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6

動搖微風發 서늘한 바람 일으킨다오.

주자서는 잠에서 깼다. 한참 전에 잠에서 깼지만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날은 아직 어두운지 시야가 어둡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때는 언제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주자서가 타고 있는 이 커다란 배는 주자서를 또 어떤 지옥으로 데려가는 걸까? 주자서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덮고 몸을 작게 말았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자서는 이불을 매만지는 손길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따뜻한 손이 이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주자서는 깜짝 놀라서 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침상에 팔을 괴고 잠이든 온객행이 팔을 더듬어 이불을 찾았다. 벌써 계추월이라 했다. 고개를 돌려 화로를 보았다. 새하얀 잿빛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연약하다. 주자서는 덮고 있던 이불을 펴서 온객행에게 덮어주고 침상을 내려왔다. 조금 기다리니 어슴푸레하게 객실의 내부가 보였다. 등롱은 이미 다 타버렸는지 객실 안은 어둡다. 주자서는 화로 안에 불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탄을 채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허둥대고 서둘렀는지도 모르겠다. 객실을 나가는 장지문 근처를 찾다가 협탁 위에 놓여있던 소반을 떨어뜨렸다.

소반이 떨어지는 소리에 온객행이 일어났다. 온객행은 벌떡 일어나 침상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탁자 위에 놓여있는 등롱의 불을 밝혔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다가 밝아지는 시야에 조금 눈쌀을 찌푸렸다. 장지문 앞에 서 있는 주자서를 보고 온객행은 한달음에 다가와 주자서의 팔을 잡았다.
“아서! 어디가?”
조금 다급해 보이는 온객행의 모습에 주자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주자서는 많은 위기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회피해왔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라며 주자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와락 끌어안더니 말했다.
“아서. 가지 마. 어디에 가려고… 나도 데려가.”
주자서가 어디에 가는지 묻는 이는 참으로 많았으나 데려가 달라는 이는 없었다. 주자서는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은, 온객행은 정말 주자서가 만들어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주자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다. 주자서는 온객행을 마주 안고 말했다.
“제가 어디에 갈 줄 알고 데려 가라 하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고 말했다.
“어디든. 아서. 어디든 데려가. 극락이던 나락이던 아서가 가는 곳에 갈래.”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을 쓸며 말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착하거든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합시다.(5)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싫어. 아서. 지금 나랑 여기 있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말에 웃음이 났다. 부질없을 것 같던 이런 유치한 위안이 너무나 반가워서 웃었다. 그러다 온객행의 말처럼 지금 여기에 온객행과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답할 수 없는 것은 주자서의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온객행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등허리에 손을 올려 그를 침상으로 이끌었다.
“아서.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조금 더 쉬는 것이 좋겠어.”
온객행은 주자서 옆에 앉아서 주자서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온객행의 눈썹이 울상이 되는 것을 본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눈썹을 쓸었다. 온객행은 양손으로 주자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괜찮아. 대신 싫은 것만 말해줘. 내가 아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주자서는 눈썹을 쓸던 손을 내려 온객행의 뺨을 만져보았다. 조금은 차가운 뺨. 보기 좋게 살이 차오른 뺨. 주자서는 그 뺨이 부러워서 쓸어보다가 손을 내렸다. 온객행의 뺨에서 내려온 주자서의 손도 온객행의 손에 잡혔다.

