이 없는 터라 기뻐서 말했다.
“아서,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뭐든 말해 봐.”
주서는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온객행은 아쉬웠지만 더 말하지 않고 주서에게 입힐 옷을 골랐다. 온객행은 주로 밝은 색깔의 옷을 골라서 주서에게 입혔는데,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주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내의가 살짝 비치는 회색 중의를 보고 온객행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그런가? 조금 덥지 않아?”
그 사이 탕약을 모두 비운 주서는 침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온객행이 놀라서 주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서. 내가 도와 줄게. 그동안 계속 내가 신겨 줬잖아.”
주서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했다.
“이제… 이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온객행이 크게 당황하며 주서의 내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는데….”

주서는 온객행이 골라 놓은 옷이 걸린 병풍 쪽으로 이동하더니 온객행이 고른 옷을 보고 있다가 입기 시작했다. 온객행이 주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병풍으로 다가가자 주서가 다급하게 손을 내젓고 말했다.
“온공자!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가 어설프게 걸친 얇은 회색 중의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서. 아침부터 내 입맞춤을 원하는 거야?”
가까워진 거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주서가 손을 들어 다가오는 온객행을 밀며 말했다.
“노온. 노온!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온객행은 병풍에 걸려있는 장포를 둘러주고 소매를 정리해 주었다. 검은색 요대를 허리에 두르느라 온객행은 주서를 품에 안고 있었다. 등 뒤로 매듭을 짓고 앞으로 정리했다. 온객행이 주서의 앞섶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말했다.
“아서. 오늘은 조금 서둘러야 하니까.”
온객행의 시선에 들어온 주서의 목덜미와 뺨이 빨갛다. 온객행은 혈색이 좋아진 주서의 모습을 보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고 정욕이 일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 시선이 데이는 기분이다. 온객행은 저도 모르게 주서에게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주서는 온객행의 가슴에 가지런히 손을 올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노온. 서두르신다고….”
온객행은 아쉬워서 주서의 귓가에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응. 어서 가지 않으면 배를 놓칠지도 몰라.”

온객행은 정신이 있는 주서를 너무 오랜만에 마주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마차에 탈 때는 항상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온객행은 마차에 타자마자 자연스럽게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주서는 온객행의 행동에 조금 경직되기는 했지만 뭐라고 더 말하지는 않았다. 낭수의 포구는 물줄기의 시작점이라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의상단의 커다란 배가 포구를 차지하고 짐을 싣고 있었다. 선창에서 화물선으로 이어진 다리 위로 수레와 말이 보였다. 마차에서 내린 온객행에게 나부몽이 말했다.
“지금 선적을 하고 있어서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온객행이 마차에서 내리는 주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래? 강주(江州)로 먼저 간다고 했지?”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주에서 짐을 내리고 다시 짐을 싣고 장강을 따라 촉경으로 갑니다.”
온객행이 마차에서 내린 주서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같은 배로 가는가?”
나부몽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강주에서 싣는 짐은 많지 않아서 아마 아닐 겁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나부몽이 온객행과 주서를 배로 안내하며 말했다.
“이틀이면 도착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서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서 강주에는 가보았어?”
주서는 온객행이 한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낭수의 포구를 보았다.

온객행은 배에 타자마자 상갑판에서 선장을 만났다. 이번엔 주서도 곁에 두었다. 주서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낭수를 보았다. 강바람에 주서가 입은 옷이 휘날린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온객행은 나부몽에게 주서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명령을 했다. 나부몽은 하인을 시켜 여우털 피풍의를 가져오게 시켰다. 주서가 입은 옷은 나풀거려 예쁘기는 했지만 강바람을 맞기에는 얇아 보였다. 나부몽이 주서에게 피풍의를 둘러주자 주서가 거절하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나부몽은 주서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풍의를 둘러주며 말했다.
“한증이 있으니 몸을 따뜻하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서가 피풍의를 여미는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나부몽은 전보다 힘이 들어간 주서의 목소리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나부몽이 주서의 곁에 서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는 분이시니 조금만 더 어울려 주십시오.”
주서가 나부몽을 힐끔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과 온객행이 상단의 거래 물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부몽은 차를 내렸고 주서는 그 옆에 앉아 점점 멀어지는 이주의 포구를 구경했다.

