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9

棄捐篋笥中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

나부몽은 주서의 올린 머리를 보고 온객행을 힐끔 쳐다봤다. 시기 한번 적절하다. 이주에서 타고 온 배에서 내리면서 장안에서 데려온 하인들과 호위들은 급한 물자를 배달하기 위해 동천(東川)으로 향했다. 갑자기 머리를 올린 주서를 보고 온객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사람은 나부몽정도다.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한숨을 쉬자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활짝 웃었다. 화창한 가을 날씨에 옥같이 고운 얼굴이지만 나부몽은 섬뜩하여 고개를 돌려버렸다. 온객행의 간절한 구애를 받고 있는 주서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흐르는 장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장강이 흐르는 곳 출신인가 싶어 물었지만 역시나 주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주로 향하는 배는 이주에서 탔던 배보다 그 규모는 작았지만 신의상단의 표국(鏢局)이었기 때문에 배에서 일하는 모든 선원이 보표(保鏢)의 역할도 겸했다. 배에 실은 물건들도 작지만 값이 많이 나가는 귀중품이다. 조위녕이 유학하는 촉경에도 조씨의 방계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 실은 물품 중의 대부분은 그들에게 보내는 폐물이다.

강주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온객행의 일행은 가주로 향했다. 짙은 안개를 보며 표국의 우두머리 표사(鏢士)가 말했다.
“날씨가 추워질 모양입니다.”
온객행은 대답없이 갑판에서 가주로 향하는 경로를 확인했다.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요 몇 년은 날씨가 이상하게 춥습니다.”
표사가 말이 없는 온객행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날씨는 추워도 바람이 좋으니 가주까지는 하루면 닿겠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이 배로 촉경까지 가는가?”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자.”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힐끔 옆에서 안개가 자욱한 장강을 보는 주서를 보았다. 불편한 침묵이 깔리고 물이 흐르는 소리와 세차게 부는 강바람 소리만 들린다. 나부몽이 주서의 피풍의를 털며 말했다.
“날이 차니 어서 객실로 들어갑시다.”
주서는 고개를 돌려 온객행과 표사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나부몽과 함께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나부몽의 생각과 달리 온객행은 바로 객실로 내려오지 않고 표사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객실은 이주에서 타고 왔던 배에 비하면 조금 작았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객실들과 붙어있어서 번을 서거나 호위하기에도 좋았다. 나부몽은 주서를 평상에 앉히고 객실의 퇴로와 배의 구조를 확인했다. 주서가 나부몽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려는 주서를 말리며 나부몽이 말했다.
“날이 더 밝으면 여십시오. 강바람이 차고 습합니다.”
주서는 창문에 손을 올려 놓고 한참 생각하더니 결국 열지 않았다.

온객행은 객실의 장지문 밖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부몽은 온객행이 들어오자 마자 배의 내부를 확인한다며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평상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주서에게 다가갔다. 아직 어젯밤의 오해를 풀지 못해 답답한 온객행이 주서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주서의 손을 잡았다.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부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온객행은 애가타서 주서를 올려보며 말했다.
“아서… 미안해. 계속 무례하게 굴어서….”
주서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주서의 손에 얼굴을 기대고 말했다.
“아서가 너무 좋아서….”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뺨에 닿았다. 온객행은 눈을 감고 주서의 손에 고개를 기댔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같이 있는데도 천리 밖에서 부르는 소리보다 희미하다.
“응… 응. 아서. 나 여기 있어.”
온객행은 주서에게 끊임없이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온객행은 어디든 주서가 가는 곳에 따라가리라고 다짐했다.

주서가 고개를 숙여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온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온객행은 귓가에 닿는 주서의 숨결이 간지러워 고개를 들고 주서를 보았다. 잠시나마 광채가 돌았던 눈동자는 또 언제 저렇게 죽었는지 온객행은 주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작게 탄식했다.
“아… 아니야. 아서. 그런게 아니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주서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아서 온객행이 얼른 주서의 양 뺨을 잡고 말했다.
“아서. 아니야.”
주서의 눈동자는 온객행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텅 빈 주서의 눈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말했다.
“아서. 서남풍이 되면 어디로 갈 거야?”
온객행의 질문에 주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온객행은 손을 들어 눈썹을 쓸고 말했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
주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떠다니고 가라앉음은 서로 처지가 다르지요.”
온객행이 주서의 양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의 품이 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4)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주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온. 제 품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온객행은 조금 젖은 듯한 주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서. 나한테만 열어. 다른 사람 말고 나에게만.”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등을 쓸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 나 여기 있어. 나만 두고 가지 마. 아서.”