크고 따뜻한 손. 주자서는 고개를 숙여 잡힌 손을 보았다. 그러다 어디에 잡힌 것이 싫어서 조심스럽게 손을 놓았다.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를 침상 위에 잘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서. 내가 여기 있을게. 조금 더 자.”
주자서가 몸을 반쯤 일으켜 일어나며 말했다.
“노온. 저는 괜찮으니 가서 쉬세요.”
온객행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서랑 같이 있을래.”
주자서는 다 꺼진 화로를 보고 이불을 들추며 온객행에게 말했다.
“그럼 추우니 이리로 오세요.”
온객행은 주자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으로 가서 등롱의 불을 껐다. 온객행은 다시 침상으로 돌아와 침상에 기대 앉아 이불째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온객행은 이불을 들추는 주자서의 내의만 입은 몸을 보고 정욕이 끓었다. 그러다 서늘하고 가는 손목에 느껴졌던 미미하고 연약한 혈맥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로 가서 등롱을 껐다. 주서를 위해 꺼내 놓은 이불은 겨울에 덮는 이불이다. 솔직히 온객행은 춥다기보다 더웠다. 이불까지 모두 끌어안아도 주서는 한 품에 안긴다. 온객행은 그게 또 안타까워서 주서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주서는 품에 안겨 또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다가 잠들었다.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온객행은 주서의 마음이 자신과 같기를 바라며 주서를 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침상에 기대 잠이든 온객행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나부몽이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옹성에 도착했습니다. 이주(利州)까지 마차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나부몽이 시선을 내려 온객행의 품에 있는 주서를 보고 말했다.
“이주에서 촉경까지 물길로 가는데 괜찮을까요?”
온객행은 주자서의 몸에 팔을 두르고 나부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짓으로 나부몽을 내쫓았다. 나부몽은 표정을 구기고는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찬합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짐을 내리느라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중천이 되기 전에는 출발하셔야 합니다.”
온객행은 또 고개만 끄덕이고 턱짓했다.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며 온객행을 흘겨보고 말없이 객실을 나갔다. 온객행은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주서를 추슬러 안으려다 이불이 조금 흘러내렸다. 주서는 흘러내린 이불때문에 추웠는지 온객행 쪽으로 몸을 더 웅크렸다.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고 날이 더 밝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때 온객행은 어쩔 수 없이 주서를 흔들어 깨웠다.
“아서. 아서.”
주서는 온객행의 목소리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눈을 살짝 떴다. 고개를 들어 온객행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뜬 주자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온객행은 침상에 있던 이불을 주서에게 둘러주고 일어나 탁자의 찬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찬합의 음식은 모두 식어 차가웠다. 온객행은 차가운 음식을 한증이 있는 주서에게 먹이고 싶지 않아서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주서의 옷을 침상으로 가져갔다. 주서의 환복 시중을 다 들고 나서 여우털 피풍의를 둘러 준 뒤에 객실을 나왔다. 나부몽이 선창에서 온객행과 주서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
“아직 오시가 되지 않았으니 한시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마차는 어디에서 출발하지?”
나부몽이 답했다.
“옹성 남문으로 나가 천태산(天台山)을 넘어 이주로 향합니다.”
온객행이 주서를 보고 물었다.
“아서, 배고프지? 간단히 요기하고 마차로 이동할건데 괜찮아?”
주서는 말없이 온객행의 소매만 꼭 붙잡았다.

옹성을 나와 마차를 타고 이동한지 얼마 안돼서 금방 날이 저물었다. 산길이었기 때문에 평소 날이 어두워지면 금방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는 길이다. 온객행은 이주로 향하는 길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허름한 객잔에서 하룻밤 머무르기로 했다. 객실도 나뉘어 있지 않은 아주 작은 객잔이었는데 다행히 손님이 없어 온객행의 일행이 머무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주서는 온객행이 준비해준 귀한 식재료의 음식보다 소박하고 담백한 음식을 조금 더 잘 먹었다. 온객행은 잘 먹는 주서가 예뻐서 주서의 그릇에 이것 저것 음식을 올려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부몽이 말했다.
“공자님께서도 어서 드시지요. 내일 아침에는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할 예정이니 일찍 주무세요.”
온객행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그리 서둘러서 무엇 하는가?”
나부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온객행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을 나갔다. 온객행은 주서와 함께 앉아서 느긋하게 밥을 먹고 함께 가는 호위와 하인들에게 주서를 소개시켜주고 나서야 객실로 향했다. 객실이라기 보다는 그냥 침상이 있는 방이다.

온객행은 주서가 두르고 있는 피풍의를 벗겨 침상 위에 두고 이불을 폈다. 주서가 신발을 벗는 것을 돕고 침상에 눕는 것까지 도운 온객행은 피풍의를 다시 펴서 주서의 몸에 덮어주었다.
“아서. 방이 작아서 화로를 들일 수 없어. 춥지는 않지?”
주서는 온객행이 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하자 주서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오랜만에 들은 주서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다시 침상으로 다가가 걸터앉으며 말했다.
“응. 아서. 왜?”
주서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온객행의 소매를 잡았다. 주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노온.”
온객행은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아서. 가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있을까?”
주서는 말없이 한참 온객행의 얼굴을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객행은 마음이 울렁거려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방안은 조용해서 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온객행은 혹시나 쿵쿵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부끄러워졌다. 주서가 말했다.
“노온. 가지마.”