강바람이 세차다. 돛이 높게 올라가고 선원들이 배위로 올라와서 뱃일을 시작했다. 온객행은 나부몽을 힐끔 보더니 선장과 하던 대화를 잠시 멈추고 말했다.
“부몽. 아서랑 같이 객실로 가 있는 것이 좋겠어.”
온객행의 말을 들은 선장이 주서를 힐끔 쳐다봤다. 나부몽은 앉아 있는 주서를 부축해서 갑판아래 선미에 있는 객실로 이동했다. 온객행이 선장을 보고 다시 장부를 펼쳤다. 화물의 확인을 하인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온객행이 꼭 해야 할 일들을 얼추 마쳤다. 선원을 관리하고 배로 짐을 실어 나르는 것은 장안에서도 종종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없었다. 단지 조금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선원들이 힐끔힐끔 주서를 쳐다보는 것 정도다. 온객행은 빠르게 마무리하고 객실로 향했다. 선장은 온객행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였지만 온객행은 모르는 척하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온객행이 객실에 들어서자 세찬 강바람이 온객행의 뺨을 스쳤다. 주서가 창문을 열고 강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벌써 강물 끝에 해가 걸렸다. 나부몽이 객실의 등롱을 밝히며 온객행에게 인사했다.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다과만 드시고….”
나부몽이 객실을 나가며 말했다.
“저녁을 준비할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부몽. 고마워.”

온객행이 창밖을 보고 있는 주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서.”
주서는 고개만 돌려 어깨너머로 온객행을 힐끔 보고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주서에게 뒤로 다가가 안으며 말했다.
“왜 또 온공자야.”
주서는 어깨에 기댄 온객행의 고개를 피하며 말했다.
“노온! 노온.”
온객행은 아쉬워서 주서의 목 뒷덜미에 입을 맞췄다. 주서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귀여워 온객행은 웃었다. 주서는 고개를 돌려 장지문을 보고 말했다.
“호위하는 분은…?”
온객행이 주서의 허리를 잡고 말했다.
“밥을 먹어야지. 아서는 뭐 좀 먹었어?”
주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화로 쪽으로 향했다. 온객행은 주서의 피하는 기색을 읽고 조금 서운해졌다. 객실의 창문을 닫고 주서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아서. 갑자기 왜 그래?”
주서가 찻잔에 차를 따라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제가 뭘 말입니까?”
주서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입을 축인 온객행이 말했다.
“뭔가… 뭔가 달라. 전에는 좀 더… 아서는 좀 더….”

주서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로를 불쏘시개로 뒤적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은 주서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주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뭔가 전에는 좀 더 친밀했던 것 같은데… 아서….”
온객행은 멀어지려는 주서를 끌어당겨 허리를 안았다. 주서는 딱히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주 안지도 않았다. 온객행은 괜히 서운하여 주서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고 말했다.
“아서.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주서는 온객행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나부몽이 기별도 없이 장지문을 열고 들어와 탁자에 찬합을 올려 놓고 말했다.
“공자. 와서 요기하세요.”
주서는 당황하여 온객행의 팔을 잡아당겼다. 온객행이 웃으며 말했다.
“아서! 정말 왜 그래? 부몽에게는 한 침상에 있는 것도 여러 번 보였는데 왜 이제 와서 내외하는 거야?”
온객행의 말에 주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주서의 모습을 본 나부몽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뭘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십니까.”
주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동안 정말 폐가 많았습니다.”
나부몽은 다시 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한증에 좋은 약이 아니라 정신에 좋은 약인가 봅니다.”