주자서는 밀기로 했다. 그동안 당기기만 했으니 온객행이 원하는 것을 줘버리면 나부몽의 말한대로 금방 지쳐서 질려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온객행이 당기기 시작했다. 몸 이곳 저곳에 닿는 온객행의 손길은 못 견딜만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눈이야 떠나면 다시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매달리고 조르는 말을 할까 조심하다 보니 말 수가 줄었다. 그랬더니 온객행의 말 수도 줄어들어 버렸다. 온객행의 조심스럽고 다정한 행동에 주자서는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메마른 자신의 품으로 날아오려는 온객행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주자서에게 기대겠다는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는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전부 주겠다고 말했더니, 온객행은 자신만 봐 달라고 답한다. 마치 주자서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두고 가지 말라고 답한다. 주자서는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나부몽이 한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는 사람….’

촉경에 혼약자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 ‘촉경에서 혼약자를 만나면….’ 주자서는 온객행의 연정이 자신을 향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온객행이 방탕하고 점잖지 못한 사람이라 주자서를 마음껏 흔들고 탐했다면 주자서는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온객행과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변덕이 심한 사람 치고 태도가 썩 진중하다. 덕분에 주자서만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온객행은 긴장이 풀렸는지 주자서가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잠이 든 것 같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주자서의 허리에 매달린 온객행은 주자서가 생각한 것 보다는 조금 무거워서 주자서는 고개를 숙여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온. 평상으로 올라오세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안돼. 나는 아서의 마음이 갖고 싶어.”
온객행의 말에 주자서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노온. 좀 더 편히 쉬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뒤로 밀어 평상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몸이야 마음을 가지면 언제든지….”
주자서는 조금 당황했지만 온객행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더니 어깨를 베고 축 늘어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머리를 끌어안고 뺨을 쓰다듬었다. 이미 온객행에게 마음을 다 줘버렸는데 마음을 달라고 하니 막막하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조금 억울했다.

간단한 요기거리를 찬합에 들고 객실로 들어간 나부몽은 침상 위에 정답게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부몽은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다시 찬합을 들고 객실을 나갔다. 배로 이동한 이후 온객행은 계속 주서의 침상에 꼭 붙어서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벌써 사흘, 나흘째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니 고단 할 것이다. 그런 온객행을 주서가 밀어내려고 했으면 밀어냈을 것이다. 저렇게 꼭 붙어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주서도 온객행에게 아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나부몽은 생각했다. 그래서 나부몽은 주서를 향한 온객행의 관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연정이라는 것은 봄바람처럼 왔다가 꽃샘추위에 떨어지는 꽃잎 같은 것이니 손에 쥐고 흔들면 금방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처음이라 조금 특별한 것이라고 아마 금방 다른 사람으로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그 애정이 옮겨 갈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도 온객행에게 관심이라는 것을 받아보았던 사람 중에 주서가 제일 무던한 사람이기는 했다. 씀씀이가 헤프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지도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조금 이상했지만 점잖기까지 했다. 나부몽은 내심 주서를 기점으로 온객행의 가벼운 취향이 조금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객행은 은은한 동백꽃 냄새에 눈을 떴다.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따뜻해서 온객행은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 마셨다. 온객행의 품에 있는 것은 조금 움직이더니 온객행을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졸음으로 뿌옇던 머릿속에 갑자기 찬물을 들이 부은 것처럼 온객행은 눈을 번쩍 뜨고 품에 안은 사람을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모습도 좋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좋다. 온객행은 주서의 몸에 둘러진 팔을 풀어 몸을 일으켰다. 주서를 몸으로 거의 덮고 있는 온객행은 혹시 주서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주서는 아직 잠결인지 온객행의 앞섶을 꼭 쥐고 얼굴을 비볐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주서를 다시 품 안에 가뒀다. 온객행의 움직임에 주서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주서는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온객행은 품속에 있는 사람이 경직된 것을 느끼고 주서를 놓아주었다. 주서가 눈을 뜨고 온객행을 올려보았다. 온객행은 정욕이 일어서 몸을 반쯤 비키고 말했다.
“아서. 싫으면 어서 거절해.”
주서는 말없이 눈을 꼭 감아버렸다. 온객행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주서의 입술을 찾았다. 처음 온객행의 입술이 닿은 곳은 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차오른 뺨, 굶주림으로 생긴 발진이 있던 목덜미 그리고 예전보다는 보드라워졌을지도 모르는 가칠한 입술을 탐했다.