온객행은 주서의 행동이 사랑스러워서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말했다.
“아서. 나는 아무데도 안가. 걱정 마.”
주서는 양팔을 들어 온객행을 마주 안고 온객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온. 여기 있어.”
온객행이 답했다.
“응. 아서. 나 여기 있어.”
주서는 고단했는지 금방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잠이 든 주서를 다시 침상에 잘 눕히고 온객행은 그의 뺨을 쓸었다. 그러다 다시 손목을 들어 맥을 짚었다. 조금 나아졌을까? 온객행의 의술로 알 수는 없으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잘 잡히는 혈맥이 반가웠다. 온객행은 조금 망설이다 신발을 벗고 침상 위에 올랐다. 같은 이불을 덮는 것은 부끄러워서 객잔의 얇은 이불을 잘 덮어주고 피풍의를 나누어 덮었다. 침상이 조금은 작을지도 모르겠다. 주서와 더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는 구실이면 조금 불편한 잠자리도 나쁘지 않다. 온객행은 모로 누워서 주서의 몸에 팔을 둘렀다. 일정한 주서의 숨소리를 들으며 온객행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아주 이른 시간에 온객행의 일행은 길채비를 시작했다. 온객행은 먼저 일어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주서에게 옷을 입히고 시중을 들었다. 그런 온객행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코웃음을 쳤다. 온객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의 곁에 달라붙어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피곤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서를 먼저 마차에 실어 놓고 온객행은 시장이 있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면 비단 이불을 한 채 사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객잔에 대금을 치르고 다시 길을 출발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산 끝에 떠오르는 해가 걸려 있었다. 나부몽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어제 어디서 주무셨습니까?”
온객행이 고개를 휙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그건 왜 물어?”
나부몽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두 분이 같이 계시면 번을 한군데만 서면 되지 않습니까?”
온객행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부몽을 한참 본 다음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이주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산길이었는데 가는 길에 낭수의 발원지가 있다. 낭수의 발원지를 조금 지나면 배를 띄울 수 있기 때문에 온객행은 배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주서를 마차 안에 잘 눕혀 놓고 온객행이 마차 밖으로 나와 나부몽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 뱃길로 갈 수 있을까?”
나부몽이 말을 몰며 말했다.
“멀지는 않은데 짐을 다 가지고 탈 수 있을만한 큰 배는 띄우지 못 할 겁니다.”
온객행이 풍경을 구경하며 말했다.
“그래?”
나부몽이 마차의 내부를 힐끔 보고 말했다.
“이제 침수도 같이 드시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것입니까?”
온객행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것 아니야.”
나부몽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 것이 무엇입니까?”
온객행이 팔을 들어 턱을 괴고 말했다.
“아서는 나를 좋아할까? 모르겠어.”
나부몽이 표정을 구기며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마음도 확인하지 않고 몸부터 취하셨습니까?”
온객행은 놀라서 바로 앉아 나부몽의 팔을 툭 치고 말했다.
“헛소리! 미쳤어? 취하긴 뭘 취해!”
온객행은 나부몽을 한참 흘겨보다가 다시 휘장을 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자서는 마차에 실려 어디로 인가 가고 있다. 정신이 들때마다 입은 옷을 확인했다. 언제는 온객행이 있었고, 또 언제는 없었다. 주자서는 온객행이 사라질까 봐 온객행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의 소매를 만지고 있으면 온전히 혼자인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이 길의 끝에 목적지에 닿으면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까? 매달리고 의지하는 무르고 멍청한 중생에게 어떤 형벌을 선고할까? 주자서는 몸이 너무 고달파서 오래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주자서는 또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악몽을 꿀까? 혹여나 꿈에 온객행이 나온다면 어쩌면 그 꿈은 악몽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같은 생각을 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주자서는 생각했다. ‘죄를 짓고자 그리 한 것이 아니에요.’ 어줍잖은 변명이라는 것은 주자서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들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들켰으면 관동에 전쟁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황실을 기만한 죄는 구족을 멸한다 했다.

주자서가 입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궁에 피바람이 불었다. 선황의 황후와 귀비의 싸움으로 황실은 선황의 건강이 나빠지기 전부터 흉흉했다. 그런 사정을 알 수 없는 주자서는 그럴듯한 뒷배를 가졌음에도 황후와 귀비 모두의 눈총을 샀다. 결국 황후와 귀비 모두 부태후에 의해 숙청당하고 부태후는 황실 최고 자리에 군림했다. 지금 황제자리에 앉아 있는 유흔도 결국 부태후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아름답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바느질도 제대로 못하고 여인이 하는 일은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주자서는 부태후에게 눈엣가시였다. 황후와 귀비를 모두 숙청하는 바람에 부태후 다음으로 육궁의 어른이 된 주자서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부태후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가며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부태후가 죽고 나면 황제에게 부탁하여 선황의 무덤을 지키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 환갑을 넘긴 부태후보다 먼저 하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한 주자서는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났다.