주서는 전과 달리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잘 먹었다.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양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 전보다는 많이 먹었지만 보통 사람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다. 온객행은 끊임없이 주서에게 음식을 권했다. 온객행의 끈질긴 권유가 지겨웠는지 주서가 말했다.
“속을 게워 내는 것은 큰 일이라 더 먹고 싶지 않습니다.”
주서의 말을 들은 온객행은 놀라서 더는 음식을 권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탕약에 내장의 기를 보하는 약재를 추가했다. 온객행이 영견에 물을 묻혀 주서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아서. 나에게 좀 더 의지해도 좋아. 응?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손에 있는 영견을 빼앗아 협탁 위에 올려 놓고 대야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고 닦았다. 주서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노온. 저는 괜찮습니다.”
온객행은 주서를 빤히 보았다. 방금 씻어서 맑은 얼굴이 예뻐서 온객행은 웃으며 얼굴을 붙였다. 주서는 불편한 기색을 비치며 온객행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노온. 날이 늦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온객행이 주서의 허리춤을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아서, 벌써 피곤해?”
주서는 온객행에게 벗어나기 위해 조금 몸부림치다가 금방 포기하고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매우 피곤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서를 침상 쪽으로 끌고 갔다. 주서는 온객행을 멈추고 말했다.
“노온! 노온! 이 곳은 노온께서 지내시는 객실이니 저는 이만….”
온객행은 주서에게 얼굴을 붙이고 물었다.
“아서는 이만?”
주서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장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저는 하인들이 지내는 곳에서….”
온객행은 표정을 구기고 말했다.
“안돼. 아서는 벌써 두번이나 도망쳤잖아.”
주서는 온객행의 대답에 입을 달싹이다 다물어 버렸다. 온객행은 주서를 침상 근처에 세워놓고 피풍의를 벗겼다. 주서가 탈의하는 것을 돕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부몽이 말했다.
“공자께서 남을 돌보는 일에 재능이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온객행이 주서의 옷을 옷걸이에 걸고 말했다.
“남을 돌보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아서를 돌보는 일을 잘하는 거야.”
나부몽은 콧방귀를 끼더니 화로에 찻물을 올렸다. 온객행이 침대의 휘장을 걷더니 이불을 보고 말했다.
“부몽! 이주에서 산 이불을 어디 두었지?”
나부몽이 객실을 나가며 말했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온객행은 얼른 피풍의를 내의만 입고 있는 주서에게 둘러주고 화로 앞에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아서, 춥지는 않아?”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고 찻잔을 들어 방금 끓은 차를 마셨다. 온객행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서는 숙차를 좋아한다고 했지?”
주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가지고 들어온 이불을 침상 위에 깔았다. 주서를 데려다 신발을 벗기고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아서. 성급하게 굴지 않을게. 아서가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주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은 낮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주서의 눈썹을 쓸고 말했다.
“나는 아서가 아주 많이 좋으니까 아서도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주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좋아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온객행은 한참 고민하다가 화로에 탄을 채워 넣고 있던 나부몽을 슬쩍 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자꾸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온객행이 더 말하려고 하는데 나부몽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공자!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객실을 나갔다.

나부몽의 행동을 보고 있던 주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로 몸을 가리며 말했다.
“온공자. 저는… 저는….”
온객행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서! 아서! 아니야. 아서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주서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이요?”
온객행은 주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서의 뺨을 쓸고 말했다.
“응. 아서가 원하지 않는 것은 안 해.”
그리고 주서에게 입을 맞췄다. 주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부스스 웃고는 주서를 안고 말했다.
“아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리고는 주서의 목덜미에 또 입을 맞췄다. 주서는 뭔가 말할 것처럼 숨을 헐떡이다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온객행은 주서의 등허리를 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서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게.”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주서의 목덜미가 빨갛다. 온객행은 몸을 돌려 평상에 이불을 펴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잘 테니까 혹시라도 무서워지면 말해. 아서. 언제든지 부르면 갈게.”
온객행이 등롱불을 끄면서 보았던 주서의 표정은 부끄러운 듯 슬퍼 보여서 온객행은 한참 고민했다. 탁자에 있는 등롱을 마지막으로 객실에 어둠이 내려 앉았다. 온객행은 평상에 잠시 누워있다가 일정해진 주서의 숨소리를 듣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온객행의 시야에 보이는 주서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온객행은 주서에게 손을 뻗었다가 거둬드렸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사이로 온객행의 한탄이 나지막이 들렸다.
“어떻게 해야 아서가 나를 원할까?”