온객행의 앞섶을 쥔 주서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온객행이 낮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프게 안 해.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드러난 목덜미를 조금 핥고 빨다가 옷깃 사이로 보이는 주서의 어깨에도 입술을 맞췄다. 해가 졌는지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주서의 목덜미가 붉게 변한 것이 보였다. 온객행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으로 주서의 앞섶을 쥐었다. 가쁘게 내쉬던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의 손길에 주서의 중의가 벌어졌다. 주서가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온객행의 손이 중의를 지나 내의 안으로 들어갔다. 온객행은 주서의 목덜미를 희롱하다 귓가에 속삭였다.
“혼인 했었다며….”
주서는 맨살에 닿는 온객행의 손에 놀라서 그를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이 주서의 허리춤을 잡아 끌어당기고 말했다.
“아서. 좋아해.”
주서가 자신의 앞섶을 모아 쥐고 고개를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객행은 주서의 요대를 풀었다.
“온공자.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호칭에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몸을 더 가깝게 붙이고 주서의 귓가를 희롱하며 말했다.
“아서의 혼대(婚對)는 죽었다며….”
온객행의 손이 주서의 고개를 돌려서 온객행을 보게 했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객실은 밖에서 나는 장강의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부몽은 등롱을 밝히기 위해 객실에 들어왔다가 평상에 엉켜 있는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나부몽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아주 가깝게 붙어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는지 주서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다. 나부몽은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나가려고 했는데 들고 왔던 화절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절자가 떨어지는 소리에 온객행의 고개가 장지문으로 돌아갔다. 나부몽은 들고 있던 등롱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객실을 나가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나부몽은 장지문을 닫고 나와 문 밖에 서서 객실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부몽은 작게 한숨을 쉬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사를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아마 온객행이 부를 때까지 객실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주서는 대체 어쩌고 싶어서 온객행의 감흥에 응하게 된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분명 나부몽은 온객행과 거리를 둘 수 있게끔 이런 저런 말들을 흘렸는데도 어째서인지 전보다 더 가까워진 듯하다.

온객행이 주서를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오히려 온객행이 주서의 형편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남자. 온객행이 대접하는 사치품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익숙하다. 온객행이 그를 찾은 것은 장안성 부용지이다. 부용지로 흐르는 곡강은 황궁에서 시작하는 물길이다. 나부몽은 황궁에서 죽었다는 선황의 첩여 성씨가 주서와 같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떤 사연을 가졌든 복잡할 것이다. 첩여가 된 시점을 보면 그는 선황을 모시기도 전에 선황이 승하했을 것이다. 사내로 후궁이 되었는지 아니면 누굴 속이고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황실을 속인 죄는 일족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 그것이 무엇이던 괜히 온가와 얽혀봐야 주서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특히 황실과 연을 대고 싶어하는 가주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장안에서 멀어졌으니 촉경에 데려다 놓고 여비를 넉넉히 쥐여 주면 될 일이다. 주서의 병은 황실에 갇혀서 생긴 병이니 궁에서 멀어질수록 나을 것이다. 나부몽은 딱히 오래 두어도 상관없을 만한 다과를 골라서 객실 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날이 늦어 바람이 차다. 나부몽은 화로를 들여 놓을까 하다가 어차피 둘이 붙어 있으면 추울 일은 없겠다 싶어서 금방 생각을 털어버렸다.

나부몽이 객실의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온객행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등롱 빛에 객실 안이 밝아졌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대로 손을 내려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온객행의 손이 닿은 곳에서 주자서의 심장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주자서는 이런 기분과 감정이 낯설어서 초조하고 불안했다. 온객행은 점점 거리를 좁히더니 주자서의 귓가에 입술을 맞췄다. 주자서는 살갗에 닿는 자극이 따뜻하고 축축해서 피해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이 손을 들어 주자서가 고개를 돌린 쪽의 어깨를 잡았다.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니고 밀기로 마음먹고 난 이후에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헤아려 보긴 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태껏 온객행의 손길은 이렇게 진득하거나 검질기게 들러붙지 않았다.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주자서의 손끝이 저릿하고 간질간질하다. 온객행은 거리를 벌리려는 주자서를 당겨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서. 거절할 것이라면 지금 해. 입맞추고 나면 멈추지 않을 거야.”
주자서의 어깨에 있던 손이 견갑골을 지나 등허리로 내려갔다. 온객행의 손이 풀어진 요대 틈으로 주자서의 몸을 쓸어내렸다.

