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8

凉飇奪炎熱 시원한 바람이 더위 빼앗아 가면

주자서가 눈을 떴을 때, 침상에 고개를 괴고 자고 있는 온객행의 얼굴이 보였다. 주자서는 혹시나 또 꿈인가 싶어서 온객행의 뺨을 쓸어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노온.”
온객행은 눈을 뜨지 않았다. 주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워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자서의 한숨소리에 온객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온객행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 나부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는 사람….’ 강주에서 동정호까지 장강을 따라 가면 사흘이 걸린다. 동정호에서 포양호까지 말을 달리면 하루면 도착이다. 어떻게 해도 멀기만 했던 장강의 물줄기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정말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황궁에서는 주첩여를 찾고 있을까? 육궁에서 후궁이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많지는 않았으나 없지도 않았다. 부태후는 드디어 눈엣가시가 사라졌다고 생각할까? 주자서는 신세를 한탄하느라 온객행이 눈을 뜬 줄도 몰랐다.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물었다.
“아서. 무슨 생각해?”
주자서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공자!”
온객행은 주자서의 호칭에 눈썹이 축 처졌다. 주자서는 괜히 미안해서 눈썹을 손으로 쓸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배시시 웃었다. 주자서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온객행의 얼굴을 마주보고 부스스 웃어버렸다.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서,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아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이불을 주자서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주자서는 침상 곁에 놓인 화로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말했다.
“노온, 추운데 왜 여기서….”
온객행이 주자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붙어 앉아 말했다.
“보고싶어서… 아서가 보고싶어서.”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꿈에서까지 제가 보고 싶으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주자서 쪽으로 기대며 말했다.
“응. 계속 보고싶어. 아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여기 있어. 아서.”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보였던 추태가 떠올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부몽이 간단한 음식을 가지고 객실로 들어왔다. 나부몽은 침상에 나란히 앉아 졸고 있는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했다. 이미 다 꺼진 화로와 등롱을 보고 작게 한숨 쉰 나부몽은 탁자에 찬합을 내려놓고 부산을 떨었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화로에 탄을 채워 넣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몽. 언제 왔어?”
나부몽은 얼른 화로에 찻물을 올려놓고 탁자에 찬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탁자로 가서 찬합을 열어보았다. 주서도 온객행이 일어나는 기척에 금방 눈을 떴다. 온객행은 벗어 놓았던 장포를 걸치고 주서의 환복시중을 들었다. 주서가 작은 목소리로 거절을 했고, 온객행은 주서의 거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의 몸 이곳 저곳을 더듬으며 시중을 들었다. 나부몽은 온객행이 다른 사람에게 졸라대며 귀찮게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평소 타인에게 별로 큰 관심이 없는 온객행은 주서에게서 뭘 보고 있는 걸까?

온객행이 주서에게 골라 입히는 옷은 원래는 온객행의 옷이다. 계절별로 명절별로 매해 새로 짓는 옷은 온객행이 입을 때도 있고, 한번도 입지 않을 때도 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온객행의 취향에 맞게 색깔도 소재도 다양하다. 주서는 온객행이 골라준 밝은 벽색(碧色)옷을 입었다. 언젠가 온객행이 너무 수수해서 입지 않겠다고 했던 무늬 없는 옷이다. 온객행은 자꾸만 흐트러지는 주서의 등허리에 손을 얹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서가 똑바로 몸을 세우면 온객행보다 한 치(약 3cm)정도 작다. 살짝 고개를 숙이면 눈이 마주치고 귓가에 입을 가져가 무언가를 속삭이기 딱 알맞다. 온객행은 주서의 등 뒤에 서서 요대에 말려 들어간 장포를 정리하고 허리를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서는 벽색이랑 잘 어울려.”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주서의 목덜미와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객행은 주서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서 주서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아서는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
온객행의 말에 차를 준비하고 있던 나부몽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온객행은 주서를 탁자로 데려가 앉히고 찬합을 열어 음식을 꺼냈다. 갓 내린 찻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나부몽이 온객행을 도왔다. 나부몽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온객행이 주서를 희롱하는 것을 구경했다.