秋扇 第6

動搖微風發 서늘한 바람 일으킨다오.

주자서는 잠에서 깼다. 한참 전에 잠에서 깼지만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날은 아직 어두운지 시야가 어둡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때는 언제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주자서가 타고 있는 이 커다란 배는 주자서를 또 어떤 지옥으로 데려가는 걸까? 주자서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덮고 몸을 작게 말았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이불을 매만지는 손길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따뜻한 손이 이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서 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침상에 팔을 괴고 잠이든 온객행이 팔을 더듬어 이불을 찾았다. 벌써 계추월이라 했다. 고개를 돌려 화로를 보았다. 새하얀 잿빛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연약하다. 주자서는 덮고 있던 이불을 펴서 온객행에게 덮어주고 침상을 내려왔다. 조금 기다리니 어슴푸레하게 객실의 내부가 보였다. 등롱은 이미 다 타버렸는지 객실 안은 어둡다. 주자서는 화로 안에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탄을 채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허둥대고 서둘렀는지도 모르겠다. 객실을 나가는 장지문 근처를 찾다가 협탁 위에 놓여있던 소반을 떨어뜨렸다.

소반이 떨어지는 소리에 온객행이 일어났다. 온객행은 벌떡 일어나 침상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탁자 위에 놓여있는 등롱의 불을 밝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다가 밝아지는 시야에 조금 눈쌀을 찌푸렸다. 장지문 앞에 서 있는 주자서를 보고 온객행은 한달음에 다가와 주자서의 팔을 잡았다.
“아서! 어디가?”
조금 다급해 보이는 온객행의 모습에 주자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많은 위기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회피해왔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라며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더니 말했다.
“아서. 가지 마. 어디에 가려고… 나도 데려가.”
주자서가 어디에 가는지 묻는 이는 참으로 많았으나 데려가 달라는 이는 없었다. 주자서는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은, 온객행은 정말 주자서가 만들어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주자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마주 안고 말했다.
“제가 어디에 갈 줄 알고 데려 가라 하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고 말했다.
“어디든. 아서. 어디든 데려가. 극락이던 나락이던 아서가 가는 곳에 갈래.”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착하거든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합시다.(5)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싫어. 아서. 지금 나랑 여기 있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웃음이 났다. 부질없을 것 같던 이런 유치한 위안이 너무나 반가워서 웃었다. 그러다 온객행의 말처럼 지금 여기에 온객행과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답할 수 없는 것은 주자서의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침상으로 이끌었다.
“아서.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조금 더 쉬는 것이 좋겠어.”
온객행은 주자서 옆에 앉아서 주자서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온객행의 눈썹이 울상이 되는 것을 본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눈썹을 쓸었다.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괜찮아. 대신 싫은 것만 말해줘. 내가 아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주자서는 눈썹을 쓸던 손을 내려 온객행의 뺨을 만져보았다. 조금은 차가운 뺨. 보기 좋게 살이 차오른 뺨. 주자서는 그 뺨이 부러워서 쓸어보다가 손을 내렸다. 온객행의 뺨에서 내려온 주자서의 손도 온객행의 손에 잡혔다.

