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扇 第10完

恩情中道絶 은혜로운 정 중도에 끊어질까 하노라.

온객행은 달라진 주서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주서가 전부 주겠다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서는 강주에서와 달리 가주에서 계속 온객행과 붙어 있었다. 시중을 들어 보려고 이것 저것 해보았지만 남의 시중을 드는 일은 처음인 것인지 어설프고 허술했다. 가깝게 다가와 무언가를 속삭일 때면 온객행은 가주로 오는 길에서 자신을 놓아달라고 말했던 주서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온객행은 주서와 가까워진 거리만큼 동떨어지고 어그러진 기분이다. 가주는 예로부터 비단으로 유명하다. 가주의 비단은 장강 유역에서도 비싸지만 황하 유역에서는 아주 귀한 물품이다.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가 크다 보니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다. 상단의 일을 하느라 주서와의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한 온객행은 마음이 떨떠름하다. 온객행은 다과(茶菓)가 유명하다는 객잔에 앉아 주서와 차를 마시며 장강과 문수가 만나는 하구를 보았다. 창가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저 멀리 보이는 양산(凉山)에 해가 걸려있다. 내일은 일찍 촉경으로 향한다. 주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인다. 온객행은 흩어질 것 같은 주서의 모습에 마음이 불안하기만 하다. 주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알아채고 온객행을 보고 물었다.
“차의 맛이 아주 좋습니다.”
온객행은 다정한 주서의 말에 마음이 이들이들하게 무르는 기분이다. 마시고 있는 차의 맛 따위가 어떠한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배로 돌아온 온객행은 주서와 같은 객실에 있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주서가 머무르는 객실 바로 옆방에 머물렀다. 온객행이 주서가 지내는 객실 쪽의 장지문 가까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나부몽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렇게 애가 타시면 같은 객실에 머무시지 왜 갑자기 내외하십니까?”
온객행이 나부몽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아서를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나부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번은 한군데만 서고 싶으니 어서 객실로 돌아 가십시오.”
온객행이 찻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양손에 묻고 말했다.
“너무 참기 힘들어. 자꾸 만지고 싶고, 나를 만져 줬으면 좋겠어.”
나부몽이 몸을 부르르 떨고 온객행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가서 주서에게 말하시오.”
온객행이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주공자. 손님께 무슨 무례인가?”
나부몽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답했다.
“주공자… 저도 아서라고 부를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부몽에게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부몽이 온객행의 손가락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실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공자. 이제 침수에 드십시오.”
온객행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 주서가 있는 객실의 장지문을 보고 말했다.
“불이나 꺼줘. 알아서 할 테니.”
나부몽이 등롱의 불을 끄며 말했다.
“좀 주무십시오. 주서 곁에 계시느라 장안에서부터 편히 주무시지 못하셨잖아요.”
온객행이 장지문 쪽으로 귀를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아서만 보면 하나도 안 힘들어.”
온객행의 말에 나부몽이 피식 웃었다. 온객행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나부몽을 보았다. 나부몽은 침상 근처에 있는 등롱을 제외한 모든 등롱을 끄고 방을 나갔다. 온객행은 침상에 다가가 등롱을 들고 주서가 머무는 객실 쪽의 협탁에 올려 놓았다.