온객행의 품에서 눈을 뜬 주자서는 온객행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차가 산길을 달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온객행의 심장고동이 잘 들리지 않았다. 주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은 자각이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온객행은 모두 받아주었다. 주자서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주자서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현실에 이런 사람은 없겠지 싶어서 주자서는 웃음이 났다. 주자서는 스스로가 이렇게 매달리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여태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황궁에서의 하루하루는 너무 고단하여 하루에서 수십번씩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주자서를 괴롭혔다. 주자서는 내심 알고 있었다. 황궁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주자서는 정신이 들때마다 만나는 온객행에게 응석을 부렸다. ‘원컨대 서남풍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멀리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으로 날아가게요.(4)’ 주자서는 서남풍이 되어 온객행의 품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온객행은 이주에 도착하자마자 의원을 찾았다. 주서에게 갑작스러운 여행은 무리였을까? 주서는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풍경을 보며 여행을 하면서 마음을 채우면 낫지 않을까 했던 온객행의 생각이 틀렸던 것일까? 나부몽은 주서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병이 든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섣불리 마음을 고치려고 하다가 몸을 망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주에서 제일 유명한 의원을 객잔으로 불러 주서를 진맥하게 했다. 증상은 장안에서부터 익히 들어왔던 내장손상, 한증, 그리고 기혈의 울결(鬱結)이다. 주서의 상태를 살핀 의원이 온객행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말했다.
“잘 먹지 못한 것 같은데….”
온객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잘 먹지 못합니다. 위장에 병이 있는 것 같은데 또 그것은 아니라고 하니….”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울결은 꼭 몸의 이상으로만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워있는 주서를 힐끔 보았다.

온객행이 의원의 소매를 붙들고 말했다.
“제발 살려주시오. 천금이 들어도 낼 수 있으니 고쳐만 주시오.”
온객행의 간곡한 부탁에 의원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병자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원을 붙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니?”
의원은 가지고 왔던 물건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객행이 의원을 따라 객실을 따라 나가며 물었다.
“의원님 제발 우리 아서 좀 살려주시오.”
장지문을 닫고 나와서야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의 병은 제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부탁하셔도 방법이 없습니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온객행은 의원의 소매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말해주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의원이 온객행에게 말했다.
“이해합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러니 저는 더더욱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손상되었던 내장은 그나마 기운을 회복한 것 같으니 한증에 좋은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온객행은 의원이 목간에 적어준 처방전을 들고 한참 객실 밖에 서 있었다.