크고 따뜻한 손. 주자서는 고개를 숙여 잡힌 손을 보았다. 그러다 어디에 잡힌 것이 싫어서 조심스럽게 손을 놓았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침상 위에 잘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서. 내가 여기 있을게. 조금 더 자.”
주자서가 몸을 반쯤 일으켜 일어나며 말했다.
“노온. 저는 괜찮으니 가서 쉬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서랑 같이 있을래.”
주자서는 다 꺼진 화로를 보고 이불을 들추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그럼 추우니 이리로 오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으로 가서 등롱의 불을 껐다. 온객행은 다시 침상으로 돌아와 침상에 기대 앉아 이불째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이불을 들추는 주자서의 내의만 입은 몸을 보고 정욕이 끓었다. 그러다 서늘하고 가는 손목에 느껴졌던 미미하고 연약한 혈맥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로 가서 등롱을 껐다. 주서를 위해 꺼내 놓은 이불은 겨울에 덮는 이불이다. 솔직히 온객행은 춥다기보다 더웠다. 이불까지 모두 끌어안아도 주서는 한 품에 안긴다. 온객행은 그게 또 안타까워서 주서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주서는 품에 안겨 또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다가 잠들었다.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온객행은 주서의 마음이 자신과 같기를 바라며 주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침상에 기대 잠이든 온객행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옹성에 도착했습니다. 이주(利州)까지 마차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나부몽이 시선을 내려 온객행의 품에 있는 주서를 보고 말했다.
“이주에서 촉경까지 물길로 가는데 괜찮을까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두르고 나부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짓으로 나부몽을 내쫓았다. 나부몽은 표정을 구기고는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찬합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짐을 내리느라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중천이 되기 전에는 출발하셔야 합니다.”
온객행은 또 고개만 끄덕이고 턱짓했다.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을 흘겨보고 말없이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주서를 추슬러 안으려다 이불이 조금 흘러내렸다. 주서는 흘러내린 이불때문에 추웠는지 온객행 쪽으로 몸을 더 웅크렸다.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날이 더 밝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때 온객행은 어쩔 수 없이 주서를 흔들어 깨웠다.
“아서.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눈을 살짝 떴다.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뜬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은 침상에 있던 이불을 주서에게 둘러주고 일어나 탁자의 찬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찬합의 음식은 모두 식어 차가웠다. 온객행은 차가운 음식을 한증이 있는 주서에게 먹이고 싶지 않아서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주서의 옷을 침상으로 가져갔다. 주서의 환복 시중을 다 들고 나서 여우털 피풍의를 둘러 준 뒤에 객실을 나왔다. 나부몽이 선창에서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아직 오시가 되지 않았으니 한시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마차는 어디에서 출발하지?”
나부몽이 답했다.
“옹성 남문으로 나가 천태산(天台山)을 넘어 이주로 향합니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물었다.
“아서, 배고프지? 간단히 요기하고 마차로 이동할건데 괜찮아?”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의 소매만 꼭 붙잡았다.

옹성을 나와 마차를 타고 이동한지 얼마 안돼서 금방 날이 저물었다. 산길이었기 때문에 평소 날이 어두워지면 금방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는 길이다. 온객행은 이주로 향하는 길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허름한 객잔에서 하룻밤 머무르기로 했다. 객실도 나뉘어 있지 않은 아주 작은 객잔이었는데 다행히 손님이 없어 온객행의 일행이 머무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준비해준 귀한 식재료의 음식보다 소박하고 담백한 음식을 조금 더 잘 먹었다. 온객행은 잘 먹는 주서가 예뻐서 주서의 그릇에 이것 저것 음식을 올려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부몽이 말했다.
“공자님께서도 어서 드시지요. 내일 아침에는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할 예정이니 일찍 주무세요.”
온객행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그리 서둘러서 무엇 하는가?”
나부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나갔다.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앉아서 느긋하게 밥을 먹고 함께 가는 호위와 하인들에게 주서를 소개시켜주고 나서야 객실로 향했다. 객실이라기 보다는 그냥 침상이 있는 방이다.

온객행은 주서가 두르고 있는 피풍의를 벗겨 침상 위에 두고 이불을 폈다. 주서가 신발을 벗는 것을 돕고 침상에 눕는 것까지 도운 온객행은 피풍의를 다시 펴서 주서의 몸에 덮어주었다.
“아서. 방이 작아서 화로를 들일 수 없어. 춥지는 않지?”
주서는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하자 주서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오랜만에 들은 주서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다시 침상으로 다가가 걸터앉으며 말했다.
“응. 아서. 왜?”
주서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주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아서.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있을까?”
주서는 말없이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마음이 울렁거려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방안은 조용해서 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혹시나 쿵쿵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부끄러워졌다. 주서가 말했다.
“노온. 가지마.”