배에 도착해서 온객행은 주자서를 객실에 혼자 두고 배 안을 여기저기 다니며 부산을 떨었다. 주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까워서 온객행과 붙어 다니고 싶었지만 온객행이 거절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부몽이 객실의 창을 닫고 방 이곳 저곳에 밝혀 두었던 등롱을 끄기 시작했다. 포구에서 통행을 금지하는 북을 친다. 벌써 이경(二更; 21-23시)이다. 나부몽이 화로에 탄을 조금 더 채우며 물었다.
“춥습니까?”
주자서는 두르고 있는 피풍의를 매만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부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으로 가서 이불을 폈다. 주자서는 평상에서 일어나 옷걸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온객행이 언제인가 주자서에게 둘러주었던 검은색 피풍의가 걸려있다. 나부몽이 주자서를 보고 물었다.
“시중이 필요하십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돌려 나부몽을 힐끔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쉬세요.”
나부몽은 주자서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이 탁자에 앉아 찻물로 목을 축였다. 주자서가 환복을 하고 평상으로 다가가자 나부몽이 주자서의 소매를 잡아 침상으로 이끌고 말했다.
“공자께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주자서는 다급하게 나부몽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촉경…. 촉경까지만.”
나부몽이 얼굴을 구기고 주자서를 보았다. 주자서가 나부몽이 잡은 소매를 빼고 말했다.
“온공자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촉경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부몽이 주자서를 빤히 보더니 피식 웃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주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끝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부몽은 침상에 앉아 있는 주자서를 보고 있다가 탁자 위에 남아있던 등롱을 가지고 객실을 나갔다. 사위에 어둠이 깔린다. 마치 주자서의 처지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문수는 산에서 시작되어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라 강 폭이 넓지 않았다. 촉경으로 들어가는 금수(錦水)와 이어진 문수는 촉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장강으로 날랐다. 장안에서 촉경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험준한 진령산맥(秦岭山脈)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파촉에서 나는 생산품은 대체로 장강을 따라 강동에서 많이 거래되었다. 본래 파촉 출신이었던 온여옥은 진령고도(秦岭古道)를 통해 장안으로 들어오는 서역의 물건을 파촉에서 거래하며 재화를 모았다. 진령고도를 넘기 위해서는 상단을 호위할 호위무사도 많이 필요했지만 물건을 지고 나를 수 있는 노련한 짐꾼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신의상단에는 다른 상단보다 담부(擔夫)가 많았고 상단 내에서 지위도 높았다. 촉경은 신의상단의 지점 중에 가장 크고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온객행이 촉경의 지점에서 일을 돕겠다는 제안을 온여옥이 거절할 리 없었다. 만약 주서만 좋다고 하면 주서와 촉경에 살든지 아니면 일엽선 같은 호화 여객선을 축조하여 장강을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서의 고향은 장강의 물줄기가 닿는 곳 같으니 유람을 하다보면 그의 고향에도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온객행은 주서가 있을 객실의 장지문을 보았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지 객실이 어둡다.

바람이 좋았는지 아니면 노꾼이 훌륭했는지 표국의 배는 이틀만에 금수에 닿았다. 가주에서 금수로 향하는 내내 주자서는 온객행을 보지 못했다. 음식을 가져오거나 등롱을 끄고 켜는 일을 하는 하인들은 주자서가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이다. 주자서는 가주에서 온객행에게 전보다는 더 친밀하게 굴었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량이 조금 늘어서 온객행을 따라다니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목소리가 낯설어서 혹여 듣지 못할까 온객행의 귓가에 속삭이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온객행은 그런 주자서의 귓속말에 몸을 움츠리거나 깜짝 놀랐다. 주자서는 그래서 더 말을 줄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주보고 웃는 것 만으로도 좋아서 어쩌면 주자서의 목소리가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주자서는 방의 불을 모두 끄고 나가는 하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에 침상에 모로 누웠다.

습하고 따뜻한 장강의 날씨는 주자서에게 익숙하다. ‘현월(玄月; 음력 9월)이 이렇게 추웠던가?’ 주자서는 뺨에 닿는 비단 이불의 감촉이 중명원에서 쓰던 해진 이불보다 부드럽고 도톰해서 어색하다. 어서 온객행이 와서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진득하고 검질기게 들러붙어 오면 주자서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주자서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당장 객실문을 열고 온객행을 찾으러 나가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주자서는 내심 촉경까지 갈 것도 없었구나 싶었다. 여인도 아닌 볼품없는 사내에게 온객행의 관심은 분수에 넘치는 것이다. 주자서는 이제야 처지에 맞는 위치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침상 곁에 피운 화로에 불빛이 아른거리다 모두 꺼졌다. 온객행의 관심이 떨어진 주자서는 그동안 온객행이 얼마나 자신에게 정성을 쏟았는지 알게 되었다. 주자서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주자서는 지나온 문수를 구경하려고 금수와 맞닿은 곳을 잠시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객실에 얼마 남아있지 않던 온기가 흩어졌다. 주자서의 부질없고 순진한 일부가 말했다. 죽기야 하겠냐고 황실에서 벗어나 장안에서 멀어졌으니 제 한 몸 치레하는 것이 어렵기야 하겠냐고 말했다. 주자서는 한숨을 쉬고 구름 속에 가느다란 달을 보았다. 계추월이 되었다 하니 저 달은 차는 달이겠구나 생각하며 신월(新月; 초승달)을 보았다.