다 먹은 찬합을 정리해서 나부몽이 객실에서 나갔다. 금방 선장과 이주의 행수(行首)가 기별했다. 온객행은 그들을 방 안으로 들이는 대신 자신이 장지문을 열고 나갔다. 온객행은 주서를 혼자 객실에 두고 싶지 않아서 나부몽이 돌아 올때까지 객실 앞에 있다가 주서를 부탁하고 갑판으로 향했다. 나부몽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주서는 창문을 조금 열고 낭수의 물줄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부몽은 혹시 주서가 한증으로 또 앓아 누울까 걱정이 되어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고 화로에 탄을 조금 더 채워 넣었다. 주서는 나부몽의 한숨소리에 창문을 닫고 평상에 가서 앉았다. 나부몽은 그래도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주서를 두루두루 자세히 보며 상태를 살폈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남이 보기에 조금 민망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배에서 온객행을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부몽은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강주는 처음이십니까?”
주서는 나부몽의 질문을 듣고서도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부몽이 힐끔 주서를 보자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이 말했다.
“촉경에는 왜 가는 줄 아십니까?”
주서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나부몽은 끓고 있는 찻물을 찻주전자에 옮겨 담고 주서에게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혼약자를 데리러 갑니다.”
나부몽이 다시 주서를 보았다. 주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뿐 별말 하지 않았다. 주서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묻지 않으니 나부몽 역시 답해줄 수 없다.

강주로 향하는 내내 주서는 전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 일어나 앉아 있는 시간도 길었고 거동하는 것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온객행은 주서를 데리고 배의 이곳 저곳을 다녔다. 실은 짐들의 대부분은 관중에서 나는 특산물로 파촉에서는 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온여옥이 온객행을 촉경으로 보낸 이유는 촉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조위녕을 데려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파촉에 주문해둔 혼례물품을 공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주문 물품의 대금을 돈이 아닌 물건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파촉은 예로부터 비단이 유명했기 때문에 혼례복부터 예단과 폐물로 사용할 곳이 많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확인목록에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서 마음이 바빠졌다. 주서는 전과 다르게 온객행을 찾거나 온객행에게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온객행만 더 애가 닳아서 틈만 나면 주서에게 몸을 붙였다. 온객행의 손은 항상 주서의 몸 어디인가에 붙어 있었다. 지금도 차를 마시는 주서의 등허리를 쓸고 있는 온객행의 손이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보고 있는 나부몽이 민망했다. 주서도 나부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몸을 이리저리 틀어 보았지만 온객행은 불편하냐며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둘러 품에 안았다. 또 품에 안았다. 주서는 전과 달리 온객행과 거리를 두고 싶은 것 같았다. 눈만 마주치면 들러붙어 오는 온객행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고민하는 기색이다. 주서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거절과 거절을 거듭해야만 그제야 온객행은 주서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나부몽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온객행이 눈치를 주면 객실밖으로 쫓겨났다.

갑판 난간에 기대어 저 멀리 보이는 강주를 보고 있던 나부몽에게 선장이 다가와 물었다.
“셋째공자의 손님은 대체 누굽니까?”
나부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것이 왜 궁금하시오?”
선장이 말했다.
“여인입니까? 사내입니까?”
나부몽은 선장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선장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선장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몸짓도 그렇고 말도 잘 안하고 입은 옷도….”
나부몽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해보았다. 자기 스스로도 몇 번이나 주서의 몸짓이 여인 같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선장을 나무라기도 난처했다. 나부몽은 목을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냥 다물어버렸다. 선장이 답답한지 나부몽에게 말했다.
“누구인지는 상관없으니 여인인지 사내인지나 말해보시오.”
나부몽은 선장을 빤히 보다가 다시 시선을 강주로 던지며 말했다.
“셋째공자께 물으시오.”
선장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신의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온가의 셋째공자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온객행의 부를 시샘했던 귀족집 자제의 가문이 갑자기 쇠하여 유배를 가거나 장안에 다니던 서원에서 온객행을 괴롭히던 학자들이 하나둘 좌천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온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꽤 높은 벼슬에 있는 첫째공자나 둘째공자보다 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셋째공자를 더 무서워했다. 나부몽이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시오. 내 기억으로 셋째공자께 미움을 샀던 이중에 편히 살고 있는 이는 없으니.”
선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던 선원들에게 정박(碇泊)할 준비를 하게 했다.