온객행은 주서의 행동이 사랑스러워서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아서. 나는 아무데도 안가. 걱정 마.”
주서는 양팔을 들어 온객행을 마주 안고 온객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온. 여기 있어.”
온객행이 답했다.
“응. 아서. 나 여기 있어.”
주서는 고단했는지 금방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잠이 든 주서를 다시 침상에 잘 눕히고 온객행은 그의 뺨을 쓸었다. 그러다 다시 손목을 들어 맥을 짚었다. 조금 나아졌을까? 온객행의 의술로 알 수는 없으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잘 잡히는 혈맥이 반가웠다. 온객행은 조금 망설이다 신발을 벗고 침상 위에 올랐다. 같은 이불을 덮는 것은 부끄러워서 객잔의 얇은 이불을 잘 덮어주고 피풍의를 나누어 덮었다. 침상이 조금은 작을지도 모르겠다. 주서와 더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는 구실이면 조금 불편한 잠자리도 나쁘지 않다. 온객행은 모로 누워서 주서의 몸에 팔을 둘렀다. 일정한 주서의 숨소리를 들으며 온객행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아주 이른 시간에 온객행의 일행은 길채비를 시작했다. 온객행은 먼저 일어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주서에게 옷을 입히고 시중을 들었다. 그런 온객행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코웃음을 쳤다.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의 곁에 달라붙어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피곤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서를 먼저 마차에 실어 놓고 온객행은 시장이 있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면 비단 이불을 한 채 사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객잔에 대금을 치르고 다시 길을 출발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산 끝에 떠오르는 해가 걸려 있었다. 나부몽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어제 어디서 주무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휙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그건 왜 물어?”
나부몽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두 분이 같이 계시면 번을 한군데만 서면 되지 않습니까?”
온객행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부몽을 한참 본 다음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이주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산길이었는데 가는 길에 낭수의 발원지가 있다. 낭수의 발원지를 조금 지나면 배를 띄울 수 있기 때문에 온객행은 배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주서를 마차 안에 잘 눕혀 놓고 온객행이 마차 밖으로 나와 나부몽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 뱃길로 갈 수 있을까?”
나부몽이 말을 몰며 말했다.
“멀지는 않은데 짐을 다 가지고 탈 수 있을만한 큰 배는 띄우지 못 할 겁니다.”
온객행이 풍경을 구경하며 말했다.
“그래?”
나부몽이 마차의 내부를 힐끔 보고 말했다.
“이제 침수도 같이 드시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입니까?”
온객행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것 아니야.”
나부몽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것이 무엇입니까?”
온객행이 팔을 들어 턱을 괴고 말했다.
“아서는 나를 좋아할까? 모르겠어.”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마음도 확인하지 않고 몸부터 취하셨습니까?”
온객행은 놀라서 바로 앉아 나부몽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헛소리! 미쳤어? 취하긴 뭘 취해!”
온객행은 나부몽을 한참 흘겨보다가 다시 휘장을 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자서는 마차에 실려 어디로 인가 가고 있다. 정신이 들때마다 입은 옷을 확인했다. 언제는 온객행이 있었고, 또 언제는 없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사라질까 봐 온객행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의 소매를 만지고 있으면 온전히 혼자인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이 길의 끝에 목적지에 닿으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까? 매달리고 의지하는 무르고 멍청한 중생에게 어떤 형벌을 선고할까? 주자서는 몸이 너무 고달파서 오래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주자서는 또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악몽을 꿀까? 혹여나 꿈에 온객행이 나온다면 어쩌면 그 꿈은 악몽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같은 생각을 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주자서는 생각했다. ‘죄를 짓고자 그리 한 것이 아니에요.’ 어줍잖은 변명이라는 것은 주자서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들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들켰으면 관동에 전쟁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황실을 기만한 죄는 구족을 멸한다 했다.

주자서가 입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궁에 피바람이 불었다. 선황의 황후와 귀비의 싸움으로 황실은 선황의 건강이 나빠지기 전부터 흉흉했다. 그런 사정을 알 수 없는 주자서는 그럴듯한 뒷배를 가졌음에도 황후와 귀비 모두의 눈총을 샀다. 결국 황후와 귀비 모두 부태후에 의해 숙청당하고 부태후는 황실 최고 자리에 군림했다. 지금 황제자리에 앉아 있는 유흔도 결국 부태후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아름답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바느질도 제대로 못하고 여인이 하는 일은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주자서는 부태후에게 눈엣가시였다. 황후와 귀비를 모두 숙청하는 바람에 부태후 다음으로 육궁의 어른이 된 주자서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부태후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가며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부태후가 죽고 나면 황제에게 부탁하여 선황의 무덤을 지키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 환갑을 넘긴 부태후보다 먼저 하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한 주자서는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났다.