나부몽이 의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약방에 다녀오는 동안 온객행은 주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주서를 괴롭게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나부몽이 약방에서 약을 지어와 탕약을 가지고 객실로 올때까지 주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온객행은 침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주서의 손을 잡고 그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주서가 어서 깨어 났으면 하는 마음과 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온객행을 괴롭게 했다. 나부몽이 소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침상 옆에 있는 협탁에 소반을 올려 놓은 나부몽이 온객행에게 물었다.
“촉경으로 계속 가십니까?”
주서의 얼굴을 바라보던 온객행이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보았다.
“가야지. 부친께 약속했으니.”
나부몽이 주서를 보고 말했다.
“주공자는 어쩌시겠습니까?”
온객행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일단은 이야기를 해보려구.”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반에서 탕약이 든 그릇을 온객행에게 건네고 말했다. 식기전에 얼른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객행이 주서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며 그를 깨웠다.
“아서. 아서 일어나봐.”
나부몽은 주서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한 후에 온객행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주서는 온객행이 떠주는 탕약을 별말 없이 먹었다. 탕약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온객행이 다 마신 탕약 그릇을 다시 소반 위에 올려 놓고 영견으로 주서의 입가를 닦았다. 주서는 온객행의 얼굴을 한참 보고 있다가 말했다.
“노온.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까?”
온객행이 영견을 소반 위에 올려 놓고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서. 나는 아서가 아픈 것이 싫어.”
주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온. 저는 괜찮아요.”
온객행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주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객행이 주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서. 나는 아서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이제 상관없어.”
주서는 한참 온객행의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달싹였다. 주서는 몇번이나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답답한 온객행이 주서에게 뭔가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주서가 온객행을 끌어안았다. 온객행이 당황하여 말했다.
“아서?”
주서가 온객행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댔다. 온객행은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주서의 어깨를 잡아 떼어놓으려고 했다. 주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객행에게 몸을 붙였다. 온객행은 주서를 밀어내려다 같이 침상에 털썩 누워 버렸다. 온객행이 팔을 집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주서가 더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온객행은 얼떨결에 주서의 몸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민망해진 온객행이 자신의 등허리에 있는 주서의 손을 잡아 침상에 내리 누르며 말했다.
“아서! 아서. 진정해!”
온객행 아래에서 보이는 주서의 얼굴은 억울한듯 조금은 화나 보였다. 온객행은 처음보는 표정이라 신선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좀더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주서의 얼굴은 가깝게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주서의 숨결이 가깝게 느껴졌다. 온객행이 입을 벌리면 그의 숨결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술을 붙였다. ‘어떤 맛이 날까?’ 주서의 입술은 탕약의 맛이 났다. ‘그 탕약에 감초가 들어 있었을까? 달다.’ 입술을 핥고 입 안을 맛보려고 하는데 주서가 고개를 돌렸다. 온객행은 아직 맛보지 못한 입안이 아쉬워서 손을 들어 주서의 턱을 잡았다. 온객행은 주서의 놀라는 얼굴도 귀여워서 부스스 웃어버렸다. 주서는 예쁜 눈썹을 찌푸리더니 온객행을 불렀다.
“노온?”
온객행은 주서의 뺨에도 입을 맞추고 다시 입술을 찾았다. 주서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이 점점 내려가 옷깃을 잡았다. 옷을 갈아 입고 이불을 덮어 줄때마다 보았던 그의 속살이 궁금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목덜미의 발진이 거의 없어졌으니 몸에 난 발진도 많이 없어졌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온객행은 정욕이 끓어 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주서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손으로 주서의 얼굴을 잡으려고 하는데 주서가 풀린 손으로 온객행을 밀어냈다. 주서는 온객행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돌리고 고개도 돌려버렸다. 온객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서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서?”

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섶을 양손으로 쥐고는 온객행에게 말했다.
“저… 저를 벌하러 오신겁니까?”
온객행이 영문을 몰라 주서에게 물었다.
“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주서는 온객행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벌하시려고….”
주서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온객행은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주서의 얼굴을 양손에 쥐었다.
“아서.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 울지 마.”
주서는 울음을 참는듯 보이더니 온객행이 일어나서 주서를 품에 안자 조금 크게 훌쩍였다. 온객행이 주서의 등을 쓸며 말했다.
“놀랐어? 미안해….”
주서는 온객행의 앞섶을 잡고 훌쩍이며 말했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주서가 한 말을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주서는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
“속이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객행은 주서가 한 말 중에 대다수를 알아듣지 못했다. 온객행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부분은 ‘일부러 속인 것이 아니다.’ 온객행은 주서의 등을 쓸며 생각했다. ‘누구를 속였다는 거지? 나를? 나는 주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주자서는 다가오는 온객행의 행동에 너무 놀랐다. 심판을 하러 온 나찰인줄 알았는데 주자서를 벌하러 온 것이다. 주자서는 온 힘을 다해서 온객행을 밀어보았지만 좀처럼 밀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고 몸을 돌려보려고 해도 온객행의 손에 잡힌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자서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늘에서도 주자서가 주첩여인줄 아는 것일까? 왜 주자서를 벌하는 나찰의 모습이 사내인 것인가? 주자서는 원해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산 것이 아닌데, 하늘까지 자신을 황궁의 볼품없는 서부인 취급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벌이라면 주자서는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

주자서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손이 얼굴 근처를 맴돌더니 점점 내려와 앞섶을 잡았다. 주자서는 가슴에 닿은 손의 느낌에 소름이 돋아서 풀린 손을 들어 있는 힘껏 뿌리쳤다. 주자서는 온객행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지만 겨우 모로 누울 수 있었다. 온객행은 언제 주자서를 겁탈하려고 했냐는 듯이 다시 다정하게 주자서를 다독였다. 주자서는 온객행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주자서는 온객행이 등을 쓸어주는 느낌에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어버렸다.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이가 원치 않는 곳에 시집 가는 것이 싫었어요. 저는 어차피 서출이니 대를 이을 필요도 없어서 그랬습니다. 잘못했어요. 누군가를 속이려고, 황실을 속이려고 주가를 기만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주첩여, 서부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주자서가 되고 싶을 뿐이다.

(5) 이백 월하독작 달빛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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