강주는 장강의 여러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 포구가 굉장히 컸다. 온객행은 배를 내리기 전에 물품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화물을 싣는 하갑판으로 내려갔다. 주서는 온객행 옆에 서서 배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배가 선창에 다리를 내릴 때까지 온객행은 이주의 행수와 장부를 보며 싣고 온 물건들에 대한 시세에 대해 대화했다. 해가 지기 전에 배가 강주에 닿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귀중한 물품이 대부분인 상단의 물건을 하역(荷役)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하루 더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강주의 행수가 보낸 호위와 아침에 하역을 도울 하인들로 조금은 한산했던 배가 북적북적했다. 이주와 강주의 행수에게 상단의 일을 일임하고 온가주에게 받았던 물품 목록을 확인한 온객행이 서둘러 객실로 향했다. 온객행은 너무 오래 주서를 혼자 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주에 닿았으니 이제 온객행을 알아보는 이들이 적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서와 함께 강주의 시내를 돌아볼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온객행이 객실로 들어오자 나부몽과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주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활짝 웃으며 탁자로 다가가 주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아서! 나 보고 싶었어? 내일은 강주를 둘러보자.”
나부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유가 있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서의 옆자리에 앉아 주서가 마시던 찻잔을 빼앗아 입을 축이고 말했다.
“여유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 장강에 닿았으니 노(櫓)꾼이라도 부르지 뭐.”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요기는 하셨습니까? 저녁을 준비할까요?”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아서. 저녁은 먹었어?”
주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아직 안먹었는데…. 혼자 먹기 싫으니까 아서가 도와줘.”
온객행의 말에 주서는 역시 대답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부몽은 인사도 하지 않고 장지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배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일하는 것을 보고 그가 실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 실감했다. 주자서를 보살펴주는 온객행과 상단의 일을 하는 온객행은 주자서가 알고 있는 감각과는 조금 달라서 낯설기까지 했다. 주자서는 혹시나 방해가 될까 객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온객행은 주자서를 떼어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나부몽이 아닌 다른 호위를 두어 주자서를 속박하려고 하지는 않아서 계속 온객행 곁에 있었다. 정박을 하고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늘 밤도 배에서 머무를 것 같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곁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온객행의 거리감은 주자서를 확실하게 불편하게 했지만 주자서가 머릿속을 헤매고 있을 때, 그를 다독이고 붙잡아준 것 역시 온객행이었다. 온객행의 옷깃에 얼굴을 묻고 잘못을 고백했던 것이 생각났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했던 말을 모두 들었을까? 주자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온객행은 뭐라고 말할까? 그러다 벌써 몇번이나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주자서의 나약한 마음이 온객행에게 매달리고 싶어했다. 혼약자를 데리러 간다고 한다. 관을 했으니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온객행이 혼례를 치르고 나면 주자서는 어디든 갈 수 있을까? 언제쯤 온객행의 흥미가 떨어질까? 혼례를 치르고 나면 주자서를 놓아줄까? 주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달리고도 싶었다. 부질없고 순진한 주자서가 되어 온객행에게 매달리고 의지하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고도 한참 동안 주자서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어 꿈속을 헤맸다. 주서를 좋아한다고 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침상에서 주자서에게 올라타 그의 몸을 만지던 온객행이 떠올랐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다 온객행의 연심이 주자서를 향하게 되었을까? 주자서는 다 부서지고 망가진 자신을 좋다고 하는 온객행이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 뺨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주자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손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노온….”
뺨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주자서의 입술에 닿았다. 주자서는 ‘노온’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계속 입을 맞추겠다는 온객행의 맹랑한 엄포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따뜻했던 온객행의 품이 그리워서 말했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4)
그리고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잡아 얼굴을 묻었다. 온객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서남풍 불어오길 기다린다오.(3)
주자서는 눈을 떠서 방금 그 말을 한 것이 정말 온객행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고단하여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주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나부몽이 아침 일찍 온객행을 깨우러 객실에 들어왔다. 평상을 보았으나 온객행은 없었다. 나부몽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침상을 보았다. 침상 곁에 엎어져 주서를 바라보고 잠든 온객행을 보고 나부몽은 헛웃음이 나왔다. 온객행이 옷걸이에 걸어 놓은 장포를 들고 온객행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말했다.
“공자. 일어나세요. 곧 하역합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았다.
“벌써?”
나부몽은 가져온 장포를 온객행에게 둘러주며 침상 위에 맞잡은 온객행과 주서의 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통금이 막 풀렸습니다. 가서 장부만 맞춰 보시면 됩니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맞잡은 손을 쓸어 어루만지다 주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부몽이 얼굴을 구기는 것을 본 온객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다녀오는 동안 아서를 잘 보고 있어.”
온객행은 주서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일어나며 말했다.
“보기만 해. 만지지 마.”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내려야 할 짐이 많았기 때문에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주서는 간단히 죽으로 요기를 하고 온객행이 골라 놓은 옷을 입었다. 나부몽은 혼자 할 수 있다 하기에 주서가 혼자 옷 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답답해서 다가가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나부몽이 주서의 요대에 구겨진 앞섶을 정리하는데 온객행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서!”
가깝게 붙어 서있는 나부몽과 주자서를 발견한 온객행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온객행이 나부몽과 주서를 떨어뜨려놓고 말했다.
“부몽!”
나부몽은 얼른 찻잔에 차를 따라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배에서 내리십니까? 강주를 둘러보신다고요?”
나부몽의 말에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서. 강주는 처음이야?”
온객행은 주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객실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으니까 강주를 구경하자.”
온객행과 주서는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내렸다.