온객행의 품에서 눈을 뜬 주자서는 온객행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차가 산길을 달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온객행의 심장고동이 잘 들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은 자각이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온객행은 모두 받아주었다. 주자서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주자서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현실에 이런 사람은 없겠지 싶어서 주자서는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스스로가 이렇게 매달리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여태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황궁에서의 하루하루는 너무 고단하여 하루에서 수십번씩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주자서를 괴롭혔다. 주자서는 내심 알고 있었다. 황궁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주자서는 정신이 들때마다 만나는 온객행에게 응석을 부렸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4)’ 주자서는 서남풍이 되어 온객행의 품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온객행은 이주에 도착하자마자 의원을 찾았다. 주서에게 갑작스러운 여행은 무리였을까? 주서는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풍경을 보며 여행을 하면서 마음을 채우면 낫지 않을까 했던 온객행의 생각이 틀렸던 것일까? 나부몽은 주서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든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섣불리 마음을 고치려고 하다가 몸을 망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주에서 제일 유명한 의원을 객잔으로 불러 주서를 진맥하게 했다. 증상은 장안에서부터 익히 들어왔던 내장손상, 한증, 그리고 기혈의 울결(鬱結)이다. 주서의 상태를 살핀 의원이 온객행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말했다.
“잘 먹지 못한 것 같은데….”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잘 먹지 못합니다. 위장에 병이 있는 것 같은데 또 그것은 아니라고 하니….”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울결은 꼭 몸의 이상으로만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워있는 주서를 힐끔 보았다.

온객행이 의원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제발 살려주시오. 천금이 들어도 낼 수 있으니 고쳐만 주시오.”
온객행의 간곡한 부탁에 의원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병자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원을 붙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니?”
의원은 가지고 왔던 물건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의원을 따라 객실을 따라 나가며 물었다.
“의원님 제발 우리 아서 좀 살려주시오.”
장지문을 닫고 나와서야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의 병은 제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부탁하셔도 방법이 없습니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온객행은 의원의 소매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말해주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의원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이해합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러니 저는 더더욱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손상되었던 내장은 그나마 기운을 회복한 것 같으니 한증에 좋은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온객행은 의원이 목간에 적어준 처방전을 들고 한참 객실 밖에 서 있었다.