중천이 지나서 촉경에 닿았다. 문수에서 갈라져 나온 금수는 물길이 평탄하고 수위가 낮았기 때문에 촉경의 물길을 아는 조항사(操航士)가 길을 이끌었다. 선원들이 모두 나와 배를 조종하느라 배 안이 어수선했다. 온객행은 주서가 머무르는 객실 근처를 맴돌았지만 가주에서 촉경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나부몽은 촉경에 닿으면 상단의 일로 바쁘니 괜히 떨어져 있지 말고 주서와 함께 있어서 호위의 손포를 늘리지 말라며 온객행을 타박했다. 온객행은 표정을 꾸며 싫은 내색을 했지만 마음은 이미 객실 안에 있는 것 같았다. 포구에는 신의상단 익주부(益州府) 행수가 미리 나와 정박 절차를 밟고 있었다. 온객행은 배의 갑판에 서서 행수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하갑판으로 내려가 하역(荷役)을 준비하는 물품을 확인했다. 배가 선창에 닿자 확인이 끝난 물품을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선원과 일꾼의 구분이 모호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배에 익주의 하인들까지 들랑날랑하다 보니 배 안은 더 분주해졌다. 배에서 누가 내리고 타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아 짐을 내리는 것을 우선으로 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객실에 온객행의 손님이 있다는 사실은 선장과 나부몽 그리고 주서의 시중을 들었던 하인 몇 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 촉경에 도착해서 배 안이 붐비기 시작하고 주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이 배에 싣고 온 화물을 모두 내리고 익주의 행수에게 인사를 한 뒤에 객실로 향했다. 온객행은 객실 주변을 지키는 호위가 한 명도 없는 것이 의아해서 나부몽에게 물었다.
“부몽. 호위는 모두 어디 갔어?”
나부몽이 객실 근처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배를 정박하는데 손포가 부족하여 모두 그리 갔나봅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 문 앞에 섰다. 온객행은 장지문에 손을 올려 놓고 작은 목소리로 주서를 불렀다.
“아서. 많이 기다렸지?”
안에서 들리는 기척이 없어서 온객행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지문을 밀어 열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온객행은 눈썹을 찌푸리고 얼른 가서 창문을 닫고 침상 옆에 싸늘하게 식어 있는 화로를 보았다. 온객행이 어깨너머로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부몽. 손님 대접이 어찌 이리 인색한가?”
부몽이 장지문 근처에 놓아둔 탄을 넣은 바구니에 손짓하며 말했다.
“일이 바빠 잠시 소홀했습니다.”
온객행은 가득 찬 바구니를 보고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온객행은 객실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휘장을 걷지 않은 침상으로 갔다. 찬바람에 혹시 또 몸이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침상의 휘장을 걷고 걸터앉아 말했다.
“아서. 바람이 찬데 어찌 창문을 열어 두었어?”
사용한 흔적이 없는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침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옷걸이에 주서가 입었던 옷이 걸려있다. 주서가 둘렀던 피풍의가 옷을 넣는 커다란 함 위에 어설프게 개여 놓여있다. 온객행은 피풍의를 개켜 놓으려고 씨름하는 주서를 상상하다 웃음이 나왔다. 장지문 곁에 서있던 나부몽이 바닥에 무릎 꿇고 말했다.
“당장 찾아오겠습니다.”
온객행이 몸을 돌려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벌써 세번째야.”