부태후의 곁에서 후궁의 인사를 받을 때, 숙비 소씨(淑妃 蕭氏)가 재인(才人)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장안성에는 남색이 유행이라고 했다. 지위가 높은 고관부터 학식이 높은 학자, 돈이 많은 부호까지 기루에서 즐기는 자부터 아예 집에 들여 첩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황제의 총애를 사내와 다퉈야 한다며 내전에 있는 여인들은 비역질하는 사내들을 헐뜯었다. 주자서는 후궁이 했던 말들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온객행에게 있어 주자서는 잠깐 즐기는 유흥일까? 아니면 온객행도 주자서를 가둬 놓고 탐하고 싶어 하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싫지 않았지만, 솔직히 온객행이 좋았지만 온객행에게 구속당해 또다시 어디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주자서는 앞섶을 잡고 있던 팔을 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놔주세요.”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비비고 물었다.
“응?”
주자서는 온객행의 어깨에 잠깐 기대 눈을 감았다가 손을 들어 온객행을 밀어내고 말했다.
“전부 드릴 테니 놓아주십시오.”
온객행은 주자서가 미는대로 밀려서 주자서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서?”
주자서는 숙인 고개를 들어 온객행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거절하지 않을 테니 저를 놓아주십시오.”
온객행이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서?”
주자서가 숨을 고르고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온객행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서. 무슨 소리야? 놓아달라니?”

온객행은 주자서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었다. ‘놓아주세요.’ 처음에는 끌어안고 있으니 놓아달라는 말인 줄 알았다. 전부 준다 하기에 가슴이 부풀어서 드디어 주서도 저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주서가 밀어내는대로 놓아주었다. 온객행을 똑바로 쳐다보는 주서의 눈동자는 온객행이 근래에 보았던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아니라서 온객행의 마음이 술렁거렸다. 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주서는 온객행이 처음 보는 모습이라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서?”
놓아달라는 말을 하는 주서의 표정이 결연해서 온객행은 그제야 주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주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온객행이 주서를 쥐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척했다. 온객행은 웃는 얼굴을 꾸며 다시 물었다. 주서는 한참 말없이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전부 드릴 테니 저를 놓아주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돼. 싫어.”
온객행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날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주서의 표정이 금방 울 것 같이 변했다. 온객행은 주서의 얼굴에 드러난 슬픔이 안타까워서 손을 들었다.

주서가 뭔가 더 말하려고 하기에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서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주서가 하려고 했던 말이 온객행의 입맞춤에 흩어졌다. 온객행은 이 입맞춤으로 주서가 하려고 했던 말이 주서가 하고 있는 생각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붙여오는 입술을 주서는 피하지 않았다. 온객행은 주서에게 이렇게 무언가를 대가로 조건을 걸고 싶지 않았다. 차오르는 숨을 어쩌지 못하고 참고 있던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겹쳐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싫어. 아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주서는 숨을 몰아쉬더니 말했다.
“노온… 제발….”
온객행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주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서는 온객행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힘에 부쳐 온객행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온객행은 돌아가는 주서의 턱을 손으로 잡아 고정하고 나머지 팔을 주서의 허리에 둘러 몸을 밀착시켰다. 주서의 손이 온객행의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짚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턱과 목덜미를 희롱하며 흘러내린 중의를 벗겼다. 주서가 온객행의 어깨를 살짝 밀고 말했다.
“촉경까지만….”
온객행은 주서의 어깨에 고개를 괴고 더 가깝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싫어… 싫어. 아서.”
주서는 양팔을 들어 온객행을 마주안고 말했다.
“서로의 사정에 연연하지 않는 사귐으로 길이 맺어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5)