나부몽이 의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약방에 다녀오는 동안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주서를 괴롭게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나부몽이 약방에서 약을 지어와 탕약을 가지고 객실로 올때까지 주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온객행은 침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주서의 손을 잡고 그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주서가 어서 깨어 났으면 하는 마음과 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온객행을 괴롭게 했다. 나부몽이 소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소반을 올려 놓은 나부몽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촉경으로 계속 가십니까?”
주서의 얼굴을 바라보던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보았다.
“가야지. 부친께 약속했으니.”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주공자는 어쩌시겠습니까?”
온객행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일단은 이야기를 해보려구.”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반에서 탕약이 든 그릇을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식기전에 얼른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며 그를 깨웠다.
“아서. 아서 일어나봐.”
나부몽은 주서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한 후에 온객행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주서는 온객행이 떠주는 탕약을 별말 없이 먹었다. 탕약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다 마신 탕약 그릇을 다시 소반 위에 올려 놓고 영견으로 주서의 입가를 닦았다.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노온.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영견을 소반 위에 올려 놓고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아서가 아픈 것이 싫어.”
주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 저는 괜찮아요.”
온객행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나는 아서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이제 상관없어.”
주서는 한참 온객행의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달싹였다. 주서는 몇번이나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답답한 온객행이 주서에게 뭔가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주서가 온객행을 끌어안았다. 온객행이 당황하여 말했다.
“아서?”
주서가 온객행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댔다. 온객행은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주서의 어깨를 잡아 떼어놓으려고 했다. 주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객행에게 몸을 붙였다. 온객행은 주서를 밀어내려다 같이 침상에 털썩 누워 버렸다. 온객행이 팔을 집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주서가 더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온객행은 얼떨결에 주서의 몸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민망해진 온객행이 자신의 등허리에 있는 주서의 손을 잡아 침상에 내리 누르며 말했다.
“아서! 아서. 진정해!”
온객행 아래에서 보이는 주서의 얼굴은 억울한듯 조금은 화나 보였다. 온객행은 처음보는 표정이라 신선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좀더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주서의 얼굴은 가깝게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주서의 숨결이 가깝게 느껴졌다. 온객행이 입을 벌리면 그의 숨결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술을 붙였다. ‘어떤 맛이 날까?’ 주서의 입술은 탕약의 맛이 났다. ‘그 탕약에 감초가 들어 있었을까? 달다.’ 입술을 핥고 입 안을 맛보려고 하는데 주서가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아직 맛보지 못한 입안이 아쉬워서 손을 들어 주서의 턱을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놀라는 얼굴도 귀여워서 부스스 웃어버렸다. 주서는 예쁜 눈썹을 찌푸리더니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의 뺨에도 입을 맞추고 다시 입술을 찾았다. 주서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이 점점 내려가 옷깃을 잡았다. 옷을 갈아 입고 이불을 덮어 줄때마다 보았던 그의 속살이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목덜미의 발진이 거의 없어졌으니 몸에 난 발진도 많이 없어졌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온객행은 정욕이 끓어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주서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손으로 주서의 얼굴을 잡으려고 하는데 주서가 풀린 손으로 온객행을 밀어냈다. 주서는 온객행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돌리고 고개도 돌려버렸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서?”

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섶을 양손으로 쥐고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저… 저를 벌하러 오신겁니까?”
온객행이 영문을 몰라 주서에게 물었다.
“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주서는 온객행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벌하시려고….”
주서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온객행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주서의 얼굴을 양손에 쥐었다.
“아서.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 울지 마.”
주서는 울음을 참는듯 보이더니 온객행이 일어나서 주서를 품에 안자 조금 크게 훌쩍였다. 온객행이 주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놀랐어? 미안해….”
주서는 온객행의 앞섶을 잡고 훌쩍이며 말했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주서가 한 말을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주서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
“속이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주서가 한 말 중에 대다수를 알아듣지 못했다. 온객행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부분은 ‘일부러 속인 것이 아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등을 쓸며 생각했다. ‘누구를 속였다는 거지? 나를? 나는 주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주자서는 다가오는 온객행의 행동에 너무 놀랐다. 심판을 하러 온 나찰인줄 알았는데 주자서를 벌하러 온 것이다. 주자서는 온 힘을 다해서 온객행을 밀어보았지만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고 몸을 돌려보려고 해도 온객행의 손에 잡힌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자서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늘에서도 주자서가 주첩여인줄 아는 것일까? 왜 주자서를 벌하는 나찰의 모습이 사내인 것인가? 주자서는 원해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산 것이 아닌데, 하늘까지 자신을 황궁의 볼품없는 서부인 취급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벌이라면 주자서는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

주자서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손이 얼굴 근처를 맴돌더니 점점 내려와 앞섶을 잡았다. 주자서는 가슴에 닿은 손의 느낌에 소름이 돋아서 풀린 손을 들어 있는 힘껏 뿌리쳤다. 주자서는 온객행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지만 겨우 모로 누울 수 있었다. 온객행은 언제 주자서를 겁탈하려고 했냐는 듯이 다시 다정하게 주자서를 다독였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등을 쓸어주는 느낌에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어버렸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이가 원치 않는 곳에 시집 가는 것이 싫었어요. 저는 어차피 서출이니 대를 이을 필요도 없어서 그랬습니다. 잘못했어요. 누군가를 속이려고, 황실을 속이려고 주가를 기만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주첩여, 서부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주자서가 되고 싶을 뿐이다.

(5) 이백 월하독작 달빛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