온객행은 촉경에 내리지 않고 배를 돌려 다시 가주로 향했다. 가주에서 촉경으로 이어진 물길을 뒤지며 여러 시신을 찾았지만 그 중에 주서는 없었다. 온객행은 주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혹시라도 정말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고 싶어서 종일 마음이 널뛰었다. 이레가 넘도록 물길을 찾았지만 주서는 찾지 못했다. 온객행이 다시 촉경으로 돌아갔을 때, 장안에서 온여옥이 보낸 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객행은 서신을 읽지 않았다. 화공(畫工)을 불러 주서를 닮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주서와 닮지 않았다며 트집을 잡고 생떼를 써서 화공 서넛을 갈아치우고 나서야 온객행은 얼추 비슷한 주서의 그림을 얻었다. 온객행은 주서의 그림을 가주와 촉경의 상단 지점에 붙여 놓고 현금(懸金)까지 걸었다. 양월(陽月; 음력 10월)과 상월(霜月; 음력 11월)이 지나는 동안 주서를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온객행은 촉경의 상단 사택(私宅)에 틀어박혀 주서의 그림만 보았다. 나부몽은 강호의 지인들까지 동원하여 주서를 찾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부몽은 간단한 음식을 가지고 온객행이 머무는 사랑(舍廊)으로 향했다. 방 안에 편액(扁額)을 걸어 놓는 자리에 주서의 그림을 걸어 두었다. 나부몽이 찬합을 탁자위에 올려 놓고 말했다.
“공자. 식사하십시오.”
온객행은 나부몽이 한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서가 이렇게 생겼던가? 아무래도 화공을 불러서 다시 그리라고 해야겠어.”
나부몽이 온객행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서서 그림을 보고 말했다.
“공자의 의뢰를 받아줄 화공이 익주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객행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아서는 혹시 신선은 아니었을까? 다시 선계로 돌아가 버린걸까?”

나부몽이 한숨 쉬고 말했다.
“가주께서 보내신 서신을 어서 읽어 보시고 조공자를 데리러 현중관(玄中觀)으로 갑시다. 온상아가씨께서도 정월 전에는 혼약자를 만나보고 싶어 하셨어요.”
온객행이 고개를 들어 나부몽을 보았다. 축처진 눈썹에 울상을 한 온객행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나부몽은 장안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온객행이 입을 쭉 내밀고 말했다.
“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익주부에 있는 사람 중에 아무나 하나 골라서 부탁하지 뭐.”
나부몽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공자. 가주와 약속하신 것을 잊으셨습니까?”
온객행이 탁자에 고개를 괴고 말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부몽이 온객행을 달래며 말했다.
“일단 맡으신 일이니 상단의 신용을 위해서라도 완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온객행이 탁자에 완전히 엎드리고는 말했다.
“뭐하러?”
나부몽이 찬합에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공자. 나중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힘내십시오.”
온객행이 바로 앉아 나부몽이 꺼낸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얼른 해치워 버리고 아서를 찾는 일에 더 힘을 모아야겠어.”
나부몽은 말없이 온객행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을 들었다.