온객행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서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싫어. 매달리고 조를래.”
주서가 온객행을 타이르듯 말했다.
“촉경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그동안 모두 드리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서를 놓고 다급하게 말했다.
“다 주지 마. 싫어. 아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내 옆에 있어.”
울먹이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주서의 표정이 흔들렸다. 온객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벗겼던 중의를 다시 둘러주고 앞섶을 여며주었다.
“아서. 그냥 옆에 있어. 내 옆에.”
주서의 얼굴이 허물어져 내려앉는 것을 보고 있던 온객행이 다시 주서를 끌어안고 말했다.
“아서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주서가 온객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등을 쓰다듬었다. 온객행은 주서를 놓아주고 소매로 젖은 눈가를 얼른 훔쳤다. 그리고 웃는 얼굴을 꾸며서 말했다.
“아서. 촉경에 가지 말까? 가주에 도착해서 장안으로 서신을 쓸게.”
주서가 복잡한 얼굴로 온객행의 손을 잡고 말했다.
“노온. 혼약자를 데리러 가셔야죠.”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아서가 촉경에 가기 싫으면 나도 안 갈래.”
주서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고 싶습니다. 촉경. 저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어요.”
온객행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주자서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온객행이 가여워 다시는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 흐트러졌다. 그러다 주자서는 과연 온객행 옆에서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육궁에서 사는 동안 주자서는 많은 여인들이 황제의 총애를 다투며 했던 모의(謀議)와 술수(術數)를 보았다. 어떤 이는 정말 황제를 사랑해서 그렇게 했고, 또 어떤 이는 권력과 재화가 탐나서 그렇게 했다. 총애를 다툴 대상이 없던 주자서는 업신여김 당하기는 했지만 후궁의 성권(聖眷)을 위한 모략(謀略)에 빠질 일은 없었다. 온객행의 곁에 있다는 말은 스스로 진흙탕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일 남의 눈치를 보며 매일 들킬까 조마조마한 황궁에서의 고단한 삶에서 겨우 벗어난 주자서는 다른 사람과 겨루거나 다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옆에 있으라는 말에 다시한번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직감했다. 주자서는 촉경까지만 촉경에 가서 온객행이 혼약자를 만날 때 까지만 그의 옆에 있기로 했다. 이제 서남풍이 되어도 날아가고 싶은 곳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행동거지가 수상하고 매달리며 의지하는 그에게 허락된 것은 딱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주자서는 생각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온객행의 애처로운 매달림이 가엾다.

촉경까지만 함께 하겠다고 했더니 촉경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혼약자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했더니 꼭 온객행이 아니어도 된다고 한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공감했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꼭 내가 아니어도 노온 곁에 있어 줄 사람은….’ 주자서는 그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주자서는 자신의 옷을 추슬러 여며주는 온객행의 손길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마음을 다 내어 주었으니 몸을 내어 주는 것은 온객행이 말한 것처럼 언제든지 별일 아니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실증을 내려면 전부 내어 줘야 질려버릴 텐데.’ 입술을 맞대는 일은 처음도 아니고 온객행의 입술은 부드러워서 싫지 않았다. 오히려 까슬까슬한 주자서의 입술이 온객행에게 불편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온객행이 힘겹게 꾸민 얼굴을 보고 주자서는 힘껏 웃어 주었다. 멀지 않은 이별까지 주자서는 온객행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서가 온객행의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이니….”
온객행이 주자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주자서는 축 늘어진 온객행의 눈썹을 손으로 쓸며 생각했다. ‘비싼 금 술잔이 빈 채로 달을 마주하지 마시오.’ 온객행의 술잔을 채울 이는 많으니 한순간 그 술잔을 채웠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주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표국의 배는 장강을 따라 흘러 늦은 밤 가주에 도착했다. 나부몽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객실에서 나온 온객행이다. 나부몽은 객실 근처에서 번을 서다가 장지문을 열고 나오는 온객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나부몽을 발견한 온객행은 품에서 비단봉투를 꺼내 나부몽에게 건네고 말했다.
“장안으로 급히 보내게.”
자세히 보니 온객행의 눈가가 발갛게 짓물렀다.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비단봉투를 받았다. 온객행이 다시 객실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나부몽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아 멈추고 말했다.
“공자. 가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촉경까지 사나흘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온객행은 장지문으로 몸을 돌려 서고는 한참 아무 말이 없다. 나부몽은 장지문 앞에 두었던 찬합을 들어 온객행의 손에 들려주고 말했다.
“일단 요기부터 하십시오. 곧 화로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온객행은 나부몽이 들려준 찬합을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부몽이 장지문을 열어 온객행을 객실로 밀어 넣고 말했다.
“강주의 행수가 구해준 귀한 흑차가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온객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부몽을 보았다. 나부몽은 조금 우울해보이는 온객행의 얼굴이 의아해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 옷 입고 계십시오.”
온객행은 나부몽의 말에 피식 웃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와 한편남았는데 무슨 수로 수습하지?
+새드는 아닌건 확실한데 대충 어떻게 끝낼지 마음으로는 알고 있는데 자꾸 머리가 거부함ㅋㅋ
+표지 너무 바꾸고 싶다 대체 왜 합환선 이미지중에 무료로 쓸수 있는게 없냐 진짜ㅠㅠㅠㅠ쿨럭애들은 진짜 웃긴게 지들 전통문화를 왜 자꾸 다른 나라 전통문화로 덮으려고 하지? 아니 문헌에서 접는부채는 고려발이라잖아 그게 싫으면 얼른 역사적 근거를 가져오라고

0 comment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