온객행은 강주에 도착해서 신의상단의 지점과 점포들을 둘러보며 주서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장안과 달리 온객행을 아는 이가 없어서 주서에게 더 친밀하게 굴었을 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은 폐물로 줄 여인의 장신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주서에게 말했다.
“아서. 이것 좀 봐.”
장인이 미리 주문해둔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온객행과 주서는 점포 안에 비치된 금은보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구경했다. 온객행이 옥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보며 말했다.
“포감(蒲甘; 미얀마)의 비취는 색이 정말 맑고 투명한 것 같아. 이렇게 선명한 자색의 자옥(紫玉)은 처음 봐.”
주서가 온객행이 가리킨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비단끈으로 묶은 주서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주서의 손을 잡고 옥으로 만든 관이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가서 말했다.
“아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해.”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살포시 웃더니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말없이 온객행이 이것저것 고르는 것을 보고 있던 주서는 한 켠에 놓인 금으로 만든 각선(却扇)을 보았다. 혼례때 신부가 얼굴을 가리는 부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부채를 보고 있던 주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온객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노온. 밖에서 기다려도 될까요?”
온객행이 주서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안돼. 아서는 보석에는 흥미가 없구나.”
주서는 대답없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온객행이 주서의 요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요패라도 하나 사 줄게.”
주서는 고개를 흔들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온객행은 그게 또 서운하고 아쉬웠다. 곧 장인이 들어와 온가에서 주문한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객행은 가주에게 받은 폐물목록이 적힌 장부를 펼쳐 장인이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주서는 옆에 앉아 온객행이 확인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다. 한 책이 넘는 장부를 모두 확인하는 동안 주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장인과 잠시 물건을 확인하러 가는 척하면서 주서에게 줄 하얀 벽옥으로 만든 비녀를 하나 샀다. 마음 같아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진귀한 장신구를 온객행의 취향에 맞춰 주문하고 싶었지만 주서는 뭘 주어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가장 수수하고 단아한 것으로 골랐다. ‘주서는 관례를 올렸을까? 비녀만 살 게 아니라 관을 샀어야 할까?’ 온객행은 검게 옻칠한 상자 속에 비녀를 보고 웃었다. 온객행은 품속에 비녀가 든 상자를 넣었다. 그 이후로도 비단을 주문한 포목점에 들렸다. 강주뿐만 아니라 가주(嘉州)에도 주문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주에 도착하면 문수(汶水)를 따라 촉경으로 갈 예정이다. 온여옥은 온객행에게 촉경에서 조위녕을 데리고 장안으로 오는 것과 온상의 혼례까지 얌전히 있을 것을 조건으로 일엽선을 온객행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온상의 혼례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여유롭게 장안으로 돌아가서 일엽선을 받으면 배를 타고 주서와 황하를 유람할 생각이다. 온객행은 머무는 객잔으로 향하며 말했다.
“혼례는 내년 여월(餘月; 4월)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싶어.”
뒤에 서있던 나부몽이 말했다.
“장안으로 돌아 가실 때는 육로로 가십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몰라. 조가에게 물어봐야겠지.”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한 온객행 일행은 각자의 객실로 돌아갔다. 온객행이 주서의 객실에 화로를 들고 들어가며 말했다.
“아서. 이곳은 남쪽이라 화로를 내놓지 않았나 봐.”
주서는 온객행이 들고 들어온 화로에 손을 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화로에 찻물을 올리고 행장함(行裝函)에서 검은색 피풍의를 꺼내 주서에게 둘러주었다.
“아서. 춥지? 밤바람은 차다.”
그리고 주서가 열어 놓은 창문을 닫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가져온 화로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이 끓는 찻주전자를 구경했다. 온객행이 다가가 주서를 일으켜 의자에 앉히고 말했다.
“아서. 힘들어? 피곤해? 잘까?”
주서는 한동안 찻주전자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노온께서도 가서 쉬십시오.”
온객행이 차를 내리며 말했다.
“동정호에서 멀지 않아서 아주 좋은 흑차를 얻었어. 아서는 숙차를 좋아하지?”
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객행이 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온객행을 보았다. 온객행이 주서에게 다가가 등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서?”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노온께서도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가서 쉬세요.”
주서의 걱정이 기꺼워 온객행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응. 아서. 오늘은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아서도 피곤해?”
주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놓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객실을 나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주서는 계속해서 온객행을 밀어냈다. 온객행은 주서가 잠이 들면 다시 돌아올 요량으로 일단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객실을 나가면서 주서의 객실 장지문과 창문에 호위를 두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혼례를 위한 물품을 고르는 것이 기쁘면서도 쓸쓸했다. 조가와 맺는 척분이니 온객행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루어질 혼인이다. 온객행이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주자서는 어서 온객행의 흥미가 떨어져 나가기를 주자서를 향한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온객행은 주자서가 밀어내도 밀리지 않는다. 밀리지 않으면 당기는 것도 방법이다. 전부 줘 버리면 금방 질려버릴까? 주자서는 장포와 중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 구리로 만든 면경 앞에 앉았다. 어두워진 실내에 면경 속 아른거리는 모습은 가냘프고 볼품없어서 주자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자서는 벌써 마음 속으로 온객행을 놓아주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 다짐은 온객행의 얼굴을 볼때마다 무너지고 무뎌진다. 주자서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이번엔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속을 헤맨다. 처음에는 그냥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정말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당장 옆에서 보고 만질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온객행이 원하는 대로 휘둘렸으면 좋았을까? 주자서는 익숙한 한숨을 내쉬었다. 뺨에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주자서는 또 같은 꿈을 꾼다.
“노온….”
주자서는 뺨을 어루만지는 손에 얼굴을 묻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온….”
주자서의 뺨에 닿는 숨이 간지럽다. 뺨에 느껴지는 이 감촉은 아마도 입술인 것 같다. 주자서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묻은 온객행의 손으로 고개를 돌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노온….”