며칠 후 온객행은 사택에서 나와 현중관으로 향했다. 현중관은 익주에서 가장 큰 십방총림(十方叢林)으로 신분이나 종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도교 수행도장이다. 조위녕은 황후의 방계이기는 했으나 부친의 관직이 낮은데다 다른 황후의 권당과 비교하면 조금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인척을 맺으려는 집안이 많지 않았다. 몇 해 전에 그의 부친의 관직이 신도현(新都縣) 현장(縣長)에서 현령(縣令)으로 직위와 녹봉이 올랐지만 세습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도현의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고, 조위녕에게는 형제가 많고 그들 스스로 급제하여 작은 지방 관직으로 있었기 때문에 도관에서 수학하는 조위녕의 위치는 여러모로 위태로웠다. 현중관 산문(山門)에 도착해서 하인에게 기별했다. 곧 어린 수행자 하나가 나와서 온객행을 데리고 혼원전(混元殿)으로 향했다. 혼원전에서 도사를 만나 인사한 온객행은 어린 수행자를 따라 현중관 내에 있는 여사(旅舍)로 향했다. 여사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무술을 연습하는 이들이 보였다. 온객행이 나부몽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관에서 무술도 가르치던가?”
나부몽이 수행자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강호에는 도교를 수학하는 이가 많습니다.”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름한 여사에 도착한 수행자가 온객행을 향해 인사하고 말했다.
“조공자께서 거처하는 곳입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수행자의 목소리에 처소 안에서 부산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온객행이 수행자에게 소매를 들어 인사하고 장지문을 열었다. 조위녕이 푸른 도포(道袍)를 입고 나와 인사했다.
“청성문파(靑城門派) 조위녕, 신의상단 소가주께 인사드립니다.”
온객행은 조위녕의 호칭에 표정을 구겼지만 소매를 들어 조위녕의 인사를 받았다.
“신의상단 온객행입니다.”
조위녕이 서책과 목간으로 흐트러진 탁자위를 정리하며 자리를 권했다. 온객행은 탁자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처소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월(正月; 음력 1월) 전에 온가주께서 뵙기를 청하시니 납월(臘月; 음력 12월)에는 장안으로 출발할까 합니다. 그간 사용하셨던 세간은 정리하셨습니까?”
조위녕이 화로 위에 찻물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원래 짐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물건들도 함께 수학하던 이들에게 나누어 줄 예정이라 저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온객행이 조위녕이 탁자에 내려놓은 낡은 다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조위녕이 몽산차(蒙山茶)를 꺼내 찻주전자에 넣고 말했다.
“온공자께서 친히 마중을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매를 아끼시는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온객행이 말했다.
“저희 영매께서는 이번 혼인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많으니 조공자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조위녕이 끓은 물을 찻주전자에 넣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과연 온낭자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어 송구합니다.”
조위녕이 온객행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온객행은 조위녕이 대접한 차를 물끄러미 보고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잘 찾아보세요. 저 역시 저의 소중한 동생이 미망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온객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부몽이 여사의 장지문을 열고 먼저 나갔다. 온객행은 조위녕을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문지방을 넘어 여사를 나갔다.

나부몽이 산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조황후에게 저런 토끼 같은 당질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온객행이 나부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방계에 가난하고 다복한 집안이니까.”
나부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이 몇 보였습니다. 과연 서경의 현중관입니다.”
온객행 역시 주변을 보고 말했다.
“그래?”
온객행은 산문을 넘기 전에 나부몽을 보고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납월 초하루에 장안으로 출발할까?”
나부몽이 손가락으로 셈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열흘 정도 밖에 시간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온객행이 다시 여사로 향하며 말했다.
“조위녕도 짐이 없고 나도 짐이 없으니 언제든 출발할 수 있지 않은가?”
나부몽이 고개를 끄덕이고 온객행을 따랐다. 조위녕의 여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끓이던 차와 다기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위녕의 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처소에 장지문이 열려 있었다. 온객행은 조위녕이 어디에 갔는지 물을 심산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실내가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안에서 조위녕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겠지요?”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조위녕을 위로했다. 조위녕이 차를 권하며 말했다.
“몽산차는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차였는데 매부의 성에 차지 않았나봅니다.”
차를 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조위녕이 말했다.
“주형의 글씨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온객행이 장지문의 문지방까지 닿았다. 온객행을 먼저 발견한 조위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모으고 인사했다. 서안에 이불을 두르고 앉아 있는 사내의 머리에 하얀 벽옥으로 만든 비녀가 있다. 진귀한 보옥으로 장식한 것은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골랐던 수수하고 단아한 옥비녀다.

주자서는 행장함을 뒤져 소매가 짧은 옷을 골라 입었다. 온객행이 둘러준 하얀 여우털 피풍의를 잘 개어 두고 싶었지만 해본적이 없어서 잘 되지 않았다. 함 안에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처음으로 빌려주었던 가죽신발이 있었다. 가벼워진 옷차림에 바람이 차다. 객실 주변을 지키던 호위가 모두 사라졌다. 주자서는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미리 객실을 나갔다. 낭수를 건넜던 배보다는 작았지만 배의 구조를 잘 모르는 주자서는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헤맸다. 주방에서 일하던 어멈이 주자서를 발견하고는 먹을 것을 조금 먹이고 선원들이 입는 장포를 둘러주며 말했다.
“이렇게 말라서 뱃일을 어떻게 한다니?”
주자서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멈의 도움으로 선원들이 짐을 내리는 하갑판에 도착했다. 장부를 보고 물품을 확인하는 온객행이 보였다. 주자서는 한동안 선 자리에 멈춰서 온객행을 보았다.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온객행을 보고 있는 주자서에게 다가온 선원이 말했다.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꽤 서글서글한 공자인 것 같아.”
주자서가 화들짝 놀라며 선원을 보자 선원이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는가? 익주부에서 보낸 하인인가?”
주자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은 주자서를 선창으로 밀며 말했다.
“삼공자께서 저렇게 서두르시니 우리도 어서 서두르세.”
주자서는 익주부의 하인들 틈에 섞여서 일을 하다가 유시(酉時; 17-19시)가 다 되어서야 부두에서 나와 시장이 있는 쪽으로 나왔다.

주자서는 시장에서 운 좋게 글자를 파는 사람을 만났다. 주자서는 궁궐에서 지내면서 다양한 서체로 되어있는 책을 읽었고, 부태후는 악필로 유명했기 때문에 부태후를 대신해서 서신을 쓰거나 부태후가 쓴 초서를 번역하는 일을 종종 했던 주자서는 장안으로 처음 왔을 때보다 아는 글자도 많았고 쓸 수 있는 서체도 많았다. 글자를 파는 사람은 주자서를 현중관에 소개했고, 마침 고대의 서책을 해서(楷書)로 고쳐 쓰는 작업을 하고 있던 현중관에서 주자서를 고용한 것이다. 주자서는 도교를 수학하는 수행자들이 머무는 여사에 머무르며 죽간에 쓰여 있는 도경(道經)을 목간에 적고, 검수 받은 내용을 다시 종이에 옮겨 적어 서책을 엮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현중관에서 수행하는 이들 중에는 학자도 있었기 때문에 주자서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태후를 대신해서 불경을 베껴 쓰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던 주자서라 가끔 지나는 삼청전(三淸殿)에 향을 피워 부태후의 건강을 빌었다. 황궁에 있을 때는 누가 시켜서 한 일이었는데 향을 피우고 여사로 돌아가는 동안 주자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자서가 머무는 처소 근처에 현령의 아들이라는 조위녕이 머문다. 그는 부잣집의 데릴사위가 되어 촉경을 떠나 도성으로 떠난다고 한다. 원래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는지 도관내에서 그를 따르는 수행자가 많았다. 그는 청성문파의 무술도 수학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단련한 조위녕은 주자서가 그리워하는 과거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부러웠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주자서에게 한참 어린 조위녕은 아낌없이 나누었다.
“나는 곧 도관을 떠나니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쓰세요.”
조위녕이 베풀기 시작하니 그와 함께 수학하던 이들도 하나 둘 자신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주자서에게 주었다. 황궁에서 지낼 때와 비교하면 보잘것없고 낡은 세간살이는 주자서의 보물이 되었다. 갑자기 도관으로 굴러 들어온 주자서를 싫어하는 학사들이 있었다. 주자서를 비아냥대며 그가 하고 있는 일을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주자서는 황궁에서 버텼을 때처럼 몸을 움츠리며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계추월, 맹동월(孟冬月; 음력 10월)을 지나 중동월(仲冬月; 음력 11월)이다. 동지(冬至)가 멀지 않았다. 사용하고 남은 탄을 가져다주던 이들이 줄었다. 확실히 겨울이 되니 강북(江北)은 강남(江南)보다 춥다. 주자서는 도관을 떠난다는 이가 두고 간 낡은 솜이불을 덥고 서안에 앉아 서책을 베껴 적었다. 목간에 옮겨 쓸 때 쓰는 먹이 아까워 글자를 작게 쓰느라 주자서의 자세가 구부정하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처소라 장지문을 열어 놓지 않으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조위녕이 물주전자와 다기를 들고 처소로 들어왔다. 부산을 떨며 잿빛으로 변한 화로에 탄을 넣고 물주전자를 올렸다. 주자서는 글자를 옮겨 적으며 조위녕의 푸념을 듣느라 누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조위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온공자.”
주자서는 두르고 있던 이불을 걷고 몸을 돌려 들어온 사람을 보았다. 주자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공자?”
온객행은 성큼 한 걸음에 처소 안으로 들어와 서안에 앉아 있는 주자서를 끌어안았다. 조위녕은 주자서와 온객행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더니 장지문에 서있는 나부몽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부몽은 고개를 흔들며 바깥으로 턱짓했다. 조위녕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주형께 가져다주라고 한 서책을 깜빡했습니다.”
나부몽이 조위녕의 뒤를 따라 처소 밖으로 나갔다. 온객행은 주자서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서. 보고 싶었어.”