온객행은 손에 입을 맞추는 주서가 사랑스러워서 팔을 둘러 주서를 끌어안았다.
“아서. 정말 좋아해.”
주서의 숨소리는 금방 평온해졌다. 온객행의 심장이 주서의 입술이 닿은 손바닥에서 뛰는 것 같았다. 잠결에 온객행은 자기도 모르게 침상 위로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주서를 끌어안고 자고 있는 모습을 온객행을 깨우러 온 나부몽이 보았다. 나부몽은 온객행을 어떻게 깨워야 하나 침상 앞에 서서 고민하고 있다가 주서와 눈이 마주쳤다. 나부몽은 주서를 한참 보고 있다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기침하셨습니까?”
나부몽의 목소리에 주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자고 있던 온객행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직… 무슨 일이야?”
온객행의 잠긴 목소리에 주서가 몸을 움츠리며 온객행을 밀어냈다. 주서의 바르작대는 몸짓에 온객행이 주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윽’ 하는 주서의 신음소리에 온객행의 눈이 반짝 떠졌다. 고개를 돌려 침상을 내려보고 있는 나부몽을 보고 온객행이 말했다.
“어… 왜?”
나부몽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가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이 찾아왔습니다. 장안에서 전령을 보냈습니다. 주문 목록을….”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부몽. 고마워. 금방 나갈게.”
나부몽은 온객행의 말을 듣고 별말 없이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끌어안고 있던 주서를 놓아주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주서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아서. 그러니까….”
주서가 침상아래 있는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잠결에 잠자리를 착각하셨나봅니다.”
온객행이 주서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주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옷을 입었다. 온객행도 일어나 주서를 따라가며 말했다.
“이거는… 내가….”
주서는 말없이 묵묵히 중의를 입었다. 온객행이 주서를 멈추고 말했다.
“아서. 아니야 오늘은 이 옷 말고….”
온객행이 회백색의 얇은 무명 옷을 꺼내 주서에게 입히며 말했다.
“강주는 아직 날이 차지 않으니까….”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의 시중을 받아주었다. 온객행은 내의가 다비치는 얇은 중의를 입히고 요대를 매준 뒤 조금 두꺼운 장포를 입혔다. 온객행이 옷걸이에 걸어 둔 피풍의로 손짓하며 말했다.
“추우면 피풍의를 두르면 되니까….”
주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가 옷을 갈아입는 온객행의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온객행은 어제 사두었던 옥비녀가 떠올라서 주서를 면경 앞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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