주자서는 온객행의 등장에 정신이 얼떨떨하여 온객행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노온. 왜 여기 계십니까?”
온객행이 주자서를 놓아주고 말했다.
“세번이나… 내가 그렇게 싫었어? 도망치지 못하게 어디 가둬야 하겠어.”
주자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노온?”
온객행이 주자서의 눈썹을 매만지며 물었다.
“주서는 정말 아서의 이름이 맞아?”
주자서가 온객행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탄식했다.
“아….”
온객행이 주자서의 얼굴을 매만지고 말했다.
“진짜 이름을 말할 때까지 입맞추겠다고 하면 싫어?”
고개를 돌린 주자서의 뺨이 빨갛다. 온객행은 얼굴을 붙여 주자서의 입술을 찾았다. 주자서가 손을 들어 온객행의 입을 막고 말했다.
“노온. 혼약자 분께 무례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온객행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 놀라서 주자서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위녕이 왜?”
주자서가 고개를 돌려 온객행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온객행이 장지문 쪽을 힐끔 보고 말했다.
“내동생의 혼약자가 조위녕이야.”
주자서가 온객행을 보고 말했다.
“동생?”
온객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여동생이 여월에 혼인해.”
온객행은 주자서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가져가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자서는 한참 온객행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주자서.”
온객행이 얼굴을 가깝게 붙이고 물었다.
“무슨 자에 무슨 서를 쓰십니까?”
주자서가 잡힌 손을 빼고 온객행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람할 때 子(당신이란 뜻도 있다.)에 펼칠 舒(여유롭다는 뜻도 있다.)를 씁니다.”
온객행은 주자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그대에게 여유가 필요했습니까?”
주자서가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어디에 가두시겠습니까?”
온객행이 주자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마음에.”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짜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라서 한참 고민했는데 요따우로 끝난다구요? 네.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걸 어찌합니까ㅠㅠㅠ크흐뷰ㅠㅠㅠ이번에도 흥퍽하는건 못썼네... 미주랑 후기 정리는 내일 하는걸로
+요즘 랑야방 재탕중인데 진짜 너무 재밌다. 어떻게 10년전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지? 묘하게 퍼렁퍼렁한 화면도 노랑노랑한 화면에 비하면 나은것 같기도... 나도 랑야방 같은거 써보고 싶은데 아마 안될꺼야...
+더 쓰고 싶은게 있긴한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생각이 더 많이 들어서 갑자기 정리함. 천월때도 그랬지만 어쩔수 없는거류ㅠㅠㅠ내가 그거밖에 안돼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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